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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안녕 소년! 난 간지 브래드라고 한다!)

에...'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오늘 친구와 함께 보고 왔습니다.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참 복잡 미묘한 작품이더군요. 주된 내용은 80세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점점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밴자민 버튼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밴자민 버튼의 일생 을 그려내면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죠.

사실, 영화 티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저는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은 기대를 했었습니다. 일단 세븐, 조디악 감독인 데이빗 핀처의 신작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그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인생에 대한 깊은 우화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에서는 그러한 상황 자체가 제가 기대한 것과 반대로 다가오더군요.

벤자민 버튼은 80세의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그의 정신은 평범한 사람의 정신과 똑같습니다. 나이를 역으로 먹는다는 상황을 제외 한다면요. 즉, 일반적인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벤자민 버튼이 젊어지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그 상황에서 오는 메리트를 잃어버리고 평범한 인생 역정극이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가 사실 정방향으로 필름을 찍은 것을 역순으로 배열해서 특이한 효과를 도출해놓은 사실을 알고, 이를 머릿속에서 다시 재편집을 해서 정방향으로 놓았을 때 슬픈 블랙 코미디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 처럼요. 뭐, 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코미디 영화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의 상황이 가지는 특징은 그의 인생이 의외로 평범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 빛을 바랩니다.

물론 벤자민 버튼이 그가 가지는 특수한 상황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특수한 상황은 그에게 인생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하지만 의외로 벤자민 버튼이 그의 특징으로 인해서 바깥 세상과 갈등하는 부분은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주변 사람들을 잘 둔 탓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사건이나 고난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의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대단히 축복받은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벤자민 버튼의 인생이 그의 특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늙어지는데, 자기 혼자만 젊어지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젊어지는 대상이 브래드 피트라는 점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는 연기를 잘 합니다. 인생 경험이 많은 눈빛을 보여준다던가 등은 좋았는데, 이 사람이 뭘 하면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문제입니다(......) 20대를 넘어서면서(겉 나이로는 50~60), 이 사람이 옷을 입고 다니는게 완전히 어디 광고에 나올법한 이미지와 포스를 풍기면서 나오기 시작하면 '아 이거 좀 아닌데?' 싶더군요. 즉, 브레드 피트의 연기 보다는 그가 풍기는 오라가 작품에 안 어울린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밴자민 버튼이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밴자민 버튼'이 아니라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광고 선전에 나올 법한 브레드 피트'로 보여진다는 거죠(안젤리나 졸리는 '체인즐링'에서 자기 이미지를 죽이는데 성공했는데, 반성해라 브레드 피트!)

영화 내의 화면 구성이나 이미지 등은 적절합니다. 담담하고 차분하며 현실적인 분위기죠. 다만 문제는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의 독특한 상황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합니다. 상황도 상황인데, 좀 초현실적인 이미지나 분위기로 나가도 솔직히 좀 상관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니까요. 동화적인 부분과 현실적인 부분, 그 양쪽 경계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묘한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참 보는 사람도 복잡 미묘한 느낌을 들게 만들더군요. 인생에 대한 이미지나 동화적인 느낌을 잔뜩 집어넣고 벤자민 버튼의 특수한 상황을 잘 살려서 동화적인 작품을 만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특수한 상황이 고난과 역경이 되어서 이를 넘어서는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비교적 축복받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으니, 이 둘 중 하나를 기대하고 본 사람으로써는 미묘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영화가 완전히 망쳐졌다던가 이상한 작품이 된건 아닙니다. 영화는 '당신의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의 삶을 살아라'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었겠죠.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과정이 별다른 감흥이 없게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극심히 갈릴 영화라고 생각은 됩니다만, 일단 저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식령 제로는 동명의 라이트 노벨인 식령의 이전 시간대를 다루고 있는 프리퀼 작품입니다. 많은 작품에서 써먹은 '퇴마'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한 작품인 식령 제로는 자칫 잘못하면 그렇고 그런 평범한 작품이 될 뻔하지만, 이러한 클리셰를 탄탄한 시나리오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주 내용은 퇴마사 가문에 태어나서 사상 최강의 식령 백예를 봉인하는 퇴마사 집안 츠지미야 가에 태어난 숙명을 이어가는 츠지미야 카구라라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애니의 주 내용은 '평범한 소녀 였던 카구라가 어떻게 퇴마사로 거듭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습니다.

애니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현재-과거-현재라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런 구조는 여기 저기서 많이 써먹는 구조이기도 하죠. 애니의 처음, 애니는 퇴마사 동료들을 배신한 요미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요미의 변절을 카구라는 받아들이지 못하죠. 여기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요미와 카구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요미는 왜 변절 하였는가? 이런 식의 질문을 시작하면서 던지는 것이죠.

초반 이후에는 카구라와 요미, 이 둘의 행복한 순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초반의 비극적인 부분을 강화합니다. 그 내용만으로는 도대체 왜 초반에 요미가 카구라를 증오하는지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왜 증오하는지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같은 목표를 보고, 서로를 친 가족처럼 감싸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그들의 엇갈릴 이유는 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파고들 틈이 없는 그 관계를 단 한순간에 반전시키고, 요미라는 인물을 타락시키면서 애니는 결말로 다다르게 됩니다.

