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읽는 책




폴란드의 풍차는 장 지오노의 후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장 지오노는 지오니즘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쌓았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인간의 조건으로 유명한 앙드레 말로는 장 지오노를 가장 위대한 프랑스 소설가 중 한명으로 꼽을 정도로 근현대 프랑스 소설가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장 지오노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연친화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초기의 사상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자연에 동화되는 것을 강조했다면, 후기작들은 자연 속에 숨어있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굴해내고 가혹한 자연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폴란드의 풍차는 바로 이 후기작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의 풍차는 기본적으로 코스트가의 수난의 기록이다. 모두가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한 코스트 가의 비극을 소설은 그리스 비극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리스 비극에는 훌륭한 사람들, 또는 위대한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자신의 핏줄 또는 선조의 잘못에 의해서 파멸로 향하게 되는 장르적 특성이 있으며(예를 들자면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근친상간을 하는 배경에는 자신의 죄가 아니었다), 폴란드의 풍차는 그리스 비극의 장르적 특성을 차용하고 있다. 다만 그리스비극이 신이나 신탁이라는 초자연적인 특성에 의해서 일어나는 비극에 가깝다면 코스트가의 비극은 전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본성의 문제'로 인해서 파국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코스트 가 일원들의 '성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1대 코스트 가의 가장의 파멸을 끌어모으는 성격이 '유전'되어(물론 코스트 가가 겪는 일은 유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기는 하지만), 파멸을 재생산하고 또다시 재생산할 뿐이다. 하지만, 중매쟁이 오르탕스 양이나 코스트 가의 말예인 줄리와 결혼하는 조제프 씨 등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멸과 싸우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줄리와 조제프의 자식이 창녀와 도망치고 줄리 역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으로 폴란드의 풍차 영지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장 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는 자연 속에 숨어있는 죽음이라는 요소를 드러낸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으나, 이 작품의 완성도는 장 지오노와 지오니즘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에 비하면 너무 모자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 자체도 '미완성'인 상태로 발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이 2차세계대전이라는 충격을 겪고 자연 속에 숨어있는 파멸적인 운명의 씨앗을 발견하는 그런 문제의식이 결국은 인간은 모두 그 파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은 비극적인 아름다움, 파멸의 쾌감보다는 그냥 이도저도 아닌 애매함(왜 줄리-조제프의 결혼으로 줄리가 구원받는 듯이 묘사하고 조제프가 코스트 가의 일원과 다른 '멀쩡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다시 코스트 가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으로 끝내는가?)을 보여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서 지오노의 작품 세계를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 바로 폴란드의 풍차가 나오고 1년 뒤의 '나무를 심는 사람'을 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애매함과 미적지근함을 지우는 작가 나름대로의 폴란드의 풍차에서 드러난 문제의식의 승화와 완성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무를 심는 사람은 한 사람이 인간의 실패(1, 2차세계대전 모두를 거치는 장대한 시간을 다룬다)와 황무지가 된 자연에 대해서 끝없는 인내와 노력으로 묵묵하게 자연을 다시 살린다는 내용을 보여주는데, 초기 장 지오노의 자연친화적인 사상과 후기의 자연 속에 숨어있는 파멸의 씨앗에 대한 문제의식 이 양쪽을 만족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폴란드의 풍차에 대한 이 감상의 결론은 참으로 기묘한데, 장 지오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대표작'이라는 칭호를 달기에는 대단히 부족한 작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폴란드의 풍차가 보여주는 묘사나 작가가 갖는 문제의식은 거장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거나, 그것을 마무리 짓는데 있어서 대단히 부족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이 아닌 나무를 심는 사람을 통해서 보여준 지오노의 미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살아야 하며 인간이 자연속에 숨어있는 파멸의 씨앗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하는 작가의 모습은 폴란드의 풍차가 보여준 문제의식과 기존의 미학을 훌륭하게 접목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히려 후기의 대표작은 폴란드의 풍차 같이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작품이 아닌 나무를 심는 사람으로 평가를 해야하지 않나...라고 생각을 하나, 아마도 책을 팔아야하는 출판사 사정상 이런 타이틀을 달고 나온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