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자신을 닮은 똑똑한 아들,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는 성공한 비즈니스맨 료타는 어느 날 병원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6년 간 키운 아들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고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것. 료타는 삶의 방식이 너무나도 다른 친자의 가족들을 만나고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고민과 갈등에 빠지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보통 가족을 소재로 다루는 영화들의 기본 전제는 이러한듯 하다:파괴 뒤에 창조 있으리라. 수많은 작품들은 가족이라는 커뮤니티를 파괴직전까지 몰고 간다. 그러고는, 그속에서 가족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토대로 가족을 재구축한다. 예외 사례(킬러조 같은 극단적 파국)도 존재하긴 하지만, 가족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영화들의 기본 특징들은 이렇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와중에 가족에 대해서 가장 담담한 시선이자 통념을 거부하고 뼈대만 남은 가족을 보여주는 작품들, 예를 들어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아버지는 살인마야!)나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원래 남남인 인간들이 남남으로 돌아간것 뿐이야) 같은 작품조차도 가장 극단적으로 가족을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다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그런 '극적인' 서사를 거부하며 이러한 영화 경향들과 대척점에 놓이는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담담한 카메라를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지막으로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경력이 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러한 과정을 어떠한 극적인 서사나 장치를 거부하면서도 세밀하게, 하지만 희미하진 않게 영화를 구성한다. 자칫 잘못하면 가족이 무엇인가를 두고 감독의 일방적인 설교 또는 신파극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케릭터들을 존중하면서 열려있는 결말로,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성공한다.


먼저 제목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극의 시작이 뒤바뀐 아이들에서부터 시작하긴 하지만, 이는 어떤 파국을 향해서 달려나가는 사건이 아니다:이는 '변화'이자 가족이란 개념을 향한 '문제제기'이다. 과연 피가 섞여있지 않아도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제목이 '그렇게 가족이 된다'가 아니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일까? 이는 기묘하게도 서로의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 그 충격에 대해서 케이타의 가족이나 류세이의 가족 모두가 천천히 그 충격과 변화에 적응하고 받아들이지만(일련의 단계를 통해서 뒤바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정작 료타만이 이 충격에서 가장 혼란스러워하고 공황을 겪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것은, 료타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를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료타라는 케릭터가 혈연에 기초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물론, 전통적인 혈연에 근거한 가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동시에 료타는 자신의 친어머니(그의 어머니는 새어머니였다)를 찾아서 가출한 전력이 있는 등 혈육의 정에 대해서 목말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료타가 갖고 있었던 가족의 개념은 그 나름의 사랑이 깔려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자기중심적이고 기계적이며 삭막한 부분이 있다:극후반 친아들인 류세이를 집에 데려왔을 때, 류세이에게 여기서 살때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정한 규칙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라던가, 케이타에게 저쪽(친부모)과 함께 살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임무'의 형태로 이야기한다던가, 혹은 류세이의 부모를(구체적이진 않지만, 그들이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극의 은연중에 깔려있다. 또한 류세이의 부모가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군마현에 사는 것은 강렬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정치/경제적인 텍스트를 깔아뒀다고도 볼 수 있다) 바라보는 료타의 시선 등에서 드러난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이러한 지점을 '가부장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형태로 드러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구체적인 대립 형태'를 거부한다. 이는 정치/경제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클리셰를 피하고 료타의 케릭터를 정형화된 틀에 넣기를 거부하는 감독의 의지로 보여진다.


하지만, 류세이를 집에 데려온 이후에 류세이가 왜 자신들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러야하는가에 대해서 료타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자:애시당초에 어린아이에게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명확한 개념이나 확실한 타당성을 가진게 아니라면, 그 명제 자체는 경계 자체가 애매모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료타는 자신의 확고하지만 동시에 불확실한 '혈연'의 개념 때문에 갈등하고 고뇌하며, 이는 그의 엘리트적이며 워커홀릭적인 삶과 맞물려서 그에게 피곤함과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을 위해서, 피가 이어진 아들과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불청객과도 같은 소식(뒤바뀐 자식)은 그의 인생과 가족관 모두를 뒤바꿔버린다. 