애니가 막바지에 이를 때, 요미는 그녀의 인생 자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도저히 겉잡을 수 없이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이사야마 가의 후계자를 빼앗기고, 아버지가 맡긴 사자왕을 빼앗기고, 마지막으로 약혼자인 노리유키가 떠나게 됩니다. 그녀의 인생을 완벽하게 박살이 난 셈이지요. 이는 모두 살생석이 요미를 더 이상 이사야먀 요미가 아닌 살생석에 이끌여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기 위한 책략인 것입니다. 초반의 행복했던 그녀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그녀의 비극을 심화시키죠. 그리고 그러한 책략은 그녀를 약하게 하고, 그 틈을 파고 들자는 살생석의 계략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결국, 요미는 살생석의 유혹을 못이겨 괴물이 됩니다.

그와 반대로 애니의 초중반, 카구라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것들을 없애고,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퇴마사의 의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는 그저 평범한 소녀입니다. 임무 중에 스쳐지나간 여자가 자살해서 망령이 되자 그녀를 똑바로 베지 못하고, 좋아했던 양호실 선생에 망량이 붙어서 카테고리 D가 된 것을 죽였을 때, 그녀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죠. 그리고 퇴마사인 아버지를 받아들이는데 껄끄러워 합니다.

하지만 요미가 괴물이 되고, 요미에 의해서 아버지가 죽게 되자 카구라는 퇴마사인 아버지와 자신의 사명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자신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숙명,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점을요. 결국 카구라는 요미를 죽이고 퇴마사로 거듭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요미는 그녀의 중요한 것들을 잃게 되죠. 그리고 그러한 비애와 슬픔을 짊어지게 됩니다.

식령 제로는 이러한 비극의 탄생 과정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평범한 소녀ㅡ언니를 사랑하고, 친구와 어울리고 싶으며, 과자 먹는 것을 좋아하는ㅡ가 비극적인 숙명을 받아들이고 퇴마사가 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또한 카구라가 퇴마사가 되면서, 그녀의 인생이 전과 다르게 되었는가 라는 점도 잘 보여줍니다. 요미를 베어버린 카구라에게 있어서, 요미를 베기 전과 베고 난 후의 인생은 도저히 같을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식령 제로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시나리오의 완급도 훌륭하며, 이야기에 있어서 군더더기도 없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케릭터의 행동과 그 동기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작품 자체로는 완결성이 없다는 점ㅡ물론 카구라가 퇴마사가 되는 동기는 설명하지만, 구미호와 살생석에 대한 이야기는 완결성이 없으니ㅡ에서 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원작 이전의 프리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따라서 식령 제로는 괜찮은 작품입니다. 식령 제로 때문에 원작 식령을 읽고 싶어질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죠.

덧. 저는 Blood+가 이런 구조를 따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2.술 마시고 머리가 어질어질 한 상태에서 쓴 리뷰입니다.
좀 이상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인 체인질링을 보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느 블로그에서 '밀양의 대척점에 있는 영화'라고 해서 관심이 생겼습니다. 솔직히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어렸을 때 본 용서받지 못할 자(The Unforgiven)의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본적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뭐, 같이 간 가족들은 또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타일의 영화라고 평을 합니다만, 저는 그 차분한 분위기가 좋더군요.

영화는 실종되었던 자신의 아이가 실종된지 몇달만에 다른 아이로 바뀌어져 돌아온 싱글맘 크리스틴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영화는 주인공인 크리스틴이 자기 자식을 되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여타 영화들과는 달리 이 과정이 대단히 담담하게 표현됩니다. 크리스티는 대단히 극한의 상황ㅡ경찰은 그녀, 경찰에게 대들었다고 정신병원도 가고, 실종된 아들은 사실 연쇄살인범이 납치해서 죽이기 까지ㅡ에서의 감정은 담담하면서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어머니 VS 온 세상'의 대립구도를 보여주는데, 온 세상이 '그 놈이 니 아들이다 or 아들은 죽었다 받아들여라'라고 어머니에게 압박을 가하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어찌보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단히 답답한(혹은 애처로운)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심정을 신파적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또다른 특징은 당연 섹시 스타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 변신입니다. 솔직히 작년의 원티드(Wanted, 2008)를 생각하면 '이사람이 그사람인가?'라고 느껴질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1930년대의 능력있는 싱글맘의 모습이더군요. 부모님은 영화속 크리스틴 '안젤리나 졸리 많이 늙었네'라고 하셨지만, 저는 '안젤리나 졸리가 배우로서의 관록이 붙었다'라고 이야기 하고 싶군요. 영화 내에서 드러나는 배우의 오라는 단순한 분장이나 특수효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경험과 몰입에서 우러나옵니다. 체인질링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그러한 크리스틴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습니다. 특히 정신병원에서 겨우 나오고 난 뒤 자신의 자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쯤 넉이 나간 모습을 단지 버스 차장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는 부분은 압권이더군요.

하여간, 대단히 좋은 작품입니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지루하지 않으면서 자극적이지 않고, 드라마도 좋으니까요. 원래 처음 미국에 나왔을 때 꽤나 악평을 들었는데, 왜 그런 평이 나왔는지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이런 잔잔한 드라마를 보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군요 ㅎㅎ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원래는 감상예정에 들어있지 않은 작품입니다만, 어쩌다 보니 가족 극장으로 부모님과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가 감상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두 번째 작품(첫번째는 이스턴 프라미스)인데,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작품입니다. 당시 1980년대에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서부터 주제나 이를 표현하는 방식까지 지금 봐도 놀랍다고 할 수 있더군요.

