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82건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애니메이션(~무한열차 전까지)을 감상한 내용입니다.

*이후 전개에 대한 다소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항상 바뀐다. 사회의 조류에 따라, 많은 흥행작들은 뜨고 지고 사라진다. 마치 패션이나 트렌드와 같은 유행처럼 말이다. 벤야민은 그렇기에 유행의 본질은 죽는 것이라 보았다:결국 유행하는 것들의 핵심은 대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은 유행의 흐름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몇몇은 너무나 성공해서 그 작품을 빼놓고 다른 작품을 논하는게 힘들게 되고, 몇몇은 흥행과 관계없이 다른 작품들이 보지 못한 선구자적인 혜안을 드러내서 죽지 않는다. 그런 작품들은 더이상 유행의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닌, 그 사회에 하나의 '상수'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작품은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다:건담이나 드래곤볼, 원피스,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들처럼, 10년이 지나도 다시금 회자될 작품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간단하게 다루고자 하는 귀멸의 칼날은 그런 작품의 문턱에 올라와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작년 여름쯤에 이미 연재가 마무리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애니화의 광풍 이후 귀멸의 칼날의 인기는 식지 않고 오히려 더 치솟고 있는 중이다:무한열차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일본 영화 관람 인원 '2,000만'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 중이고, 앞으로 2기 애니와 완결까지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광풍은 몇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귀멸의 칼날이 애니화의 수혜를 엄청나게 받은 것은 확실하다:몇몇 초반 부분의 늘어지는 전개가 정리 되고, 무한열차 이후 정립된 연출이나 이런 부분들을 애니화에서는 전반적으로 재해석하여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몇년간 애니메이션 보는 것을 손 놓긴 했지만, 확실한 것은 귀멸의 칼날은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을 봤던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눈요기할만한 요소가 많은 물건이란 것이다:우키요에 풍으로 그려진 호흡과 필살기 연출 등은 확실히 애니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뒤흔들만할 정도로 강렬하다. 대표적인 예가 루이와의 싸움에서 일륜도로 목을 배는 장면의 연출이다:루이의 실을 뚫고 나가 히노카미 카구라로 루이의 목을 치는 장면은 이미 애니와 만화를 비교하는 분석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장관이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전적으로 귀멸의 칼날이 애니의 수혜만 받은 작품이라 볼 수는 없다:애시당초에 원작 만화에서 그러한 연출과 미학(우키요에를 연상케하는 화려한 색체와 굵은 붓 필치)을 정립하지 않았다면, 애니에서 재해석할만한 요소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극의 구성이나 묘사, 연출, 설정의 구성 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귀멸의 칼날은 최근 몇년간 보였던 소년 만화의 공식에서 다소 빗겨나가는 독특한 감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귀멸의 칼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물의 감정 묘사나 이런 부분들이 소년만화 답지 않게 섬세하다는 점이다. 젠이츠와 이노스케와 처음 만나고 장구 도깨비와 싸우는 초반 에피소드를 보자:여기서 탄지로는 이전 도깨비와 싸움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고전하는데, 작가는 그 부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장남으로서의 자신의 역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한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을 논리적이고 자연스럽게 전개한다. 부상 때문에 아프고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지 않고 맞서는 것은 소년 만화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귀멸의 칼날은 그런 난관을 더 큰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고난을 긍정하는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모습에서 보통 소년만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인 탄지로가 갖는 미덕이 '그 나이 또래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구체적인 수준'의 무엇이라는 것이다. 탄지로의 주요 모티브인 장남이기 때문에 아픔을 참고 견뎌야한다는 것이나 이제는 가장이니까 남은 네즈코를 지키고 인간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 사람을 잡아먹는 도깨비에게 공감하고 자비를 보이는 따뜻함 등은 여타 소년 만화에서는 스케일이 커지면서 금방 희석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귀멸의 칼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소소한 미덕'에 집중하고 극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애니를 소비하는 주 소비자층에게 크게 어필할만한 부분들이 있다.

 

귀멸의 칼날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서 구조 측면에서 상당히 탄탄한 모습을 보인다:마음을 잇는 자들(귀살대)와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자들(도깨비들)을 서로 대립하게 두고, 그 둘 사이에서 인물과 극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단순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대단히 효과적인데, 요즘 같은 시대에 키부즈치 무잔 같은 미형 악역이 인기를 크게 못 끄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무잔은 '이기적인' + '그러면서 아전인수격으로 헛소리를 논리적으로 하려고 하는' 인물인데, 극에서 그 어떤 이입의 여지를 주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심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입하기보다 '생긴것과 다르게 추하기 짝이 없다' 라는 감상자의 평을 이끌어낸다.

 

결국 이러한 이기심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귀살대와 마음을 잇는 자들인 것이다. 극이 전개되면 될수록 탄지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이어나가면서 성장하고 결국에는 무잔을 쓰러뜨리는 게 된다: 자신의 동기들, 무한열차의 렌고쿠, 죽은 자신의 가족들 등등 탄지로가 이들의 마음을 잇고자 하고 그들 역시 탄지로를 이끌기 때문에 탄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위업들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예가 애니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귀멸의 칼날 이후 전개에서 희대의 메리수로 불릴 수 있는 요리이치일 것이다. '그' 키부츠지 무잔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정작 무잔을 죽이지 못한 점에서 전개에 구멍이라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요리이치 라도 무잔을 죽이지 못했지만 결국 그의 마음을 잇는 호흡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무잔이 죽게 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탄지로 혼자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에 기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극의 테마를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귀멸의 칼날은 3가지 측면(섬세한 묘사, 공감 가능한 미덕과 인물들, 대칭적이고 분명한 구조)에서 미덕을 갖고 있고, 이 덕분에 일본 대중의 큰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장기연재작들이 테마나 구조에서 흔들리는 부분을 많이 보여준것과 달리, 귀멸의 칼날은 상당히 깔끔한 마무리와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부분들은 대중적인 작품치고 호평할 부분이 많다. 애니화 되는걸 따라서 쭉 정주행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은밀한 한 탕을 설계한 범죄 조직원 ‘카세’ 야쿠자와 손을 잡은 부패 경찰 ‘오토모’ 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복서 ‘레오’  잃을 것 없는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바로 그날 밤 예상치 못한 유일한 변수 ‘모니카’가 나타나고 완벽했던 그들의 계획은 걷잡을 수 없이 뒤틀리기 시작하는데…(네이버 영화)

 

감독 미이케 다케시는 참으로 독특한 감독이다:빠른 제작 속도, 똘끼넘치는 연출들과 B급 감수성들, 엄청난 폭의 장르를 소화하는 모습 등등. 오디션이나 비지터 Q 같은 작품에서 역전재판이나 용과 같이 영화판 같은 작품들까지 그의 행보는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종잡을 수 없는 작품의 연속에서도 미이케 다케시가 거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그만의 뚜렷한 세계관이 있기 때문이다. 퍼스트 러브도 그러한 관점에서 미이케 다케시의 영화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퍼스트 러브는 기본적으로 부조리극의 양식을 취한다:완전 범죄를 위해 세운 계획은 제 3의 변수(레오의 개입)에 의해서 무너지고, 계획의 붕괴와 함께 다양한 이해 관계를 가진 인간 군상들이 예정된 파멸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는 코엔 형제의 영화들이나 몬테 헬만의 영화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도다. 그들의 작품들처럼 퍼스트 러브는 이러한 상황에서 극을 기묘한 긴장감으로 채워넣는다: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낀 사람들의 어색함과 계획 외의 요소가 개입하였을 때의 당혹감 사이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대로 튀어 다닌다. 

