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위처 3의 초반 퀘스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5월 중순 발매된 위처 3:와일드 헌트는 폴란드 게임회사인 CD 프로젝트의 회심의 역작이자 서구권 트리플 A 게임들이 가지지 못한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폴란드 판타지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위처를 원작으로 한 위처 3부작은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와 매력적인 세계관 등을 기반으로 근 10년 동안 나날이 발전하며 꾸준하게 팬층을 넓혀왔었다. 그리고 3편은 게롤트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북미-유럽 중심의 트리플 A 게임 이외에 새로운 방법론과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들의 출발인 위처 자체가 바이오웨어의 영웅서사를 뒤튼 것이었지만, 3편은 게럴트라는 케릭터를 다뤄내는 방법과 세계를 구축하는 자신만의 철학, 더 나아가 거대한 공간을 구축하는 '미학'을 공고하게 보여주는, 그야말로 청출어람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통 위처 시리즈의 세계를 표현할 때, 사람들은 '회색세계'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러한 표현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위처  시리즈의 세계를 TRPG인 D&D 특유의 '가치체계'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질서 선~혼돈 악까지 선-중립-악과 질서-중립-혼돈의 격자로 구성된 D&D 특유의 가치체계는 케릭터의 행동이나 가치관을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이를 통해서 케릭터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어떤 인간형인지 뚜렷하게 파악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실제 초기 바이오웨어 게임들(발더스 게이트~매스 이펙트 등등)은 이러한 분류된 가치판단 체계를 게이머의 행위에 적용한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위처 시리즈는 이를 거부한다:위처 시리즈의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단 하나, 행동과 결과이다. 게이머는 행동하고, 그 선택에 결과를 져야 한다. 다만, 비슷하게 원인과 결과를 강조한 텔테일 워킹데드 시리즈와 다르게 위처 시리즈는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잔혹하고 냉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가령, 플래이어는 몬스터 퇴치를 의뢰한 마을을 위해서 지옥의 사냥개를 추적해야 한다. 하지만 게이머는 게임이 진행될수록 까발려지는 추악한 비밀들이, 사실 마을 사람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지옥의 사냥개를 불러온 가해자란 사실을, 더 나아가서 그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애꿎은 마녀를 사냥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게이머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마녀를 사냥해야 하는가, 아니면 칼날을 돌려서 지옥의 사냥개들의 마을을 심판하도록 만들어야 하는가? 게임은 이런식의 도덕적 딜레마들로 가득차 있다. 그 어느쪽을 선택해도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하지만 그 여운이 게임을 곱씹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처 시리즈의 이야기는 여타 게임들과 다른 차별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위처 시리즈는 특유의 원인-결과의 스토리텔링을 다양한 퀘스트의 예기치 못한 연계의 형태로 풀어낸다:3편의 경우, 초반의 정오의 악령 퀘스트는 '도대체 왜 이 여인은 정오의 악령이 된 것인가'라는 의문을 남겨둔채 퀘스트가 클리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의 해답은 이후 다양한 사이드 퀘스트를 통해서 예기치 못한 결과의 형태로 조우하게 된다. 영주의 아들이 동성애자였고 여자의 남편과 갈등이 있었기에 그런 비극이 생겼다는 점, 그것이 NPC와 만남을 갖는 중 예기치 못한 형태로 꼬이기 때문에 플래이어는 흥미진진하게 게임에 몰입하게 된다.


