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하나의 작전, 서로 다른 목표 당신이 믿었던 정의가 파괴된다. 사상 최악의 마약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 국경 무법지대에 모인 FBI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CIA 소속의 작전 총 책임자 맷(조슈 브롤린), 그리고 작전의 컨설턴트로 투입된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극한 상황 속, 세 명의 요원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숨쉬는 모든 순간이 위험한 이곳에서 이들의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네이버 영화)


드니 빌뇌브란 감독이 갖고 있는 강점이란 무엇일까? 고작 두편의 영화(프리즈너스와 그을린 사랑)만을 본 본인이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본인은 조심스럽게 그의 영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은 고발하는 침묵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그을린 사랑은 자칫 잘못하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무게있는 이야기와 별개로 선정적인 멜로드라마와 폭력의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소재의 자극적인 부분을 이야기 외적인 부분인 카메라 워크와 미장센을 통해서 통제한다. 마치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영화의 시선 속에서 선정적인 이야기들과 폭력은 마치 세상의 일부인 것처럼 조용해지고 얌전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거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을린 사랑의 충격적인 진실이 관객에게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관객이 그 존재를 은연중에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이나 프리즈너스의 이야기는 그 충격적인 '진실'을 통해서 이야기가 역전되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흔히 진실을 통해서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는 영화 장르적 개념으로서의 '반전'과 다르게 그을린 사랑이나 프리즈너스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그렇게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 미학은 진실이란 이름의 반전을 이용하여 관객의 머리채를 잡아 젖히며 '이걸 봐, 이걸 보라고!'라고 강요하고 폭로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관객은 그 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프리즈너스의 두 주인공을 보자:아버지는 자식을 납치했다고 생각하는 범인을 고문하지만, 관객과 아버지는 그가 은연중에 범인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차라리 그가 범인이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 아니라 또다른 희생자라는 불편한 진실은 관객의 시야 내에 무거운 바위처럼 자리를 잡으며 관객에게 그 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관객들이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또 돌려도 그 진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관객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향하며, 그 진실이 도달해야 하는 숙명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렇기에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 있어서 반전의 개념은 영화의 극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애게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그것은 바로 관객이 영화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시카리오는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드니 빌뇌브의 강점들이 살아있는 영화다. 영화의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꾸준히 그 맥락을 이어오고 있는 마약을 둘러싼 르포 형태의 픽션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고, 실제로도 그 내용 자체도 장르적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약을 없앨 수 없다면 통제하겠다는 맷의 극중 발언과 사상은 이미 다른 영화나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많이 묘사되었었고, 그 최대 수혜자가 미국이라고 미국을 은연중에 돌려까는 톰 클랜시 원작 해리슨 포드 주연의 긴급명령으로 이미 20년전에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카리오에는 추악한 진실로부터 정의를 대변하는 유일한 대변자인 라이언 박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카리오는 전적으로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정의와 체제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시카리오는 그 불편한 진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외면되고 있는 마약과 관계된 이야기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시카리오의 재밌는 부분은 극중 주인공인 케이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전원 '남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CIA, FBI, 마약단속반, 국경수비대 등 같은 군과 치안에 관련된 종사자들이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성격을 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카리오에는 남성적-여성적인 이미지들이 극도로 거세되어 있다:마초적인 이야기나 로멘스 같은 것을 거세함으로써 영화에는 남자들만의 세계와 케이트라는 이방인이라는 추상적이지만 명확한 막을 구축한다. 이러한 성적인 이미지의 거세는 케이트 머서라는 인물을 '전문가'로 묘사하는 동시에 남자들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고생하는 외부자의 이미지 양측으로 구축하게 된다. 그렇기에 시카리오는 어떤 의미에서 유능한 커리어 우먼의 분투기라 할 수 있는 제로 다크 서티의 분위기와 맞닿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제로 다크 서티에서 마야가 그러한 외부적인 상황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고 끝내는 목적을 달성했던 것과 다르게, 시카리오에서의 케이트는 타협할 수 없는 상황들과 마주하게 된다. 

전적으로 성적인 의미를 거세하고 있는 시카리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단 한 시퀸스에서는 이 섹스의 이미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맷의 페이스에 끌려다니는 상황에 지쳐버린 케이트는 동료의 소개로 남자 경찰과 원나잇 스탠드를 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는 자신이 원나잇을 하려는 남자가 부패에 연루되었음을 직감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본다. 케이트는 그를 제압하려 하지만 역으로 죽을 곤경에 처하게 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알레한드로가 나타남으로서 살아나게 된다. 일견 극의 긴장감을 올리는 시퀸스처럼 보일 수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이전과 이 이후에서 일절 성적인 긴장감이나 남성-여성의 벽을 다루는 내용의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시퀸스조차도 성적인 긴장감이나 로맨틱, 반전 같은 자극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로멘틱한 분위기나 성적인 긴장감이 느껴진다기 보다는 우울함과 피로감의 끝에서 쉴 자리를 찾아 기대는 듯한 카메라의 부감과 관조함은 이 시퀸스의 흐름이 여타 대중문화에서 다루는 여성-남성의 관계나 섹스에서 빗겨 나가 있음을 드러낸다. 