 

하지만 퍼스트 러브는 코엔 형제의 무덤덤하고 냉소적인 유머감각이나 몬테 헬만의 광기와 독기하고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퍼스트 러브는 레오와 유리(=모니카)가 만나면서 생기는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 전까지, 그들의 인생은 희망없고 생기없는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레오는 재능있는 복서였지만 태어날 떄부터 부모로부터 버림 받았고, 승리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리는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환상과 마약 금단 증상 속에 갇혀서 고통받고 있다. 이 둘을 지배하는 감각은 '무력감'이다:어찌할 수 없는 환경과 상황에 대한 무력감들로 그들은 자기 자신에 갇혀서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연명할 뿐이다.

 

이러한 무력감은 좀 더 확대해서 본다면 일본이나 전세계 젊은 세대가 경험하는 무력감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무력한 젊은이들의 첫 만남은 벼랑 끝에서 이루어진다: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레오는 뇌종양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며, 유리는 부모의 빚 때문에 조건만남을 강요당하고 몸을 팔다가 범죄 계획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되면서 죽을 위험에 처한다. 그들의 만남은 부조리한 동시에, 어쩌면 필연적이다:자신의 책임도 아닌 사건과 파국의 끝에서 서로를 만났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벼랑 끝에서 서로를 만남으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간다.

 

레오와 유리를 둘러싼 인간들의 다양한 욕망들과 충돌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휘말린다는 점에서 부조리하지만 흥미롭게도 미이케 다케시는 이 부조리를 재해석한다. 레오는 뇌종양 때문에 상대가 어이없게 뻗은 럭키 펀치에 쓰러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상황을 부합하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거리 점쟁이가 의사가 확진해준 뇌종양 판정과 다르게 인생 앞으로 시작이고, 대단히 건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레오가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 뇌종양은 오진이었고 점쟁이 말이 맞았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은 맞이한다. 당연하다 생각하는 일들(의사의 말이나, 앞날이 보이지 않는 미래, KO에 대한 적당한 설명인 뇌종양 같은)은 전복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럭키 펀치는 진짜로 '럭키 펀치'(레오의 삶에 대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부조리함은 일종의 '기적'과도 같은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기적은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나가게 한다:신주쿠 한 복판에서 유리가 약과 트라우마 때문에 환각을 보지 않았다면 레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레오가 뇌종양이라 진단받지 않았다면, 상대가 운좋게 휘두른 럭키 펀치를 맞지 않았다면 유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어찌할 수 없는 삶에서 만났던 기적과도 같은 부조리함이 레오의 첫사랑First Love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미이케 다케시의 센스는 여기서부터 빛을 발한다:애시당초에 삶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이 조리에 맞고 이치에 맞는 것이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부조리한 상황들을 대단히 유쾌한 무언가로 표현한다:예를 들어 카세가 주리를 기절시키고 아파트에 데려다 주는 시퀸스를 보자. 침대에 주리를 내려놓고 아파트를 나가려는 순간에서 갑자기 주리의 어머니가 튀어나온다. 카세가 '보통은 혼자 사는거 아니냐고'라고 불평하는 장면과 주먹 한방에 죽어버린 주리의 어머니, 카세가 화재로 주리와 범죄현장을 은폐하려 하지만 '앗뜨거'하면서 튀어나와서 살아남는 주리까지, 이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부조리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부조리들이 이어지면서 주리는 카세를 뒤쫒을 방법을 야쿠자에게 알려주고, 이야기는 흘러가게 된다. 극 중반 이후부터의 모든 이야기들이 이런 '부조리함'의 연속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것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바로 카세와 레오, 유리, 그리고 오토모가 처음으로 만나 차에 타고 서로 뭐하는 인간들인지를 물어보는 시퀸스일 것이다:쉴세없이 카메라를 한 인물에게서 다른 인물로 핑퐁하듯이 빠르게 넘기는 이 장면에서 미이케 다케시는 이 부조리한 상황을 유쾌한 코미디로 승화시킨다. 분명 피가 튀고 사람이 죽는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묘하게 희망찬(?) 탈출구를 보여준다는 점과 황당할 정도로 웃기다는 점에서 퍼스트 러브는 미이케 다케시 식의 '멋진 인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배경은 크리스마스가 아니지만 말이다.

 

또 눈여겨 봐야할 점은 미이케 다케시가 바라보는 영화속 공간들이다. 일본의 현대적인 풍경과 달리, 퍼스트 러브의 세계는 쇠락하고 우울하며 시대착오적이다. 뒷골목의 쓰러져가는 중국집, 복싱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스포츠, 유리가 살았던 무너져 가는 판잣집들, 일본의 밤거리, 그리고 마지막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공구 쇼핑몰들이 그러하다. 인물들 역시 풍경의 연장선에 존재한다:더 나아가서 시대착오적으로 행동하는 야쿠자와 중국 마피아들, 복서인 레오 등등. 미이케 다케시는 멋지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닌 구질구질하고 버려진 세계에 집중한다. 

 