영화는 그러한 애매한 지점을, 실험을 위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목림에 비유한다:원래 실험을 위해서 만들어진 수목림에서 15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는 매미 유충이 허물을 벗고 태어나며, 하나의 '자연'을 형성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이 자연이라 할 수 있을까? 영화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그 개념의 '진품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중요한 것은, 그 커뮤니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였던 노력들,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료타 이외의 부모들이 그 충격속에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적응해나갔다면, 료타는 먼길을 돌아서 그 가족의 진품성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 내에서 가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려고 했었던 과정들, 경험들, 그것들이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급작스럽지 않고 서서히 진행되는데, 자신의 새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간의 자신이 잘못한 점을 사과한다던가, 스스로 혼란스럽다고 변호사 친구에게 토로한다든가 등의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마지막은 피곤해서 자고 있었던 자신을 케이타가 사진으로 찍어서 사진기에 담아둔 것을 보고 케이타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다시 한번 가족이 되며 그렇게 (케이타의)아버지가 된다.


하지만 어찌보면 15분만에 끝낼수도 있는 뻔한 이야기(진품성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유지하려는 노력)를 영화가 2시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하고자 한 것은, 가족에 대한 료타의 변화 이상을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판 포스터를 보도록 하자.









이 포스터에서는 두 가족이 서로 동등하게,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영화에서 나온 이 장면은 두 가족이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형태의 포즈-케이타의 가족은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의 정형화된 포즈를, 그리고 류세이의 가족은 자유분방한 포즈를-를 취하면서 두 가족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킨다. 이는 영화 내내 류세이의 가족과 함께 편하게 지내는 케이타와 아내한테 '그 가족과 떨어져 지내'라고 이야기하는 료타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류세이 가족의 삶의 방식을 료타가 은연중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바로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섞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가족의 의미를 넘어서 '대안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서로 만나고 섞일 일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기묘하게 꼬여버린 부모-자식의 관계를 보인다. 료타는 이러한 관념에 익숙치 않기에, 너무나 쉽게 이 속물적으로 보이는 타인들에게 크나큰 무례(제가 두 아이를 다 데리고 살겠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라도 주겠습니다)를 저지르며, 영화 내내 지속적으로 류세이의 부모를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사회 엘리트인 료타가 영화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그런 어떤 정형화된 틀의 세계(내 자식은 뭐든지 잘해야하고-이는 혈연과 유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자식을 위해서 직장에서 불철주야 일하며, 열심히 일하고 유능한 인간이 되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 등등)가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자신이 생각했던 혈연에 근거한 가족 개념도 포함해서) 그리고 가족이라는 커뮤니티는 단순히 나-아내-자식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류세이 가족이라는 '타인'에게로까지 확대된다. 


이 확대과정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이는 아이들이 뒤바뀐 것을 고지한 병원이 제시한 아이 '교환'의 프로세스에 의거한 것이다. 서로 만나서 안면을 트고, 그리고 서로의 집에 아이들을 교환해서 묵은 뒤에, 최종적으로 아이들을 교환하는 것. 물론, 이는 단순히 케이타-류세이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의 가족들은 섞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케이타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류세이의 아버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켐코더를 들고 들어오는 지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서로의 가족이 동등하게 서서 사진을 찍은 저 포스터는 영화의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마치 형제처럼, 두 가족이 동등하게 서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모여서 마치 '가족인것처럼' 사진을 찍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을 타파하는 이상, 가족이란 커뮤니티의 확장을 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료타는 케이타를 자신의 진실한 자식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료타는 케이타의)아버지가 된다. 그렇다면 류세이는 어떠한가? 료타는 자신의 경직된 세계를 벗어던지고 류세이와 함께 연날리기 캠핑을 하기를 준비하면서 류세이의 아버지 역활을 맡는다. 그리고 그렇게 (료타는 류세이의)아버지가 된다. 또한 료타가 케이타와 함께 돌아왔을 때, 류세이의 동생들은 이렇게 물어본다:이제 '돌아가지' 않는거야? 이 말에는 류세이가 돌아가지 않음을 묻는 의미기도 하지만, 류세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케이타의 집, 케이타의 가족으로 인지하는 지점이 있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류세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류세이는 '양측 모두'의 아이가 된다. 그리고 류세이의 부모는 자연스럽게 밥이나 먹자는 권유를 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생면부지의 타인들은 하나의 가족이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정말로 대단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의 객관적인 시선과 지극히 섬세한 카메라 워크가 맞물려 들어가면서도, 영화는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극의 탬포를 잃지 않고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든다. 또한 인위적인 장치를 극도로 배제하면서도 극의 장면마다 필요한 상징적 구도들을 자연스럽게 집어넣는 등, 영화는 섬세하게 짜여진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올해를 빛내는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며, 기회가 된다면 극장에서 꼭 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