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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뉴욕의 한복판.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중년의 남자가 순식간에 한 청년의 총에 숨을 거둔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범인 조슈아 샤피라(팀 로스 분)는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그는 마피아 행동 대원 중의 하나다. 전화로 수행한 임무를 보고하는 그의 다음 임무는 브룩클린의 리틀 오데사로 불리는 러시아인들이 사는 지역의 한 아랍계 보석상 팔레비를 없애는 일이다.  하지만 그곳은 자신이 자랐던 마을이며, 그의 부모와 동생, 사랑하는 여인 알라(모이라 켈리 분)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에 이 일을 결행한다. 몰래 리틀 오데사로 잠입하지만 그의 동생 루벤(에드워드 펄롱 분)에게 발각되고 죽어가는 어머니의 소식을 접한 조슈아는 그의 생가에까지 들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살인자로 소문난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한국에선 비열한 거리로 수입되었다)는 독특한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평범한 범죄물이다:킬러가 한번 떠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인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면서 해어졌던 가족들과 친구들과 다시 조우한다. 그러나, 리틀 오데사는 평범한 장르영화의 공식을 빌려오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한 장르영화를 인용하지만, 그것을 전혀 다른 분위기로 표현한다.


제임스 그레이 영화 세계를 가리켜 누군가는 '축축한 우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제임스 그레이 영화를 모두 본것은 아니지만, 리틀 오데사를 두고 본다면 이 '축축한 우울'이라는 명제는 영화를 훌륭하게 요약한다. 리틀 오데사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해어나올 수 없는 우울함이다. 주인공인 조슈아나 루벤, 그리고 형제의 아버지나 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까지 극은 형용할 수 없는 우울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정사 장면마저도 에로티시즘이 아닌, 우울의 일부로서 다루면서 영화는 독특한 질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우울로 인해서 서로 각기 떨어져있는 케릭터들을 공통된, 그리고 평등한 존재로서 설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들어낸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언급한, 대안적인 '치유하는 피로'의 이미지에 리틀 오데사의 우울은 많은 부분 맥락이 닿아있다. 인물들은 서사적으로 떨어져있으며 각자 자기의 문제와 폭력에 사로잡힌다. 남편은 병든 아내에 대한 욕정을 풀지 못해서 바람을 피며, 장남은 살인자며, 아내는 뇌종양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공간에서, 각기 다른 컷으로 잡혀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다루는 질감의 동일성, 축축한 우울함과 피로의 정서로 인해서 이들은 묘한 유대감을 만들어낸다. 장남과 친하게 지내는 동생을 가죽벨트로 때리는 장면에서조차, 통속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보다 이 행위를 꼭해야하는가 라는 회의와 피로로 장면을 채워넣어버린다. 느릿느릿하면서 우울한 느낌, 그리고 축축한 질감들(대부분은 성가를 연상케하는 삽입곡을 사용한다)은 영화를 지배한다. 


리틀 오데사는 미국의 러시아 유태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제임스 그레이가 미국 러시아계 유태인이기에 기초하고 있는 러시아계 유태 문화의 독특한 풍경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민자 사회가 겪는 일반적인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의 괴리(출신지 전통적인 문화를 고수하는 아버지 세대, 그리고 미국적 기회에 현혹되어 범죄자가 된 자식 세대, 그랜 토리노 같은 작품에서도 보여주는 모습이다)에 기반한 갈등을 보여준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렇게 서로 부서진 가족 관계도, 카메라의 독특한 질감 속에서 폭력에 대한 피로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형을 노리는 깡패들을 처리하기 위해 형의 권총을 들고 온 동생은 오해를 받아 총을 맞고 죽고, 형의 연인도 그와 함께 죽는다. 그리고 형은 동생의 시체를 소각로에 넣고 태운 뒤에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난다.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기존의 가족의 화해, 이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드러내는 장르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난 결말이다. 이는 영화의 우울의 질감을 스크린 바깥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손쉬운 카타르시스를 거부하고, 관객들에게 케릭터가 느끼는 우울함을 같이 느낄 수 있게 함으로서 거기서부터 폭력의 중단을 위한 관객과 영화 모두가 공통의 피로를 느끼게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 영화로 장편 데뷔를 하였는데, 이 영화의 방식이 다른 영화에서도 적용된다는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미학을 확립하는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지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던 영화였으며, 동시에 그 자체만으로 독특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