영화는 포르노 TV 체널을 운영하고 있는 맥스가 비디오드롬이라는 스너프(실제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영상물)를 보게 되면서 환상을 보게 되고, 그의 인생이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보여줍니다. 처음 주인공인 맥스가 이 스너프 프로그램인 비디오드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비디오드롬이 대단히 자극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대로의 이루어지는 허구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 후, 그가 비디오드롬이 극본이나 각본대로 연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스너프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왜 그런 모험을 하는거지? 가짜로 하는 것이 실제보다 덜 위험하고 비용이 덜 들잖아?"

영화 내에서 비디오드롬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스너프가 아니라 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철학은 바로 '더 강한 자극'입니다. 즉, 스너프라는 그 살인의 기록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목적인 더 강한 자극입니다. 브라이언 오블리비언(Oblivion, 망각이라는 의미입니다.) 교수는 이를 텔레비전과 결부시켜 '텔레비전은 인간의 망막이며, 그것은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이다.'라고 암시를 하죠. 그리고 TV에서 일어나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오감과 다른 인간이 새로운 감각이 될 것이며 비디오드롬은 그러한 새로운 감각을 위한 자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인간의 새로운 자극은 인간을 실제와 환상, 이 둘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주어진 프로그램(테이프, 비디오드롬)에 순응하는 광신도적인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더 강한 자극'은 주인공인 맥스의 신체와 기계의 결합으로 이어집니다(총과 손의 결합, 그리고 비디오와 인간의 결합) 애시당초부터 인간은 그러한 자극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그러한 자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새로운 감각을 수용하는 과정입니다. 거기에 이러한 비디오를 위시한 새로운 매체들, 이것이 기술의 발전에서 왔다는 것과 인간과 기계의 이질적인 결합은 결과적 인간을 파괴할 수 밖에 없다는 크로넨버그 감독의 지론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계와 결합한 주인공은 처음에는 베리의 명령을 따르다가, 오블리비언 교수의 딸에 의해서 프로그램이 바뀌니까 역으로 베리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은 기계와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성이 사라지고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인간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감각 기관과 정보 능력을 확장시키는 미디어라는 새로운 기계 감각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러한 담론이 대단히 발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놀라운 주제는 아니지만, 20년전 비디오라는 매체가 점점 보급되기 시작하였을 때 크로넨버그는 이러한 혜안을 가지고 기술 문명을 경계한 점은 대단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 무너지는 과정과 그 폭력을 자극적이지 않지만 대단히 인상깊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아버립니다. 총에서 기계가 자라나서 주인공의 팔과 결합하는 부분, 주인공의 배에 비디오 데크가 생기는 것 등은 그런 부분을 잘 보여주는 대단히 인상깊은 장면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맥스가 스스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Long Live With New Flesh"이라 말하고 자살합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성이 없어진 인간은 스스로 자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먹힌다는 것이 더 무섭네요.


덧.글이 너무 길어지는거 같아서 그냥 갈아엎은 글입니다. 뭔가 많이 부족한듯;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전거 선수지만 형보다는 뛰어나지 못했고, 군대를 갔다왔더니 형이 자신의 애인을 차지하였습니다. 게다가 고향은 답답하고 따분하며 지루하며 메마른 토지밖에 없는 절망적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을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타지에서 자전거 선수가 되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자전거 경주 중에 자신의 고향을 지나게 됩니다. 하필이면 그 날이 자기 예전 애인과 형의 결혼날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는 '저 놈 잘라버려'라는 스폰서의 말을 듣습니다. 게다가 우리편을 이기게 하기 위해 도발하러 앞으로 나섰다가, 우리편은 중도탈락하고 자신이 가장 선두에 서서 후발 그룹에게 쫒기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은 그런 사면초가의 기묘한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귀향을 하게 된 자전거 선수 페페의 이야기입니다.  

-이 애니의 가장 멋진점은 자전거 경주와 페페의 상황과 과거가 한데 어우러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페페의 상황은 철저하게 페페의 외부의 관점에서 설명됩니다. 예전 고향에서 페페에게 있었던 일들을 다른 제 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서 페페의 자전거 경주 장면을 보여줍니다. 페페 자신이 과거의 있었던 일을 직접적으로 회상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 인물들이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페페의 심경 또한 이러하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거죠. 게다가 자전거 경주가 점점 치열해지면서 우리는 페페가 과거에 자기보다 더 뛰어난 형에 대한 일종의 컴플랙스와 애인을 빼앗긴 것에 대한 어떤 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자전거 레이스는 절정에 치닫게 됩니다. 

