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존댓말을 생략하겠습니다.

리뷰: http://leviathan.tistory.com/970
코멘트:http://leviathan.tistory.com/971

 사실 영화를 보고난 뒤, 상당히 격한 리뷰를 썻다. 게다가 추가 포스팅까지 대단히 격하게 썼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 화가 단단히 나더라도, 그 다음날에까지 그 사람에게 머리 끝까지 화나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 또한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영화 평가에 있어서 약간 과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었다(실상, 나는 영화에 열받은 것이 아니라, 감독과의 인터뷰에 열받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한가지는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최악의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좀 달리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의 문법이나 표현에 대한 것이다. 실상 여태까지의 호러 영화들은 이미지나 포장된 형태의 가학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가학성은 호러영화의 중요한 코드 중 하나이고(동시에 거의 모든 대중 문화의 코드의 중요 코드이다),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이다. 뭔가 기분 나쁜 명제이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만약에 우리 자신이 선하다면, 공포영화에서 살인마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주인공들이 살인마를 처단하는 줄거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공포영화 자체가 없어질 것이다.

 이게 단순히 현대사회가 인간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인간 자체가 뒤틀리고 폭력적인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 두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서로를 죽이고 괴롭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해왔다. 즉, 호러영화는 그런 인간의 상상력에다가 영화적인 허구성을 입히고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우리가 희생자들을 죽이고 동시에 영화의 끝에 다시 질서를 회복하면서 우리의 파괴적이고 뒤틀린 본성을 충족시킨다.(비단 호러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때 가학성은 현실과 동떨어진 왜곡된 형태나 비사실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관객과 영화 속 살인 사이의 거리를 넓히면서 관객을 영화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동시에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하지만 마터스는 다르다.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영화 속에서 실제적인 가학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뒤틀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형태의 가학이 아닌 실제적인 형태의 가학을. 게다가 이는 휴유증이 매우 커서 한 소녀를 미치게 만들어서 15년 동안 기괴한 형태로 비틀린 여인을 보게 만들고 자해하게 만든다거나, 자아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가학의 원인을 말도 안되는 것으로 설정하기는 했지만(이 영화에서 종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탈은 외부적인 요인에서 비롯되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주인공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극사실적이다.

 혹자는 프랑스의 익스트리미티(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돌이킬수 없는' 등의 작품으로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조류가 여기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터스가 관객에 대해 가지는 파괴력은 관객을 영화속으로 끌어들여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을 영화 밖으로 내보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관객은 100분 이상을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왜냐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가죽이 벗겨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처참한 육체와 같이 영화속에 봉인된다. 어떤 공포영화도, 아니 어떤 대중문화도 감히 시도할 수 없었던 금기의 영역(관객은 영원히 영화 속에 갇힐 지어다, 아멘)으로 마터스는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제목인 마터스(Matyers)의 의미, 목격자들 순교자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본다. 바로 여러분들이 가해자고 주인공들은 그 가해자에 의해 순교당한 인간들이라고. 여러분들은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표 값내고, 영화 속에서 사람이 죽는걸 보러왔지!)로 다양하고 뒤틀린 고통을 주인공들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동시에 주인공들은 그 고통 속에서 서서히 익사해 간다. 천천히, 사실적으로. 하지만, 마터스는 동시에 가해자들(즉, 우리)에게 큰 벌을 내린다. 그것은 관객들이 주인공들과 함께 그 고통속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터스는 정말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영화가 대단히, 너무나도, 끔직하게 싫다. 왜냐고? 마터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관객들에게 극 사실적이며 잔인한 고어 장면을 보여주고(누군가는 엑스텐션보다 덜 잔인하다고 하지만, 현실적이란 의미에서는 더 잔인하다) 관객들을 영화라는 무간지옥에 빠뜨려 버렸다. 이는 여태까지 우리가 접하지 못한 새로운 자극이다. 그리고 새로운 자극은 언제나 그랬듯이(인정하기는 싫지만) 돈이 된다.

 이미 감독이 헐리웃으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나의 우려는 점점 현실화 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호러영화는 인간의 뒤틀린 심산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러한 뒤틀린 정신 속에서도 인간은 일상으로 돌아가길 꿈꾼다. 따라서 많은 수의 호러영화들이 비일상을 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거나 희망을 보여주는 결말을 취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을 그러한 뒤틀린 정신 속에 가두어 버리고 꺼내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리고 이것으로 돈을 벌고 시대의 조류가 되는것이 과연 인간에게 괜찮은 일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누군가 그랬듯이,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기 때문이고, 인간은 광기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은 자극을 받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자극의 한계를 넘었다는 느낌마저도 든다. '마터스'는 내게 그 자극을 넘어선 미지의 지평선 너머를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그 프론티어는 뒤틀린 뭉크 그림의 '절규'처럼 나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