이러한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끝나고, 레오와 유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분명 어제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무엇보다도 살아있다는 에너지로 충만하게 된다(재활치료를 하는 유리의 모습이나 레오가 권투 시합에서 이기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라) 젋은이가 서로를 의지하고 지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희망과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미이케 다케시의 퍼스트 러브는 재기발랄하고 독특하지만, 동시에 희망과 따스함을 잃지 않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코미디라는 장르는 웃음이라는 감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르다. 하지만 웃음이라는 감정이 어떤 감정인 것일까? 웃음이라는 감정을 정의하는 것은 여러 것이 있지만,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웃음의 특수성은 '위치의 변화'일 것이다:웃음은 어떤 소재의 높낮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만약 높은 위치를 점하는, 예를 들면 고상하거나, 위대하거나, 아름답거나 한 것들이 추하거나, 하찮거나, 비루한 것이 되었을 때, 그 '높이의 차이'에서 우리는 웃음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들(비행 서커스나, 성배나, 브라이언의 생애 같은)일 것이다.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들은 기본적으로 70년대의 영국의 엄숙주의에 기반한다. 위대한 영국, 성과 예절에 엄격했던 영국의 사회 분위기는 성과 권위에 대하여 대단히 엄격하였다. 몬티 파이썬이 파고드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이들은 성과 권위의 단단하고 높은 위치들을 '추락'시킨다. 엄숙한 초상화들은 외설적인 그림과 사진들과 콜라주 되어서 뛰어놀고, 높은 권위를 가진 자들(판사나, 음악가 같은)은 이상한 개념에 집착하여 촌극을 빚어낸다. 부조리하면서 떄로는 초현실적인 개념의 연결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내는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는 이후 많은 코미디 장르에 영향을 끼쳤다.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부분은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가 단순한 스탠드업 코미디의 말장난이나 좌충우돌의 슬랩스틱식 코미디를 벗어나서 '영상매체'의 특수성을 십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콜라주되는 이미지들도 그렇고, 각종 편집을 이용한 컷과 시퀸스의 배치와 배분, 연결들을 통해서 권위를 추락시키거나 생소하고 낯선 상황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물론 TV 코미디 프로그램 스러운 '웃음'을 삽입하여 웃음 포인트를 명확하게 잡는 부분들은 TV 프로그램 스러운 부분들이고,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옴니버스 방식으로 따로 논다는 점에서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경우,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의 특성이 영화적으로 드러났을 때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브라이언의 생애다:이 영화는 예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브라이언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종교와 정치에 대한 풍자를 이어나간다. 꽁트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성배와 다르게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브라이언의 생애는 '영화'라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드러난다. 기독교에 대한 강도 높은 비꼬기(메시아와 종교, 그를 따르는 사람들까지)를 보여주는 영화는 십자가에 메달린 사람들이 브라이언에게 삶이란 부조리 하며, 그걸 있는대로 받아들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끝을 낸다:이러한 장면에서 영화는 코미디의 핵심이 '부조리함'과 '높은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로운 점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나 세브린느, 비리디아나, 욕망의 모호한 대상 같은)도 이러한 특성(부조리함과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은 초현실주의 사조를 이끈 감독으로 유명한데, 영화 내에서 부르주아의 문화들과 관음증들을 상징과 교차하여 배치하고, 지배계급에 대한 차가운 경멸을 쏟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루이스 부뉴엘이 이러한 경멸을 표현한 방식도 몬티 파이썬이 이용한 코미디의 방식과도 유사하다. 자유의 환상을 예로 들어 보자:자유의 환상에서 부르주아들은 응접실에 설치된 화장실 변기에 앉아 배설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화장실에 설치된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한다. 이렇게 교양을 차리는 식사와 은밀하게 용변을 보는 것을 서로 뒤섞어 놓음으로 부르주아가 갖고 있는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이 부뉴엘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은 코미디의 방법론을 따르는 것과 별개로 전혀 '웃기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려면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들에서 권위는 추락하여 특정한 '위치'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르포를 쥐 옷을 입는 사람들로 치환시켜서 만든 꽁트에서는 동성애라는 당시 무거운 주제가 쥐 옷을 입는 사람들이라는 사소하고 엉뚱한 것으로 치환되어 사소한 것에 대해 엄숙함과 이상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세태를 비꼬는 것으로 바꾼다. 혹은 브라이언의 생애에서는 메시아의 삶은 평범한 젊은이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도 이러한 방법론이라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코미디의 방법론에서 추락은 결국 '어느 일정한 위치' 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에서 추락은 '어느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에서 추락은 무한한 상태다. 자유의 환상에서 한 에피소드를 보자:옥상에 올라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던 남자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 받는다. 그러고 나서 남자는 담배를 한까치 태우고, 변호사와 검사와 악수를 한 뒤에 재판정에서 나와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는 것은 법정과 법에 대한 권위의 추락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달하고 치환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이 에피소드에서 법과 제도는 추락하고 기능을 상실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웃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안전한' 위치에 도착하지 않는다.

 

이는 부뉴엘이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스페인 인이었던 부뉴엘은 프랑코 정부 수립 후 망명하며 전세계를 떠돌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바라봤던 세계는 절망으로 가득찼을 것이다:혁명은 실패하고, 학살은 묵인되며, 시위는 무자비하게 탄압당했다. 실제 그의 영화들에서 실제의 사건에 모티브를 둔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절멸의 천사는 실제 학살을 방조한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이며, 자유의 환상의 엔딩은 당시 시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의미하는 부분이었다. 신성모독으로 유명한 비리디아나의 경우에는 가톨릭 성찬식을 빈민들의 만찬과 섹스로 치환시켜 종교의 권위를 무너트렸고, 어느 하녀의 일기는 아동 성추행 살인범이 파시스트가 되는 결론으로 이끈다.

 

그렇기 떄문에 부뉴엘의 영화는 부조리 코미디 장르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전혀 웃기지 않고 싸늘하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절망의 끝은 없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는 웃음도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귀멸의 칼날  (0) 2021.03.20
[감상]퍼스트 러브  (0) 2021.02.12
[칼럼]스즈키 세이준의 영화에 대한 짧은 소고  (0) 2021.01.02
[감상]루시퍼  (0) 2020.09.05
[감상]브레이킹 배드  (0) 2020.08.29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소설과 영화, 이야기라는 구조는 기본적으로 허구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이 허구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하는 것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는 가장 이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실제하는 것들(사람, 풍경과 같은)을 가상을 연기하기 때문에, 실제하는 것이라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 있는 요소가 있다. 벤야민이 언급한 배우의 거짓된 아우라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영화의 이미지를 실제 배우에 이입하여 배우를 숭배하는 것이야 말로 실제와 영화의 가상을 서로 혼동하는 사례라는 것이 벤야민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살인의 낙인, 동경 방랑자, 야수의 청춘 등등)은 이러한 대전제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기본적으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은 장르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동시에 'B급 싸구려' 테이스트가 강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B급 싸구려'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B급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목적성(특정 대상의 관객을 만족시킨다, 특정 장르의 문법을 충족한다)을 갖고 있는 동시에, 제한된 예산과 연출들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소위 B급 영화의 연출 같은 것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는 이러한 B급 영화의 테이스트와 일반적으로 다르다. 기본적으로 B급 영화들은 이러한 흐름들을 속이려 한다:마치 아무리 그것이 속임수를 쓴다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뻔뻔하게 영화의 흐름에 녹여내려 한다. B급 영화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아무리 속임수를 진실처럼 믿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는 이 거짓을 '진짜'라 생각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살인의 낙인 같은 작품에서 종이 연극을 이용해서 연출을 하거나 하는 등에서 이러한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연출이나 미장센들은 스즈키 세이준이 웃기려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코미디 영화에서 웃기는 부분들은 기본적으로 웃기려는 의도들을 내재하였지만,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은 '원래 그러한 것(장르 영화의 공식)을 거짓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의 핵심은 강박적인 공간의 구성과 연출이라 할 수있다.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는 의도적으로 작위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야수의 청춘에서 한 컷에서 두 공간이 서로 다른 원색으로 구성하거나, 하나의 공간에 투명 유리를 배치해두고 서로 다른 일이 일어나게끔 하여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들이 실수가 아닌 전적으로 '의도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B급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박적인 흐름일 것이다. 장르 영화 공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쓸모 없거나 의미없는 설정들을 강박적으로 추구함으로 영화 전반에 불협화음을 만드는 것이 스즈키 세이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강박증과 불협화음이 아름다움으로 두드러지는 부분들이 바로 공간의 구성일 것이다:스즈키 세이준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성의 공간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스튜디오'들을 활용한다. 동경 방랑자의 마지막 시퀸스의 컷구성이나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밖에서 여성을 채찍질하는 시퀸스의 구성 등등은 작위적인 미학으로 차 있다.