-안달루시아로 돌아오는 레이스에서 페페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진짜 돌아가기 싫은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사실 날짜 타이밍도 안좋게 자기 전 애인과 형이 결혼하는 날에 고향으로 들어오는 레이스를 한다면 더더욱 싫겠죠. 자기가 고향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니까요. 거기에 자신을 자르라는 스폰서와 우리편을 이기기 위해서 도발하러 앞으로 나갔다가 맨 앞에 혼자 서서 온갖 레이서들에게 추격을 받게 된다면 아마 그건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이 마치 인생에 대한 비유같이 느껴졌습니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피하고 싶은 기억이나 추억이 있습니다. 페페 에게는 그것이 자기 고향, 안달루시아라는 공간이죠. 그리고 그러한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여기에 자기 인생의 최악의 순간들이 겹칠 때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냥 다 때려치고 포기할까요? 망연자실하고 대충 행동할까요? 아닙니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마치 레이스 처럼,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닥쳐와도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페페의 배경을 시청자들이 이해하게되는 그 순간, 페페는 마지막 구간에 들어가고 애니는 클라이맥스에 들어갑니다. 마치 그의 갈등 또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듯이 말이죠. 그리고 자전거 레이스는 끝이 나고 페페는 가까스로 1등을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힘든 순간이 있고 그걸 극복하고 난 다음에는 그 순간은 하나의 추억이 됩니다. 페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고향이라는 공간과 자전거 레이스라는 경험이었겠죠. 하지만 페페 자신은 고향을 버리고 자전거 선수가 되었지만, 고향은 그를 따스하게 맞아줍니다. 마치 고향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의 한 구절인 '그대를 기다리는 고향, 아무것도 없는 고향 안달루시아'처럼 말이죠. 그리고 페페는 자신의 고향과 과거를 받아들입니다. 뭐, 엄밀히 이야기해서 그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이 고향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는ㅡ애인과의 이별 후의 페페가 언덕에 오르고 나서 행동을 보았을 때ㅡ 사실 자체인 것이죠. 결국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순간(자전거 레이스 중의 해프닝)과 부정하고 싶은 공간(형과 전 애인이 결혼한 공간인 고향)은 그에게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아닌, 흑백 사진과 같은 추억이 됩니다.

후에 그는 계속되는 레이스 중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서 자기 고향 안달루시아의 명물인 가지 절임과 와인을 맛있게 먹습니다. 뭐, 페페 나름대로의 과거와 현재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나 싶군요^^


덧.이 작품은 2003년 칸느 영화제 비경쟁 부분에 나갔다는군요.
덧2. 지브리 제작의 작화 스타일이 느껴지더군요.
덧3.어떤 의미로는 대단히 향토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덧4.술마시고 리뷰쓰기는 처음이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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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쌍둥이 백합물이 아닙니다)

1999년 건담의 창시자인 토미노 옹이 다시 감독을 맡은 건담 시리즈입니다. 칸노 요코 음악, 스타워즈 메카닉 디자인의 시드 미드, 그리고 건담의 창시자이자 디렉터인 토미노 옹 등의 드림팀이 모여서 만든 작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턴에이 건담은 건담 중에서도 이질적인(G건담을 포함해서), 그리고 일본 애니 중에서도 이질적인 특이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 명작 동화-건담편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건담이 다른 건담에 비해서 얼마나 이질적인 작품인지는 토미노 옹이 칸노 요코에게 음악을 주문 할 때의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데,

토미노 : 남자와 여자 뒤에 숨겨져있는 그 호모라던가 레즈비언 같은 느낌을
품고있는 유전자가 암약하는 듯한 느낌의 곡을 만들어줘.

.....그거 이외에도 턴에이 건담은 대단히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일본 애니 특유의 미형 작화에서 벗어난 듯한 작화, 팔아먹으려고 만들어낸 것 같지는 메카닉 디자인,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천성적으로 착하다는 성선설적 입장, 그리고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인물 설정 등은 건담 시리즈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애니에서도 벗어난 듯한 느낌입니다. 결과적으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동화적이면서 전설적인 독특한 애니입니다.

이 애니는 보통 건담 시리즈가 그러하듯이 반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전이라는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크게 두가지 장치를 이용하는데, 하나는 서로 닮은 외모를 지닌 지구측의 키엘 하임과 문레이스 측의 디아나 소렐 간의 관계이고 두번째는 과거의 거대한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하였다는 전설을 통해서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장치를 이용합니다. 특히 디아나 소렐과 키엘 하임의 관계는 '두 사람이 하나, 한 사람이 두사람'이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서로의 입장-지구와 문레이스-을 이해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사람이 디아나 소렐, 이 사람이 키엘 하임'이라고 구분 지을 수 있었지만, 점점 애니가 진행되면서 둘의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어쩌면 디아나 소렐과 키엘 하임으로 대표되는 지구와 문레이스가 융합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애니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주인공은 로랑 셰아크와 턴에이 건담이 아니라 키엘 하임과 디아나 소렐, 이 둘이라고 할 수 있죠.

결과적으로 만족스런 작품입니다. 문제점이 있다면 너무 이야기의 완급이 없기 때문에 빠져들어가면서 보기는 무리가 있다는 점 정도? 솔직히 오랫동안 보기는 보았지만, 아직까지 3/4밖에 못보았다는 점이 이런 문제점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메카닉 탈춤. 에헤라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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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적절하다....)




-국내 비디오 버전(삭제 버전) 뒤에는 이렇게 써져 있습니다.

"이걸 끝까지 다 본다면 당신은 악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걸 끝까지 깔깔 거리면서 다 봤습니다. 악마 인증(.......)

-피터 잭슨이 유명해지기 전, 뉴질랜드에서 B급 고어 영화들을 찍었다는 것은 영화계에 일종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고무인간의 최후, 데드 얼라이브, 피블스를 만나요 등 그의 뉴질랜드 시절 영화들은 프라이트너로 헐리웃에 엉망으로 상륙(.....)하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팬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피터 잭슨표의 B급 고어 영화로 알려진 작품들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라면 당연히 '데드 얼라이브' 끼게 되는데(개인적으로 피블스를 만나요 도 대단한 작품이라 보지만), 당시 나온 좀비 영화 중에서는 강한 묘사로 나름 악명이 높은 작품이었죠.

