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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그랜 토리노'는 명백한 보수주의 영화입니다. 보수적이면서 꽉 막힌 노인네가 이민자 아이에게 미국적 가치관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서 미국을 물려준다는 내용의 영화는 언뜻 보면 미국적 가치관의 재생산과 미국 우월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랜 토리노의 강점은 그러한 맹점에서 비켜나서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랜 토리노의 스토리는 단순합니다. 노인이 아이를 만나고, 아이에게 자신의 가치를 전수한 다음, 아이를 위해 죽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스토리 보다는 영화적인 상황과 은유를 통해서 영화적인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아내를 잃은 노인의 쓸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미국적인 가치를 위해 한국전에 참전하였고, 자동차 공장에서 조립공으로 성실히 일했으며, 아내를 사랑했고, 미국 차를 몰고 다니고, 미국적 가치를 숭상하고 이민자들과 그의 문화를 경멸합니다. 영락없는 미국인의 전형이죠.

하지만, 노인은 고독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가치관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일제 차를 몰고 다니는 자식들은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서 아버지 집을 차지하려고 하고, 손녀는 할아버지의 자부심이자 보물인 그랜 토리노에만 눈독을 들이죠. 즉, 이는 구세대가 쌓아온 미국이라는 가치관은 업신여겨지고, 미국이 가진 부와 권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런 와중에서 노인은 소년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동네 양아치의 협박에서 소년을 구해준 것이지만(역설적이게도 노인은 소년을 구하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차츰 이웃에 사는 이민자 가족과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그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소년에게 아버지 적인 존재가 되어서 소년에게 세상을 사는 방법을 가르키기 시작합니다.

현대 미국 사회는 이제 백인 주류가 아닌, 아메리칸 드림을 쫒아 전세계에서 흘러 들어온 다양한 인종 민족 그룹에 의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영화에서 노인 이외에는 백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노인이 사는 마을에는 더 이상 노인 이외에는 백인이 살지 않죠. 심지어는 이민자가 '너는 왜 다른 백인처럼 나가지 않냐?'라고 묻기까지 합니다. 이제 미국은 백인이 아닌 다양한 민족 그룹에 의한 다원적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이죠.

하지만, 소위 아메리칸 드림은 이민자 사회를 왜곡합니다. 기존의 이민자 고유의 사회나 가치를 무너뜨리고 싸구려 저질 미국적 가치에 물들게 합니다. 마약이나 방탕, 음주 등등 이는 미국이 그들에게 있어 기회가 아닌 하나의 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화에서는 소년의 사촌 형이나 그 친구들이 이런 타락한 가치관에 물든 이민자 2세대들로 나옵니다. 그리고 스스로 소년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소년을 타락시키려 하죠.

이럴 때, 노인이 소년의 보호자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소년에게 미국적 가치를 가르키고, 미국이 주는 기회와 평등을 누리게 하려 도움을 주죠. 이로써 노인과 소년 사이에는 유사 가족관계가 형성됩니다. 아버지가 없는 소년에게 노인이 아버지 역할을 맡고, 소년은 노인의 가치를 이어받아 정신적인 아들이 되는거죠. 이 영화에서 가족이란 단어는 중요한 키워드인데, 가족은 사회적 가치의 전수자이자, 자식 세대의 보호자이고,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노인과 소년 사이의 관계는 미국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전승되고 보존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영화는 담담하면서 차분하게 전개해 나갑니다. 특이한 점은 미국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들(자기들이 진 베트남 전쟁이 아니라, 이겼던 한국전을 통해)에 대해 영화는 '그건 우리가 명백하게 잘못한거야'라고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게다가, 미국이 미국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미국의 죄는 아버지 대에서 끊어야한다는(노인의 순교) 영화의 주장은 최근 미국 영화 중에서 가장 솔직하고도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영화 자체는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키자는 보수주의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화법이나 이에 대한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생각은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저로써도 수긍이 됩니다. 어쩌면 이제는 미국 영화계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저력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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