 

물론 이러한 구성이 벤야민이 지적한 거짓된 아우라를 비판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스즈키 세이준이 추구한 것인 어린아이가 추구하는 '전복적인 재미'라 할 수 있다. 장르와 마초이즘, 야쿠자에 대한 환상을 전복하여 강박적이고 바보같이 보이게 만드는 것, 그 속에서 일반적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연출을 추구하는 것이 스즈키 세이준 영화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드라마 루시퍼는 닐 게이먼의 샌드맨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샌드맨에서 지옥의 지배자인 루시퍼 모닝스타는 더이상 지옥을 지배하는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의 날개를 잘라낸 뒤, 지상으로 기나긴 휴가를 떠나게 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드라마 루시퍼와 닐 게이먼의 샌드맨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부분은 이 정도일 것이다:세계관도 맞닿아있지 않고, 케릭터도 새롭게 해석되어 있으며, 샌드맨과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지옥의 지배자가 지상으로 휴가를 나온다면?' 이라는 짧고 굵직한 발상에서 시작한 루시퍼는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먼저 언급해둬야 하는 점은 수사물 장르로서의 루시퍼는 상당히 엉성하다는 점이다:이런 수사물들은 범죄에 얽혀있는 비밀을 인물들의 능력을 이용해 파해쳐 내려가면서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이 중요한 장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루시퍼에서 범죄는 미스터리로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각각의 범죄들에 숨겨져있는 이면이나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 자체가 상당히 거칠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단서가 여기저기 건너뛰기 떄문에 짜임새 있는 수수깨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든 수사물의 범죄 해결법이 인물들의 능력(정통적인 추리든 초자연적인 능력이든)에 맞물려 있고, 그 능력이 인물들의 성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루시퍼의 경우에 그 능력이란 '타인의 욕망을 밝히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욕망의 흐름대로 진행되며, 그 욕망의 흐름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루시퍼가 욕망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동화되어가는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어진다.

드라마 내에서 욕망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한 테마로 작용하는데, 화려한 로스 엔젤레스의 클럽이나 파티 문화, 섹스와 마약 같은 자극적인 요소들이 드라마 곳곳에 깔려있고, 그러한 요소들의 중심에는 루시퍼라는 인물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루시퍼라는 인물을 성경이나 기독교 문화에서 등장하는 절대악의 개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시퍼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지옥의 지배자로 추방당했지만,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은 루시퍼나 악마들이 부추긴 것이 아닌 인간 스스로가 행한 것이라는 것이 루시퍼의 핵심 전제다. 대신 드라마는 반항아이자 욕망에 충실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혐오하는 상처받은 인물로 루시퍼를 설정하였다. 

드라마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루시퍼라는 인물을 성서가 아닌 이슈가 있는 가족에서 자라난 탕아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분명 성서와 지옥이나 신화적인 세계들(창조주와 천사, 악마와 같은)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드라마 루시퍼는 이들이 '별개로 존재하는 규칙'에 얽메여있는 것이 아닌 '인간들과 유사한 문제들(아버지나 형제 문제 같은)'을 통해서 성서와 다양한 신화속의 이야기를 재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의 핵심은 살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루시퍼와 클로이 데커의 관계나 린다 박사와 정신과 상담 등의 변화 과정이다. 첫 시즌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마력이 통하지 않는 클로이 데커와 자기 위해서 노력하는 루시퍼가 점차 변화해서 자기 혐오와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고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은 매력적이다. 여기서 루시퍼 역을 맡은 톰 앨리스의 연기가 두드러지는데, 첫 시즌의 매력적인 조증 환자였던 루시퍼에서 점차 클로이 데커라는 인물에게 마음을 열고 나름 진중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매력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공포를 조종하고 루시퍼에게 콤플랙스를 심하게 가진 쌍둥이인 미카엘까지 연기폭이 상당히 넓게 잘 소화하였다.

결론적으로 루시퍼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원작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기준에서 보자면 상당히 근본없는(?) 재해석이긴 하지만, 무난하게 아무 생각없이 볼만한 작품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얼마 안 가 잊히고 마는 불행한 배우일 뿐.
인생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 의미도 없도다.

 

-맥베스 5막 5장, 셰익스피어

 

개인적으로 드라마라는 대중 문화 장르에 대한 감상평은 꺼리는 편이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짜임새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작품이다:초기에 짜여진 콘셉트와 각본들은 해가 바뀌고 이야기가 진행되면 폐기되고 변질되기 십상이고, 배우들의 계약 문제와 인기로 인한 급작스러운 종영과 원치 않게 늘어나는 이야기 분량들 등등은 이야기의 구심점을 흐트려뜨리고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되게 만드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장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핵심적인 테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욕망'일 것이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이 관철되기를,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욕망의 해소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를 희망한다. 아무리 이야기가 망가지고, 배우가 바뀌고, 갑작스러운 종영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드라마라는 대중 문화 장르가 나름의 일관성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브레이킹 배드는 본인을 놀라게 만든 드라마였다. 일반적인 드라마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이야기가 너무 커져서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지거나, 원래 갖고 있었던 결함이 두드러지거나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시즌 1에서 시즌 5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일관된 테마와 주제(욕망과 도덕)를 갖고 있고, 더 나아가서 이야기와 사건의 흐름에 따라서 인물들의 변화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기 떄문이다. 

브레이킹 배드는 여러 의미에서 프란시스 코폴라의 '대부'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범죄와 가족, 도덕, 관계의 파국 등등의 테마를 두 작품은 서로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눈여겨 봐야할 점은 두 작품의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일 것이다. 

대부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왕국의 흥망성쇠와 맥을 같이 한다. 어떻게 왕이 왕위에 등극하였는지(대부 1편), 왕국을 지켜냈는지(대부 2편), 그리고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러주었는지(대부 3편)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대부의 서사다. 그리고 대부의 이야기에서 가족은 중의적 의미(실제의 가족과 범죄 조직으로서의 패밀리, 가족)를 띄고 있기 때문에, 영화 속 가정사(결혼식, 문제를 일으키는 형제, 별거, 세례식 등)는 이야기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대부는 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거대한 고전 서사의 일부가 된다:원치 않게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의 이야기는 급작스럽게 왕위를 이어받은 왕자의 이야기로 이어지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에게 상처입히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인생사에서 접하는 이야기의 연장선이자 왕위를 지키기 위한 폭군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대부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사람이 살면서 접하는 삶의 변곡점들이 범죄와 도덕이라는 테마 아래 고전적인 서사와 결합하여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서사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범죄와 도덕, 가족이 함께 결합되었기는 했지만 그것이 거대한 서사의 일부(범죄 왕국의 운영)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초점이 잡혀있다. 대부에서 마이클이 아버지의 자리를 원치않았지만 억지로 떠맡고 그 과정에서 서서히 도덕적으로 망가져갔다면, 브레이킹 배드에서 월터는 전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따라 나락으로 떨어진다. 브레이킹 배드의 이야기는 그 욕망이 어떻게 더 거대해지고, 더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모든 것을 망가뜨려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서 알레고리와 연결되어 있던 대부와 달리, 브레이킹 배드의 욕망들은 전적으로 '현실적'이다:브레이킹 배드는 월터가 가족을 위해 돈을 남겨주기 위해 시작되었고, 매 시즌마다 그 욕망이 구체적인 숫자(자식의 대학 자금, 가족의 병원비, 차의 구매 등등)으로 거대해진다. 브레이킹 배드의 이야기가 일견 허무맹랑한 흐름처럼 보일지라도,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손에 잡힐만한 욕망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에 따라서 마주하는 도덕적 딜레마들도 마약과 범죄라는 소재를 때어놓고 본다면 일상생활에서 접할만한 이야기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가 대부의 마이클과 서로 대척점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월터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동인이 욕망에 놓여있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충동적으로 행동(예를 들자면, 제시를 구하기 위해 거스의 부하 마약상 둘을 차로 받아버리고 쏴죽인다던가)함으로써 일을 더 꼬이게 만든다. 거스가 월터를 평가하였듯이,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치밀하지 못하다. 오히려 20년 동안 마약 제국을 운영해왔고 스스로를 절제하며 살아온 거스가 대부의 마이클에 가깝다 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거스가 죽는 순간이 그의 억눌러온 '욕망'-자신의 친구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이 가장 두드러진 순간이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브레이킹 배드와 대부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맥베스와 리어왕에 맞닿아있다. 둘다 비극이지만, 그 비극의 스케일과 초점이 다르다. 리어왕은 가족으로 인해서 고통 받고 파멸한다는 점에서 대부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관계망에 의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서 광기에 빠지고 파멸한다는 점에서 맥베스에 맞닿아있다:맥베스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이었지만, 제왕의 능력을 지니지 못했고, 왕이 되고자하는 스스로의 욕망에 짓눌려서 비극을 만들어내었다.