-근데 사실 이거 코미디 영화입니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50년대, 마마보이와 여자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심술궂은 엄마는 아들의 연애를 방해하게 되고, 그리고 돈을 밝히는 엄마의 사촌이 마마보이를 치근덕거리고...하지만 마마보이와 여자는 그러한 사랑의 장애물들을 다 넘어서 진정한 사랑을 이루어냅니다. 마치 50년대의 흑백 코미디 영화같은 스토리 라인이죠.

......여기에 좀비가 들어가 되면서 영화는 골때리는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엄마가 좀비 원숭이에게 물리고 좀비가 되고, 마마보이인 주인공은 어찌어찌 좀비인 엄마와 엄마가 죽인(?) 좀비들을 지하실에 놓고 열심히 엄마와 좀비들을 부양(?)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극단적 버전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이 달랑달랑하게 붙은 간호사 좀비가 음식을 제대로 못넘기자 주인공이 목을 뒤로 재껴서 식도에 직접 음식물을 넣는 장면, 간호사 좀비와 신부 좀비가 성관계를 해서 나온 아기 좀비(......), 곱창 좀비(허파가 팔이고, 다리는 창자, 식도가 머리;;), 그리고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잔디깎이 좀비 학살 장면 등 좀 '관대한'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이 봤을때는 대단히 웃긴 장면들이 많습니다.(만약 관대하지 못하다면 이 영화는 거의 생지옥에 다름 없지만)

게다가 보통 이런 좀비 영화들이 무거운 색조와 공포스러운 음향, 심각한 배우들의 연기들로 나름 분위기를 잡으려 하는데, 데드 얼라이브는 이와 반대로 밝은 분위기와 의도적으로 어설픈 배우들의 연기로 영화의 높은 수위에도 불구하고 코미디 영화같은 분위기를 물씬 냅니다. 어찌 보면 피터 잭슨의 연출력이나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반지의 재왕 이전 데드 얼라이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뭐 결론적으로 호러 코미디 영화로 일가를 이룬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요.

-데드 얼라이브는 두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는 전 영화를 통틀어서 피를 30CC 썼고, 스튜어트 고든의 좀비오는 피를 2000L, 그리고 마지막 데드 얼라이브는 피를 4만 리터를 썼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는 중입니다.

뉴질랜드에서 이 영화는 무삭제로 12세 이용가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정보에 따르면, 데드 얼라이브를 본 뉴질랜드 영등위 위원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이 넘어가도록 웃은 뒤에 '이 영화를 진짜라고 믿을 사람은 없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12세 이용가를 때렸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죠.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좀 점잖은 짤을 원했건만, 흠흠)


마크로스 F는 마크로스 7 이후 근 16년 만의 신작입니다. 사실, 제가 마크로스 전 시리즈를 감상 완료한 시점 즈음에서 마크로스 F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번 F에서는 과연 마크로스 원작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뭐, 실제 나온 F는 마크로스 시리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삼각관계, 음악, 전투 이렇게 3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고, 마크로스 시리즈를 나름대로 재해석 했으며 그리고 나름대로의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원작 마크로스 이후의 새로운 마크로스 시리즈의 전통을 확립했나 라는 부분에 있어서 저는 좀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밑에서 차차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마크로스 F는 마크로스 7 이후로 한참 뒤의 이야기(2059년)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크로스 7 선단 이후, 은하 최중심을 향해서 가고 있는 프론티어(Frontier) 선단에서 주인공인 알토와 아이돌 지망생인 란카, 그리고 성공한 아이돌인 쉐릴 사이의 삼각관계, 외계생물 바쥬라와 그와 관련된 음모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구성은 원작 마크로스 시리즈의 구성들-삼각관계, 외계생물과 인카운터->전투->화해와 이해의 구조, 연애와 외계생물과의 조우 과정에서 음악의 중요성 등-을 따르고 있지만, F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전작에 대한 원용과 변용을 시도합니다.

일단 란카와 쉐릴이라는 두 히로인은 前 마크로스 시리즈의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있는 주인공들인 린 민메이와 넥키 바사라의 변주입니다. 사실 이 둘을 명백히 변용했다고 주장하거나 드러내는 부분은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 내에서 인물이 하는 행동 등에서 이 두명이 과거 민메이와 바사라의 오마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란카가 미스 마크로스 대회에서 '나의 그이는 파일럿'을 부르거나(민메이가 제 1회 미스 마크로스에서 불렀던 노래), 중국집에서 알바를 하는 부분(민메이는 중국계 혼혈로 원작 마크로스에서 중국집에서 삼촌을 자주 도왔음), 자주 린 민메이와 비교되는 부분(후에 바사라를 동요하게 하는 작전 이후로 민메이와 많이 비교가 되었음) 등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쉐릴은 '나의 노래를 들어!'(바사라가 즐겨 말하는 대사 18번)라는 대사, 그리고 그 근거 없는 자신감 등은 바사라의 케릭터와 맥이 많이 닿아있습니다.

