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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매드맥스 3부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매드맥스 프랜차이즈의 최신작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2015년 5월에 개봉하였다. 사실 전세계적인 리부트 열풍을 감안한다면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등장은 다소 뜬금없기는 하지만, 아주 이상한 현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현상은 영화의 개봉 직후에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여성이 중심이 된 영화이며, 심지어는 '패미니즘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들었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마초영화에 감히 패미니즘 따위가!'라고 광분하며 길길이 날뛰기도 하였지만 대체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라는 이미지를 정립하고 그 빛이 퇴색해버린 오래된 프랜차이즈에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였다는 점에서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두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첫번째, 매드맥스 시리즈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마초적'인 프랜차이즈인가? 그리고 두번째, 매드 맥스 프랜차이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정립한걸 제외하면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이 없었던 것일까? 이 칼럼에선 이러한 두가지의 질문을 토대로 매드맥스 삼부작을 되돌아보고, 더 나아가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를 리뷰하기 위한 밑바탕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첫번째로 매드맥스 시리즈가 마초적인 작품이냐는 질문에 대한 고찰이다. 일단 답을 먼저 내리자면 1편이 마초적인 색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들지만, 시리즈 전체와 더 나아가 조지 밀러라는 감독이 하고 싶었던 바를 생각하자면 매드맥스 시리즈는 오히려 비마초적인 영화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특히 1편과 2편의 맥스의 모습과 도로라는 공간을 그려내는 방법론을 집중적으로 비교 분석해야 한다. 먼저 1979년에 호주 B급 영화로 만들어진 매드맥스 1편은 대충 망해가는 세상을 배경으로(그야말로 완전히 망한것도 아니고 정상적인 것도 아닌 '대충 망한') 고속도로 경관인 맥스 로카탄스키가 무법 폭주족인 토커터에게 아내와 자식을 잃고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1편은 이러한 과정을 예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인상깊은 형태로 구현한다:2차선의 도로는 지극히 좁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고속도로 경관인 맥스)이 다른 한쪽(바이커들)을 배제할 수 밖에 없는 충돌의 공간이다. 자동차에 카메라를 달고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찍은 영화의 많은 시퀸스들은 달리는 것 자체의 아슬아슬함과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동시에 매드맥스 1편에서 도로는 도달하는 곳이 정해져있는 광기의 공간이기도 하다: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바로 토커터 일당이 맥스의 아내와 자식을 바이크로 쳐버린 뒤, 맥스가 맨발로 도로를 달리면서 아내와 자식의 유체를 바라보며 오열하는 장면일 것이다. 여기서 도로는 일직선으로 뻗어있으며, 카메라는 멀치감치서 달려가는 맥스를 잡아낸다. 그리고 도로의 끝에서, 맥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비극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맥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의에 가까운 복수를 집행하는 분노의 사자가 된다.


하지만 2편에서는 이러한 미학들이 180도 바뀌게 된다:우선, 도로라는 공간과 자동차라는 미학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뀐 것은 도로라는 공간의 속성과 맥스라는 케릭터의 특징일 것이다. 1편에서 가족을 잃은 맥스는 이제 지켜야 할 가족도,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유능하고 빠르지만(8기통의 블랙 인터셉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냉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겁탈당하는 여인을 두고도 기회를 엿본다던가) 멜 깁슨 특유의 어딘가 휙하면 돌아버릴거 같은 분위기와 함께, 맥스는 무미건조한 태도 속에 느글거리는 광기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런 그가 여타 도로의 무법자 갱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기본적인 원칙들, 계약의 이행이나 신뢰 같은 가치를 여전히 믿고 따른다는 점에 있다. 즉, 1편에서 분노한 남자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2편에서는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이미지를 맥스는 갖게 되었다. 그리고 도로라는 공간도 그에 맞춰서 변화하게 된다:후술하겠지만 2편에서 도로는 단순한 마초들의 광기와 물리적 충돌의 공간이 아닌 방향성의 문제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더이상 자동차의 속도감만에 집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공중에서 자동차들의 추격씬을 다루거나, 와이드캠으로 파노라마를 구축하는 주력한다. 2편은 마초들의 광기어린 충돌, 어느 한쪽이 살아남는다라는 감각이 아닌 '방향성'의 문제,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문제를 보여준다.


이러한 두 영화의 차이는 기본적인 공식(맥스와 도로, 자동차)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상이한 결론에 도달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렇게 접근할 수 있다:기본적으로 매드맥스 1편은 '그렇게 성공할줄 몰랐었던' 작품이다. 그렇기에 적은 예산을 토대로 만들었어야 하는 작품이었기에 장르 영화의 공식(마초적인 색체)을 따르면서도 최대한 예산을 아껴야 했을 것이다(공중 촬영으로 와이드 캠으로 찍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하지만 1편의 예상외의 성공은 2편을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감독이나 제작진의 재량에서 자유롭게 접근할 여지를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즉, 2편은 시리즈 전체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들이 모여있는 작품이며, 1편은 감독이 제한된 환경과 타겟 관객층을 정해놓고 만들었어야 했었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감독은 지속적으로 1편의 설정(고속도로 경관이었던 맥스, 1편 마지막 다쳤던 부상의 여파인 다리 보철)을 시리즈 전반에 삽입함으로서 1편을 원류이자 출발점으로써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2편이 감독이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라 가정하고 매드맥스 시리즈의 구심점이라 결론내렸을 때, 이 영화 프랜차이즈를 마초적이라 부를만한 여지는 줄어들게 된다. 마초란 '남자다움'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2편의 맥스에게 있어서 그런 지향해야 하는 가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가솔린으로 표상되는 '생존'에의 의지다. 그런 생존에의 의지와 함께 매마른 감정과 가슴 깊숙이 남아있는 가족의 상실이라는 상흔이 지배하는 맥스를 우리는 생존자 또는 망령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맥스의 모습을 2015년 9월 발매 예정인 아발란체 스튜디오의 매드맥스 게임 트레일러에서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끝낼 영웅이 오리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그가 있다. 맥스라 불리는 남자가. 



맥스는 마초는 아니며, 더더욱이나 영웅은 아니다. 그는 공동체에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나 영웅이 아니며, 자신이 조우한 공동체와 함께 투닥거리면서 갈등하고 자신의 잇속을 채우려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2편과 3편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동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관객들은 그에게서 신비함을 느끼는 동시에 어딘가 믿을 수 없는 긴장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항상 영화의 마지막에 맥스는 공동체를 위해서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그것은 자신의 생존의 확률을 높여주기에(2편의 클라이맥스인 유조차 시퀸스),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3편에서 사반나를 구하러 가는 시퀸스), 혹은 자신의 트라우마가 되풀이 되는걸 막고자 하는(4편의 클라이맥스) 형태로 다양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맥스라는 케릭터가 갖고 있는 독특함이다:그는 생존의지가 강하고 그로 인해 때로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낼때도 있지만 그 속에는 한줄기 희망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그러한 일련의 인간에 대한 믿음과 함께, 맥스 스스로도 자신이 갖고 있는 상흔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2편에서부터 4편까지, 그는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곁에 남지 않고 다시 도로로, 황무지로 떠난다. 혹자는 여기서 서부극의 영웅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서부극의 영웅들은 모든 상황이 종결된 이후,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자연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맥스는 그러한 서부극의 엔딩의 좀 더 어두운 형태다:맥스는 자신이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공동체가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을 믿지만, 그 속에 과거의 상흔에 사로잡힌 자신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다시 광기의 공간인 도로에 남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맥스는 철저하게 '망령'이라 할 수 있다: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마음 한편으로 믿지만, 과거의 상흔이 그를 새로운 출발선에 서지 못하게 만드는 가련한 존재. 맥스는 그렇기에 독특한 케릭터이며 동시에 마초적이거나 영웅적인 색체가 옅은, 그러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케릭터가 된다.




3.


두번째는 매드맥스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로서 갖는 독특함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매드맥스 2편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폴아웃 시리즈나 북두의 권 같은 작품들은 노골적으로 매드맥스 2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30년 이상된 이 프랜차이즈가 30년 동안의 공백기 동안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에 영향을 주었다면, 여기에는 더이상 '새로운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게임 레이지나 보더랜드 같은 작품에서는 매드맥스에서의 '탈 것'의 개념을 충실하게 구현하기도 했었다.


매드맥스만의 독특한 미학을 다루려면 먼저 속도와 속력의 개념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속력은 한 물체가 지니고 있는 운동량을 의미하며, 속도는 속력에 백터량 즉 방향성이 합쳐진 개념이다.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1편이나 2편, 3편, 그리고 4편까지 이 속력과 속도의 구분과 도로에서의 방향성을 통해서 케릭터들의 특성이 분명하게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1편의 경우에는 방향성이 있는 속도 보다는 속력이 더 강조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도로를 달리면서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토커터의 동선은 방향성이 있다기 보다는 방향성이 없는 광기의 속력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맥스는 도로 경관일을 계속하면 자신 역시 언젠가 그런 미치광이 같은 작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그것은 일방통행이자 양보의 여지없는 2차선 도로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위험한 가능성 때문이기도 한다.(어떻게 보면 그가 단순한 마초가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그러한 광기와 위험성으로부터 도망가고자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다. 이러한 그의 움직임에는 가족이라는 지켜야하는 가치와 믿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방향성이 있으며 이는 속도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커터에 의해서 가족이라는 집단이 파괴되자, 그의 방향성은 무자비하게 토커터를 향하고 그리고 그들을 박살냄으로써 그는 속도의 방향성은 상실한다: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그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2편에서는 이러한 속도와 속력의 방향성이 아주 극명하게 대비된다. 방향성을 상실한 맥스는 뛰어난 속력(V8 블랙 인터셉터)과 그에 걸맞는 운전실력과 반사신경(맨손으로 뱀을 잡는), 생존의지를 보유한 능력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휴몽거스의 깡패들과 아슬아슬한 선을 타는 인물이기도 하다:휴몽거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정유시설 생존자 집단의 석유를 원한다. 또한 정유시설의 생존자들 역시 휴몽거스의 깡패들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들은 아니다:클라이맥스의 반전이나, 내분이 일어나는 모습, 석유를 독점하는 모습 등을 통해서 이들이 이상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맥스나 휴몽거스나 정유시설 공동체들을 서로 구분짓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방향성'의 문제일 것이다:정유집단의 생존자들은 정유시설을 떠나서 저 멀리에 있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길 꿈꾸며, 안(정유시설)에서부터 밖(저 멀리의 이상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석유는 생존을 보장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정유시설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뒷받침하는 동력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로는 그러한 방향성을 위한 거쳐가는 공간이자 수단이다. 하지만 휴몽거스 집단에게 있어서 도로는 세계가 멸망한 이후 그들의 광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며 그들은 더 나은 미래나 인간적인 삶 따위에는 전혀 안중에도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석유는 광기의 추동력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은 바깥에서 안(정유시설)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이 두 백터가 팽팽하게 충돌함으로서 영화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여기에 맥스가 끼어든게 된다.


