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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가장 특이한 작품들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 리스트 중에는 꼭 스컬맨이 들어갈 것입니다. 복고적인 애니메이션 스타일에 반제국주의적 성향과 의뭉스러운 스토리와 충격적인 결말로 시청자를 당혹하게 만든 작품이니까요. 특히 마지막의 주인공이 개조되어서 악의 총수가 되었다는 황당하고도 암울한 결말은 엔딩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주요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작품의 스타일은 스컬맨의 원작자인 故 이시노모리 쇼타로 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가이 고 보다 전세대의 활동한 분으로, 가면 라이더 블랙과 사이보그 009, 그리고 인조인간 키카이더 등의 작품을 만들고 특유의 암울한 세계관과 스토리 라인을 구축한 작가로 유명합니다. 실제 스컬맨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가면 라이더 블랙의 결말[각주:1], 사이보그 009의 케릭터[각주:2]나 기믹[각주:3], 심지어 스토리적으로 연결되는 듯한 암시까지[각주:4], 작품의 거의 대부분을 원작자인 이시노모리 쇼타로에게서 차용하고 있습니다.

 스컬맨 작품 자체는 숙명적인 악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사건의 조사자이자 관찰자였던 주인공이 모든 사건의 핵심이자 원흉인 사람의 아들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의 업적을 그가 뒤집어쓰고(해골 가면)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다는 점과 머나먼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순환론적인 구성으로 인해 악인 탄생에 대한 숙명론적인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부를 전까지는, 스컬맨은 과거의 죄악을 청산하는 존재와 과거의 망령들 사이의 초자연적인 싸움,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탐문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컬맨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스컬맨과 가호 계획(신인류 개발계획)이 만들어낸 산물 사이의 사투가 아닌, 주인공이 그들 사이의 싸움과 그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과거 탐정물의 형식으로 풀어냅니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어낸 산물들을 추적해나가고, 그리고 마지막에 주인공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이 작품의 또다른 핵심 축이자 주인공의 친구이자 신부, 그리고 前 스컬맨인 칸자키 요시오란 인물은 실상 그 가면의 정당한 주인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에서 세상의 끝을 보고 좌절해서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마야(주인공의 여동생)로 부터 가면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면을 받은 뒤 그는 과거 전쟁에서 보았던 개조 인간들, 즉 가호 계획의 산물들을 처단하기 시작합니다. 실상, '처단'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가 행한 것은 가호 계획으로 인해서 괴물이 된 인간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들이 보았을 때는 무차별 엽기 연쇄살인에 불과했지만요.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은 채, 비극을 끝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가호 계획의 산물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호 계획의 핵심이자 모든 일의 원흉인 백령회의 교주, 동시에 이 모든 죄악에서 순수한 마야를 죽여서 이 비극을 끝내려 합니다.

 또한 모든 일의 원흉이자 발단인 가호 계획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발견한 유적에서 인간 개조를 통해 우수한 개조 병사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전에 투입된 것이 칸자키가 참전한 전쟁에서부터였죠.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가호 계획을 끊임 없이 저지하고 처단하려 했던 것은 일종의 과거 청산이자 단죄와도 같은 것입니다. 즉, 칸자키는 과거 전쟁의 되풀이되는 과오와 전쟁을 일으킨 악에 대한 분노로 가면을 쓰고 스컬맨이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컬맨은 세상의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 스스로 오명을 뒤집어쓴 악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재밌는 점은 스컬맨이라는 작품 자체가 가지는 정치적인 성향입니다. 이야기에서 조금 마이너한 축을 차지하고 있지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과거의 영광'(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대동아공영권 이나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을 되찾으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또한 가호 계획이나 전쟁처럼 과거의 망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 내에서 제국주의자들은 여전히 뒤틀린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과거 일본에 대한 풍자이자 비판입니다. 웃기는 점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인간들이 과거 자신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원자폭탄을 탈취하면서 '이제 저 코큰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하는 부분입니다. 이는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앙증맞은(?) 제국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진정한 악에 의해서 괴멸되고 맙니다.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난 뒤에 초 미래적인 4족 보행 전차와 개조 인간들에 의해서 말이죠. 사실상 그들의 정체는 외국인이면서 동시에 무기상이었고 작품 내의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습니다. 즉, 제국주의자들도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악(무기상, 외세, 아니면 진정한 악?)의 꼭두각시였으며, 작품의 마지막에 일본은 그들의 손아래서 놀아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작자의 작품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복고적인 분위기의 작화와 내용, 일본 애니메이션치고 독특한 정치색을 띄고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정작 13화 끝나고 나서도 이해가 힘든 스토리[각주:5]와 정말 찝찝한 결말, 보통 애니메이션과 다른 특이한 템포(나쁜 말로는 늘어지는 이야기 전개)로 아직까지도 괴작 취급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복장에 하얀 해골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중후한 목소리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를 읊는 스컬맨이라는 존재 하나 만으로도 이 애니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1. 주인공이 악의 총수가 된다 [본문으로]
  2. 실제 작품의 최고 악역이 이 작품의 모티브를 준 '스컬'입니다 [본문으로]
  3. 마지막 화에서 스컬맨이 어금니를 깨물자 초음속으로 움직인 것은 사이보그 009의 주인공, 009의 능력입니다 [본문으로]
  4. 원작은 그렇지 않지만, 스컬맨에서는 009의 아버지가 스컬맨인 것 처럼 나옵니다. [본문으로]
  5. 사실 라제폰의 각본가가 참여한 만큼 스토리가 쉽게 이해될거라는 편견은 버리시는게 좋습니다. [본문으로]
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캡콤의 게임인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사냥'이라는 개념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게임 시리즈입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인기는 일본 내에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데, DS에 판매량이 밀리던 PSP의 판매량을 MHP2G(몬스터 헌터 포터블 2G)의 발매로 단번에 역전시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물론 장기적인 판매량에서는 다시 PSP가 뒤쳐졌지만) 몬스터 헌터 프론티어(통칭, MHF)는 이러한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컴퓨터 온라인 게임으로 옮겨놓은 온라인 게임입니다. 일본에서는 인기가 많은 온라인 게임이며, 한국에는 작년 8월에 상륙하여 지금 현재 시즌 4.0까지 업데이트 된 상태입니다.

몬스터 헌터 프론티어(이하, MHF)의 게임 시스템은 간단합니다. 퀘스트를 수주 받은 뒤에 사냥과 채집을 통해 재료를 모으고, 이를 가공하여 무기와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 형식입니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단순한 재료 노가다의 반복입니다. 여기에 어떠한 스토리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죠. 하지만 MHF는 이러한 반복적인 노가다에 재미를 부여합니다.

MHF의 핵심이자 기본은 사냥입니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좋은 장비를 만들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이는 사냥을 통해서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소재를 수집해야 합니다. 이는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반복적인 사냥을 해야지만 모여집니다. 이 때, 수렵하고자 하는 몬스터는 각기 고유한 특성이 있고, 패턴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비룡종이자 육상전 몬스터의 표준인 리오레이아는 문자 그대로 육상전에 특화되어 돌진이나 지상 브레스가 주특기라면, 공중전 몬스터의 표준인 리오레우스는 레이아와 반대로 공중 브레스나 덥치기에 특화되어 있죠. 이와 같이 각기 몬스터 마다의 개성이 다르고, 약점이나 공략법이 다릅니다. 때문에 이에 대한 철저한 사전 준비와 대처가 필요합니다.

