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며칠전 실직 당한 아빠, 언제나 외로운 엄마, 갑자기 미군에 지원한 형, 남몰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나. 우리 가족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켄지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것… 켄지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은 음악 학교 오디션을 권유하지만 아빠의 반대 때문에 몰래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켄지는 계속 그 사실을 숨기기로 한다. 그런데 비밀이 있는 건 켄지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해고 된 아빠, 어느 날 사라진 엄마, 미군에 지원한 형까지 모두들 숨겨둔 비밀이 있었는데... 과연, 켄지는 아름다운 꿈의 연주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거짓말쟁이 켄지네 가족의 불협화음 조율이 시작된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에서 다뤄지는 것저럼, 도쿄 소나타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일종의 '치유물'의 방식으로 다뤄지는 듯한 느낌이 있다. 뭐, 결론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치유물은 맞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힐링과는 거리가 멀다. 호러영화로 자신의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구로사와 기요시는 절규 이후로는 호러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토로한적이 있다. 실제로도 도쿄 소나타는 호주 각본가가 쓴 각본을 기요시가 도쿄와 일본의 이야기에 맞게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며, 장르적으로는 가족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를 지배하는 정서는 '공포'다. 문제는 호러영화에서 다뤄지는 공포의 질감과 다르게, 도쿄 소나타의 질감은 담담하며 저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도쿄 소나타는 더 숨막히는 영화가 된다.


가족의 해체와 재생이라는 담론은 이제 가족 드라마 장르에 있어서 뻔하고도 흔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가 이 담론에 접근하는 방식은 색다르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 가족이 사실은 내부로는 썩어있었으며, 가족들이 이것을 직면하고 갈등하며 마지막에는 재결합/해체되는 이야기에는 근원적으로 가족 공동체 개념에 대한 창작자들의 다양한 믿음이 깔여있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는 이를 부정한다. 영화 내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문제 속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다. 영화 속에서 피아노 선생이 자신의 이혼에 대해서 담담하게 '원래부터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남남으로 돌아간 것 뿐이야'라고 진술했던것 처럼, 애시당초에 서로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이라는 서투른 연극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것은 바로 가족 간의 '소통의 부재'다. 영화에서 가족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대화라는 형식을 빌 뿐,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뿐이다. 켄지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했을 때, 아버지 류헤이가 켄지의 피아노 교습을 반대한 이유는 지극히 아버지 '개인적인 문제'(가장의 권위를 세우겠다)라는 것이다. 어머니 메구미는 그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위치에 서있긴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중재에 불과하며 의미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오히려 타카시가 미군에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와 타카시 사이의 갈등에서 어머니가 보여주는 위치는 지극히 자기를 억누르고 상대방을 띄워주는 역할 뿐이었다. 형인 타카시가 아버지에게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고 역설하는 장면이나, 켄지가 더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자신의 급식비를 털어서 피아노를 배우는 장면들은 전적으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소통의 부재, 결국은 남남일 수 밖에 없는 분위기를 묘사한다.


그렇기에, 켄지 가족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개념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상처주는 무언가에 불과하다. 가장인 류헤이는 실직한 이후, 매일 출근하는 것과 같이 양복을 입고 무료 급식대에서 밥을 얻어먹는다. 가장이라는 권위에 얽메여서 스스로를 옭아메는 그의 위태한 느낌은 해직된 첫날 집 담장을 넘어서 위태위태하게 집에 들어오는(류헤이의 집은 재밌게도 철로 바로 옆에 있다.) 그의 모습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류헤이는 타카시의 뼈아픈 지적(아버지가 우리를 위해서 뭘했는지 이야기 해봐요!)에 백화점 청소부일을 하게 되지만, 청소부로서의 그의 모습에서는 전적으로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현실이 충돌하여 만들어내는 경직된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어머니라는 역할에 의해 얽메이는 메구미 역시 누군가 자신을 지탱해주기 바라면서 손을 뻗지만(누군가 나를 일으켜줘) 가족 중 아무도 그 부름에 응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차 뚜껑이 열리는 컨버터블 차량을 바라보며 일탈을 꿈꾼다. 자식들의 사정도 사실은 별반 다를게 없는데, 타카시는 가족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며 켄지는 아버지의 권위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상처받는다.(그는 계단에서 굴러떨여저서 머리를 다친다)