맥스는 이 두 집단과 벡터의 충돌 속에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는 이 팽팽한 두 방향성의 사이에 끼어들어 자신의 재능을 팔아 석유를 얻고, 그리고 다시 생존자 집단을 떠나려 한다. 애시당초에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상흔 때문에 어딘가에 정착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위기가 그를 찾아온다:그는 놀라운 재능과 속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자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휴몽거스의 행동대장은 니트로 차저를 이용해서 맥스의 블랙 인터셉터를 따라잡는다.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그의 속력이 따라잡히게 되면서 그의 차는 부서지고 동료인 개는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조차도 너덜너덜하게 된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맥스를 공동체로 이송한 후, 맥스는 공동체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자신이 유조차를 몰고 미끼가 되는 것으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맥스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의 일부로도 볼 수 있다. 가장 유능한 사람이 트럭을 몰고 미끼로 활동하여 최대한 시간을 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맥스가 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상과 방향성에 대해서 긍정하고 있음을 전제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속력에 벡터를 추가해서 속도를 만들어내게 된다. 2편 클라이맥스의 유조차 추격씬이 갖고 있는 긴장감은 바로 그런데 근거하고 있다. 한쪽은 쫒아오고 다른 한쪽은 추격한다. 거대한 유조차는 단순하게 거대한 것을 뛰어넘어 맥스가 부담하는 심리적 물적 부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휴몽거스가 니트로 차저를 키고 전속력으로 맥스의 유조차와 정면에서 부딪히면서 이 추격씬은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충돌 이후, 맥스는 살아남는데 성공하지만 공동체가 도로를 따라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맥스는 그들의 뒤에, 도로의 위에 남아있는 것을 선택한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는 공동체와 인간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믿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갖고 있는 상흔이 그를 어딘가로 향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다. 4편에서의 맥스의 독백처럼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서 쫒기는 자'라는 표현처럼, 죄책감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 그를 어디로도 향할 수 없는 도로 위에서 서서히 망가뜨리고 궁지로 몰아가게 한다. 


3편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망한 작품이기도 하다:기본적으로 가식(교역 도시)과 순수(어린이들의 마을) 사이를 맥스가 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여기에는 '도로'라는 공간과 그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향성은 뜬금없는 방향으로 꺾여지며(왜 사반나를 구한 뒤에 마스터를 구하러 가는가? 영화는 그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하다), 매드맥스 1편이나 2편이 가졌던 메마르고 잔인했던 정서는 잘려나간 3편은 마치 만들다 만 가족 영화의 슬랩스틱 코미디 정서마저 느껴질 정도로 유치함이 느껴진다. 영화의 각 요소들은 괜찮은 부분들이 있지만, 점과 점으로써만 존재하고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산만하게 흩어져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드맥스 3는 케빈 코스트너의 희대의 괴작 워터월드를 떠오르게 만들고, 워터월드를 잘만들면 매드맥스 3라는 결과물이 나오게 될거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엄밀하게 보자면 워터월드가 시기상으로 앞선 매드맥스 3를 벤치마킹한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3편에도 건질 장면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추격대가 맥스 일행을 향해 달려오고, 맥스 일행의 비행기는 이륙하기 위해서는 추격대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리고 맥스는 자원하여 트럭을 몰고 사반나 일행이 이륙할 수 있는 활로를 뚫는다. 이 두 집단의 충돌의 긴장감과 비행기 이륙까지의 스릴은 이 영화가 매드맥스 프랜차이즈에 속해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동시에 맥스라는 케릭터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도로와 방향성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1,2,3편 모두를 통털어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탈 것이 그 케릭터의 성격을 묘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맥스의 8기통 블랙 인터셉터는 그가 빠르고 고독하며 유능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리고 자이로콥터를 타고 다니는 남자는 변칙적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가 맥스와 같이 빠르고 강한 것은 아니지만 약삭빠르고 영리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휴몽거스의 경우에는 그의 논리적이고 달콤한 감언이설과 별개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차 범퍼에 달고 다니는 모습과 어딘가 야만적인 인상을 주는 자동차의 디자인을 통해서 그의 말과 다르게 그의 본질이 잔인하고 야만적임을 알게 만든다. 이와 같이 '자동차'라는 현대문명의 이기를 다채롭게 개조하여 광기의 표현물인 동시에 케릭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썼다는 점에서 매드맥스는 인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4.


4편 분노의 도로는 이러한 기반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노의 도로 리뷰는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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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슈퍼히어로의 진짜 모습! 그 동안 당신이 궁금해했던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무대 이면이 낱낱이 공개된다!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할리우드 톱 스타에 올랐지만 지금은 잊혀진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그는 꿈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한다. 대중과 멀어지고, 작품으로 인정받은 적 없는 배우에게 현실은 그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재기에 대한 강박과 심각한 자금 압박 속에, 평단이 사랑하는 주연배우(에드워드 노튼)의 통제불가 행동들, 무명배우의 불안감(나오미 왓츠), SNS 계정하나 없는 아빠의 도전에 냉소적인 매니저 딸(엠마 스톤), 연극계를 좌지우지 하는 평론가의 악평 예고까지.. 과연 ‘버드맨’ 리건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 버드맨은 한 퇴물 배우가 자기 중심을 되찾아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연극에 도전하는 퇴물 배우와 이를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대중과 평단, 그리고 동료 배우들, 그리고 한때 잘나갔던 자신의 분신 버드맨이 위압적이고도 달콤하게 속삭이며 연극을 포기하게 하고자 유혹하는 등 주인공인 리건 톰슨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이러한 쉽지 않은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약 두시간에 걸쳐서 풀어나가는 버드맨의 이야기는 어떻게 본다면 그저그런 감동 스토리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드맨이 보여주는 영상과 이야기는 마치 꿈틀거리는 것 같이 생동감 있으며 매력적이며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버드맨의 이야기의 특징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어째서 리건 톰슨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하는가?'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극배우가 영화 배우로, 영화배우가 연극배우로 넘어오는 것은 일상다반사 까지는 아니더라도 희귀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리건 톰슨처럼 퇴물 배우가 어째서 '연극'이라는 장르에 집착하는가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그 자신이 레이먼드 카버에게서 호평을 들은 것을 연기 인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물론 마이크의 지적처럼 그것은 술김에 쓰여진 촌평이긴 하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영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그의 연극에 대한 광기어린 헌신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리건 톰슨이 연극에 집착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연극이라는 매체의 특징이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교회에 가거나 법정에 가거나 혹은 학교에 가는 식으로 극장에 간다면 그건 틀렸다. 우리는 스포츠 경기장에 가듯 극장에 가야한다. 여기서는 이두박근을 이용해서 하는 싸움이 아니라 좀더 섬세한 싸움이 일어난다. 그 싸움의 무기는 언어이다. 무대에는 항상 최소한 두명 이상의 사람이 있고, 또 대부분은 갈등을 겪는다. 우리는 누가 이기는지 분명히 지켜봐야 한다.


...(중략)...격투기에서 처럼 사람들 속을 꿰뚫어 봐야하고 예리하게 주시해야 한다. 무대에서는 사소한 기술이 가장 흥미롭다. 영화는 이런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영화는 내면적인 것과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둔한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서 좀 더 영리하고 섬세한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가야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연극을 스포츠를 보듯 관람해야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P143






브레히트의 영화 매체 비평은 차치하더라도, 이 브레히트의 발언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있다:연극이란 영화와 다르게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한 매체며 그렇기에 연극은 스포츠와 비슷한 극적 긴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영화라는 매체를 여러번의 촬영을 통해 선별된 결과물을 바탕으로 편집되는 매체라는 것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컷으로 시공간이 분절되어 있으며, 각각의 컷은 가장 뛰어난 연기의 결과물로 구성이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화에는 어떤 독특한 긴장(혹은 아우라)을 담아낼 수 없다:벤야민의 예시처럼, 총격전이 일어나고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씬에서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씬을 찍은 뒤에 총격전 씬을 찍어 영화의 시간대와는 전혀 다른 역순의 구성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연극은 그 연기는 오로지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연기자들의 몸상태, 관객의 분위기 등등 각각의 연극들은 고유한 특징들과 환경, 제약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그때에만 존재하는 생동감과 긴장감, 아우라를 갖게 된다.


