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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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So Serious?

배트맨은 1930년대에 처음 등장한 DC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 중 한명입니다. 1930년 처음 나온 이후, 지금까지 배트맨은 수많은 파생작과 재해석을 통해서 독특한 오오라를 지닌 작품으로 자리매김하였고, 개성있고 매력적인 케릭터들과 악역들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러한 특징들을 토대로, 최근 배트맨: 다크 나이트(2008)는 배트맨이라는 케릭터와 작품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헐리우드 오락 영화사에 커다란 한획을 긋게되었습니다. 이 글은 팀버튼의 배트맨, 배트맨 리턴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 그리고 최근작 다크 나이트를 비교 정리하는 글입니다.

베트맨(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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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악마와 춤춰 본적이 있나?)

배트맨의 첫 영화화는 그 당시의 최고의 흥행영화 감독이 아닌, 희대의 괴감독 팀 버튼이 감독을 맡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미국 영화계의 크기나 규모, 흥행 성적들을 고려하였을 때, 지금과 같은 개념의 블록버스터 감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팀 버튼이라는 자기 색깔이 매우 뚜렷하면서 액션 영화 보다는 판타지나 기괴한 이미지의 영화에 특화된 감독을 배트맨이라는 유명 코믹스의 영화 감독으로 기용한 것은 이례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배트맨에 대해서 팀 버튼이 그 나름대로의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감독을 맡은 것이 가능했지만 그 당시에 조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던 알란 무어의 ‘킬링 조크’나 1930~40년대의 편집광적인 배트맨에 대한 재해석과 재발견이 그의 배트맨을 뒷받침하고 지지하게 된 것입니다. 배트맨 첫 영화가 개봉 하였을 때, 기존의 배트맨의 팬들은 분노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배트맨이라기 보단, 팀 버튼의 영화라고 이야기를 많이 했었지요. 하지만, 지금 입장에서 본다면 1989년도의 배트맨은 그 당시 불고 있었던 배트맨과 그 세계관, 케릭터들의 재해석을 팀버튼 식으로 옮겨놓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팀 버튼이 발견한 배트맨은 편집광적이고 사회 부적응자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입니다. 백만장자이면서 고담시의 안전을 지키는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은 거대한 자신의 저택에서 알프래드와 단 둘이 살고 친구는 없고, 자신의 저택에 감시 카메라를 잔뜩 설치해서 전 저택을 감시하고, 아무도 없는 그의 은신처에서 혼자 앉아서 밥을 먹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에게 어디 출장간다고 거짓말을 하는 등, 주변 환경과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존재입니다. 그런 그가 배트맨이 되는 이유는 어렸을 때, 자신의 부모가 길거리에서 잭 네피어, 즉 조커에게 총을 맞아 죽은 것이 어린 브루스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해서 그는 의무감이 아닌 편집증적으로 사회의 안전과 보안, 기성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게 됩니다.

