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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갑작스런 인원 감축으로 퇴직 통보를 받는 리스크 관리 팀장 에릭은 자신의 부하직원 피터에게 곧 닥칠 위기상황을 정리한 USB를 전하며 회사를 떠난다. 그날 밤 에릭에게 전달 받은 자료를 분석하던 MIT박사 출신의 엘리트사원 피터는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파생상품의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고 상사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이른 새벽 긴급 이사회가 소집되고, 그들만이 살아남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데...(네이버 영화, 마진콜 시놉시스)


마진 콜은 기본적으로 '실화에 기반한' 영화라고 스스로 주장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마진 콜의 그 어떤 것도 실제 일어난 '사건'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영화 속에 나오는 기업은 100% 허구의 기업이며, 현실의 사건과는 하등 관계없는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마진 콜의 가장 무서운 점은 사건 그 자체의 재현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마진 콜이 보여주는 '본질'은 묵시룩적이라고 평할 수 있다.


마진 콜은 '마피아'물의 화법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마진 콜은 범죄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진 콜의 영화 화법은 소셜 네트워크가 보여줬던 넓은 의미의 마피아물에 가깝다고 보는게 옳다. 인물들은 그들만의 화법과 언어로 마치 음모자들처럼(실제로도 그들은 음모자들이다) 구석에 숨어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며, 외부 사람이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민다. 마진 콜은 흔히들 봉급 부르주아라고 일컬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최상위 계층인 금융직종에 종사하는 인물들과 그 집단 내부를 들여다보듯이 관찰하면서 현재의 금융 대란의 본질을 다루고자 한다.


마진 콜의 주요 갈등은 회사의 생존하기 위해서 시장을 희생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안겨준 파생상품이지만, 만약 이것을 다 팔지 못했을 시에는 회사에 막대한 피해, 아니 회사가 사라질 수 있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파생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경우, 이 파생상품은 시장 자체를 아예 죽일 수도 있다. 일반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계수단과 좀 더 대국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시장-공생의 문제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하지만, 마진 콜은 그러한 일반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는 스토리의 축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끝까지 회장의 지침에 반대하는 뉘앙스를 풍겼던 샘이 너무나 싱겁게도 결전의 시간에 돈 때문에 회장 편에 동조하는 장면이나, 이 모든 사태를 예측한 데일이 잘리고 난 다음에 돈 때문에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장면 등등에서 인물들은 너무나 쉽게 돈에 굴복한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인간 욕망과 복마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 복마전을 구성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그것을 구성하는 금융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마진 콜의 메세지는 기본적으로 자가존속하는 '구조'(기업)로서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기본 이념(유능함에 대한 지불, 건전하지 못한 기업의 도태 등등)을 파괴한다 라는 자본주의 묵시룩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데일의 정리해고 장면과 여러분은 유능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라고 샘이 직원들을 독려하는 장면 사이에서의 아이러니, 끝없이 사람들을 봉급으로 재단하려는 세스, 봉급이 늘어난 만큼 씀씀이도 늘어난다고 이야기하는 윌, 로켓공학을 전공하고 MIT 박사를 딴 새내기 금융맨 피터, 멋진 집을 샀지만 결국 그것이 족쇄가 되서 다시 회사로 들어오는 데일, 샘을 회유하려는 회장과 샘을 견제하는 자레드 등등 영화는 거대한 사건 사이에 작지만 섬세한 이야기들을 배치한다. 영화는 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 자칫 일방적인 드라마로 흘러서 지루해지기 쉬운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는 한편, 이 모든 재앙을 꾸민 자본가 혹은 금융 자본가의 문제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그들 역시 '구조'의 꼭두각시라고 지적한다. 샘과 데일의 변절아닌 변절은, 결국 윌이 이야기했듯이 씀씀이가 늘어나버린 봉급 부르주아가 그 씀씀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관과 기분을 제쳐두고 기업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기업은 어떠한 존재인가? 그것들은 24시간 깨어있으며(꼭두새벽에 비상이사회를 소집), 효율적으로 사람을 관리 하며(데일을 해고하는 장면이나,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대규모 해고를 감행하는 부분), 필요하다면 사람을 협박하며(데일에게 일하지 않을 시에 소송을 걸겠다고 하는 부분),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회유하고(샘이 결국은 돈 때문에 일한다고 회장에게 속삭이는 부분), 새로운 인재를 충당하기(피터를 임원으로 승격시키는 부분)까지 한다.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결전의 순간, 기업은 성공적으로 파생상품을 모두 팔아치우면서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즉, 기업은 자신의 기반이 된 시장과 소비자를 죽임으로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요한 슘페터는  “그것(자본주의)의 성공 자체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사회 제도를 약화시켜서 그것(자본주의)이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 상황을 ‘불가피하게’ 창출할 것” 이라고 진단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월가가 미국 정부의 대규모 국고 지원으로 살아남고도 보너스 파티를 연것에 대하여 지젝은 '실패에 대한 보상'이라 비판하며 자본주의 기본 명제의 붕괴라고 지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진콜은 거기서 한술 더 뜬다:기업은 자본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시장을 박살낸다. 그렇기에 마진 콜은 자본주의 묵시룩을 다룬 무서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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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에 대한 네타가 있습니다.


알레한드로 조도르프스키 감독의 작품에 대해서 누군가는 '컬트 영화의 분수령'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조도르프스키 수준으로 사람에게 충격을 주지 못한다면, 그건 사이비 컬트 영화에 불과하다고. 엘토포나 홀리 마운틴 같은 영화들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괴한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그속에는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실제로 엘토포를 보고 영화에 빠진 비틀즈의 존 레논이 미국 배급 판권을 지르고는 미국 전역에 엘토포를 배급하였다. 뭐, 결과는 따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처참하게 쫄딱 망했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성스러운 피는 감독 스스로가 '이번에는 상당히 대중적으로 만들었다'라고 공언한 야심작(?)이다.


