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버스 납치사건 당시 살인사건 현장에 있던 버스 운전사 사와이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사와이 이외의 생존자는 중학생인 나오키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오키의 여동생 둘뿐이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이들 세 명의 생존자는 사건이후 몰려든 보도진과 주변의 끊임없는 호기심 속에 더욱 깊은 상처를 받는다. 사와이는 버스 납치사건이후 가족을 버리고 모습을 감춰버리고 나오키 남매는 자신들의 세계만을 고집하며 타인과 거리를 둔 생활을 보낸다.



사건이 있은 지 2년 후 나오키 가정은 붕괴되어 이들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단둘만의 생활을 보내고 있다.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던 사와이가 돌아옴과 동시에 마을에는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마을사람들은 그런 그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본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고통과 싸우던 사와이는 자신과 같이 버스 납치사건의 생존자인 남매를 찾아간다. 가족도 없이 단둘이 생활하고 있는 남매를 본 그는 이들과 함께 살 결심을 한다. 사와이와 나오키남매와의 공동생활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오키의 사촌형 아키히코가 이들 남매를 찾아온다. 이렇게 4명의 묘한 공동생활은 시작된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유레카는 상처와 재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거기서 다시 일어나 원래 생활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유레카는 기존의 영화들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한다. 기존의 치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외적 동력, 그리고 그 외적 동력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의지'나 '목적의식'은 영화 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살아달라고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해버린다. 동시에 드라마를 최소한으로 축약하고 '일상의 노이즈 낀 영상'(감독의 표현을 따르자면)의 형태를 빌림으로서, 영화가 만들어내는 질감은 지극히 삭막하고 거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기묘한 선언(살아달라고는 하지 않겠다)과 함께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영화는 정말로 독특하며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박살나버린 개인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커뮤니티로부터 시작한다. 여느날과 똑같이 진행되는 등교길과 출근길, 그리고 버스에 탄 그들의 인생은 버스 하이잭 사건과 함께 박살나버린다. 하지만, 남겨진 생존자들이 짊어진 상처와 경험의 무게와 다르게, 세상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버스 납치범이 1차 가해자였다면 이들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지목하는 2차 가해자이자 주된 가해자이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기거나(버스 사건에서 살아남은 코즈에가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돌거나), 오해와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범인으로 지목되는 마코토) 심지어 영화는 사회와 커뮤니티의 붕괴를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커뮤니티 단위인 가족으로부터 시작시키고 완성시킴으로서 생존자들에게서 공유할 수 있는 기존의 사회를 완전히 거세하고 소외시켜버린다. 이런 구도를 영화는 시종일관 생존자들(마코토, 코즈에, 나오키)과 사람들 사이에 컷 또는 분명한 대비를 만들어낸다:2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마코토를 마코토, 자신의 형과 형수, 자신의 아버지와 조카(아버지-조카-친구-전처와 마코토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이해불능의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마코토가 너무 커버렸기에, 그렇기에 그를 사랑하지만 그를 내버려둘 수 밖에 없는 방관자적인 입장이다) 사이의 세 층위로 뚜렷하게 구분하여 묘사하는 등 생존자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보이지는 않지만 뚜렷한 '막'을 만들어내면서 이들과의 단절을 시종일관 강조하며 생존자들끼리 모여서 하나의 대체적인 커뮤니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역설한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생존자들의 상흔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자, 사회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지점은 언어를 통해서 구체화된다. 사고 이후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죽어 가족 자체가 와해된 코즈에와 나오키가 '실어증'으로 오해받는 지점을 보자:코즈에와 나오키가 실어증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끼리 있을 때 언어로 소통하는 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도 있으며 그들은 언어를 잃어버렸다고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언어를 거부하는' 뉘앙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코토는 남매와 다르게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지 않지만, 그가 생존자 이외의 인간들과 소통하는 지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코즈에와 나오키의 사촌 아키히코와 마코토 사이의 대화양상들, 아키히코가 마코토에게 쏟아내는 언어들을 마코토가 감내하는 듯이 보이는 뉘앙스에서 영화는 '(일상)언어란 폭력이다'라고 선언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생존자들은 언어 없이(혹은 거부하는?) 생활을 한다:오히려 영화는 생존자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편견과 폭력을 쏟아내는 지점과 대비되는 지점들로 언어 없음의 편안함을 강조한다(마코토-남매 유사가족의 식사 장면이라던가, 벽을 두드리는 것으로 서로 소통하는 지점이라던가)


이런 특징들이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스스로 "구로사와 키요시의 무의식 속에 공포영화가 살고 있다면 나의 경우는 무의식 속에 서부극이 살고 있다. 서부극 안에 내 무의식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라 발언과 함께 결합되면서, 영화 유레카는 어찌보면 바로 그러한 감독의 서부극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이 된다. 어디서 찾아낸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고 느릿한 기타큐슈의 풍경이나 2년만에 귀향하는 마코토의 모습을 다루는 장면이 마코토를 일종의 무법자처럼 보여주는 대목 등등은 직접적으로 서부극을 차용한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서사적 측면에서도 영화는 서부극의 구도를 들고온다:일상 세계, 즉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떨어진 생존자들, 즉 무법자들은 황야에 내던져짐을 당한다. 그리고 삭막한 황야에서 무법자들은 그들을 안내하는 어떠한 지표나 안내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황야를 해매인다. 


