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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앞서서

이 작품은 하도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잘 안나는 것을 더듬거리면서 완성한 칼럼입니다. 은근히 시간이 많이 걸리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지적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罪惡業 3부: 위치헌터 로빈-그것의 이름은 원죄(原罪)

위치헌터 로빈은 2002년에 나온 선라이즈 제작 애니메이션입니다. 위치헌터 로빈은 선라이즈 작품 치고는 대단히 독특한 아우라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심지어 혹자는 '앞에 선라이즈 로고만 없으면, 이걸 어떻게 선라이즈 작품으로 알 수 있겠느냐?'라고 하더군요. 정갈하고 깔끔한 그림체, 조용한 음악, 차분한 성우들의 연기, 도회적인 분위기 등 일본 애니에서는 보기 드문 분위기를 지향하는 작품입니다.

위치헌터 로빈의 구도는 일견 단순하게 보입니다. 정상과 비정상, 일반인과 초능력자, 쫒기는 사람과 쫒겨지는 사람 등 이분적인 구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로빈은 엄밀하게 그 어느쪽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애니는 그러한 로빈이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는지, 그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을 통해서 독특한 심리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위치헌터 로빈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위치(Witch)'입니다. 위치헌터 로빈에서의 위치는 단어 그대로의 마녀(Witch)를 지목하는 게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위치는 철저하게 유전적으로 그 능력을 이어받는데, 이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위치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면 위치의 능력을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지는 원죄(原罪)입니다. 더러운 피, 태어날 때 부터 순수하지 못한 인간, 인간의 탈을 쓴 괴물. 위치는 애니 내에서 그런 취급을 받습니다. 과거 조상이 위치였으면, 자신이 능력이 있던 없던 감시받게 되고, 의심받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위치를 사냥(Hunt)하는 집단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들은 역사시대가 도래한 이후로 지속적으로 이러한 위치를 사냥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은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어떤 능력도 없는 나약한 인간들이고, 위치는 엄청난 초능력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과학과 기술을 써서 밀어붙인다고 해도, 솔로몬이 많이 후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위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요? 그것은 똑같이 위치의 힘을 빌어서 위치를 사냥하는 것입니다. 위치의 가계를 이어받은 사람들을 어렸을 때부터 키워서 위치헌터로 키워내는 것입니다. 주인공 로빈처럼요.

사실, 이런 설정은 이제 거의 클리셰가 되다시피한 설정입니다. 인간이 비일상적인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그들의 기술이나 능력을 쓰지만, 정작 이들 역시 적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정체성의 혼란이 오게 되는 내용 말입니다. 하지만 위치헌터 로빈은 철저하게 로빈이라는 캐릭터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세세한 감정묘사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클리셰적인 설정을 써도 '너무 흔한 이야기다'라는 평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시작, 로빈은 솔로몬 일본 지부인 STN-J에 새로운 헌터로 도착하게 됩니다. 로빈이 STN-J에 온 것은 본부가 STN-J를 지원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STN-J에서 위치의 능력을 상쇄시키는 오르보에 대한 감시와 견제, 그리고 STN-J의 위치를 죽이지 않는 헌트 정책에 대한 견제 등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STN-J의 헌터들이나, 본부에서 온 로빈이나 서로에 대해서 썩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처음 만남에서 지부장에게 인사를 한 로빈이 '오르보는 기분이 나쁘니까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장면 등에서 암시적으로(하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STN-J에 도착할 시점의 로빈은 대단히 완고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히 위태로와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솔로몬 본부에서 철저하게 위치를 사냥하는 법에 대해서만 교육을 받고, '좋은 위치는 죽은 위치 뿐이다'등의 사고방식(물론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으로 무장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본부와 다른 STN-J만의 마취탄으로 위치를 잠재워서 헌트하는 방식과 오르보의 사용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구요. 하지만, 크래프트 사용자(Craft使い)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녀 역시 위치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녀의 능력 사용 방법인데, 애니 초반 그녀의 크래프트는...뭐랄까 대단히 ‘위태롭습니다’. 헌트 대상인 위치에게 불을 붙이려고 하는 것이 주변일대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든다던가, 조준이 안되서 딴 데 불붙이기 일쑤이지 않나, 옆에 있는 사람을 대단히 위태롭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로빈도 STN-J에서 아몬, 사카키, 카라스마 등의 동료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처음 대단히 완고해 보였지만, 같이 생활하고 헌트를 하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 이는 그녀가 점점 소녀적인 이미지가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죄ㅡ자신이 위치라는 것ㅡ에 대해서 많은 부분 긍정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계기가 되는 것이 아몬이 건내 준 안경ㅡ아마도 능력 사용에 있어서 초점이 안 맞는다고 본 것이겠죠?ㅡ인데, 안경을 통해서 그녀는 애니에서 처음으로 능력을 똑바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로빈은 이에 대해서 대단히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데,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능력을 쓰거나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사고를 당하자 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로빈이 자신의 능력이나 임무에 상관없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로빈의 평화로운 시간도 STN-J의 산하 기관인 팩토리가 그녀를 헌트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깨지게 됩니다.

