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1940년, 카스티야 고원의 이름 없는 마을. 일요일 영화 트럭이 도착한다. 다용도로 쓰이는 낡은 건물에서 영화 <프랑켄스타인 박사>가 갑자기 상영된다. 관객들 중에는 이사벨과 아나라는 두 소녀가 있다. 동생인 아나는 언니에게 왜 괴물이 사람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죽느냐고 묻는다. 이사벨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괴물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정령이라고 대답해준다. 아나는 괴물을 보고 싶어 그를 찾아다니며 부른다. 자매가 부모와 함께 사는 오래된 큰 집을, 아나만이 느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채워간다. 부모들은 삶을 향한 그들만의 향수와 미련에 갇혀 어린 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다. 어느 날 아나가 사라진다. 고통스러운 수색 끝에 아나가 발견되지만, 아나 외에 그 누구도 이 모험의 끝을 알지 못한다. (puredew114@naver.com)(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벌집의 정령은 정말로 독특한 영화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나 영화 내에서 스페인 내전은 하나의 풍경에 불과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이다. 벌집의 정령이 보여주고자 하는 스페인 내전의 상흔(직접적으로 스페인 내전을 다루지 않지만,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은 어떤 점에서는 판의 미로나 악마의 등뼈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장르영화의 공식(판타지나 공포영화)으로부터 벌집의 정령을 원용하는 두 영화와 다르게 벌집의 정령이 출발하는 지점은 상당히 독특하며 아름다운 이미지를 구축한다.


벌집의 정령의 가장 큰 특징은 서사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프랑켄슈타인의 상영 장면 이후로, 영화는 아나와 이사벨의 일상 생활의 장면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장면들은 어떠한 서사의 일관된 흐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정말 말그대로의 '일상적인 행위들의 연속'인 것이다. 물론, 이사벨이 아나에게 프랑켄슈타인의 존재, 즉 정령의 존재를 이야기해주고, 그로 인해서 아나가 주변에 흐르는 기묘한 흐름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흐름이 깔려있기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그것이 언어화되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던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재밌는 점은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어떤 서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벌집의 정령은 서양 회화의 전통을 영화 속으로 들고옴으로서 서사를 구축한다;즉, 영화는 서양회화 처럼 소품과 인물의 배치 등을 통해서 어떤 독특한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마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독특한 구도를 통해서 다른 회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뉘앙스를 만들어냈다던가, 그리고 서양회화들이 그림 내에서 소품들(해골 같은 것이나 혹은 특정한 상징물 같은)을 배치함으로서 회화는 단순히 그림을 뛰어넘어서 어떠한 이미지와 시적 함축성을 만드는 지점들, 등등에서 말이다. 벌집의 정령도 그러한 지점들을 갖지만, 재밌는 점은 그런 지점들이 감독이나 작자 단계에서 배치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세계가 아나라는 어린 소녀의 시선에 의해서 재배치 되고 거기 숨어있는 '정령', 즉 평화로운 일상 속에 숨어있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우울한 풍경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령의 메타포로서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한다;아나가 언니 이사벨에게 물어보는 것, 왜 프랑켄슈타인이 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죽어야했는가에 대해서 이사벨이 프랑켄슈타인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실체없는 정령이 되어서 여기에도 있다는 이야기(겸 거짓말)를 할 때, 정령과 프랑켄슈타인은 등치된다. 재밌는 점은 이사벨이 아나에게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난 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나의 아버지가 인간 사회를 하나의 벌집의 형태로 비유하는 독백이 등장한다. 인간사회가 하나의 벌집이고, 프랑켄슈타인이 실체가 없는 정령이라면, 제목 '벌집의 정령'이 가르키는 바는 바로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어떤 맥락 그 자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소녀를 죽이고 성난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한 '괴물'의 이미지를 이사벨이 부정하고 '그건 영화야 다 뻥이라고'라고 선언하는 지점에서 이 정령은 뭔가 '독특한 것'이 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면서 동시에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신비로운' 존재지만, 그것은 사회의 편견과 다르게 사악함이라던가 등의 특질을 지니지 않는다. 


이 정령의 존재를 믿는(또는 눈치챈?) 아나가 재발견하고 일상속에서 찾아내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대단히 조밀하고 미세하다. 앞서 이야기한 서양 회화의 전통처럼, 이 모든 것들은 일상의 풍경 속에 숨어있으며 구체적인 이미지라기 보다는 모든 그림의 세밀한 지점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아주 극히 미묘한 뉘앙스의 문제이다. 그리고 아나는 이 신비로운 분위기에 점점 매혹되는데 언니 이사벨이 창문을 열어놓고 죽은척 하면서 장난을 치는 부분에서의 아나의 모습이라던가, 불타는 장작더미 위를 뛰어넘으면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나의 시선은 어딘가 위태롭다. 이 위태로운 감각은 아나가 진짜 정령, 스페인 내전에 관련된 탈영병을 만나게 되면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 탈영병이 처형되면서 결국 우리 주변을 정령처럼 떠도는 이 사라진 맥락은 사회에 포함될 수 없으며 잘려지고 거세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나가 깨닫게 되면서 영화는 극적 갈등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자살까지 생각할정도로 암울함에 빠졌던 아나가 독버섯을 먹기 직전에 본 환상(정령-프랑켄슈타인)과 마지막 엔딩에서의 독특한 결론(창문을 열고 정령에게 속삭이는 부분)을 내리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혹은 강제로 잊혀져버린 희생자들이 거기 있음을 인정하고 잊지않겠다고 조용히 속삭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묘하고 섬세하며 여운있는 엔딩의 지점들은 악마의 등뼈에서도 재확인되는데(상처입은 사람들은 떠나며, 유령은 뒤에 남겨진다.), 장르 영화적인 변용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이미지의 원전은 확실히 벌집의 정령이 먼저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벌집의 정령은 극적인 서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오히려 아나의 눈으로 보는 일상의 지점들을 아름답고 위태롭게(모닥불 장면 같이) 잡아내었다는 점에서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예모로 델 토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악마의 등뼈에서 이를 장르적 공식을 뒤틀어서 재구축한 것이 이해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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