게임 이야기



*핸즈온은 게임 리뷰 전에 간단한 소감을 올리는 칼럼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폴아웃 시리즈는 전쟁, 전쟁은 변하지 않는다War, War never changes라는 명언과 함께 근 RPG 30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프랜차이즈라 할 수 있다:블랙아일이 폴아웃 1편과 2편을 통해 웨이스트랜드 등의 CRPG 계보를 계승하였고, 베데즈다로 넘어간 이후에는 엘더스크롤 오블리비언의 형태를 완성하는 오픈월드 RPG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폴아웃:뉴 베가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블랙아일의 멤버들이 만든 옵시디언은 베데즈다의 폴아웃 3 포멧을 들고와서 자신들이 만든 폴아웃 시리즈에 '종지부'를 찍었다. 핵전쟁 이후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황무지에서 최후의 대결을 벌이며, 그 사이에서 게이머(=배달부)는 집단을 선택하고 핵전쟁 이후의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또한 '전쟁, 전쟁은 변하지 않는다...(중간 생략)...그렇다면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시리즈의 전통적 명언에 대한 뉴 베가스의 결론은 폴아웃 1편부터 내려온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적인 문법과 프렌차이즈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뉴 베가스로 폴아웃 프랜차이즈가 끝났다면 폴아웃 4는 앞으로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폴아웃 4의 문제는 게임 플레이적인 문제보다는 이야기의 문제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사실 폴아웃 4의 문제는 폴아웃 3로부터 시작된 것이긴 했었다. 폴아웃 3가 수도 황무지로 대변되는 거대한 면으로써의 공간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하는 스토리는 부족했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폴아웃 3의 이야기는 '가족'과 '유지의 계승'의 문제였기 때문이다:무너진 세상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유지와 발자취를 따라가는 폴아웃 3의 메인 스토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RPG 폴아웃 시리즈에 있어서 이단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를 통해서 보고 싶은 것은 '세상이 완벽하게 무너졌을 때, 과연 우리가 믿었던 가치들이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지만 폴아웃 3는 어떤 의미에서는 동화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올바른 이야기 구성을 따랐다:진정으로 선한 아버지가 있고, 자식은 그저 그 아버지를 밀쳐내거나(악한 행동이나 마지막 프로젝트를 망가뜨리는 것을 통해서)/받아들이거나(선한 행동이나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통해서) 하는 양극단의 행동 중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습게도, 폴아웃 3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나서는 것이 아닌데서 흥미롭게 전개된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기성의 가치가 없는데서, 플레이어는 좀 더 도덕적이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폴아웃 4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게이머는 폴아웃 3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가족의 비극을 마주한다. 주인공의 아들은 납치당했으며, 주인공은 납치자와 아들을 뒤쫒아야한다. 이러한 여정의 끝에 기다리는 진실(인스티튜트의 수장이 자신의 아들이라는)은 가혹하지만, 명백하게도 이 진실은 다시금 이야기를 둘로 쪼개버리고 만다. 아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아들과 함께할 것인가. 폴아웃 3의 문제(아버지를 따르거나 거스를 수 밖에 없지만, 정작 거스르는 것의 당위성은 부족했다는 것)를 극복하기 위해 베데즈다는 뉴 베가스의 이야기 구조(자신의 가치를 믿는 진영을 고르고 이를 위해서 싸운다)를 차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핵심은 '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메인 모티브를 다시 부모와 자식이라는 감정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테마를 택함으로서 결국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찝찝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 결말을 만들어버리고 만다. 이는 게이머의 도덕적인 선택과 가치관 등이 게임에 반영되기 보다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거칠지만 막강한 감정적 소재가 게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폴아웃 4의 메인 모티브보다 더 엉망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 게임이 더이상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인 스토리 줄기인 아들 찾기와 함께 등장하는 인조인간 신스와 인간 사이의 반목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다. 바디 스내처물이나 인간의 감정을 가진 인조인간 등등은 SF 장르에선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하위 장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어울리는가의 문제이다:바디 스내처물로 대변되는 SF 크리처 장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신, 관계의 파괴라는 이야기에 특화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관계가 파탄나버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에서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한 인간의 감정을 가진 인조인간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제한된 자원을 놓고 서로 인간 미만의 동물로 추락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에서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이 아닌지를 놓은 '고상한' 이야기가 진행될만한 여지가 있는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폴아웃 4의 이야기 소재들은 각각을 띄어놓고 보았을 때 나름대로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틀에 묶어놓고 섞어버렸을 때다. 각각의 이야기 요소들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총합의 미만으로 후퇴한다.


-폴아웃 4의 게임 플레이는 스카이림에서 더욱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스카이림이 RPG에 있어서 생활감을 강조하였다면, 폴아웃 4는 여기에 마을 만들기라는 콘텐츠를 추가한다. 마을마다 NPC를 배치하고 NPC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면서 마을을 확장 발전시켜 나간다는 폴아웃 4의 빌리징 요소는 다분히도 마인크래프트나 모드 같은 유저 제작 콘텐츠를 의식한 구조이다. 하지만 게임에 어울리는가 안 어울리는가를 차치하더라도 이 빌리징 요소는 상당히 공을 들여서 만들어진 부분이라 할 수 있다:게이머는 자유롭게 지정된 장소 내의 오브젝트들을 해체하고 다시 설치할 수 있으며, 설치에서부터 꾸미기 까지의 다양한 요소들이 별다른 복잡한 요소 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게임 내에는 이런식으로 꾸밀 수 있는 장소들이 은근히 있으며, 이들을 해금하고 꾸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시간을 즐길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빌리징과 함께 게임은 게임 내 제작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이 부분이야말로 폴아웃 4에 있어서 유일하게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향취가 물씬 풍겨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게이머는 좋은 무기 모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지막지한 양의 쓰레기와 폐품을 주워야 한다. 자원의 종류가 생각외로 많아서 필요한 모드나 부품을 만들어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현재는 초중반부지만, 후반부에는 자원 수급이 좀더 원활해지지 않는다면 게임 디자인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현재까지의 인상만 놓고 본다면 전반적으로 폴아웃보다는 엘더 스크롤 신작에 어울리는 시스템과 이야기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애시당초에 폴아웃 4에서 핵전쟁이라는 테마와 장르적 문법을 거세해도 이야기와 게임 플레이는 성립한다. 이렇게 본다면 폴아웃 4는 RPG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란 부분에서 결함이 있는 게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러한 결함은 단순히 폴아웃 4만의 문제가 아니라 폴아웃 3부터 시작된 베데즈다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도 들게 만든다. 같은 폴아웃 3의 포멧으로 나온 폴아웃 뉴 베가스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