또한 MHF에서는 각기 다른 11개의 무기(한손검, 쌍검, 태도, 대검, 해머, 수렵피리, 랜스, 건랜스, 라이트 보우건, 해비 보우건, 활)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무기들은 서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 너무나 다르고, 몬스터의 약점을 공략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초보의 친구이자 모든 근접 무기의 특징을 두루 갖춘 한손검을 봅시다. 데미지 딜링 능력은 떨어지는 대신에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범용성(무기 발도 상태에서 무기 사용 가능)과 기동성을 이용한 집요한 도그 파이팅 능력, 그리고 무기에 붙은 높은 속성치와 상태이상 능력치 등으로 몬스터에 따라 무기를 바꿈으로서 몬스터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가능하게 합니다.

반면, 근접 거리에서 방어와 모든 것을 포기한 극단적인 무기인 쌍검을 봅시다. 쌍검은 '난무'라는 폭발적인 딜링 능력으로 약점 부위에 대해서 어느 무기보다 효율적으로 집중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대신 어려운 스테미너 관리와 극단적으로 짧은 사정거리로 인해 컨트롤 하기가 어려운 무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각 무기 마다의 특성이 다 다르고 할 수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몬스터를 잡을 때 어떤 무기를 들고 가느냐에 따라서 수렵 방식이나 결과가 확 달라집니다. 물론 몬스터에 따른 적절한 무기가 있지만, 대부분 컨트롤이나 실력이 뒷받침 된다면 충분한 효율을 거둘 수 있습니다. 또한 MHF는 여타 온라인 게임과 다르게 보조 도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서 도구를 적재적소에 잘 사용한다면, 이것으로 각 장비간의 격차를 어느정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 내에서 장비 간의 성능 차는 플레이어의 센스로 커버되며, 중요한 것은 각 무기 간 개성과 플레이 스타일입니다.

또한 몬스터 헌터는 게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잔재미를 제공하는데, 가구를 배치하여 자신의 방을 꾸미는 마이 갤러리, 소재를 채집하기 위한 마이 가든, 자신만의 공원 마이 파크 등에서 다양한 이벤트와 소소한 일거리를 제공하여서 게이머를 쉬이 지루하지 않게 만듭니다.

MHF의 단점은 게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노가다성입니다. 게임 자체가 스토리나 흐름이 아닌 노가다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에서는 MHF의 한계는 극명합니다. 물론 무기 마다의 차별성, 새로운 몬스터들의 지속적인 추가, 각종 소소한 재미들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게임의 완성도가 높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일정 수준 이상이 지나게 되면 노가다에 질리게 되는 때가 오게 됩니다. 이를 MHF는 지속적인 업데이트로 커버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노가다라는 점은 큰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기존의 온라인 게임과 다른 조작 체계 또한 게이머가 적응하는데 큰 무리를 줍니다. 게임 자체가 온라인 게임이 아닌 콘솔 게임의 형식을 많이 띄고 있는지라, 키보드로 하면 카메라 워크 등에서 많은 어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전용 패드를 사서 하면 해결되는 문제이긴 하지만(혹은 키보드 조작 자체에 익숙해지거나), 이로 인해서 게임 서비스 초반에는 게임에 대한 진입장벽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MHF는 한번쯤은 해볼만한 게임입니다. 일본식 콘솔 게임이 온라인 게임으로 어떻게 성공적으로 옮길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존댓말을 생략하겠습니다.

리뷰: http://leviathan.tistory.com/970
코멘트:http://leviathan.tistory.com/971

 사실 영화를 보고난 뒤, 상당히 격한 리뷰를 썻다. 게다가 추가 포스팅까지 대단히 격하게 썼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 화가 단단히 나더라도, 그 다음날에까지 그 사람에게 머리 끝까지 화나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 또한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영화 평가에 있어서 약간 과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었다(실상, 나는 영화에 열받은 것이 아니라, 감독과의 인터뷰에 열받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한가지는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최악의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좀 달리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의 문법이나 표현에 대한 것이다. 실상 여태까지의 호러 영화들은 이미지나 포장된 형태의 가학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가학성은 호러영화의 중요한 코드 중 하나이고(동시에 거의 모든 대중 문화의 코드의 중요 코드이다),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이다. 뭔가 기분 나쁜 명제이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만약에 우리 자신이 선하다면, 공포영화에서 살인마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주인공들이 살인마를 처단하는 줄거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공포영화 자체가 없어질 것이다.

 이게 단순히 현대사회가 인간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인간 자체가 뒤틀리고 폭력적인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 두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서로를 죽이고 괴롭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해왔다. 즉, 호러영화는 그런 인간의 상상력에다가 영화적인 허구성을 입히고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우리가 희생자들을 죽이고 동시에 영화의 끝에 다시 질서를 회복하면서 우리의 파괴적이고 뒤틀린 본성을 충족시킨다.(비단 호러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때 가학성은 현실과 동떨어진 왜곡된 형태나 비사실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관객과 영화 속 살인 사이의 거리를 넓히면서 관객을 영화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동시에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하지만 마터스는 다르다.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영화 속에서 실제적인 가학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뒤틀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형태의 가학이 아닌 실제적인 형태의 가학을. 게다가 이는 휴유증이 매우 커서 한 소녀를 미치게 만들어서 15년 동안 기괴한 형태로 비틀린 여인을 보게 만들고 자해하게 만든다거나, 자아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가학의 원인을 말도 안되는 것으로 설정하기는 했지만(이 영화에서 종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탈은 외부적인 요인에서 비롯되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주인공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극사실적이다.

 혹자는 프랑스의 익스트리미티(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돌이킬수 없는' 등의 작품으로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조류가 여기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터스가 관객에 대해 가지는 파괴력은 관객을 영화속으로 끌어들여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을 영화 밖으로 내보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관객은 100분 이상을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왜냐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가죽이 벗겨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처참한 육체와 같이 영화속에 봉인된다. 어떤 공포영화도, 아니 어떤 대중문화도 감히 시도할 수 없었던 금기의 영역(관객은 영원히 영화 속에 갇힐 지어다, 아멘)으로 마터스는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제목인 마터스(Matyers)의 의미, 목격자들 순교자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본다. 바로 여러분들이 가해자고 주인공들은 그 가해자에 의해 순교당한 인간들이라고. 여러분들은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표 값내고, 영화 속에서 사람이 죽는걸 보러왔지!)로 다양하고 뒤틀린 고통을 주인공들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동시에 주인공들은 그 고통 속에서 서서히 익사해 간다. 천천히, 사실적으로. 하지만, 마터스는 동시에 가해자들(즉, 우리)에게 큰 벌을 내린다. 그것은 관객들이 주인공들과 함께 그 고통속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터스는 정말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영화가 대단히, 너무나도, 끔직하게 싫다. 왜냐고? 마터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관객들에게 극 사실적이며 잔인한 고어 장면을 보여주고(누군가는 엑스텐션보다 덜 잔인하다고 하지만, 현실적이란 의미에서는 더 잔인하다) 관객들을 영화라는 무간지옥에 빠뜨려 버렸다. 이는 여태까지 우리가 접하지 못한 새로운 자극이다. 그리고 새로운 자극은 언제나 그랬듯이(인정하기는 싫지만) 돈이 된다.