성스러운 피는 주인공 피닉스의 '극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이비 교주 어머니와 서커스 단장이자 꼴마초 아버지를 둔 피닉스는 외도를 하던 아버지의 자살과 아버지가 어머니의 두 팔을 잘라내는 것을 목격을 하고 그 충격에 그만 미쳐버리고 만다. 정신병원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던 그는 정신병원에서 출소하면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고, 어머니의 잘린 두팔을 대신해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피닉스는 미치광이 어머니의 명령에 의해서 그는 여성들을 죽이게 되고, 점점 그에 대한 죄책감과 어머니에 대한 압박감과 증오로 인해서 미쳐가는데...


성스러운 피는, 그야말로 대립적인 이미지들의 향연들이다. 죽음과 삶, 여성과 남성,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과 증오 등등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다양한 대립적인 이미지들을 리드미컬하게 연결시킨다. 재밌는 점은 보통의 정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지향하는 예술 영화와 다르게, 성스러운 피의 이미지들은 죄다 지저분하고 추하며 조잡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다른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날것의 매력이 있다. 예를 들면, 피닉스의 아버지가 서커스단 내의 여자와 정사를 하던 중에 여자가 절정에 이르자, 그 다음 컷에서 코끼리가 코에서 피를 쏟으면서 죽어가는 장면을 곧바로 연결시킨다. 섹스와 사랑, 각혈과 사정을 한 곳에 묶어버린다. 영화 내의 이미지들은 이런식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어찌보면 B급 영화 스러운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조도르프스키가 B급에 영향을 주었다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피닉스란 인물은 상당히 복잡한 인물이다. 피닉스의 아버지는 그에게 마초성향을 주입하고자 하고, 피닉스의 어머니는 그에게 강박관념과 여성에 대한 증오를 물려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피닉스는 대단히 수동적인 인물이며, 이야기 자체도 이 둘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피닉스가 과거의 옛사랑을 만남으로서 구원받는다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닉스라는 억눌린 케릭터를 영화는 억눌린 내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피닉스의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생생한 이미지로 드러냄으로서, 자칫 둘 사이에 끼어버린 수동적인 케릭터의 이야기를 무시무시한 매력을 가진 이야기로 바꾸어버린다.


아버지가 피닉스에게 물려준 것은 마초적인 '남자다움'에 대한 것이다. 어머니 외에도 다른 여자들을 후리던 아버지의 행동을, 피닉스가 일부나마 재현하는 장면, 그리고 아버지가 어른이 되었다는 기념으로 그에게 새긴 문신은 아버지가 피닉스에게 준 영향력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 의해서 거세당하고, 자살함으로서 그의 이미지는 파편적이고 잔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지배하는 것은 어머니의 광기어린 집착과 여성에 대한 격렬하고도 편집증적인 증오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증오와 피닉스의 관계는 영화는 두팔이 잘린 어머니의 팔을 대신하는 피닉스의 존재로 풀어낸다. 


이 기묘한 2인 1역은, 영화 포스터에 나온 어머니 뒤의 피닉스 모습마냥 단순한 형태가 아니다. 어머니의 잘린 두팔을 대신하는 피닉스의 어머니에 대한 기묘한 헌신, 연극적이고도 과장된 피닉스의 팔연기,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피닉스의 팔의 봉사를 받는 어머니의 고압적인 여왕같은 모습 등등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의지와, 그 의지를 수행하는 피닉스의 팔이라는 관계는 비단 두명이 함께할 때뿐만 아니라, 살인에 있어서 어머니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팔의 역할로도 풀어낸다. 하지만, 피닉스는 이러한 관계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를 막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성전환 프로레슬러를 다음 살인 타겟으로 지목하거나, 투명인간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고 투명인간 약을 만들려 하는 점 등등은 그의 현실에 대한 탈출 욕망을 잘드러낸다. 이러한 탈출 욕망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미지는 바로 날아오르는 새의 이미지인데, 어릴적 그를 사랑했던 벙어리 소녀가 그의 가슴의 문신(문신이란 각인이자 구속, 낙인의 이미지를 갖는다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에 대고 그림자 연극의 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시늉을 한 부분, 벙어리 소녀를 못잊어서 자신의 피해자들에게 흰색 패인트를 칠하자(그녀의 얼굴 분장이 하얀 패인트였다) 그것이 새로 변해서 날아오르는 환상을 보는 등의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영화의 절정에서, 어릴적 만났던 벙어리 소녀와 재회하고 소녀를 죽이라는 어머니의 명령을 거부한 그에게 진실이 드러난다. 사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두 팔을 잘라낼 때 이미 죽었으며, 어머니의 명령은 그의 머릿속의 환영에 불과했었다. 그는 경찰에 잡혀가지만, 영화의 마지막, 스스로의 팔을 들어올리면서 '내 팔, 내 팔!'이라고 외치는 장면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성스러운 피는 놀라운 이미지의 향연으로 가득찬 작품이며, 영화의 이야기도 흡입력이 대단히 뛰어나다 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영화는 꼭 봐야한다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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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타 있습니다.



비스트 오브 서던 와일드는, 세계와 나의 관계를 오로지 '나'라는 개인이 겪는 경험과 사건들, 그리고 독특한 세계를 통해서 표현한다. 비스트 오브 서던 와일드(이하 비스트)의 이야기는 '욕조'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꼬마 허시 퍼피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문명과 동떨어진 원시의 환경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욕조의 주민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서 욕조는 물에 잠기게 되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전혀 아플것 같지 않아 보이던 아버지는 백혈병에 걸려서 점점 죽어간다. 그리고 허시 퍼피는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어머니를 찾아서 물을 건너게 되는데...


