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악질 범죄자이자 영국 역사상 최장기 복역수인 ‘찰스 브론슨’의 실화를 다룬 영화. 영국 개봉 당시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브론슨은 1974년 강도를 시작으로 수많은 폭력과 범죄행위를 저질러 현재 35년째 수감 중이다. 실제로 수감 중 독특한 예술 활동으로 주목을 받기도 한 브론슨 역을 맡아 폭넓은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톰 하디의 재능이 돋보인다.(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소갯글)


미쉘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이런 논지의 이야기를 했었던걸로 기억한다:국가가 과격한 신체의 손괴를 유발하는 형벌 대신에 교화와 수감형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바는 국가의 신체의 통제가 국가 권력의 과시에서 보이지 않는 통제와 공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푸코의 명제와 이 영화를 21세기의 시계태엽 오랜지(제도를 통해 인간을 길들이는 것의 폭력성, 자세한 내용은 모두의 친구 엔하위키를 참조하시라)에 비유했던 누군가의 평가를 결합하면 장기수 브론슨의 고백의 미학이 완성된다. 장기수 브론슨의 고백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위대성을 발견한 한 야만인의 이야기며, 그 야만인에게 열광하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의 미학은 니콜라스 윈딩 레픈 특유의 영상미와 과대망상증 환자이자 제도적 억압에 끝없이 헤딩하는 야만인을 열연한 톰 하디를 통해 위대하고 장엄하게, 그리고 동시에 유치하게 완성되었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브론슨의 독백(그리고 이를 듣는 익명의 관객들)과 그의 소명이 다름아닌 '감옥'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초반의 선언은 영화의 미학적 전제를 제시한다. 왜 감옥인가? 감옥은 아무곳도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감옥에서 무언가를 이룩할 수 없다. 감옥은 자유를 억압하는 공간이며, 범죄자들을 재사회화시켜서 사회에 맞는 인간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공간에 불과하다. 감옥은 그 어느곳도 아니다. 하지만, 브론슨은 감옥을 호텔방에 비유하고 감옥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고 토로한다. 이러한 브론슨의 별난 고백은 앞서 이야기한 푸코의 명제를 전제로 깔고 해석을 해야한다:즉, 감옥은 범죄자들에 대한 국가와 제도의 숨겨진 억압이 실제로 실현되는 곳이다.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감옥은 국가와 제도의 억압이 실제적으로, 그리고 유이하게(이는 후술할 정신병원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낸다. 그렇기에 감옥이야말로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야만인이 사회에 온몸을 던져 저항할 수 있는 실질적인 최후이자 최초의 전초지, 파이널 프론티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브론슨이 발견한 자신의 소명은 이 사회라는 폭력에 실제적인 폭력으로 저항한다라는 것이다. 재사회화를 위한 직업교육에 대해서 꺼지라고 대답하는 그의 모습과 그를 제지하는 간수에게 주먹을 날리는 그의 모습은 이러한 영화의 주제의식을(혹은 브론슨 스스로가 발견한 소명의식)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상당히 즐긴것 같다. 무장강도 7년 복역이 26년으로 뻥튀기 된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제도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정신이 이상하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브론슨은 멀쩡하며(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자신을 끝없이 온순한 양(사고조차 불가능한)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잭 니콜슨이 둥지 위로 날아간 뻐꾸기에서 감옥을 탈출해서 정신병원으로 왔다면, 브론슨은 역으로 정신병원에서 탈출해서 자신이 투쟁할 수 있는 감옥으로 탈출하길 꿈꾼다. 정신병원의 문제의식은 미친 사람을 치유하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게 해서 사회에 맞게 길들이는 교묘한 폭력의 공간이며, 이는 브론슨이 발견한 자신의 재능(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는 그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살인을 시도한다. 물론 실패로 끝나지만.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다른 정신병원으로 이감되었을 때, 거기서 탈출해서 교도소 지붕을 오르는 기행을 벌여서 가석방을 받는데 성공을 한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찰스 브론슨이라는 케릭터를 제도에 저항하는 '성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의 정신세계를 대단히 '유치'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그려낸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만 이를 억누르지 않고 브론슨을 두둔하는 부모의 모습이나, 가석방 후 어렸을 때 자신이 잤던 침대에 집착하는 브론슨의 모습, 그리고 그렇게 폭력적인 인간이 여자에 대해서 숙맥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당신보다 덩치가 큰 사람을 흥분시키면 안돼) 등을 통해서 브론슨이 갖고 있는 체제에 대한 저항의 소명의식이 다소 유치한 10대의 반항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그가 대단히 폭력적이지만 '순수'하다는 인상을 지속적으로 심어준다. 교도소 사서를 납치하고는 고작 하는 짓은 간수와 몸싸움을 벌인다는 점이나, 자신을 차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여성을 위해서 반지를 선물하기 위해 가석방 중임에도 보석점을 터는 등등을 통해 드러나는 브론슨의 '어린이' 같은 순수함을 강조함으로서 이 '시대의 야만인'을 기존의 마초나 음험한 야만인들의 이미지와 다른 독특한 케릭터로 승화시킨다.


결국 반지를 훔치고 다시 감옥에 돌아온 브론슨은 자신의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그림을 배우게 된다. 예술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합법적이고도 용인된 방법으로 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로서, 어찌보면 브론슨이 예술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교도소장에 의해서 제지되고 그의 예술은 꺽이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그가 잘하는 짓, 다시끔 간수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저항을 시도한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 온몸에 흑칠을 하고 간수들과 주먹다짐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미학이자 브론슨의 소명의식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찰스 브론슨 역을 맡은 톰 하디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하며, 감독 윈딩 레픈의 영상은 인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특히 톰 하디의 열연은 그의 커리어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론슨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야만인의 이미지와 단지 주먹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폭발할 것 같은 아우라를 발산하는 그의 연기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맛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이 영화는 브론슨이 익명의 관객들을 향해서 이야기를 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도대체 이 관객들은 누구인가? 그의 야만적인 반항에 열광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 익명의 관객들은 바로 우리다. 이 어린아이 같은 야만인이 교도소 콘크리트 바닥에 두개골 경도 테스트를 할 떄마다 환호성을 지르는 관객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구성된 현대 사회에 숨이 턱턱 막히는 질식 속에서 해방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날 세상이 당신을 압박해서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가 찾아오면, 영국의 장기수 찰스 브론슨을 기억해달라. 알몸에 버터칠을 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는 복역수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간수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한 야만인을. 세상의 실제적 억압에 폭력으로,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이 유치한 야만인을.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좀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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