 이미 감독이 헐리웃으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나의 우려는 점점 현실화 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호러영화는 인간의 뒤틀린 심산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러한 뒤틀린 정신 속에서도 인간은 일상으로 돌아가길 꿈꾼다. 따라서 많은 수의 호러영화들이 비일상을 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거나 희망을 보여주는 결말을 취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을 그러한 뒤틀린 정신 속에 가두어 버리고 꺼내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리고 이것으로 돈을 벌고 시대의 조류가 되는것이 과연 인간에게 괜찮은 일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누군가 그랬듯이,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기 때문이고, 인간은 광기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은 자극을 받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자극의 한계를 넘었다는 느낌마저도 든다. '마터스'는 내게 그 자극을 넘어선 미지의 지평선 너머를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그 프론티어는 뒤틀린 뭉크 그림의 '절규'처럼 나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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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이 안옵니다. 아, 진짜로 영화보고 기분 나쁜건 정말 오랫만이군요. 감독의 자의식 및 허영심 쩌는 인터뷰(여기)까지 사람을 열받게 만듭니다. 게다가 고문에서 종교적인 '숭고함'을 느꼈다고 하는 코멘트 및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나 회로와 같이 호러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려 했다'라는 정말이지 정신줄 놓은 코멘트까지 보는 바람에,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제가 미친건지 세상이 미친건지 도저히 알 수 없군요.

 리뷰 외에 코멘트를 첨언하자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헐리웃으로 진출했다고 합니다. 실상, 헐리웃으로 스카웃 된 이유가 뭐겠습니까? 헐리웃은 항상 새로운 자극을 원하죠. 영화 '마터스'에서 감독은 헐리웃이 '쏘우 시리즈'나 '큐브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판타지적인 고문 및 고통을 보여준 것을 현실적인 단계로 끌어내렸습니다. 얼핏 보면 환상이 아닌 현실적이란 의미에서 덜 자극적으로 보이지만,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맥락에서는 마터스의 고문 및 고통은 환상이나 망상 속의 고통보다 더 자극적입니다.

 결국, 헐리웃이 원하는 건 감독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자극적인 능력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극은 돈이 되니까요. 그리고 감독은 이 제의를 받아들인 겁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이 썩을 자식은 애시당초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던 겁니다. 거장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이야기하였듯이 감독과 메이저 영화사 와의 관계는 악마와의 계약입니다. 결과적으론 돈되는 작품 밖에 찍어낼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자신의 호러영화를 '종교적'으로 해석하길 바라는 인간이 자신의 영화에서 종교적 코드를 싹 빼고 자극만을 추구하는 헐리웃으로 날랐다는 것은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입니다.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애시당초부터 '종교 코드'는 노이즈 마케팅이었고 새로운 자극을 보여줌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그리고 관객 및 평론가는 껌뻑 속아넘어가겠지!). 또다른 하나는 진지하게 자기 영화를 종교적으로 생각하는데 헐리웃으로 가면 더 많은 자금과 기술력이 생기게 되고 이를 통해서 또 '종교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 라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낙천적인 생각과 일반적인 이성을 벗어난 사고 방식 때문이었다. 사실, 어느쪽이 더 나쁜 건지는 알 수가 없군요.

 이러한 사실적 고문이 만일 헐리웃에서 J 호러 열풍의 뒤를 계승하는 호러 장르가 된다면, 호러영화에게 미래는 더이상 없습니다. 80년대 싸구려 영화의 탈을 쓰고 여러가지 영화적인 실험 및 거친 사회 고발의식과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 주류영화와 다른 맛과 재미, 혹은 생각할 거리를 주었던 호러영화가 결국 더 강하고 더 사실적이고 아무런 의미없는 자극의 과잉으로 치닫는다면 호러영화나 포르노 사이의 차이점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관객이 원하는 건 스너프 같은 영화 내용에 말도 안되는 개똥 철학을 갔다 붙인 쓰레기 같은 영화를 보고, '내용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존나 쓸데 없이 자극적이지만, 감독이 이렇게 이야기했으니 존나게 심오한 의미가 있겠지.'라는 평을 내리거나 심지어는 진정 위대한 작품들(예를 들어 '큐어'나 '회로' , '디 아더스' 등과 같은)과 같은 반열에 놓고 찬양하는 이런 개같은 불상사가 일어날 수 도 있단 말입니다(실제로 그런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일전의 대중문화에 대한 칼럼을 두개 썼지요(http://leviathan.tistory.com/947 와 http://leviathan.tistory.com/934 ). 여기서 내렸던 결론은 '대중문화에서 철학이란 네러티브 및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장치다'와 '대중문화는 대중의 욕망에 의해 부침이 결정되는데, 장기적으로 자본가 나 생산자에 의해 기망되어진 욕망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였습니다. 스스로 이런 결론을 내리고서, 제 두 눈으로 두 결론을 모두 부정하는('대중문화에서 철학이란 어떤 쓰래기 같은 작품이라도 이를 정당화 시키는 장치이다'와 '대중문화는 자극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런 망할 영화를 보았으니(게다가 호평을 주는 곳도 있어!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된거야?) 뒤집어 지고 환장할 수 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기분도 더럽고 우울하네요. 영화때문에 잠도 안오고, 쩝;
제발, 시간이 지나 대중들이 이 영화를 씹 쓰레기라고 규정지어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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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과격한 표현 및 욕이 존재합니다.

근래 호러영화의 대세는 '고문'입니다. 사실상 80년대 호러장르를 풍미했던 살인마와 크리쳐물의 쇠퇴 이후, 호러영화는 계속적인 부진을 겪어왔습니다. 물론 90년대 들어서도 80년대 호러 영화의 맥은 끊기지 않았지만, 사실상 크리쳐나 살인마 물은 예전 문제의식이나 주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감독들의 개성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근래 큐브, 호스텔, 쏘우 시리즈 등을 통해서 호러영화는 다시 한번 주류(?)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고문' 테마의 호러영화의 기조는 예전 80년대의 구체적인 폭력의 가해자들(살인마, 크리쳐, 귀신, 외계인 등등)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돈많고 권력을 가진 익명의 가해자들을 놓습니다. 이러한 익명의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고문하고 괴롭힙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유유히 빠져나가죠. 그들의 이유는 불분명하거나 터무니 없습니다. 쏘우 시리즈에서는 '생의 고마움을 가르치겠다', 호스텔에서는 돈많은 부자들의 여흥, 큐브에서는 아예 그러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최근 호러영화의 흐름은 과거 사회적인 문제나 왜곡된 구조로 인해 발생한 구체적인 가해자를 두고, 이들을 죽임으로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혹은 화해하는) 구조에서 벗어난 새로운 네러티브입니다. 즉, 요즘 호러영화의 기조는 사회의 착취 구조가 고통과 고문, 살인을 통해서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결과적으로 보통 인간은 뜯어 먹힐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고문 영화의 기조는 최근 발달된 CG, 분장기술과 완화된 검열 기준과 결합하면서 정말이지 놀라운 시너지(?)를 일구어 냈습니다. 여태까지 호러영화들이 보여주었던 허접한 고어씬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잔혹하고 사실적인 고어와 폭력장면들. 그리고 사도-마조히즘에 입각한 성적이고 가학적인 고문 도구까지. 이런 조류에 대해서 극단적으로(그리고 아주 진솔하게) 이야기하면 타인의 고통을 상품으로 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터스:천국을 보는 눈'도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 중반까지는 평범한 슬래셔 호러 영화(반전이 너무 뻔해보이는)였지만, 영화의 진짜배기는 영화 시작 1시간 이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주인공을 지하실에 박아놓고 1시간 가까이 사실적으로 두들겨 패면서 고문한 다음에, 가죽을 벗겨버립니다. 그리고 끝.