비스트의 주제의식은 '세계는 나로 인해서 망가지며, 또한 나로 인해서 세계가 치유된다'라는 다소 독특한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거대한 세계와 조그마한 꼬마 주인공 사이의 관계를 현대의 원시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서, 나와 세계의 관계를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다. 욕조라는 공간에서부터 허시 퍼피가 사는 공간, 부녀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영화에서 다루는 소재까지, 비스트의 세계는 철저하게 문명을 배제한다. 이러한 문명의 배제의 정점에는 허시 퍼피의 아버지 라는 존재가 있다. 그는 철저하게 문명을 배제하는 원시적 생명력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는 둑 너머의 도시인들을 안좋게 보며, 태풍을 향해 소리치면서 태풍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과시한다. 심지어 그는 물고기를 잡을 때 낚싯대를 쓰지도 않으며, 삶은 게를 먹을 때 조차 게를 도구를 써서 껍질을 벗기는 것이 아닌, 손으로 잡아서 문자의미 그대로 으깨서 먹는 것을 자식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온몸으로 생명력을 드러내는 허시 퍼피의 아버지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이러한 허시 퍼피가 아버지에게 대드는 장면, 아버지가 쓰러지는 장면, 그리고 폭풍이 몰아치는 장면을 리드미컬하게 이어서 마치 하나의 '연관성'을 갖는것처럼 보여준다. 물론, 허시 퍼피가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이 아버지에게 병을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나, 이 장면은 허시 퍼피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들면서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태풍이 오고, 욕조는 물에 잠긴다. 하지만 염수의 피해로 민물의 숲이나 생명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다이나마이트를 이용해서 둑을 파괴하고, 염수를 빼냄으로서 다시 욕조에 삶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수 피해로 인해서 더이상 욕조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


아버지가 실패하고, 죽음에 가까워지자 자식인 허시 퍼피가 내린 결론은 어머니를 찾는 것이었다. 영화 내내, 허시 퍼피의 상상내에서 존재했던 어머니의 이미지와 어머니가 바다 건너로 넘어갔다는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었다는 악어 튀김 이야기 등등 오로지 허시 퍼피의 어머니는 바다를 건너기 전까지는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존재한다. 영화는 허시 퍼피의 어머니가 왜 아버지를 떠났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거세한다. 영화를 본 뒤에, 상당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었다. 허시 퍼피가 어머니와 만남으로서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로 인해서 아버지-어머니를 넘어서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데 성공하고, 그 결과 세계가 치유되었지만(정확하게는 다른 터전을 찾아서 떠난 것이지만), 왜 아버지와 별개로 어머니는 극중에서 '타자'로 취급되는가? 몇몇 일단 이것에 대해서 내가 내린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가설은, 허시 퍼피가 원시적 생명력의 발현처럼 보이는(실제로는 죽어가고 있지만) 아버지의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라는 이미지만의 존재를 실제 만남으로서 어머니의 이미지를 깨부수고, 아버지의 죽음과 화해하는(아버지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그런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헀다. 실제, 아버지에게 허시 퍼피가 준 것은 어머니가 잘 해주었다는 악어 튀김이었고, 이를 먹는 아버지와 허시 퍼피 사이의 눈빛은 아버지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로 읽혔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허시 퍼피는 이전의 어린아이적인 면모를 벗어던진 성숙한 '무언가'가 된다. 영화 초반 선생이 이야기해주었던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 오락스가 부서진 빙하에서 깨어나서 허시 퍼피에게로 오는 과정, 허시 퍼피에게 오는 과정과 모습은 피할 수 없는 숙명, 또는 자연의 잔인함을 암시적이고 신비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런 그들이 욕조에 도착해서 달라진 허시 퍼피에게 무릎꿇는 장면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자에 대한 경외감(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비스트 오브 서던 와일드는 상당히 독특한 작품이다. 원시적인 이미지와 한 아이의 성장기를 통해서, 세상과 내가 소통하고 화해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독특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석연치 않은 몇몇 부분이 있기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자체가 주는 경험이나 이미지가 매우 독특하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은 꼭 보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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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헌트가 이야기하는 집단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는 사실 이런 소재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새로운 주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마녀사냥이라는 집단 히스테리에 저항하는 존 프록터의 이야기인 크루서블이라던가, 침묵의 폭력과 그걸 학습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인 하얀 리본 등등에서 많은 영화들이 집단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하지만, 더 헌트가 접근하는 각도는 상당히 특이하다. 기존의 작품들이 상황에 대한 '극단적'인 상황 설정들(마녀사냥이나 모두가 범죄에 침묵하는 등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더 헌트의 상황은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더 무섭다.


더 헌트의 이야기는 평범한 유치원 교사인 루카스에게서부터 시작된다. 부인과 이혼하고, 여자친구도 있고, 친구들과 함께 사슴사냥을 다니면서 술도 진탕나게 마시는 말그대로 평범한 소시민인 루카스. 클라라는 자신에게 무신경한 부모보다 자신을 더 아껴주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기 유치원 선생인 루카스에게 호감을 갖지만, 너무 접근하는 자신을 거부한 루카스에게 화가 난 나머지 해서는 안되는 거짓말을 하고 만다. 그 결과, 루카스의 인생은 크게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집단 히스테리의 성격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루카스가 누명을 쓰는 과정은 어디에서나 일어날법한 오해와 불협화음의 하모니이며, 사태는 전적으로 누구의 잘못이다 이야기 할 수 없다. 심지어는 오해와 거짓말의 장본인인 클라라 조차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집단의 폭력성은, 집단의 '안일함'과 '맹목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라가 처한 상황이 매우 바람직한 상황은 아닌 것은 맞다. 오빠의 수위높은 성희롱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클라라나, 서로 치고받고 싸운다고 클라라를 유치원에 등원시키는 것 조차 친우에게 미루어버리는 테오 부부에 대한 묘사을 통해 사실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클라라에 대해서 테오 부부가 무관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 '무관심'의 정도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기는 했지만.


그러한 일상적인 무관심은, 클라라의 거짓말로 인해서 루카스에 대한 맹목적인 악의로 채워진다. 클라라에 대한 무관심이 사건을 통해서 클라라에 대한 애정으로 바뀌기는 했지만(실제 영화에서도 사건 이전과 이후, 테오 부부가 클라라에게 스킨쉽을 하거나 안고 다니는 등의 빈도가 늘어난다), 그 상황에 도달할 때까지의 상황을 합리화 하기 위해 테오 부부는 아이의 거짓말을 맹목적으로 믿는다. 유치원 원장은?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이가 하는 말은 진실일 것이다. 다른 인물들의 행동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맹목적인 신념 아래서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루카스였고. 한 공동체의 안일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위해서, 그는 낙인 찍히고 고통당한다.