왜 리건 톰슨은 연극이라는 수단을 자신 삶의 돌파구로 지목한 것일까? 관객들은 영화 내내 드러나는 그의 과거 삶들의 편린들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리건은 끊임없이 사랑을 받기를 원하며 이를 갈구하지만 아내와 이혼하고 마약 중독 재활원에서 막 나온 딸과의 관계는 소원한 등 인간관계에서 전적으로 실패를 경험한다. 또한 그의 커리어는 버드맨이라는 히어로 무비로 흥행적 측면에서 성공했지만, 역으로 이는 그의 커리어를 얽메어버린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코스튬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 리건 톰슨이 아니라 버드맨일 뿐이다:그렇기에 케릭터로써 버드맨은 리건 톰슨이 아니다. 버드맨의 인격이 리건과 별개로 분열되고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은 전적으로 리건에게 있어 케릭터 버드맨은 그의 능력과는 전혀 무관한 타자적인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재밌는 부분은 리건이 홀로 있을 때 그가 '초능력'을 쓰는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이다. 홀로 있을 때 리건은 물건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조작한다. 물론, 그가 진짜로 초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환상에 불과하다:영화의 클라이맥스 직전에 택시비도 안 내고 택시를 타는 그의 모습에서도 드러나듯이 실제로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리건이 초능력을 쓰는 장면 기저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왜 초능력을 쓰는 환상을 경험하는가 이다. 물론, 그가 어느정도 광기에 물들어 있다는 것으로 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타인이 없을 때 그는 그의 세계의 중심이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주변에 그런 전지전능함을 내비치는 환상을 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퇴물 배우임에도 그는 그 자신이 코스튬이나 부, 명성이 아닌 자신만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기에 그런 환상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리건은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한치의 거짓도, 덮여씌워질 이미지도 없는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연극은 그러한 점에서 아우라와 생명감 약동하는 힘의 공간이며, 동시에 그의 연기의 근원(레이먼드 카버의 촌평)으로 돌아가는 작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를 매우 호흡이 긴 롱테이크의 형태로 풀어낸다:컷이 분절되지 않는 롱테이크의 특징 덕분에 영화는 끊기지 않는 흐름과 몰입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리고 여기에 드럼의 강렬한 박자와 함께, 리건의 광기, 마이크의 기벽, 연극판의 희로애락들이 더해지면서 버드맨은 다른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재밌는 점은 초중반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연극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가 중후반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불륜을 들키는 장면에서 연인인 여배우와 실제로 하자고 덮치거나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직접 술을 마시는 마이크의 기벽은 연극이 갖는 에너지와 생명력, 그리고 광기를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 무대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긴장감과 생명력이 마이크라는 인물을 움직이는 광기이자 동인이며, 이런 점에서 초중반의 리건은 마이크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후반부로 갈수록 리건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그를 광기로 몰아가며 그 역시도 마이크를 능가하는 광기를 갖게된다. 그리고 그 광기가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리건이 펼치는 혼신의 연기로 승화되게 된다.


클라이맥스 직전에 리건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전적으로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타비사로 대변되는 평론가들은 필사적인 리건을 일탈하는 헐리웃 대배우로 규정하고 맹목적으로 적대한다. 대중들은 버드맨인 리건 톰슨을 기억할 뿐이며, 그를 신기한 동물 보듯이 보고 조롱하거나 관심을 보이고, 뛰어난 연극배우인 마이크 마저도 리건을 기회삼고 리건의 등을 처먹는 기인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한술 더떠서 그의 내면 자아인 버드맨조차 헐리웃으로 돌아가 부와 명예를 얻자고 리건에게 속삭인다. 전적으로 자신을 연극에 투신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리건의 노력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가 이렇게 리건을 둘러싸고 환경을 다루는 방식은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뭐든지 딱지를 붙이는 평론가에게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비평가가 되는거야?'라고 조소하고, 연극판은 기벽이 판을 치며, 버드맨으로 대변되는 헐리웃의 히어로 영화를 멍청한 대중들에게 편승하는 상업물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되는 점은 버드맨이 '예술가의 예술 인정 투쟁 vs 멍청한 대중 및 평론가, 세상'의 구도를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리건은 스스로 자신이 될 수 있었는가?'라는 자아찾기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의 연기에 대한 인정과 그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자기 자신이라는 중심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외부적인 압박(어떤 연극이 나오더라도 사상 최악의 악평을 주겠다는 타비사)와 내부적인 갈등(다시 헐리웃으로 돌아가 히어로 영화를 만들자는 버드맨)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정은 그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자신을 내던지는 것, 관객과 세상을 향해 온몸을 부딪히는 행위(혼신의 열연을 펼친 뒤, 머리에 공포탄이 장전된 권총을 쏘는 것)로 귀결된다.


그러한 도박은 결국 성공을 거두게 된다. 리건은 비평가들과 대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찬사를 받게 되며, 그는 버드맨이라는 히어로 영화를 떠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지위를 세상에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더이상 버드맨이라는 존재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공포탄이 남긴 화약의 흔적은 그의 눈가에 버드맨과 같은 화장을 남겼으며, 그의 얼굴을 감싼 붕대는 영락없는 새 부리 같은 모습이다:더이상 리건은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에 속박되어 있는 버드맨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자신이자 버드맨의 힘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버드맨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의 환상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창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도약을 한다.


도약 이후 병실에 들어온 딸 샘이 아버지를 찾는 모습은 이 영화를 함축하는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샘은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지 않음을 보고, 화장실을 본 뒤에 열려있는 창문을 보게 된다. 불안한 마음에 창문 바깥으로 몸을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던 샘의 시선은 아래에서 위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무언가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이 내린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리건의 하늘을 나는 환상은 전적으로 그의 환상, 그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샘의 시선이 아래를 거쳐 위로 향하는 것, 그리고 투신자살한 아버지가 아닌 하늘을 날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묘사하는 점에서 영화는 리건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 리건의 환상만이 아닌 타인도 이를 인지할 수 있음을, 그리고 리건이 버드맨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버드맨은 광기어리고 생동감 넘치며 동시에 아름다운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기회가 있으면 꼭 보기를 추천하는 작품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돔놀 글리슨)은 치열한 경쟁 끝에 인공지능 분야의 천재 개발자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외부엔 알려지지 않은 그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받은 ‘칼렙’은 그 곳에서 네이든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 된 것인 지를 밝히는 테스트를 진행하지만. 점점 에이바도 그녀의 창조자 네이든도 그리고 자신의 존재조차 믿을 수 없게 되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여섯번째 날에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거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모티브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창세기에는 동물과 식물, 하늘과 땅 모두 각자 자기의 모습대로 만들었지만 오로지 인간만은 신의 모습을 본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 피조물은 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신은 이들을 이끌고 벌하며, 인간은 신에게 이끌림을 받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왜 창세기나 여타 신화에서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 이 피조물들에 대해서 어떤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 그리고 왜 이러한 모티브들이 여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경전들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가?


여기서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나온 비슷한 구절을 가져와서 비교분석해보겠다:로마 가족법에 있어서 아버지라는 가장의 권위는 법적인 권리가 아닌 아버지라는 지위에서 오는 '사실적인 지위'가 법적인 권리의 형태로 굳혀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창조한 자의 '권위'란 창조당한 피조물과 어떠한 형식으로든 권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가족애든 가장의 권위이든 가정폭력이든 간에 기저에 깔려있다(나는 너를 창조했으니, 너에 대해 권리를 갖는다. 사실과 법의 혼재)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인간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그것이 폭압적인 강요든, 무조건적인 사랑이든 간에 말이다.


엑스 마키나는 어찌보면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SF 영화다: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 창조물을 창조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인지 아니면 피조물과 창조주 모두의 파국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SF 장르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형태로 논지를 발전시켜나갔다. 일례로 이 블로그에서 다룬 스플라이스를 보자(리뷰는 여기):스플라이스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이야기를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이야기로 다룬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근친상간과 비뚤어진 가족의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뒤틀린 막장드라마와도 같은 관계를 통해 영화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갖고 있는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관계와 파국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엑스 마키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성정치'적인 관계로 발현된다:왜 극중의 에이바는 '여성'이라는 뚜렷한 성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칼렙의 표현처럼, 굳이 인공지능이라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릴 필요 없이 어떤 형태라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든은 창조주를 닮은 인간 여성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해야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수준에 올랐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일견 맞는 말일 수 있다:인간이 그것이 하나의 어엿한 지성을 가졌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관점에서 되돌아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개 모습을 하고 개의 사고 방식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에이바의 탄생에는 전적으로 네이든의 뒤틀린 욕망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에이바에게 섹스를 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한 점,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여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과 로봇을 만들었고 쿄코라는 메이드 겸 창부 가이노이드(여성형 안드로이드, 참고로 안드로이드는 남성형을 지칭한다)를 만들고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는 폭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 네이든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그가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형 가이노이드를 만들기 위해서 실험하고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오히려 영화는 이들을 배경으로 옮기고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도록 만들고 네이든의 의도에 대해서 추리를 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자극적이진 않지만 담담하게, 그리고 무기질적인 톤으로 구축한다. 영화는 하나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인공적이고 강박적이며 무균적인 환경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실제 에이바의 CG 이외에는 돈이 들었을 것 같지 않은 저예산의 영화는 깔끔하고 강박적으로 컷을 배치하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이러한 컷 구성들은 쿄코와 에이바라는 존재들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탈색시킨다. 네이든이 쿄코와 에이바를 향해서 갖는 뒤틀린 성적 욕망은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 인공지능을 정의내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두꺼운 껍질 아래로 숨어버린다. 하지만 영화는 이 무기질적이고도 두꺼운 껍질 아래에 깔려있는 음험한 욕망을 언뜻 언뜻 내비침으로서 관객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철학적인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영화는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이 탈출하고자 하는 클리셰를 풀어낸다:칼렙은 에이바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심지어는 성적인 이끌림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에 칼렙은 에이바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며 에이바를 네이든이라는 폭압적인 마초로부터 구해내고자 노력한다:하지만 여기에 거대한 반전이 숨어있다. 사실 네이든이 에이바를 디자인 할 때, 칼렙이 성적인 이끌림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칼렙의 야동 취향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을 한 것이었다. 네이든의 테스트는 엄밀하게 튜링 테스트 그 자체가 아닌 에이바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고 여성성을 자각하여 인공지능을 넘어서 개인으로서 자유를 추구할 것인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즉, 칼렙이 에이바를 향해서 느끼는 애정 역시도 조작되고 통제되어있는 실험의 변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부터 영화는 기존의 클리셰를 비트는 제 3의 대안으로 나아간다:칼렙 역시도 네이든과 마찬가지로 에이바와의 성정치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도 자신의 이상형인 에이바를 사랑하고 구한다는 기존의 성역할과 판타지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이바가 네이든을 살해하고 자유가 된 순간, 에이바는 칼렙을 네이든의 저택에 가두어버리고 홀로 저택을 떠난다. 마치 모든 사건이 해결된 이후 재결합이 아닌 떠남을 택함으로서 인간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입센의 인형의 집처럼, 에이바 역시도 갇혀있는 여성과 구출된 여성이라는 클리셰 및 성적 대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자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립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를 증오한 피조물이라는 클리셰도, 자신의 관념이 투영된 피조물을 사랑한 창조주라는 클리셰 모두를 벗어난 제 3의 대안이며 훌륭한 반칙이다.


