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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신은 인간을 통해 그 분의 뜻과 의지를 드러내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악한 인간들이 있으며, 부조리와 모순이 넘쳐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하면서 완벽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어떻게 인간의 악이라는 존재를 이 체계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영화 '사냥꾼의 밤'은 이에 대한 기묘한 대답을 제시한다. 연쇄 살인마 '해리 파월'은 미망인과 결혼한 뒤, 이들을 죽이는 연쇄살인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감방 동료가 숨긴 만달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출소 후 감방동료의 미망인과 결혼해서 그 돈을 가로채고자 한다.


해리 파월은 이제는 흔하디 흔한 연쇄살인마 케릭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나왔을 때는 충격적이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해리 파월이라는 케릭터가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연쇄살인마 케릭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다. 해리 파월의 가면은 바로 전도사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 연쇄살인마라니! 그러나 해리 파월은 전도사라는 역할을 단순히 연기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시도때도 없이 하나님에게 신앙 간증아닌 간증을 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심지어 설교까지 한다! 


설교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해리는 양손에 사랑(L.O.V.E)과 증오(H.A.T.E)를 세겨놓았다. 그런데 이 문신은 오로지 주먹을 쥐었을 때만 그 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해리는 이 주먹의 문신을 두고, 기묘한 설교를 한다. 아벨의 사랑과 카인의 증오의 알레고리에 대해서 말이다. 카인과 아벨의 싸움을 깍지낀 형상으로 표현하는 해리는 어떻게 주님의 사랑이 승리하는가를 설교한다. 하지만, 여자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해리야 말로 아담을 타락시킨 이브와 여자에 대한 기독교적인 증오와 스스로 묘사했던 카인의 증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리는 자신의 증오를 숨긴다. 성실한 전도사 같지만 능글맞은데다 보는 사람 속을 느글거리게 만드는 로버트 미첨의 연기는 해리 파월이라는 악역을 복합적인 이미지로 만든다. 그는 매력적인데다가 사람을 어떻게 속이는지 않다. 마치 창세기 선악과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뱀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본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에게 쫒기는 어린 아이들만이 그의 괴물같은 본모습을 볼 뿐이다.


영화는 이 모든 이야기를 동화나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알레고리로 풀어낸다. 자매인 벤과 펄의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녀는 만난지 며칠 안되는 전도사 해리와 결혼하면서, 자식을 지키지 못하고 허무하게 해리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부모 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계부인 해리에게서 탈출한다. 마치 출애굽기의 모세의 에피소드와 예수가 예루살렘을 떠난 이야기를 반반씩 섞은 듯한 이 이야기를 영화는 동화나 성경의 삽화처럼 정교한 구도가 아닌 거대하고 정적인 풍경속의 작은 인물들의 형태로 많이 묘사한다. 해리가 그의 아내를 살인할 때의 장면, 지하실에서 해리의 손길을 피해 도망치는 아이들, 마굿간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을 쫒아오는 지평선 너머 해리의 실루엣 등등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강을 따라 내려간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의 대체자라 할 수 있는 쿠퍼 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해리의 완벽한 대척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인데, 기독교적인 사랑과 자비를 대표하듯이 부모가 없는(혹은 부모가 맞벌이를 해서 부재한) 아이들에게 부모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쿠퍼 부인과 해리, 한쪽 편만을 드는 것이 아닌 양측 모두 신을 대변한다고 설파한다. 영화의 절정 부에서 해리와 쿠퍼 부인이 대치 상태를 이룰 때, 그 기묘한 긴장 속에서 해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쿠퍼 부인이 화답한다. 카인의 증오와 아벨의 사랑이 서로 만나 하나의 완벽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결론적으로 영화 사냥꾼의 밤은 기묘한 영화다. 성경과 동화의 구조 속에 아이들의 세계를 침범하는 어른들의 음험한 이야기를 다룸으로서 기묘한 느와르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영화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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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낙인이라는 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에 가깝게 시도라도 해본다면 기괴함, 비논리성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컷들의 구성은 무의미하고 정합성 없이 뚝뚝 끊어진 구성을 보여주며, 이야기들은 리얼리즘은 커녕 현실에서 수백만 광년정도 떨어져있는 듯한 기기묘묘함을 보여준다. 게다가 인물들은 정신줄을 죄다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는데, 밥냄새 환장하는 넘버 3 킬러, 수만마리의 박제 나비들을 벽에다 꽂아놓고 살며 자신의 희망은 죽음이라 이야기하는 넘버 2 킬러, 그리고 바지에다 오줌을 지리면서 준엄하게 자신의 타겟을 꾸짖는 넘버 1 킬러까지 감독한테 약이라도 빨고 영화를 만들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내용은 간단하다. 한 킬러가 있다. 서열 넘버 3. 영화는 이 남자가 일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남자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과정을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그런 느와르 물이라 할 수 있지만, 스즈키 세이준은 이 이야기를 기묘한 이미지와 구조로 비틀어서 한 남자의 강박관념에 대한 이야기로 빚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에드 우드나 우베볼 같은 정신나간 저퀄리티의 영화가 아니다. 스즈키 세이쥰은 그러한 정신나간 이미지 속에서도 정확하게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고 있었으며, 그 속에 교묘한 알레고리를 배치하여 한 남자의 강박관념과 광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여태까지 많은 영화들이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 차분하게/폭력적으로, 정적으로/동적으로 등의 다양하고 상반된 방법을 보여주었지만, 살인의 낙인처럼 '진짜 싼티나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어찌보면 상상력이나 표현력의 싼티, 그리고 개그 요소 등의 B급 요소에 있어서는 주성치와 비교할 수 있으나, 스즈키 세이쥰은 이 B급 요소를 예술적인 표현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B급 정서만이 가질 수 있는 파격성과 그리고 허를 찌르는 장치를 이용해서 스즈키 세이쥰이 현실과 영화의 괴리를 통한 웃음을 뛰어넘어 강박관념과 집착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사실 스즈키 세이쥰의 영화는 직접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편린의 투성이이다. 다음은 그 편린의 단편을 분석하고자 노력했던 나의 실패작 리뷰의 일부이다.


영화는 3가지 파트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파트는 주인공 하나다가 공항에서 도착해서 실수로 민간인을 쏘기까지의 이야기, 두번째 파트는 조직에게 쫒기는 하나다가 미사코의 아파트에서 숨어살면서 생기는 에피소드, 그리고 마지막 파트는 하나다와 넘버 1 킬러 사이의 기묘한 동거(?)에 대한 이야기다. 첫번째 파트에서 하나다라는 케릭터는 자신의 원칙을 갖고 살아가는, 범죄영화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프로페셔널 킬러라 할 수 있다. 그와 대비되는 것이 한때 조직의 랭크안에 들었다고 주장하던 퇴물 킬러다. 그는 입에 술을 달고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대해 하나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킬러가 술과 여자에 빠지면 그걸로 끝장이라고. 실제 하나다와 그 퇴물 킬러가 같이 임무를 수행할 때, 하나다가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였다면 퇴물 킬러는 한때 순위권에 들었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허접한 모습을 보여주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이야기가 두번째 파트로 접어들면서 부터 하나다 역시 그 퇴물 킬러가 했던 행동양식을 똑같이 따라한다. 민간인을 쏜 이후로, 하나다는 술을 입에 달고 사며, 미사코를 범하기 위해서 찌질한 모습을 보이는데다가 미사코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원칙과 프로페셔널리즘이 깨졌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강박관념'이었다. 사실 그의 쿨하고 프로페셔널했던 세계는 그의 부인이 그를 총으로 쏘면서 깨지는데, 그의 프로 의식에 대한 강박관념이 여자와 술, 그리고 생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필름위에 조잡한 종이 새를 붙여서 펄럭이게 만드는(.....) 장면은 하나다의 강박관념을 참으로도 B급스럽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파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미사코'라는 케릭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인도-일본인의 혼혈인 배우이기도 하지만, 영화 내내 다른 인물들과는 한 차원 정도 붕 뜬거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는 미사코는 이 영화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할 수 있을 정도다. 첫만남에서부터 미사코는 관객에게 기묘한 포스를 내보이는데, 비오는날 오픈카를 몰면서 차 장식으로 목에 바늘을 꽂은 새 시체를 갖다 박아넣는 이 정신나간 센스는 이루어말할 수 없을정도다. 게다가 하나다가 미사코의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수만 마리의 나비 박제들이 벽에 꽂힌 모습은 미사코의 정신상태가 하나다 보다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다의 강박관념이 미사코의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발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는 이러한 미사코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박제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압도적으로 구현한다.