영화는 철저하게 집단 내부에만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다. 루카스가 실제로 아동성추행을 했는가 안했는가의 진실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주된 핵심은 루카스라는 인물이 거짓말로 인해서 누명을 쓴 이후, 집단이 루카스에 대해서 가하는 폭력의 본질과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더 헌트의 폭력의 방식은 '사냥'이라는 폭력적인 상황과 맥을 함께 한다. 영화 초반, 주인공 루카스가 숫사슴을 사냥하는 시퀸스는 루카스의 앞으로의 운명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루카스가 처하는 상황은 그가 한 행동의 결과도 그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문구 의미 그대로의 마른 하늘의 날벼락인 것이다. 루카스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때마다, 그의 위치를 상기시켜주는 무자비한 폭력들(슈퍼마켓, 페니의 죽음,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의 엔딩까지.)은 그러한 희망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그렇기에 루카스라는 케릭터 역시 그러한 총맞는 숫사슴의 연장선상이다. 하지만 메즈 미켈슨은 그러한 수동적인 피해자의 입장을 단순한 형태로 묘사하지 않는다. 메즈 미켈슨의 연기는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정도로 절제되어 있는데, 자신이 처한 폭력적 상황에 대한 분노와 슬픔 등을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대신, 그는 자신의 행동이나 표정 등의 연기를 통해서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절제해서 드러내는데,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크리스마스 미사 장면에서 테오를 바라보는 루카스의 눈빛은 자신이 막을 수 없는 집단의 폭력에 대한 무기력함과 분노를 동시에 드러내는 훌륭한 연기였다.


영화의 마지막,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1년뒤의 루카스의 아들인 마커스의 성인식 겸 첫 사냥으로 건너간다. 루카스는 다시 여친과 재결합했으며, 친구들 모두 그의 곁에 있다. 첫 사냥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마커스는 자신을 파멸 직전까지 내몰았던 클라라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실수를 할 수 있으니까, 루카스는 클라라를 안아주면서 화해한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사슴사냥을 하며 모든것이 완벽한 것처럼 보이던 순간, 혼자 남겨진 그에게 누군가 일부러 총을 빗겨 쏜다. 그가 아동을 추행하든 추행하지 않았든 간에, 그에게 찍힌 낙인과 집단의 증오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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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워드 빌은 시청률 부진을 이유로 자진사퇴 압력을 받고 사퇴를 눈앞에 둔 UBS의 뉴스캐스터이다. 그가 뉴스 앵커로 이름을 떨치던 때와 달리, 이제 TV를 대표했었던 뉴스 프로그램은 자본의 논리와 엔터테인먼트에 밀려서 예산도 삭감되고 찬밥신세 취급을 받는다. 이러한 현실에 분노한 하워드 빌은 생방송으로 세상을 향한 직설적인 분노를 드러내고, 절친한 친구인 보도부장 맥스 슈마커는 이를 묵인한다. 하지만, 현실의 더러움을 적나라하게 까발려버린 하워드 빌의 뉴스 방송이 예상외의 인기를 끌자, 시청률 상승에 혈안이 된 다이애나는 하워드 빌을 주역으로 내새운 뉴스 쇼를 만드는데...


1976년,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네트워크는 매스 미디어와 거대 자본, 그리고 매스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꼽을 때 마다 자주 언급되는 영화 중 하나이기도 한데, 네트워크가 보여주는 이야기와 영화의 극 구조는 미디어 사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네트워크라는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야기의 구조와 분위기, 네러티브가 크게 두개로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전반부는 맥스 슈마커가 보도부장에서 잘리기 전의 이야기이고, 다이애나가 본격적으로 하워드 빌 쇼를 연출하기 시작하는 부분이 후반부라고 할 수 있다. 전반부의 맥스 슈마커나 하워드 빌의 이야기는 오락 중심의 TV프로그렘에 뒤쳐지기 시작하는 구세대적인 감성을 가진 방송인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해고 당하기 전에 사무실에 모여앉아서 농담을 즐기고, 방송에 대한 신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하는 인간적인 군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하워드 빌 쇼를 담당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비틀리기 시작한다. 인물들은 인간성을 잃어버리며, 드라마는 사라지고 TV 시대의 성난 선지자가 되어버린 하워드 빌의 예언적인 선언과 소통 없는 독백만이 극을 지배한다.