하지만. F는 이러한 오마주를 변용하여 발전 계승 시킵니다. 전작에 있어서 각각 케릭터들이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서 작품 내에서 벨런스가 깨졌던 문제들-예를 들어 민메이 같은 경우는 소녀의 감수성을 잘 살린 케릭터였지만 동시에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 문제가 있었고, 바사라 같은 경우 너무나 극중에서 뛰어난 나머지 애니 내에서 파워 벨런스를 다 무너뜨렸다는 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마크로스 F는 이러한 케릭터의 성격의 벨런스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란카 같은 경우, 민메이의 소녀 같은 매력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소녀의 수줍음을 추가하여서 원작 마크로스의 대단히 자기 중심적인 모습을 탈피하는데 성공합니다.(이런 면에서는 극장판 마크로스의 민메이와 멕이 많이 닿아 있습니다) 이는 알토를 좋아하는 란카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잘 드러나는데, 란카가 알토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해매는(?) 부분은 란카라는 케릭터를 잘 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알토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두고 일희일비하는 모습도 이러한 소녀같은 수줍음을 잘 드러내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일희일비하는 부분이나 수줍어서 제대로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는 란카의 모습을 보고 많은 팬들은 '뭐 어쩌자는 거냐' 식의 짜증을 표출하였고, 심지어 란카가 아이 군을 바쥬라의 모성으로 데려가려 했을 때는 '잘됬네, 꺼져라 녹색균'이라면서 란카를 심각하게 까더군요. 사실, 저는 이러한 란카의 소녀같은 수줍음이 마음에 들었고, 이것이 란카라는 케릭을 살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수줍음을 가지고 케릭터를 심하게 까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취향차이면 모르겠지만요(........)

쉐릴 같은 경우, 마크로스 7에서 바사라가 겪지 않았던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됩니다(물론 바사라가 내용적으로 고난을 겪는 부분이 있기는 있지만, 감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난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수행의 일종으로 보이더군요;;) 그것은 자신이 쌓아왔던 명성과 신화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그것도 그레이스가 뒤에서 조작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지만)을 보고, 좌절하는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거기에다가 지병(이라고 보기에는 미묘하지만 하여간)이 겹쳐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위태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좌절에서 쉐릴은 다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자각하고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이러한 자존심이 높은 케릭터가 추락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서 케릭터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정당화 하고, 케릭터의 성격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래 이러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가운데서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올라오는 케릭터의 모습은 이 쪽 장르에서는 많이 쓰였던 클리셰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케릭터가 바사라를 오마주한 케릭터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오히려 쉐릴의 케릭터는 설득력을 지니면서 동시에 바사라의 매력을 그대로 지닌 케릭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크로스 F에서 가장 재밌는 점은 바로 기존의 마크로스 시리즈의 외계 존재와의 만남의 틀을 역으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마크로스 시리즈에서는 인간의 문화를 모르는 외계 생명체가 인간과 조우하면서, 인간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계의 전반적인 흐름은 이러한 일방적인 전파나 전도의 방식을 거부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마크로스 시리즈도 시대에 발맞추어 나가기 위해서 새로운 시리즈의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마크로스 F는 이와 반대로 외계 생물인 바쥬라가 인간과는 다른 형식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 일례로, 시리즈 전통적으로 외계 생물들이 노래와 문화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비해서, 바쥬라는 노래를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의 틀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문화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불신과 오해로 대립 구도를 형성합니다만, 그것이 언제나 전면적이거나 서로를 궤멸시킬 만큼의 살의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쥬라와 인간의 첫 만남은 전면적인 전쟁을 일으킬 만큼의 증오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지만, 이러한 바쥬라와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전쟁을 불러와야지 애니의 이야기가 진행이 되기 때문에 마크로스 F도 그러한 요소를 애니 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재밌는 점은 그러한 오해와 불신을 일으키는 원인이 바로 거대 자본과 권력가들의 어두운 욕망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이것 또한 오랫동안 쓰여온 이야기 소재이며 일종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 장치입니다만, 여태까지 마크로스 시리즈에서는 마크로스 플러스 이외에 한번도 쓰이지 않은 장치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마크로스 플러스에서는 이러한 이야기 장치가 부수적인 맥락으로 쓰였다면(사실 모든 건 뮨의 또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샤론 애플이 불러일으킨 문제지요), F에서는 이것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장치입니다.

또한 주인공들이 속한 SMS라는 단체가 정부소속이 아니라 사설 경비업체, 쉽게 이야기하자면 용병들이라는 점도 이야기 진행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는 과거 주인공들이나 주요인물들이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부측에서 일하면서 외계인들과의 침략에서 인간을 대변해서 싸웠지만, F에서는 사설 용병 단체이기 때문에 거대 자본이나 정부의 음모에 의해서 휘둘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실제 전개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많이 나오구요. 그렇기 때문에, F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대단히 미묘합니다....만 알토는 그런거 전혀 신경 안 씁니다. 이 문제는 밑에서 다루도록 하지요.