하지만 하나다는 미사코의 납치와 죽음, 그리고 조직에서 보낸 킬러들을 하나다가 처리하면서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나, 그런 하나다 앞에 최대의 강적 '넘버원'(심지어 이름조차 없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넘버원과 하나다의 대결이 영화의 후반과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영화는 이 넘버원이라는 케릭터를 통해서 원칙과 타이틀에 대한 강박관념을 희화화 시킨다. 미사코의 아파트에 하나다를 몰아넣고 하나다에게 친절하게 전화를 걸어서 압박하는가 한편, 하나다와 동거할 때는 하나다를 감시하기 위해 화장실도 안가고 바지에 소변을 지린다. 그러고 이를 비웃는 하나다에게 준엄하게 꾸짖는 넘버원의 모습은 웃기다 못해 아연이 질색할 정도다. 재밌는 점은 넘버 원이라는 케릭터 자체는 자신의 '원칙'에 대단히 충실한 케릭터라는 점이다. 어찌보면 하나다의 원칙에 대한 강박관념이 완전하게 발현되었을 때의 모습을 넘버원이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넘버원은 하나다에 의해서 패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원칙에 대한 '강박관념'을 하나다가 꿰뚫었기 때문이다. 사실 완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넘버 원은 이마 정중앙에 총알을 박아넣는 습관을 갖고 있는데, 하나다는 그런 넘버원의 습관을 역으로 이용해 미사코의 헤어밴드로 이마를 커버해서 넘버원의 공격을 방어한 것이다. 어찌보면 영화는 자신의 원칙에 의해 스스로 당해버린, 원칙과 그에 대한 강박관념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은 '내가 넘버원이다!!'로 귀결된다. 끝은 그냥 직접봐라. 백문이 불여일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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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영화는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나쁜 남자'가 제 첫 김기덕 영화였죠. 아마도 한국 대중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진(피에타 이전에는) 작품일텐데, '여대생이 창녀가 되는' 이라는 센세이셔널함(그리고 거기에 페미니스트들의 김기덕 물어 뜯기까지) 덕분에 각광을 받은 케이스죠. 나쁜 남자 자체는 김기덕 영화의 가장 근원적인 테마인 '평범한 중산층의 인식 비틀기'에 기반하고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맨스물을 아주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관음하는 사랑, 창녀-포주의 무언가 알 수 없는 로맨스, 그리고 충격적인 엔딩까지...사실 이후 김기덕 영화는 본적이 없지만 제 머릿속의 김기덕은 가죽 팬티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채찍을 들지 않았을 뿐인 초 S 변태감독이었습니다. 

근데 이번 피에타로 황금사자상 받고 나서 '이제 산에서 내려와도 되려나...'라는 드립을 치는걸 보면서 의외로 자연과 노을을 사랑하고 베지밀 Q를 즐겨마시는 이 시대에는 흔하디 흔한, 평범하고도 순수한 변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피에타의 기본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진짜 나쁜 남자 이강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청계천에서 사채업자의 돈을 수금하는 이 주인공에게 한 여성 미선이 찾아옵니다. 미선이 말합니다. 자기가 예전에 남자를 버린 엄마라고...영화는 주인공 강도가 엄마를 만나면서 변하는 것이 주된 스토리라인입니다. 사실, 영화 보고나서 다시 회상하면서 놀랐던 것이 김기덕 영화 같은 그런 썩은(?) 맛, 아니면 뒤통수를 깨는 반전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에서 대단히 정석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그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과정 자체는 김기덕 특유의 썩은맛이 철철 넘치죠.

-영화에서 '엄마와 모성애'가 가장 눈에 띄는 핵심 테마이기는 합니다만,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돈'이라는 존재죠. 주인공 강도는 사채업자입니다. 영화 초반부에서부터 영화 중후반부까지의 주된 이야기는 바로 강도가 수금하러 다니는 사건이 주가 됩니다. 사채업자 답게, 말도 안되는 이자율로 돈이 불어나고 그 돈을 강도는 인간 백정마냥 뜯어냅니다. 이 인간백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도 않게,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죠(손가락, 팔 절단에, 다리병신 만들기 등등...) 여기서 강도는 악업을 쌓고, 후에 자신의 엄마를 납치했을 만한 채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악행을 되돌아보는(불구가 되서 증오를 불태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죠.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할 점은 영화는 강도'만' 나쁜 놈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강도가 수금하러 왔을 때, '지깟게 설마 진짜 병신으로 만들겠어'하면서 자기 부인이랑 정사를 나누는 남편, 그리고 갚아야할 돈이 너무 많다면서 돈을 못갚겠다고 하는 남자, 자신을 병신으로 만든 강도를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아들에게 그 증오를 대물림하는 아버지까지, 영화의 포커스를 살짝 강도에게서 벗어나서 본다면 뭔가 단순히 '피해자'로만 보기에는 미묘한 케릭터들이 대다수입니다. 이건 김기덕 감독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시각인데,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유리한대로만 사는 사람들(특히 중산층)의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거죠. 재밌는 점은 강도가 무자비하지 않게 대하는 두 사람은 변제의 의지가 뚜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식을 위해 한손이 아닌 두손을 잘라달라고 이야기하는 청년에게 기타를 돌려주는 모습(하지만 결국은 스스로 손을 자르죠...), 자살하려고 건물 위로 올라가는 노인에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 그리고 자살하면 보험금이 복잡해진다고 하면서도 그를 막지 않는 모습 등은 '의외로' 강도에게 인간적인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본다면 강도는 자신의 업무(수금)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충실한 사회의 일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업무에 있어서 방법 자체가 무자비할 뿐이죠. 그리고 그의 업무 수행 방법이 잔혹한 것은 사실 그의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것에서 오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미선의 엄마노릇을 통해서 해결됩니다. 자신의 엄마가 위험에 처해지리라 생각한 강도는 스스로 수금업도 때려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실, 영화 후반부로 갈 수록 드러나는 강도의 모습은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많이 유사하죠.


-하지만 미선 역시 강도의 무자비한 수금업의 피해자였고, 사실은 강도에게 가장 잔혹한 복수(자신의 엄마가 눈앞에서 죽어서 영혼까지 죽여버리는)를 하기 위해 접근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뛰어내리기 전의 독백을 통해서 강도에게 묘한 동질감과 모성애를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죠.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뛰어내립니다. 왜 뛰어내릴까요? 저는 이것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돈으로 인해 만들어진 죄악의 순환고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선의 아들이 자살한 것도 돈 때문이었고, 자식을 위해 손을 자른 이유도 돈 때문이었고, 사람 병신 만든것도 돈 때문이었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강도에게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 채무자에서부터 심지어 자신의 고용인인 사채업자까지, 모든 사람들이 강도를 나쁜놈, 근본 없는 놈이라 하죠. 


