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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잊을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You can't forgive what you can't forget"

-Arcade Fire, Windowsill

할로윈 밤의 살아 있는 공포이자 레전드로 불리는 ‘마이클 마이어스’, 존재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가 40년 전 그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그녀 ‘로리 스트로드’와 다시 마주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소개)


할로윈 1978은 호러 영화에 있어서 슬래셔 하위 장르를 정의내린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할로윈1978이 살인마를 소재로 다룬 첫번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살인마를 다루는 공포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할로윈1978이 특별한 이유는 살인마 공포라는 장르 자체의 문법을 확립한 데 있다. 살인마의 존재,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희생자들, 그리고 살인마와 주인공의 사투 등 할로윈은 슬래셔 장르 서사 요소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살인마의 등장과 살해 장면, 섹스와 고어를 한 영화 아래 뒤섞는 것도 할로윈을 통해 확립되었다. 하지만 서사 요소나 연출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펜터가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미국 중산층이었다. 조용하지만 어딘가 텅비어있고, 어른은 존재하지 않으며 청소년들이 방탕하게 섹스를 하는 모습을 통해 카펜터는 미국 중산층의 풍경을 마치 종말을 맞이한 폐허처럼 다루었다. 이런 성적 방종을 통해 드러나는 도덕의 붕괴, 기성세대를 대변하여 징벌하는 듯한 살인마, 살아남는 주인공의 순수함 같은 시선은 살인마와 희생자의 관계에 대한 장르적 표본이었다. 그리고 할로윈의 통찰 이후로, 수많은 영화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장르를 따라갔다. 과거를 넘어서 미래에 일어날 장르적 특색을 먼저 정리한 작품이 할로윈이었다.

할로윈1978의 영화적 의미 이외에도 영화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수많은 속편과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영화는 원본의 완성도를 따라가지 못하였고, 영화는 주기적으로 리부트를 반복하면서 설정을 뒤집고 과거의 영광을 되세김질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 할로윈 레저렉션(2018)이 등장하였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프랜차이즈가 걸어온 모든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이 할로윈 1편 이후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직계혈통임을 자처하였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영화는 그만한 성공과 평단의 호응을 끌어냈다.

유념해야하는 점은 할로윈 레저렉션은 애시당초에 원작을 뛰어넘고자 하는 작품이 아니다. 영화의 큰 서사 구조인 '마이클의 탈출 - 살인 - 로리 스트로드와의 마지막 결전'은 이미 1978에 완성된 구조였다. 또한 영화의 많은 컷들과 소품의 배치, 이야기의 전개, 심지어 살인 방식까지 할로윈 프랜차이즈 전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치 더 씽2011과 같이 큰 구조와 컷 등을 가져오면서 그 속에다 감독 자신만의 영화적인 해석을 붙이는, 속된 말로 하면 팬메이드 무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씽 2011이 더 씽1982의 안주하여 프리퀼이란 지루한 아이디어에 사로잡혔다면, 할로윈 레저렉션은 원작에서 보지 못했었던 새로운 맥락과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할로윈의 특이성은 모든 슬래셔 영화의 원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점에는 마이클 마이어스라는 인물이 있다. 요즘같이 살인마들에게 구구절절한 사연과 슈퍼스타나 가질법한 개성이 붙어서 따라다니는 시대에 마이클 마이어스라는 살인마는 대단히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할로윈1978에서 마이클 마이어스는 순수한 악이다. 그는 기원도 없다, 동기도 없다, 심지어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하얀색 가면 밑에서 후욱 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인 마이클 마이어스는 불가해하며 순수한 악의 존재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렇게 '추상적인 악역'은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극에서 붕 뜨거나 난잡한 설정이 붙기 쉽다. 그러나 존 카펜터는 그러한 불가해한 악을 훌륭하게 스크린으로 옮겼다:어딘가 폐허를 연상시키는 미국 중산층 주택가의 어두운 그림자 처럼 스며들어간 마이클의 존재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 존재했었던 것 같은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렇기에 '거기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악'을 카메라 연출과 음악으로 잡아낸 존 카펜터는 순수한 악이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레저렉션2018은 어떠한가? 큰 틀에서 레저렉션은 1978에 대한 데칼코나미다: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카메라 워크, 연출, 음악 사용(존 카펜터 본인이 직접 참여한) 등이 원작에 참조를 두고 있다. 하지만 2018은 여기에 '40년의 시간'이란 맥락을 배치한다. 그리고 영화는 영리하게도 '순수한 악으로부터 살아남은 피해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라는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마이클 마이어스가 순수한 악이었다면, 그로부터 살아남은 로리 스트로드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이 시대에 순수한 악이란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영화는 변화한 시대상과 생존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서사를 이끌어낸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순수한 악이란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프로파일링과 과학적 수사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살인마가 그저 순수한 악이나 공포가 아닌 뒤틀린 모티브를 가진 퇴행적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 살인마는 슈퍼스타인 것처럼 팬들을 갖고 있고 하나의 가십거리 처럼 소비된다.(첫 시퀸스에 등장하는 영국인 팟캐스트 방송자 둘을 보라) 마이클은 이제 평범한 고등학생 총기 난사범의 킬카운트도 못따라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째서 사틴 박사나 저널리스트들은 마이클에 매료될까. 그것은 바로 마이클이 순수한 악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모든 살인마는 동기를, 자신만의 수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마이클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자신을 대변하려 하지도 않고, 변호하려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거기 있고, 살인을 할 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이클의 살인 장면을 연출하는 방법일 것이다:영화는 슬래셔 영화에서 자주 보여지는 과장된 살인 방법이나 생존자의 사투같은 장면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마이클이 어떻게 평범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 평범한 일상의 도구로 인간들을 참살하는가를 롱테이크로 다뤄내고 있다. 일상의 삶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 삶이 드리우는 그림자에 조용히 침입하여 삶을 파괴하는 마이클의 존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악의 존재를 다룬다. 이런 점에서 2018년 버전은 1978의 종말론적인 풍경과는 다르지만, 일상에 자연스럽게 침투하는 모습을 드러낸 점에서 마이클의 무서움을 잘 다루었다.

그 다음으로 봐야하는 것은 생존자에 대한 재해석이다. 악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악에 메일 수 밖에 없다:악에 대한 공포, 그로 인해 파괴되는 삶. 악과 생존자는 강력한 인과관계로 묶여있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로리 스트로드에게 집착할 수 밖에 없다. 로리는 마이클에게 있어서 완성시키지 못한 하나의 퍼즐 조각이다. 그 완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40년의 집착을, 순수하고 완벽한 악 그 자체를 보통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노인들만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순수한 악에 대한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타협할 수 없는 악이 있기에 그것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악이 있다는 것을 목도한 로리 스트로드의 삶은 망가졌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에 상흔을 남긴 마이클에 없애고자 한다. 희생자는 더이상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악이 있다면, 그것은 파괴해야 한다. 구세대적인 이분법이지만, 1978년 할로윈과 2018년의 할로윈은 40년이란 시간의 간극을 통해서 이 당위성에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해방과 역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악이 존재하더라도, 생존자는 더이상 무력하게 당하지 않는다. 생존자는 공포에 사로잡혀있지만, 동시에 사명감으로 함께 준비되었다. 최근 슬래셔 영화에서 피해자가 역으로 살인마를 떄려눕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할로윈 2018는 무려 40년을 기다리고 준비해왔던 생존자의 복수극이다. 살인마가 언제 무력한 생존자를 덮칠 지를 보는 것이 아닌, 준비된 주인공과 살인마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을 할로윈 2018은 다루고 있다:마이클이 목을 조르면 로리는 산탄총으로 마이클의 손가락을 날려버리고, 붙잡히면 칼로 찌르는 등등 40년 전 똑같은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이(물론 마이클은 대역을 쓰긴 했지만, 진짜 마이클 역을 맡은 배우도 영화에 출현하긴 하였다) 다시 엎치락 뒤치락하는 장면들은 장르의 팬으로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절정은 로리가 시리즈의 역사를 그대로 마이클에게 되갚아 주는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마이클과 로리가 싸우다가 로리가 창밖으로 떨어지고, 마이클이 한 눈을 판 사이 사라지는 장면은 할로윈1978의 엔딩 장면을 역할만 그대로 바꿔서 되갚은 것이다. 더 나아가 마이클의 뒤 그림자 속에 숨은 로리가 스팟라이트를 받으면서 튀어나오는 장면은 1978년 작품의 마이클 등장 장면을 역전한 것이다. 더이상 생존자가 무기력하게 당하고 생존 '당하는' 것이 아닌,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악을 처단하는 도식을 만들어낸다. 과잉이긴 하지만 살인마가 살인을 벌이는 공간인 집에 대한 재해석도 눈에 띈다. 쇠창살 등으로 막혀있는 로리의 집은 마치 맹수인 살인마와 주인공을 한데 가둬놓는 우리cage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그것은 살인마를 유인하고 가둬서 끝장내기 위한 준비된 함정trap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모든 것은 살인마에게 되갚아주기 위한 것들이었다.