브레이킹 배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월터 화이트를 이해해야 한다. 월터라는 인물은 욕망이라는 동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월터는 단순히 죽음의 앞에서 돈이 급해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월터의 욕망은 가족에게 무언가를 남기고자 하고, 가족에게 무언가(존경받는 아버지, 좋은 동서, 좋은 남편 등)가 되고자 하고, 무엇보다 잘 하는 것을 하며 최고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월터 화이트 본인의 관점에서 관철되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욕망들이다. 거스가 죽은 후, 스카일러에게 월터가 정상적인 가족을 요구하는 모습들이나 자신의 계획을 위해 어린아이에게 독을 먹이는 모습 등은 월터라는 인물의 이기적이고 잔인함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월터 화이트가 이기적인 욕망을 내려놓을 때가 종종 있는데, 이 때는 조력자인 제시 핑크맨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자인 제시 핑크맨은 월터 화이트의 악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위기의 순간에 서로를 돕지만, 이들의 관계는 점점 나락으로 빠진다. 흥미로운 점은 제시가 생각하는 월터와의 관계, 월터가 생각하는 제시와의 관계는 서로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제시를 월터가 이용한다는 점은 전제는 공통이다. 하지만 월터가 자신을 단순하게 조종하고 착취한다고 생각하는 제시와 달리, 월터는 제시와의 관계에서 유사 부자 관계를 느낀다. 그러나 가족에게 자신의 범죄를 숨겨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나 잘하는 것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월터는 제시와의 관계를 더 특별하게 생각한다. 

월터와 제시의 관계는 일종의 '나르시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월터는 자신의 특기를 살리는 모습, 성공해서 돈을 버는 모습, 생존하기 위해 동고동락 모습 등등의 다양한 모습을 제시에게 투영하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에서 제시에게 최선을 선택하여 제시를 조종하려 한다. 하지만 제시가 자신의 예측과 다른 형태로 행동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특히 마지막 시즌에서 제시가 행크와 협력해서 월터를 몰아붙이는 걸 알아채는 부분), 가족과의 관계보다 월터와 제시의 관계가 더 깊은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브레이킹 배드가 훌륭한 점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 중산층이 맞딱뜨리는 일상적인 장면들과 엮어서 영상을 잘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견 무의미해보이는 도입부의 영상들이 그 화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요한 소재라는 점, 그리고 현란하거나 자극적인 요소들 없이 극을 끌어가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만하다. 이러한 강점이 두드러지는 부분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못느끼고 공허함을 느끼는 제시의 방탕한 삶을 파티 문화나 게임, 음악 등의 다양한 대중문화와 교차하여 직조하는 부분이다. 단순히 피상적인 인용이 아닌 피폐해져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대중문화를 엮어내는 장면에서 브레이킹 배드는 서사 뿐만 아니라 영상과 연출 측면에서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결론적으로 브레이킹 배드는 드라마라는 매체에서 얻을 수 있는 높은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즌 5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나의 짜임새 있는 모양새로 드라마를 만든 것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지만,  그 짜임새가 범죄와 도덕, 중산층, 대중문화, 사회의 흐름을 모두 함께 엮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그렇기에 브레이킹 배드는 드라마를 본다면 꼭 봐야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도입부, 영화는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어린이 피해자들에 대한 통계를 담담하게 읊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전쟁이라는 폭력을 가하는 어른, 그리고 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 어린이라는 도식적인 구도를 구축한다. 이 구도는 익숙한 클리셰이자 대중문화나 이야기를 넘어서 현대 사회의 도덕율을 관통하는 구도다. 그 도덕율이란 먼저 온 자들이 뒤에 올 세대들을 보호하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끔 배려하는 것이다. 이 도덕율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새로 사회로 들어온 자들이 사회를 채울 수 없을 것이고 사회는 점차 말라 시들어 죽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가 현대적인 것이기도 하다:상대적으로 영아 생존율이 낮고, 노동하는 청장년 계층이 나이 어린 세대원보다 더 중시되는 근대 이전 시대에는 이러한 도덕율과 감수성이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기 어려운 시대라도 '부녀자'를 쉽게 죽이는 관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이를 손쉽게 살육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좀 더 정확하게 짚자면 아녀자를 죽이는 대신 노예로 삼는 일이 더 흔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전과 수명의 연장, 생산력의 증대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어린이라는 약자를 보호하는 도덕율이 틀을 갖추고 당위성을 강하게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누가 어린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위와 같은 현대적인 도덕율과 딜레마(실제로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따르고 있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전설적인 영화 이후, 많은 수의 좀비물들(모든 좀비물은 아니다, 몇몇 좀비물들에서 대중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은 산업 사회와 도시 문명의 도래 이후 등장한 '대중과 군중'에 대한 공포를 스펙타클로 다루었다. 대상화된 대중이자 주인공과 관객들로부터 유리된 존재인 좀비들은 그야말로 낯선 사회와 세상의 종말 그 자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좀비물은 좀비(=대중과 현대사회)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가미하면서 다양한 맥락을 쌓아올려왔다.

 

영화는 이 좀비와 군중을 '어린이'로 채워넣으면서 좀비물 장르에 도덕적 딜레마를 뒤섞는다. 어린이 좀비의 존재는 더이상 내가 아닌 대중에 대한 공포가 아닌 '도덕적 딜레마 그 자체'가 된다. 미래세대, 사회의 희망, 그리고 약자 등등,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상당한 터부이며, 심지어 몇몇 대중문화권에서는 자극적이라 여겨 쉽게 다루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그러한 현대적인 도덕율과 아이 살해의 터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 그 자체'다:이미 영화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사회의 붕괴는 사회적인 약자인 어린이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미 아동살해라는 끔찍한 상태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 끔찍한 전제에서 출발하기에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이 충분히 도덕적이지 못한 어른을 심판하는' 소설과 영화 등의 클리셰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 에리히 케스트너가 쓴 동물들의 대회의나 5월 35일 같은 작품이나 좀 더 더 폭을 넓게 본다면 미하엘 엔더의 모모 같은 작품들이 이러한 클리셰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에서 어른들의 악행의 가장 큰 피해자가 어린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는 일견 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절망은 그런 클리셰를 넘어 더 깊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어린이들이 공동체를 구성하여 어른을 죽이는 괴현상에 대한 '트리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몇몇 추측과 감염에 대한 묘사, 마지막 엔딩의 대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 원인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클리셰의 결론과 영화의 내용들이 대치된다는 것이다: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러한 구도의 작품들은 결국 어린이들이 어른을 심판하는 동시에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러한 작품들은 새로운 세대가 어른 세대를 용서하고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가 어른을 죽이는 시퀸스를 구성하는 히스테리컬한 컷과 신경을 긁는 음향 연출, 그 사실에 좌절하는 주인공의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어린이를 죽일 수 없는 주인공의 딜레마를 다루는 연출까지 영화는 그 어떠한 안전장치 없이 헐리웃에서 제작된 공포영화보다도 더욱 더 사람을 몰아붙이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 모든 희망의 가능성조차 버리게 만든다.