그렇습니다. 이게 영화의 전부입니다. 사실,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가 나오기는 합니다. 정말 우아하게 생기고 곱상하게 늙은 귀부인이 주인공의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어디 엽기 사이트에나 올릴 법한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말합니다. 사후세계와 해탈에 대해서요. 순간 시사회에 같이 갔던 사람들이 모두 '풉'하고 웃었습니다. 저 또한 그랬구요. 그러나 감독은 진지합니다. 자기는 고문을 통해서 주인공이 해탈했다고 보죠. 이 부분은....자세한 포스팅으로 따로 언급하겠습니다.

사실, 마터스에서 감독의 의도를 빼놓고 영화를 감상하자면, 전형적인 고문 호러영화입니다. 전반부에서 심하게 고문당한 15살 어린애가 결국 자라서도 그 옛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묘사하였다면, 후반부는 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인간을 고문 살해하는 미친 부자새끼들의 잔혹함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게 뭘까요(종교적으로 해석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제쳐두고)? 사실상 이 영화는 '세상 좆같다, 씨발' 이거 말고는 주제를 찾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세계의 문제점만 확대 재생산해서 보여주고, 그리고 거기서 끝납니다.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즘 호러 영화들은 어린 애새끼들 성적 판타지나 충족시키는 개허접 쓰레기라구요. 그래요.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근데...저는 감독 당신 또한 개 허접 쓰레기를 하나 만들었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습니다. 그것도 감독의 지랄맞은 자의식과 허접 쓰레기 같은 철학과 상징으로 덮어쓰고, 2시간 가까이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개 쓰레기 같은 영화를요.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적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에르고 프록시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니, 에르고 프록시에게 미안할 정도군요.

이 영화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마세요. 감독이 뭔 이야기를 하든, 감독의 의도가 뭐인지도 생각하지 마세요. 그 다음 이 영화를 보세요. 그럼 여러분은 거기서 2시간 가까이 반복되는 끔찍한 고통을 발견할 겁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어떤 종교적인 의미도, 어떤 논리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영화 속의 모든 것은 다 개소리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정말 좆같다(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동시에 일상적인 폭력)는 걸 설파하는 것이 영화의 주제였다면...그래요, 대단히 성공적인 영화라고 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딴 주제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인생에서 황금같은 2시간을 투자하느니, 차라리 9시 뉴스를 보세요. 뉴스 10분만 보더라도 세상 좆같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마터스는 올해 최악의 영화입니다. 제 인생 최악의 작품으로 에르고 프록시와 호각을 다툴 정도이니 말 다했죠. 차라리 어떤 의미에서는 극단적인 폭력의 상품화 측면에서 보면 극단적인 성의 상품화인 포르노 영화나 AV와 같습니다. 아니, 그건 보고 나면 성욕 해소라도 되니까 이 영화보다는 뛰어나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8월 6일에 개봉하는 이 영화에 절대 낚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덧1.리뷰의 제목은 광고 카피에서 따왔습니다.

덧2.나오면서 사람들 표정이 죄다 썩어 있더군요.

덧3.이 영화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회로나 큐어와 비교하는 사람이 몇몇 있더군요.
정신과 상담을 진지하게 추천합니다.

덧4.이걸 좋게 평가한 평론가들은 죄다 손가락을 분질러야 합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편의상 존댓말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쿠아리스'는 지알로 영화(피와 살이 난무하는 이탈리아 표 호러영화)의 걸작으로 뽑히는 영화다. 이미 수많은 호러영화 팬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평가하고 극찬하였으며,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분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존의 분석은 잠시 옆으로 제쳐두고, 조금 다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아쿠아리스의 올빼미 살인마, 어빙 윌리스는 얼핏 보기에는 기존의 슬래셔 물에 나오는 미치광이 연쇄살인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치광이 연쇄살인마들이 살인의 동기나 법칙이 있었는데 반해서 어빙 윌리스는 그러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어느 누가 연쇄살인마에게 구차한 이유가 붙기를 바라겠는가? 그냥 러닝 타임 내내 살인마가 나와서 가오 잡아주고, 토막내고 내장을 끄집어 내다가 결국 마지막에 자기보다 덩치도 작고 약한 여자 혹은 청소년 기타 등등 에게 쳐발린 다음에 마지막 장면에서 후속작을 암시하는 듯한 묘한 엔딩으로 마무리 지으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호러 영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쿠아리스는 뭔가 좀 다르다. 주인공들은 살인자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하고 동료 베티를 무참히 살해한 뒤에, 밀폐된 극장에 남아서 각본을 살인마에 맞게 뜯어 고치면서(흥행을 위해서, 이 얼마나 달콤 살벌한 낱말인가!) 연극을 연습한다. 물론, 관객의 예상대로 살인마는 이미 폐쇄된 극장에 들어와있는 상태. 하지만, 살인마가 극장에 들어와서 먼저 한 일은 살인이 아니라 올빼미 가면과 무대 의상을 훔쳐서 무대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왜 살인마 어빙 윌리스는 극장에 들어오자 마자 한 일이 무대에 오른 것일까? 영화는 살인마에 대한 배경 설명을 거의 해주지 않는다. 그가 예전에 연극배우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16명을 참살한 미치광이 연쇄살인마라는 것 외에는. 하지만, 그가 진짜 미치광이 살인마였다면, 무대 위에서의 첫 살인(물론 영화에서 첫 살인은 아니지만) 이전에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살인을 행하지 않은 것일까?

 영화는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추론은 가능하다. 영화에서 살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베티의 살인, 나머지 하나는 살인마가 의상을 훔쳐입은 뒤에 무대 위에서 벌인 살인과 그 이후에 일어난 살인들. 이 두 살인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누군가가 '죽음'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점이다. 먼저 베티와 일리시아가 병원에서 극장으로 돌아올 때, 베티는 어빙 윌러스가 벌인 살인 행각에 대해서 낱낱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입에 곡괭이가 처박혀서 죽게 된다(말 조심을 하라, 라는 경고?) 그리고 무대 위에서 살인 장면을 연습하던 중, 살인마가 의상을 훔쳐입고 쭈삣거리면서 무대위에 올랐을 때, 연출가는 소리친다. "뭐하는거야? 어서 그녀를 죽이라구!"

