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MMO(Massively Multiplayer Online) 게임들은 많은 게이머들의 꿈이었다:수많은 사람들과 협동, 경쟁한다는 발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게임은 창작과 향유, 양 측면에서 상호 보완 발전하였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본격적인 콘솔 MMO 게임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톰 클랜시의 디비전이나 데스티니 1편 같은 게임들이 대규모 자본을 등에 업고 등장한 것은 불과 3~4년전의 일이니 말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프라와 산업의 성숙도라 할 수 있다. MMO 같이 상시 온라인에 접속해야하는 게임이 등장할 수 있는 인프라가 확충된 것은 콘솔 기준에서 본다면 불과 얼마 되지 않았으며, PC 온라인 게임을 통해서 검증된 성공 모델을 콘솔 게임에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한 제작자들의 생각도 필요했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데스티니와 디비전이었고 이들의 고민은 실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기록적인 흥행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수많은 게이머들이 실망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데스티니와 디비전은 그 자체로도 재밌는 부분이 많은 게임이었지만, 동시에 어딘가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마케팅과 게이머의 인식 사이에 괴리가 심한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데스티니 2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콘솔 MMOFPS 장르의 표준을 세웠다:스토리의 혁신, 레벨링 구조와 아이템 파밍 구조, 2번의 DLC와 2번의 확장팩을 통해 가다듬어진 게임플레이 등등은 1편이 부족했었던 부분을 모두 뜯어고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데스티니 2의 컨텐츠 소비 구조는 그 어떤 MMO 게임보다도 세련되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이다. 와우 같은 PC MMO 게임에 비교한다면 데스티니 2의 컨텐츠 분량은 많은편이라 할 수 없지만, 데스티니 2는 분량이 아닌 게임 플레이의 유기적인 흐름과 그에 따른 몰입 및 보상이 더 인상적인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데스티니 2는 파밍이 중심인 FPS다:이러한 게임들은 소위 '폐지를 주워서 더 나은 폐지를 줍는 게임'이라고도 불리는데, 반복적인 사냥과 컨텐츠 소비를 통해서 플레이어는 현재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들보다 더 나은 아이템을 장비하고,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아이템을 최적화 시키며 강해지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기에 상당수의 파밍 중심의 게임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아이템을 덜 지루하게 획득하게 만드는가'가 게임 디자인의 중요 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데스티니 이전에 파밍 중심의 FPS를 성공시킨 보더랜드 프랜차이즈의 경우, 이러한 문제를 적들을 잡고 박스를 열때마다 쓸만한 무기들이 쏟아지는 막 퍼주기로 이 문제를 쉽고 간단하게 해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보더랜드 프랜차이즈의 문제는 게임이 그런 점에서 단순하고 직관적이지만 전혀 섬세하지 못할 뿐더러, 컨텐츠의 소비 구조가 매우 단순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보더랜드는 이를 무지막지한 DLC 발매로 커버하였지만, 게임 내에서 일어나는 장비와 컨텐츠 분량의 인플레와 복잡화, 더 나아가서 무너지는 게임 벨런스로 인해 발매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막장이 되어버리는 문제를 갖게 되었다.


데스티니 2의 강점은 컨텐츠 소비 템포를 반복되고 지루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하게 배분되었고, 컨텐츠 소비 속도의 많은 부분을 플레이어의 자율에 맡겨두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데스티니 2는 1편과 유사하게 적당한 크기의 월드맵 몇개와 인스턴트 던전, 레이드, 패트롤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임이다. 데스티니 2에서 크게 바뀐 점은 1편의 컨텐츠 부분이 아닌 컨텐츠의 소비 속도와 템포다:플레이어는 월드맵에서 패트롤과 퍼블릭 이벤트, 로스트 섹터 탐험 등의 자잘한 컨텐츠들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다. 게임은 이러한 이벤트를 클리어할 때마다 보상으로 토큰을 주는데, 플레이어는 이 토큰을 각 지역 NPC에게 줌으로 자신이 장착하고 있는 아이템 레벨보다 더 높은 레벨의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게 된다. 게임은 이러한 토큰을 모으기 위한 크고 작은 활동들을 조밀하게 배치하고 플레이어가 선택하게끔 만듬으로써 게이머는 플레이 내내 끊김없이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데스티니 2가 각각의 활동들이 별다른 특이점 없는 단순한 반복임에도 불구하고 생동감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작위의 이벤트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것이 가시적인 보상으로 직결된다는 점 때문이다. 게임은 이런 부분에서 각 컨텐츠의 깊이보다는 컨텐츠 간의 유기적인 소비를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데스티니 2 컨텐츠에서 큰 변화는 인스턴트 던전 - 좋은 보상으로 이어지는 MMO 구조를 탈피하여 월드맵 중심으로 게임 플레이를 재편하였다는 점이다. 많은 게임들이 인던을 통해서 어려운 보스에 덤비는 구조를 강조하였지만, 동시에 파밍을 위해서 인던 중심으로 게임을 진행하다 보니 게임이 반복적이고 지루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기에 와우 등의 MMO에서도 월드맵에서 즐길 수 있는 컨텐츠를 보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데스티니 1편에서도 월드맵 중심의 퍼블릭 이벤트나 테이큰 킹의 패트롤 및 바운티 모드가 존재하였지만 데스티니 2처럼 그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데스티니 2는 1편의 컨텐츠들을 최대한 유기적으로 연결되게끔 정리하였고, 컨텐츠의 소비 시간과 보상을 적절하게 조정함으로써 플레이가 지루하지 않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플레이어가 스스로 컨텐츠를 연결하여 소비하게끔 만들었기에 게임이 반복적이지 않게끔 느껴진다는 강점도 있다. 