왜 시카리오는 자극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섹스를 자극을 최대한 억누르는 방향으로 다뤄낸 걸까? 그것은 케이트가 '남성'과 관계를 맺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의미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일반적이고도 정상적인 섹스는 '상호합의' 하에서 서로 합을 맞추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이 시퀸스 전까지 처해있었던 상황은 불편함과 피로함의 연속이었다. 어떤 임무인지도 모르고 맷에게 끌려다니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법과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 일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녀가 임무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표면상의 악을 몰아내는 것이 아닌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며, 케이트는 등을 돌려서 떠날 수 있었음에도 떠나지 않고 영문 모를 일들을 마주하며 남는다. 그러나 케이트가 마주하는 일들은 그녀를 피로하게 만들며, 동시에 상황과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남자'와 섹스를 시도하는 것은 상황과 타협하는 맥락을 만들며, 전희의 도중에 부패의 증거를 보고 남자를 밀어내는 것은 가장 외롭고 피로한 순간조차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케이트의 의지를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케이트가 거부하고자 하는 현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케이트와 맷이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오프닝 시퀸스에서 카르텔의 폭탄 테러로 FBI 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끔찍한 사건의 대책 회의에서 맷은 조리를 신고 나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케이트가 '당신은 대체 뭐하는 인간이냐'라는 표정으로 맷을 바라보자 맷은 능글맞게 자신을 소개한다. 맷이란 케릭터는 케이트와 다르게 이런 일들이 '익숙한' 인간이다:그렇기에 케이트의 끊임없는 거부와 항변에도 능글맞게 웃어넘기거나 귀찮아 할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 진행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예측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듯이, 알레한드로는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케이트와 대립되는 맷과 남자들의 세계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움직이는 세계이며, 케이트가 속한 일상의 법과 정의, 규칙의 경계이자 그 너머이다. 멕시코 후아레즈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폭력들은 항상 상존한다(잠깐 잠깐 삽입되어 들어오는 맥시코 경찰의 일상을 보자;아들과 함께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의 침대 옆 의자에는 산탄총이 놓여있다.) 하지만 마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통제해야한다는 맷의 표현처럼, 이 폭력들은 교묘하게 통제되어 있으며 세계의 일부로 통합되어 있다. 케이트가 저항하고고 좌절하는 영역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인 동시에, 법과 규칙 너머의 세계다.  


영화는 이를 카메라워크와 풍경을 통해서 은연중에 프레임 안에 합치시킨다:미국-맥시코의 국경을 멀리서 잡아내는 부감의 풍경은 마치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적인 사건들이 일상적이고 무심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또한 미국과 맥시코의 경계를 다루는 카메라는 법과 무질서라는 이분법적으로 마치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 같은 맥락을 깔아두며, 영화의 클라이맥스의 미장센으로 귀결되는 발판을 제공한다:영화의 마지막, 맷과 케이트는 국경을 오가는 카르텔의 땅굴을 확인하고, 이 곳을 급습한다. 해질 무렵 땅거미 속으로 무장한 델타포스 대원들과 CIA, FBI 요원들이 하나 둘 어둠속으로 조용히 가라앉는 모습은 영화가 어둠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진상, 세계를 움직이는 추악한 논리 속으로 들어감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시퀸스에서 케이트는 두가지를 알게 된다:알레한드로가 맥시코 카르텔에 의해서 가족을 잃고 복수를 꾀하는 전직 검사였음을, 그리고 이 모든 작전이 마약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통제하기 위함이었음을 말이다. 시카리오는 영화 전반에 부감의 카메라워크를 깔아두고 클라이맥스의 순간의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인물들을 통해서 관객이 법과 무질서, 그리고 그 상위의 통제하는 '힘'을 한 데로 어우르는데 성공한다.    


결국 모든 것은 CIA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고, 케이트는 무기력하게 자신의 집에서 알레한드로의 협박 아래 이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행해졌다는 CIA의 서류에 사인하게 된다. 하지만 끝까지 무기력하게 끌려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케이트는 알레한드로에게 총을 겨눈다:모든 것이 끝난 상황에서 왜 그녀는 끝까지 알레한드로에게 총을 겨누며 저항하는 것일까? 그것은 알레한드로가 속한 남자들의 세계, 법과 무질서 양측을 모두 '통제'하는 세계에 대한 미약한 저항의 표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라도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아레즈로 카메라를 다시 돌린다:경찰인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축구시합에 나가서 축구를 한다. 하지만, 총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폭력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평화로운 일상 속에 알레고리처럼 침투되어 있으며, 싸워야 하는 것은 폭력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구축하는 논리와 알레고리, 그 논리를 돌리는 힘 그 자체라는 것이라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는 그런 점에서 아름답고도 잔혹하며 흥미로운 영화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악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 악과 싸워야 해.

 하나의 악이 다른 악을 정당화하진 않아.


혹은 다른 악을 부정하지도 않지." 



-영원한 친구, 존 르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