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미드소마, 위커맨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여름, 낮이 가장 긴 날 열리는 미드소마에 참석하게 된 친구들. 꽃길인 줄 알고 들어간 지옥길, 축제가 끝나기 전까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미드소마는 상당히 독특한 영화이다. 장르적인 구분을 내리자면 미드소마는 공포 영화다. 그러나 미드소마는 과연 무엇에 대한 공포영화인가? 라는 질문으로 들어간다면 이 영화는 오리무중에 빠지기 쉽게끔 되어 있다. 이교도 사회이자 단절된 사회인 호르가가 공포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교도들의 사회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 주인공인 대니가 겪었던 사건과 대니 주변 인물들의 행동들, 그리고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영화가 내리는 결론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본다면 단순히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깜짝 놀라게 만드는 공포 영화라고 쉽게 정의할 순 없다.

 

미드소마가 다루고자 하는 공포와 그 감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위커맨(1973)을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의 섬에서 사라진 소녀를 찾기 위해서 분투하는 경찰관이 결국은 인신공양의 제물로 간택되어 죽음을 맞이한다는 위커맨은 미드소마 뿐만 아니라 수많은 호러 영화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위커맨의 이야기 구도는 올바른 주인공과 사악한 이교도 사이의 알력으로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인 경찰관은 경찰 제복을 입고 1970년대 관점에서도 캐캐묵은 도덕관념과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에 대비한 사이비 종교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긴 하지만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갖추었다. 위커맨의 서사 구조를 단순한 선악의 대결로 보기 힘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위커맨의 핵심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제 3자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춤과 율동, 그리고 자유분방한 성관념을 통해서 드러낸다. 사람들이 원시 고대 종교가 갖고 있는 편견들(인신공양, 생명 잉태에 있어서 여성의 강조, 성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 등)을 한 데 모은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악으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영화는 균형의 추로서 우리가 이입할 수 없는 보수적인 종교와 권위를 따르는 주인공을 설정함으로 어느 한쪽에 몰입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두 문화의 충돌을 목도하게 만든다.

 

위커맨의 서사가 '제 3자의 관점에서 본 두 문화의 충돌'이라면 미드소마 서사의 핵심은 '이질적인 두 문화의 결합'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위커맨의 서사가 제 3자적인 관점이었다면 미드소마의 서사는 전적으로 대니가 호르가라는 공동체에 어떻게 편입되는가를 다루는 내부인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분명 위커맨에서 나타나는 두 문화의 충돌이 미드소마에서도 일정 정도 다루어지긴 하지만, 미드소마는 모든 이야기와 서사 구조, 상징들이 대니의 삶에 있어서 시련-방황-극복-공동체의 편입이라는 구조로 맞춰졌다. 어떻게 보면 미드소마는 구조적인 부분에서 위커맨을 차용하되(인신 공양을 하는 이교도에 대한 이야기), 핵심적인 부분에서 위커맨과 정반대로 서사를 전개하여(이입할 수 없는 주인공 vs 모든 서사 구조의 중심인 주인공) 레퍼런스를 뛰어넘고자 하는 야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미드소마는 종교적인 상징과 징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일찍이 조셉 켐벨은 영웅 신화에 대해서 "인간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자식의 탄생, 성장, 부모로부터의 독립 등)을 상징화 한 것이 신화이다"라 했다. 미드소마는 비록 영웅 신화를 다루고 있진 않지만, 사람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들을 서사와 배경에 녹여냈다는 점에서 조셉 캠벨이 이야기한 구조로서의 신화를 따르고 있다. 영화는 첫 시퀸스에서 겨울의 호르가와 대니가 가족을 잃는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겨울과 죽음의 이미지를 교차시키고, 한 사람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호르가로의 여정으로 이어지는 필연성으로 이어나간다.

 

미드소마Midsommar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사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24절기 중 해가 가장 오래 뜨는 '하지'다. 이러한 하지는 문화권에 따라 해가 가장 오래 떠있다는 점에서 생명이 가장 충만한 시기로도 묘사가 되는데, 첫 시퀸스가 대니 가족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죽음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서 시작해 해가 가장 긴 시기에 맞이한 생명력이 넘치고 폭발하는 순간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계절적 변화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변화할 수 밖에 없는 흐름을 다루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대니가 어떤 식으로든 그 나름대로의 구원을 찾게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이러한 생명의 폭발을 그로테스크한 장면들과 양식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우선 영화에 나오는 다양한 벽화들이나 상징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양식 그 자체로서 그로테스크에 부합하기는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단순히 양식으로서의 그로테스크를 넘어서 육체의 훼손과 절단이라는 고어를 통해서도 생명력의 폭발으로 그로테스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의 주기가 끝난 노인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나 근친상간의 결실인 루벤의 존재, 피의 독수리를 당한 시체에 꽃을 꽂아두어 죽음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장면 등은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고어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감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을 최고도로 고양시킨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로테스크한 형상물들은 동시에 한 시대의 넘쳐흐르는 기운의 표현이다….물론 그로테스크한 것의 원동력을 두고 보면 이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퇴폐적인 시대나 병적인 두뇌를 가진 자들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그로테스크한 것은 퇴폐적 시대와 병적 개인들에게는 세계와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적인 반작용의 표현이다…이 두경향 가운데 어느 경향이 창조적 추진력으로서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의 배후에 있는가 하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에두아르트 푹스, 당조의 조형예술;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재인용.

