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드라마 루시퍼는 닐 게이먼의 샌드맨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샌드맨에서 지옥의 지배자인 루시퍼 모닝스타는 더이상 지옥을 지배하는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의 날개를 잘라낸 뒤, 지상으로 기나긴 휴가를 떠나게 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드라마 루시퍼와 닐 게이먼의 샌드맨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부분은 이 정도일 것이다:세계관도 맞닿아있지 않고, 케릭터도 새롭게 해석되어 있으며, 샌드맨과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지옥의 지배자가 지상으로 휴가를 나온다면?' 이라는 짧고 굵직한 발상에서 시작한 루시퍼는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먼저 언급해둬야 하는 점은 수사물 장르로서의 루시퍼는 상당히 엉성하다는 점이다:이런 수사물들은 범죄에 얽혀있는 비밀을 인물들의 능력을 이용해 파해쳐 내려가면서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이 중요한 장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루시퍼에서 범죄는 미스터리로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각각의 범죄들에 숨겨져있는 이면이나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 자체가 상당히 거칠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단서가 여기저기 건너뛰기 떄문에 짜임새 있는 수수깨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든 수사물의 범죄 해결법이 인물들의 능력(정통적인 추리든 초자연적인 능력이든)에 맞물려 있고, 그 능력이 인물들의 성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루시퍼의 경우에 그 능력이란 '타인의 욕망을 밝히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욕망의 흐름대로 진행되며, 그 욕망의 흐름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루시퍼가 욕망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동화되어가는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어진다.

드라마 내에서 욕망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한 테마로 작용하는데, 화려한 로스 엔젤레스의 클럽이나 파티 문화, 섹스와 마약 같은 자극적인 요소들이 드라마 곳곳에 깔려있고, 그러한 요소들의 중심에는 루시퍼라는 인물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루시퍼라는 인물을 성경이나 기독교 문화에서 등장하는 절대악의 개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시퍼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지옥의 지배자로 추방당했지만,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은 루시퍼나 악마들이 부추긴 것이 아닌 인간 스스로가 행한 것이라는 것이 루시퍼의 핵심 전제다. 대신 드라마는 반항아이자 욕망에 충실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혐오하는 상처받은 인물로 루시퍼를 설정하였다. 

드라마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루시퍼라는 인물을 성서가 아닌 이슈가 있는 가족에서 자라난 탕아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분명 성서와 지옥이나 신화적인 세계들(창조주와 천사, 악마와 같은)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드라마 루시퍼는 이들이 '별개로 존재하는 규칙'에 얽메여있는 것이 아닌 '인간들과 유사한 문제들(아버지나 형제 문제 같은)'을 통해서 성서와 다양한 신화속의 이야기를 재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의 핵심은 살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루시퍼와 클로이 데커의 관계나 린다 박사와 정신과 상담 등의 변화 과정이다. 첫 시즌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마력이 통하지 않는 클로이 데커와 자기 위해서 노력하는 루시퍼가 점차 변화해서 자기 혐오와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고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은 매력적이다. 여기서 루시퍼 역을 맡은 톰 앨리스의 연기가 두드러지는데, 첫 시즌의 매력적인 조증 환자였던 루시퍼에서 점차 클로이 데커라는 인물에게 마음을 열고 나름 진중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매력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공포를 조종하고 루시퍼에게 콤플랙스를 심하게 가진 쌍둥이인 미카엘까지 연기폭이 상당히 넓게 잘 소화하였다.

결론적으로 루시퍼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원작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기준에서 보자면 상당히 근본없는(?) 재해석이긴 하지만, 무난하게 아무 생각없이 볼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