결론적으로 할로윈 레저렉션은 원작에 대한 존경과 함께, 40년의 간극을 자기만의 재해석으로 채워넣은 훌륭한 작품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닌, 2편의 속편을 더 만들겠다는 영화사의 발표다. 할로윈 레저렉션은 그 자체로 완결된 영화였다. 거기다 새로운 무언가를 붙이는 건 사족이다. 하지만 사족이 붙더라도, 이 영화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빛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미드소마, 위커맨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여름, 낮이 가장 긴 날 열리는 미드소마에 참석하게 된 친구들. 꽃길인 줄 알고 들어간 지옥길, 축제가 끝나기 전까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미드소마는 상당히 독특한 영화이다. 장르적인 구분을 내리자면 미드소마는 공포 영화다. 그러나 미드소마는 과연 무엇에 대한 공포영화인가? 라는 질문으로 들어간다면 이 영화는 오리무중에 빠지기 쉽게끔 되어 있다. 이교도 사회이자 단절된 사회인 호르가가 공포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교도들의 사회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 주인공인 대니가 겪었던 사건과 대니 주변 인물들의 행동들, 그리고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영화가 내리는 결론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본다면 단순히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깜짝 놀라게 만드는 공포 영화라고 쉽게 정의할 순 없다.

 

미드소마가 다루고자 하는 공포와 그 감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위커맨(1973)을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의 섬에서 사라진 소녀를 찾기 위해서 분투하는 경찰관이 결국은 인신공양의 제물로 간택되어 죽음을 맞이한다는 위커맨은 미드소마 뿐만 아니라 수많은 호러 영화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위커맨의 이야기 구도는 올바른 주인공과 사악한 이교도 사이의 알력으로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인 경찰관은 경찰 제복을 입고 1970년대 관점에서도 캐캐묵은 도덕관념과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에 대비한 사이비 종교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긴 하지만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갖추었다. 위커맨의 서사 구조를 단순한 선악의 대결로 보기 힘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위커맨의 핵심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제 3자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춤과 율동, 그리고 자유분방한 성관념을 통해서 드러낸다. 사람들이 원시 고대 종교가 갖고 있는 편견들(인신공양, 생명 잉태에 있어서 여성의 강조, 성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 등)을 한 데 모은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악으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영화는 균형의 추로서 우리가 이입할 수 없는 보수적인 종교와 권위를 따르는 주인공을 설정함으로 어느 한쪽에 몰입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두 문화의 충돌을 목도하게 만든다.

 

위커맨의 서사가 '제 3자의 관점에서 본 두 문화의 충돌'이라면 미드소마 서사의 핵심은 '이질적인 두 문화의 결합'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위커맨의 서사가 제 3자적인 관점이었다면 미드소마의 서사는 전적으로 대니가 호르가라는 공동체에 어떻게 편입되는가를 다루는 내부인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분명 위커맨에서 나타나는 두 문화의 충돌이 미드소마에서도 일정 정도 다루어지긴 하지만, 미드소마는 모든 이야기와 서사 구조, 상징들이 대니의 삶에 있어서 시련-방황-극복-공동체의 편입이라는 구조로 맞춰졌다. 어떻게 보면 미드소마는 구조적인 부분에서 위커맨을 차용하되(인신 공양을 하는 이교도에 대한 이야기), 핵심적인 부분에서 위커맨과 정반대로 서사를 전개하여(이입할 수 없는 주인공 vs 모든 서사 구조의 중심인 주인공) 레퍼런스를 뛰어넘고자 하는 야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미드소마는 종교적인 상징과 징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일찍이 조셉 켐벨은 영웅 신화에 대해서 "인간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자식의 탄생, 성장, 부모로부터의 독립 등)을 상징화 한 것이 신화이다"라 했다. 미드소마는 비록 영웅 신화를 다루고 있진 않지만, 사람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들을 서사와 배경에 녹여냈다는 점에서 조셉 캠벨이 이야기한 구조로서의 신화를 따르고 있다. 영화는 첫 시퀸스에서 겨울의 호르가와 대니가 가족을 잃는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겨울과 죽음의 이미지를 교차시키고, 한 사람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호르가로의 여정으로 이어지는 필연성으로 이어나간다.

 

미드소마Midsommar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사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24절기 중 해가 가장 오래 뜨는 '하지'다. 이러한 하지는 문화권에 따라 해가 가장 오래 떠있다는 점에서 생명이 가장 충만한 시기로도 묘사가 되는데, 첫 시퀸스가 대니 가족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죽음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서 시작해 해가 가장 긴 시기에 맞이한 생명력이 넘치고 폭발하는 순간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계절적 변화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변화할 수 밖에 없는 흐름을 다루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대니가 어떤 식으로든 그 나름대로의 구원을 찾게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이러한 생명의 폭발을 그로테스크한 장면들과 양식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우선 영화에 나오는 다양한 벽화들이나 상징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양식 그 자체로서 그로테스크에 부합하기는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단순히 양식으로서의 그로테스크를 넘어서 육체의 훼손과 절단이라는 고어를 통해서도 생명력의 폭발으로 그로테스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의 주기가 끝난 노인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나 근친상간의 결실인 루벤의 존재, 피의 독수리를 당한 시체에 꽃을 꽂아두어 죽음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장면 등은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고어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감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을 최고도로 고양시킨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로테스크한 형상물들은 동시에 한 시대의 넘쳐흐르는 기운의 표현이다….물론 그로테스크한 것의 원동력을 두고 보면 이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퇴폐적인 시대나 병적인 두뇌를 가진 자들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그로테스크한 것은 퇴폐적 시대와 병적 개인들에게는 세계와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적인 반작용의 표현이다…이 두경향 가운데 어느 경향이 창조적 추진력으로서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의 배후에 있는가 하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에두아르트 푹스, 당조의 조형예술;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재인용.

 

아리 애스터는 이미 전작이자 데뷔작이었던 유전에서도 미니어처를 통해서 불길한 징조의 반복이라는 이미지를 구체화 시킨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 작품 미드소마에서는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최대로 발휘하였다. 영화는 곳곳에 이미지와 상징을 촘촘하게 심어놨으며(심지어 영화의 첫 그림은 영화 시놉시스 전체의 요약이다), 이러한 영화 속 이미지와 상징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자 징조 그 자체다. 즉, 하지 축제 자체가 생명력의 과잉에 대한 상징인 것처럼, 영화는 이미지의 과잉을 통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불길함과 필연성을 배치하며, 단지 개별 장면의 그로테스크함을 넘어서 영화 자체가 그로테스크 양식 자체가 된다.

 

그리고 생명력의 과잉에는 필연적으로 생명이 소비하여야 하는 소비재, 먹이가 필요하다. 그 먹이는 바로 외부에서 데려온 '죽어 마땅한 산 재물들'이다. 영화의 전반에 등장하는 외부자들은 영화 이야기와 호르가 공동체 관점에서 죽어야 하는 당위를 가지고 있다:마크는 섹스를 밝히면서 마을의 신성한 나무에 오줌을 갈기는 불경을 저질렀고, 조쉬는 학사 논문을 핑계로 마을의 경전을 도둑질하려 하였다. 잉마르가 데려온 커플 역시 호르가 공동체의 규범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한 당위를 얻었다. 

 

이 외부자들에게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현대문명의 개인주의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외부자들은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호르가 공동체와 대치된다. 영화의 초반 시퀸스에서 대니를 짐처럼 생각하고 해어지길 주저하는 크리스티안이 그러하고, 원치않게 대니를 스웨덴 여행에 동참시키면서 불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의 친구들도 그러하다. 이들을 다루는 영화의 시퀸스는 매우 '어색'하다. 무언가 서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지만, 각자 자기 주장에 갇혀서 멤돌 뿐이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체면치례나 사회관계를 고려하여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티안의 최후는 특별하다: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겨울잠과 겨울의 기운을 대변하는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화형을 당한다. 그는 마크나 조쉬과 같은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대변하지만, 흥미롭게도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주인공인 대니와 여성성의 대척점에 섰다.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크리스티안이 마을 공동체의 일원과 섹스를 하는 장면이다:기존 공포 영화 문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섹스 장면은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점, 섹스와 같은 개인적이고 은밀한 행위조차도 개인의 것이 되지 못하는 점, 남성성의 거세 등등이 드러난다. 섯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현대문명을 남성성에 호르가와 같은 고립된 공동체를 여성성에 대입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결국은 펠레가 대니에게 물었던 '과연 그(크리스티안)가 너를 지탱해주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대니의 대답은 크리스티안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와 개인주의를 버리고 호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니는 5월의 여왕으로서 세상의 중심에 서며, 크리스티안이 외도를 하였을 때의 충격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나눈다기 보다는 동기화하는')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불타죽어가는 호르가 마을의 산 제물에 공감하며 통곡을 할 때, 대니 혼자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미드소마는 감독의 야심이 넘처나는 작품이다. 그리고 관객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충분히 있고 감독도 자신의 재량을 십분 발휘한다. 그러나 영화 자체가 과잉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많은 상징들과 복선들을 영화 내에 우겨넣고 관객이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리다:영화 초반에 24절기를 암시하는 달의 그림을 넣은 장면이나 곰과 공주의 그림을 대니가 자고 있는 방에다 붙여 넣은 것, 호르가 마을에서 묵을 때 각 인물들의 마지막이 침대 머리맡에 태피스트리 형태로 새겨진 것, 바이킹 전통 처형 방식인 피의 독수리나, 조쉬의 발에 세겨진 도둑이라는 룬문자 등등. 영화는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디테일에 집착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1회 감상으로 모두 찾아내는 건 어렵다. 물론 영화의 큰 틀에서의 구조가 관객들도 충분히 따라올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미드소마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자기만 털어놓는 괴작이 될 뻔하였다. 

