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얼마 남지 않은 물과 기름을 차지한 독재자 임모탄 조가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한다. 한편,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사막을 떠돌던 맥스(톰 하디)는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가고, 폭정에 반발한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임모탄의 여인들을 탈취해 분노의 도로로 폭주한다. 이에 임모탄의 전사들과 신인류 눅스(니콜라스 홀트)는 맥스를 이끌고 퓨리오사의 뒤를 쫓는데... 


시대는 리메이크와 리부트를 요구하고 있다:한때 시대를 풍미했었던 대중문화 작품들은 다시 한번 시대적 해석을 통해서 재탄생되어서 그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경향이 이 시대가 갖고 있는 한계,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창의력의 고갈과 새로운 옛 것의 발견을 통해서 과거로 회귀하려는 흐름으로도 보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해석이 맞을 수도 있거나, 틀릴 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가 모르는 제 3의 요인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역시 그러한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과 경향성을 재쳐두고 본다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는 프랜차이즈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그 구태의연함이 갖고 있는 우직함이 현대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주장하고 더 나아가 그 이상을 작품이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겠다: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서브컬처 상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로 분류되는 수많은 작품들뿐만 아니라 장르를 뛰어넘어서 '종말'의 이미지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해왔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종말'이라는 테마에 매료되었던 것은 그 '종말'을 통해서 인간이 갖고 있었던 절망이나 희망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인간은 종말에 의해서 절망하고 미쳐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종말로부터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기도 한다:인간을 옭아매고 있었던 가식적인 제도, 문화, 시스템 등을 무너뜨리고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종말한다면 과연 문자의미 그대로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난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순진한 희망을 가진것 뿐일까. 혹은 더 끔찍하게도,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신세계의 밑거름이 되는 종말의 잿더미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영원히 조금씩, 더 끔찍한 방향으로 망해버리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이토 케이카쿠의 소설들(학살기관이나 하모니)을 보자:세상이 멸망할 것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인간들은 그 멸망과 종말에 적응해나간다. 그리고 그 종말을 마치 '일상적'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혹은 J.G. 발라드의 소설을 보자:물에 빠진 세계에서 인간들은 종말에 도취되며 종말의 더위 속으로 녹아서 사라진다. 발라드의 멸망 3부작에서 종말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아니다. 여기에서 종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융합'되는 것, 익숙해지는 개념에 가깝다. 즉, 어떻게 본다면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이나 새로운 시작이 아니다:종말은 그저 환경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환경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적응'을 수반한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도 그러하다:관객들이 마주하는 매드맥스의 세계는 의외로 '정상적'인 세계이다. 제한된 자원인 물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쥔 이모탄 조는 물을 자원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다:자식들이자 병사들인 워보이나, 워보이를 생산하는 여성들인 브리더, 여성 모유를 착유해서 식량을 쥐고, 물을 자원으로 무기 농장의 무기나 가스 타운의 석유와 교역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마치 정상적인 사회가 작동하는 것처럼, 이모탄 조가 지배하는 분노의 도로는 마치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이모탄 조가 죽고 퓨리오사가 리더로 되는 것이 시터델의 필연적인 멸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도 결론내리기도 하였다. 이모탄 조의 방법론은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으로 제한된 자원을 통제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는 인류의 '생존'이라는 '거시적'인 목표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방식의 접근이다:멸망과 그에 대한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이모탄 조가 만들어낸 분노의 도로는 구세대의 절망, 아니 인류 역사 이래 계속되어 왔었던 절망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적응 변화시킨 사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모탄 조의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는 종말 이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구시대로부터 이어내려져 온 반복된 절망, 우리가 오랫동안 적응해왔었던 오래된 종말의 모습에 대한 것이다:빈부의 문제, 남자와 여자의 문제, 전쟁의 영광과 약탈의 문제 등등. 인간은 항상 이런 미친 것들에 적응해왔었다, 그리고 순종하였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효율적인 세계의 종말 아래서 인간은 착실하게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미쳐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세계는 그야말로 구시대적이며, 이러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특유 아래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 특유의 막나가는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의 말초적인 행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종말 이후 각자의 방식대로 미쳐버린, 아니 세상에 '적응'해버린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차용하고 있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점은 전적으로 패미니즘 담론이다:남성은 파괴하며, 여성은 생산한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1980년대스러운 오래된 담론(패미니즘도 항상 변화하고 있다. 이 점을 숙지하여야 한다)을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그대로 써먹고 있다. 메인빌런에서부터 거대한 가족을 이끄는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모탄 조), 사람을 잡아먹는 양복입은 식인종 자본가(피플 이터), 사람을 고문하기 좋아하는 폭력적인 무기상(무기농장 주인)을 설정해놓고, 그와 대칭되게 도망가는 자들을 '여성 브리더'로 설정해놓은 점에서부터 이미 철저하게 스테레오 타입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은 오히려 영화를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만드는데 주요한 동력이 된다. 이전 칼럼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매드맥스 시리즈의 이야기는 도로라는 공간과 함께 속도와 속력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칼럼을 요약하자면 도로라는 공간 끝에 놓여있는 도착지, 그리고 그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방향성이자 운동량인 속도가 매드맥스 시리즈 속의 케릭터들을 움직이는 주요한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원화된 케릭터 군상들은 강력한 대비를 이루며 방향을 가진 운동을 완성한다:여성들로 구성된 브리더와 퓨리오사, 그리고 맥스는 시터델을 등을 진 체 희미한 희망을 쫒아 녹색의 땅을 향해서 정처없이 나아간다. 그리고 이들을 남자들로 구성된 파괴적인 악당들이 뒤쫒는다. 