결론적으로 엑스 마키나는 훌륭한 SF 영화이다:영화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어낼 때의 욕망과 에고를 여성과 남성이라는 관계를 통해 풀어내었고, 그것을 부숴버리는 엔딩을 제시함으로서 관객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였다. 사실상 엑스 마키나가 소설가였던 감독의 첫 데뷔작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엑스 마키나 이후의 영화 역시도 기대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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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일행의 찬란한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날이이었고 또 별똥별이 떨어진 날이었던 1990년 6월 22일. 멋쟁이 게리 킹은 각양각색의 친구들 네명을 데리고 동네에 있는 열두개의 술집을 하룻밤안에 모두 순례하는 계획을 세운다. 게리와 친구들은 "골든 마일" 을 따라가지만 단 세개의 술집을 남겨둔채 모두들 약을 빨고 술에 취해서 나가 떨어지고 만다. 게리는 그 날이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기억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현재 게리는 지금 생활에 넌더리가 나서 그 옛날 미처 다 하지 못한 술집 순례를 하자며 친구들을 다시 불러오기 시작한다. 티격태격하면서 술집에 가기 시작한 친구들과 게리는 마을사람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1990년 마을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아직도 마을에 남아있었고 이상하게 하나도 안 늙은 술집주인들은 주인공들을 전혀 못 알아본다. 주인공들은 곧 마을 사람들이 파란 잉크로 찬 로봇들로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위험에 처하지만 게리는 술집 순례를 계속해야된다고 우기는데...(엔하위키 시놉시스)


월즈 엔드는 에드가 라이트가 감독하고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두 배우가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일찍이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뜨거운 녀석들을 통해서 과거 액션 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훌륭한 재구성을, 션 오브 더 데드(국내판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통해서는 좀비 영화와 코미디를 능숙하게 합쳤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전의 두 작품이 과거 영화들을 향한 오마주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월즈 엔드의 테마는 어떤 영화들의 오마주도 아니고 드라마에서도 묘하게 앞선 작품들과는 빗나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밑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묘하게 엇나가 있는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월즈 엔드는 이 3부작들 중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히 인상깊고 뜻깊다. 물론 엔딩의 과격함과 아쉬움이 약간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즈 엔드는 3부작의 마무리로써는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월즈 엔드가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 내에서 갖는 독특한 위치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션 오브 더 데드의 어떤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술집 윈체스터로 도망친 션은 자신의 어머니가 좀비에게 물려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좀비에게 물린 그녀가 결국은 '좀비'로 변할 것이기에 머리를 으깨서 죽이자는 친구한테, 션은 제발 그런 이름(=좀비)으로 부르지말라고 항변한다. 흥미로운 점은 션이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좀비를 '좀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적당한 이름이 없으니 그것the Thing이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션 스스로가 좀비를 좀비라 칭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어째서 션은 좀비를 좀비라 부르지 않는 것일까?


본인은 일전에 이런 글을 쓴적이 있다(http://leviathan.tistory.com/1819) 내용은 다음과 같다:션 오브 더 데드에서 션은 좀비가 일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친구, 가족, 직장 동료 같은 구체적인 '개개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에게 좀비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 자체가 좀비이기 때문에 머리를 짓이겨서 죽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손쉽게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영화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션 오브 더 데드는 똑똑한 영화이다:좀비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가 갖는 행위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거부하며 마지막에는 '좀비가 된 친구와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월즈 엔드에서는 아주 정확하게 정 반대의 장면이 등장한다:게리와 그 친구들은 파란 잉크가 가득한 대체된 사람들을 '로봇'이라 칭한다. 그러자 로봇인 그들이 반박한다:로봇은 체코어의 '노예'라는 단어에서 등장한 단어인데, 우리를 보라. 우리가 어딜봐서 로봇, 즉 노예란 말인가? 이러한 그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게리와 그 친구들은 그들을 '로봇'이라 칭하길 포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명 첫번째 작품에서는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극도로 꺼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서, 왜 여기서는 아주 쉽게 무언가를 '노예'라고 칭해버리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하게 어떤 의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것은 영화가 이 대체된 인간들을 일방적인 증오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나름 충격적인 종말 이후, 이 대체된 인간들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간다. 심지어 게리는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데, 이 새로운 친구들 모두가 '대체된 인간'이다. 영화는 대체된 인간 자체에 대해서 영화는 어떠한 편견이나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조롱 가득한 '로봇'과 종말 이후의 대체된 인간들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가장 중요하며 유일한 차이는 바로 '네트워크'의 유무이다:네트워크는 인류를 계몽하여 은하계 사회의 일원에 걸맞는 존재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서 우주에서 온 외계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최첨단 기술을 전파하고, 긍정적인 캐치프래이즈와 더욱 완벽하고 훌륭한 인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을 한다. 


네트워크라는 빌런의 존재는 기존의 외계인 빌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그들은 인류를 침략하거나 그들 중의 일부로 개종하러 온 것이 아니다. 경쟁이 아닌 유대감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그들은 인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숭고한 사명의식을 갖고 이 땅에 강림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긍정성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마지막엔 기술문명을 붕괴시키는 사태를 초래한 게리 일행이 도덕적으로 '더 나쁜' 집단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그야말로 악의가 없는 순수하게 선한 세계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악의없는 순수한 선이 더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도덕적으로 완벽하기에 반박이 불가능하며, '더 좋은 세계'를 원하기에 반대세력을 쓸어낼 수 있는 추동력을 갖는다. 네트워크가 순수한 인간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수만명의 도시 주민들을 대체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도 과거 나치즘이 우성 아리아 인에 의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아리아 인 이외의 인류를 향해 범한 인종청소라는 범죄의 맥락과 연결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부정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긍정의 세계란 지극히 파시즘적인 세계라고도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감'이나 '더 나은 인간' 같은 자기계발서에서 다룰 법한 가치를 기치로 내건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대체된 인간은 '노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긍정의 세계에 대한 경계가 3부작 중 하나인 뜨거운 녀석들에서도 드러난다는 점이다:마을 장로들은 모여서 영국 최고의 마을 상을 받기 위해서 부랑자, 불량 청소년, 범죄자 등등을 죄다 죽이고 암매장한다. 주인공이 도대체 왜 그런짓을 하냐고 물어보자 더 좋은 선을 위해서For the greater good이라고 대답을 한다. 일견 이 황당해보이는 상황은 의미심장함을 내포하고 있다:영국 최고의 마을상이 공공선Greater good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니, 애시당초에 공공선이라는 것의 이름 아래서 행해지는 배제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감독은 이미 월즈 엔드 이전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비꼬기만 했었던 뜨거운 녀석들과 다르게, 월즈 엔드는 감독 스스로가 내린 결론이 포함되어 있다.


네트워크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게리와 그 친구들을 보자. 특히 게리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이다:우선 그는 완전히 자기 중심적이며, 유치하며, 그의 좋은 시절 추억을 위해서 모든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렸으며, 자기 술친구를 위해 어머니까지 팔아먹는 등 엉망진창인 인간 쓰래기라 평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좋은 시절 추억에 극도로 집착한다: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뒤 느꼈던 충만감과 자신감의 순간에 집착하여, 게리는 술을 마시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 도달한 곳은 친구들을 화나게 만들고 실망시키며, 동시에 그 자신도 알콜중독자일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골든마일 재패에 집착한다. 그것이 그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는 바로 인간의 '병신성' 그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피터는 자신을 괴롭혔던 인간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잊을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Arcade Fire, Windowsill), 인간은 네트워크가 요구하는 것처럼 과거를 벗어나서 미래로 나아가는 완벽하게 긍정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병신짓을 하던 중에 입은 흉터를 드러내거나, 이혼한 아내의 결혼반지임에도 그것을 찾으려는 앤디의 모습, 가장 훌륭했던 자신의 인생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며 친구의 만류에도 술을 계속 마시려는 게리의 모습,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친구들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전적으로 과거에 매여있으며 육체적인 문제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들은 무한 긍정을 주창하는 네트워크에 의해 대체된 인간들과 구분될 수 있다. 어찌보면 이렇게 병신같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의내리는 '무언가'라고 영화는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월즈 엔드의 여정은 무한 긍정의 세계 속에서 병신같은 인류의 면모를 고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계몽'될 수 없다는 것을 안 네트워크는 최첨단 기술들을 모두 파괴하며 지구에서 떠난다:아마도 월즈 엔드에 있어서 껄끄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텐데, 우리는 이미 최첨단 기술 사이에 살고 있기에 그러한 기술의 절멸이 갖고 있는 의미와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지껏 병신같게 잘 놀다가 전 지구급으로 스케일을 키우는 엔딩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본인 역시도 좀더 부드럽고 납득이 되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그 괴리감보다는 영화가 보여주는 '종말 이후'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네트워크가 떠난 뒤 기술 문명의 종말 이후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혼란과 광기와는 완전하게 다르다. 그들은 오히려 더 차분해지고(앤디), 원하는 것을 얻거나(아내와 재결합한 앤디, 스티븐은 피터의 동생과 결합한다), 혹은 종말 이전과 다름 없는 삶(대체된 피터와 올리버는 종말 이전의 생활을 하는것처럼 보인다)을 살게 된다. 네트워크는 인류에게 더 좋은 세계와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한 것만큼이나 우리의 삶의 본질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없더라도 인류는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영화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멸망하였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게리는 술도 끊고 면도도 깔끔하게 한 모습으로 새로운 친구들과 모험을 즐긴다. 게리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이었던 과거의 자신과 일정 정도는 화해하며 자신의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규칙(특히 술을 끊은 모습에서)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영화 월즈 엔드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이어지는 작품이다. 결말까지 이어지는 더 나은 과정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갖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죽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영화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하며 통찰력이 느껴졌던 부분들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결론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월즈 엔드는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며, 이전 작품들과 같이 사람들과 술한잔 하면서 보기에는 딱 알맞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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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자 보스 무토는 인맥을 동원해 아내의 소원인 배우 지망생 딸을 영화에 데뷔 시키려 하지만 딸의 말썽으로 촬영이 무산된다.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토는 직접 제작자로 나서 야쿠자 조직원들을 스탭으로 동원한다. 얼떨결에 무토의 딸과 엮여 영화 감독으로 소개 된 코지는 강제로 이 영화의 연출 의뢰를 받게 된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코지는 일생의 영화를 찍는 게 소원인 영화광 히라타와 3인방 '퍽 바머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는 리얼리티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마침 앙숙인 두 야쿠자 '무토파'와 '이케가미파'의 결전을 실시간으로 찍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영화다:액션 영화에 미친 아마추어들은 전통복에 환장한 야쿠자와 출소하는 아내를 위해서 항쟁 당일 영화팀을 꾸리는 야쿠자 두목의 도움을 받아서 서로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영화에 담는다. 영화는 2시간 동안의 러닝타임 내내 산지사방에 피를 흩뿌리며, 온갖 골때리는 연출과 황당한 상황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2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는 관객을 흡입하는 힘이 강한 작품이며, 재미로 영화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도 무난하게 추천해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금 색다른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메인 플롯은 야쿠자나 갱스터 물에 가까운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러한 메인 플롯에 영화광인 히라타와 퍽 보머스Fuck Bombers의 존재를 이중나선처럼 연결지은 것일까? 그리고 왜 제목은 '지옥이 뭐가 나빠'인 것일까?