 

즉, 미드소마는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영화 정보량의 임계치에 근접한 물건이다. 더 과하거나 이야기 구조를 비틀었으면 이 영화는 카드로 만들어진 집처럼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미드소마는 공포영화를 사랑하는 팬들이나 특이한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들에게 어필할만하며, 이후로도 계속 거론될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만약, 아리 애스터가 미드소마의 성공에 취해 더 야심찬 영화를 만든다면, 그때는 이해 자체가 어려운 괴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존 윅 시리즈 전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존 윅 시리즈는 코믹스 중심의 최근 트랜드(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같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영화다:원작도 없는 간결한 서사에, 오로지 액션만이 중심이 된 영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 영화 리뷰 만화에서는 존 윅 시리즈를 '그 어떠한 주제의식 없이 존 윅이 사람을 몇명 쏴죽이는게 중요한 영화'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일견 이러한 평가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최근에 개봉한 3편인 파라벨럼도 "존 윅이 뉴욕에서 탈출함 - 존 윅이 최고 의회와의 중재를 위해 원로를 찾아감 - 친구인 윈스턴을 죽이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옴 - 덤비는 모든 적들을 제거하지만 윈스턴에게 배신당하고 살아남음"이라는 4가지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액션씬(총격, 맨손 격투, 나이프 파이팅, 근접전 등등)들이 존재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존 윅 시리즈는 1편에서부터 3편까지 짧은 시놉시스 내에서 반전이나 영화 특유의 주제의식 없이 러닝 타임 내내 액션으로 몰아붙이는 영화였다.

 

하지만 과연 존 윅 시리즈가 "아무런 내용없이" 액션으로 몰아붙이기만 하는 영화 시리즈였을까? 좋은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관객이 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이야기에 빠져드는 몰입의 요소를 갖는다. 존 윅이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죽이는 살인마였다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일어나는 모든 액션은 거북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존 윅이라는 케릭터가 움직이는 모티브에는 분명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런 점에서 모 영화 리뷰 만화의 평가는 존 윅 시리즈의 핵심을 빗겨나간 수박 겉햟기에 불과하다. 영화는 분명 존 윅이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가? 에 대해서 관객들에게 잘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빗겨나간 채로 영화를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 윅 1편은 흥미롭게도 10년 전에 나왔던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테이큰과 유사하다:둘 다 건드려서는 안되는 사람을 건드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주인공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 악역들에게 몇 배에 상응하는 고통을 주는 것으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존 윅과 테이큰이 주는 카타르시스의 핵심은 테이큰의 명대사 "(전혀 사적인 감정이 없다는 악역에게)나에겐 완전히 사적이야"로 축약할 수 있다:주인공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고, 개인적인 삶을 파괴하였던 무정한 세상과 잔인한 폭력에 대해서 몇배의 폭력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도 공감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공을 건드려서 좆되는 악역들"이라는 이야기에서 출발한 두 영화는 후속작이 나오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테이큰 시리즈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공의 딸을 건드려서 좆됨"(1편),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공의 전처와 딸을 건드려서 좆됨"(2편),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공의 전처를 죽여서 좆됨"(3편)이라는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주다가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몰락하게 되었다. 물론 3편이 나름대로의 반전을 설정하기는 했지만, 관객들이 테이큰 시리즈에 요구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존 윅 2편은 독특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확장하였다:1편은 존 윅이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생활의 파괴에서 비롯된 분노가 동인이었다면, 2편은 존 윅이 빠져나올 수 없는 공적인 세계(킬러들과 암흑가의 규칙들)에서 자신의 사적인 생활(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이었다. 이러한 공적인 세계 1편에서도 어느정도 드러나기는 했지만(암살자들의 성역인 콘티넨탈 호텔이나 암살자들의 화폐인 금화 같은), 그것을 전세계적인 규칙과 암살자들의 공적인 사회로 구축한 것은 2편의 공이 크다. 

 

그렇다고 2편은 이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정 설명을 갖다 붙이지 않았다:관객이 아는 것은 존 윅이 산티노에서 빚을 졌다는 것, 그리고 그 빚은 존 윅이 산티노의 부탁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원시적인 채무 관계이며, 채무라는 시스템을 기능케 하는 공동체와 규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2편에서 관객들은 설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필요 없이, 1편에서 어렴풋이 보였던 암살자들의 사회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사회의 미니어처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존 윅의 세계는 무협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계관과 비슷하다:둘 다 세상 안에 작은 미니어처의 형태로 구현되어 있고(암살자들의 세계와 강호), 그 내부에서의 규칙들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동시에 납득가능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존 윅 2편부터는 이러한 무협 영화에서의 강호라는 커뮤니티를 암흑가의 커뮤니티로 재해석하는 동시에(기술에 대한 존경, 주고 받는 예의와 격식 등), 서브컬처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범죄, 무협, 총격전 등의 클리세를 뒤섞는다. 존 윅 시리즈는 그야말로 전세계 액션 영화의 잡탕과도 같은 시리즈다. 이런 점에서 존 윅 시리즈는 고전적인 액션영화의 오마주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시리즈와도 맥이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킬 빌이 B급 영화의 오마주를 통해서 일종의 예술영화(?)를 만들었다면, 존 윅 시리즈는 자신이 B급 영화라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존 윅 시리즈의 매력일 것이다.

 

2편이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자신 사이에서 정당한 복수(공적인 규약을 지켰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배신한 산티노를 쏴 죽인 것)를 선택하는 이야기였다면, 3편은 공적인 조율을 통해서 평화를 되찾고자 한다. 영화의 부재인 파라 벨럼Para Bellum은 4세기 경 쓰여진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군사학 논고에서 나온 유명한 격언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해라"(Si vis pacem, para bellum)에서 따온 것인 동시에 탄약 종류 중 가장 유명하고 많이 팔린 9mm 탄약의 규격을 뜻하는 중의적인 제목 선정이다. 여기서 존 윅은 전세계 암살자들을 적으로 돌렸지만, 자신의 복수가 정당한 것임을 알리고 자신의 사적인 삶(평화)을 되찾기 위해 공적인 권위(모로코에서 만나는 암살자 기원의 일족)에 호소한다. 영화는 제목에 전쟁을 준비해라Para Bellum고 하였지만, 평화를 원하면Si vis pacem이라는 전제를 숨기고 있는 셈이다.

 

전세계 암살자들을 적으로 돌린 상황에서도 평화를 원하는 존 윅이라는 케릭터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매력을 가졌다. 필요하다면 권총, 산탄총, 저격총, 나이프, 몽둥이, 심지어는 연필로도 사람을 죽이는 냉혈한이지만 동시에 상대에 대한 예의와 격식을 끝까지 지키는 케릭터이기 때문이다. 서로 아는 킬러를 죽이지 않고 보내준다던가(1편), 격식을 지킨 친구를 마무리 일격을 가하지 않고 놓아준다던가(2편), 예의를 갖춰서 싸워준 상대를 죽이지 않는 등(3편) 걸어다니는 살인 기계에 인간미를 가미한 것이 존 윅이란 케릭터다. 그렇기에 존 윅은 "거칠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신사답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라는 필립 말로의 경구가 들어맞는 인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존 윅은 엄청난 고난을 경험한다. 많은 사람들은 존 윅 시리즈를 "택티컬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모든 것들을 갖다 붙인 영화" 또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영화"로 본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3편을 본 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 윅은 "적들보다 존 윅이 더 처맞는 영화"다. 그리고 이것이 존 윅이라는 영화 시리즈의 정체성이자 존 윅이라는 인물의 정체성 그 자체다:자신의 사적인 삶들(아내와의 추억, 개, 친구 등등)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온갖 고통과 역경을 겪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뚜기처럼 일어나 예의와 격식을 갖춰가며 상대를 쓰러뜨리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고전적인 헐리웃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공감할 수 있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존 윅은 개 한마리와 자동차 한대로부터 시작된 영화였지만, 이제는 전세계를 적으로 돌려버린 한 남자에 대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관객에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면 모든 사람에게는 말도 안되는 사소한 것이지만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려도 상관 없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존 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욕망을 잘 건드리고, 액션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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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애니’는 일주일 전 돌아가신 엄마의 유령이 집에 나타나는 것을 느낀다. 애니가 엄마와 닮았다며 접근한 수상한 이웃 ‘조안’을 통해 엄마의 비밀을 발견하고, 자신이 엄마와 똑같은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애니의 엄마로부터 시작돼 아들 ‘피터’와 딸 ‘찰리’에게까지 이어진 저주의 실체가 정체를 드러내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비범한 인물이 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 피할 수 없는 파멸을 맞이하는 것이다. 극 중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파멸을 보라:그는 온갖 불길한 전조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나아갔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다:만약 아킬레우스가 자신이 향해가는 파국의 결과를 알았다면, 혹은 그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더라면 그 비극은 과연 덜 비극적이었을까?