또다른 위처 시리즈의 게임 서사의 강점은 세계관을 '설명'하려기 보다는, 게이머가 몸소 체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가령 몬스터 사냥꾼인 위처의 핵심 임무인 몬스터 사냥은 선형적이긴 하지만 몬스터를 사냥하는 과정을 실제로 체험하게 만듬으로서 지금 내가 사냥하는 몬스터가 단순하게 텍스처 덩어리가 아닌 이야기가 있고 각기 특징이 있는 생물임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위처 시리즈의 전투는 대대로 미묘한 재미를 보장하는 미묘한 시스템이며, 3편 역시 전투가 좀 미묘한 편이다:하지만 게임 시스템에 있어서 준비과정(기름 및 포션, 폭탄의 준비, 칼갈기 비석 등 버프의 준비)의 강조를 통해 상대적으로 노가다가 될 수 밖에 없는 약초 채집과 재료 수집 등에 동기를 부여한다. 전투 자체는 평범하지만 전투를 둘러싸고 있는 몰입과 동기의 부여 측면에서 위처 시리즈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러한 위처 특유의 게임 서사와 스토리텔링의 중심에는 리비아의 게럴트라는 전설적인 위처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게럴트는 영웅이 아니라는 것이다:전쟁의 폐허를 지나치면서 전쟁이 빨리 끝나면 우리 모두에게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베스미어에게 '우리에게 편이 있습니까?'라고 냉소하듯이 툭 던지는 게럴트는 모두를 구원하러 온 영웅이라기 보다는 진짜 필요한 순간에 나타난 유쾌하지 않은 이방인, 하지만 공동체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불청객이라고 보는 쪽이 더욱 적합하다. 기묘한 것은 이 냉소적인 남자가 중세 수준의 야만적 인권 감수성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도 현대적인 인권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냉소적인 자세와 함께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자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에 머리를 들이밀어서 자기 화를 자초한다는 점에서 게럴트는 매드 맥스의 주인공 맥스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언젠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위처 시리즈에 있어서 1편이나 2편과 다르게 3편이 완성형이라고 칭할 수 있는 뚜렷한 특색이 있다는 것이다. 3편에서 CD 프로젝트는 '오픈월드'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세계를 구현해내는데 성공하였다. 혹자는 스카이림 같은 자유도가 없다는 점에서 '세미 오픈월드'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오픈월드라는 장르의 정의를 '거대한 풍경에 근거한 미학'이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위처 3 역시도 오픈월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또 이 오픈월드의 '모호한 정의'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위처 3의 오픈월드는 대단히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위처 3와 비교할 사례로 스카이림이나 인퀴지션의 사례를 들여다보자. 스카이림이나 인퀴지션의 공간은 수평적인 넓이와 함께 '수직적'인 높이가 게임 내의 오픈월드를 구성한다. 수십미터가 가볍게 넘는 구조물이나 산맥들, 자연물들 등등을 통해서 이들 게임은 '신화적인 판타지'그 게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위처 3는 다르다:게이머가 벨렌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게이머를 위압하는 거대한 공간이나 자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낮은 구릉과 언덕들, 오솔길들, 그리고 지저분한 늪과 개울들이 게이머를 반긴다. 위처 3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오히려 '목가적'이며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러한 다른 판타지 게임들의 위압적인 거대한 구조물과 위처 3의 목가적인 분위기는 게임이 만들어내는 지향점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위처 원작 소설은 동화와 우화에 대한 블랙코미디, 비틀기에서 시작하였으며 게임 위처 시리즈 역시도 그러한 동화, 우화, 그리고 그들을 포괄하는 '전설'이라는 장르 구분에서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설의 대척점에는 신화가 있다:신화는 어떤 사회나 가치가 시작되는 지점의 이야기다. 신과 영웅은 손가락을 들어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는 그에 따라서 만들어 진다. 하지만 전설은 다르다. 이미 전설에서 사회는 구성되어 있으며, 전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웅장한 비전이 아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교훈이다. 그렇기에 전설이라는 분위기를 지향하는 위처 시리즈에 있어서 신화적인 거대함과 웅장함, 수직적인 이미지는 불필요하다. 게럴트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러러 보아야할' 정도로 높은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위처 3가 보여주듯이 얕은 언덕들과 구렁들처럼, 게이머들은 위를 바라다 보는 것이 아니라 밑을 내려다 봄으로서 그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대상과 미학(전설로서의 위처, 회색의 세계, 무엇을 판단할 것인가)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위처 3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게임이다:이는 거대한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위처 시리즈가 성취한 미학적인 성과와 함께 위처 3가 그에 알맞은 공간과 이야기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위처 3의 존재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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