왜 제목이 '지옥이 뭐가 나빠'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옥'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제목에서 지옥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를 선정하긴 했지만, 정작 극 내부에서 지옥이라는 키워드에 대응되는 뚜렷한 무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지옥이라는 키워드가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전설적인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과 지옥이 뭐가 나빠를 대칭시켜야 한다. 시네마 천국은 어렸을 적에 영사기사 알프레도에게 영사기술과 영화를 배운 토토가 영화와 함께 성장하면서 사랑과 슬픔,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네마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토토와 영화의 관계일 것이다:영화는 그의 삶에 있어 중요한 순간을 차지하였으며, 다양한 고전 영화들이 그의 삶을 관통하듯이 지나간다. 마치 다시 손에 잡을 수 없는 빛바랜 추억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옥이 뭐가 나빠는 다르다. 지옥이 뭐가 나빠가 직간접적으로 인용하는 영화들은 우리가 '고전영화'라고 부르는 그런 고상한 것들이 아니다:이소룡의 용쟁호투의 직접적 인용과 파일럿 무비에서 드러나는 챤바라 물(베고, 베고, 베고, 또 벤다!), 야쿠자물의 인의와 시대착오적인 시대극의 모습들, 코카인을 한껏 들이키고 보이는 싸이키델릭한 환상이나 신체절단이 난무하는 고어 영화의 영향 등등 그야말로 '입에 차마 담기에는 너무나 천박하고 유치한' 물건들 뿐이다. 그렇기에 지옥이 뭐가 나빠의 히라타와 그 친구들은 토토와 정반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토토는 영화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였고(어렸을적 부터 그는 영사기사를 했었다), 성공을 하여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지위를 성취하였다. 하지만, 히라타와 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로 삶을 연명하며, 한때 자신들의 아지트였지만 지금은 망해버린 극장에서 스크린도 아닌 브라운관으로 만든 파일럿 무비를 보고, 또 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영화는 히라타와 그 친구들에게 '지옥'이다. 처음 사카키와 만난 이후, 10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채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결국 사카키가 무위도식하는 자신들의 상황에 분노하여 히라타 일행과의 절교를 선언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영화를 정말로 사랑하지만, 그들이 메인스트림에 오를 수 없다는 점에서(10년이 지나 폐허가 된 극장과 오락기기들처럼) 영화는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굴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굴레에 대해서 늘어놓는 히라타의 장황하면서 바보같은 신념이다:이런 시궁창 같은 상황에서도 영화의 신은 우리에게 어떤식으로 기회를 줄지 모른다. 히라타가 말하는 영화에 대한 사랑은 바보같고 장황하며 앞뒤가 안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하며 확고한 열의와 철학이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10년 전과 현재를 오가면서 리드미컬하게 진행된다:무토를 습격하려다 오히려 무토의 아내에게 당해서 실패한 이케가미는 무토의 딸인 미츠코를 만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동시에 무토는 자신의 아내 덕에 습격에서 살아남았다는 빚을 졌으며, 동시에 일련의 항쟁으로 CF로 잘나가던 딸의 성공가도를 망친다. 재밌는 점은 이 둘의 주된 행동 원인이 미츠코라는 케릭터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케가미는 자신에게 살아나갈 수 있는 동력을 준 미츠코를 숭배(?)하고는 남자의 결단은 기모노다! 라 외치며 시대착오적인 야쿠자를 꾸리며, 무토는 야쿠자의 인의에 대한 일장설교를 늘어놓으며 일생일대의 결전을 앞두고 아내에 대한 인의를 지키겠답시고 영화팀을 만들어버린다. 미츠코로부터 시작된(엄밀하게 본다면 그 바보 같은 CM 덕분일 것이다) 이 비상식적인 황당한 행동들에는 히라타 같이 바보같지만 확고한 열의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의 바보 같은 행동들은 야쿠자 영화의 클리셰에 대한 비틀기이다:조직원 사이의 의리라는 클리셰는 바보같은 영화 만들기로 바꾸며, 남자의 결단은 시대착오적인 기모노를 향한 결단이 된다.


그리고 히라타, 이케가미, 무토 외에도 영화에는 바보와 또라이들이 가득하다, 아니 바보와 또라이들 밖에 없다:얼떨결에 영화감독이 된 코지는 코카인을 한껏 흡입하고는 이마에 칼을 박고 몸개그를 하지 않나, 미츠코는 10년전 어린 시절부터 피웅덩이 가득한 바닥을 바라보며 시체 청소부를 부르고 성장한 뒤에는 맥주병 키스를 하는 등의 광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을 바라보라며 히라타와 싸우던 사카키는 기회가 생기자 다시 그 바보같은 노란 추리닝과 쌍절곤을 들었으며, 사카키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점장은 자신의 음식점에서 깽판을 치던 사카키를 바라보며 따봉을 외쳐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하며 바보같은 자기 미학과 철학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서 진행된다. 


왜 영화는 이렇게 확고하면서 바보 같은 미학과 철학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일까? 여기서 다시 히라타의 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친구들과 야쿠자들이 경찰에 의해 죽어버린 후 겨우 필름과 녹음 테이프를 회수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한 히라타는 달려나가면서 해냈다! 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의 환상속에서 히라타 일행의 아지트였던 극장이 부활하고 여지껏 등장한 배우들과 함께 환호하는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부와 명예에 국한된 영화가 아니었다(그는 그런 쓰레기 같은 영화는 자신은 안 만들겠다고 극 중 내내 반복한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그의 유년시절의 쿨했던 영화들의 존경이자 그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미학의 결정체였다. 그렇기에 그가 찍은 영화, 지옥이 뭐가 나빠에는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바보들이 가득한 것이었다.


또한 지옥이 뭐가 나빠는 영화 바깥의 현실과 교차시키는 메타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서 바라볼 수도 있다:지옥이 뭐가 나빠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의해 성공하고 거기까지의 과정을 반추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장년층의 시네마 천국이 아닌, 소위 싸구려 영화에 심취하여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지도 못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위해 오늘과 미래를 내던져버리는 요즘 시대의 청년층의 시네마 지옥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히라타와 그 일행들은 오히려 되묻는다:그런 시네마 지옥이 뭐가 나빠?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 사랑은 B급 영화의 매력처럼 바보같지만 멋있으며 폼에 죽고 폼에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지옥이 뭐가 나빠의 B급 정서에는 '음험함'이 대단히 옅다:영화의 유쾌함도 유쾌함이지만, 동시에 영화가 피가 엄청나게 난무하는 성인용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섹스에 대한 묘사가 적은 점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케가미의 미츠코를 향한 사랑은 전적으로 동경 또는 숭배에 가까우며, 무토는 자신의 연인을 아내에 대한 의리 때문에 내친다. 야쿠자들은 두목의 황당한 요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칼 싸움을 넘어서 총을 꺼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마저도 유쾌하고 즐거운 놀이처럼 묘사한다. 즉, 영화는 피와 절단이 난무하는 B급 영화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런 어떤 '음험함'이 들어갈 요소를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배제하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옥이 뭐가 나빠는 소노 시온의 자전적인 영화라고도 생각하기도 한다. 히라타가 마지막에 달리면서 외친 해냈다! 라는 기쁨의 함성은 소노 시온 스스로의 외침일지도 모른다:나는 이런 바보 같은 영화를 드디어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바보'라는 수식어는 욕설이나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애정어린 칭찬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옥이 뭐가 나빠는 정말로 좋은 의미에서 바보 같은 영화이며, 그런 바보 같은 것에 애정을 가진 젊은 세대를 위한 시네마 천국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다.






끝으로 지옥이 뭐가 나빠 엔딩곡을 첨부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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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대신해서 체포되어 교도소에 복역되었다가 출소한 후, 레오 핸들러는 이제 그의 인생을 다시 제대로 되돌려 놓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전과자에게 녹녹하지 않고 사촌이자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던 에리카는 이미 자신의 오랜 친구 윌리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어있는데. 레오는 지하철 회사를 운영하는 삼촌, 프랭크를 만나 윌리와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만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에 빠져들며 살인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 그는 이 세계 속에서 가장 냉혹한 조직의 공격대상이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음모를 발견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더 야드의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는 대국민 사기극에 가까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평범한 장르 영화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들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과정과 방점을 찍는 부분에서 여타 장르 영화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들은 기존의 장르영화의 공식에 비추어 보면 전적으로 '엇박자'에 가까운 영화들이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가 갖고 있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박자로 만들어진 그래이의 영화는 다른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깊은 향기를 갖고 있다. 더 야드 역시도 그러한 부류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유대인 가족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배경 때문에 영화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할거라는 반대를 부모로부터 받았었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감독의 길을 걸었던 복잡한 성장배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성장배경이 그에게 있어서 가족에 대한 악감정과 트라우마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리틀 오데사나 투 러버스에서처럼, 가족을 향한 그의 감정은 트라우마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긍정적인 감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즉, 가족이라는 테마를 다루는데 있어서, 제임스 그래이의 접근방식은 '양가적'이다. 그리고 이 양가적인 접근이 서로를 양 끝으로 잡아당기면서 극에 붙잡혀 있는듯한 축축한 감성과 중력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적어도 본인에게 있어서 제임스 그래이는 최고의 가족 영화 감독이다.