 

유전은 일반적은 호러영화와는 결이 다른 작품이다. 우선, 이 영화에는 호러 영화 장르 특유의 점프 스케어가 거의 없다. 영화는 차분하고 불길한 시선으로 한 가족이 어떻게 기이한 파멸을 맞이하는지를 다룰 뿐이다. 몇몇 관점에서 본다면, 유전은 공포 영화보다도 그리스 비극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족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불가해한 징조들을 목도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지 않으며 심지어 파멸을 스스로 실현(강령의식을 하는 등)한다. 오히려 공포 영화를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 가족들이 참으로 답답(?)하다고 느껴질 부분도 많다.

 

하지만 역으로 접근해보자:어째서 이 가족은 파멸에 도달하는가, 혹은 파멸에 도달할 수 밖에 없을까? 고대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무엇을 해도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영웅의 운명(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 같이)이었다. 그리고 유전에서 공포의 핵심은 점프 스케어로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멸을 피할 수 없다'라는 메세지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메세지의 한 가운데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다.

 

애니가 처음 모임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관객들은 그녀의 가족사가 광기와 죽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울증으로 굶어죽은 아버지, 해리감 정체 장애로 오랫동안 고통받다 죽은 어머니, 정신분열증으로 자살한 오빠, 기이한 행동을 하는 찰리와 몽유병을 겪는 자신까지, 자신의 가족 핏줄 속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무언가가 기어다니는 인상을 준다. 정신병력이 환경과 유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긴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런 '과학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유전의 핵심은 불길한 이미지들이 서로 유추되어 파멸의 연쇄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꿰뚫어보는 것은 '가족은 서로 닮는다'라는 오래된 명제가 숨어있다. 영화 유전에서 이 명제는 연역이나 귀납이 아닌, 유비추리(서로 비슷한 명제들을 통해서 비슷한 결론을 내리는)의 영역이다. 애니가 빠지는 가족의 내력에 대한 집착와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행동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머니가 찰리와 피터에게 했었던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애니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만 보이는 명백한 사건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논리적인 개연성을 가진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불길한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애니의 광기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애니의 광기는 그리스 비극과 분명하게 다르다: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영웅이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렇듯이,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은 그가 아무리 발악하고 노력하더라도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하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전에서 가족의 파멸에 집착하여 점점 미쳐가는 애니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비범하지도 않고,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소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정도일 뿐이다. 바로 이 부분이 유전을 공포 영화로 만드는 부분이다:가족에 대한 집착과 주변 환경에서 보여지는 불길한 이미지와 징조들은 평범한 사람들도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다. 마치 특별할 것 없는 모든 것들이 일상을 옥죄어오며 파괴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유전은 점프 스케어나 끔찍한 이미지 없이도 두려운 공포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연출관점에서 본다면, 유전은 이를 독특한 카메라 연출을 통해서 이루어낸다:마치 정물을 다루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 속의 세계를 불길한 시선으로 관조한다. 그리고 애니의 직업인 미니어처 조형사라는 점은 유전의 카메라 연출을 독특하게 변주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동일한 상황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니어처들을 카메라는 고요하게 관조하고 들여다본다. 마치 똑같은 일이 다시금 반복되고 일어난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영화는 극 내에 동일한 상황을 복제하여 이것이 단순한 장면이 아닌 불길한 서사의 일부인 것처럼 구성을 한다. 

 

결론적으로 유전은 독특한 공포영화고, 단순하 불길함만으로 이야기와 공포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보여준 사례라다. 공포 영화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충분히 즐길수 있고,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끔찍한 유년기와 전쟁 트라우마로 늘 자살을 꿈꾸는 청부업자 ‘조’. 유력 인사들의 비밀스러운 뒷일을 해결해주며 고통으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어느 날, 상원 의원의 딸 ‘니나’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고 소녀를 찾아내지만 납치사건에 연루된 거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다시 사라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데… (영화 시놉시스)


린 램지의 영화 모번 켈러는 인상적인 시퀸스를 지니고 있다:집에 돌아온 주인공 모번 켈러는 집에 돌아오자 자살한 남자친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의 유서와 소설을 확인한 주인공은 일상생활을 하다 불현듯 남자친구의 시신을 욕조에 넣고 톱으로 절단한다. 이때 '나는 당신에게 과하게 집착하고 있어요', 라는 내용의 가사가 나오면서 영화는 관객을 심란함과 혼란속으로 몰아넣는다. 왜 모번 켈러는 남자친구의 시신을 토막내는가. 그리고 이 뜬금없는 기괴한 음악 인용과 장면의 인용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모번 켈러의 도입 시퀸스는 린 램지의 영화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린 램지 감독의 신작이다. 위의 시놉시스에 적힌대로, 큰 이야기는 한때 유행하였던 테이큰이나 아저씨와 같은 액션 장르 영화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실제 구성은 장르 영화적이지도 않고, 심지어는 영화에는 기승전결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건만을 남겨둔 채로 서사를 구성한다. 9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크게 일곱 가지의 사건(조의 등장 - 상원의원의 의뢰 - 니나와의 만남과 구출 - 니나의 납치 - 주변 인물들의 죽음 - 주지사의 추격 - 니나의 재구출과 엔딩)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일곱가지의 사건들은 서사로써 밀접하게 이어져서 이야기를 구성하기 보다는 주인공인 조의 환영과 심리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 또한 이는 린 램지가 모번 켈러 첫 시퀸스에서 보여주었던 장면과 상황을 구성하는 미학과 밀접하게 맞물린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구성하는 미학의 핵심은 영화적이다:산업화된 매체인 영화는 음악과 영상, 배우의 연기가 재조립을 통해서 구성된다. 벤야민이 예로 들었듯이, 몸싸움을 벌이다가 창문을 통해 도망가는 액션 시퀸스의 장면이 몸싸움-창문으로 뛰어내림이라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 아닌 먼저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촬영한 후, 몸싸움 장면을 촬영한 후 이를 편집작업을 통해서 마치 '하나의 장면'처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속에서 이미지와 장면들은 꼭 같은 시공간에 얽메여있을 필요가 없다:때로는 편집 작업과 쇼트, 앵글 등을 통해 서사의 흐름이나 논리적 흐름을 뛰어넘어서 창작자의 맥락과 의도에 따라서 자유롭게 재조합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시공간은 서사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컷의 편집과 삽입, 쇼트의 분절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공간으로 변화한다. 


다시 모번 켈러의 장면으로 돌아와보자:어째서 주인공은 영화의 중반 뜬금없이 자살한 남자 친구의 시체를 욕조에서 토막내었을까. 이 장면은 서사라는 일방향적인 시공간의 흐름에서 접근한다면 불가해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꼭 그래야한다는 당위성은 없지만, 동시에 모번 켈러라는 개인이 서사를 넘어서(남자친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넘어서) 영화의 장면을 지배하는 강렬한 기괴함을 선사한다. 즉, 이 장면은 서사라는 흐름에서 벗어나면서 사건에 대한 개인의 인상/사건을 대하는 인물의 태도를 강력하게 드러낸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인물은 서사를 넘어서 영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강렬한 무언가가 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역시도 동일한 미학이 적용된다. 이는 조의 어머니가 킬러들의 손에 죽은 뒤, 자신 나름대로 장례를 지내러 호수로 떠나 자살을 시도하는 조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일반적인 서사 구조였다면, 이러한 장례의 과정 자체가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서사라는 시공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개인의 이야기로 침잠하는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이미지가 작품을 지배하는 구조를 구축한다. 즉, 이 작품에서 서사는 개인의 심리와 행동을 전개하기 위한 최소 당위에 불과하다. 모번 켈러가 그러했고, 이 작품이 그러했듯이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 봐야할 점은 바로 조라는 인물의 심리 상태가 전체 영화의 미학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영화다. 조는 영화 내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았은 기억과 군인으로 복무했을 때의 경험들의 플래시백(컨테이너에 쌓인 시체들, 초코바 하나 떄문에 총맞고 죽은 어린아이가 일으키는 다리의 사후경직)으로 고통받는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플래시백을 환청과 환몽의 형태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환몽과 환청은 자기파괴의 이미지, 특히 질식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다:영화의 첫 시퀸스에서 조는 의뢰를 해결한 후, 침대에 누워서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스스로 질식시킨다. 질식 특유의 내부에서부터 타들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본다면 그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의 성질을 드러내는 부분이자, 동시에 '숨을 쉬고 싶다'라는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환청과 환몽은 조가 숨을 쉬지 못하게끔 만드는 '물'과 같은 존재다:그는 스스로의 머릿속의 이미지속에 갇혀있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자기를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에 질식당한다. 


