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김경주, ‘주저흔’


영화 만신은 나라무당이라 불리우는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며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본인의 진술과 나레이터의 나레이션, 그리고 배우들의 재연을 통해서 재구성하는 영화 만신은 특이하게도 무당이라는 ‘미신’을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을 다루는 형식으로서 다루려 한다. 또한,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 과거의 재연과 현실 자료영상을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교차한다:김금화가 내림굿을 받을 때, 그녀의 미래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듯이 그녀에게 예지를 내리며, 그녀가 굿을 한 자료영상은 그녀의 인생사와 함께 교차되어 등장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듯이 보여진다. 다큐멘터리라는, 정보의 보존과 전달이라는 영화 장르(http://ko.wikipedia.org/wiki/다큐멘터리_영화)를 영화 만신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간섭하며 정보를 재구성하려 하고 있기에 다큐멘터리로서 만신을 바라본다면 대단히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영화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소재로서 무당을 바라보는, 샤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은 독특하다:이것이 종교인가? 혹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세계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일까? 영화는 이런 선정적인 서사에 빠지지 않는다. 차력쇼로서 무당이 작두를 타는 자료화면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단순한 호기심 위주로 소모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만신이 기초하고 있는 서사는 무당과 굿에 대해 매료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향수이다:눈파란 서양인들이 만신 김금화에게 내림굿을 받는 장면에서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들이 미개하게 작두나 타는 무당에게 내림굿, 강신무를 받는 것일까? 영화는 그것이 사실임(진짜 무속적 신이 존재하는 것)을 강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한때 우리에게도 있었고 서양인들에게도 있었으며, 동시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원시적인 믿음,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근원적이며 원시적인 것에 대한 향수로서 샤머니즘, 무당을 다루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샤머니즘의 미학에 따라서 영화의 서사를 배열한다:작두를 타는자, 귀신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에도 머물 수 없는 무당이란 존재가 작두 위라는 아슬아슬한 시공간 위에서만 자신의 존재, 그리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만신 내에서 인용한 민속학자의 견해를 재인용해보면, 무당의 신체야말로 과거(귀신들), 현재, 그리고 미래(예지몽 같은)가 한꺼번에 존재하는 시공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만신 김금화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에게 간섭을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는 전반적으로 샤머니즘에서의 샤먼, 무당이라는 존재의 특징을 영화 전반의 구조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김금화라는 무당의 육신과 그녀의 인생내력을 통해서 구축하려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경험한 전통문화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김금화가 보여주는 전통 문화, 굿이라는 전통예술은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예로부터 ‘신은 인간에게 내렸으되, (먹고살기 위해서는)재주는 네가 배워야한다’(노름마치에서 인용)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굿이란 단순하게 신내림과 작두타기로써만 행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에는 형식이 존재하며, 또한 그 형식 와중에 무당은 관객(굿을 보는)들의 상황에 맞춰서 굿을 풀어나가야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근대적 무대예술과 다르게 굿은 관객과의 참여, 그리고 극을 풀어나가는 무당의 역량 역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계가 불분명하고 자연스럽게 굿이라는 무대를 이끌어가야하는 김금화의 굿은, 어떤 의미에서 김금화라는 인물의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굿을 할 때, 굿이 시작도 끝도 그 구분이 모호하다. 그녀는 일상속에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하며, 자연스럽게 노래를 끝마친다. 그리고 이는 무대의 개념이 모호하고 관객과 공연자 사이의 교류를 중요시여기는 전통예술 전반에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예술을 예술로서 따로 보존하고자 했던 현대적 개념의 예술가들이 아닌 삶과 함께 예술을 하고,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았고, 그것에 의해서 탄압받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함께 살기를 희망했던 광대, 기생, 판소리꾼, 한량, 사당패, 무당 등등의 이야기들은 결국은 전통예술이 겪었던 근현대사의 혼돈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분절적인 시공간의 구분인 과거-현재-미래를 무너뜨리고 김금화의 삶들을 서로를 교차시키면서 스스로 ‘굿’이 되기를 희망한다. 해방 이후, 혼돈스러웠던 정국에서부터 천대받았던 무당의 삶과 6.25 전쟁과 분단현실, 그리고 죽은 넋을 위로하는 굿이 교차한다. 그리고 무당이라는 이유로 이혼당했던 김금화가 시간이 지난 뒤에 전남편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남편과 처가 만나는 형식의 대동굿의 영상을 겹쳐 보이게 한다. 미신 타파를 외치던 새마을 운동에 의해서 도망치듯이 굿을 하고 굿으로 쌓인 울분을 굿으로 풀어내며, 굿을 하던 중에 기독교에게 까지 박해를 받던 이야기까지 굿은 이 모든 주요한 사건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굿이 행해지는 시공간을 통해서 이런식으로 영화는 한 맺힌 과거와 현재, 그러한 앙금들이 삭아서 가라앉은 미래(동시에 현재)를 하나의 시공간에 넣음으로서, 이 거대한 타임라인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려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역사의 질곡을 한데 모아서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씻김굿을 내리고자 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게 김금화 라는 만신, 무당의 이야기가 아니다:영화 만신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고, 외면하였지만 다시금 되찾고자 하는 것을 한 사람의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는 초혼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만신은 다큐멘터리의 경계 내에서 머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알렝 레네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나 범죄에 있어서 진실을 밝혀내고자 영화외적이며 사회적인 시도를 보였던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선과 같이,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어떤 사건이란 단순하게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다큐멘터리 영화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엄밀한 사실의 전달을 넘어서 그 시대나 사건, 현상, 상황이 가졌던 어떤 특징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천문학과 민주주의를 향한 사람들의 노력과 고난들, 그리고 아타카마 사막 어딘가에 묻혀있을 자신들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형용할 수 없는 슬픔까지 다뤘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칠레 천문학과 민주주의를 다루는 것이 아닌 사실의 전달이 아닌 별과 사람, 천문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와 같이 질곡으로 가득찬 칠레 근현대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무당과 그녀가 살았던 삶의 질곡을 굿이라는 시공간을 통해서 과거-현재-미래의 틀을 부수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화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가 살아왔던 삶과 전통 예술을 다뤄내는 방식으로 있어서 적합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신의 마지막은 애잔하다:무당을 위한 도구들을 만들기 위해서 어린 김금화가 쇠를 모으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순히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자신들, 스쳐지나갔던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 카메라 프레임 바깥의 스태프들까지 쇠를 모으는데 참여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스스로 마지막에 굿이 되기를 선택한다:단지 김금화의 삶을 메타 시공간적으로 다뤄내는 것이 아닌, 영화 스스로도 프레임 바깥이 아닌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오면서 모두가 맞닿아있는, 죽은자 산자가 어울려 노는 굿판에 걸맞게 프레임 내부와 외부의 모두가 만나고 화해하는 굿의 미학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미학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분절되어있는 시공간이 굿 이라는 예외적인 시공간을 통해서 만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뿐이며 그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배우들과 김금화 본인 모두 어린 김금화를 남겨둔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 애잔함, 신명나게 놀고 화해하기 위해서 모두 모였지만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라는 것, 한 인물의 삶의 끄트머리에서 그것들을 다 모아서 다시 돌아보는 아련한 슬픔은 어쩌면 김금화 본인과 굿이라는 장르를 떠나서 전통예술이라는 미학 전체로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