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www.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2875&bc=03&mc=09 와 http://djuna.cine21.com/xe/6483889

이 글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참조하시길.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 이것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진짜 재난이다! 지구로부터 600km, 소리도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하던 스톤 박사는 폭파된 인공위성의 잔해와 부딪히면서 그곳에 홀로 남겨지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라비티는 전적으로 '기술적'인 쾌거이다.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기 전에 모든 동선과 카메라 워크를 완성해놓고, 그 뒤에 영상을 완성하고, 그 완성된 영상 위에서 배우가 연기를 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 그라비티는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라비티는 시각적인 충격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놀라운 지점들을 보여준다. 영화라는 매체가 전적으로 시각 매체인 점을 감안하면, 그라비티는 컷을 나누어서 다양한 상황과 재난을 화려하고 빠르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라비티는 컷전환 없는 롱테이크를 훌륭하게 이용해서 라이언 스톤 박사의 상황에서 닥쳐오는 재난을 몰입감 있게 다룬다.


또한 구조에 있어서도 그라비티의 이야기는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재난의 스펙타클에 밀려서 사라질수도 있는 이야기를 회상, 나레이션이나 어떠한 사족이나 부연설명 없이 영화는 롱테이크와 단 두명의 배우, 그리고 사건과 대화의 배치만으로 구성한다.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따라서 전개되며, 큰 부연설명 없이 대사와 배우의 연기만으로(주로 산드라 블록의 라이언 스톤 박사의 1인극으로) 단단하지만 뼈대만 남은 이야기 구조를 구성한다. 물론 후술할 심각한 문제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라비티의 이야기 구조는 날씬하고 가볍고 유연하며 아름답다. 단지 카메라 워크 또는 롱테이크 포르노로 치부하기에는 영화는 이야기를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 능숙함을 보여준다.


그라비티의 이야기와 미학은, 영화 소개와 정반대로 전적으로 SF적인 감수성에서 벗어나있다고 할 수 있다. 듀나가 지적한대로, 그라비티의 세계는 어떠한 과학적 가정이나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라비티는 전적으로 '구식'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우주는 해상조난물에서나 볼법할 바다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며, 스톤과 코왈스키는 배가 난파되어 조난당한 선원들일 뿐이다. 단지, 그것이 태평양 망망대해 한 가운데가 아닌 조난시 생존가능성 제로의 우주에서 일어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병신 같이 느껴지는 한국 그라비티 광고 문구는 이 모든 것을 축약하고 있다;외계인도 없다, 우주전쟁도 없다. 하지만 그라비티에는 '유령'(라이언이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라이언이 보는 코왈스키의 환각)이라는 구세대의 잔재는 있다. 그라비티의 세계는 과학적인 고증이나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우주에 대한 페티쉬나 동경은 전적으로 배제한 인간 세계의 극한의 축소판(두 명의 인간과 재난, 생존, 재탄생 등등) 것에 불과하다.(어찌보면 건담에서 사야가 소리친 '중력에 얽메인 우매한 중생들!'이라는 표현은 영화의 미학에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영화의 미학은 지구의 '중력'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불모의 우주공간의 대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우주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아름답게 다루는 지점은 무한하게 펼쳐진 우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지구의 풍경들이며, 오랫동안 우주를 유영했던 코왈스키가 매료되었던 것은 저 앞에 무한히 펼처진 인류 최후의 프론티어 '우주'가 아닌 해가 떠오르는 '일출' 광경이란 점은 영화가 전적으로 '지구'와 '인간 세계'에 잡혀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 세계와 대비되는 우주 공간은, 그야말로 중력과 반대로 엄정한 작용-반작용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며, 카메라가 우주공간으로 포커스를 돌릴떄 영화는 마치 '여기서는 인간은 살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프닝 시퀸스에서 우주를 묘사하는 끔찍한 설명들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즉, 검은 무한이 지배하며 아무도 살지 않는, 살수 없는 공간이 그라비티의 우주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를 방황하는  주인공 라이언 스톤 박사는 위태로운 인물이다. 그녀는 죽음(우주)과 삶(지구)의 경계선에서 방황한다. 4살 박이 딸이 죽은 뒤에 집에 돌아가지 않고 차를 타고 하염없이 집 밖을 해매는 이 표류자는 방황 끝에 집(지구)을 벗어나서 우주로 나아간다. 라이언이 우주에서 표류하는 것은 인간 세계의 '중력'에 붙잡히지 않고 떠올라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위태위태한 상황을 은유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라이언은 우주에서 표류할 때조차 '중력'에 사로잡혀 있다;왜 라이언은 초반 시퀸스에서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무한히' 튕겨나가지 않고 궤도상의 한 지점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맷 코왈스키에게 구출 받을 수 있었는가? 우리의 '상식'과 다르게 라이언이 지구 궤도상에 붙잡혀 있을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중력' 영향권 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인물, 코왈스키와 함께 중력은 계속해서 라이언을 '끌어당기며' 집으로 '귀환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는 종교적인 탄생과 희생의 이미지를 채용한다. 코왈스키가 라이언을 끌고 가다 결국은 자신을 희생해서 라이언을 구한다.(자신이 끈을 놓는 행위의 반작용으로 라이언을 구하는) 그리고 안전하게 ISS에 안착한 뒤 몸을 웅크린 라이언의 모습이 여태까지 코왈스키가 라이언을 끌고 가는 '끈'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탯줄과 태아의 이미지를 구축, 살 의욕이 없었던 라이언의 재탄생을 드러내는 모습이나 맷의 유령과 조우하는 장면, 기도의 이미지나 마지막 땅 위에 서는 장면까지 그라비티는 종교 이야기를 넣지 않지만 동시에 종교적인 이미지로 영화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전적으로 '영성' 충만하다. 이는 전작인 칠드런 오브 맨에서 보여주었던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전적으로 더욱 거대한 종교의 이미지를 채용하지 않고 인간의 이야기로만 다루고자 했던 감독 미학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그렇기에 드라마도 후술할 결점을 제외하면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이미지나 기술적인 완성도와 별개로 그라비티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극은 '애매한 지점'이 있는데, 이 영화가 1인극인지 아니면 2인극인지 혹은 그 어느쪽도 아닌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라이언 스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맷 코왈스키는 어떤 케릭터란 말인가? 기본적으로 라이언은 중력에서 붕뜬 위태위태한 존재며, 코왈스키는 그녀를 끌어당겨서 집으로 보내는, '중력'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케릭터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라이언을 중력에 계속 붙잡게 만드는 코왈스키의 역할이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케릭터라기 보다는 극에 있어서 '장치'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조지 클루니의 연기나 혹은 극 내에서 코왈스키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코왈스키가 하나의 케릭터가 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더 합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1.5인극(라이언+덤으로 코왈스키)에 가까우며, 결국은 유령의 이미지로 코왈스키를 재탕하면서 그가 하나의 케릭터라기 보다는 '장치'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해버리고 만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드라마는 살짝 붕괴한다;철저히 그때까지가 인간의 이야기였다면 코왈스키의 유령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착륙은 곧 발진이다)의 등장으로 영화의 이야기는 의도치 않게 인간의 이야기를 벗어나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그라비티는 비주얼적으로 아름다운 영화며 90분 내내 사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영화기도 하다. 그러나 그라비티는 그런 기술적 성취와 별개로 아쉬운 지점 때문에 더욱 안타깝게 되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그라비티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커리어 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길 지점이 많다는 점, 그리고 기본적으로 영화가 못만든 것은 아니라 잘만들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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