영화는 이를 TV화 라고 부른다. 후반 극 흐름의 중심에 있는 다이애나처럼 맥스 슈마커의 표현을 빌리자면, TV를 보고 자라나서 TV 속의 세상이 전부인줄 알며, 세상의 모든 것을 TV로 환원시켜서 생각하게 되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이애나란 인물은 똑똑하고 유능하지만 어딘가 인간적이지 못한, 무언가 결여되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맥스 슈마커와 사랑을 나눌 때도 끝없이 시청률과 자신이 맡은 프로에 대해서 독백 아닌 독백을 하며, 반 사회 테러를 TV 미니시리즈로 기획해서 시청률을 올릴 생각이나 하며, 방송윤리 따위는 옛저녁에 버려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맥스가 다이애나와 하는 대화에서 드러나듯이,그녀와 맥스의 관계는 TV 드라마 속의 이야기 그대로를 답습한다(노년의 위기와 바람, 그리고 해어진 뒤에 가족으로의 귀환). 그녀가 맥스의 잠자리 실력이 무능하다고 모욕하는 그런 모습까지, 그녀의 케릭터는 철저하게 미디어 내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의 반복 재생산이다.(맥스가 어이없다는듯이 피식 웃으면서 '왜 그것이 남자에 대한 심한 모욕이 되지?'라는 장면은 그 허구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결국은 그녀가 만들어내는 하워드 빌 뉴스 쇼 역시 그녀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뉴스의 '저널리즘' 따위는 옛저녁에 갖다버린지 오래이며 프로는 점쟁이와 타로카드와 미신이 판치는 한때 한때 흥미 위주의 뉴스 프로그램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하워드 빌이란 인물은 TV화의 가장 큰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 분노하던 그가 뉴스를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호응을 얻게 되자 다이애나는 그로부터 인간성을 거세하고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버린다. 농담도 하고 분노도 하던 그의 모습은 후반에 들어서는 TV속에서만 소리치고 분노만하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그의 메세지는 점점 간질 발작처럼 변화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선지자적 이미지와 메세지는 거대 자본의 엄정한 운영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 UBS의 아랍 자본 유입을 폭로하면서 아랍 자본 유입을 막아낸 하워드 빌에게 젠슨 회장이 역설하는 자본주의의 운영논리는 세계, 아니 우주의 법칙의 웅장한 선언이다. 인간은 이미지를 소비하고,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는 파편화 되고 자극적인 이미지 사이로 숨어버린다. 미디어는 진실을 밝히는 도구가 아닌, 결국 지배 논리의 장단에 맞춰서 돌아가는 광대에 불과했다. 진실을 알게 된 하워드 빌은 카메라 앞에서 그 우주적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시청률이 떨어지고 그를 자리에 앉혀놓은 자들에 의해 생방송 도중 암살 당하게 된다.


시드니 루멧이 만들어낸 네트워크는 단순한 미디어의 진실 찾기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서 미디어를 수용하는 자, 만드는 자, 배후에서 그것을 조종하는 자까지 모두를 한데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훌륭한 통찰력을 가진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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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샘 패킨파의 2차 세계대전 영화, 철십자 훈장은 독기로 가득찬 작품이다. 다른 전쟁영화들과 다르게, 추축군, 그것도 독일의 입장을 다루고 있는 철십자 훈장은 전쟁의 광기와 허무, 그리고 폭력에 중독된 마초의 장엄한 최후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패색이 짙은 동부전선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임무에서도 살아남는 전설적인 군인, 슈타이너 하사의 부대에 스트랜스키 대위가 들어온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슈타이너 하사와 그의 소대원과 다르게, 스트랜스키 대위는 철십자 훈장을 받기 위해 안달이 난 전형적인 프러시아 귀족 군인이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소련군은 점점 그들을 옥죄어 오는데...


샘 패킨파의 미학적인 주된 관심사가 폭력과 스러지는 것들이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그 정점에 대한 미학이라는 걸 상기하면, 그가 전쟁영화의 주인공으로 독일군을 선택한 것은 타당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내내 슈타이너 상사(스트랜스키가 부임하자 마자 곧바로 그를 상사로 진급시킨다)와 그의 소대원들은 살아남기 위한 발악을 할 뿐이며,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더러운 상황과 분위기로 그들을 옥죄인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패퇴했지만, 영화속에서 그들은 소련군에게 당하며 상관에게 버림받아 낙오당하고, 심지어 아군에게 사격당하기 까지 하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한다. 


재밌는 점은, 철십자 훈장이 보여주는 슈타이너 라는 주인공의 케릭터이다. 샘 패킨파 특유의 마초적 케릭터에, 뼈속까지 폭력으로 물든 인간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폭력'이라는 메소드는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영화 내에서 가장 인간적인 존재이다. 포로로 잡은 소련군 소년병을 풀어주는 장면이나, 소련 여군들을 포로로 잡았을 때 보여주는 그의 모습, 그리고 스트랜스키가 철십자 훈장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브랜트 대령이 고발하려 하자 '당신들이나 스트랜스키나 모두 똑같아'라고 비판하는 장면 등등에서 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폭력에 중독된 마초이기도 하다. 그가 전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장에 복귀하는 점, 그리고 농담으로 '이제 막 전쟁이 좋아지려고 하는데 말야!'라고 이야기 하는 점 등등에서 결국은 이 폭력과 광기의 순환을 빠져나갈 수 없는 슈타이너의 숙명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와일드 번치에서는 주인공들이 자신이 행하는 폭력에 의해서 스스로 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철십자 훈장은 그보다 더 큰, 빠져나갈 수 없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보여준다. 슈타이너와 그의 소대원들의 파멸이 소련군이나 그들의 과오가 아닌, 스트랜스키의 철십자 훈장에 대한 개인적이고 어리석은 집착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기묘하다. 슈타이너가 요양원에 있었을 때, '야채는 몸에 좋습니다! 야채를 많이 먹으십시오!'라고 나치 당원이 소리치자 마치 시체뜯어먹는 좀비처럼 혐오스럽게 야채를 주워먹는 부상병들의 이미지나, 철십자 훈장을 받기 위해서 슈타이너를 꼬드기는 스트랜스키가 '사회도 군대하고 마찬가지지. 결국은 줄을 잘서야 한다는걸세'라고 이야기하면서 슈타이너를 은연중에 협박하는 장면은 이미 전쟁의 광기가 전쟁터가 아닌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부분이다.


결국 자신의 범행(철십자 훈장을 못받게 슈타이너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까봐)을 숨기기 위해서 스트랜스키가 슈타이너의 소대원을 쏴죽이라고 명령을 하고, 결국 슈타이너의 소대원들은 슈타이너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죽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압도적으로 몰려오는 소련군과 싸우면서 이 총은 어떻게 장전하는지 모르겠어 라고 외치는 스트랜스키와 그걸 보면서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슈타이너, 그리고 소련군 소년병들이 총을 쏘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내내 겪었던 고난과 소대원들의 희생의 원인이 결국은  총도 하나 제대로 장전 못하는 병신 장교의 훈장에 대한 욕심, 그리고 그들을 전쟁터로 내몬 웃기지도 않는 사회의 광기를 처절하게 비웃는 슈타이너의 광소는 영화를 미학적으로 완성시키는데 성공한다.