 그렇다면 왜 어빙 월리스는 사람을 먼저 죽이지 않고, 상대방이 살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을 때 발동이 걸려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이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연극배우였다. 하지만, 그 역시 영화에 나왔던 배우들처럼 무명의 가난한 배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뜨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남들과 다르게 튀면 된다. 어떻게? 그래서 그는 영화 속의 배우들처럼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자극적인 연극에 출연한다. 하지만, 그래도 뜨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그는 점점 미쳐간다. 점점 명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해져가고, 그는 결국 자신의 배역(아마도 살인마 역이었으리라)에 몰입한다. 결국 그는 미친다. 연극과 현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는 현실에서 연극 속의 살인마 역을 충실히 재현한다. 따라서 '살인'이란 단어는 그에게 연극의 배역(살인마)에 몰입하게 하는 키워드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떴다'. 물론 그게 진짜 뜬거냐고 물어보면 할말 없지만. 그래도 그는 미치고나서도 투철한 직업정신(?)에 불타오른다. 탈출하자마자 간 장소가 바로 연극 무대였고, 심지어는 무대의상을 훔쳐서 쓰고 무대 위로 올라온다. 그러자 연출가가 소리친다. "뭐하는거야? 어서 그녀를 죽이라구!" 죽인다구? 그거야 말로 내 전공이지! 그리고 살인마는 자신의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한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관객인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호러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공포, 살인, 절망, 귀신 등등. 하지만 영화는 1/3이 지나도록 살인 장면은 커녕 가난한 3류 배우들의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각주:1]. 이런 상황에서 결국 살인마가 무대위로 오른다. 하지만 그는 무대 뒤에서 주저한다. 관객들은 외친다. "젠장! 네가 진짜 살인마면 빨리 당장 무대 위로 튀어나와서 사람을 죽이란 말이야!" 그리고 살인마는 화답한다. 기꺼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살인마가 무대 위에 오르고 제 2막이 시작된다.

 그 이후 영화는 살인마가 '무대'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연습을 하기 위해 모인 배우들을 다양한 공구로 참살하는 내용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희생자'인 배우들은 '살인자'인 배우를 피해 이리저리 '무대'를 도망다닌다[각주:2]. 사실 '아쿠아리스'의 희생자들은 여타 공포영화의 희생자들과 같은 바보같은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뭉쳐다니며, 무장을 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들은 무대를 살아나갈 수가 없다. 왜냐고? 아직 러닝타임 90분을 채우기에는 시간이 모자르기 때문이다. 




 결국, 연약한 여주인공을 남겨두고 모두 죽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 살인마는 무대 위에 자신이 죽인 시체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편안히 앉아 휴식을 취한다. 마치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어'라는 느낌으로. 사실 그럴만도 하다. 그는 연출가(동시에 관객)의 주문을 충실히 수행했다. 다 죽였으니까. 따라서 그가 시체 사이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과 동시에, 자신의 한 일(맡은 역할에 충실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살인마가 너무 역할에 충실해서 주인공까지 다 죽여버린다면, 그건 살인마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살인마는 여주인공을 죽이려다가 여주인공 손에 죽는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서 여주인공을 죽이려 하지만, 양미간에 총알을 맞고 결국은 '완벽한 죽음'을 맞이한다[각주:3]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전, 살인마는 카메라를 향해서 씨익 미소를 짓는다. 누구를 향해, 무엇 때문에? 설마 후속편이라도 낼 생각인가?

 아니다. 살인마는 관객에게 미소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사족.
 영화 기술적인 완성도로 이야기하자면, 아쿠아리스는 괜찮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지금봐도 훌륭한 시점이나 표현들이 많이 있다. 물론 80년대 특유의 신디사이저 풍의 음악이나 분위기는 좀 어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더라도 영화적 완성도는 딱히 흠 잡을 때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억 달러를 쳐박아 넣어서 2시간 동안 저질 농담과 허접한 카메라 워크로 사람 지루하게 만드는 마X클 베X 같은 감독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요즘 영화 감독들은 옛날 영화좀 보고 배워야 한다.

사족2.
 영화 포스터에는 도끼로 수족관을 깨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도끼로 수족관을 깨는 장면은 커녕 수족관이 단 한번, 그것도 별 의미 없이 쏨팽가리(맞나?)를 포커스로 맞추는 장면만 나온다.




  1. 주1.물론 나는 그것이 영화의 네러티브를 흐트러트린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분위기를 비참하고 암울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본문으로]
  2. 주2.이것이 영화란 것을 생각하면 재밌는 구조이다. 배우들은 극중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흔히 호러영화에 있어서 희생자-살인마의 역할을 분담하여 무대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주3.이것도 살인마의 주요 본분 중에 하나이다. [본문으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애니에 대한 잡생각



1.드디어 감상을 미루고 있던 막말기관설을 재감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도 오랜만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그래도 다시 보니까, 분석할 부분이나 구조적으로 재밌는 부분이 많더군요.

2.일단 애니메이션이란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극이란 장르를 선택한 점이 대단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실상, 역사를 테마로 다루는 애니메이션 작품 대부분이 역사에서 모티브를 얻고 아예 역사와 관련없는 내용을 전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을 고려하면, 막말기관설 같이 정통적인 사극(?)을 표방하는 작품도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사건이나 흐름이 판타지적인 요소를 통해서 전개된 것이 어떻게 전통 사극이냐?'라고 반문하신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역사의 흐름'을 작품내에서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사극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작품은 구조적으로 '겉과 안'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큰 구조에서는 역사적인 사건(겉)과 그 뒤에서 사건을 조종하는 초자연적인 힘과 배후 세력들(안), 구체적인 세부 구조에서는 극단의 연극(겉, 바깥 사람이 보기에는 허구)과 연극 안에 감추어진 진실(안, 그러나 실제하는 진실), 그리고 각 케릭터들의 이중적인 모습까지 애니메이션 곳곳에서 이런 구조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막말기관설 뿐만 아니라 막부말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취하는 주제 의식, '시대는 왜 바뀌어야 했는가'에 대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헤겔의 역사관을 따르면, 역사는 항상 진보하는 방향성(민주화, 자본주의화, 공업화 등)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방향성을 가리켜 헤겔은 '시대정신'이라 표현을 했습니다. 하지만, 추상적인 철학의 극치를 달리는 헤겔 철학으로서는 이러한 시대정신의 존재를 원인이 아닌 결과로서(전세계 전반에 자리잡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업사회 등의 서구화 전반) 증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막말기관설에서는 막부말의 혼란스럽고 개개를 놓고 보면 이를 관통하는 의미나 방향성이 없어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안', 즉 초자연적인 힘과 배후세력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무작위로 일어난 사건들이 초자연적인 힘(패자의 목)을 통해 방향성을 얻고, 이러한 방향성은 헤겔의 '시대정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왜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어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초자연적인 힘과 이를 둘러싼 케릭터들 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러 이러했기에 시대는 바뀌어야 했었다'라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4.물론 아직 1/3 정도 밖에 감상이 안되었지만 작품에 대한 불만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는 비단 막말기관설 뿐만이 아니라, 일본 막부말을 다루는 시대극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입니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결과적으로 막부말을 대표하는 케릭터들이 시대의 변화를 수긍하고, 새로운 시대와 세대에 대한 축복 혹은 희생을 통해 이들을 정당화 시켜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막부말 이후의 일본이란 국가는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왜곡되고 뒤틀린 제국주의, 군국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시대정신이 그러한 일본의 방향성이 옳다고 긍정한 것인가요?