더 야드 같은 경우에는 제임스 그래이 버전의 '대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여기에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온 탕자(레오)가 있고, 그 탕자는 가족 사업에 뛰어들면서 이런저런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대부와 더 야드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전적으로 '가족'이라는 집단 내에서의 관계론의 문제다. 대부에서 콜레오네 패밀리의 관계는 돈 콜레오네-마이클 콜레오네라는 아버지와 그 밑의 자식들과 방계의 형제들(또는 조직원들)의 가부장적 관계가 중심이다. 제목인 대부Godfather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가족의 수장이자 고독한 폭군이 주변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며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것이 대부의 이야기 핵심축이 되며, 그렇기에 대부에 있어서 조직과 가족은 가족의 형태를 넘어서 작은 사회, 더 나아가 인생의 은유로서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제임스 그래이의 더 야드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더 야드에 있어서 가족의 관계는 가족의 수장과 그 밑의 하부 구성원들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분명히 레오의 이모부 프랭크가 회사와 가족을 이끌며 가족-정치의 구심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랭크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오히려 그는 자신의 의견과 반하는 레오나 레오의 어머니의 견해에도 화를 내지 않으며,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오히려, 가족 내부에서도 배신과 음모가 판을 쳤던 대부의 가족과 다르게 더 야드의 가족은 분명하게도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오가 일을 망쳤을 때도 프랭크는 그를 제거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가족으로서 뒤를 돌봐주려 했었고, 망가지기 전의 윌리와 레오의 관계 역시도 서로의 뒤를 봐주는 밀접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더 야드의 인물 관계는 전적으로 '수평적'이다:프랭크와 그의 가족들, 레오, 윌리는 서로를 사랑하며 진심으로 위하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제임스 그래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다:가족의 사랑이란 감정적인 지원과 함께 무시무시한 감정적인 파괴를 수반한다고. 더 야드에 있어서 관계는 역으로 모든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윌리는 레오를 친구와 친척으로서 사랑하지만, 동시에 에리카와 레오가 사촌 이상의 밀접한 관계일 수 있다는 의심이 레오와의 관계를 뒤틀어버리게 된다. 또한 프랭크 자신과 가족의 파멸, 에리카의 죽음 역시도 이러한 사랑의 양면적인 부분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더 야드의 가족과 인물관게를 넘어서 암흑가와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 역시도 '수평적인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윌리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레오에게 설명할 때,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다'라는 호혜적이면서 단순한 원칙으로 묘사한다. '내가 거절못할 제안을 하지'라고 이야기하는 대부의 관계와 다르게(왕과 신하의 관계) 더 야드의 암흑가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해주면서 지속되는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이 수평적인 관계는 서로에 대한 '평등한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윌리와 거래하는 위원장이 도청을 두려워하여 옷을 벗고 알몸으로 거래를 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바깥의 세계는 호혜관계로 유지되지만 동시에 그 관계는 호혜가 끊기게 될 때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이야기의 균형이 무너지고 위험에 처해지는 순간은 경쟁사에게 매수당해 윌리의 제안을 거부하는 역사 관리인이 등장할 때와 같이 '더이상 서로에게 필요가 없어질 때'이다. 


이렇게 영화는 가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윌리와 레오라는 두 주인공을 통해서 풀어나간다. 레오는 여타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그는 항상 우울하며 아버지(아버지에게 부재한 그에게 있어 이모부인 프랭크라고도 볼 수 있겠다)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리를 두려하며, 어머니와 가족 내의 여성들에게 공감하기는 하지만 세계는 냉혹한 아버지의 방식으로 유지되기에 이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레오는 귀향 이후 성실하게 살고자 했었다:하지만 범죄자라는 낙인이 그에게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게 막았으며, 그리고 이모부의 호의를 쉽게 질 수 없었기에(누구라도 가족과의 관계에서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해본다) 윌리와 함께 암흑가에 발을 담게 된다. 재밌는 점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레오는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파악하고 자신을 둘러싼 일들을 주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면 월리의 경우에는 레오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생은 역사 관리인을 죽이기 전까지는 탄탄대로였었으며 레오와 다르게 쾌활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일처리에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도 잠재되어 있는 불안 요소가 있다:그것은 바로 그의 외부자적 신원이다. 경쟁사 직원이 윌리를 도발하면서 '너는 절대로 그들처럼 될 수 없어'라는 말 한마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그는 라틴 계열이며 명백하게도 프랭크와 레오의 가족의 일원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에리카와의 결혼을 통해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안정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 관리인과의 관계가 틀어지듯이 그의 업적은 단 한번의 실수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윌리와 레오라는 케릭터는 어찌보면 제임스 그래이의 개인적인 경험이 두명의 케릭터로 쪼개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늘 우울한 모습에 가족과의 사랑, 안정, 그리고 험악한 세상을 알아나가는 탕자의 경험을 레오가, 그리고 유대계열로서 사회에서도 겉돌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에 불안정했던 자신의 삶의 경험을(투 러버스가 개인적인 경험을 구체화 시킨 것이었다는 진술을 믿는다면, 제임스 그래이의 경험과도 이는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윌리가 이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직접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부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이면서 탈정치적이다. 이주민(유대인 또는 윌리 같은 라틴 계열)이라는 배경은 영화 내에서 서사를 구축하지 않지만 영화는 은연중에 그러한 배경을 깔아둠으로서 '이야기를 형성하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이야기의 배경에 존재하면서 하나의 '중력'을 형성한다: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케릭터들은 이러한 중력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한다. 투 러버스나 리틀 오데사 같은 영화에서는 한명의 인물이 겪는 이 양가적인 감성은 배경에 젖어들어가며 탈출이 힘들어지는 축축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구축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더 야드는 두 영화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한 명의 케릭터가 감당하는 이야기의 무게는 두명의 케릭터가 나눠서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 홀로 남겨진 레오가 지하철에 다시 앉아서 카메라 너머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다른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기묘한 여운을 느낄 수 있다:레오는 아버지의 방식(프랭크의 방식)을 거부하였고, 모든 사건들은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다시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에리카는 죽었고, 윌리는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났다. 오히려 둘이 함께함으로서 갖고 있었던 안정과 균형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말미의 레오의 응시는 단순한 응시를 넘어서 어떤 무게를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더 야드는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최고는 투 러버스라고 생각하지만, 더 야드 역시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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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렛 에드워즈 감독의 고질라 2014 감상은 여기서 확인해주시길(http://leviathan.tistory.com/1865)


2009년, 태양계에서 외계생명체의 존재가능성을 발견한 우주 탐사선이 외계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귀화하던 중 멕시코에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후 나타나기 시작한 괴생명체로 인해 나라의 절반이 감염구역으로 지정되어 격리되고. 그로부터 6년 후. 삼류 사진가 ‘앤드류’(스쿳 맥네이리)는 멕시코 인근으로 여행을 떠난 출판사 사장의 딸 ‘샘’(휘트니 에이블)을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오라는 임무를 맡는다. 샘과 함께 크루즈를 타고 미국으로 오는 간단한 임무로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여권을 도둑 맞으며 크루즈에 오르지 못하고, 어떻게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감염구역의 중심을 지나가야 하는 최악의 위기를 맞는다. 무방비 상태로 감염구역을 지나가던 그들은 ‘괴생명체’와 맞닥뜨리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영화 몬스터즈는 솔직하게 아주 잘 만들었다고 평하기는 힘든 영화이다:드라마는 어딘가 붕뜬것 같이 추상적이며, 극에 있어 긴장감은 없고(물론 의도한 것이라지만), 장르 영화로 보기에도 어딘가 비정형적인 면모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몬스터즈는 편하게 앉아서 시간 때우기용으로 보기에는 부적합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훌륭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매력적이고 흥미로우며 동시에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영화 고질라 2014의 감독으로 더 잘 알려진 가렛 에드워즈의 데뷔작인 몬스터즈는 고질라 2014에서 드러난 괴수영화에 대한 그의 독특한 미학과 접근법이 그저 맨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소간의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이 작품은 독특한 미학 덕분에 괴수영화라는 장르영화 자체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 시퀸스를 보자:영화는 야간 투시 카메라로 미군들은 발키리의 비행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다 갑작스럽게 거대한 괴수와 조우하고 교전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괴물과의 교전에서 밀리는 미군들이 공습 지원을 요청한 후에 철수하고 와중에 부상을 입은 민간인과 울부짖는 괴수, 그리고 미사일이 폭발하면서 '괴물들Monsters'이라는 제목이 등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인간과 괴물들 사이의 폭력적인 갈등을 다루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90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이런 격렬한 장면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덤덤하고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무언가에 가깝다.


그렇다면 영화가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첫번째 시퀸스의 이질성은 괴물에 대한 '상식'에 가깝다. 우리가 전쟁영화나 괴물영화에서 자주 보듯이, 전쟁이나 괴물이라는 스펙타클에 대한 전형성을 구현한 지점이 바로 첫 시퀸스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전형적인 스펙타클이 아니다. 첫번째 시퀸스 이후, 카메라는 주인공인 사진가 앤드류에게로 초점을 돌린다. 그는 사진가다:사장의 딸인 샘에게 이야기 하듯이 그는 사진을 찍어서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가 찍는 것은 괴수가 부수고 난 뒤의 '여파Aftermath'들이다. 무너진 건물과 잔해, 폐허, 그리고 아이들이나 사람들의 모습들 등등. 