하지만 조라는 인물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단순한 역할의 클리셰로 이어지진 않는다. 우선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 영화의 테마를 취하면서도,장르 영화의 문법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예를 들어, 조가 처음으로 니나를 매춘굴에서 구해내는 시퀸스를 보자. 이 시퀸스에서 린 램지는 CCTV의 화면들로 쇼트들로 구성하였고, 조가 경비원과 아동성애자를 죽이는 폭력의 과정을 삭제한 채 오로지 결과(쓰려져있는 사람들)만을 무미건조하게 담아내며, 카메라 역시 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조를 무미건조하게 관찰하듯이 쇼트에서 쇼트로 이동하는(cctv에서 cctv로) 이어내어 마치 시공간 자체가 끊기고 날아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식으로 영화에서 폭력은 때로는 과정 없이 결과만(집에서 어머니를 살해한 두명의 암살자를 총으로 제압하는 과정이라던가), 혹은 그 결과조차도 삭제되어있는 경우(예를 들어 약속시간에 늦은 조력자를 조가 구타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의 폭력이라는 테마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오히려 영화에서 집중하는 것은 폭력의 원인과 과정이 아닌 '결과와 여진'이다.





조는 자신의 폭력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호텔방에서 부패경찰을 목졸라 죽일 장면에서도 그의 살인은 천장에 달린 거울에 비춰진 이미지 형태로 묘사되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별장의 인물들을 하나씩 제압할 때조차 폭력의 과정 묘사없이 분절된 컷들이 연결되고 반복되며 어지러이 흩어진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은 폭력이 끝나고 난 뒤에 조가 취하는 태도일 것이다:예를 들어, 자신의 집에 침입한 암살자 중 한명에게 치명상을 입힌 조는 암살자에게 약을 먹이고 옆에 누워서 함께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기괴한 장면에서 조는 이상하게도 암살자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보다도 폭력의 피해자로 죽어가는 암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기괴한 장면이 뜬금없다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의 미학에 맞물려 들어간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이미지화 되거나(CCTV나 거울상) 쇼트에서 잘려나간(클라이맥스에서 저택의 경호원들을 제거하는 시퀸스) 조의 폭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의 직업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그는 소아성애자들로부터 피해자들을 구하는 청부업자다. 그의 행위는 피해자를 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하려는(어린 시절 무력하게 당했었던)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원을 위해 휘두르는 폭력이 이미지화 되었다는 점은 그가 경험하는 환몽과 환청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할 것이다. 즉, 그가 휘두르는 폭력은 그를 구원하는 것(피해자를 구하는 것)이 아닌 그의 환청과 환몽과 같이 그를 질식시키는 요인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구원을 향해서 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는 더 끔찍한 악순환의 고리로 빠져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현듯 폭력을 멈추고 자신이 죽인 피해자 옆에서 누워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손을 잡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라는 인물의 동인(피해자를 구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장면이다.


조가 니나를 구하려 하는 것 역시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구원을 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그의 환청과 환시에서 뚜렷하게 얼굴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들(어린 시절 조, 어머니, 그리고 니나)은 모두 폭력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피해자인 니나를 구하는데 실패한다:니나는 이미 모든 일의 원흉인 주지사의 목을 면도날로 그어 죽였으며, 그녀 역시도 조와 같이 폭력이 남긴 트라우마에 갇혀버린 피해자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조가 니나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닌, 니나가 조에게 괜찮다고 이야기를 한 점이다:그녀 역시도 조가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을 따라왔는지 알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폭력의 피해자로써 그들은 기묘한 유대감을 갖는다.


하지만 정작 주지사를 죽이고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그들이 가야할 목표는 없었으며, 니나는 조와 같은 인물(트라우마와 폭력의 순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세계는 폭력의 피해자들을 없는 존재인냥 취급하며 행복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제목의 선언은 폭력의 피해자들이 폭력의 경험에 갇혀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조는 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식당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불현듯 터져나오는 총성과 흘러나오는 뇌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행복하고 밝을 뿐이다. 이 순간 폭력의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트라우마로부터 구해내는데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나가 자리로 돌아오고, 조에게 말을 건다:밖은 아름다우니, 어디론가 떠나자고. 그 순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카메라에서 순식간에 사라짐으로써 피해자들은 그들 자신을 드디어 질식할 것 같은 세계와 트라우마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이라는 테마를 피해자의 관점에 맞추어 훌륭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여기에는 어떤 장르적 클리셰(폭력에 물든 순정 마초 같은)도 없고, 미화도 없다. 하지만 세부적인 디테일들과 쇼트의 구성, 개인화된 이미지들을 배치해둠으로써 영화는 피해자의 경험을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만들되 동시에 관객 모두에게까지 전달하게끔 만든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영화 매체의 경험을 잘 다뤄낸 작품이며, 영화관에서 볼 기회가 있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덧. 번역이 매우 훌륭하다. 모번 켈러도 그러하고, 린 램지의 영화에서는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장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번역가는 그런 부분들을 캐치해서 자막을 구성하였다. 


덧2. 흥미롭게도 폭력의 가해자이자 원흉의 이미지를 상당히 추상적이지만 분명하게 구성하기도 하였다.

니나를 납치할 때 보여지는 부패 경찰의 뱃지, 암살자의 성조기 버튼, 그리고 노래 가사나 인형의 집을 건드리는 손의 존재까지.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지적장애 동생 ‘닉’과 그의 형 ‘코니’. 코니는 그들에게 비참함을 안겨주는 뉴욕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으려 은행 털이를 결심한다. 하지만 현금 2만 달러를 들고 도주하던 형제는 그들의 계획이 엉망이 되었음을 깨닫고, 동생은 홀로 구치소에 수감된다. 코니는 경찰의 수사망을 따돌리고 동생을 구하기 위해, 또 형제를 옥죄는 뉴욕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 사투를 벌이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굿 타임의 오프닝 시퀸스는 굿타임이라는 영화의 모든 것을 집약한다:먼저, 영화는 뉴욕의 빌딩을 원거리에서 부감으로 찍어낸다. 천천히 빌딩으로 다가간 뒤, 갑자기 영화는 인물의 얼굴을 거대한 클로즈업으로 다뤄낸다. 여기서 동생 닉이 등장한다. 닉은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지만, 거기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여기에 코니까지 가세하면서 관객들은 이 인물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일반적인 범죄 장르영화였다면, 닉과 코니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서사를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굿 타임의 시작은 당혹스럽고 어색하다. 닉의 클로즈업 된 거대한 얼굴이 보여주듯이, 거기에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과 어색함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굿 타임의 이야기 구조는 오딧세이의 변종이다. 신은 오딧세우스의 불경을 벌하기 위해 오딧세우스가 귀가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바다를 떠돌도록 만들었다. 굿 타임에는 코니를 벌하는 신은 없지만, 한밤중의 뉴욕을 돌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운다. 하지만 문제는 왜 코니는 한밤중의 뉴욕을 떠돌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고통을 받게 되었는가 이다:그 원인에는 구치소에 끌려간 동생이 있다. 동생을 보석으로 풀어내기 위해서 코니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맥락을 놓고 본다면 영화는 가진 것 없는 빈곤층 형제가 서로를 세계로부터 지키는 이야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상투적인 맥락을 배제하고 끊임없이 얼굴의 클로즈업과 부감 풍경을 교차 배치함으로써 이야기를 붕뜨게 만든다.


부감 풍경과 클로즈업을 통해 굿타임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다:코니는 닉을 아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정말 그러한가? 상담사와 상담하는 중에 닉을 강제로 끌고가는 코니가 그 다음 시퀸스에서 동생과 바로 하는 일은 고무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은행을 터는 일이다. 동생을 사랑한다 이야기는 하지만, 닉이 보여주는 행동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동생에게 강압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를 떠드는 것 뿐이다. 주목해야하는 것은 영화 내내 보여지는 닉의 독특한 태도이다. 닉은 클로즈업된 미장센 속에서 영화 속 그 누구보다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것처럼 보이며, 단순히 갇혀있는 것을 넘어 무언가 '선택하지 못하는' 중간자적 위치를 점한다:코니가 닉을 칭찬하거나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마다, 코니는 주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생뚱맞은 대사와 행동을 뱉어낸다. 닉은 총체적으로 그 행동의 동인이 이해불가능하고 떠도는 케릭터이며, 극의 이야기 속에서 걸리적거리는 위치에 놓여있는 케릭터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주목해야하는 점은 어째서 코니가 닉을 구하기 위해서 불야성의 대활극을 벌이는가이다:영화는 드라마를 쌓지도 않고, 동생과 형의 관계는 위태로워 보이며, 심지어 극 중반 이후로는 학대하는 보호자라는 클리셰(뉴스에서 코니와 닉이 가출할 때, 할머니의 팔을 부러뜨렸다고 한다)마저도 점점 무너져 가기 시작한다. 코니가 어째서 닉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동인이나 동생에 대한 유대감은 없다. 하지만 코니는 필사적이다. 끊임없이 타인에게 동생과 자신의 상황을 거짓말하고, 사람을 때려눕히고, 협박하고, 얼버무리면서 동생을 구하는데 집착한다. 하지만 그에게 동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영화는 일언반구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 있다:닉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해결해야하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한다.(영화 처음 닉에게 상담사가 문제가 뭔지를 물어보는 시퀸스를 보자. 닉은 상담사에게 문제가 무엇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코니가 닉에게 집착하는 것은 그런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 대한 불안이자 강박관념, 그리고 허황된 믿음(네가 있어 나는 훌륭하다)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극단적인 인물의 클로즈업, 부감 풍경, 마지막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과 맞물리면서 굿타임은 거대한 부조리극이 된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경찰이 경호하는 범죄자를 데려왔지만, 실제는 자기 동생이 아니었고, 자신에게 친절했던 사람에게 등처먹고, 마약을 팔겠다고 설치다가 결국은 광란의 질주 끝에 잡히게 되고 역설적이게도 동생은 코니의 구속과 함께 자유로워진다. 이 과정을 굿타임은 서로에게 이야기하지만 전혀 맥락이 서로 닿지 않는 인물들이 각자의 샷에서 과도하게 클로즈업된 얼굴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그들 스스로에게 가두어버리고, 파국을 향해서 치닫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영화는 시퀸스와 시퀸스 사이에 부감으로 도시의 풍경을 찍음으로써 이 모든 것들이 정말로 하찮은 촌극에 불과한것처럼 포장한다. 