 사실상, 결과만 놓고 따졌을 때, 일본은 1945년 패전을 통해 그 방향성에서 한참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수많은 작가들은 막부말, 시대가 교차되는 그 순간에 매료되고 시대가 바뀌는 그 역사를 미화시키는 걸까요? 이는 어떻게 보면 막부말을 통해 일제 시기를 미화하고 그 때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감성을 잘 드러낸걸까요? 아니면, 막부말에 드러났던 사무라이 정신을 찬양하고 싶은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이러한 논점 덕분에 감상 내내 껄끄러운 느낌이 들더군요.

5.뭐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지만, 작품 자체로는 흥미로운 작품이고 분석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감상 후에 자세한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애니에 대한 잡생각



 노이타미나 시간대 방영작인 동쪽의 에덴이 11화 완결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사실, TVA 이야기 자체의 완결성은 있었다고 보지만, 문제는 역시 이 또한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후에 나올 극장판을 염두에 둔 석연치 않은 엔딩(뒷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엔딩)으로 작품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멋졌습니다.

 저번 감상에서 다루었듯이 동쪽의 에덴은 주인공인 아키라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는가가 주된 이야기의 흐름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앞서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동쪽의 에덴을 구원의 대상과 사회의 문제를 젊은 세대(혹은 서민, 빈민 등)가 기성세대(혹은 부르주아)에게 착취당하고 제도화된 틀에 의해서 규격화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애니메이션 전반에 깔려있는 문제 재기 인데, 능력도 있고 야심도 포부도 있지만(예를 들어 사키와 클럽 부원들이 만들어낸 휴대폰 사이트, 니트의 낙원 '동쪽의 에덴') 사회적인 제약과 그러한 자신의 재능을 실천할 재원이 부족하기에 젊은 세대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에서만 일어나는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낙오와 사회 정체화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도 끼도 있고 패기도 있는 젊은 세대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1학년 때부터 대기업 입사를 위한 소위 스펙 관리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문제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사회에 알아서 머리 숙이고 들어가지 않으면 사회에서 낙오되는(히키코모리, 백수, 니트, 뭐 기타 등등) 세태를 여지없이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쪽의 에덴에서 문제 삼는 이야기는 비단 일본 시청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습니다.

 '동쪽의 에덴'은 여기서 동화같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구원자, 타키자와 아키라 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젊은이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실현화 시키는 추진력을 부여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진력으로 젊은 세대들은 이 답답한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을까요? 작품은 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봅니다. 결국 젊은 세대란 집단은 하나 하나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으로 모여 있으면 자기들 편한대로 행동하는 등 개개인 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익명성 등의 방패 뒤에 숨어서 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까지 합니다.(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로 인해서 아키라는 좌절하지만,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의 저력을 긍정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젊은 세대의 구심점을 만드는 것이죠. 그것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면서 책임지려 하지않는 이 세계에서, 모든 책임을 떠맡는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작품 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이 없는 나라의 왕자님'이죠. 그리고 아키라는 스스로 이 자리에 올라 모든 책임을 부담하기로 결심합니다.

 마지막 11화에서는 이러한 파편화된 젊은 니트들의 아키라라는 구심점을 만나 어떤 기적을 불러일으키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만명의 집단 지성을 통해 일본 전국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막아내는 부분은 동쪽의 에덴의 전 에피소드 중의 최고의 명장면. '젊은 세대란 것이 문제가 많기도 하지만, 뭉치면 정말 놀라운 저력을 보여준다'라는 것을 작품 내에서 피력하고 싶은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의 구원이라는 주제의식에서는 코드기어스 시리즈가 연상이 되기도 합니다만, 코드기어스 시리즈가 힘은 있지만 우매한 대중, 그리고 거의 모든 케릭터들이 주인공 루루슈의 체스말의 의미 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기분이 나쁜 작품입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은 더럽게 잘난 몇명의 사람에 의해서 움직인다(그게 설령 사실이라도 기분 나쁜 명제입니다) 라는 것을 작품내에서 열심히 피력하기 때문이죠. 코드기어스 엔딩도 결국 그 이야기의 연장선상 입니다(세상 사람들이여! 날 미워하라! 그러면 평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동쪽의 에덴은 대중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코드기어스보다 동쪽의 에덴이 훨씬 뛰어나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엔딩이 석연치 않은 관계로 뒷이야기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서 이번 TVA의 완성도도 같이 엇갈린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왕이 없는 나라의 왕자님'이란 개념은 어떤식으로 실현 될 건가? 과연 서포터는 누구인가? Mr.Outside, 아토 사이조는 진짜 살아있는걸까? 작품에서 나온 세레손은 6~7명 정도인데, 나머지 세레손은 어디있는걸까? 석연치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작품입니다. 노이타미나 시간대에 처음으로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한 점이나 설정이나 장르적인 다양한 시도들은 높게 평가를 해야 합니다. 올해 최고의 작품...까지는 아니고(이미 망념의 잠드가 차지했으니까), 올해 신선한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전반부(전편 읽으러가기)는 죽은 자와 산 자의 화해, 그리고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그 사이의 희망에 대하여 다루었다면, 작품의 후반은 이렇게 삶을 부정하는 루아콘 교의 가르침과 삶을 긍정하는 나키아미의 가르침으로 나누어져서 대립하는 것이 주요 이야기다.





4.대립-나키아미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핍박받는 민족인 테시크 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히루코를 인도하는(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히루코를 시체에서 추출하는) 루아콘 교의 무녀로 선발되었다. 어느날 그녀는 시체 더미 속에서 한 소녀를 구하게 되고, 루아콘 교의 무녀의 의무를 포기하고 산노바의 곁을 떠나서 새로운 사람과 세상들과 만난다. 한 때 그녀의 이름은 '구름을 베는 자'였지만, 이제 그녀의 이름은 '나키아미'이다.

망념의 잠드라는 작품에서 나키아미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잠드들(라이교와 아키유키, 얀고)의 어머니이며, 아키유키와 더불어서 주제를 드러내는 작품 내의 중요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루아콘 교의 무녀일 때 배운 지식을 토대로 잠드들에게 가르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공존과 화해를 가르친다.

전번 리뷰에서 다루었듯이, 잠드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있는 중간자적인 존재다. 일단 잠드라는 존재는 작품 내에 등장하는 루아콘 교적인 개념인데, 특이한 점은 잠드에 대한 나키아미의 가르침과 루아콘 교의 가르침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이다. 루아콘 교 역시 잠드를 죽은 자와 산 자의 중재자로 본다. 하지만, 루아콘 교는 살아있는 것과 그 현제의 세계 그 자체를 고통이라 보고 이를 죽음으로 구원하고자 한다. 잠드는 산 자를 죽음이라는 영원한 평화로 인도하는 구원자인 것이다.

