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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천문학적인 돈을 주무르는 뉴욕의 최연소 거물 투자가 에릭 패커. 그의 하루는 뉴욕 도심의 초호화 리무진에서 시작 된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그에게 찾아오는 회계전문가, 투자전문가, 경제전문가, 큐레이터, 보디가드, 그리고 그의 부인은 에릭 패커가 가진 고민의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한편 세계 공황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뉴욕 시민들은 에릭 패커를 문제의 근원이라 지목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폭력의 역사 이후로 크로넨버그의 관심사는 SF 호러라는 장르를 뛰어넘었다. 폭력이 어떻게 중산층 가정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폭력의 역사), 조직폭력배의 세계와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가 만나는 그 지점에 대한 이야기(이스턴 프라미스), 융과 프로이트에 대한 이야기(데인저러스 메소드),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쳤는가(코스모폴리스) 등 크로넨버그의 폭력과 섹스에 대한 관심사와 표현방식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서 이야기와 극의 구조 사이로 세련된 형태로 숨어들기 시작한다. 영화 코스모폴리스도 그러하다. 크로넨버그는 이 영화를 마르크스에게 헌정한다 라고 밝혔고, 실제로 '세상에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문구를 인용하는 영화는 자본주의 묵시룩을 추구한다. 크로넨버그는 이 자본주의 묵시룩을 명백한 이미지 대비와 독특한 대사 센스들(물론 이는 원작 소설의 영향을 받기도 한 것이지만), 그리고 자본주의의 병자역을 아름답고 위태롭게 소화한 로버트 패틴슨의 명연기로 풀어낸다.


재밌는 점은 마진 콜(리뷰는 여기로)의 봉급 부르주아들의 현실적인 한계와 문제들, 그리고 기업이 시장을 잡아먹고 살아남는 자본주의 묵시룩과 다르게, 코스모폴리스의 자본주의 묵시룩은 뚜렷하고 분명하며 강렬한 이미지들의 연속이다. 주인공 에릭 페커가 있는 리무진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소우주다. 그리고 그를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이 리무진 안으로 들어오며, 에릭은 그의 리무진 안에서 전세계 경제를 휘젓는다. 극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이지만, 에릭 페커는 동시에 가장 자폐적인 존재이며 그의 관심사는 섹스와 자극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 리무진을 둘러싸고 시위대가 리무진을 때려부술듯이 위협하더라도, 리무진 내부의 세계는 정적과 고요가 지배하며 에릭 패커와 그의 파트너는 리무진 소파에 편히 드러누워서 술을 홀짝일 뿐이다.


영화는 복잡하고 암시적인 대사들과 방언과도 같은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본인은 이런 대사를 일일이 분석할 능력이 안된다. 다만, 영화가 지적하고 싶은 포인트는 자본주의는 미래를 담보삼아 현재를 소모함으로서 점점 더 거대해지고 있으며, 인간은 그 흐름속에서 파편화되고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쪽이 아닐까 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파편화의 최종원인인 '이윤'에 의하여 인간들은 물화되고 자폐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고 볼 수 있다.(사회학자와의 대화라던가) 그와 별개로, 영화 속에서의 대사들은 대화의 형태를 띄고는 있지만, 그 대화들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독백의 연장선상이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인물들의 시선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닌 어딘가 살짝 초점이 빛나가 있으며, 그들의 표정에서는 감정이 아닌 어딘가 영혼이 살짝 빠져나간듯한 느낌도 든다. 특히 에릭 페커와 그의 아내의 섹스 이야기는 이러한 영화의 대화 양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로버트 패틴슨의 열연이 빛난다. 트와일라잇의 성공으로 뜬 하이틴 스타 정도로만 인식되던 로버트 패틴슨은 이 인간미 없는 세계의 중심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고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이 된다. 그는 자신이 기존의 트와일라잇 영화판에서 가졌던 창백하고 우아한 이미지와 연기력을 결합하면서 자본주의의 병자로 화한다. 권태에 몸이 휘청거리는 이 자폐적인 자본주의의 병자를 로버트 패틴슨은 제대로 소화했으며, 처음 계획된대로 콜린 파렐이 케스팅되었다면 연기의 질과 별개로 패틴슨이 묘사한 병자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구현하지 못했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에릭 패커의 자폐성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통의 필요없음과 부재, 그리고 물화된 사고방식(돈으로 살 수 없는 성당을 돈으로 구입하려는 에릭 패커의 모습이라던가)은 크로넨버그 특유의 섹스와 육체에의 자극 추구로 귀결된다. 그것은 타자가 없는 세계에서 자신이 살아있고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커의 자극추구는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다. 처음에는 섹스에서, 전기충격기, 자기 파괴(그는 파산했을 때 오히려 전에 비해서 편해졌다고 이야기한다), 살인, 나중에 가서는 자해가 되며, 이러한 패커의 자극 추구는 점점 가학적이고 위태로워진다. 