동생을 향한 코니의 집착은 이런 의미에서 정말로 '하찮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하찮은 것 때문에 사람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코니의 애인은 코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부모의 카드로 거액의 카드깡을 하려 하고, 중간에 만났던 소녀는 코니의 여정에 살짝 끼어들었다가 경찰서로 끌려간다. 영화는 이 하찮고 허황된 세계에 대중문화의 밈들(스프라이트나 개구리 페페, 반복되는 뉴스, 패스트 푸드 같은)을 섞어둠으로써 하찮고 반복적인 도회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케릭터들은 이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다. 즉, 굿 타임은 영원히 고통받는 오딧세이아 팝아트 버전인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시퀸스는 흥미롭다. 계속해서 코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동생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었던 카메라는 불현듯 코니의 검거 과정을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마약상의 관점에서 다뤄낸다. 마치 미국 뉴스에서 나오는 헬기로 촬영된 체포장면을 영화는 보여주고, 후에는 갑자기 코니의 관점에서 마약상이 도망가는 장면을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듯이 찍어낸다. 마치 자극적인 뉴스의 한 장면처럼, 마약상은 고층 아파트에서 추락사한다. 그러고는 카메라는 경찰차 창살 뒷편에 놓여있는 코니를 클로즈업으로 점차 잡아낸다. 처음에는 창살 너머에서 잡던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하면서 창살이 희미해지고, 이내 코니의 얼굴은 창살을 넘어선다. 마치 이처럼 광포한 인생 끝에는 광포한 종말만이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코니는 풀려나고 다시 상담사의 수업에 참석하게 된다. 방을 오고가는 환자들의 모습과 거기서 갈팡질팡하는 과정을 클로즈 업에서 클로즈 아웃으로 카메라는 천천히 빠져나온다. 부감은 아니지만, 닉의 얼굴에서 벗어나는 카메라는 교실, 더 나아가서 교실 바깥으로 위치를 옮겨가면서 영화 중간 중간 보여주었던 부감풍경의 축소판을 구축한다.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키워드에 맞춰서 방을 오고 간다. 닉과 사람들이 왜 그런 키워드에 맞춰서 방을 가로지르는지, 코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영화 속 모든 케릭터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른다. 각자 가지고 있는 행동의 동인 속에서 갇혀있는채로 방과 도시를 가로지른다. 굿타임의 마지막은 그런 점에서 영화의 축소판이자, 서로 맞닿지 못하는 씁쓸한 도시문명의 축소판이다. 하찮고 무의미하며, 개인에 갇혀있지만, 그것이 주는 애잔하고 씁쓸한 반복과 종말. 그런 점에서 굿타임은 도시문명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그림자 군단 및 사무라이에 대한 감상 링크를 첨부합니다.(그림자 군단 / 사무라이)


2차대전 중, 독일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은 나치에 의해 점령된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에 주둔한다.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의 주인 노인과 조카딸은 그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저항과 경멸을 표시한다. 매일 저녁 노인과 조카딸이 있는 서재를 찾아간 폰 에브레낙은 자신의 삶과 고향에 대한 이상적인 이야기들로 침묵을 깨뜨리려 시도한다. 하지만 집주인들의 깨어지지 않는 침묵은 결국 그에게 경외스러운 효과를 미치게 된다.(네이버 영화)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고 한다.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기와 거대 스튜디오랑 작업하던 시기. 바다의 침묵은 자신의 이름을 딴 스튜디오에서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 대표작들인 그림자 군단이나 사무라이, 암흑가의 세 사람에 비교하면 기교적인 부분에서는 투박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바다의 침묵은 멜빌 영화의 정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며, 무엇보다도 나치 점령 중의 프랑스 레지스탕스라는 소재를 '레지스탕스' 없이 표현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바다의 침묵은 침묵과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캐치하여 나치즘의 본질에 대한 통찰, 더 나아가서 그에 대한 저항을 폭력이 아닌 굳게 닫힌 부정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다의 침묵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바로 침묵이다:자신의 집에 불현듯 찾아온 나치 불청객에 대해 프랑스인 노인과 조카딸은 침묵으로 저항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이들이 베르너를 무시하는 방법은 고개를 돌리거나 외면하는 식의 '능동적'인 무시가 아니다. 바다의 침묵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노인과 조카딸이 거실의 의자에 앉아있고 베르너가 그들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으로 채워져있다. 하지만 앉아있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베르너를 향한 적극적인 경멸이나 괄시가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독이자 저항이다. 그것은 프랑스를 독일이 점령했을지라도 인정할 수 없고 꺾을 수 없는 정신이 있다는 것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는 이 둘의 모습을 마치 단단한 바위처럼 묘사하였다. 베르너가 자신의 독백속에서도 매번 거북하게 느끼는 것도 거실에 박혀있는 이 바위같은 노인과 조카딸의 존재감 때문이다.


바다의 침묵은 나치즘을 단순한 거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는 나치 장교의 베르너를 로멘티스트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나치라는 색안경을 끼고 판단하지 않는다. 베르너가 노인과 조카딸의 침묵의 저항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그렇기에 반응없는 독백에도 그는 절제된 예의와 양식미를 보여준다. 그 양식미란 프랑스인들의 침묵과 저항을 이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베르너는 그 침묵과 저항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프랑스를 사랑한다. 문학과 사상, 예술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예술가의 섬세함을 지닌 그에게 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 비극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베르너는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며, 독일과 프랑스의 병합을 통해 그 결합이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병합은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인 개념이 아닌 사상의 결합이라고 베르너는 생각한다. 노인과 조카딸이 흔들리는 것도 그의 독백이 진심이기 때문이며, 그가 점령자가 아닌 진정으로 하나됨을 원하는 예술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섬세한 미장센으로 드러낸다. 노인이 내뿜는 규칙적인 담배 연기, 조카딸의 뜨개질, 내리 깐 눈길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움직임들. 영화는 거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연극적으로 풀어낸다. 


연극적인 베르너의 독백은 그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결합을 끌어내기 위한 시도다. 그의 독백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인 동시에, 결합에 대한 열정이다. 영화는 베르너의 이러한 모습을 진심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 이야기가 독일과 프랑스 간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고 시작에 못박는다. 오히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나치즘과 그에 대한 저항이다. 베르너의 로맨틱한 이야기에는 나치즘에 있었던 이상향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그러나 베르너의 믿음은 순진하다:나치즘이 처음으로 유럽에 새로운 태양을, 하나의 국가를 새워서 진정으로 통합된 이상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베르너의 믿음은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 도달하고 그의 동료들을 만날 때 무너진다:나치즘과 파시즘의 핵심은 단순한 점령이 아닌 하나의 사상을 남겨놓기 위해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베르너가 파리에서 본 것은 저항하는 프랑스인들을 죽이고, 경제적으로 비굴하게 만들고, 문화적으로 절멸시키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는 나치 동료들이었다. 거기서 베르너는 자신이 했었던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자신의 독백은 너무 순진했었던 이상론자의 이야기에 불과했으며, 나치즘은 새로운 이상향을 만드는 것이 아닌 절멸과 재앙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불행한 예술가는 자신이 해왔던 행위에 대해서 노인과 조카딸에게 사과한다. 자신은 결합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닌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한 파괴자였단 것을, 그리고 자신이 이야기했었던 것은 정복자의 역겨운 변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순간에, 노인과 조카딸 역시도 그에게 마음을 열기 직전이었다.(노인은 처음으로 이 때 베르너에게 말을 건다) 서로 이해하려는 순간, 그들은 이 결합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섬세한 예술가가 스스로 한 행위를 속죄하는 방법은 격전지로 나아가는 수동적인 자살이었다:프랑스라는 안락한 점령지를 떠나 국가와 나치의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 군인으로써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렇게 떠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메세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 메세지는 침묵 속에서 프랑스 서적의 인용으로 전달된다(국가의 범죄에 군인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가장 긍지 높은 행위다) 그 침묵속에서 베르너와 노인은 서로를 이어짐을 경험한다. 