영화 전반의 가장 큰 문제는 돈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언급하지 않아요. 죄다 서로 비난의 화살을 구체적인 누군가에게로만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 돈에 의한 악의 순환고리는 아무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너무 거대하고 확고한 나머지 영화 전반을 굴러가게 만드는 핵심 동력입니다. 


-결국 미선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강도는 엄마와 함께 심은 소나무 밑에 자신의 엄마를 묻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소나무 밑에는 이미 미선의 아들이 묻혀있었죠. 모든 것을 이해한 강도는 자신의 피해자 트럭에 스스로 몸을 메달고 트럭에 끌려서 죽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어찌보면 미선의 말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고 빈껍데기가 되서 죽은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로 봤을 때 강도의 피로 이 죄악의 흐름을 끊고자 하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메라 워킹이나 미장센 등에서 이미 김기덕 감독은 자기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 담담하면서 동시에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김기덕 영화의 코드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죠. 그와 별개로 매번 이런 영화볼때마다 신기한거지만...도대체 감독들은 어디서 저런 한국같지 않지만 한국 같은 곳을 찾아내는 걸까요?


-근데, 대사 수준이 영...영화가 좋은 건 맞는데, 영화에 쓰이는 대사들이 무슨 국어책 읽기에서나 볼법한 대사들이 대부분입니다. 연기와 대사가 매치가 안되요. 치명적인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자막으로 감상한 외국인들에게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 부분이었겠죠, 음...


-끝으로, 요즘 김기덕 감독 추켜올리기가 한창 유행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진짜 역겨운 광경이 따로 없습니다. 그거 아세요? 불과 몇년전까지만 하더라도 김기덕이 '아 나 한국에서 영화 못찍겠음요 'ㅅ' '라는 발언을 하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지랄을 해라 미친ㅋㅋㅋㅋㅋ'이라는 반응을 보였었고, 사람들에게는 해외영화제 출품/수상 소식보다는 '여배우하고 응응 했다더라'로 더 잘 알려진 감독이었죠. 팬들과 비판론자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것과 무관하게 말이죠. 하지만 웃기는건 순식간에 피에타가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오오 김감독님 오오', '한국 영화의 선두주자 오오' 이러고 있고, 심지어는 '김기덕 감독님의 바람에 힘입어서 우리 영화가 어떻게 해외에서 잘나가게 할 수 있을까' 이딴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조금만 더 지나면 저기 한예종 대공분실 위에다가 '친애하는 김기덕 감독 수령님 반자이!'라고 제목 달고 동상이라도 세워줄 판이에요...


사실, 김기덕 감독은 김기덕 감독입니다. 나쁜남자 때도 그랬고,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무려 '은'사자상)을 받은 빈집 때도 그랬고, 피에타도 그랬습니다. 변한건 김기덕 감독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웃기지도 않는 띄워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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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불린 사람은 하늘색 리본을 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겠지."


-파울로 파졸리니 감독, 살로 소돔의 120일에서




미하일 하케네 감독은 동생(giantroot)의 표현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도덕적인' 새디스트입니다. 미하일 하케네 영화는 사람을 견딜 수 없게 고문합니다. 퍼니 게임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반전을 보여주고, 히든에서는 사람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엔딩을 보여주죠. 하지만, 미하일 하케네 감독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상황이 보여주고 있는 인간의 추악함과 그로부터 인간이 각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람을 고문한다는(?) 측면에서 미하일 하케네는 도덕적 새디스트라 불릴만 합니다. 사실, 하얀 리본이라는 영화 자체도 이러한 미하일 하케네 식 새디즘이 여지 없이 발현된 영화입니다. 하지만 독특한 표현양식과 연출, 미장센 덕분에 놀라운 경지에 이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인 교사가 마을 의사가 낙마사고를 당하는 것을 회상하면서 시작합니다. 마을 의사의 낙마사고에서부터 1919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까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마을에서의 일상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의 추악함을 낱낱이 까발리죠. 사실, 하얀 리본의 플룻은 낙마사고 이후 일어난 이상한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주된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을 찾아나가는 노력이나 과정보다는 사건에 대처하는 인간 군상들의 반응과 상황을 보여줌으로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진행될 수록 평범해 보이는 마을이 사실은 광기와 뒤틀림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자신의 책임을 나몰라라 하는 남작, 자신의 딸을 범하는 의사, 자신의 아이들에게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목사 등등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속은 모두 썩어있죠. 이러한 세계를 미하일 하케네는 고전 예술 사진의 프레임을 그대로 본따서 짜냅니다. 아름답고 정물화를 보는 듯한 정교한 미장센 위에 인간들의 추악한 이야기를 덧칠함으로서 하얀 리본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미칠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하얀 리본을 지배하고 있는 코드는 바로 '침묵'입니다. 마을을 지배하는 역겨운 기운에도 불구하고 그 아무도 문제를 소리내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의사와 그 조수의 불륜 후의 대화, 남작의 수확제 연설, 목사의 예배,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한 아들, 목사가 가족에게 하는 이야기 등등 영화 내에서 침묵은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영화 내에서 모든 대화는 공허합니다. 대화 내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인형들이 서로 알 수 없는 외계어로 말하는 듯한 낯섬까지 느껴집니다. 이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 그리고 그 가족 사이의 대화와 대칭된다고 할 수 있죠. 하케네는 이러한 침묵을 정적인 카메라 워크와 롱태이크로 잡아냅니다. 앞서 이야기한 정교한 미장센, 정적인 카메라워크와 롱테이크가 서로 얼기고 섥히면서 보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립니다.


하얀 리본에서 중요한 소재는 바로 아이들입니다. 보통 아이들이란 어른들의 추함과는 거리를 둔 모습을 보여주죠. 하지만 영화 하얀 리본에서는 마을이 만들어낸 타락의 핵심이자 정점이 바로 아이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영화는 영화 내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들을 아이들이 일으킨 것으로 암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것을 요구하는 교사에게 침묵합니다. 또한 아이들의 부모인 목사도 교사에게 침묵할 것을 강요하죠.


재밌는 점은,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미하일 하케네는 영화 내에서 아이들이란 존재를 순수하거나 어른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존재가 아닌 어른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자 카피로 묘사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묘사하지는 않고 은연중에 이를 암시하면서 아이들이 이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은 어른들 역시 악을 보면서 침묵하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게다가 어른들, 특히 목사가 아이들에게 하얀 리본을 메어주는 장면은 이 영화를 지배하는 허위와 가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얀 리본은 놀라운 영화이며, 20세기 유럽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짚어낸 역작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꼭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덧.이번 리뷰는 망했네요...그냥 적당히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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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대량 함유되었습니다.