영화의 케릭터 조형은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단순해진 대신에 '깊이'를 더한다. 깊이를 가진 다양한 케릭터들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케릭터는 맥스와 퓨리오사일 것이다. 먼저 퓨리오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기존의 대중문화에서도 싸우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항상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싸우는 여전사를 다룰 때 '헐벗은 눈요깃거리'나 '모성성' 등의 스테레오 타입에 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었다. 퓨리오사의 신선함은 그런 성적인 매력이나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전통적인 '전사'의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 퓨리오사는 영화의 처음에는 이모탄 조의 소유물을 빼돌려 그를 분노케하려 하지만, 녹색 땅에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희망에 벅차오르다 좌절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동인 자체는 분노Fury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인간을 향한 개인적인 분노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에 찬 밝은 불꽃같은 분노까지 그녀는 전적으로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케릭터이다. 


재밌는 점은 몇몇 사람들이 퓨리오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칸느 영화제 시사회 GV에서 기자는 '여자가 이렇게 분노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샤를리즈 테론에게 던졌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밑도 끝도 없이 멍청한 질문을 영화/연예 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이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여자가 분노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하지만 퓨리오사라는 케릭터가 갖는 특수성은 영화 내적인 것이 아닌 영화 외적인 것이다. 여지껏, 분노에 이끌려서 싸우고 투쟁하는 여성 케릭터는 흔치 않았다. 더욱이 삭발을 하고 한 팔을 잃은 채 눈가에 엔진오일을 바르는, 기존의 성적인 코드를 제거한 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성 케릭터 자체가 드물었던 것이다. 물론 퓨리오사의 케릭터 자체도 깊이가 있는 뛰어난 케릭터인 것도 한몫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맥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기존 시리즈에 등장한 멜 깁슨의 맥스는 정상적이고 능글맞은 마스크 밑에 폭발할 것 같은 광기를 숨기고 있는 케릭터였었다. 하지만 톰 하디의 맥스는 그와는 다르다:톰 하디의 맥스는 광기가 폭발할 거 같은 위험을 느끼기 보다는 어딘가 망가져버린 이미지, 전쟁통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전장을 떠도는 군견과도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지켜야할 것도 잃어버린 채, 오로지 생존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톰 하디의 맥스는 환영이나 환청 등의 형태로 구현된 '죄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멜 깁슨의 맥스와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맥스의 언어사용일 것이다. 톰 하디의 맥스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단문이나 툴툴 거리는 목소리로만 의사소통을 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톰 하디의 맥스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톨이 같은 모습을 더욱 강화한다.