물론 팩토리가 로빈을 헌트하려는 것은 본부가 그녀에게 내린 임무도 하나의 큰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위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녀가 좋은 일을 하고, 사람과 소통하면서 사람 속에서 섞여지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위치'라는 주홍글씨는 지울수 없는 것이지요. 즉, 로빈은 지울 수 없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로빈은 자기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본부를 위해서 위치를 사냥했지만 역으로 이제 자신이 솔로몬에 의해서 헌트당할 위험에 놓였다면,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로빈은 STN-J에서 도망간 이후, 아몬의 친구인 나기라의 사무실에 몸을 숨깁니다. STN-J에 있으면 동료들과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펙토리가 STN-J 본부를 습격하고 난 뒤, 로빈을 헌트하기 위해서 본부에서 헌터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로빈은 어쩔 수 없이 본부의 헌터들을 죽이게 됩니다. 또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위치'들이 단지 선조 위치와 혈통이 이어졌다는 이유로 헌트당하는 광경도 목격하게 되죠. 이러한 과정에서 로빈은 극심한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로빈의 꿈ㅡ아몬이 로빈에게 총을 겨누면서, '위치는 헌트해야만 한다'라고 하고 로빈이 아몬을 불태우는 내용ㅡ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로빈의 고민은 점진적으로, 극적인 전개없이 해결됩니다. 그것은 그녀가 나기사의 사무소에서 다른 위치들을 만나고, 자신을 헌트하러 온 헌터들에게 저항하는 등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다시 로빈과 재회한 아몬이 로빈에게 총을 겨누지만 쏘지 않은 것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헌터였다는 것, 그리고 위치라는 사실에 얽메이지 않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다가오는 적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그냥 쉽게 이야기하면 벌려놓은 이야기는 마무리 짓기 위해서), STN-J의 동료들과 함께 펙토리를 습격합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여러 작품에서 많이 보였거나 변용된 구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로빈의 정체성 혼란과 자아 찾기 과정이 대단히 식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지요. 하지만 애니는 철저하게 로빈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인극의 모습과 대사의 자제, 음악의 적절한 사용, 절제된 그림체 등을 통해 그러한 원죄에 대한 인물의 심리와 그 변화를 효과적으로 잘 다루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다시 만나게 된 아몬과 로빈, 그리고 STN-J의 맴버들은 팩토리에서 오르보의 정체ㅡ살아있는 위치로부터 뽑아내는 물질ㅡ와 로빈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로빈은 로빈의 아버지가 인공적으로 실험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해서 만든 위치이며, 그 능력은 다른 위치에 비해 대단히 월등하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STN-J의 지부장은 로빈의 아버지의 기록과 로빈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이구요. 이는 일반적인 애니에서는 후속작을 예고하는 대단한 떡밥이 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로빈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이나 원죄에 얽메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로빈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게, 고작 그런거였나' 라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결국 로빈은 자신의 출생과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홀가분해진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로빈과 아몬은 잠적하게 됩니다.

위치헌터 로빈은 클리셰와 진부함으로 가득찬 작품이지만, 그러한 클리셰와 진부함을 분위기와 절제된 감정묘사, 연출로 커버하고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무라세 슈코의 다음작인 에르고 프록시를 본 것이죠.

...네, 다음 작품은 에르고 프록시입니다. 아마 반쯤은 욕설로 도배를 한 칼럼이 될 것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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