 

이러한 극단적인 절망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있다. 영화는 스페인 군부독재 말기에 제작되었고, 군부 독재와 억압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영화에 깊이 깔려있다 할 수 있다. 영화 자체는 그러한 사회적 함의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절망감은 당시 스페인 영화계에 깔려있는 깊고도 강렬한 감정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스페인 시절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일 것이다:종교는 자본가와 결탁하여 카드놀이나 하고, 성체는 모욕당하며, 희망은 없고 파시스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을 쏴죽인다. 영화에는 이러한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당시 스페인 군부의 검열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뜬금없는 좌절감과 절망감들은 극을 일반적인 장르 안전장치 바깥으로까지 밀어붙이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절망감을 그저 감정에서 끝내지 않고 논리적인 구조로 안착시킨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전화 교환원의 죽음을 다루는 시퀸스일 것이다. 이 시퀸스는 교회라는 공간을 죽은 여자의 옷을 들고 춤을 추는 소녀들 - 시신을 성희롱하는 소년들 - 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어린이들로 3등분한다. 영화 내내 보여지는 긴장감 넘치는 구조와 다르게 묘한 맥락을 가지는 이 장면은 추악한 인간의 행동을 초현실적으로 축약하는 부분이다. 교회라는 성스러운 장소 아래서 살해한 타인의 재물을 갈취하고(소녀들), 성에 대한 추잡한 욕망을 드러내며(소년들), 그것을 고해성사하여 퉁치는 모습(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아이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는 행동 자체가 어른들이 하는 행동들, 인간 만마전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어른을 살해하는 어린이의 입을 빌려서 이 모든 것이 '놀이'라고 이야기한다:놀이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 실제를 모방하는 사회적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실제'를 모방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폭력 사용하는 어른들로부터 말이다.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일반적인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인 구도가 아닌, 어른의 폭력이 아이의 폭력으로 대물림되는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세대의 순환고리라 이야기하는 영화의 절망감은 많은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밑바닥이 없는 절망감이다.

 

이러한 절망의 논리구조 아래서, 영화는 전개 내내 이렇게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감과 광기로 인물들을 몰아붙인다. 마치 '이래도 선(아동 살해)을 안넘을래?', '선을 넘어도 답이 있을거 같아?'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붙이는 영화는 많은 대중문화의 금기들을 뛰어넘는다. 주인공을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아이를 쏴죽이고,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의 태아에 의해서 내부에서부터 내장이 찢겨져 나가 죽으며,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은 변해버린 아이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자신만 살아남겠다고 달려나가고, 변해버린 아이들과 싸우며 절규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죽는다. 이 모든 과정들에서 드러나는 절망감과 긴장감은 그 어떠한 희망도 없는 깊은 절망감이다.

 

결론적으로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정말로 훌륭한 호러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공포를 넘어서 '절망감'을 사회적 도덕률과 터부를 이용해서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호러 영화를 좋아하고 기회가 된다면 꼭 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괴물 영화에서 괴물의 본질은 그로테스크함이다.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함은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속성과 맞닿아 있다. H.R.기거가 디자인하고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에이리언의 제노모프가 성기와 삽입, 섹스, 생명의 재창조에 대한 기괴한 은유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 기괴한 은유는 필연적으로 고전적인 괴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대적인 에너지의 폭발에 기반한다. 고전적인 괴물이 동물과 인간을 섞거나 동물을 재해석함으로써 동물이 갖고 있는 특수성에 주목하였다면, 현대 영화 매체의 괴물들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산업화되고 재생산된 기괴함,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욕망과 공포에 주목한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두 영화, 그들Them!(1954)과 그것은 살아있다It's Alive(1974)이다. 20년의 텀을 두고 세상에 나온 괴물 영화는 서로 다른 공포(방사능 오염과 유전자 변이에 대한 공포 vs 탈리도마이드와 기형 임신, 중산층의 사회적 위신을 둘러싼 불안과 공포)가 각각의 괴물(거대화된 거미와 살인 괴물 아기)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서로 소재와 내용, 연출 톤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 LA의 하수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묘한 접점을 갖는다. 마치 거대한 도시의 아래 구불구불 꼬여 있는 내장과도 같은 하수도를 해매며, 두 영화에서 인물들은 가장 내밀한 공포와 마주한다.

 

먼저 그들Them!(1954)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는 명백히도 원자력 시대의 도래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공포를 다루는 방식일 것이다. 핵실험이 있었던 뉴 맥시코의 사막에서 대서양으로, 그리고 LA의 하수도에 도착하기 까지, 영화는 논리적인 흐름과 판단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감정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다. 거대 개미를 추적하는 과정은 합리적인 추론이며, 정부는 핵실험의 실수를 숨기는데 전전긍긍하기 보다는 대중에게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를 전달하며 계엄령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일반적인 공포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이 괴물 그 자체였다면, 영화 그들에서 공포의 대상은 거대 개미가 아닌 다른 무언가이다. LA 하수도에서 마지막 여왕 개미의 알집을 태우면서 그들은 핵실험의 영향이 얼마나 클지, 어째서 개미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되묻는다. 거대한 개미가 나올 수 있다면, 거대한 전갈도, 아니면 다른 이상한 무언가도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미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즉, 영화에서 근본적인 공포는 마지막 박사의 표현대로 바로 새로운 시대인 원자력 시대에 대한 공포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대처하더라도,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대가 도래했다. 불타는 여왕 개미의 알집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표정은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에 어떤 재앙이 올지 모르는 사람들의 막연한 절망감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에 반해서 그것은 살아있다It's Alive는 좀 더 내밀하지만 사회적인 공포에 주목한다. 임산부 입덧을 막기 위해서 산모들이 먹었던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를 만들어냈었던 사건에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중산층 가정이 살인 기형아를 낳았을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주목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살인 기형아를 둘러싼 이야기가 개개인의 드라마가 아닌 사회적인 욕망이라는 것이다:살인 기형아를 낳은 아버지는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생각해 기형아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며 심지어 자신의 자식인 기형아를 직접 자기손으로 죽이려 한다. 중산층이 소비하는 다양한 약물을 만드는 제약회사는 기형아 아이가 자신들의 약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게 밝혀지는게 두려워 살인 기형아를 완전히 박살내버릴 것을 경찰 반장에게 은밀하게 제안하기도 한다. 결국 살인 기형아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사회적 욕망들이 충돌한다.

 

그것은 살아있다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정 자체를 마치 사실을 다루는 듯한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는 극적인 연출과 감정을 고조할만한 이야기와 극의 장치들을 최대한 억누른다. 그 결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요하지만 그 속에서는 휘몰아치는 다양한 사회적 욕망들의 소용돌이다. 객관적으로 연출되는 이들의 욕망은 관객에게 이입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과 달리 그것은 살아있다는 영화가 더 차분한 동시에 끓어오른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기형아의 아버지는 LA 하수도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자식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하지 못했었던 내밀한 고백을 한다. 기형아 역시도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을 인정한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을 안고 자식을 죽이려는 경찰을 피해 배배꼬인 하수도 통로를 해맨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솔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없고, 자식은 경찰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일이 시애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끝을 낸다. 기형아에 대한 두려함, 중산층의 사회적 지위와 허영을 둘러싼 공포가 단순히 그들만의 것이 아닌 당시 미국사회가 공유하던 것임을 암시하면서 말이다.