 

아리 애스터는 이미 전작이자 데뷔작이었던 유전에서도 미니어처를 통해서 불길한 징조의 반복이라는 이미지를 구체화 시킨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 작품 미드소마에서는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최대로 발휘하였다. 영화는 곳곳에 이미지와 상징을 촘촘하게 심어놨으며(심지어 영화의 첫 그림은 영화 시놉시스 전체의 요약이다), 이러한 영화 속 이미지와 상징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자 징조 그 자체다. 즉, 하지 축제 자체가 생명력의 과잉에 대한 상징인 것처럼, 영화는 이미지의 과잉을 통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불길함과 필연성을 배치하며, 단지 개별 장면의 그로테스크함을 넘어서 영화 자체가 그로테스크 양식 자체가 된다.

 

그리고 생명력의 과잉에는 필연적으로 생명이 소비하여야 하는 소비재, 먹이가 필요하다. 그 먹이는 바로 외부에서 데려온 '죽어 마땅한 산 재물들'이다. 영화의 전반에 등장하는 외부자들은 영화 이야기와 호르가 공동체 관점에서 죽어야 하는 당위를 가지고 있다:마크는 섹스를 밝히면서 마을의 신성한 나무에 오줌을 갈기는 불경을 저질렀고, 조쉬는 학사 논문을 핑계로 마을의 경전을 도둑질하려 하였다. 잉마르가 데려온 커플 역시 호르가 공동체의 규범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한 당위를 얻었다. 

 

이 외부자들에게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현대문명의 개인주의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외부자들은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호르가 공동체와 대치된다. 영화의 초반 시퀸스에서 대니를 짐처럼 생각하고 해어지길 주저하는 크리스티안이 그러하고, 원치않게 대니를 스웨덴 여행에 동참시키면서 불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의 친구들도 그러하다. 이들을 다루는 영화의 시퀸스는 매우 '어색'하다. 무언가 서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지만, 각자 자기 주장에 갇혀서 멤돌 뿐이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체면치례나 사회관계를 고려하여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티안의 최후는 특별하다: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겨울잠과 겨울의 기운을 대변하는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화형을 당한다. 그는 마크나 조쉬과 같은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대변하지만, 흥미롭게도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주인공인 대니와 여성성의 대척점에 섰다.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크리스티안이 마을 공동체의 일원과 섹스를 하는 장면이다:기존 공포 영화 문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섹스 장면은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점, 섹스와 같은 개인적이고 은밀한 행위조차도 개인의 것이 되지 못하는 점, 남성성의 거세 등등이 드러난다. 섯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현대문명을 남성성에 호르가와 같은 고립된 공동체를 여성성에 대입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결국은 펠레가 대니에게 물었던 '과연 그(크리스티안)가 너를 지탱해주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대니의 대답은 크리스티안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와 개인주의를 버리고 호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니는 5월의 여왕으로서 세상의 중심에 서며, 크리스티안이 외도를 하였을 때의 충격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나눈다기 보다는 동기화하는')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불타죽어가는 호르가 마을의 산 제물에 공감하며 통곡을 할 때, 대니 혼자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미드소마는 감독의 야심이 넘처나는 작품이다. 그리고 관객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충분히 있고 감독도 자신의 재량을 십분 발휘한다. 그러나 영화 자체가 과잉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많은 상징들과 복선들을 영화 내에 우겨넣고 관객이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리다:영화 초반에 24절기를 암시하는 달의 그림을 넣은 장면이나 곰과 공주의 그림을 대니가 자고 있는 방에다 붙여 넣은 것, 호르가 마을에서 묵을 때 각 인물들의 마지막이 침대 머리맡에 태피스트리 형태로 새겨진 것, 바이킹 전통 처형 방식인 피의 독수리나, 조쉬의 발에 세겨진 도둑이라는 룬문자 등등. 영화는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디테일에 집착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1회 감상으로 모두 찾아내는 건 어렵다. 물론 영화의 큰 틀에서의 구조가 관객들도 충분히 따라올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미드소마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자기만 털어놓는 괴작이 될 뻔하였다. 

 

즉, 미드소마는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영화 정보량의 임계치에 근접한 물건이다. 더 과하거나 이야기 구조를 비틀었으면 이 영화는 카드로 만들어진 집처럼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미드소마는 공포영화를 사랑하는 팬들이나 특이한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들에게 어필할만하며, 이후로도 계속 거론될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만약, 아리 애스터가 미드소마의 성공에 취해 더 야심찬 영화를 만든다면, 그때는 이해 자체가 어려운 괴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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