특히 마지막 자신의 손에 대고 총을 쏘기 직전의 패커의 평온한 표정은, 그러한 자극 자체가 없으면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병자의 모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또한 크로넨버그 특유의 폭력 묘사도 여기서 빛을 발했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구나 해결책을 부정한다. 그가 리무진을 타고 뉴욕시내를 해매게된 모티브이자, 어렸을 적부터 그를 잘 알아온 이발사 역시도 택시에 이상한 집착을 보이며 12시간 동안 택시를 타고 돌아다닌 이야기를 머리를 깎는 내내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결국 에릭 패커가 머리를 깎다말고 한밤중의 이발소를 뛰쳐나가는 것은, 그러한 추억속에서 옛날이 좋았었다는 감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 드는 베노 레빈(폴 지아매티)은 편집증적인 인간이며 성불구에(그의 성기는 배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쓰래기통 같은 공간에서 거지같이 살며, 패커와 레빈 역시 포인트가 엇나간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노 레빈이야말로 에릭 패커의 문제점과 고민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다:완벽한 계산으로 시장을 분석한 에릭 패커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짝짝이 전립선처럼 이 시장은 완벽하게 계산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가장 두려운 사실, 돈이 살아서 스스로 움직인다라는 것이며, 인간이 돈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이 통제하는 종말론적인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하지만 베노 레빈이 패커의 최고의 이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소통은 배 속으로 파고드는 성기를 보여달라는 패커의 부탁을 거절하는 베노로 축약할 수 있다. 이게 왜 소통의 실패냐면, 과거 크로넨버그 작품인 '브루드'에서는 아내와 소통하려 하다가 아내의 변이한 육체를 보고 남편이 소통이 실패함을 깨닫는 장면이 있었는데, 서로의 장애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애시당초에 패커의 장애인 전립선 짝짝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문제다)은 소통 자체가 실패하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코스모폴리스는 물론 크로넨버그의 '하이 커리어'라고는 하기 미묘한 작품이다. 크로넨버그의 장기와 묘사가 잘 살아있고, 영화의 주제의식 역시 대단하기는 하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너무나 복잡하다. 그것이 극명한 상징과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영화 러닝 타임 내내 영화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힘들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모폴리스는 관객을 흡입하는 힘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코스모폴리스가 보여주는 자본주의 묵시룩적인 이미지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영화의 마지막 베노 레빈은 패커의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네가 나를 구원해줄거라 믿었는데!'라고 절규한다. 그리고 영화는 화면이 암전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래서, 과연 베노 레빈이 방아쇠를 당겼을까? 패커는 머리에 총맞고 구원을 받았을까? 아마도 크로넨버그가 의도한 결말은 둘다 아니었을 것이다. 배 속으로 성기가 말려들어간 불능의 체제 비판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슈뢰딩거의 방아쇠에 건체 영원히 전립선이 짝짝이인 자본주의의 병자에게 머리를 겨누기만 할 것이며, 방아쇠는 영원히 당겨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자본주의라는 문제는 그렇게 순진하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바로 그 긴장관계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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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주의


일정 시점 이후로 헐리웃 블록버스터에 대한 감상은 블로그에 적지 않고 있습니다(아마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이후?) 그것은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미학이나 스토리 등등은 이제 '개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얼마나 기술적(각본, 특수효과, 연기 등등)으로 잘 만드느냐'의 문제로 넘어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게 재밌는데 왜 재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감독의 버릇이나 특성들을 큰 그림 보듯이 다루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작품을 하나의 구조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감독이나 제작진들의 특성)을 맞추기 위한 하나의 퍼즐조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물론 개별 퍼즐조각의 완성도는 다룰 수 있으나, 역시 큰 그림이 없다면 이를 이야기하기는 힘들죠. 