가족 외부의 세계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오랜만에 만난 류헤이의 고교동창은 류헤이와 같은 실직자 신세지만, 동시에 집에서 자신이 실직한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자 류헤이를 끌여들여서 연극을 벌인다. 이 때, 이 동창의 집 역시 류헤이의 집과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그리고 동시에 더 무서운 것은, 중학생인 동창의 딸이 사실은 이 모든 연극을 눈치채고 있었다라는 암시다.) 또한 만화책을 전달하다가 걸린 켄지는 자신이 만화책을 본게 아니라 전달한것에 불과하다고 항거하면서 담임교사의 치부를 까발린다.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실제로도 그 장면은 켄지 보다는 담임 교사의 부당한 대우가 더 부각되기는 해었다)에 대한 항변이기는 했지만, 그 결과 담임 교사는 자기 담임 학급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하게 된다. 재밌는 점은 학급 학생들이 교사를 이지메하면서 즐거워하는 장면, 그리고 '이건 혁명이야 혁명!'이라고 외치는 부분에서 기성세대에 대한 신세대들의 반발과 함께 본질적으로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는 현세대에 대한 영화의 문제 제기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켄지가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다고 사과하자 담임 교사는 '서로 가까이 가서 상처주지 말고,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자'라는 식으로 어물쩡 넘겨버린다. 이와 같이, 가족과 그 구성원들, 그리고 그 바깥에 세계까지 타인에 대한 믿음과 소통이 부재한 상황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에 거스를수 없는 거대한 세계의 흐름을 집어넣는다. 기요시는 구체적이진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과 이미지들을 영화 전반에 깔아둠으로서 사회의 문제가 켄지 가족의 문제이며, 동시에 켄지 가족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영화 도입부, 영화 전반을 암시하는 듯이 폭풍이 몰아치고 '집안'으로 폭풍이 들이침과 함께 중국에서 저임금 노동력이 기존의 류헤이 등의 기성세대를 대체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류헤이가 실직 이후 집을 나와서 이리저리 떠도는 장면들에서 군중을 다루는 영화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풍경' 또는 '정물'적인 인상이 강하다. 군중들은 한 방향으로 향해서 걸어가는 등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류헤이는 그 속에 끼어있거나, 혹은 그 밖에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느쪽이든 이 거대한 군중의 흐름이라는 풍경은 류헤이와 그 가족들을 압박하는 세계의 흐름으로 작용한다. 심지어 류헤이의 집이 철도변에 있다는 것, 거대한 열차가 끊임없이 소음으로 류헤이의 집을 지나치며 압박하는 모습을 통해서(영화 내내 철로를 다리는 열차는 선명하지 않지만, 분명히 집 바깥, 바로 거기 존재하는 하나의 배경이다) 이 중산층 가정이 사실은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타카시가 미군에 입대한다는 설정은,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설정이다. 하지만 기요시는 '대체역사물'적인 접근을 한다. 미군에 일본인이 입대해서 미국의 현실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했다라고 기요시는 이야기했다.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안일하고 이상적인 발상을 하는 타카시가 미군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 그리고 타카시가 완벽한 타자(살인자)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는 악몽을 꾸는 메구미의 모습을 통해서 바깥 세계에 대한 압박과 공포는 점점 더 구체화된다. 


이런 압박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탈출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 탈출 방향에서조차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간다. 메구미가 자신이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것을 보자, 비명을 지르며 메구미와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류헤이, 그리고 집에 들어온 어설픈 도둑과 함께(이 도둑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히 기요시적인 케릭터다. 신경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컨버터블 차량을 타고 해안으로 도망치는 메구미, 가출하려고 버스에 무임승차하는 켄지까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엄청난 압박감에 본능적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를 할 뿐이다. 


이들의 '어설픈 탈출'은 전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켄지는 버스에 무임승차를 하지만 검사가 기소를 취하하는 바람에 범죄자도 못한체 어설프게 집으로 돌아갈 뿐이며, 류헤이는 차에 치였지만 '죽지도 못한체' 너덜너덜한 체로 집에 돌아온다. 메구미는 도둑과 함께 해변까지 일탈을 했지만, 동시에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도둑이 차와 함께 바다속으로 들어가서 자살함을 선택하는 바람에 홀로 자신만 해변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결국 이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다함께 밥을 먹는다. 침묵 속에서.


마지막 식사장면은 지난 식사장면들에 비교하면 화학적으로 본질적으로 변화했음을 관객들은 느낄 수 있다. 일탈 이전의 가족들이 식사하는 장면, 그들이 대화하는 모습들, 그리고 그 장면을 지배하는 질감은 삭막함 그 자체였다. 그들은 대화를 하고 있지만 대화를 하고 있지 않으며, 밥을 먹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소위 믿고 있는 전통적인 가정의 행복함이 아닌 묘한 긴장감 속에 사로잡혀서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밥을 먹는 장면은 어딘가 모르게 '깨작거린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이 지점이 가장 극대화된 부분이 바로 동창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분위기가 경직됨을 넘어서 의심이 지배하는 식탁인데(사실 남편이란 작자가 실직을 한게 아닐까 라는), 류헤이의 어딘가 불편하고 긴장된 모습, 그 속에서 태연하게 자기 역할을 연기하는 동창, 이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내, 그리고 모든것을 알고 있지만 침묵하는 딸까지 이 팽팽한 신경증의 극치 속에서 가족의 식사란 개념은 서로를 찢어발기는 개념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후 동창의 가족들이 자살로 파국을 맞이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들의 식탁이란 전적으로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한 긴장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식사 장면은 다르다. 이들의 문제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지만(특히 아버지의 실직이라는), 이들의 긴장감은 해소되어 어딘가 편안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들의 피로한 모습에서, 그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해낸듯 하다. 그렇기에 마지막 식사 장면은 전적으로 대사 한마디 없지만, 이들이 모인 장면을 통털어서 가장 가족다운 부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장면에서 가족의 의미는 재발견된다. 그것은 가장의 권위나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희생이나 개념에 기초한 것이 아닌, 모두가 긴장을 풀고 편히 있을 수 있는 피로의 공간, 모든 것이 무너지고 박살나고 심지어 거기서 탈출하려고 발악을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서 집이자 가족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여전히 류헤이는 잡역부로 일하고 있으며, 타카시는 파병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켄지의 월광 소나타 연주와 함께, 본질적으로 이들이 변화하였음이 암시된다. 파괴적이고 거스를 수 없는 세계의 흐름에서, 이들이 찾아낸 해답은 인고하는 것이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는 장르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작품들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기존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물건이며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같이 '한 장르에서 대가를 이룬 사람이 다른 장르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다'라는 것을 훌륭하게 입증한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