영화 철십자 훈장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있을 전쟁 비판 영화이다. 하지만, 철십자 훈장이 다른 영화들과 차별되는 부분은, 폭력에 찌든 마초가 나와서 전쟁과 사회를 비웃고,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는 샘 패킨파 특유의 폭력 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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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필사의 추적'(원제:Blow Out)은 결국은 히치콕 영화들의 총집편(또는 노골적인 배끼기)과 이탈리아 모더니즘 영화 감독 안토니오니의 Blow Up의 리메이크+개조 버전에 불과한 영화이다. 심지어 드 팔마 감독의 영화들은 히치콕 영화 덕질의 산물에 불과하고, 과장된 스타일과 이미지로 뻥튀기 된 별거 아닌 영화 밖에 안된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 모든 비판 포인트를 인정하더라도 드 팔마 감독의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이며, '필사의 추적'은 고전 영화들로부터 '진실'에 대한 담론들을 빌려오지만 이를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닌 자기 색깔로 포장하는데 성공한 영화이다.


주인공인 잭 테리는 시시껄렁한 B급 영화의 음향기사이다. 어느날 밤, 영화에 사용할 음향을 찾으러 나온 잭 테리는 우연하게 한 남자와 여자가 탄 차량이 강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인 샐리는 구하는데 성공하지만 남자는 구하는데 실패한 잭은 그 남자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고, 그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계획된 살인임을 알게 된다.


필사의 추적은 진실을 추적하는 주인공 잭의 이야기지만, 잭의 위치는 능동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쪽에 가깝다. 그의 관점은 소리를 통해 세상을 관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초반 시퀸스에서 그가 사고를 귀로 듣는 장면은 망원경이 아닌 음향마이크를 사용했을 뿐, 전형적인 관음의 형태를 보여준다. 멀리서 전지적 작가 시점을 즐기는 듯한 잭의 모습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 처럼 살인을 목격하게 되면서 어그러지게 된다. 병원에 당도해서 그를 입막으려는 보좌관을 만난 뒤, 잭이 진실을 숨기려는 세계에 분노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입을 닥치게 만드려는 세계에 분노해서 진실을 파해치는 부분이나 샐리나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를 들려주면서 자신이 진실을 알고 있음을 과시하는 부분 등을 볼 때 이들은 잭의 관음증 환자의 성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잭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영화는 영화의 제작 기법을 그대로 따라간다. 잭은 자신이 가진 음성만으로는 확실하게 진실을 증명하기는 어려우니 이를 증명할 수 있는 필름들을 찾아낸 뒤, 이 필름에 편집을 가하고 음향을 덧씌워서 하나의 영상으로 만든다. 즉, 두개의 파편적인 진실이 만나서 하나의 진실이자 영화가 된 것이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대선 후보 살인의 진실과 이를 주도한 흑막 사이의 서스펜스가 아닌, 흑막과 별개로 통제불능의 여성혐오 살인마와 그의 존재를 모르고 진실을 어떻게 폭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주인공 남녀의 서스펜스가 주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가 보통 흑막을 쫒아가는 이야기 였다면, 필사의 추적은 진실과 진실에 향한 자의식 과잉이 결국 파멸을 부른다는 기묘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가파멸의 끝은 진실이 싸구려 B급 호러무비속에 묻히면서(샐리의 비명을 영화 인트로에 나온 영화의 비명 음향으로 쓴다) 자기환멸적인 엔딩으로 귀결되게 된다.


드 팔마는 이러한 자가파멸적인 이야기를 특유의 과장되고 팽팽한 연출로 묘사한다. 살인마가 송곳을 집어드는 장면과 멀리서 나가는 여성을 위압적인 원근감을 조성하는 부분이나, 잭이 자신의 사무실의 모든 테잎들이 지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카메라가 패닝으로 빙글빙글 도는 장면은 스타일리쉬하다 못해 과격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드 팔마 특유의 여성 혐오 역시 영화 전반에 묻어 나오는데, 특히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샐리나 몇몇 여성 케릭터들은 짜증나다 못해 살인마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정도다. 영화에 나오는 여성들은 머리가 텅비었으며 공허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심지어는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만든다. 영화 내의 여성 묘사는 그래야 할 필연성이라기 보다는 여성이기 때문에 짊어져야하는 숙명적인 멍청함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드 팔마 감독의 필사의 추적은 이런저런 짜집기 영화라는 비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한계점이 분명하면서도 보는 내내 재미를 보장하는 스릴러 영화라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드 팔마 특유의 과장되고 남성적인 연출은 다른 감독들이 쉽게 흉내내지 못하는 포스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현대적인 감각에서 보더라도 놀라운 장면들(클라이맥스의 자동차 추적신이라던가)도 있다. 물론 드 팔마의 여성혐오증의 마음에 안들면 영화를 재밌게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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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캐너스는 그의 대표작들과 비교해서 봤을 때,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스캐너스는 브루드가 보여주었던 크로넨버그의 가능성이나, 비디오드롬이 보여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인간 종말론, 폭력의 역사나 이스턴 프라미스의 폭력과 인간의 관계론에는 한참 떨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스캐너스의 이야기는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자들이 나오는 그저그런 B급 SF 영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이러한 평범한 B급 SF영화를 그의 일관된 표현방법과 독특한 설정을 통해 장르영화의 진부함을 뛰어넘는 독특한 영화로 승화시킨다. 


사실, 스캐너스의 이야기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진부하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여기에 하나의 설정을 추가한다. 보통 초능력자들이 사람의 정신을 ‘읽거나’ ‘조종’한다는 설정들은 대단히 추상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대단히 편리한 능력(?)이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이 전무한 일종의 결과론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는데, 스캐너스는 이 과정에 대해서 재밌는 설정을 부여한다. 초능력자인 스캐너스가 자신의 뇌와 신경 시스템을 다른 인간의 시스템에 덧씌운다는 이 기묘한 설정은 크로넨버그가 그의 작품 세계에서 끝없이 추구한 인간과 이물의 결합과 맥락을 함께한다고도 볼 수 있다.


