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도박은 인류 최악의 발명품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확률이나 운만으로 일확천금을 한다는 발상 자체에서부터 사회의 통념에 상당히 이단적이기도 하고, 도박 자체의 중독성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하게 하는 악영향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국가에서 도박을 금지하거나 제한을 두죠. 하지만, 싱가포르의 건국자가 말했기를 "중국인에게 모든 것을 시킬 수 있었어도, 단 하나 마작(도박의 일종)은 끊게 할 수 없었다"와 같이 도박은 적어도 인류가 모두 성인군자가 되거나, 멸망하기 전까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후쿠모토 화백의 도박묵시룩 카이지는 이러한 도박에 대해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만화는 한 명의 인간 쓰레기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도박을 통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기사회생하고, 살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절망적인 도박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도박 중독자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작품에 있어서 거대한 스토리 라인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데, 현재까지 40권 까지 나온 작품 자체가 총 열 손가락에 꼽을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도박묵시룩 카이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그림체입니다. 요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각지고 투박한, 좀 강하게 이야기하자면 조악한 그림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조악한 그림체야 말로 카이지의 매력입니다. 도박에 중독된 인간들의 왜곡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던가, 도박 패에 희비가 엇갈려서 울렁거리거나 무너지는 인간들의 모습들을 뭉크의 그림 '절규'처럼 사람까지 일렁거리게 하는 등 도박 중독자들의 희비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카이지에서 그림체는 하나의 매력포인트로 작용한다는 것도 이를 입증합니다.

카이지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는 도박에서 이기고 지는 희비와 파멸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한 에피소드가 만화책 몇 권에 이어서 진행되는 만큼, 이야기의 템포가 느려지거나 맥이 빠질 수 있다는 단점도 있지만, 작품에서는 이를 시원시원한 연출과 직설적인 묘사로 커버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품의 에피소드의 완급 자체가 훌륭해서, 이길 것 같으면 거기서 한번 뒤집어서 위기가 찾아오고, 다시 위기가 기회가 되고...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사실, 작품에서 도박은 단순히 도박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는 도박이란 것에 대해 묘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박이 우리 인생의 상황을 극단적인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스포와르 호의 가위 바위 보 카드 게임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 속고 속이는 상황을, 리조트에서 외나무 다리 레이스는 각자 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 사이의 실존적인 고독을, E 카드 게임은 버러지 처럼 기면서 사는 인간들의 반항심을 등등...이런식으로 도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처할 수 있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암시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도박 묵시룩 카이지의 이야기는 단순한 도박 중독자의 도박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인생에 대한 메타포인 거죠. 물론 최근 에피소드인 17보 마작 같은 경우에는 마작이란 소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샛길 인생을 살아온 인간의 병적 심리를 그려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작품의 큰 흐름 내에 존재하는거죠.

이러한 큰 흐름속에서 카이지는 작은 버러지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생과 사가 걸린 도박이 아니면 제대로 집중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죠. 하지만, 도박이나 승부에 있어서는 사람이 180도 바뀝니다. 또한 도박에 있어서 속임수를 쓰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양심이나 도덕관념에 충실하고, 강자 앞에서는 강하고 약자 앞에서는 자신을 굽힐 줄 아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구요. 어떻게 보면,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향점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승부에서 상대방의 속임수에 굴하지 않고 승부하는 모습, 그러면서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그런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화는 현재 17보 마작 에피소드가 끝나고, 재애 그룹 회장 아들과의 승부로 들어섰습니다. 사실 만화가 40권 정도가 되니까 점점 승부가 복잡해지고, 늘어진다는 느낌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박 묵시룩 카이지는 훌륭한 만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