전작 배트맨 다크나이트는 영화사에 한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영웅을 벗어나고 싶은 영웅과 그 발버둥, 영웅조차 감당할 수 없는 혼돈, 그리고 마지막 영웅으로서의 비극적인 숙명을 받아들이고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영웅의 비장한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고 한철 장사하는 히어로 영화의 틀을 바꿔버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이 간절히 원한 테제, '히어로가 필요없는 세계'는 약간의 시니컬한 관점과 비장미가 섞인 복잡 미묘한 엔딩에 의해서 부정되었죠. 3편,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그러한 명제에 대한 반대 명제입니다. 어떻게 히어로가 대체되고, 세계가 히어로 없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죠.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전작들보다도 더욱 인간적인 배트맨을 그리고자 합니다. 2편 이후, 브루스 웨인은 8년동안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알프레드는 떠나고, 웨인 기업은 적들 손에 넘어가며, 베인에게 허리는 부러지고 서아프리카 어딘지도 모르는 구덩이 감옥에 갇혀서 라이브로 고담시가 망하는 장면을 TV로 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 다시 한번끔 일어납니다(Rise) 더이상 잃을 게 없기에 죽어도 좋다는 막무가내식으로 싸웠지만,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남는다 라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일어난 배트맨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물론 표면적으로) 고담 시를 다시 지켜냅니다. 그리고, 그가 바란대로 그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정의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영원히 남게 되죠.


영화는 배트맨 보다, 배트맨 주변 인물들이 고담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노력하는 장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이번 라이즈는 배트맨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미의 고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긴즈에서는 범죄자에게 공포를 주는 상징으로, 다크나이트에서는 영웅을 옭아메는 동시에 거역할 수 없는 비장미를 부여하는 장치로, 라이즈에서는 모든 이들의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숨쉬는 정의의 상징으로 말이죠. 상당히 일반론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의 배트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사실 여기서 비틀기에 들어가면 무한히 비틀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에 놀란 감독은 상당히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어로가 필요없는 히어로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는 '도대체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히어로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역설적인 지점에 도달합니다. 영화는 그렇기에 영화내의 모든 장치들을 배트맨의 '과거 청산'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영화 대부분의 장치나 플룻은 배트맨의 과거나 오판, 실수로부터 비롯됩니다. 브루스 웨인, 배트맨이 방심하고 있었기에 텀블러 같은 배트맨의 주요한 장비들이 빼았겼으며, 베인과 탈리아 알굴이라는 메인 빌런은 비긴즈부터 비롯된 배트맨의 업보입니다. 결국 히어로가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히어로 스스로의 과거 자체를 청산해야 하는거죠. 


여기까지만 적어놓고 본다면, 상당히 괜찮은 영화입니다. 솔직히 다크나이트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 포인트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전체 플룻이나 장치에서 오는 것이 아닌,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부분에서 비롯됩니다. 한마디로 부분부분을 놓고 보면 훌륭하나, 그 부분을 연결시키는 연결고리가 감히 허접스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사소한 빈틈들이 자꾸 쌓이고 쌓이다 보니, 결국 마지막 영화 끝나기 15분 전 탈리아 알 굴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뻥하고 터져버립니다.


첫번째로, 왜 다크나이트 이후 8년 동안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다 버린걸까요? 그렇게 비장한 엔딩을 거쳤는데, 결과적으로 라이즈 시작부터 나온 결과물은 히키코모리 였습니다. 뭐, 이것도 어느정도 봐줄만 해요. 사실 놀란의 배트맨은 영웅과 인간의 그 중간점에서 고뇌하는 백만장자의 이미지가 강하니까요.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브루스 웨인이 8년의 공백을 벗어던지고 다시 배트맨이 되기를 선언할 때, 뭐랄까 미묘한 어중간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알프레드가 지적했듯이 베인이라는 적을 살짝 깔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죠. 결국 베인한테 영혼까지 털려버리고 허리가 부러지는데다가 자기 무기고까지 털립니다. 하지만 베인이라는 적이 워낙이 강적이니, 이렇게 개털리는 모습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8년동안 놀았으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죠.


두번째 미묘함은 바로 감옥 시퀸스와 전체 플룻 사이의 관계입니다. 감옥 시퀸스에서 브루스 웨인은 다시금 영웅으로 일어나기 위한(Rise) 죽음-재생-부활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영웅이 필요 없는 세계라는 명제와 영웅이 고난을 거쳐 다시 영웅으로 부활하는 것, 이 두가지의 명제 사이에서 플룻은 미묘한 마찰을 일으킵니다. 차라리 배트맨이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고, 전체 이야기의 핵심축을 형성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놀란은 영웅이 필요없는 영웅영화에서 감옥 시퀸스와 부활의 장면은 너무 쓸데 없이 길고 중요하게 잡습니다. 차라리 베인이 만들어낸 '고담 시민들에 의한' 고담시라는 상당히 의미있고 심도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아무리 일반인들이 정의감과 희생으로 막을 수 없는 임계점의 상황에서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마지막으로 일어나 고담을 지킨다고 한다면 그 나름대로 감동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부분에서 비율을 이상하게 배트맨쪽에 무게를 실으면서 '영웅이 필요없는 세계에서 영웅 뺀 나머지 인간들은 쩌리임'이라는 이상한 뉘앙스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감독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요.


마지막 미묘함은 바로 탈리아 알 굴의 등장입니다. 사실 라스 알굴의 '자식'이라는 떡밥은 탈리아 알굴의 등장을 시사하고는 있었으나, 사실 영화 내에서 사전 지식없이 본다면 옆구리 찔린 배트맨 마냥 충격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베인이라는 악역을 지적이고 사악한 아나키스트에서 지고지순한 순정 로리콘(.....)으로 만들어버리며, 라스 알굴은 간지 악역에서 순식간에 가면 쓴 변태에게 딸을 뺏길수 없다! 고 외치는 딸바보가 됩니다. 탈리아 알굴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냐고 물으면요? 10분만에 교각에서 떨어진 트럭에서 충격을 받고 어이없게 죽습니다. 웃긴건, 고든 청장은 뒤에서 중성자 폭탄이랑 구르고 있었는데도 멀쩡하게 기어나오는데 말이죠.


사실 베인이라는 악역은 조커 급으로 인상적인 악역입니다. 배트맨이 대처하지 못하는 악이라는 의미에서의 조커와는 달리, 배트맨과 정면에서 맞붙어도 배트맨을 압도할 수 있는 악역이라는 측면에서 베인은 인상적인 악역입니다. 게다가, 마치 시민들에게 권력을 모두 이양한것 마냥 속이고는 시민들 스스로가 혼돈과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상황을 교묘하게 연출하는 지능적인 악역이기도 하구요. 조커가 그 기상천외함에서 배트맨을 압도하고 있다면, 베인은 지적이고 인내심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톰 하디의 인상적인 목소리 연기도 좋았구요. 그런데 이 모든게 영화 끝나기 15분 전에 그의 지적인 아나키스트적인 이미지는 단지 탈리아 알굴을 향한 지고지순한 키잡+로리콘+페도필리아 수준으로 격하되며, 2분 정도 뒤에 캣우먼의 바이크 캐논 공격(사실 옆구리를 내주고 캐논으로 공격하는 전략이었어!) 어이없게 리타이어 당해버립니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합니다. 베인이라는 악역이 어떤 큰 목적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악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배트맨이 죽인 라스 알굴이라는 거대한 업보(라 쓰고 거대합 삽질, 또는 빅똥으로 읽는다)때문이라는 것은 영화내에서 고담 시민들이 겪었던 고초가 한순간에 배트맨이 쌓은 업보(라 쓰고 싼 똥이라 읽는다)에 쓸데없이 다같이 고생하는 어이없는 상황으로 격하됩니다. 게다가 고담 시민들이 겪은 고초에 대해서, 그리고 베인이 만들어낸 아나키즘이 지배하는 고담에 대한 묘사가 대단히 적기에 고담시민들의 겪었던 고통은 사실 베인의 연정에 의한 것이라는 이상한 상황에 봉착하죠. 사실, 베인이 어둠의 리그에서 파문당했다는 설정만 그대로 유지하고 라스 알굴과 탈리아 알굴만 없었어도 영화의 평가는 이정도로 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탈리아 알굴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배트맨이 스스로 싼 똥을 치우는 결자해지의 영화로 격하됩니다. 결국 자기 업보를 치우기 위해서 배트맨이 핵과 함께 자폭을 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동상까지 세워주고 정의의 아이콘으로서 영원히 상징화합니다.


