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3D 프린터가 보드게임이라는 취미 기준에서 불러온 혁명은 엄청나다. 보드 게임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드게임에서 게임을 구성하는 콤포넌트들을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콤포넌트 정리를 위한 수요는 존재해왔고, 정리를 위한 보드게임용 악세사리를 제작해서 파는 소규모 브랜드들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콤포넌트 정리 악세사리의 기능은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게임에 따라서 콤포넌트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정리 및 수납 수요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게임에 필요한 다양한 계산과 게임 요소 관리가 사람이 직접 해야하는 만큼, 이런 것들을 정리해서 관리하는 것의 보드 게임 플레이어의 수요는 항상 존재해왔었다. 그러나 이런 세부적인 수요들을 하나 하나 따라주기에는 보드 게임 시장의 수요는 다양하지만 한정되었고, 수율은 당연히 맞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3D 프린터 이전의 보드게임 플레이어들은 대체품과 자가 제작의 대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3D 프린터의 등장으로 게임에 필요한 주변 악세사리들의 제작이 매우 쉬워졌다. 게임 플레이 중에 카드를 꽂거나, 박스 안에 콤포넌트를 정리하거나 등의 편의성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미니어처 워게임에서 쓰는 지형 지물의 제작에 활용하는 등의 다양한 활용처가 발견되면서, 보드 게임 플레이어들은 때 아닌 4차 산업의 혜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3D 프린터의 한계는 명확하다:3D 프린터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은 기존의 공산품 만큼의 품질을 확보하기 힘들다. 산업용으로 쓰는 3D 프린터 수준이 아니면 시장에 유통되는 공장 생산 미니어처 수준을 맞추기 힘들다. 또한 그만한 퀄리티의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관리해야하는 부분이 늘어난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3D 프린터는 3D 모델링 파일을 만드는 단계, 그리고 3D 모델링을 3D 프린터로 출력할 수 있게 공정을 분해하여 관리하는 슬라이싱, 마지막으로 3D 프린터로 출력하는 실출력 단계로 나뉘어진다. 3D 프린터가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기존 제품 생산에서 필요했던 많은 시행착오와 설정 과정을 자동화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동화된 영역을 벗어나면 3D 프린터는 공산품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려준다. 물론 다양한 걸 시도하는 3D 프린터 유저들이 많아진 만큼, 출력물의 결과물을 올리는 법이나 제품을 관리하는 방법이 인터넷을 통해서 공유되는 중이고 고난도 작업에 도전하는 허들은 그만큼 낮아졌다.

 

3D 프린터의 등장은 한계와 가능성이 분명하다. 기업 관점에서는 다품종 소량 생산의 길을 열었고, 일반 개인의 관점에서는 자잘한 생활 물품이나 공예품을 뽑아낼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하지만 품질이 높은 미니어처나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데 있어서 3D 프린터는 많은 제약 사항들이 존재하기에, 기존의 공산품 제품들을 완벽하게 대체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3D 프린터가 공산품과 수공예의 틈새를 매꾸어주면서 여지껏 드러나지 않았던 수요와 가능성을 충족시켰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3D 프린팅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1983년까지 올라간다는 점이다. 3D 프린팅이 산업계에 등장한지 근 40년이 지났지만, 왜 이제서야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3D 프린터가 대중화될 수 있을만큼 기기 가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딥러닝과 인공지능 기술이 거슬러 올라가면 컴퓨터 과학 태동기부터 존재해왔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기술의 축적과 판단(3D 프린팅을 움직이는 동선을 짜고 기기를 제어하는 로직을 만들어주는 슬라이서 같은)을 대신 처리해주는 알고리즘의 발달이 3D 프린팅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대중화를 불러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의 대중화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수많은 사람들이 기술을 테스트 하고, 자발적으로 개선점을 찾아서 기여하였기 때문에 이런 기술들은 찻잔 속의 폭풍이 아닌 대중화가 될 수 있었다.

 

3D 프린팅의 사례는 게임 시장과 산업에도 똑같이 대입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3D 프린팅이 보여주는 혁신은 뚜렷한 특징들을 보여준다:1)개념 자체는 이미 과거에도 존재한다. 2)혁신이 불러오는 결과는 생각보다 그 한계와 성과가 명확하다. 3)혁신이 만들어낸 파장은 과거에 보이지 않던 틈새 수요를 드러내는 집중되었다. 4)인터넷이라는 공간이 혁신의 베이스가 된다.

 

이러한 요소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모드'일 것이다. 기존 게임을 개조해서 게임의 개조된 버전을 만든다는 모드의 개념은 오랫동안 존재해왔었다. 기존 게임에 이미지를 덮어서 불법 카피판을 만들던 시절까지 치면 더 오래되었겠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모드의 태동이 모드가 배포될 수 있는 인프라(PC통신이든 인터넷이든)가 깔리면서 부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3D 프린팅의 사례와 많이 유사한 부분을 보인다. 하지만 카운터 스트라이크와 같이 모드에서 출발한 게임들이 게임 시장의 구조와 근간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을 생각하면 그 질감을 동일하게 보기는 힘들 것이다. 어찌보면, '무주공산'과 같은 게임 시장에 모드가 도입되면서 그 공백을 빠르게 채워나갔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모드가 일으킨 혁신의 사례는 배틀로얄 모드의 사례일 것이다. 배틀로얄 자체는 ARMA의 모든 DAYZ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며, H1Z1의 배틀로얄 모드를 거쳐서 PUBG와 포트나이트 배틀로얄 모드를 통해서 대중화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 이후, 이들의 거둔 파장을 고려해 보았을 때 배틀로얄의 성공은 '생각보다' 미미했다. 분명 배틀로얄 모드의 등장은 기존 데스매치 등에 대해 매너리즘을 느끼던 플레이어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완벽한 대체품이 아닌 '대안 선택지 중 하나'라는 점에서 정해진 파이를 놓고 싸우고 있다.

 

하지만 배틀로얄의 존재는 기존 시장이 드러내지 못했었던 영역에 조명을 비춤으로써, 기존 게임들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콜 오브 듀티 워존의 사례일 것이다. 콜 오브 듀티 워존은 오랫동안 데스매치와 킬스트릭에 얽메여 있었던 콜옵의 멀티플레이를 배틀로얄로 재해석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강탈 모드를 통해 배틀로얄 역시 새로운 양식으로 재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워존을 통해서 등장한 혁신의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질지 여부는 불투명하지만(매년 나오는 콜옵의 특수성 상 게임 수명이 매우 짧기 때문에), 배틀로얄 모드가 성공을 위해 단순히 똑같은 모드를 배끼는 것을 넘어서 기존 게임을 재해석하고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단 점에서 콜옵 워존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