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지극히 사적인 감상입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살면서 무수히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렇기에 사람을 한번의 실수로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살면서 선의라도 실수든 뭐든 간에 해서는 절대 안되는 짓들이 있다'는 걸 잘 안다. 고의가 전혀 없는 과실치사처럼 '죽일 생각은 아니지만 실수로 손이 삐끗해서 사람을 죽여버렸어요 데헷★'이라는 변명은 인정될 수 없다는걸,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원더풀 데이즈는 바로 그 살면서 하면 안되는 '실수'에 들어간다. 


사실, 원더풀 데이즈는 객관적으로도 쓰레기지만, 그래도 해어나올 수 없는 나락과 무저갱 속에 갇혀버린 인류의 죄악 옆자리에 놓일만한 물건은 아니다. 1.5배속으로 돌려봤음에도 불구하고 보다가 눈알을 스스로 파내버릴 뻔한 맨데이트나, 자살하지 말자를 외치면서 보는 사람을 자살충동이 들게 만들었던 4요일이라던가, TMA 협찬을 받아서 만든 교복 AV였던 블러드 영화판이나, 지금도 쿠소 영화 원탑으로 회자되는 디워 등등...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병신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산업화된 엔터테인먼트의 평균화와 균질화에 대한 인류의 승리, 휴머니즘의 극치다 라고 이야기할만한 물건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모든걸 돈주고 본 본인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원더풀 데이즈는 그 차고 넘치는 악명에도 불구하고, 극 내에서 이미지들은 봐줄만 했고...또 음악도 나쁘지 않았고...에 그리고 또....뭐 하여간 비주얼적인 측면만 본다면 원데는 상당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만약 이게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서사의 중요성이 낮은 뮤직비디오였다던가, 아니면 정지화면+약간의 움직이는 영상으로 구성된 단순한 일러스트 모음 영상(+음악은 배경으로 깔아주고)같은 거였다면 이정도로 끔찍하지 않을 것이다(아마 트랜스포머 2편 급 정도로 끔찍했겠지...뭐랄까 그냥 지루한 정도?). 원데의 병신성은 전적으로 '스토리와 서사'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감독은 애니메이션, 포스트 아포칼립스 등등의 장르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 예의, 인간성 등등 따위는 걷어차버리고 지꼴리는것만 막 쑤셔쳐넣어버렸다. 게다가 더 용서할 수 없는 사실은, 프리프로덕션까지 합쳐서 '7년'(1년도 아니고 7년, 무려 7년!)의 시간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106억원을 쏟아부은 희대의 프로젝트였다는 것이었다. 이게 어느정도냐면 그 비슷한 시기 개봉한 실미도가 105억원의 제작비로 1000만명의 관객을 모으던 시절이었다.(관련 링크 1, 관련링크 2


원데의 장르적 특성은 기본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기반을 두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대충 망한 세상이지만, 인류는 오염물질로 에너지를 만들어서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인류는 그 에너지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에코반이라는 도시와 에코반에 들어가지 못한 하층민들의 마을 마르에 정착해서 삶을 지속하나, 지구의 자정작용으로 인해서 환경이 깨끗해지자 에코반의 동력원인 오염물질이 모자르게 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에코반의 지도자들은 마르를 불태워서 오염물질을 확보하려 하고, 주인공인 수하는 원래 '푸른 하늘'을 되찾기 위해서 에코반의 인간들과 싸우게 된다.


일단, 이정도까지만 놓고 본다면, 원더풀 데이즈는 그냥저냥 평범한 '환경 SF'일지도 모른다:적당히 환경오염의 위험을 설파하고 환경을 지키자, 중얼중얼중얼...하지만 문제는 원데의 세계에서 환경 오염 문제란 '물 색깔은 구정물 색깔, 하늘은 똥색' 이정도의 테제에 불과하다. 어째 22세기의 대충 망한 인류들은 그렇게까지 힘든 삶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안드는게, 푸줏간에는 고기가 그득하며 똥물에서 낚시도 하고, 술도 마시고 댄서에게 추파도 보내는 등등 그냥 그럭저럭 살고있다. 그렇기에 원데의 환경오염의 문제의식은 인류 생존의 절박함 혹은 지구에 대한 윤리의식의 문제도 아니고, 수하의 도저히 이해안될 정도의 파란 하늘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미학적인' 문제의식 수준 밖에 안된다. 


그렇다면 이 극을 지배하고 있는 갈등 구조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차적으로는 에코반-마르라는 지배-피지배 간의 계급 투쟁의 문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마르를 불태우는 것은 극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 이로 인해서 에코반과 마르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배-피지배의 갈등구조로도 보기에는 극의 서사는 너무 빈약하다. 에코반은 마르를 불태운다고는 하지만 극의 끝까지 간만보고 결단력이나 실행력이 전혀 없는 허접한 집단이며, 마르의 주민들은 트럭이나 훔치고 다니며 동료가 죽으니까 비장하게 에코반을 친다-훗 그래야 우리 대장이지! 이러는 3류 허접 양아치들에 불과하다. 극의 에코반-마르의 갈등은 전혀 심각하거나 생존의 문제가 아닌, 동네 양아치들의 가오잡기의 연장선상(저새끼가 우리 나와바리 건드렸어!-조져!)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것도 억지로 쥐어짜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준거다. 우리나라 더빙 버전에서는 이 둘의 갈등을 '에코반-마르'라는 단어에 옭아매서 전개를 하는데(마치 팔씨으 르씨으 코쿤으 팔씨으 르씨으 파판 13을 보는듯하다), 이 덕분에 안그래도 동네 양아치들 가오 잡기 싸움으로 격하시켜버린다. 재밌는 점은 본인이 감상한 영어 더빙판은 이들의 관계를 피지배-지배 관계의 계급 투쟁처럼 묘사하기 위해서 단어 선정을 마르가 아닌 일꾼, 워커 같은 개념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노력과 시도는 가상하나, 질펀하게 싸재낀 설사똥 위에 신문지 한장 덮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극이 주목하고 있는 갈등 관계는 무엇인가? 극은 수하-제이-시몬이라는 삼각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한때 친구였으나 제이가 수하를 사랑하는걸 눈치챈 시몬이 수하를 에코반 옥상에서 밀어버림으로서 시몬은 제이를 독차지하게 된다(이게 대충 10살 전후의 일이었던거 같으니 정말 앞날이 창창한 꼬꼬마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먼훗날 시몬과 제이는 살아있는 수하를 만나게 되고, 제이가 다시 수하에게 끌리는 것을 보고 시몬은 다시 열폭하게 되는데...


