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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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빌은 시청률 부진을 이유로 자진사퇴 압력을 받고 사퇴를 눈앞에 둔 UBS의 뉴스캐스터이다. 그가 뉴스 앵커로 이름을 떨치던 때와 달리, 이제 TV를 대표했었던 뉴스 프로그램은 자본의 논리와 엔터테인먼트에 밀려서 예산도 삭감되고 찬밥신세 취급을 받는다. 이러한 현실에 분노한 하워드 빌은 생방송으로 세상을 향한 직설적인 분노를 드러내고, 절친한 친구인 보도부장 맥스 슈마커는 이를 묵인한다. 하지만, 현실의 더러움을 적나라하게 까발려버린 하워드 빌의 뉴스 방송이 예상외의 인기를 끌자, 시청률 상승에 혈안이 된 다이애나는 하워드 빌을 주역으로 내새운 뉴스 쇼를 만드는데...


1976년,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네트워크는 매스 미디어와 거대 자본, 그리고 매스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꼽을 때 마다 자주 언급되는 영화 중 하나이기도 한데, 네트워크가 보여주는 이야기와 영화의 극 구조는 미디어 사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네트워크라는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야기의 구조와 분위기, 네러티브가 크게 두개로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전반부는 맥스 슈마커가 보도부장에서 잘리기 전의 이야기이고, 다이애나가 본격적으로 하워드 빌 쇼를 연출하기 시작하는 부분이 후반부라고 할 수 있다. 전반부의 맥스 슈마커나 하워드 빌의 이야기는 오락 중심의 TV프로그렘에 뒤쳐지기 시작하는 구세대적인 감성을 가진 방송인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해고 당하기 전에 사무실에 모여앉아서 농담을 즐기고, 방송에 대한 신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하는 인간적인 군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하워드 빌 쇼를 담당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비틀리기 시작한다. 인물들은 인간성을 잃어버리며, 드라마는 사라지고 TV 시대의 성난 선지자가 되어버린 하워드 빌의 예언적인 선언과 소통 없는 독백만이 극을 지배한다.


영화는 이를 TV화 라고 부른다. 후반 극 흐름의 중심에 있는 다이애나처럼 맥스 슈마커의 표현을 빌리자면, TV를 보고 자라나서 TV 속의 세상이 전부인줄 알며, 세상의 모든 것을 TV로 환원시켜서 생각하게 되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이애나란 인물은 똑똑하고 유능하지만 어딘가 인간적이지 못한, 무언가 결여되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맥스 슈마커와 사랑을 나눌 때도 끝없이 시청률과 자신이 맡은 프로에 대해서 독백 아닌 독백을 하며, 반 사회 테러를 TV 미니시리즈로 기획해서 시청률을 올릴 생각이나 하며, 방송윤리 따위는 옛저녁에 버려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맥스가 다이애나와 하는 대화에서 드러나듯이,그녀와 맥스의 관계는 TV 드라마 속의 이야기 그대로를 답습한다(노년의 위기와 바람, 그리고 해어진 뒤에 가족으로의 귀환). 그녀가 맥스의 잠자리 실력이 무능하다고 모욕하는 그런 모습까지, 그녀의 케릭터는 철저하게 미디어 내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의 반복 재생산이다.(맥스가 어이없다는듯이 피식 웃으면서 '왜 그것이 남자에 대한 심한 모욕이 되지?'라는 장면은 그 허구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결국은 그녀가 만들어내는 하워드 빌 뉴스 쇼 역시 그녀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뉴스의 '저널리즘' 따위는 옛저녁에 갖다버린지 오래이며 프로는 점쟁이와 타로카드와 미신이 판치는 한때 한때 흥미 위주의 뉴스 프로그램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하워드 빌이란 인물은 TV화의 가장 큰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 분노하던 그가 뉴스를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호응을 얻게 되자 다이애나는 그로부터 인간성을 거세하고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버린다. 농담도 하고 분노도 하던 그의 모습은 후반에 들어서는 TV속에서만 소리치고 분노만하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그의 메세지는 점점 간질 발작처럼 변화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선지자적 이미지와 메세지는 거대 자본의 엄정한 운영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 UBS의 아랍 자본 유입을 폭로하면서 아랍 자본 유입을 막아낸 하워드 빌에게 젠슨 회장이 역설하는 자본주의의 운영논리는 세계, 아니 우주의 법칙의 웅장한 선언이다. 인간은 이미지를 소비하고,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는 파편화 되고 자극적인 이미지 사이로 숨어버린다. 미디어는 진실을 밝히는 도구가 아닌, 결국 지배 논리의 장단에 맞춰서 돌아가는 광대에 불과했다. 진실을 알게 된 하워드 빌은 카메라 앞에서 그 우주적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시청률이 떨어지고 그를 자리에 앉혀놓은 자들에 의해 생방송 도중 암살 당하게 된다.


시드니 루멧이 만들어낸 네트워크는 단순한 미디어의 진실 찾기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서 미디어를 수용하는 자, 만드는 자, 배후에서 그것을 조종하는 자까지 모두를 한데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훌륭한 통찰력을 가진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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