솔직히 영화 끝나기 15분전까지 저도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놀란은 이상한 부분에서 완급조절을 잘못한데다가, 탈리아 알굴의 등장으로 이 모든 영화의 장점을 죄다 씹어먹어버려요. 만약 놀란이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시리즈를 끝내려 했었다면, 탈리아 알굴이나 베인을 동시에 등장시키지만 않았더라면 이정도로 망했다는 느낌은 안들었을 겁니다. 결국 욕심이 영화를 망쳤다고 밖에 말 못하겠네요.



 덧.뭐랄까, 점점 시리즈 뒤로 가면 갈수록 배트맨의 정체를 몰라주는

고담시민들의 친절함에 눈물이 나려합니다(.....)



덧.아무리 빈말로도 전작에 비해서 액션 시퀸스가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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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라모레 델라모테는 과거 제가 리뷰했던 작품, 아쿠아리스(리뷰는 여기로  http://leviathan.tistory.com/966 )의 감독인 미쉘 소아비가 만든 좀비영화입니다. 북미 쪽 제목으로 Cemetery Man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제목보다는 원제인 델라모레 델라모테(Dellamorte Dellamore)라는 제목이 훨씬 더 영화의 본질적인 의미를 살린다고 생각합니다. 밑에서 정확하게 분석하겠지만, 이 영화는 미쉘 소아비가 나름대로의 야심, 혹은 노림수가 다분히 깔려있는 작품입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무언가 찝찝한 구석이 많은 작품입니다. 사실, 툭까놓고 이야기해서 완벽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부분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죠.

본격적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서,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영화 자체가 함축적인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고, 그에 비해서 자막은 뭔가...부족하더군요. 귀에 들리는 영어하고 자막하고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정도 히어링이 된다면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선형적입니다. 오히려 상황극에 가까운 영화죠. 상황은 간단합니다. 마을 공동묘지에 사람을 묻으면 며칠이 지나서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좀비로요. 그리고 묘지기 프란체스코 델라모테는 매일 밤 살아나는 좀비들과 투닥거립니다. 이렇게 투닥거리는 와중에 주인공인 프란체스코의 사랑을 만나고, 해어지고, 그 속에서 자신의 묘지기로서의 역할과 어딘가 불현듯 떠나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안좋은 형태로 결말을 맞이하고, 더이상 현실을 참을 수 없는 그는 묘지 밖으로 탈출합니다.


영화 내에서 공간의 개념은 이원적입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돌아오는 공간인 묘지,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델라모테 델라모레의 독특한 분위기와 컨셉 여기서 나오는데, 일반적인 좀비 영화에서의 관념, '비일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좀비'가 무너진 기묘한 공간 구도를 보여줍니다. 영화 오프닝 시퀸스, 집을 찾아온 좀비를 대수롭지 않은듯이 보고 총으로 쏴 죽이는 주인공 델라토레의 모습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며, 사실 마을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뿐 대부분 마을 공동묘지에 사람을 묻으면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지 않으고 쉬쉬하며, 묘지를 관리하는 주인공과 그 조수를 불길하게 생각하고 경멸하죠.  


전반적으로 영화는 죽은자들의 공간에서 사는 기묘한 묘지기, 델라모테의 관점에서 진행됩니다. 그의 시점에서 본 산 자들의 세계는 경멸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경박한 젊은이들, 죽은 딸을 이용해서 시장 선거에 재선되려고 하는 시장, 부패한 관료들, 돈으로 사랑을 파는 여자 등등...델라모테의 입장에서는 경멸받고 외면받아야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세상 그 자체입니다.  

죽음과 삶의 이원론은 많은 영화에서 사용한 장치입니다만, 델라모테 델라모레의 관점은 여지껏 등장한 영화들과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이를 드러내는 단적인 장치가 바로 주인공, 프란체스코 델라모테라는 이름의 유래와 그의 기원입니다. 죽음의 성인인 '프렌체스코'에 성인 Dellamorte에서 Morte, 이탈리아 어로 '죽음' 자체를 의미합니다. 사실, 그의 산자들보다 죽은자들과 더 가까이 지내는 모습이나, 살아있는 사람들로 무시당하고 경멸당하는, 심지어는 '부정'당하는 모습에서 그의 존재가 '죽음'그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자식에게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준 그의 어머니는 이름이 Dellamore, 즉 Amore(사랑)의 화신이라는 것이죠. 감독은 죽음의 어머니는 사랑이라고 설정함으로서 '사랑과 죽음은 하나이다'라는 독특한 주제의식을 만들어냅니다.


뭐, 사람들이 종종 잊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어떤 생명이든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 죽음으로 끝을 맺죠. 시종(始終)은 여일(如一)하니, 이 두 관념을 분리해서 보지 말자는 것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특히 영화 전반의 핵심적인 사건들은 델라모테의 사랑과 본질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한 미망인과 납골당에서 섹스를 하고, 미망인은 섹스 후에 좀비에게 물려서 죽음을 맞이하고(엄밀하게는 좀비로 변했다고 생각한 주인공이 실수로 죽인거지만), 다시 좀비로 변한 미망인과 주인공이 키스를 하는 등 죽음과 사랑의 이미지가 교차반복되어 드러납니다. 그 후로도 델라모테는 계속해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하죠. 


그리고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계속해서 부정당하는 현실에 지친 델라모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죽여서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 것이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매번 그가 누구를 죽일 때마다 누군가 그의 죄를 뒤집어 씁니다. 심지어 백주대낮에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를 쏴죽였음에도 그의 살인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되지 못하죠.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에 다다를 무렵, 그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음의 문턱에서 그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본업을 포기하고 묘지를 떠납니다. 하지만, 그 일탈의 끝은 낭떠러지였고 결국 그는 그를 기다리는 묘지로 회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죽음이 있어야 할 곳은 묘지뿐이라는 것이죠.


델라모레 델라모테는 좀비영화의 탈을 쓴 예술영화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보통의 좀비영화가 시체를 갖고 장난질을 하는 것이 주요한 이야기의 도구라면, 델라모레 델라모테는 좀비란 단지 상황에 불과한 특이한 작품이죠. 죽음을 부정하는 세계를 향한 블랙코미디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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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펜터는 공포 영화팬들이면 적어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법한 감독입니다. 모르시는 분들이라면 살인마 영화의 프로토타입이자 살인마 영화 붐의 시발점, 할로윈이란 영화의 감독이 바로 존 카펜터라는 사실만 아시면 됩니다. 엄밀하게는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감독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의 걸작들은 옛날에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존 카펜터의 영화는 '매드니스'(In the Mouse of Madness, 1994)였죠.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쥬라기 공원의 샘 닐(박사 있잖아요, 그)[각주:1]이 나와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는 소설을 쓴 소설가의 이야기였는데, 나중에 나이들어 찾아보니 존 카펜터 영화 치고는 별로였다 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저는 어렸을 때, 쫄면서 봤는데 말이죠.[각주:2] 하지만 요즘은 마스터즈 오브 호러에 단편 영화를 두편 냈는데[각주:3] 상당히 괜찮은 평가를 듣고 있더군요. 