물론 그런 그가 그의 재력과 능력을 이용해서 가면을 쓴 어둠의 수호자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고담시의 안정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어릴적 트라우마로 인해서 그러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즉 스스로, 그만의 방식으로 고담의 정의를 세우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가치에 동조되지 못하는 자들-마피아, 건달, 악당 등-을 자신만의 방법-공포와 두려움-으로 처단합니다. 하지만, 영화 내에서 제가 봤을 때, 그의 악에 대한 처단은 그의 어렸을 적 경험과 트라우마에서 나온 보복심리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트맨은 고담이라는 사회의 한 사회의 질서에 대한 욕망과 비극이 낳은 기괴한 영웅이며, 자신의 트라우마와 보복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광기어린 편집증 환자-이는 그가 조커를 두들겨 패면서, ‘네가 우리 부모를 죽였어!’라고 외친 부분에서 보여 집니다.-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조커는 독특합니다. 그는 스스로가 조커가 된 것이 아니라 배트맨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괴한 존재입니다. 조커의 전신인 잭 네피어가 브루스의 부모를 죽여서 배트맨을 만들어낸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정말 멋진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서에 대한 편집증이 역으로 질서를 붕괴시키는 또 다른 광기와 위협을 만들어낸 것이니까요. 이것은 조커의 기원을 다루었다는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조커가 되었는가?’라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 알란 무어의 ‘킬링 조크’에서 그 조커의 기원에 대한 모티브를 차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팀 버튼의 조커는 배트맨에 의해서 만들어진, 질서에 대한 편집증적 욕구가 만들어낸 질서와 가치에 대한 안티 테제(반대 명제)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일단 그는 배트맨과 다르게 유쾌합니다. 킴 베이싱어가 있는 박물관에 쳐들어가서 독가스를 뿌려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프린스의 노래를 틀면서 박물관의 모든 미술품을 작살 내는 장면은 무섭다거나 괴기스럽다기 보다는 유쾌하다는 느낌입니다. 그의 센스는 전체적으로 대공황기의 분위기를 지향하는 영화의 대척점에 놓여있습니다. 자신을 세계 최초의 살인 예술가로 표현하거나, 자신에게 반대하는 마피아 두목을 전기 통구이로 만들고 나서는 시체와 노는 장면, 고담 시민들을 모두 웃음 가스에 중독 시켜서 죽이려는 장면-‘외과의사가 그러듯, 가려거든 웃으면서 가라고.’- 등 영화내내 칙칙한 고담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치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제멋대로 뛰어 노는 막내같은 느낌으로요. 그의 앞에서는 고담의 질서, 가치, 그 모든 것들이 가지고 놀 소재이며 동시에 파괴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집(질서)나간 천방지축 막내(조커)를 다시 집으로 끌고 들어가기 위해서, 엄격하고 편집증 걸린 아버지(배트맨)가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며 편집증 걸린 배트맨이 조커를 이기고, 그를 파멸 시킵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조커의 시체가 계속 웃는 장면은 배트맨이 이긴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배트맨은 살아남은 승자가 아니라, 계속 그 편집증과 질서에 얽메여서 살 수 밖에 없는 패자에 불과하니까요. 이러한 해석은 후에 배트맨 리턴즈에서도 계속 되게 됩니다.

베트맨 리턴즈(1993, a.k.a 베트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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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귄, 박쥐, 그리고 고양이)

베트맨 리턴즈는 전편과 다른 구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편에서는 질서와 그 질서가 만들어낸 광기, 그 둘 사이의 대결과 파국을 그려내었다면, 리턴즈에서는 출생은 서로 다르지만 맥락적으로 같은 괴물-배트맨, 팽귄, 켓우먼-들이, 고담시라는 거대한 서커스 무대에서 벌이는 하나의 프릭쇼(기형아들을 모아놓고 벌이는 쇼)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여기서 팀 버튼은 배트맨과 팽귄, 켓우먼이라는 세 명의 동물 인간들의 케릭터들과 함께 기존 질서의 기득권, 보수 세력들의 추악한 점-막스 슈렉이라던가-까지 물려들어가면서, 기존 질서와 그 기괴한 산물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먼저 이 작품의 주인공들, 배트맨, 팽귄, 켓우먼들은 기존 질서의 추악함과 괴기함이 만들어낸 괴물들입니다. 팽귄은 선천적인 기형으로 인해서 부모에게 버림 받아서 만들어진 괴물이고, 켓우먼은 막스 슈렉이라는 악덕 자본주의 음모를 알게되었다는 이유로 창문밖으로 던져진 어벙한 비서의 뒤틀린 분신이며, 배트맨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자신의 편집증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기괴한 질서의 산물입니다. 그러한 그들은 막스 슈렉이라는 전형적인 선량한 척하는 악덕 자본주에 의해서 모이고 싸우게 됩니다.

