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애니에 대한 잡생각



데즈카 오사무 이후 지난 50년 동안 일본의 아니메는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 코드이자 조류로서 당당히 자리를 잡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건담, 미야자키 하야오, 도라에몽 등 이러한 아니메의 코드가 매니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에게까지 잘 알려져 있을 정도니까요.

근 50년 동안의 역사는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장르 내의 관습이나 암묵적인 룰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시즌이나 쿨의 개념, 20분이라는 한정된 분량, 애니메이션의 세부적인 장르 마다의 특색 등등...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대중문화가 가지는 특색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특색들 중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치성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풀어내고자 합니다.

대중문화와 정치의 관계는 일종의 금단의 관계입니다. 초창기 대중문화 평론을 하였던 벤야민은 '대중문화는 정치의 프로파간다(선전)이며 우민을 양성해내는 도구에 불과하다'라는 극단적 평가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대중문화는 3S 정책(Screen, Sex, Sports)이라 하여, 대중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점차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아가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견해를 표현하는 수단이나 도구로 많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대중 문화에 나타나는 가장 큰 정치적 특색은 바로 '현실 정치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입니다. 6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정치적 소재나 주제의식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 거의 손에 꼽을 정도이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대단히 마이너한 하위 장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적이나 상황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마징가 Z를 예를 들어보죠. 마징가 Z는 우리 편과 악당은 명백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구분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떠한 정치적인 갈등은 존재하지 않죠. 또한 주인공이나 악역인 헬 박사가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관을 대변한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오히려, 마징가 Z라는 작품에서 스토리나 설정은 철저하게 흥미위주이며 재미를 위한 내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는 정치적인 갈등을 주된 테마로 삼고 있는 건담 시리즈에서도 나타나는 것인데, 지온-연방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과 무력 분쟁이 현실의 반영물이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타츠노코의 개벽 같은 작품은 제외하죠. 사실 그 작품은 지금 관점에서 봐도 정말 엄한 작품이라....)

사실, 이러한 과거 애니메이션의 무정치성은 일본의 정치사와 많은 부분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치사와 정치적 구조의 독특함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패망 이후 민주화된 일본 내각은 지난 60년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자민당이 집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 정치가는 대부분 혈연이나 결혼으로 이어진 하나의 단단한 구조를 만들고 있죠. 심지어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면, 아버지의 선거구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아들이 선거에 출마하는 등의 사례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일본 정치입니다.

일본 정치계는 하나의 단단한 상부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국민이 현실 정치에 간섭할 수 있는 사안이 대단히 적습니다. 또한 정치적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정부의 전문 관료의 막강한 권위와 자존심, 과거 일본 재벌이나 회사에서의 평생 고용제나 입사 순서에 따른 승진제도, 일반 사회에서의 단단한 서열 구조 등은 현실 정치뿐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도 경직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과거 일본 국민에게 정치란 머나먼 현실입니다. 물론 일본 국민들도 이러한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갖고, 현실 정치 구조에 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과거 일제 시대의 일본의 최초의 민주화 투쟁인 다이쇼 데모크라시, 우리나라 4.19 혁명의 영향을 받은 시민 운동이나 극좌 학생 운동권들의 급진적인 투쟁 등은 지난 100년간 일본 국민들이나 지식인들이 일본 민주주의의 탈권위화 및 탈집중화 등을 위한 노력한 사례이죠. 하지만, 하나 같이 실패하였기에 일본 국민에게 있어 정치란 먼나라 이야기 처럼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본 대중문화에 있어서 정치성은 무정치성을 띌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공간도 없고, 피력해도 의미도 없기에 환상이나 과거의 미학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예외적인 작품들이 있었지만(예를 들어오시이 마모루가 그린 만화 '견랑전설' 같은), 파편적이고 추상적인 명제로 많이 다루어졌습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오면서 사정은 달라지게 되죠. 일본 내의 세대 교체가 일어나면서 일본 정치나 시민운동은 과거의 침체된 분위기와 다른 활발함을 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발함은 후에 애니메이션에도 영향을 미쳐서 정치적 코드나 색체를 띈 작품들이 등장하게 만들기도 하였죠. 이는 다음 下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덧.원래는 한편으로 쓰려고 했는데, 글이 쓸데없이 길어지더군요; 어째서 과거 일본 애니메이션의 무정치성을 논하기 위해서 한 장 반 가까이 되는 글을 써야하는지 당췌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