각설하고, 존 카펜터의 The Thing[각주:4]은 소위 인구에 회자되는 비운의 명작입니다. 사실, 저래 보여도 상당히 돈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었죠. 대략 1500만불(?!) 정도 들어간 작품[각주:5]이니까요. 다 합쳐서 이득을 보기는 했는데, 이 괴물 영화의 걸작은 아쉽게도 인지도 면에서는 좀 묻혀있는 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왜냐면 같은 연도에 ET 가 개봉을 했거든요!(.....) 한 쪽은 정신교감을 하는 외계인과의 드라마였다면, 다른 한쪽은 그로테스크한 신체강탈자 이야기라니! 물론 ET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솔직히 ET에 묻힐만한 그런 존재감 없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개인적인 사견을 좀 덧붙이자면 존 카펜터의 괴물은 아마 이 장르를 모두 통틀어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The Thing의 이야기와 장르는 '신체강탈자'라는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를 모태로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밌게도, 기존의 신체강탈자 류와 다른 관점으로 공포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The Thing입니다. 기존의 신체강탈자(Body Snatcher물)이란 195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미국 사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비밀스럽게 자신들끼리 모여서 사회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 부류로 개종시키고, 그리고 아무도 그 위협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죠.[각주:6] 하지만, The Thing은 상당히 다른 각도에서 신체강탈자에 대해서 접근합니다. 첫번째로, The Thing의 그것은 절대로 사교적이지 않습니다. 어딘가 어두운 골방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붉은 글씨로 '위대하신 김일성-김정일 수령 아바이 동지 만세!' 이딴 기치를 걸어놓지도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The Thing의 그것은 포식자입니다. 그들은 먹잇감을 사냥하고, 복제해서, 그 안에 숨어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를 끝없이 반복하죠. 오로지 그들만 남을때까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생겨먹은 구조자체가 인간과 다르게 생겼으며, 개종은 전혀 우아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그것들은 전염될 수 있으며, 아무도 자신안의 그것이 깨어나지 않는한 누가 그것이고 누가 우리편인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했고, 어떤 동선을 취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넌 괴물이다!' 이런 식의 머릿싸움과 눈치싸움이 서스펜스를 형성하는 주된 장치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존 카펜터는 이러한 장치를 모두 제거합니다. 영화는 중반까지 괴물의 존재를 암시로만 드러냅니다. 폐쇄된 환경, 불안감을 조성하는 조성하는 카메라 워크, 신경을 긁는 효과음을 통해서 사건이 터질듯 말듯 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그리고 괴물의 정체와 특징을 모두가 알게 된 순간, 그 장면에서 모든 인물들이 깨닫습니다:때는 너무 늦었다 라구요. 원판 버전 The Thing은 이 장면과 마지막 장면[각주:7]이 영화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드러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괴물일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자신이 괴물인지 아닌지, 그조차도 모르는 끔찍하고도 끝이없는 불신과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지배합니다. 


존 카펜터는 영화 내에서 완벽하게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을 만듭니다. 도대체 누가 괴물인가? 그로테스트한 괴물의 이미지와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불신과 절망감은 놀라운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하는 주인공과 그 일행의 사투 때문에 더욱 처절합니다. 그에 비해서 2011년도 The Thing은 상당히 온건한 노선을 걷습니다. 물론 온건하다는 것은 '원작에 비해서' 이지만요. 기본적으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원판 The Thing과 달리, 이번작에서는 믿을 수 있는 '주인공'이라는 중심축이 생기면서 절망과 공포의 이야기는 상당히 완화된 느낌이 듭니다. 사실, 2011년판 The Thing은 상당히 온건한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 기존의 1982년 원판 그대로의 이야기 구조를 따르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2011년 판은 원판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는데, 1982년 판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그 때 당시 사용했던 소품이나 분위기를 그대로 사용하려 하죠. 심지어 괴물의 디자인도 1982년판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합니다. 애시당초에 2011년판 The Thing은 원판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한 작품입니다. 게다가 마지막의 깜짝 보너스 장면은 원작 팬들이라면 좋아할만 합니다.[각주:8]


결론적으로 The Thing은 1982년판, 2011년 판 모두 훌륭한 작품입니다. 물론 괴물 영화와 호러영화,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비주얼을 쉽게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죠.





  1. 가끔식 유명배우들이 특이한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걸 많이 볼 수 있는데, 리암 니슨이 다크맨(샘 레이미 감독)에 나왔다던가, 샘 닐이랑 로렌스 피셔번(매트릭스의 모피어스) 이벤트 호라이즌에 나왔다던가 등등... [본문으로]
  2. 아주 어렸을 때, 비디오에 녹화해놓고 내용을 외울때까지 본게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플라이의 후속작 플라이 2...역시 호러 꿈나무는 조기교육부터 틀렸군요. [본문으로]
  3. '담배자국' 리뷰는 http://www.typemoon.net/bbs/board.php?bo_table=review&wr_id=31099&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13 이걸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 거기에만 쓰고, 여기에는 안 옮겨놨네요. 프로라이프는 구해는 놨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본문으로]
  4. 한국 제목은 '괴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괴물은 뭔가 어감이 살지 않고..그냥 리뷰에서는 The Thing으로 통일하겠습니다. [본문으로]
  5. http://www.imdb.com/title/tt0084787/business [본문으로]
  6. 이렇게 적고 보니까, 진짜 우리나라 빨갱이 혐오증과 똑같군요(.....) [본문으로]
  7. 기지를 폭파하고 살아남은 주인공 멕크레디가 괴물일지 아닐지 모르는 동료와 함께 앉아서 조용히 아침을 기다립니다. [본문으로]
  8. 스포일러! 살아남은 라스가 헬기를 타고 개의 모습을 한 괴물을 추격하는데...명백한 1982년 판 오프닝 시퀸스로 이어지는 부분. 즉 2011년 판은 '프리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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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 바커는 스티븐 킹과 더불어서 세계적인 호러소설의 대가로 알려져있죠. 개인적으로 스티븐 킹과 클라이브 바커 둘다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둘의 전문 분야는 극명하게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하나의 대명제(예를 들어, 살렘스 롯 같은 경우에는 우리 마을에 흡혈귀가 왔어요 라든가, 셀 같은 경우에는 휴대폰 전화로 사람을 미치게 한다든가)에 기초한 리얼리즘 소설쪽에 가깝습니다. 즉, 현실 그대로의 상황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추가하고 보통의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가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클라이브 바커는 특이하게도 그런 점에서 스티븐 킹의 대척점에 있는 작가입니다.


클라이브 바커의 소설에 있어서 공포란 피의 책 리뷰(http://leviathan.tistory.com/search/%ED%81%B4%EB%9D%BC%EC%9D%B4%EB%B8%8C%20%EB%B0%94%EC%BB%A4)에서도 다룬 것 처럼 일종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본질적으로 파고들면(제가 본 작품들에 의거하자면), 그의 소설에 있어 이야기 구조는 상당히 단순하고 쉬운 구조에 기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예를 들어, '로헤드 렉스'의 경우 모성을 두려워하는 파괴적인 남자 괴물과 자식을 잃은 아버지 사이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또, '별빛, 섹스, 그리고 죽음'의 경우 죽은자들이 돌아와서 연극을 공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서 제가 추론한 것은, 클라이브 바커 소설의 특징은 '동화적'이라는 것입니다. 클라이브 바커가 소설이든 영화든 간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야기 전반에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나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골적인 이야기를 클라이브 바커 특유의 지저분하면서도 원초적인 필체와 표현 안에 담아냄으로서 다른 호러 소설가들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죠.