바다의 침묵은 저항이라는 나치에 저항하는 행위가 단순히 점령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넘어서는 인간 본연의 저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멜빌의 전기를 대표하는 영화라 할 수 있으며, 레지스탕스라는 역사적 맥락을 넘어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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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1982년)의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http://leviathan.tistory.com/1681)를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혼재된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는 임무 수행 도중 약 30년 전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하고 충격적으로 출산의 흔적까지 찾아낸다. 리플리컨트가 출산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 큰 혼란이 야기되므로 이를 덮으려는 경찰 조직과, 그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 더욱 완벽한 리플리컨트를 거느리고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K’를 쫓는 ‘니안더 월레스’(자레드 레토). 리플리컨트의 숨겨진 진실에 접근할수록 점차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K’는 과거 블레이드 러너였던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만나 전혀 상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는 진짜와 가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점점 인간을 닮아가는 안드로이드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을 무엇이 인간인지를 구분하는 주요한 능력으로 설정한 점, 가짜 양이 아닌 진짜 양을 사고 싶은 데커드의 고뇌와 피로, 마지막으로 일련의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희망 섞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 등을 통해 소설은 철저한 논리적인 흐름과 과학적 가설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소설의 핵심은 인간과 안드로이드,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감정의 이입'과도 같은 모호한 영역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필립 K 딕은 이러한 모호성을 통해 진짜와 거짓이 구분이 점점 힘들어지는 산업 문명과 도회적인 고독과 우울감 등을 한 데 어우러놓았으며, 수많은 SF 소설 팬들을 매료시킨 작품을 만들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년작)은 리들리 스콧이 위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이 소설을 잘 읽지 않고 원작을 각색하여 블레이드 러너를 만든 점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가 자신의 창작물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피로에 찌든 배나온 중년 데커드가 헐리웃 액션 배우인 해리슨 포드로 변하는 등 블레이드 러너는 원작을 모두 뜯어고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의 핵심은 여전히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의 모호성,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에 근거하고 있다. 다만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에서는 그것이 점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어지는 피로감을 독특한 문체로 풀어냈다면, 블레이드 러너는 철저하게 상징의 시각화와 모호한 상징 네트워크에 구성하여 기반하여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흥행 대참패로 이끌었지만, 영화사에 길이 남는 SF 영화로 만들어주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여전히 구작과 비슷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강렬한 이미지들과 상징의 느슨한 네트워크, 그리고 일반적인 장르 영화의 전개와는 다른 비정형적인 전개들까지. 좋게 이야기하면 개성이 넘치지만, 나쁘게 이야기하면 대중들에게 먹힐 작품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을 만드는 데에 가장 적격은 바로 드니 빌뇌브이다:드니 빌뇌브는 일반적인 영화 시놉시스들을 미장센과 프레임, 비주얼을 이용해 한바퀴 꼬아놓는데 재능이 있으며,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그 재능은 어느정도 발휘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드니 빌뇌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십분 발휘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독창적인 재해석들과 이미지들이 원작에 사로잡혀 희석되었다는 느낌이다.


1982년 블레이드 러너가 처음 나왔을 때, 영화가 우리에게 약속한 미래는 추적거리는 중금속 산성비와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퇴폐적인 네온사인들, 그러한 암울한 세계에 바벨탑처럼 위압적으로 서있는 마천루였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드니 빌뇌브는 우리에게 자연물이 모두 죽어버린 인공물의 미래를 약속한다. 오프닝 시퀸스의 광활하게 펼처진 합성농장들의 유리 온실들,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들과 퇴폐적인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도시, 도시 너머의 쓰레기장들 등등 영화는 자연물의 존재를 완벽하게 배제한다. 그리고 이 인공물의 이미지들 속에서 자연은 죽었거나(사퍼의 집 앞에 놓여있는 하얗게 고사한 나무, 닳고 닳아버린 목마 인형) 허구(스텔린의 기억 제작소 시퀸스 같이)에 불과하다.


이런 철저한 인공물의 세계는 원작 소설과 전작의 테마인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진짜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전작이 시각적 상징을 통해서 데커드가 인간인지 자체에 의문을 갖게끔 만드는 등 서사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면, 2049는 영화 내에서 모든 것이 완결되며 서사의 모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2049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압도적인 인공의 풍경이다:영화는 거대한 인공의 풍광 속에서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린다. 기하학적이고 압도적인 도시 건물들에서부터 쓰레기 더미에 파묻힌 폐허와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라져버린 호텔까지, 영화의 모든 이미지들은 피로감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2049의 등장인물들 모두 어딘가 피로함이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이미 자신을 둘러싼 풍광에 압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49는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보는 행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전작이 오프닝 시퀸스에서 눈이 등장하거나 타이렐의 안경(나중에 로이는 타이렐의 눈을 엄지로 터뜨린다), 데커드가 레이첼을 테스트할 때 스크린을 통해서 바라본다던가, 인간과 합성인간을 구분하는 보이그트 캄프 시험이 동공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 등등에서 무언가를 본다라는 시각적 인지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산업 문명과 매스 미디어의 등장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다채롭고 화려한 시각 자극을 대중에게 선사해왔기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닌 '스크린'이나 '안경'을 통해서 거쳐서 보는 행위 자체가 갖는 인공성에 전작은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2049의 보는 행위에 대한 이미지는 전작에서 반복 재생산되는 부분도 있지만(월레스 비서인 합성인간 러브가 드론을 조종하는 안경으로 K를 보는 점, 월레스의 드론 의안, 거실에 놓여있는 K의 책상 위치-창문을 바라보는 등등) 전작에 비해서 더 나아간 부분도 있다:K의 가상 연인은 조이의 경우, 홀로그램으로써 반투명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반투명함이 그녀를 인지하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게(실제의 것의 아니라는) 만든다. K는 조이를 사랑하나, 동시에 홀로그램이라는 이 '반투명함'(실제하되, 실제하지 아니한다)이 영화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모호'의 영역으로 이끈다. 또다른 모호의 이미지는 물을 통해 반사되는 빛과 어둠의 일렁거림이다:월레스의 집무실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빛의 반사가 아닌 빛과 어둠의 교차하는 모호한 상태를 만들어낸다.


바로 여기서부터 2049는 전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낸다:전작의 레이첼은 데커드와 관계하여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경찰국장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불경이며,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왜냐면 진짜와 거짓은 분명하게도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돌하게도 2049는 바로 이 진짜와 거짓을 섞어버리고, 그 혼합에서 무언가 새로운 진짜와 희망이 탄생할 수 있다고 본다. K는 프로그래밍 된 대로 행동할 뿐인 가상 연인 조이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짜라 할 수 있을까, K가 가진 주입된 기억을 통해서 느꼈던 감정들은 과연 거짓이었을까, 합성인간과 인간이 사랑하여 낳은 자식은 과연 거짓일까. 진짜와 거짓의 이분법이 아닌 진짜와 거짓이 섞여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2049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기억이 존재한다:영화는 본다는 행위와 함께 기억과 기록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스텔린 박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억의 핵심은 불분명하며 흐릿하고 뒤섞여있다는 점이다. 대정전으로 모든 데이터들이 유실되었을 때, 구세대적이고 불분명한 아카이브는 남아서 후세에 기록을 전파한다. 기억이 단순히 과거 사실의 인지 그 이상을 넘어서 시간에 의한 필연적인 소멸에 저항하고 흐름을 거스르는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기억이 설령 K에게 주입된 것이라 하더라도, K는 그 감정을 이해함으로써 진짜 데커드의 딸이 누구인지를 추론해내게 된다. 그것이 설령 거짓의 기억이라 할지라도, K는 거기서 감정을 이입하여 무언가 희망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에 자신만의 야심을 섞어서 만든 훌륭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전작이 그랬듯이 2049 역시도 이미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있는 작품이며, 감상자의 능동적인 해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나 2049는 전작을 너무 충실하게 따른 나머지 방대하고 느슨한 서사를 만들어버렸다. 장르 영화적인 몰입이 전혀 없고 도시의 살인적이고도 위압적인 풍광 아래서 관객마저도 같이 신음하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또한 전작에 많은 부분을 답습한 나머지, 이미지들이 너무 방대하게 퍼져있다는 것도 문제다. 만약 기억과 진실-거짓의 관계에 대해서 조명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전작에서의 이미지들(특히 쓸데가 하나도 없었던 리들리 스콧 특유의 종교적인 이미지들)을 대거 처내고 거기에 초점을 맞췄으면 훨씬 괜찮았으리라 본다.