루아콘 교라는 종교 자체는 불교, 티벳 불교, 이슬람 교, 기독교 등등을 복합적으로 혼합한 종교이다. 루아콘 교의 교리 자체는 '일체는 고통(苦)이다'라는 불교적인 사고방식과 이슬람교의 성지 순례 개념, 기독교의 중보자적인 존재 잠드, 티벳 불교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종교적 지도자 '황제'까지 다양한 종교 개념이 혼재되어있다. 이러한 루아콘 교의 교리는 인류 종교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루아콘 교는 인간이 현세적인 고통을 구원받기 위해서 만들어낸 극단적인 종교 개념이다. 즉, 인간은 극단적인 삶의 부정, 즉 죽음으로서 구원하고 새로운 삶은 창출하겠다는 것이다.(물론 현실 종교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유의하시길)

그런 루아콘 교를 표상하는 것이 '황제'라는 개념이다. '황제'는 죽은 자에게 히루코를 심어서 만들어진 잠드이다. 그리고 대순례의 때, 황제가 깨어나 태동굴에 있는 순례자들(요호로기)을 삶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좋은 말로 하면 이렇지, 하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때죽음이다), 다시 한번 삶을 만들어내는 대순환을 일으킨다.




하지만, 나키아미는 루아콘 교의 가르침에 반대로 가르친다. 살고 싶다면, 소원하라. 자신을 잃지 마라. 그녀가 가르치는 것은 명백히 루아콘 교의 '황제(잠드)'와는 다르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삶의 아름다움을 긍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을 토대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으면서 동시에 그 둘을 아우르는 존재인 잠드를 잉태한다.

나키아미는 자신의 여동생인 쿠지레이카와 한 때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산노바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 끝에 쿠지레이카를 만났지만, 테시크 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잠드가 된 쿠지레이카를 본 나키아미는 더 이상 자신이 고향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타는 고향을 뒤로한 그녀는 산노바를 만나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태동굴로 향한다. 동시에, 하루와 아키유키도 잠드가 모이는 태동굴로 향하고, 이슈와 라이교는 금강탑을 둘러싼 일전에서 승리하여 히루켄 황제를 쓰러뜨리는 듯 하지만, 오히려 황제를 깨우게 된다. 그리고 히루켄 황제가 깨어나면서, 이야기는 대단원으로 흐른다.




5.화해-대단원,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

영웅들의 이야기는 막바지로 흘러 죽은 자와 산 자, 삶의 부정과 긍정이라는 극단적인 세계가 화해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인물은 바로 히루켄 황제다. 히루켄 황제는 누구인가? 그는 그 누구도 아니다(Nobody). 그는 죽은 아이며, 이름도 자아도 없는 존재다. 그는 대순례의 때, 태동굴에 모인 순례자들의 영혼을 삼켜 세계를 정화하고 세계를 유지한다(루아콘 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러한 막중한 의무와 관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외로워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 내에서 황제는 삶에 대한 고통과 공허감, 일체의 삶의 부정적 모습을 환기시키는 존재다.

대순례의 의무에 얽메여, 누구인지도 모르는 히루코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그(혹은 그들? 아니면 모든 죽은 자들?)에게 유일한 해방구는 자신의 존재의 소멸, 죽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에게는 '대적자'가 필요하다. 자신과 대칭되는 존재. 황제는 아키유키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가 그의 '의무'를 수행하게 하기 위해,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자아를 잃었을 때) 도움을 준다.

황제는 금강탑에서 풀려나(아이러니 하게도 이슈가 황제를 죽이기 위해 설치한 폭탄에 의해)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고, 태동굴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선택한 대적자 아키유키와 대결한다. 이 대결은 상징적인 싸움, 삶의 희망과 절망의 대리전이다. 아키유키로 대변되는 삶에 대한 희망과 긍정은 대단히 작다. 그러나 황제로 대변되는 삶에 대한 부정, 고통은 엄청나게 크다. 아키유키와 황제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며, 거대한 슬픔과 작은 희망의 싸움이다.




나키아미는 산노바와 만난다. 거기서 그녀는 산노바에게 자신이 산노바를 떠나서 깨달은 것들ㅡ작은 희망과 삶에 대한 긍정ㅡ을 이야기 한다. 그녀의 삶에 대한 긍정은 대단히 지독한 긍정이다. 핍박받는 민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수많은 비극을 봐온 그녀가 산노바 앞에서 세상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노바는 나키아미의 의지와 소망을 받아들여, 나키아미가 천년 동안 태동굴을 봉인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키아미는 태동굴에 모인 수많은 히루코들을 정화하고 태동굴을 자신과 같이 봉인하면서 천년 동안의 긴 잠을 자게 된다.




나키아미가 태동굴을 봉인할 무렵, 아키유키와 히루켄 황제의 싸움도 막바지에 다다른다. 황제는 아키유키와의 싸움에서 스스로 사라지길 원했지만, 아키유키는 히루켄 황제에게 자신의 소중한 '이름'을 준다. 희망과 절망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승리하는 것이 아닌, 희망이 절망을 감싸 안으면서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의미('아키유키'라는 소중한 이름)를 부여한다. 결국 황제는 아키유키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아키유키는 다시 한번 자아를 잃고 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어둠은 물러가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게 된다.




6.귀환-Life Goes On.


그리고 영웅은 다시 한번 자신이 구했던 일상으로 귀환한다.




나키아미와 아키유키의 모험은 세상을 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는가? 아니다. 그들의 모험은 세계를 일시적으로 구했을 뿐, 세계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남과 북은 그 이후 휴전을 했지만, 여전히 언제라도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본질적으로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언제라도 문제는 다시 생겨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모험은 무의미한 헛수고였을까? 아니다. 이들은 모험을 통해 그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희망'을 찾아냈다. 나키아미가 천년 동안 자신과 함께 태동굴의 히루코를 정화하고, 태동굴을 닫은 것도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소망, 그 소망이 있으면 언제든지 세상이 나아질 희망과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그리고 아키유키는 다시 한번 일상으로 귀환한다.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불러주고,
계속해서 마음을 전해주려고 했던 소중한 사람, 하루에게로.



※후기


4개월이었다. 리뷰 하나 완성시키는데 걸린 시간이 4개월이었다. 사실, 리뷰 자체를 포기할 뻔도 했었다. 리뷰를 중간까지 썼다가 뒤엎기도 했었다. 사실 4개월만에 리뷰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쁘다기 보다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실상, 작품의 핵심만을 짚어서 리뷰를 작성하였기 때문에, 작품 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교향시편 에우레카 7을 보면서, 이런 작품을 적어도 10년 안에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본즈는 그러한 나의 전망을 비웃듯이 약 3년만에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방영 당시 어느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26화 하나 하나가 모두 몇 년간 공을 들인 극장판처럼 느껴졌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사실, 4~5개월 정도를 질질 끈 리뷰를 완성하고 나니까, 뭔가 시원 섭섭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이다. '드디어 끝냈으니까, 다른 리뷰를 쓰러 갈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자신을 보면서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끝까지 봐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사실, 글 솜씨가 좀 괜찮은 사람이라면 더 축약적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었겠지만, 글 솜씨가 후달리는 관계로 글이 장황하게 길어진 점을 좀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말씀 올리며,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0.들어가면서

애니 감상은 이미 5개월 전에 끝이난 작품이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도 많았고, 도대체 어떤 틀에 기초해서 리뷰를 써야 할지 막막했었다. 처음 글을 요한 갈퉁의 평화 이론에 근거해서 전개하려고 했으나, 거의 반 논문처럼 변해버린 리뷰를 보고는 기겁해서 중도하차(.....)하였다. 여러 가지 분석틀이나 글 구조를 생각했었지만, 결국은 조셉 켐벨의 영웅 신화 구조를 통해서 분석하기로 결정했다.