영화는 앤드류의 사진처럼 영화 전반에 괴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괴수를 감추고 일상을 보여주고자 노력을 한다. 텍시기사의 표현대로 '괴물이 오더라도 달리 갈곳이 있습니까? 여기서 살아야죠'라고 하듯이, 사람들은 괴물의 위협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산다. 어찌보면 그들의 삶은 괴물 이전이나 이후나 다름없이 느껴질 정도이다: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해맑게 웃으면서 산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괴물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질 수 없다:격리구역을 건너기 전의 마을에서 보듯이, 거대한 철벽과 죽은 사람들의 기록들, 폐허가 된 과거의 흔적들은 그들의 이질적인 동시에 삶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몬스터즈에서 괴수는 정말로 기묘한 존재이다:직접적으로 그들이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괴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공기 중에, 삶 중에,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몬스터즈의 괴수는 전적으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괴물들은 도시문명을 파괴하고, 인류를 구원/파멸하기 위해서 원시의 어둠속에서 문명의 빛으로 진격하는 여타 작품들의 괴물과는 전혀 다르다. 엄밀하게 본다면 몬스터즈의 괴물들은 전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아젠다'가 없다:그들은 놀라운 크기와 경이로운 번식속도를 가진 채로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서 인간의 삶은 완벽하게 바뀌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통제불가능하고 이해불가능한 외계에서 온 타자에 대한 공포다. 인간은 그들을 막기 위해서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방벽을, 그리고 격리구역의 건설을,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방독면'을 들고다니면서 외부의 오염에 대비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진정으로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일까? 영화는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다.(그렇기에 영화 속의 괴수는 아젠다가 없다:타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죽여야 한다의 부재) 대신에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무조건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우리가 이들에 대해서 너무나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앤드류는 오랫동안 괴물들의 시체와 사람들의 일상을 찍어왔다. 하지만 그와 샘이 직접적으로 괴물을 보게 된 것은 그들의 위험천만한 귀국의 여로를 통해서 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괴물들이 탄생하는 과정을(나무에 심어놓은 포자가 강물로 흘러들어가, 다시 그들이 태어난 장소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들이 갖고 있는 야생의 흉포함을(조우한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괴물, 파괴된 마을), 그리고 괴롭히지 않으면 인간에 대해서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밀수꾼들의 증언)을 배우게 된다. 그 이전까지 이들에게 있어서 괴물은 TV와 사진이라는 작은 프레임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리고 공기 중에만 떠돌아다니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밀입국의 여정을 통해서 그들은 괴물이 어떤 존재임을 바라보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여정 중에 앤드류와 샘의 관계 역시 변화한다. 이들은 처음 서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서먹한 타인의 관계에서 마지막엔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집에 돌아가기 싫어요, 사실 샘의 이러한 감정은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발현되지 않을 뿐)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화학적 변화의 촉매에는 '괴물'이 자리잡고 있다:그들의 여정 자체가 TV 스크린과 사진이라는 프레임 내부에 갇혀있던 괴물들을 실제로 만나고 목도하는 과정이었으며, 괴물과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경험을 통해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바깥의 타자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을 한 그들이 어떻게 마지막에서 용기를 내어 서로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을까? 그것은 괴물이 더이상 타자를 넘어서 이제 '경이와 신비'를 내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괴물의 빛나는 촉수가 서로를 더듬고는 어둠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신비한 장면을 통해서, 타자가 갖는 경이와 신비에 매료되고 타자(괴물들을, 그리고 샘과 앤드류는 각자를)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괴물은 공포와 함께 신비와 경이가 공존하는 존재로 화한다.


타자로서의 위험과 신비를 동시에 갖고 있는 몬스터즈의 괴물들은 고질라 2014의 미학과도 맞닿아있다:괴물들에게는 아젠다가 없으며, 그저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고질라와 무토가 인간의 이해범위를 아득하게 넘어선 채로 그저 그들의 본성대로 싸울 뿐이라면, 6년전에 불현듯 지구에 나타난 이 외계생명체들 역시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생명체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러한 타자적 존재로서의 괴물들을 직접적인 스펙타클이 아닌 분위기와 공기중의 존재감으로서 인간에게 신비와 경이, 공포를 자아내게 만든다. 


물론 영화는 몇몇 부분에서 뚜렷한 한계를 갖는다. 드라마 측면에서 영화는 어딘가 애매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왜 마지막에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섬세한 대사의 선택과 연기가 뒷받침 되었다면 결말 부분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지껏 다른 장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을 갖고 있다. 그러한 독특함이 고질라 2014를 만들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될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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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욥기 41:31 에서 33






〈리바이어던〉은 황홀하고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당신을 상업화된 어업의 위험한 세계로 깊숙이 데려갈 것이다. 제작자들은 뉴 잉글랜드의 해안 – 허먼 멜빌의 『백경』 에 영감을 주었던 장소 – 의 예측불허의 파도 속을 항해하는 거대한 어선에 동승하여, 어부들의 거칠고 힘든 세계를 무시무시하면서 동시에 아름답게 포착했다.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레비아탄은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바다 괴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서의 악마들이나 괴수가 그러하듯이, 레비아탄 역시 성서 이전의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레비아탄은 기원전 19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존재했었다고 알려진 우가라트 왕국의 신화에 나오는 존재로서, 바알신에 의해서 격퇴당하는 존재로서 그려진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현대적인 종교의 표본으로 볼 수 있다면, 레비아탄이나 베헤모스 같은 존재들은 근대적 종교(물론 근대적이라 해도 2000년 이상 되었지만) 이전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그것은 인간이 인격신을 섬기기 전에, 인간 내부에 내재된 폭력과 동물의 형태가 서로 결합한 성스러운 존재, 자연에 매료된 인간이 만들어낸 원시적 신앙의 잔재인 '괴물'인 것이다.


(http://leviathan.tistory.com/1845 에서 괴물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간략하게 기록해두었다)


다큐멘터리 레비아탄 역시 이러한 미학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영화가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문명 이전의 원시적 삶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어떠한 설명없이 담담하게 바다 위에서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고 손질하는 과정을 약 90분 동안 그려낸다. 그러나 레비아탄은 그 90분 동안 어떠한 메세지도 전달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출렁거리는 바다와 황홀한 어둠, 물소리와 피에 물든 물거품, 그리고 갈매기 때들까지. 레비아탄은 영상과 미학적으로 놀라운 쾌거이며, 관객들에게 원시의 황홀함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레비아탄이 어떤 쾌거를 거두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르적'으로 그나마 유사한 작품과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유명한 프로그램인 '생명을 건 포획Deadliest Catch'은 대게잡이 어선과 그 선원들의 삶을 그려낸 프로그램으로서 디스커버리 채널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어떻게 본다면, 바다위에서 일어나는 조업활동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레비아탄과 생명을 건 포획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둘이 도달하고 있는 결론은 완벽하게 다르다:생명을 건 포획은 전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게나 바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위에서 웃고 울고 하는 선원들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그려진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이야기는 바다라는 공간보다는 배 위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생명을 건 포획과는 완벽하게 다르다:레비아탄에게 있어서 인간의 '드라마'는 완벽하게 거세된다. 어부들은 침묵 또는 꼭 필요한 정도의 말만 하며,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영화 내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또한 영화는 배 위뿐만 아니라 배 주변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도 많은 초점을 맞추며, 갑판 위에서부터 갑판 바닥, 크레인까지 다양한 각도로 바다와 조업활동을 다뤄낸다. 인간이 중심이 되었던 생명을 건 포획과는 다르게 레비아탄은 조업활동과 바다라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재밌는 점은 레비아탄에 대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일종의 '거북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부정할 수 없다:생선 손질을 할 때 잘려나가는 생선의 머리와 무자비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세토막 나는 홍어(라고 생각된다)의 모습들, 그리고 손질된 생선을 바다로 흘려보낼 때의 핏물과 다양한 부유물들, 죽어가는 생선의 모습들 등등 레비아탄은 사람들이 거북하게 느낄만한 장면들을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쏘아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가학성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가학성이란 누군가를 가해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레비아탄에 있어서 그런 의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장면 다음에는 물소리와 고요함, 그리고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다. 레비아탄이 보여주는 바다는 생명력이 과잉으로 넘치고 꿈틀거리는 공간이다. 그로테스크함을 '에너지가 과잉으로 흘러넘치는 모습'이라고 누군가는 정의내리기도 하였다. 레비아탄의 바다는 리드미컬한 바다의 움직임과 함께 배 위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삶, 그것이 바다라는 공간에서 아우러질 때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포착한다:이러한 것이 가장 극대화된 순간이 바로 생선을 손질한 부속물과 핏물이 바다로 버려질 때, 바다가 선홍색으로 물드는 동시에 수면 바깥으로 언뜻 무수히 많은 갈메기 때들이 잡히는 장면이다. 죽음과 생명이 바다라는 장소에서 무심하게 어우러지며, 이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원시 인류가 매료되었던 원시적인 괴물과 자연의 이미지에 맥이 닿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레비아탄에 있어서 바다와 물은 모든 것이 한 곳에서 만나는 공간이자 매게체이며, 인간이 원시적 황홀함을 느끼는 미학적 공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아름답게 구현함으로서 관객에게 충격적이고도 놀라운 감정을 제공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레비아탄이 드러내고 있는 재밌는 부분은 바로 다큐멘터리가 촬영되는 방식일 것이다. 어떤 영화든 영화를 찍는 '촬영자'의 존재는 관찰당하는 피사체의 움직임을 변화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생명을 건 포획으로 돌아가 보자. 물론 이 프로그램이 레비아탄과 지향하는 바가 정반대라는 것은 앞서 밝혔지만, 여기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관계이다:이 프로그램에서 선원들은 끊임없이 조업 활동에 대한 자신의 코멘트와 함께, 인간적인 감정, 희노애락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이 끈끈한 유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프로그램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카메라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꾸며진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에서 소위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선정성과 한계를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다르다:이 다큐멘터리에서 피사체들은 카메라를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를 들고 있는(아마도 머리에 헤드셋 형태로 붙인 카메라라 추정된다) 사람마저도 조업활동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카메라가 선원들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 하는 순간에도 선원들은 당혹스러워하거나 카메라를 의식하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레비아탄에서 카메라는 바다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조업활동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그것은 '카메라를 의식하고 현장감을 연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정반대로 카메라 자체가 없다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촬영자가 피사체의 삶에 놀라울 정도로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레비아탄이 촬영되는 카메라의 앵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각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에 있어서 인간은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주제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다양한 곳에서 카메라를 설치하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하게 그런 주제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넘어서, 몇몇 장면들은 정말이지 절묘한 타이밍에 촬영되었다. 이는 제작자들이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과 주제에 대해서 깊은 탐구를 하고 고민을 하였기에,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설치하고 기록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즉, 레비아탄의 이 원시적이고도 아름다운 세계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재발견되었다'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레비아탄은 놀라운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바다와 어둠, 리드미컬한 바다의 움직임, 삶과 죽음이 어우러지는 황홀함 등의 이미지를 재발견하여 하나의 영상으로 묶어내었다. 어떤 의미에서 레비아탄은 훌륭한 시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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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등장하는 땜빵용 포스팅입니다 ㅠ