고담시민들은 이러한 프릭쇼의 관중입니다. 처음 팽귄이 세상으로 나왔을 때, 팽귄은 고담 시민들의 자의에 의해 해석된 광대가 됩니다. 그러나 후로 가면 갈수록 고담 시민들은 그러한 팽귄의 이미지-불쌍하고 가련한 괴물-에 속아서 그를 시장으로 밀게 됩니다.(물론 여기에는 막스 슈렉이라는 악덕 자본주도 한 몫하지만)즉, 시민들이 광대를 보고 웃다가 광대가 시민들을 엿먹이는 그러한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팽귄의 본질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적인 배트맨입니다. 처음 세상으로 나온 팽귄을 보면서, 경계를 하는 브루스에게 알프래드가 '그건 주인님의 감인가요, 아니면 같은 동지로서 그런 느낌을 받으신건가요?"라고 비꼬는 부분은 배트맨과 팽귄의 동질성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그에 비해서 켓우먼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그들과 다른 아우라를 풍기는 존재입니다. 일각에서 켓우먼을 패미니즘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는 관점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켓우먼은 그저 고양이입니다. 자기 내키는데로 살아가는 고양이와 같은 느낌이지요. 그녀의 행동은 파괴적이고 동시에 충동적입니다. 그녀는 배트맨과 팽귄 사이를 오가면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본작 배트맨 리턴즈에서의 긴장감을 더 높이는 역할이지요.

결과적으로 리턴즈는 고담시라는 도시가 만들어낸 기형아들의 쇼이고, 이는 고담시가 끝나지 않는 한 끝날 수 없는 무간지옥과 다름 없습니다. 마지막에 동물원에서의 일전에서 배트맨이 팽귄을 제거하고 고담시를 지켜내지만, 정작 그 자신은 마음의 평안이나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처지에 있는 셀리나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구원을 얻으려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배트맨은 고담을 구원했지만, 고담에 예속된 기형아로 남게 됩니다. 엔딩 크레딧 전에 켓우먼이 '고양이는 목숨이 9개 있지.'라는 대사를 이야기 하는 것도 결국은 리턴즈에서의 갈등 관계가 정상적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소결론

배트맨과 배트맨 리턴즈는 결과적으로 그 당시 새롭게 제기된 배트맨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다거나, 팀버튼이 아예 처음부터 배트맨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재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두 작품은 배트맨이라는 히어로를 편집광적으로 몰고 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렸을 적 트라우마가 행동의 동기가 충분히 될 수 있고, 그러한 트라우마가 케릭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결의를 하게 하였는지 등의 과정을 다루지 않고, 원인-결과의 구조만 보여줌으로써 배트맨이라는 케릭터를 편집증에 걸린 것같은 느낌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팀버튼이라는 감독의 성향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보는데, 이성적인 구조보다는 환상과 몽환, 광기, 뒤틀림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광기의 아름다움과 이성의 추함을 강조하는 그런 성향이 강한 감독이 바로 팀버튼 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과 리턴즈는 그 당시 액션 영화면서 액션은 적고, 정신병동 같은 분위기를 풀풀 풍긴다는 평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팀 버튼식의 배트맨의 해석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해석이고, 영화 자체도 팀 버튼의 영화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본다면 훌륭한 영화입니다. 다만, 배트맨의 영화화로 보기에는 아쉬운 점들이 많았지요.(특히 너무 팀버튼 식으로 재해석한 점) 후에 조엘 슈마허 감독의 포에버나 배트맨 엔 로빈은 그러한 부족한 점을 매꾸고자, 블록버스터 영화를 지향했지만 결과적으로 평이나 팬들에게서는 엄청나게 냉대받게 됩니다. 포에버나 배트맨 엔 로빈의 문제점은 바로 배트맨의 매력적인 부분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새로운 해석은 없었으며, 그저 만화적으로 꾸미기에 급급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라는 것이지요. 역설적이게도, 비록 그 두 작품이 흥행에서 배트맨(1989)을 능가했을지는 몰라도, 팀 버튼식의 어두운 우화 같은 배트맨이 대중들이 보기에도 완성도가 더 높았고, 더 배트맨 해석에 있어서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지요.

결국, 배트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정의는 후에 메멘토, 인섬니악을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게 됩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