크로넨버그는 이 마인드 콘트롤의 과정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형태로 폭력적으로 묘사한다. 스캐너들이 타인의 정신에 융합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장면은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도 기괴하다. 중저음으로 낮게 깔리는 저음의 BGM과 발작을 일으키는 듯한 모습의 스캐너, 그리고 피를 흘리거나 구토를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상대방의 묘사 등등은 타인과 나의 결합이라는 기괴한 설정을 잘 살려낸다.


혹자는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에 대해서 ‘폭력과 섹스’ 그 자체라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에 비추어본다면 스캐너스라는 영화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육체적 결합인 섹스를 스캐너스는 불쾌하고 극심한 편두통의 형태로 재해석했다. 그 유명한 머리를 날려버리는 장면이나 비디오드롬의 끈적하고 음습한 결합, 자동차 충돌과 성욕을 기계적으로 결합한 크레쉬, 망가진 정신의 육체 발현을 뒤틀린 모성과 결합해서 표현한 브루드 등등과는 다르지만, 초반의 리건이 스캐너 능력으로 사람 머리통을 날려버릴 때 보여주는 기묘한 미소, 주인공이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하면서 보여주는 기묘한 자신감들 등등 양자의 불쾌하고 폭력적인 결합과 섹스의 연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스캐너스는 크로넨버그의 주제의식 등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는 아니다. 하지만, 스캐너스는 일반적인 B급 영화가 아니다. 크로넨버그 식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독특한 영화라 할 수 있으며, 장르 공식을 뒤틀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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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불량공주 모모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감독인 나카시마 테츠야의 2010년작 고백은 독기로 가득찬 작품이다. 동명의 소설을 베이스로 하고 있는 영화 고백은 일본 내에서는 사회적 이슈라 할 수 있는 청소년 흉악 범죄와 청소년 흉악범을 사실상 보호하고 있는 청소년법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일본 내에서 청소년법을 다룬 추리소설이나 서브컬처들이 많은 것을 생각을 하면 고백은 흐름을 타는 그저그런 작품으로 취급받을 법만도 하지만, 감독은 이 이야기에 꽉짜여진 이야기 구조와 현란한 영상 편집,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과격한 독기를 통해 영화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로 이끌어 낸다.


청소년 흉악범죄의 최대이자 최악의 난점은 다른 흉악범죄와 다르게 청소년들은 사회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기에 계도하고 선도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보통의 작품들은 청소년의 계도와 죄인에 대한 복수 사이의 적당한 지점에서의 타협을 시도하게 되고, 그 결과 상당히 미적지근한 이야기를 반복/재생산하거나, 혹은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붕뜬 잔혹한 괴물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고백은 그런 미적지근한 이야기나 비현실적인 괴물 따위는 발로 걷어 차버린다. 고백의 이야기는 막장이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의 확장이자 연장이며, 동시에 가해자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이나 자비를 보여주지 않는다. 


고백의 복수극이 다른 여타 영화들과 차별적인 부분은 가해자들(나오키와 슈야)의 숙명론적인 파멸과 유코의 치밀한 복수, 그리고 그에 대한 자비없는 묘사이다. 초반 30분에 걸친 오프닝 시퀸스(!)와 유코의 고백, 그리고 유코가 뿌린 독에 서서히 목이 조여가는 과정을 감독은 자신의 전공(나카시마 테츠야는 CF 감독 출신이다)인 경쾌하고 유쾌한 영상에 맞춰서 1g의 자비도 없는 독기 가득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재밌는 점은 나오키와 슈야는 영화 내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분명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코가 쳐놓은 덫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아니 빠져나가지 않는다. 특히, 슈야의 경우에 유코가 이야기 했던 '폭탄은 만든 것도 당신이고, 버튼을 누른 것도 당신이야'는 이러한 구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자가파멸적이고 단단하게 맞물려 들어가는 이야기 구조를 통해 영화는 계도할 여지가 있는 청소년에 대한 과도한 폭력 논란과 미적지근한 복수 논란을 동시에 잠재워버린다.


하지만, 고백이 보여주는 독기는 단순하게 청소년법으로 빠져나가는 청소년 흉악범죄자들에 대한 분노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구체적으로 이야기에 드러내지만 않을 뿐, 좀더 근본적인 기성세대와 청소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괴리, 그리고 썩어들어가는 일본 사회를 묘사한다. 30분에 걸친 오프닝 시퀸스 동안, 유코는 혼자 이야기하고 그 안에서 학생들은 유코가 이야기를 하든 말든 각자 따로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는 더 심각하다. 이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이와 어른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손에 꼽을 만큼 적으며 아이와 어른이 서로 소통하는 장면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고백이 보여주는 이 두 세계의 괴리는 나오키와 슈야의 공간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오키의 방은 마치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의 방을 연상케 할정도로 유치한 모습을 보여주며, 슈야의 경우 아예 자신의 방이 집에서 떨어져서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부모의 과보호(나오키의 경우)와 부모의 부재(슈야의 경우)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치라 할 수 있는데, 재밌는 점은 둘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애정'을 끝없이 갈구한다는 점이다. 나오키가 유코의 딸을 풀장에 집어던진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괴롭히는 세상에 대한 반발 심리와 인정받고자 했던 욕구(칼에 찔리기 전에 보았던 나오키의 환상) 때문이었으며, 슈야의 경우 아예 미즈키가 대놓고 마더콘이라고 조롱할 정도로 심각한 애정결핍 환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 동기는 바로 부모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아이들을 부모세대의 무관심 또는 잘못된 애정에 대한 피해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슈야와 미즈키를 적극적으로 이지매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영화는 스타일리쉬한 컷들로 묘사한다. 영화 고백의 학교는 소악마들이 지배하는 지옥이며, 어른은 무관심하고 아이들은 잔혹하다. 그렇기에 슈야와 나오키가 걷는 파멸의 길은 개인적인 숙명이 아닌, 일본이라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파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고백'은 러닝타임 내내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현란하고 비현실적인 카메라 워크와 컷구성, 미장센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붕뜨지 않고 놀라운 흡입력을 갖는 작품이며, 감독이 생각하는 일본 이라는 사회에 대한 독기 어린 조소로 가득찬 작품이다. 단순한 복수극으로서도 엄청난 작품이지만, 감독이 만들어내는 일본이라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가치가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실물 보다 큰'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이 영화에서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 흔히들 'Based on Real Story'라고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실화같지 않은 실화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은 밝고 아름답고 살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실물 보다 큰 은 그런 일반적인 실화극과는 다르다. 만약 실물 보다 큰이 실화극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에드가 아들을 죽이려고 시도하고 병원에 끌려난 뒤, 코티즌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에드의 모습을 눈물겹게 보여줬어야 했을테니까. 오히려, '실물 보다 큰'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미지를 차용하고, '중독' 상태의 에드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묘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분석하기 앞서서 우리는 1950년대 미국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는 두 강대국에 의해서 양분된다. 소련과 미국,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냉전. 그와 별개로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로 유래없는 부흥기를 맞이한다. 한 때, 이민자들의 2류 국가였던 미국은 이제 마샬 플랜을 통해 한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부흥을 지원하며, 자유의 수호자이자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세계는 평화로웠고, 정의로웠으며, 미국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메리카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1958년은 이제 그 팍스 아메리카의 끝자락이었다. 1960년대가 어떤지는 모두 알지 않는가? 약쟁이 히피들과 반전, 그리고 더러운 전쟁인 배트남전까지.