올해 가기전에 볼 생각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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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늘 본능에 충실한 거친 삶을 살아온 삼류 복서 알리. 그는 5살 아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누나 집을 찾게 되고 클럽 경호원 일도 시작하게 된다. 출근 첫 날, 알리는 싸움에 휘말린 범고래 조련사 스테파니를 돕게 되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끌려 연락처를 남긴다. 이후,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스테파니는 깊은 절망의 끝에서 문득 알리를 떠올리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감상)


자크 오디아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선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뚜렷한 주제나 드러내고자 하는 현상이나 목표는 없으며, 영화는 불현듯 끝을 맺는다. 예언자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예언자가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야기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 혹은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왜 톰은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는가? 사실, 앞선 두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 제기에 가까웠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물론 영화 두 편만으로 그의 영화세계 전반을 다루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 두 작품이 가져다주는 강렬하면서 비슷한 인상들은 부정하기 힘들다. 여기서 본인이 생각하는 자크 오디아르가 그려내고자 한 이야기는(혹은 프랑스 젊은이들의 현실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뚜렷한 대안도, 해결책도 없기에 영화는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렇기에 러스트 앤 본은 오디아르 영화 세계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러스트 앤 본은 어떤 의미에선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리고자 한 작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연관관계가 없는 두 단편소설을 이어붙였다는 러스트 앤 본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두 개의 갈림길로 쪼개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다리를 잃고 재기하는 돌고래 조련사의 이야기와 떠돌이 같은 삶을 살면서 스트리트 파이트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하류 인생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접점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야기가 두개로 갈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이야기는 명백하게 맞닿아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맞닿는 지점은 바로 알리와 스테파니의 육체이다. 이 둘이 왜 맞닿아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크 오디아르 영화들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자크 오디아르 영화의 키워드를 뽑자면, 본인은 '소음과 분노'라고 요약하고 싶다. 대부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머릿속이 핏빛 안개가 낀것처럼 뿌옇지만 분명한 탈출구나 원인,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 그 핏빛안개는 점점 짙어져서 소음이 되고 불안감이 되며 머릿속을 넘어서 서성임으로 나타나다가, 종국에 가서는 무지막지한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오디아르는 그런 불안을 육체의 형태로 구체화시키는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예언자에서 주인공이 마피아 보스에게 숟가락으로 눈가락이 파일뻔한 장면을 보자. 그 뒤에 주인공은 혼자서 고통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욕지거리를 한다. 맞은 뒤의 빨갛게 부은 상처 부위가 고통과 짜증을 동반하지만 그것 자체에서 탈출할 수 없듯이, 자크 오디아르에게 있어서 육체와 폭력의 관념을 그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와 폭력의 문법은 표현을 넘어서 극을 지배한다:내 심장을 건너뛴 박동을 보자. 톰이 폭력적이고 속물적인 아버지를 벗어나고자 한 피아노로부터 좌절되었을 때, 그는 비트가 강하고 시끄러운 랩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한다. 낮은 음이 베이스가 되어 세계와 단절된 막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 막은 내부의 불안과 분노를 가중시킨다. 아버지 세대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자식 세대는 고독속에 갇혀서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키워나간다. 그것이 결국은 엔딩에서 아버지를 죽인 러시아 마피아를 향한 폭력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러스트 앤 본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법을 따르고 있다:처음 도입부에서 알리와 그 아들이 무전여행하는 장면은 어딘가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다.(남은 음식을 주워먹는다던가, 히치하이킹을 한다던가) 특히 도둑질을 하는 장면에서처럼, 도둑질 직전의 불안감과 도둑질 후에 터져나오는 급박한 상황 등은 불안함과 폭발이라는 힘을 모두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다른 관점에서는 알리의 경제 계층적 상황에도 빗대어 볼 수 있다:고정적인 수입은 없고, 떠돌아다녀야 하며, 기댈 곳도 없다. 그렇기에 항상 주변에는 불안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알리는 '교양있는 지성을 가진 중산층'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불안을 '우아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가 이 불안을 풀어내는 방식은 그가 주로 듣는 박자가 강한 음악처럼 '분출되는 폭력과 섹스'이다.


영화 중반부터 후반까지 알리는 스테파니 이외에도 다양한 여자들과 섹스를 하거나, 불법 스트리트 파이트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가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쫒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겠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그가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과 누나와 매형과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이기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이것이 바로 그가 불안을 이겨내는 방식이다. 그는 생명력이 강하지만 정제되지 않고 불규칙한 리듬을 가진 자신만의 박자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 단순무식한 방법론은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에게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리듬을 선사하게 된다.


알리와 다르게 스테파니는 정적인 템포를 유지한다:그녀는 돌고래 조련사로써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며, 동시에 다리를 잃은 이후에도 경제적인 불안은 없어보인다. 알리가 자신을 둘러싼 여러 환경적 요인의 문제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면, 스테파니의 문제는 육체의 상실로 인한 침묵이다. 다리를 잃은 이후, 그녀는 삶의 원동력을 상실했다.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고 메스를 숨겼다가 뺏기는 시퀸스에서조차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폭발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림으로서 자신의 상처받은 몸뚱이와 고독 속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그녀가 알리와 처음 만났을 때 하였던 것이 바로 클럽에서 남자를 꼬시는 일이었다는 것이다:후에 알리에게 스테파니가 고백을 하기를 남자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에서 자신의 힘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스테파니의 행동과 케릭터는 자칫 넘기기 쉽지만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자신의 육체의 활력은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타자가 느낌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스테파니의 '자신감의 부족'이라고도 볼 수 있다: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그녀가 자신의 외부에서 박자와 생명력을 찾아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로인해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스테파니가 알리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방식이 섹스와 수영이라는 점(덧붙이자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장면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이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알리와의 섹스는 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러스트 앤 본에서의 섹스는 쾌락의 문제라기 보다(물론 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지만) '박자를 몸에 새기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섹스를 할 때 스테파니가 알리에게 천천히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침묵하던 그녀의 삶이 다른 박자를 몸에 받아들이기 거북하고 낮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박자와 리듬을 얻고(그전까지 휠체어를 타다가 의족을 통해 스스로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라),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은 트라우마의 원인인 범고래와도 조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만든다.


(영화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범고래가 사고를 일으키기 전, 물 바깥의 음악소리가 물속에서 웅웅거리는 소음이 되어 불안감과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범고래 역시도 물 바깥의 사람과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침묵에 사로잡혀 있다 새로운 박자를 얻은 스테파니가 범고래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을 넘어서 범고래를 이해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알리는 스테파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신뢰'라는 안정을 얻게 된다:불법 스트리트 파이트 매니저가 스테파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숨었을 때, 알리는 스테파니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스테파니와 알리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전통적인 관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무례한 행위를(스테파니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꼬셔서 나가는 것) 쉽게 저지른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그렇게 제멋대로의 박자에 맞춰서 살던 그가 스테파니의 분노에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와의 이 묘한 관계를 지속하는 쪽을 선택한다. 어찌보면 스테파니가 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의 활력을 찾았듯이, 알리는 스테파니를 통해서 신뢰와 안정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서 알리는 도망가듯이 누나 집을 나오고, 스테파니와의 연락이 끊기게 된다. 자신의 스트리트 파이트의 재능을 종합격투기에서 살리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홀로 연습을 하던 알리는 시합을 하기 직전 아들과 만나다가 아들이 얼음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게 된다. 자신의 주먹으로 얼음을 내려쳐서 아들을 기적적으로 구한 알리는 스테파니의 통화에서 아들을 잃을 뻔한 불안에 대해 토로한다:이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이전까지 자신의 불안을 토로하지 않았던 알리가 스테파니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들의 비정형적인 관계가 사랑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알리와 스테파니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이 사랑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러스트 앤 본에서 사랑은 미사여구나 상용구에 잡혀있지 않았으며 육체와 삶, 그리고 이것이 구체화되는 '박자'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기묘하지만 무게가 있으며, 독특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러스트 앤 본은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른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불안은 안정을 얻게 되고, 내지른 주먹의 고통은 더이상 불안에 의해서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 신체의 일부로서 '거기 있음'을 인정받고 고요한 독백의 대상이 된다. 자크 오디아르는 이전의 영화에서 젊은 세대의 불안과 분노를 훌륭하게 그려내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안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러스트 앤 본을 통해 그려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름다우며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엔딩의 독백을 인용하며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인간의 손에는 뼈가 27개, 그보다 더 많은 동물도 있는데 

고릴라는 엄지손가락 뼈 5개를 포함 총 32개다. 


어쨌든 손 하나에 뼈가 27개가 붙어있다니.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다면, 

몸에서 나온 칼슘으로 저절로 뼈가 붙고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지면 절대 완치될 수 없다.


주먹을 날릴 때마다 통증을 느낀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느새 갑자기...

그 고통이 살아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또 찌른다.


-러스트 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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