1.세계로의 입문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세계 정세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 조그마한 섬에서 태어나 자라고, 친구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등의 평범한 삶은 살았다. 항상 타고 다니던 통학 버스에서 자살 테러가 일어난 그 날까지는.

망념의 잠드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타 다른 애니메이션과 같이 갑작스런 사건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서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새로운 세계로의 여정은 그 성격이 각기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모험의 길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세계를 구원하는 길이고, 혹은 복수의 길이다. 각자는 자신만의 사명을 띄고 원래 속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세계, 비일상적이고 비정상적인 세계로 나선다.

망념의 잠드가 다른 작품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아키유키가 일상을 떠나 당도한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잊어버린 공간이다. 전쟁과 차별, 증오, 죽음, 테러 등의 비극적인 사건이 넘쳐나는 세계,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일부이자 세계의 추한 면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타인의 고통과 비극을 쉽사리 잊어버린다. 심지어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재'로써 소비한다. 수잔 손텍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미지 과잉의 세계에서는 타인의 고통은 스펙터클로 변해버린다고.

망념의 잠드의 세계 또한 그렇다. 세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싸우고, 폭력과 차별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통학버스에서 일어난 자폭테러는 아키유키에게 일상적인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통해 아키유키의 몸에 죽은 자의 혼인 히루코가 깃들고, 그는 잠드, 일상적인 세계와 어두운 세계의 양쪽을 동시에 아우르는 존재로 화한다.

그가 처음 잠드로 화했을 때, 그는 무의식 중에 자신을 공격하는 인형과 전투를 벌이고 폭주하여 돌로 변해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때, 나키아미가 아키유키에게 외친다.




살고 싶다면, 그렇게 맹세하라!

이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는 돌이 되어 죽어가는 아키유키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어서 원혼이 된 히루코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잠드란 존재 자체가 죽음과 삶의 양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키유키는 소망한다. 살고 싶다고.

나키아미는 아키유키를 데리고 센탄도를 떠난다. 이는 아키유키에게 있어서 기나긴 모험의 시작이었다.

2.소명의 인식

처음 잔바니 호에 승선한 아키유키는 자신이 왜 일상을 떠나야 하는지를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반항한다. 이는 영웅의 모험에 있어서 자신의 소명을 거부하는 단계인 것이다. 물론 영웅은 결과적으로 소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나, 아키유키가 소명을 거부하는 경우는 좀 특이하다. 아키유키는 위대한 영웅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닌 평범한 학생이었고, 그의 생각에는 자신과 무관한 폭탄테러에 휘말린 다음 영문도 모른체 이역만리 우편선에 끌려와서 이상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왼팔에 깃든 존재, 히루코와의 공존을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을 알아간다.

아키유키가 받아들인 히루코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원혼이다. 산 사람에게 히루코가 깃들게 되면, 인간은 죽은 자의 원념에 휩싸이고 잠드-다른 말로는 人形(히토카타)-로 화한다. 그렇기에 잠드란 존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에 서있는 중재자이다. 자신의 팔에 깃든 히루코 존자 자체를 받아들이고 잠드는 히루코와 공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히루코에서 나오는 원념 및 부정적인 감정만을 받아들인다면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먹혀서 살아있는 자신을 잊고 돌이 되어 죽을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과 히루코, 이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잠드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키유키의 팔에 깃든 원념이 누구인지는 작중에서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기 때문에, 오히려 아키유키의 팔에 깃든 히루코는 전쟁에서 죽은 일반적인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즉, 아키유키가 잔바니 호에서 히루코와 자신 사이의 공존을 배워나가는 과정은 일반적인 세계 및 산 사람과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나 전쟁의 비극 사이를 어떻게 중재하고 조정하는가의 문제이다.

잔바니호 승선 초기에 아키유키는 '자신이 왜 여기있는가?' 에 대해서 반항한다. 이는 영웅에 있어서 소명의 거부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깃든 다른 존재 혹은 세상에 만연한 비극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아키유키만의 이기심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다. 왜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나 하나, 가족 챙겨서 살기도 바쁜 인간이라고.

하지만 비극은 외면할 수 없고, 설령 외면한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인간은 그러한 비극을 화해할 수 밖에 없다. 아키유키가 잔바니 호에서 배운 것은 보통의 세계에서 부정당한 존재들과의 화해였다. 그리고 아키유키는 자신에게 깃든 또다른 존재를 긍정하면서 새로운 존재, 잠드로 화한다. 그리고 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의 기적이자 희망ㅡ망자와 산 자를 아우르고, 이들을 중재하여 세계를 평화로 이끈다ㅡ이 된다.

3.귀환의 실패와 위기

아키유키가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히루코와의 조화를 이루어내었을 때, 그는 나키아미와 함께 자신의 고향 센탄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깨달음을 얻은 영웅이 자신이 떠나온 일상적 세계와 조우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귀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고향에서 마주친 것은 일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부정적 기운과 존재ㅡ후루이치의 잠드화ㅡ였다. 그는 친구와의 대면 이후, 나키아미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된다. 그리고 그는 군의 ASP에 요격당해서 살아있는 자신과 기억을 잃는다.

영웅의 귀환 단계에서 영웅이 귀환을 거부하거나 귀환의 과정에서 외부적인 시련이 흔히 존재한다. 하지만, 아키유키가 겪은 경우는 독특하다 할 수 있다. 이는 귀환의 거부나 외부의 시련에서 오는 갈등이 아닌, 자신이 깨달음을 전파하려는 일상적 세계 자체로부터 거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아키유키에게 그 어떤 시련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이로 인해 아키유키는 잠드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자아를 잃는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절망 속에 빠진 아키유키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아키유키의 친구, 니시무라 하루이다. 그녀는 아키유키가 센탄도를 떠난 뒤에도 계속 그와 소통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기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루는 아키유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아키유키를 만나기 위해서 군에 입대하기도 한다.




하루가 아키유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가 도달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은 단순히 아키유키에 대한 연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다른 존재와 간절하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하루의 소망은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폭력이 만연하며,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세계에서 아키유키와는 다른 또 하나의 작은 희망이다.

그러한 그녀의 소망은 그녀에게 세계의 이면을 보여준다. 아키유키의 목소리, 잠드나 인형의 감정들, 그리고 모든 비극의 상징이자 북쪽을 대표하는 히루켄 황제까지. 이렇게 그녀는 다른 인물들 보다 세계의 비극이나 문제점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판단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정상의 세계에서 비정상으로 몰리고, 위기에 처한다.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탈출한 그녀는 다양한 조력자와 북쪽으로의 모험을 통해서 아키유키에게 도달한다. 아키유키가 자아를 잊고 추락하는 도중, 하루는 아키유키의 이름을 힘껏 부르고, 아키유키는 다시 자아를 되찾는다. 하루의 소망이 아키유키를 다시 한번 구원한 것이다.


나머지 부분을 下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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