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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에 있어 잊을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의 광기가 빚어낸 궁극적인 종착역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효율적'인 인종 청소, 민족 정체성 및 문화 말살, 동성애자 장애인 말살, 종군위안부 등 차마 입에 담기도 역겨운 수많은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죠.

독일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나치즘의 대부분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일본은 동경 재판 이후에도 A급 전범을 모셔놓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과거 군국주의자들로부터 정신을 계승받은 극우주의자들의 행위 등을 통해 과거 전범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특유한 국민성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지만, 6.25 이후 미국의 충견이었던 일본의 국제 정치상의 위치, 강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이 일본 전범 잔재 척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점 등의 다양한 국제 정치상의 요건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산물이기도 합니다.

일본 대중문화에 있어 이 시기는 극우적인 작품들에서 가끔가다 미화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는 이 시기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시기죠.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이 시기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이 시기는 하나의 '공백기'입니다. 잊고 싶은 역사라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대중문화가 전쟁 중의 일본을 배경이나 주제로 다루지 않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 시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은 드뭅니다.(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간장 선생' 정도가 여기 들어가겠네요)

'지금 거기 있는 나'는 그러한 일본 대중문화의 금기를 넘어버린 작품입니다. 군국주의, 소년병, 학살, 집단광기 등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소재와 주제를 거침없이 다룹니다. 특히 종군위안부 부분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만들어 버리더군요.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한 소년이 소녀를 따라서 다른 세계에 떨어져서 개고생을 하고, 다른 세계의 문제를 바로 잡은 뒤에 다시 자기 세계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지금 거기 있는 나'의 독특한 부분은 전체적인 스토리가 아닌, 스토리를 풀어내는 과정에 존재합니다. 소년이 소녀를 따라서 건너간 세계의 풍경은 한마디로 지옥도입니다. 황량한 사막, 군국주의라는 집단 광기, 학살, 살인, 종군위안부 등 인간이 치달을 수 있는 막장의 한도를 넘어선 공간이죠.

놀랍게도, 소년이 이러한 상황에서 취하는 태도는 세계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소년은 밝은 미래를 긍정하죠. 처음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치기로 보였지만, 점점 악화일로로 가는 상황에 있어서도 미래를 긍정하는 소년의 모습은 치기를 뛰어넘어 숭고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근본은 선하다는 성선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전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선한 인물들이며, 심지어 이 모든일의 원흉인 독재자 조차도 자신의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물로 표현되죠. 이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그들이 극단적인 광기에 빠져있어도 세상은 아직 긍정할 수 있다는 애니메이션의 주장입니다. 그렇기에 작품의 마지막, 황량한 대지는 물로 정화되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서로 화해하여 공존의 길로 들어섭니다.

'지금 거기 있는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가장 충격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역사가 집단 광기의 산물이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작품이니까요. 기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취하는 과거 역사와 현재의 관계는 '단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과거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고 이를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는 모습은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품이 당시의 피해자에 대한 관점에서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판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일본인들이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가 '우리도 전쟁 피해자'라는 점을 고려하면(잘 만들었지만 정치적 색체가 상당히 짜증나는 '반딧불의 묘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이만큼까지 표현하는데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거기 있는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일반인의 정신으로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세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또한 작품 자체도 연출이나 스토리 전개가 흠잡을 때 없이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당히 무리가 있는 스토리도 감상자가 받아들일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지금 거기 있는 나'는 훌륭한 명작입니다. 한번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덧. 다음은 뭘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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