디비전이나 보더랜드 시리즈, 이전에 나왔었던 파밍 FPS(심지어 전작인 1편)와 비교하였을 때, 데스티니 2의 성공은 게임 전체의 혁신이라기 보다는 게임 템포를 부드럽게 조정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정만 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스티니 2는 파밍을 지루하지 않게끔 만들었다는 점에서 게이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게임플레이의 혁신은 없지만 데스티니 2가 전작에 비해서 월등하게 나아진 부분들은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데스티니 2는 레벨업을 통과의례로 만들어 간략화 시키고, 일정 수준까지 장비를 파밍하기 쉽게 만들어 게이머가 레벨업과 파밍 중 지치지 않고 스토리 미션 클리어 및 엔드 컨텐츠에 입문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엔드 컨텐츠 입문하는 단계에서부터는 일정 '임계점'을 돌파하기 어렵게 만들어둠으로써 컨텐츠의 소진을 최대한 막고 있다. 현재로써는 레비아탄 레이드 미션과 나이트폴 스트라이크가 엔드 컨텐츠이지만, 12월 오시리스의 저주 등으로 정기적인 컨텐츠 업데이트가 이루어질 예정이기에 컨텐츠의 소비 구조나 속도에 대해서 논하기는 좀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게임은 케릭터가 강해지는 과정 자체가 무작위적인 과정이 아닌 플레이어에게 일종의 '로드맵'을 제공하고 그 과정을 플레이어가 통제할 수 있게끔 만든다는 점(퍼블릭 히로익을 공략하거나, 암시장 상인에게서 물품 구매, 주간 미션 진행 등등)은 무작위성에 너무 의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데스티니 2의 강점은 이 뿐만이 아니다. 전작이 거대한 세계관을 소개하는데 바쁜 나머지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핵심 스토리 라인을 만들어내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면 데스티니 2는 단순하지만 몰입되고 설득력 있는 스토리 라인과 케릭터들이 있다. 전작이 가디언이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스토리의 체감이 아닌 끊임없이 대사로 풀어냈었다면(물론 확장팩으로 갈수록 나아지긴 했지만), 데스티니 2는 이야기의 중심을 간략하기는 하지만 빛을 둘러싼 인물들의 갈등과 고뇌로 옮김으로써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전반적인 게임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모티브를 빌려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빛에 의해 선택 받은 인물들과 선택에 대해서 컴플랙스를 가진 악역(심지어 로마 황제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확신범이다), 단순히 여행자가 선택한 가디언을 넘어서 스스로 빛을 찾아 세계를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까지 데스티니 2는 번지가 헤일로 때 보여주었던 이야기의 매력적인 부분들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많다. 물론, 게임 대부분의 시간은 필드에 돌아다니는 불쌍한 잡몹들을 족치고 상자를 까는데 쓰이지만, '대체 뭐 어쨌단 말인가?' 싶었던 1편의 스토리 텔링(가디언의 부활에서 벡스의 검은 정원까지 이어지는 본편 스토리)보다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픽 부분에서 본다면 데스티니 2는 트리플 A 특유의 규모와 디테일이 살아있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전작에 등장했었던 스테이지들은 한군데도 등장하지 않지만, 각각의 월드맵들(타이탄, 이오, 네서스, EDZ)은 자신만의 색조와 디테일을 갖고 있으며, 이 세상 것이 아닌듯한 독특한 풍광들을 자랑한다. 특히 데스티니 2는 전작과 확장팩들에 비해서 규모감을 강조하는 연출과 그래픽을 보여주는데, 태양을 불태우는 병기인 전능자Almighty 에서 벌어지는 미션의 압도적인 스케일은 트리플 A 게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규모감과 매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경쟁전 부분인 크루시블의 경우, 전작에 비해서 오히려 퇴보한 부분들이 있다:기존의 샷건이나 스나이퍼 라이플 등의 일반 무기군이 제한된 탄약을 쓰는 파워 웨폰군으로 옮겨가면서 게임은 자동 돌격 소총, 점사 돌격 소총, SMG, 단발 소총 등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지는 비슷한 무기군들이 경쟁전에 주로 쓰이는 주요 무기가 되어 게임 플레이 스타일이 거기서 거기로 고만고만해지는 문제가 생겼다. 또한 상대의 위치를 미니맵 표시기를 통해서 항시 확인할 수 있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개개인이 실력으로 게임 판세를 뒤집는 것은 힘들어졌으며 팀 단위로 뭉쳐다니면서 마이크로 화력을 집중하는 플레이가 더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상대 위치를 미니맵에 표시하는 시스템은 데스매치 중심의 게임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콜옵 시리즈에서 가장 사기적인 킬스트릭이 상대의 위치를 찍어주는 UAV였다는걸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점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결론적으로 데스티니 2는 전작의 기대에 못미치는(그래도 재밌긴 하지만) 게임 플레이에 비하면 훨씬 더 유기적이고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테이큰 킹, 라이즈 오브 아이언 등의 확장팩을 여러개 거치면서 쌓인 노하우가 게임 디자인에 접목되면서 가능해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데스티니 2는 디비전을 넘어서 콘솔 MMO 에 새로운 스탠다드를 제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주변에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오래동안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