'실물 보다 큰'은 바로 이 지점, 팍스 아메리카의 종말 직전에서 시작한다. 가장인 에드는 학교 선생과 택시 회사 접수원일을 동시에 하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장이다. 그런 그가 심각한 희귀 불치질환에 걸려서 고통 받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 평생 코티즌을 복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이 약에는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영화의 대부분은 에드가 코티즌을 복용한 이후의 심리상태를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과대망상증에 빠져서 학부모들 앞에서 위대한 미국의 이상향을 설파하지 않나, 직장을 때려치우고 위대한 미국의 미래를 위해 논문을 내겠다고 하지 않나, 심지어 영화의 종반에는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아들을 죽이려한다.


에드라는 인물은 미국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가족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며, 미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명의 시민이고, 가족을 사랑하며, 신앙에 충실한 남자다. 문제는 이런 모습들을 영화는 그가 정상일 때 보여주는 것이 아닌, 그가 코티즌으로 정신이 훼까닥 돌아버린 이후에 보여준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쓰러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코티즌을 복용하지만, 점차 약을 맹신하며 약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에 취했을 때 그는 스스로를 거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웃기는 건, 실제 그는 그의 동료인 윌리에 비해서 왜소하게 묘사되며, 주변 사람들과 관객들은 이미 그가 약에 취해서 맛이 간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그의 아들마저도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보결선수 뿐이었다구요!'라고 아버지를 대놓고 까버리며, '이런(약에 취한) 아버지 따위는 그냥 죽어버리는게 더 나아요!'라고 선언하고, 그의 부인은 영화의 말미까지 그의 광증을 알아채지만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못하고 그저 끌려다닐 뿐이다. 


제임슨 메이슨의 과장되고 위압적인 연기는 에드라는 케릭터를 단순한 미치광이 그 이상으로 만든다. 1950년대식의 촌스럽고 과장된 연기를 뛰어넘어 신념에 가득찬 선지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제임슨 메이슨의 연기는 웅장하며 거대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와 신뢰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약빨 좀 받은 약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실물 보다 큰은 이런식으로 요즘 영화 같이 대놓고 이야기 하지만 않을 뿐, 그 속에 1950년대 미국 사회와 시대상에 대한 격렬한 악의를 드러낸다. 에드가 설파하는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관이란 한낮 약쟁이의 약빤 소리에 불과하며, 심지어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다만 아무도 입으로 말을 꺼내지 않을 뿐. 게다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의 결론은 '그(미국)는 불치병을 갖고 평생 약(임시방편)이나 빨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이기 까지 하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1950년대는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기묘한 이미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다시 오지 않는 미국의 황금기로 평가받고 있고, 많은 매체들은 미국의 밝은 이미지(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를 묘사할 때 많이 차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폴아웃 3와 베가스의 아름답고 바람직하지만 어딘가 망가지고 뒤틀려버린 듯한 이미지들이다. 놀랍게도, 실물 보다 큰 은 바로 그 시대가 현재였던 그 시점에서 이 뒤틀려버린 미국의 이상향을 보여준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딘가 나사빠지고 불연속적인 대화의 연속이며, 가족의 행복한 모습과 이미지의 이면에는 폭탄과도 같은 긴장감을 깔아둔다. 2.35 대 1의 시네마스코프 기법은 1950년대의 사회를 아름답게도 묘사하지만, 수평적 구도와 수직적 구도를 혼합해서 인물과 인물 사이의 묘한 거리감과 수직적인 위계질서(특히 위의 포스터에서 나온 그림자를 통한 묘사 장면에서 압도적으로)를 구축한다.


영화의 독기를 제쳐두더라도, 영화가 보여주는 선견지명은 엄청나다. 교사인 에드가 이야기한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와 이상은 1960년대를 거쳐서 이제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그리고 '공립학교 교사'가 이야기한 '미국의 이상향'은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의 붕괴로 이미 설자리를 잃어버린지 오래다. 물론, 영화가 이야기 한대로 미국은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며, 미국의 가치관은 변화하여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국가의 이상적인 인재상을 배출하는 공교육 시스템의 붕괴와 '교사' 에드가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미국의 문제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실물 보다 큰 은 미학적으로든, 이야기로든 간에 이미 1958년에 찍었다고 생각하기 힘든 영화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1950년대의 유토피아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썩어들어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제임슨 메이슨의 웅장한 연기로 비꼬는 모습은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나갔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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