파괴적인 사건으로 커뮤니티로부터 떨어져 나온 무법자들은 그들끼리 살아남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지만, 정작 사회는 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2년만에 돌아온 의심스러운 방랑자와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남매들의 유사가족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벗어나서 해법을 찾아야한다. 마코토가 여행을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법자들은 이제 새로운 대안과 해답을 찾아 나서는 개척자들이 된다.


하지만,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났지만 기존 사회의 폭력들은 여전히 상존한다: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세상은 계속 원환처럼 돌아며, 그로 인해서 의도되지는 않지만 생존자들에게는 그것은 무한히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처럼 인식된다(아무 생각없이 골프채로 장난을 치는 아키히코 때문에 나오키가 느끼는 심적 압박감 등등을 보라) 그렇기에 자신에게 오는 폭력을 향해서, 나오키는 다시금 폭력(살인)으로 맞받아친다. 마치 무법자가 폭력을 상대하기 위해서 총을 뽑아 살인을 저지르듯이. 이러한 감정은 마코토 역시 느꼈으며,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아키히코 역시 느낀, 끝없이 자신을 향해 폭력을 가하는 사회를 향해 무법자들이 느끼는 분노의 감정이다. 하지만, 이는 해결책이 아니다:폭력과 증오가 원환을 그리듯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의 연쇄는 어떤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여행을 떠나기 전 마코토가 전처에게 했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 이 닳고 닳아서 클리셰로도 분류되지 않는 명제는, 영화 유레카에서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명제로 작용된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명제가 사회로부터 유리된 무법자들, 동시에 그들 사이에 어떤 혈연/지연 관계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아감을 선택한 생면부지 타인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가? 를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 '(그 모든 조건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가능할까?'를 던진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인 조건을 떠나서 실존적이고 인간 근원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후 마코토가 하는 행위들, 자신의 책임도 아닌 남매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아주 클리셰 스럽지만, 마코토는 폐암 비슷한 것으로 죽어가는 뉘앙스를 풍긴다)으로 이 명제를 실현한다. 하지만 이는 어떤 신파적인 명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아키히코가 자수한 나오키에 대해서 '그래도 거기(=감옥) 있는게 나오키한테 행복할거야'라고 이야기하자, 여태까지 아키히코의 언어(이자 폭력)를 참아왔던 마코토는 아키히코에게 통렬한 한방을 날리고는 이렇게 선언한다.


뭐가 ‘행복하겠지’,라는거냐!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냐고! 나오키가 어디론가 가버렸더라도 언젠가 잃어버린 걸 되찾으러 다시 돌아온다구!!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너 같은 인간들은 아무것도 아닐테니! 나는 말이지, 그 애를 보호하는 걸로 내 삶을 살아갈꺼니까!”


'행복' 같은 사회의 언어, 관용구들의 언어를 거부함으로서, 그렇기에 영화는 '살아라' 라는 명제를 거부한다:그것은 사회로부터 내쫒겨진 무법자들에게는 사회의 폭력이자 명령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의미없는 삶, 내쫒겨진 삶이 아닌 사회 밖에서 살지말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라'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코토는 나오키가 자수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한다:살아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대신에 죽지는 말아줘. 죽지 말아달라는 부탁,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달라는 마코토의 바램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벌겨벗겨진 인간들이 그 어떠한 맥락도 존재하지 않는 유대를, 인간이 타인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오키와 작별했지만, 마코토의 노력은 코즈에를 통해서 결실을 맞이한다. 바다에 도착하고, 조개 껍질을 모은 뒤에, 자신의 언어를 되찾은 코즈에가 산 정상에서 바다에서 모은 조개 껍질을 던지면서 인물들을 호명할 때(이 인물들 중에는 심지어 버스 하이잭의 범인도 들어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 영화는 세피아 빛의 빛바랜 세계를 벗어던지고 총천연색의 세계로 돌아온다. 상처는 자연스럽게 아물고, 부서진 세계는 다시 한번 재봉합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의, 커뮤니티의, 누군가의 방식이 아니다:그것은 전적으로 사회로부터 떨어진 인간들, 무법자들이 찾아낸 풍경의 재발견이자 화해인 것이다.


영화 유레카는 정말로 인상적인 영화며, 독특한 관조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에 치명적인 결점이 있는데 거의 4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이다. 물론 감독 아오야마 신지는 삶의 노이즈를 그려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일사분란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픽션을 거부하는?), 그런 의도를 감안해도 4시간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감상을 한 본인조차도 영화가 아닌 드라마 보듯이 끊어서 감상했으니 말다한 셈이다. 하지만 그런 지점을 제외한다면 영화 유레카는 정말로 의미심장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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