 

영화 그들과 그것은 살아있다는 서로 다른 욕망과 공포, 연출 방식을 통해서 각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그서로 다른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면서 LA 하수도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비슷한 결과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들에서 하수도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여정의 종착지로, 그것이 살아있다에서 하수도는 사회적 위신과 욕망을 뒤로한채 괴물이 된 자신의 자식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인물들은 공포의 본질과 대면한다. 마치 다양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도시의 거대한 창자 속에서 말이다. 두 영화는 모두 그런 점에서 훌륭한 괴물영화라 할 수 있다. 괴물과 인간의 공포,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함이라는 본질을 정확하게 궤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서부극에서 서부라는 공간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존 포드의 서부극인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를 예로 들어보자: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서부는 낭만과 자유가 넘치는 공간이 아닌, 법 바깥에서 착실한 사람들이 무법자들에게 고통받는 공간이다. 하지만 인디언에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까지, 모두에게 열려있는 기회의 땅,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공간에서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울타리, 법을 만드는 일이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서부라는 공간은 양가적인 감수성을 지닌다. 역사의 어둠도 존재하지만 그 어둠에 빛이 비추어지면서(마치 리버티 벨런스를 쏘는 그 장면이 다시 한번 재해석 되듯이) 새로운 맥락을 갖게 되는 것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좋았던 그 때를 반추하는 것처럼 말이다.

 

서부라는 공간이 어떻게 비추어지는가는 창작자들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안소니 만과 같이 흥미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는 감독도 없었을 것이다. 안소니 만의 서부극에서 서부는 '미지의 공간'이다. 안소니 만의 영화에서 서부에서 모든 소문과 전설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서부의 사나이Man of the West의 예를 보자. 여기서 주인공인 링크 존스는 처음 학교 선생을 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돈을 모아서 떠나는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과거에 악랄한 토빈의 갱단원이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진술로 모호하게 밝혀질 뿐이다:영화 내에서 그 어떠한 사실도 명확하게 확정짓지 않는다. 

 

서부의 사나이의 모호성은 인물들의 진술과 실제 사이의 괴리에 기반한다:링크 존스를 살인자와 악당이라 주장하는 토빈의 진술과 링크 존스의 초반 묘사는 분명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상충된 묘사 그 어느쪽에 무게를 실어주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링크 존스에 대한 직접적인 회상과 묘사를 완벽하게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진술은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있는 회색 영역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토빈의 허황찬란한 은행강도 계획은 다 쓰러져가는 마을과 빈 금고로 거짓되었음을 드러내고, 토빈과 링크 존스의 마지막 결투는 장엄하기 최후라기 보다는 폐허 위에서 이루어지는 난투에 가깝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안소니 만은 서부극이라는 전설을 장엄하고 휘황찬란한 것이 아닌 진실과 이를 둘러싼 알 수 없는 공간으로서의 서부를 다룬다. 안소니 만의 서부극에서 주인공과 이야기들은 사건의 연속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 시작과 결과는 알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진실과 공간, 그리고 시간의 흐름(좀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역사) 사이의 관계가 안소니 만 서부극에서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테마였다는 것이다. 윈체스터 73의 사례를 보자. 이 서부극에서는 윈체스터 73이라는 명총이 다양한 소유주를 거치면서, 서부를 둘러싼 폭력의 역사와 그 속에서 도구가 갖는 의미를 보여주었다. 윈체스터 73의 클라이맥스는 린이 추적하던 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쏜 동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일 것이다. 무법자의 폭력, 원주민과 기병대 간의 폭력,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쏜 아들이라는 근원의 폭력까지,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도구인 윈체스터 73이라는 총기를 통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흥미로운 점은 윈체스터 73에서 이 윈체스터라는 총기가 겪는 일련의 사건이 안소니 만의 서부극의 특질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윈체스터라는 총기는 거대한 맥락의 연속에 놓여있으며, '전체와 분리해서 볼 수 없지만, 동시에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묘한 관점에 놓여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서부의 사나이 같은 안소니 만의 서부극을 설명하는 주요한 기제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감상적인 로맨티시즘이 아닌, 약육강식의 비정함이 존재할 뿐이다. 다른 예인 머나먼 서부의 예를 보자. 여기서 주인공인 제프는 영화의 시작부터 살인죄로 고발되며, 일반적인 영화의 주인공 같이 도덕적으로 무결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법과 제도를 피해서, 서부에서 서부로 움직이며 돈을 버는 이 남자는 그 정체와 기원이 모호하다. 

 

물론, 머나먼 서부는 그래도 윈체스터 73이나 서부의 사나이와 같은 서부 공간에 대한 비정한 시각에만 입각해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마을을 세워서 법의 태두리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리버티 존스를 쏜 사나이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하다. 법과 제도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악역 게넌 보안관과 이를 바라보는 제프와 여주인공의 모습은 법과 제도 바깥인 서부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악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른 예들도 그러하듯이, 이러한 악을 처단하는 것이 머나먼 서부의 메인 플롯이다. 하지만 다른 서부극들과 안소니 만의 서부극이 결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 끝이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부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이러한 사건은 그저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그들의 끝이 행복할지, 아니면 또다른 불행으로 이어질지, 플롯은 명확하게 확답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불확실성이 안소니 만 서부극을 구분짓는 또다른 특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잊을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You can't forgive what you can't forget"

-Arcade Fire, Windowsill

할로윈 밤의 살아 있는 공포이자 레전드로 불리는 ‘마이클 마이어스’, 존재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가 40년 전 그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그녀 ‘로리 스트로드’와 다시 마주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소개)


할로윈 1978은 호러 영화에 있어서 슬래셔 하위 장르를 정의내린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할로윈1978이 살인마를 소재로 다룬 첫번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살인마를 다루는 공포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할로윈1978이 특별한 이유는 살인마 공포라는 장르 자체의 문법을 확립한 데 있다. 살인마의 존재,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희생자들, 그리고 살인마와 주인공의 사투 등 할로윈은 슬래셔 장르 서사 요소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살인마의 등장과 살해 장면, 섹스와 고어를 한 영화 아래 뒤섞는 것도 할로윈을 통해 확립되었다. 하지만 서사 요소나 연출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펜터가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미국 중산층이었다. 조용하지만 어딘가 텅비어있고, 어른은 존재하지 않으며 청소년들이 방탕하게 섹스를 하는 모습을 통해 카펜터는 미국 중산층의 풍경을 마치 종말을 맞이한 폐허처럼 다루었다. 이런 성적 방종을 통해 드러나는 도덕의 붕괴, 기성세대를 대변하여 징벌하는 듯한 살인마, 살아남는 주인공의 순수함 같은 시선은 살인마와 희생자의 관계에 대한 장르적 표본이었다. 그리고 할로윈의 통찰 이후로, 수많은 영화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장르를 따라갔다. 과거를 넘어서 미래에 일어날 장르적 특색을 먼저 정리한 작품이 할로윈이었다.

할로윈1978의 영화적 의미 이외에도 영화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수많은 속편과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영화는 원본의 완성도를 따라가지 못하였고, 영화는 주기적으로 리부트를 반복하면서 설정을 뒤집고 과거의 영광을 되세김질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 할로윈 레저렉션(2018)이 등장하였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프랜차이즈가 걸어온 모든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이 할로윈 1편 이후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직계혈통임을 자처하였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영화는 그만한 성공과 평단의 호응을 끌어냈다.