그래서인지, F의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26화에서는 원작 마크로스의 인류가 수비를 맡고 외계인이 공격을 맡은 구도를 뒤집어서 인류가 침략, 공격자가 되고 바쥬라가 자신의 모성을 보호하는 수비자가 되는 기묘한 구도를 연출 시킵니다(어떻게 보면 마크로스 7과도 맥이 닿아있습니다) 또한 세뇌당한 란카의 거대한 홀로그라피는 과거 마크로스 플러스의 마크로스 전함을 이용한 샤론 애플의 거대한 홀로그라피를 연상시키구요. 하지만 그러한 껍질을 벗기고 보면, 그 속에는 거대 자본의 야망-파괴된 줄 알았던, 거대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베틀 겔럭시-이 숨어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모두 갤럭시 선단의 음모임을 안 마크로스 프론티어와 바쥬라는 배틀 갤럭시를 더블 마크로스 어텍(마크로스 쿼터와 베틀 프론티어의 더블 다이달로스 어텍!)으로 격파, 그레이스를 마크로스 제로에 나왔던 프로토 컬쳐의 유산과 비슷하게 생긴 바쥬라 퀸의 머리로부터 안전하게 분리한 후에 폭파시킨 후 바쥬라의 모성에 안착합니다. 결국은 거대 자본과 음모도 사랑과 기합의 힘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진다는 뻔한 결론을 내리는 마크로스 F입니다만, 마크로스 시리즈의 전통을 변용시켜서 색다른 형식의 마크로스를 높은 완성도로 만들어낸 점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포커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는 미쉘, ‘비행중에 애인 이야기 하면 죽는다더라’라는 농담(원작 마크로스 극장판에서 카키자키가 비행중에 애인가지고 농담 따먹기 하다가 격추당합니다), 포커의 죽음을 패러디한 장면, 마크로스 7의 에피소드 ‘민메이 비디오’의 오마주가 분명했던 에피소드, 전작들의 제목과 비슷한 제목들 등은 F의 정체성이 마크로스 시리즈 전체의 정리와 재해석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마크로스 F는 결정적으로 한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의 부재입니다. 사실, 연애라는 요소가 중요한 마크로스 시리즈에서 히로인에 못지 않게 주인공의 비중도 큽니다. 결과적으로 삼각관계에서 주인공이 한 여자를 선택해야하고, 거기에 어떤 정당화 사유를 부가하고자 한다면 주인공도 히로인들에 못지 않은 케릭터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크로스 F의 주인공 사오토메 알토는 전혀 그럴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해서 저는 이 케릭터에 도저히 감정이입이 되지 않더군요. 일단, 어떤 케릭터든 간에 자신이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와 동기가 있고,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에서 그 케릭터의 완성도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토의 행동 동기는 대단히 뭐랄까...찌질합니다. 아니, 찌질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케릭터입니다. 전통적으로 가부키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단순히 어머니에 이끌려 하늘을 동경하고, 그것이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가부키에 대한 도피처가 되고, 그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없이 대충 남들 하는 말이나 들으면서 살다가 애니가 끝납니다. 게다가 애니 진행 도중에 수많은 케릭터들이 '그렇게 살지 마라' 라는 아주 진지한 충고를 해줌에도 불구하고, 이 케릭터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케릭터가 주장하고 싶은 바가 뭡니까? 저는 대단히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대충 진지한 척 쿨게이스럽게 살다보면 인생 해피하다는 건가요? 아니면, 쿨게이스럽게 대충 살기 위해서는 성 정체성이 모호한 외모와 발키리를 모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사실, 알토의 케릭터성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쉐릴과 란카의 케릭터를 확립하기 위해서 애니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였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알토에 대한 케릭터 묘사는 줄어들고, 그 자리에 쉐릴과 란카의 케릭터 묘사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워낙이 독특한 케릭터들 사이에 있다보니까 상대적으로 그의 케릭터성이 죽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출연빈도가 적은 케릭터들-예를 들어 오즈마 라던가;;-도 자기 케릭터를 확립했기 때문에 뭐랄까 미묘한 케릭터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알토 하나만 빼면 대단히 괜찮은 마크로스 시리즈입니다. 그래요. 다만 알토가 주인공 이라는게 문제죠(.......) 그 덕분에 애니의 가장 큰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쉐릴 대 란카의 연애전선에 있어서 할램 루트를 타버리는 어쩡쩡함을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알토를 포함하더라도 마크로스 F는 대단한 작품입니다. 이야기도 나름 완결적으로 짜여졌으며, 전체적으로 작화도 좋고(물론 중간 중간 작붕이 있었지만), 시리즈 26주년 기념으로 전체 시리즈를 한번 포괄하는 작품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알토라는 케릭터의 문제, 결과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마크로스가 아니라 원작의 변용 발전이라는 점, 그리고 결과적으로 점점 카와모리 쇼지의 개인작품이 되어가고 있는 마크로스 시리즈에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덧.모든 시리즈를 보신 분들이면 26화에 나온 모든 장면들이
전 시리즈에서 오마주 한 것이라는 걸 눈치채실수 있습니다. 거의 한 장면도 빼놓지 않구요.

덧.위에 넣을 마크로스 F짤을 찾았는데, 왜 모두가 크랑크랑 짤인거죠?

덧.이로써 마크로스 전 시리즈 리뷰가 끝났습니다.
마크로스 2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시간나면 하고, 안나면 안하는거고.....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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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전 정보 없이 봤다가 뒤통수를 심각하게 맞은 작품입니다. 사실, 원래 저는 동생이나 여기저기서 정보를 알아본 다음에 영화를 보러다닙니다만, 이번같이 간단하게 '칸느에서 대상을 받을 뻔한 애니메이션'(대상은 프랑스 영화 '교실'이 받았습니다),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 정도로 알고 가서 봤는데...아주 심하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입니다. 정확한 장르는 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입니다만, 과연 그렇게 단순하게 장르를 규정 지을수 있는지가 의문이군요.