기존 시리즈의 맥스는 협상을 하는 솜씨 좋은 해결사의 이미지가 강했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기술을 판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에 득이 되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그가 자신의 생존의 측면에서 기술을 팔아먹고 사는 해결사 같은 인물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가 공동체가 갖고 있는 방향성과 비전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득이 될 것 없는 '자원봉사'로 공동체를 위기에서 끌어낸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이 맥스 역시도 강하다. 다만 맥스는 그 자신이 공동체에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에 맥스는 항상 공동체를 뒤로한 채 도로 위에 남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왜 맥스는 항상 떠나는 공동체를 뒤로 한 채 도로 위에 남기를 선택하는가? 톰 하디의 맥스는 그것이 환영이나 환청의 형태로 등장하는 죄책감으로 묘사한다. 그의 실패로 인한 죄책감과 자신은 공동체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학이 그를 언어를 잃어버리고 생존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인간형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전적으로 기존 시리즈에서 출발하였지만 새로운 방향성으로 재해석된 케릭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가 다른 시리즈의 맥스와 차별화되고, 더욱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맥스가 사람들의 방향성을 '반전'시킨 것이다. 여지껏 시리즈에서 맥스는 공동체의 비전과 가능성에 조력하는 모습을 보여왔만 그 자신이 어딘가에 뛰어들어서 무언가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는 헛된 희망에 걸어서 실패하고 그로 인해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쳐왔었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공동체에 조언을 한다:소금 사막 너머의 무의미한 희망에 걸지말고, 시터델을 점령하여 우직하게 정면으로 승부하라고. 그것은 맥스 자신이 과거에 하지 못했었던 것에 근거한 조언이다. 이 방향성의 반전과 함께 도망자들과 추적자들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이제 여지껏 도망자들을 압도한다고 생각했었던 이모탄 조와 그 일당들은 자신의 소유물들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고, 반대로 도망자들은 헛된 희망이 아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손에 쥐게 된다.


영화의 모든 액션씬들이 잘 짜여져서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이 클라이맥스의 추격씬은 그야말로 예술적이라 할 수 있다. 클라이맥스 이전의 러닝타임까지 도로는 도망의 공간이었으며, 어디론가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정처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방향성을 반전시킴으로써 도로는 이제 근거없는 희망의 공간이 아닌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공간으로, 더 나아가 최후의 결전에 걸맞는 공간이 된다. 그리고 맥스는 클라이맥스 시작에서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능동적인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의식과 마주하여 사람들을 이끈다. 혹자는 이 영화를 퓨리오사 일행과 이모탄 조 일당들의 싸움이고 맥스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지만, 단 한 번의 조언으로 맥스는 기존의 매드맥스 시리즈의 맥스 케릭터들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압도해버린다. 


하지만 퓨리오사의 시터델 점령이 성공한 이후, 맥스는 일행과 함께 남기를 선택하지 않고 다시 떠나기를 선택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였지만, 정작 스스로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조지 밀러 감독은 톰 하디와 함께 매드 맥스 시리즈를 3편 더 찍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3편의 매드맥스를 통해서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 본인은 그것이 맥스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3부작에 걸쳐서 맥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방황 끝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정착? 죽음? 구원? 본인은 맥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은 아마도 희생이나 죽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예정된 비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화에 있어서 영웅의 몰락은 예정된 결말의 일부이다. 그러나 맥스는 영웅이 아니다. 앞서 칼럼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매드맥스 시리즈는 '영웅은 아닌, 맥스라 불린 남자'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본인은 매드맥스의 이야기를 '전설'이라고 생각한다: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져오는 사람, 문제를 해결하지만 스스로는 정착할 수 없는 슬픈 숙명을 가진 한 남자에 대한 전설. 그리고 그 전설은 우리에게 세상의 질서나 이상을 교육하는 신화가 줄 수 없는 무게를 준다.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고뇌한 사람, 더 나은 세계를 꿈꾸었지만 정작 그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그 무게와 교훈은 신화의 압도적이고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간적인 세계에 대칭되며 사람의 손에 잡히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에 본인은 만약 새로운 매드맥스 시리즈의 3부작이 마지막에 맥스가 죽는다면, 그 끝을 어느정도는 얼버무리듯이 끝났으면 좋겠다. 좋은 이야기들은 끝을 열어놓아서 사람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살아 있다”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