유념해야하는 점은 할로윈 레저렉션은 애시당초에 원작을 뛰어넘고자 하는 작품이 아니다. 영화의 큰 서사 구조인 '마이클의 탈출 - 살인 - 로리 스트로드와의 마지막 결전'은 이미 1978에 완성된 구조였다. 또한 영화의 많은 컷들과 소품의 배치, 이야기의 전개, 심지어 살인 방식까지 할로윈 프랜차이즈 전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치 더 씽2011과 같이 큰 구조와 컷 등을 가져오면서 그 속에다 감독 자신만의 영화적인 해석을 붙이는, 속된 말로 하면 팬메이드 무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씽 2011이 더 씽1982의 안주하여 프리퀼이란 지루한 아이디어에 사로잡혔다면, 할로윈 레저렉션은 원작에서 보지 못했었던 새로운 맥락과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할로윈의 특이성은 모든 슬래셔 영화의 원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점에는 마이클 마이어스라는 인물이 있다. 요즘같이 살인마들에게 구구절절한 사연과 슈퍼스타나 가질법한 개성이 붙어서 따라다니는 시대에 마이클 마이어스라는 살인마는 대단히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할로윈1978에서 마이클 마이어스는 순수한 악이다. 그는 기원도 없다, 동기도 없다, 심지어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하얀색 가면 밑에서 후욱 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인 마이클 마이어스는 불가해하며 순수한 악의 존재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렇게 '추상적인 악역'은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극에서 붕 뜨거나 난잡한 설정이 붙기 쉽다. 그러나 존 카펜터는 그러한 불가해한 악을 훌륭하게 스크린으로 옮겼다:어딘가 폐허를 연상시키는 미국 중산층 주택가의 어두운 그림자 처럼 스며들어간 마이클의 존재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 존재했었던 것 같은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렇기에 '거기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악'을 카메라 연출과 음악으로 잡아낸 존 카펜터는 순수한 악이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레저렉션2018은 어떠한가? 큰 틀에서 레저렉션은 1978에 대한 데칼코나미다: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카메라 워크, 연출, 음악 사용(존 카펜터 본인이 직접 참여한) 등이 원작에 참조를 두고 있다. 하지만 2018은 여기에 '40년의 시간'이란 맥락을 배치한다. 그리고 영화는 영리하게도 '순수한 악으로부터 살아남은 피해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라는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마이클 마이어스가 순수한 악이었다면, 그로부터 살아남은 로리 스트로드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이 시대에 순수한 악이란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영화는 변화한 시대상과 생존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서사를 이끌어낸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순수한 악이란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프로파일링과 과학적 수사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살인마가 그저 순수한 악이나 공포가 아닌 뒤틀린 모티브를 가진 퇴행적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 살인마는 슈퍼스타인 것처럼 팬들을 갖고 있고 하나의 가십거리 처럼 소비된다.(첫 시퀸스에 등장하는 영국인 팟캐스트 방송자 둘을 보라) 마이클은 이제 평범한 고등학생 총기 난사범의 킬카운트도 못따라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째서 사틴 박사나 저널리스트들은 마이클에 매료될까. 그것은 바로 마이클이 순수한 악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모든 살인마는 동기를, 자신만의 수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마이클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자신을 대변하려 하지도 않고, 변호하려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거기 있고, 살인을 할 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이클의 살인 장면을 연출하는 방법일 것이다:영화는 슬래셔 영화에서 자주 보여지는 과장된 살인 방법이나 생존자의 사투같은 장면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마이클이 어떻게 평범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 평범한 일상의 도구로 인간들을 참살하는가를 롱테이크로 다뤄내고 있다. 일상의 삶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 삶이 드리우는 그림자에 조용히 침입하여 삶을 파괴하는 마이클의 존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악의 존재를 다룬다. 이런 점에서 2018년 버전은 1978의 종말론적인 풍경과는 다르지만, 일상에 자연스럽게 침투하는 모습을 드러낸 점에서 마이클의 무서움을 잘 다루었다.

그 다음으로 봐야하는 것은 생존자에 대한 재해석이다. 악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악에 메일 수 밖에 없다:악에 대한 공포, 그로 인해 파괴되는 삶. 악과 생존자는 강력한 인과관계로 묶여있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로리 스트로드에게 집착할 수 밖에 없다. 로리는 마이클에게 있어서 완성시키지 못한 하나의 퍼즐 조각이다. 그 완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40년의 집착을, 순수하고 완벽한 악 그 자체를 보통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노인들만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순수한 악에 대한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타협할 수 없는 악이 있기에 그것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악이 있다는 것을 목도한 로리 스트로드의 삶은 망가졌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에 상흔을 남긴 마이클에 없애고자 한다. 희생자는 더이상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악이 있다면, 그것은 파괴해야 한다. 구세대적인 이분법이지만, 1978년 할로윈과 2018년의 할로윈은 40년이란 시간의 간극을 통해서 이 당위성에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해방과 역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악이 존재하더라도, 생존자는 더이상 무력하게 당하지 않는다. 생존자는 공포에 사로잡혀있지만, 동시에 사명감으로 함께 준비되었다. 최근 슬래셔 영화에서 피해자가 역으로 살인마를 떄려눕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할로윈 2018는 무려 40년을 기다리고 준비해왔던 생존자의 복수극이다. 살인마가 언제 무력한 생존자를 덮칠 지를 보는 것이 아닌, 준비된 주인공과 살인마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을 할로윈 2018은 다루고 있다:마이클이 목을 조르면 로리는 산탄총으로 마이클의 손가락을 날려버리고, 붙잡히면 칼로 찌르는 등등 40년 전 똑같은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이(물론 마이클은 대역을 쓰긴 했지만, 진짜 마이클 역을 맡은 배우도 영화에 출현하긴 하였다) 다시 엎치락 뒤치락하는 장면들은 장르의 팬으로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절정은 로리가 시리즈의 역사를 그대로 마이클에게 되갚아 주는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마이클과 로리가 싸우다가 로리가 창밖으로 떨어지고, 마이클이 한 눈을 판 사이 사라지는 장면은 할로윈1978의 엔딩 장면을 역할만 그대로 바꿔서 되갚은 것이다. 더 나아가 마이클의 뒤 그림자 속에 숨은 로리가 스팟라이트를 받으면서 튀어나오는 장면은 1978년 작품의 마이클 등장 장면을 역전한 것이다. 더이상 생존자가 무기력하게 당하고 생존 '당하는' 것이 아닌,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악을 처단하는 도식을 만들어낸다. 과잉이긴 하지만 살인마가 살인을 벌이는 공간인 집에 대한 재해석도 눈에 띈다. 쇠창살 등으로 막혀있는 로리의 집은 마치 맹수인 살인마와 주인공을 한데 가둬놓는 우리cage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그것은 살인마를 유인하고 가둬서 끝장내기 위한 준비된 함정trap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모든 것은 살인마에게 되갚아주기 위한 것들이었다.

결론적으로 할로윈 레저렉션은 원작에 대한 존경과 함께, 40년의 간극을 자기만의 재해석으로 채워넣은 훌륭한 작품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닌, 2편의 속편을 더 만들겠다는 영화사의 발표다. 할로윈 레저렉션은 그 자체로 완결된 영화였다. 거기다 새로운 무언가를 붙이는 건 사족이다. 하지만 사족이 붙더라도, 이 영화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빛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1 2 3 4 5 6 ··· 39
블로그 이미지

IT'S BUSINESS TIME!-PUG PUG PUG

Leviat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