헬레이저도 이러한 클라이브 바커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입니다. 소설 자체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아서 원판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영화 자체가 클라이브 바커가 직접 연출을 맡았으니(?!) 원작과는 크게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헬레이저의 이야기는 단순 합니다. 쾌락주의자인 남자가 극상의 쾌락을 추구하려다가 지옥에 떨어진 뒤, 지옥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한때 내연의 관계였던 형의 아내이자 주인공의 양어머니를 꼬드기고....사실 이게 다입니다. 헬레이저 3부작 모두가 상당히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자랑하는데, 각각의 작품을 3줄 스토리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한 정도니까요. 


그러나 헬레이저 삼부작의 특징(그리고 클라이브 바커 특징이기도 한)은 바로 묘사와 설정에 있습니다. 헬레이저의 간판 스타이자 80년대 호러 영화를 풍미한 핀헤드와 수도사란 케릭터들과 극상의 쾌락과 고통으로 가득찬 지옥이라는 특이한 설정들은 스티븐 킹 원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과 더불어서 호러 장르 수준을 한단계 올렸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헬레이저의 세계관에서 지옥이란 기존의 지옥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이미지입니다. 1편 초반, 프랭크가 상자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이나 영화 내의 프랭크의 묘사를 보면 프랭크가 지옥에 가게 된 것은 그의 악행 때문이 아니라 그의 쾌락에 대한 '탐닉'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1편에서 수도사들이나 지옥에 다녀온 프랭크는 지옥을 '극상의 쾌락과 고통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으로 묘사를 하는데, 보통 악한 자를 벌하는 공간으로서 지옥을 묘사하는 기존 서브 컬처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헬레이저의 지옥관은 선악의 개념보다는 인간다움의 개념에 의해서 정의됩니다(제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죠) 고통과 쾌락, 이 두가지 상반된 개념은 한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착'이라는 것이죠. 가령, 극심한 고통은 사람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대한 것에만 집착하게 만듭니다. 또한 극심한 쾌락은 그 쾌락 자체에만 빠지게 만들죠. 양쪽 다 인간으로부터 인간다움을 뺏어갑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그것에 몰입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게 만들죠. 특히 지옥에 직접 내려가는 2편의 경우, 이러한 지옥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몇몇 장면이 있습니다. 2편에서 핵심 인물로 나온 의사가 수술용 드릴을 머리에 꽂고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수도사가 되는 장면이나, 크리스티가 수도사들에게 그들이 예전에 사람이었다는 것을 설파하자 그들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부분, 그리고 3편 자체에서 잡은 대결 구도인 인간 핀헤드 vs 수도사 핀헤드 등에서도 추론할 수 있죠. 


이러한 독특한 세계관을 영화는 클라이브 바커의 전매 특허인 연출과 표현으로 완성됩니다. 특히 '수도사'라는 케릭터들은 호러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중 하나입니다. 이제는 지옥에서 온 수도사나 헬레이저의 수도사 이미지를 딴 컨셉들을 주변에서 꽤 찾아볼 수 있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어요. 베르세르크의 고드 헨드가 헬레이저의 수도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죠. 이제는 연중되어 끝날 기미가 안보이는(.....) 프리스트 역시 수도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작가가 직접 언급했구요. 하드코어 SM 포르노에나 나올법한 가죽 옷에 머리에 대못을 갖다 쳐박은 핀헤드의 이미지는 평론가 허지웅의 표현을 빌리자면 '20년이 지난 지금도 충격적'입니다. 뭐 개인적으로 50년이 지나도 핀헤드의 이미지는 충격적일것 같지만요. 


수도사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직접 지옥에 내려가는 2편의 경우 회색빛 콘트리트 미로로 표현되는 지옥의 음울한 모습, 프랭크의 지옥에서 보여준 고깃덩어리들의 에로티시즘 등은 지금 보아도 놀라운 이미지의 향연입니다. 물론 80년대말 관점에서 상당히 진지한 특수효과였겠지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상상력을 특수효과가 따라오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특히 2편의 경우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헬레이저 삼부작(4편 이후부터는 클라이브 바커가 참여 안해서 무효)은 대단한 작품입니다. 호러 영화의 팬이라면 꼭 보고 지나가야하는 성서 같은 작품이라 저는 단언 할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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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이 총에 맞아서 구멍 뚫리거나 잘려나가거나 피가 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표현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뭐,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물론 폭력 영화라는 분야가 처음부터 이렇게 잔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각 시대별로 폭력성의 단계를 한층 고조시키거나 인상적인 결과물을 남긴 일종의 문턱(?)같은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실제 총을 맞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더티 해리라던가, 정교한 고문/가학적 장치를 통해 고통을 엔터테인먼트화 시킨 쏘우 시리즈,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적인 폭력과 이해불가능한 목적을 결합시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을 보여준 마터스 등등이 대표적이죠. 샘 패킨파 감독의 와일드 번치는 이런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아마 이렇게 독기가 어린 작품은 영화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기본적으로 와일드 번치는 서부극의 끝자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동차가 등장하고, 자동 권총에, 기관총 등등 서부시대가 끝나는 전환기의 마지막 무장강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극중 주인공인 파이크가 이야기하죠. 더이상 (강도)기술이 늘지 않고 있어. 이미 파이크와 그들은 절정의 시기를 지났죠. 이제는 내려갈 때입니다. 그렇기에 파이크와 그의 일당들은 마지막 큰 한탕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이 문자의미 그대로의 '마지막'이 되어버리지만요.

와일드 번치란 영화는 그 내리막을 아주 독기어리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허무주의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겼던 서부영화 장르조차도 와일드 번치가 보여준 이 독기어린 세계관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와일드 번치의 세계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거기에 덧붙여서 '미'나 '의리', '미덕'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세계입니다. 철저하게 '인과율'과 허무주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죠. 초반 기병대 복장으로 은행을 턴 후에 은행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무고한 마을 주민 절반 이상을 총격전에 휩싸이게 한 파이크 일당은 결국 자신의 동료였던 엔젤을 구하기 위해서 200명이나 되는 마파치 반군들과 싸우다 장렬하게 죽습니다. 이 첫번째 총격전과 마지막 총격전이 수미쌍관의 구조(군인의 복장으로 총질을 한 뒤에,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다)를 이루고 있죠. 게다가 어처구니 없게 위대한 악당 파이크는 어린아이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둡니다. 또한 엔젤은 자신을 배신했던 연인을 죽이고, 그 연인의 어머니에 의해서 고발당하고 파이크 일당을 쫒던 조무래기들은 결국 원하던 파이크의 시체를 손에 넣지만 결국 그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주의와 인과의 법칙으로 점철된 썩은 맛이 줄줄 흐르는 영화라는 겁니다.

이 극단적일 정도로 허무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샘 패킨파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폭력으로 흥한 자들의 최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창녀와 한판하고 술병을 비운 파이크와 그의 일당들은 분명 자신의 몫을 챙겨서 도망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200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향해서 총질을 하고 장렬하게 모두 죽어버렸죠.(물론 그 과정에서 200명의 거의 대부분을 장렬하게 죽여버렸지만) 파이크가 동료들과 함께 엔젤을 구하기 위해서 총을 들고 나란히 반군의 수장 앞으로 행진하는(그리고 그와 대비되게 그들을 미친 놈 보듯이 멍하게 바라보는 반군들) 장면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들을 그대로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폭력으로 흥한 자, 폭력으로 망한다. 라는 것을요.

