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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년이 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군 통수권자이며, 가정에 있어 아들과 아내에게는 완벽한 가장이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상하고 남편과 금슬이 좋은 현모양처다. 돈, 명예, 지위, 친구, 이 모든 것들을 가진 소년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살기를 갈망한다. 그러던 와중에, 소년은 한 남자를 만난다. 소년은 이 남자를 존경한다. 소년도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소년은 모르고 있다, 그 남자가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남자라는 것을...“

암굴왕(2004)은 곤조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원작으로 하여 이를 각색한 작품입니다. 저번 편에서 설명드렸듯이, 지금까지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많이 영화화 또는 만화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리메이크 작품들이 소설을 그대로 옮기거나, 혹은 소설에 있어서 몇몇 중요한 포인트-대부분은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연적, 페르낭에 대한 복수-에 초점을 맞추어서 작품을 전개합니다. 이는 원작 자체가 분량이 엄청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따로 손을 댈만한 부분이 없을정도로 원작이 훌륭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암굴왕은 원작을 아주 색다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암굴왕은 원작과 달리 ‘복수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즉,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주인공이 아니라,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복수의 대상의 아들인 알베르 드 모르세르가 주인공이 되어 백작의 복수극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이죠.

사실, 원작에도 이런 컨셉이 다소 존재했습니다. 그 부분은 알베르가 백작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자 결투를 신청하고 나서 진심으로 백작에게 사과 하는 부분이었죠. 이는 원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원작에서 알베르가 다혈질의 올곧은 청년이었음에 반해 암굴왕에서는 다소 다르게 나옵니다. 암굴왕의 알베르는 아직 세상과 자신,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사춘기의 소년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에서 인생의 지표를 찾기를 갈구하고, 결과적으로 백작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죠.

암굴왕이라는 작품은 그렇기에 원작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원수의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들에 대한 케릭터성을 강화합니다. 그렇기에 작품은 젊고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자식들이지만, 백작의 가혹한 복수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갈등을 겪고, 이로써 세상에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서는 과정을 통해서 원작의 케릭터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립니다. 특히 알베르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자 친우였던 백작의 배신에 분노하고, 자신의 가족에 끝없는 불행을 가져다 준 백작을 증오했지만, 백작의 복수를 이해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어 원작보다 더 깊은 케릭터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원작은 백작이 행하는 복수의 정당성을 높이는 도구적인 케릭터에 불과하였지만, 암굴왕에서는 스스로의 주체를 확립한 케릭터로 변모하였습니다.

암굴왕에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그야말로 악의의 화신입니다. 원작에서 신의 대리인으로서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철퇴를 가한다는 의미가 어느 정도 있는 케릭터였지만, 암굴왕에서는 원작의 흡혈귀 같은 모습과 뒤틀린 완벽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원작의 백작이 어느정도 인간성을 가지고 있어서 완벽했다고 할 수 있었다면, 이와 달리 암굴왕의 백작은 완벽한 동시에 너무나 위험하고 사악한 인물로 변모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희곡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와 많은 부분 닿아있습니다. 마치 메피스토가 선의를 가장하여 파우스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유혹하듯이, 암굴왕의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선의를 가장하여 자신의 적들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유창한 달변과 우아한 외모 속에 감춰진 심연과도 같은 악의와 뒤틀림. 그리고 이를 모르고 접근한 이들은 자신의 과오와 죄악의 업보를 받아 파멸하게 됩니다. 완벽한 파멸, 그것이 그가 원한 복수였죠. 하지만, 알베르는 그의 분노와 복수심을 이해하고 자신을 희생하려 하고, 이로 인해 백작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물론 원작에 비해서 백작의 케릭터가 비교적 단순합니다. 원작에서는 그가 선하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자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암굴왕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없지요. 특히 막시밀리안 모렐과 백작 사이의 독특한 우정이나 그가 자신의 복수극이 점점 큰 불행을 낳자 결심이 흔들리는 부분 등을 제거하여 백작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 역인 나카타 죠지의 퇴폐적이면서 귀족적인 목소리, 우아하지만 그로테스크한 백작의 외모 등은 이미 여태까지 나왔던 번안작이나 리메이크 작 중에서 가장 인상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 전체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생각나게 하는 독특한 색감과 화려한 배경, 원작의 배경을 적절하게 SF의 형식으로 바꾼 점 및 원작과 케릭터에 대한 독특한 해석 등은 작품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높입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화에 알맞게 적절히 소설 내용을 편집한 것도 훌륭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알베르와 백작의 결투 장면까지의 분량은 충분히 이 작품을 완벽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아쉽게도 완벽한 작품에서 좋은 작품으로 평가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알베르와 백작과의 결투 이후의 내용 및 작화가 전반적인 작품의 질을 악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부분이 정말 눈뜨고 못 봐주겠다, 쓰레기다, 뭐 그런 수준은 아닙니다. 제가 아쉬워 하는 것은 거기서 뒷심을 발휘했었더라면, 원작에 대한 훌륭한 변주곡이 되었을텐데 그 뒷심을 발휘하지 못해서 주저 앉아 버린 점에 대한 것입니다.

알베르와 백작의 결투, 대략 18화 후 22화까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친구를 위한 프란츠의 희생 이후, 알베르가 그 상실감으로 방황하고 좌절하는 장면이 대략 5화 정도 진행되죠. 하지만, 우리는 여태까지 알베르가 유약한 성격이고 그에 상처받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상실감에 대해서는 압축적이고 간략하게 서술했어도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백작의 과거에 초점을 맞추어서 왜 이 남자가 냉혹한 복수자가 되었는가를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백작이 24화 내내 자신의 숙적들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몰골로 만드는 복수를 하는데, 그 동기가 되는 회상이나 설명은 전 24화 통틀어서 고작 10분도 채 안된다는 것은 백작에 대한 모욕이 아니겠습니까? 18화에서 22화까지 부유하는 알베르를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백작에 대한 묘사를 강화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게 들더군요.

게다가 원작에도 없는 ‘암굴왕’이란 설정은 도대체 뭡니까? 물론 원작에서는 파리야 신부가 그의 스승으로 그에게 부와 지혜 그 모든 것을 주었고, 그를 신의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스승적인 존재는 냉혹한 복수자인 백작에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고, 암굴왕이라는 암흑의 존재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암흑의 존재가 백작을 악의 존재로 만들고 냉혈한으로 만들었다는 설정은 좀처럼 납득하기 힘듭니다. 원작의 백작은 거의 전지전능한 능력과 강철보다 더 굳센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모든 복수는 그의 치밀한 계획과 인내심 끝에 이루어 진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타자도 개입이 되지 않았죠. 백작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철인적인 인간상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암굴왕에서는 이를 전지전능한 악에 ‘휘둘리는’ 케릭터로 묘사되었죠. 스스로도 ‘몬테크리스토 백작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 몬테크리스토 백작 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암굴왕의 영향력 아래 놓인 백작의 모습은 뭔가 모순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차라리, 스스로 뒤틀린 길을 선택했었더라면 더 박력있는 케릭터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물론, 끝마무리는 훌륭했고 제가 말씀드렸던 부분들은 ‘아쉽다’ 수준의 문제이지, ‘망했다’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훌륭한 작품입니다. 물론 흥행에서는 망했지만요. 원작을 읽지 않아도 원작의 매력을 충분히 잘 살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원작을 읽고 나서 봐도 나름의 독특함을 가한 훌륭한 변주곡이기도 합니다. 취향은 조금 타겠지만(완전히 주류에서 벗어난 작품이니), 추천 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