2.일단 개인적 체험과 역사적인 체험이 만난다는 구도 자체는 과거 이란 여성이 자신의 수기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와 비견될 수 있으나, 페르세폴리스가 그러한 경험을 일종의 동화의 형태로 표현을 했다면, '바시르와 왈츠를'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고수 합니다. 즉, 레바논 전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음을 깨달은 감독 자신이 자신의 기억을 계속 되짚어 올라가는 형식의 다큐멘터리 처럼 말이죠. 그러나 매체가 인위적인 느낌을 내는 애니메이션이다 보니까, 다큐멘터리라기 보다는 일종의 페이크 다큐(블레어 위치와 같은)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영화 장르 자체가 현실적인 사실을 지향하는데 비해서, '바시르와 왈츠를'은 개인적인 경험과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에서의 개인적인 체험을 초현실적으로 다루어내는 전쟁 드라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바시르와 왈츠를'의 대부분의 밑그림은 실제 촬영한 필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여기에 셀 애니메이션, 3D 애니메이션, 플레시 애니메이션, 컷아웃 기법 등을 동원해서 제작한 작품입니다. 즉, 이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는 이제 미묘해졌지만)은 진짜 실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느끼는 대부분의 생각이나 감정은 일차적으로 자신과 스크린 사이의 차이가 있음을 그 근저에 두고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니를 보는 내내, 우리는 감독 아리 폴만의 초현실적인 과거 경험이 일종의 허구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실제 감독이 겪었던 일이었든 아니었든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전쟁에 얽힌 초현실주의적인 환상이나 회상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그러한 개인적인 초현실주의적인 체험과 경험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일어난 팔랑헤 당원들의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 사건에 연결되게 됩니다. 그 사건을 당시 취재했던 리포터의 이야기와 여러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그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레바논 전쟁 당시의 기억 상실의 원인이 감독 자신이 그 광경에서 목격한 충격적인 장면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부분에서 영화는 갑자기 현실로 돌아옵니다. 당시 리포터가 찍었던 사브라와 샤틸라 수용소의 학살 후 폐허 장면을 말이죠. 이렇게 영화는 개인적인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체험에서 시작해서 팔레스타인 학살이라는 사회적인 경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3. 어떻게 보면 이건 심각한 장르의 반칙입니다. 마치, K-1 선수가 싸우다가 칼이나 총같은 흉기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수준입니다. 사실,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애니를 만든 페르세폴리스 같은 경우도 처음부터 끝까지 동화라는 장르에서 벗어나지 않았죠. 하지만 '바시르와 왈츠를'은 이러한 장르를 뒤집으면서(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이러한 '반전'은 제작 단계나 기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보는 관객에게 경악 또는 충격, 혹은 불쾌감('나는 애니를 보러 온거지, 다큐멘터리를 보러온게 아니라고!' 라는 식의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감독이 의도했던 바를 철저하게 애니메이션이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서 내었으면 어떻게 될까요?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을 열심히 다루다가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결부지으면서 끝나게 될 것이고,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열심히 사회적인 경험과 역사를 이야기 하다가 개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러한 사회적 개인적인 체험이 결과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다른 전쟁 다큐멘터리나 영화와 다른 독특한 체험을 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해서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충격을 받았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신겁니다. 사실, 전쟁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가 넘쳐나고, 그런 영화를 보고나서 '아 그런가 보다'하고 넘기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는 자체에서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니까요.

4.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There Will Be Blood'와 더불어서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고 싶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서 대단히 독특한 영상미와 더불어서, 작품이 이야기하고 싶은 매세지, 주제, 그 방법 까지 모두다 인상적이었던 작품이니까요.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이 되었으니, DVD가 나오길 기다릴 뿐입니다.



덧1.해변가에서 조명탄이 터지면서 아리와 동료들이 일어서는 장면은
올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중 하나였습니다.
덧2.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갔다가, 사람들 반응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ㅠㅠ
역시 저는 스노비즘인건가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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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리뷰를 쓰려고 했지만, 솔직히 이런 작품에 이상한 주석 같은 리뷰를 달아보았자 작품을 망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단 만화책으로 나온 원작도 상당한 걸작입니다. 기묘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따스하면서 동시에 독특하다는 느낌의 작품이었죠. 사실 원작의 애니화가 이아기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대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는 동양화적인 분위기나 일반 만화와 다른 컨셉 등을 과연 기존 일본식의 애니에서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우려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애니판은 원작의 그러한 분위기를 잘 살려낸 애니입니다.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애니판은 기존의 일본 애니라기보다는 다른 형식의 애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극단성을 거의 배제하고, 케릭터라는 요소를 많이 배제하였으니까요.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매우 '일본적'입니다. 사실, 충사라는 작품의 구성 형식인 벌래(蟲)에 관련된 옴니버스식의 단편 구조는 일본의 전래 문학중 하나인 모노가타리(사물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한 일종의 전승문학)라고 볼 수 있고, 어떻게 본다면 벌레라는 존재 자체가 기괴함과 기묘함에 대한 일본문화의 하나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본 전통 문화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충사는 놀랍게도 우리가 여태까지 접했던 일본 애니와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뭐, 원작이 가지고 있는 특성도 있겠지만, 한 에피소드 내에서 벌레와 사람, 그리고 매게자로서의 충사 깅코의 관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한 에피소드 마다의 케릭터들은 각자 사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저런 상황에서는 저럴수 있겠구나'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사연을 표면으로 끌어내는 벌래의 존재와 이를 중재하는 깅코의 존재도 인상이 깊습니다. 특히 이작품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깅코 같은 경우에는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아주 자연스런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옴니버스식 구조에 있어서도 자신의 색을 분명하게 유지하는 독특한 케릭터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충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그려내고 있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그림체와 음악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여운에 남고, 성우들도 억지로 케릭터를 만드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려는 자연스러움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전에 미야지가 하야오가 '가장 세계적인 것은 바로 가장 일본적인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딱 이 충사라는 작품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충사는 여태까지 애니들 중에서 독특하면서 동시에 인상적인, 그리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작품들 중 하나로 손꼽을수 있을 것입니다.


덧.결과적으로 길어졌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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