와일드 번치란 영화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잔인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잔인했지만요. 오히려 샘 패킨파 감독과 와일드 번치가 영화사적으로 갖는 의미는 폭력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액션영화나 폭력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경지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덧.다 쓰고 보니까, 음....마음에 안든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용서받지 못한 자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존경받을만한 작품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떻게 감독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60~70년대를 풍미했던 더티 해리와 전통적인 서부극의 변종인 스파게티 웨스턴의 전설적인 아이콘이었죠. 스파게티 웨스턴은 전통적인 서부극과 대척점입니다. 흔히 존 웨인과 그의 대표작 하이눈에서 등장하는 정의로운 보안관, 영웅적인 무법자 등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은 어딘가 썩어 빠져버린 인간군상이 서로 총질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바로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사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하기 전까지의 커리어는 거의 대부분 '무법자형 히어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가 감독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히 아이러니한데 지금 현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더이상 황야의 무법자가 아닌 위대한 감독입니다. 사실, 제가 제 자신을 열렬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팬으로 자처하는 바이지만, 저 역시도 88년작 버드 이후의 '감독' 작품들만을 보았을 뿐 60-70년대의 무법자 류의 영화는 하나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보았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인생에서 위대한 배우에서 위대한 감독으로 변모하는 극적인 반전의 계기는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 1993)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품의 핵심적인 특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동시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여태까지 무법자 전문 배우로서 걸어왔던 자신의 영화 인생의 한 부분을 스스로 끝내는 상징적인 작품이니까요.

영화는 윌리엄 머니가 자신의 아내를 묻는 장면을 배경으로 그가 어떻게 정착하였는지에 대한 자막을 짤막하게 올리면서 시작합니다. 사실, 일반적인 영화라면 그 지점이 바로 엔딩 지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물음표를 던지면서 시작하죠. 그리고 동시에 영화는 서부 영화에 전반적으로 깔린 클리셰들을 담담하면서 현실적인 시선으로 재조명하고 이를 영화 내에 담아냅니다.

영화 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윌리엄 머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분신 그 자체입니다. 젊었을 때는 악명 높은 무법자였으며, 수틀리면 사람 죽이고, 물보다 술을 더 마시고, 애도 어른이고 할 것없이 다 쏴죽이는 냉혹한 살인마였습니다. 60-7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 나올법한 전형적인 무법자 케릭터, 즉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했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전형이었죠. 하지만 이제 그는 나이가 들어서 가정을 꾸리고, 술도 끊고, 홀아비의 몸으로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서 병걸린 돼지들하고 돼지 우리에서 뒹구는 전형적인 농부가 되었죠. 그가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금을 쫒아 집을 떠난 뒤에도, 그는 영화의 절정 부분 직전까지 계속해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오한에 몸을 떨면서도 몸을 데우기 위한 술을 한방울도 안마시거나, 현상금을 건 창녀들의 공짜 서비스를 받지 않는 점 등에서 여실히 드러나죠.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자아성찰이자 고백입니다. 젊었을 때 자신의 페르소나 그 자체였던 스파게티 웨스턴과 그 케릭터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폭력은 결코 아름답거나 멋있을 수 없다-을 지속적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윌리엄 머니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자아성찰은 비단 윌리엄 머니 뿐만이 아니라 영화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영화 내에서 나오는 총격전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죠.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구질구질한 의미에서 총격전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배에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 울부짖는 사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 총을 맞아 죽는 사람 등등 영화에서는 총격전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 구질구질하게 묘사합니다. 오히려 총격전의 장면보다 영화가 더 비중을 두는 부분은 바로 사람을 죽인 뒤의 살인자들의 심리입니다. 윌리엄 머니가 네드와 키드와 함께 첫번째 카우보이를 죽일 때, 카우보이가 죽어가면서 울부짖는 모습, 동료들이 머니 일행을 욕하면서 저주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쏜 카우보이를 보는 윌리엄과 옆에서 촐랑거리는 키드, 그리고 그 장면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네드의 모습을 교차시켜가면서 '살인'이라는 폭력의 무게를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두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난 뒤, 한번도 살인을 하지 않았다면서 울먹거리는 키드의 모습에서 화려하고 쿨하게 보였던 살인을 한 사람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보여주죠.

아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노년에 들어서 다시 생각한 서부시대의 본질이란 '멋지지도 않은 비이성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 그 자체인 듯 합니다. 극중에서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키드가 살인할 때의 기분을 묻자 윌리엄은 '잘 모르겠군, 대부분 취해있었으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영화 내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살인이나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고 고뇌하죠. 인간성 자체를 날려버려야 살인, 폭행 등의 극단적인 행위를 할 수 있고, 이러한 인간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술이나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윌리엄이 자신의 친구인 네드가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까지 마시지 않았던 술을 마시고 리틀 빌 일당을 처리했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이 영화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리틀 빌이 마을의 치안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런 부분이 드러납니다. 리틀 빌이 당시 서부시대 관점에서는 상당히 유능한(?) 보안관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가 마을의 치안을 다루는 방식은 대단히 폭력적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의 계기가 된 창녀의 얼굴에 칼질을 한 카우보이들에 대한 처분(강자-포주-편에서 일을 처리한 점)에서부터 잉글리쉬 밥과 윌리엄 머니에 대한 폭행,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도 죽이지 않은 네드를 때려 죽였다는 점에서 이미 리틀 빌은 '정의'와는 거리가 먼 보안관입니다. 오히려 마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폭력을 쓰고 있다는 점, 이 점에서 법을 등뒤에 놓고 있을 뿐 과거의 윌리엄 머니나 무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와 부보안관들 역시 마지막에 윌리엄 머니에 의해서 처단당하게 되는 것이죠.

영화의 제목인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의 의미는 바로 여기서 옵니다.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폭력으로 무언가를 행하는 자는 그 자신을 용서할 수 없고(스스로 과거로부터 벗어나려고 지속적으로 단절을 선언하는 윌리엄 머니), 죄값을 치룰 수 밖에 없다(폭력으로 마을 평화를 지켰던 리틀 빌의 최후), 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기에 마지막 리틀 빌과 윌리엄 머니의 대화는 의미심장 합니다.

리틀 빌:I don't deserve this...to die like this. I was building the house. 
윌리엄 머니:Deserve got nothing to do with it. 

Deserve 자체에 '자격', '~할 자격이 있다'라는 의미가 있죠. 끝까지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생각한 리틀 빌이 자신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자, 윌리엄 머니가 '자격은 아무 관계가 없다'라고 하죠. 이와같이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용서받지 못한 자일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영화 자체로도 대단하지만,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서부극으로 흥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자신의 영화적 정체성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승화시켜서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렸으니까요. 그리고 또한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 표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 영화에서 드러납니다. 느릿하고 담담한 카메라 움직임과 담백한 스토리라인, 관조적인 분위기 등등 그랜 토리노나 체인즐링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만의 분위기가 여기서도 잘 드러나죠. 

결론적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는 정말 대단한 영화입니다. 서부극을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영화를 좋아한다면 꼭 한번정도 보셔도 좋을 작품입니다.

 


덧.과거와 끊임없는 단절을 선언하는 전직 무법자...어디서 들어본것 같지 않나요? 정답:레드 데드 리뎀션, 존 마스턴.

레데리를 하고 나서 영화를 본거지만, 확실한 것은 레데리의 상당히 많은 스토리 요소들이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재밌는 점은 지금 현재 보고 있는 샘 패킨파 감독의 와일드 번치도 레데리에 많은 영향을 준거 같은데, 정작 영화가 지향하는 지향점은 둘이 정 반대라는게 포인트입니다. 와일드 번치도 조만간 다루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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