결론적으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좋은 의미, 나쁜 의미 모두에서 블레이드 러너 전작의 완벽한 재림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싫어할 것이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좋아할 것이다. 문제는 블레이드 러너가 세기말과 디스토피아적 세계, 모호함에 대한 이미지로 재평가 받을 여지가 있었다면 2049에게는 그런 재평가 기회가 존재하지 않을 거란 점이다. 거기에 건질 것이 충분히 많이 있음에도 말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우리가 주목할만한 에일리언 코버넌트 영상이 있다:코버넌트 호의 승무원들이 콜드 슬립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만찬과 주인공의 연설, 그리고 에일리언 1편에 대한 작은 오마주(존 허트 옹이 밥먹다가 체스트 버스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로 그 장면)이 담겨 있는 이 장면은 그 유명한 '마지막 만찬'의 구도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코버넌트 승무원들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을 은연중에(그리고 악의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만찬을 인용하는 것은 단순한 메타포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


성경에서 마지막 만찬은 예수와 그 열 두 제자의 마지막 식사이자 신약 성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즉, 마지막 만찬은 신과 인간의 새로운 약속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있었던 성경상의 중요한 사건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코버넌트 승무원들 13명(주인공 남편은 아프기 때문에 이 마지막 만찬을 거른다. 그리고 합성인간은 이 만찬의 구도에서 빠져 있다)들의 마지막 만찬 시퀸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본편이 나오기 전에 특별한 내용을 유추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의 메타포인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재정립이 이루어질 거라는 일종의 암시라고 할 수 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점에서 구약을 연상케하는 물건이었다:영화 내내 인물들은 창조주를 찾아서 돌아다닌다. 하지만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보여준 것은 사랑과 희망이 아닌 피조물을 증오하는 모습, 더 나아가 피조물을 멸망시키려는 모습이 드러난다(사실 이 또한 명확하지 않은 것이, 영화가 이에 대해서 일언반구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사도 바울에 의해서 세계 종교가 되기 이전의 기독교가 유대교의 신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처럼 말이다. 초창기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야훼는 창조주이자 절대선, 그리고 더 나아가 절대악의 모습을 어느정도 갖고 있었다(욥기에서 사탄과 획책하는 장면 등을 보자) 즉, 구약의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창조주이자 하나님의 모습보다도 자연현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엔지니어가 어째서 인간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동인을 가이 피어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그저 만들 수 있었으니까 만들었던게 아닐까. 구약의 세계에서 신이 불가해 하듯, 프로메테우스는 창조주와 인간 사이의 관계는 어떤 의도와 목적성이 있는 것이 아닌 원치않은 탄생과 그로 인한 감정의 소용돌이만이 남는 것이 아닐까, 라는 묘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패스벤더가 연기한 데이빗 8은 바로 그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해내고 있다:만들어진 친절함과 완벽함 아래 숨어있는 무기질적이고 복잡한 감정들, 인간을 모방하였지만 인간이 아닌 데이빗의 복잡한 모습은 프로메테우스라는 영화에서 외계괴물이나  HR 기거의 디자인보다도 더 가치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가 구약이고, 코버넌트가 신약이 된다면 이 영화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코버넌트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공동채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영상을 통해 공개된 걸로 알고 있듯이, 쇼 박사와 데이빗 8은 엔지니어의 모성에 도착하였고 코버넌트 탐사대도 바로 '그 엔지니어 행성'에 도착한 것으로 정보가 공개되었다. 즉, 엔지니어 행성은 쇼 박사와 데이빗 8의 도착 이후 파괴되었으며(실제 이를 암시하는 컷이 공개되기도 하였다:검은 액체가 담긴 용기를 엔지니어 행성에 투하하는), 코버넌트 호의 승무원들은 바로 그 사건 이후에 도착하여 '결과물'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를 죽인 피조물들에게 남겨진 세계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을 목도하고 그 결과물들(네오모프들과 그로 인한 지옥도)을 마주하는 것이 새로운 약속New Testament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인 것일까.


그런 점에서 에일리언 코버넌트는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일 수 있다:하지만 동시에 그런 점에서 매우 걱정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에일리언 시리즈는 분명 SF 영화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고(기거의 기괴한 디자인, 리플리와 여성 주인공 모델에 대한 새로운 모델 제시 등등) 가치 있는 영화 시리즈임은 분명하나, 프로메테우스처럼 종교적 탄생과 창조주-피조물 사이의 복잡한 감정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거가 성기의 이질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만들었듯이, 에일리언 시리즈는 충실하게 남성기와 여성기에 기반을 둔 크리처 디자인과 성에 대한 메타포, 이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리플리라는 케릭터의 재해석(1편 유능한 여자 커리어 우먼, 2편 트러커 맘과 당찬 모성에 대한 재해석 등)을 통해서 쌓아올린 독특한 SF 연작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명성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프로메테우스는 제노모프(=에일리언)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가라는 팬심과 오덕심이 가득한 망상 위에 리들리 스콧의 과대망상을 끼얹은 괴작이라 할 수 있다. 장르적인 문법 따위는 깡그리 다 무시한 채(제대로 된 괴물 조차 나오지 않고, 그에 대한 설명도 없고, 뭔가 똥싸다 만거 같은 찝찝함까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종교적인 SF 영화(?)를 만들겠다는 프로메테우스는 장르적인 영화를 기대하고 보면 벙찔 수 밖에 없고, 돈은 왜저렇게 많이 들여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창조주 리들리 스콧의 불가해한 의지와 악의가 느껴지는 괴작이었다. 그렇다면 신약의 위치라 할 수 있는 코버넌트는 좀 더 나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그건 개봉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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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로 동거를 함으로써 연방의 평화와 존엄을 위배했습니다. 유죄를 인정합니까? 1958년, 타 인종간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미국 버지니아 주 서로를 영원히 지켜주고, 언제든 함께하기로 맹세한 ‘러빙 부부’가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러브 스토리.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제프 니콜스의 영화의 축을 이루는 두가지 테마는 가족과 사랑이다. 테이크 쉘터에서는 경제적 아포칼립스 아래 사랑하는 가족이 종말을 목도하는 이야기를, 머드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사랑과 가족의 형태를, 미드나잇 스페셜에서는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사랑으로 가족이 되고 더 나아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본다면 제프 니콜스의 영화는 요즘 시대에 있어서 대단히 '반동적'인 영화라 할 수 있는데, 제프 니콜스가 기반하고 있는 가족과 사랑관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음에도 어딘가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다. 이는 그가 보여주는 영화적 스펙트럼이 미국의 아칸소 같은 시골의 자연풍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선배격이라 할 수 있는 테렌스 멜릭이 거대한 자연 풍광을 통해 인간과 섭리가 하나로 이어짐을 이미 선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릭이 트리 오브 라이프로 자신의 장점을 바람 앞의 티끌마냥 흩날려버릴 동안, 제프 니콜스는 정직하게도 자신이 바라본 것, 자신이 믿는 것만을 이야기하였고 이런 점에서 자신의 스승이자 원본을 넘어섰다.


러빙은, 물론 영화 제작 당시에는 의도치 않았지만, 혐오와 차별이 들끓는 작금의 세태에 정말로 시의적절한 영화다. 금지되어 있는 인종간의 결혼, 거기 정면으로 저항한 부부,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사랑까지. 러빙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드라마'가 들어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러빙의 이야기는 인간과 체제가 맞부딪히는 정치 드라마가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종 간 결혼의 이야기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영화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먼 거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러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권과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닌 지근거리에서 일어나는 러빙 부부의 구체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이야기로부터 영화는 거대한 담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도록 이끌어낸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인내'며, 인내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하지만 러빙의 사랑은 언어적이거나 서사적이지 않다:제프 니콜스는 과거 자신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자연 풍광의 파노라마를 러빙 부부의 포옹 등의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서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전 작품들에 비하자면 러빙은 두 인물을 한 프레임에 담아내는 장면들이 많다. 특히 영화는 두 인물의 시선이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이 많이 배치함으로써 언어적인 표현 없이 두 인물의 감정적 유대감을 표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러빙은 인물이 중심이긴 하지만, 이 두 인물을 다뤄내는 방식은 마치 자연풍광을 다뤄내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조용히 포옹한채로 서로를 응시하고 쓰다듬는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만든다. 마치 이들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과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러빙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소 '반동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는 것이다:러빙 부부는 자신들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버지니아를 떠나 인종간 결혼이 합법이었던 워싱턴으로 갔다가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온다. 인종간 결혼이 합법이었던 곳에 머물렀다면 자신들의 사랑에 어떠한 장벽 없이 그대로 아이들을 기르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러빙 부부는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간 것일까. 물론 영화가 기반하고 있는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영화가 러빙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고자 한 것은 역사를 바꾼 혁명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그러했었던 자연의 섭리대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와 사회에 급진적으로 저항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아닌 농촌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것들이 가장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영화에 그런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러빙 부부의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점이다:러빙 부부에게 연방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고 올라가자고 이야기하는 변호사가 처음 등장하는 시퀸스를 보자. 그의 첫등장은 우스꽝스러우며 '가식적'이다. 그는 연방 대법원까지 소송이 진행되는 것, 더 나아가 소송에 따라서 헌법 그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나, 영화는 그를 러빙 부부와 대비되는 존재로 그려낸다. 어딘가 도회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번잡한 사람. 흥미롭게도 이 번잡한 사람들, 도회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러빙 부부가 대하는 태도는 상반된다. 남편은 이들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을 지킬 수 있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내는 다른 것을 본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타인에게 희망과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영화는 이 둘이 소송을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대비되게 그려내지만, 그것이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게 만든다. 부부는 사랑으로 이어져있지만,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것은 갈등이 아니라 공존이며, 이 공존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이어져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연방 대법원은 러빙 부부의 손을 들어주고 미 연방의 헌법은 이로 인해 새로운 수정 조항을 추가하게 된다. 미국의 역사에 길이남을 순간, 그리고 러빙 부부이 겪어온 오랜 고난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에 영화는 어떠한 클라이맥스나 극적 감정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는 장면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부부가 처음 결혼을 약속하고 집을 짓기로 한 그 장소로 돌아와 집을 짓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마치 원래 그러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러빙은 다소 반동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중력을 갖고 있는 영화다:그것은 연어가 고향을 찾아 회귀하듯이,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 아래서 가족을 구성하고 서로 다른 사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장 원초적인 공존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과 인내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러빙은 제프 니콜스의 필모그래피에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빛날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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