어디서 많이 본 갈등 구도라고? 그렇다. 이들의 갈등 구조는 매일 우리네 가정의 안방과 거실을 지배하는 막장드라마의 전형적인 연애 삼각구도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드라마에 비교하는 것은 막장드라마에게 크나큰 결례이며 실례다. TV가 안방과 거실을 차지한 후로 근 수십년 동안, 드라마들은 우리네 부모님들과 평범한 대중의 '버튼'을 대놓고 누르는 방법을 축적하였으며 그 수십년 동안 쌓인 클리셰들과 연출, 노하우 등등을 가볍게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교한다면 원더풀 데이즈의 드라마는 씨발 아주...차라리 아내의 유혹이 반지의 제왕급의 대서사시로 보일정도로 허접함을 자랑한다. 어째서 제이는 수하에게 끌리는가, 그리고 파란하늘 성애자 수하는 제이를 거부하는척 하면서 왜 받아주는가, 마지막으로 시몬은 제이를 수하에게 NTR 당할 동안 도대체 뭘 했는가(실수로 꼬마애 한명 쏘고 맨붕하는 병신새끼...) 등등 이야기는 클리셰에 맞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클리셰조차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그래도 그나마 감상자가 의자나 손가락을 씹어먹지 않도록, 원데는 '미려한 그림'라는 최소한의 배려를 해준다. 원데는 그림의 구도로만 봤을 때는 아름다운(특히 엔딩 후에 홀로 날아다니는 글라이더 장면이라던가) 장면들이 생각외로 있으며, 센스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원데는 그러한 미학에 집착한 나머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 특성마저 무시한다. 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그림들의 향연이다. 무슨 낙동강 오리알 마냥 묘하게 둥둥 떠다니는 정지 화상들의 연속을 보기 위해서 관객들은 돈을 내지 않는다. 원데는 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신성모독이자 수많은 선배 애니메이터들에게 빅엿을 날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데의 문제는 미니어처를 이용한 독특한 촬영 방식 등의 기법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에 애니메이션을 무슨 그림 감상용 스크린 세이버로 생각하고 속도감도 뭣도 없는 밋밋한 영상의 연속으로 땜빵해버린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욕을 오라지게 처먹어야 하는 것이다. 덕분에 감상자는 손가락을 씹어먹는 대신에 지루함과 싸우면서 자기 뇌세포를 씹어먹어야 하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도대체 어떤 망할 놈의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은 미학의 과잉으로 가득차있다. 애시당초에 수하가 에코반으로부터 파란 하늘을 되찾겠다는 것은 마르의 해방이 목적도 아니고, 인류가 환경오염에 대해서 응당 책임을 지거나 지배계급의 폭정에 항거하는 필사의 발악이 아닌 그저 '파란 하늘' 그 자체를 되찾으려 한다는 참으로 고상한 목적의식은 원데의 문제점을 전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작자들은 '일단 멋있으니까 다 때려넣어볼까'라는 느낌의 물건들을 막 던지며, 극후반부 에코반의 동력시설의 경우 반중력 장치가 둥둥 떠다니는 초 하이테크 SF적인 물건을 사용하는 모습에서 절정을 찍는다. 도대체 인류는 22세기에 반중력 장치에 원자 분해까지 일으키는 물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찌질하게 마을에 불지르는걸로 쳐싸우고 있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많이 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최악의 사실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실들 보다 더 빡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프로젝트가 무려 7년 동안 106억원의 예산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산업재해다. '산업'이라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대중문화 제작에 있어서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건지 시대의 미스터리다. 물론 엎었다가 다시 만들었다가 엎었다가 다시 만들었다가를 수없이 반복하면 가능하리라는 막연한 추측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욱 분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원데 하나의 실패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 나올 때까지 근 8년 동안 투자자들이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 하나, 그리고 투자자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산업 전반에 빅엿을 날린, 그야말로 더이상 어떻게 쉴드를 쳐줄 수 없는 끔찍한 경지에까지 도달하고 만다.


결론을 내리자면 원데는 그야말로...산업재해이다. 극의 완성도와 이런저런 문제들을 차치하더라도, 과실로 8년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을 박살냈다는 시점에서 이미 이건 원데 하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는 해도 용서 할 수 있는 실수가 있지만 거기에는 '과실치사'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거 하나만으로 원데는 까이고 까이고 또 까여서,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때까지 짓밟아야 한다. 더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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