예를 들면 맨 오브 스틸에서처럼 왜 슈퍼맨이 마지막에 그런짓을 했어야 했는가, 같은 문제는 놀란의 각본과 현재 영웅 영화가 부딪히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퍼시픽 림은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치고는 상당히, 아니 대단히 '엇나간' 작품입니다. 거대 로봇 vs 거대 괴수라는 지극히 망상적인 컨셉 하에서 만들어진 퍼시픽 림은 놀란 이후로 볼거리 보다는 서사를 강화하는 쪽으로 경향이 기우는 헐리웃 영화에게 빅엿을 날립니다. 퍼시픽 림은 너무 뻔뻔한 나머지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가 나오는걸 빼면 나머지는 클리셰로 채워놓고는 그것이 스토리인양 꾸며놓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그 '클리셰'들도 헐리웃 영화들의 클리셰들이 아닌 B급 영화에서부터 특촬물, 일본 애니메이션 등등에서 돌고 돌아서 닳아버린, 사람들 기억저편의 클리셰들의 연속입니다. 그렇기에 퍼시픽 림을 델 토로의 '덕력'과 '망상력'이 구현된 '동인지'에 비유하는 것은 정말로 올바른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나이더의 망상력에 집합체에 뭔가 거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자빠진 '동인지' 써커 펀치와 비교했을 때, 퍼시픽 림은 스스로 몸을 낮추고 클리셰 속으로 허접한 이야기를 숨김으로서 영화가 보여주는 미학에 주력합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영화는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퍼시픽 림의 미학이란, 그것은 서사와 이야기, 또는 이미지에 기반한 것이 아닌 만인의 어린시절의 경험과 망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거대괴수와 거대로봇의 대결이라는 이 유치한 망상은, 우리의 어린 시절 특촬물, 만화, 애니메이션 등등의 서브컬처를 보고 자란 대중들이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이라고 표현해도 적당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집단 무의식'이 갖는 잠재적인 수요에도 불구하고, 퍼시픽 림 이전에 이런 작품들이 잘 나오지 않은 것은, 우리가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 같은 망작(?)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서브컬처들의 미학이란, 망상력의 발현이라는 중요한 미학과 동시에 '예산과 표현의 문제'라는 한계 역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동했던 작품들의 미학이 특촬물, 만화, 애니메이션의 매체의 틀을 넘어서 헐리웃 대자본과 결합해서 영화화 되는 것은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은 어색함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델 토로는 바로 이 '미학적' 부분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했습니다. 퍼시픽 림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스펙타클함과 무게감에 초점을 맞춥니다. 요즘의 액션 장면들이 제이슨 본식의 화려하고 빠른 CQC를 지향하는데 비해서, 퍼시픽 림이 예거를 통해서 보여주는 미학이란 진중하고 느릿한 로봇과 괴수들의 고전적 아름다움입니다. 특촬물(일본, 미국 양측 모두를 통틀어서)의 문법을 오마주한것으로 보여지는 퍼시픽 림의 액션 장면들은 대자본과 서브컬처에 대한 사랑이 결합해서 이룩할 수 있는 놀라운 시너지입니다. 걸을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며, 괴수들과 프로레슬링 하듯이 치고받는 예거들, 그리고 전투할 때 스피커에서 공기의 진동뿐만 아니라 바람마저 느껴질 정도로(실제로 바람이 불었을지도?) 울려퍼지는 파열음과 괴수의 포효음은 우리가 극장에서 보고자 했던 거대로봇의 로망을 그대로 구현합니다. 그렇기에 퍼시픽 림의 미학이란 일종의 리비도의 실현이자 마약적 쾌락이며, 그건 우리가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숨겨진 욕망의 해방이자 그것이 일궈내는 카타르시스이자 오르가즘 그 자체입니다. 일반적인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렸을 적에 서브컬처를 보면서 자란 사람들에게 퍼시픽 림은 일종의 신앙간증이며 집단적 희열을 보장합니다.


하지만 스토리에 있어서 퍼시픽 림이 보여주는 부분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퍼시픽 림의 스토리 라인은 유치하다 못해서 최악의 수준을 달립니다. 케릭터는 묘사되기도 전에 휙휙 변하며, 갈등은 무의미하게 시작되었다가 끝나는 등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올해 최악의 시나리오의 굴레를 뒤집어 씌워도 할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델 토로는 그 끔찍한 스토리를 서브컬처 장르의 클리셰를 덧씌움으로서 스토리를 로봇의 액션을 위한 설명으로서 최소한의 인과관계로서 탈바꿈 시키며, 이야기 자체를 한없이 가볍고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트라우마를 가진 퇴물 주인공 파일럿과 가족을 괴수에게 잃은 히로인, 한번만 더 예거를 타면 죽는 전설적인 예거 파일럿이자 사령관, 너드 과학자들 등등 20년이라는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전형적인 케릭터들과 막 만난 주인공과 히로인이 궁합이 잘맞는다던가, 구식 아날로그 로봇이 최신 '디지털' 로봇이 못하는 일을 하는 등등 영화의 스토리는 새롭지 않은 수준을 넘어서 거의 네크로맨싱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 의미없는 '스토리'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향수를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는 서브컬처에서조차도 버림받은 클리셰들의 집합체이자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지배하는 독특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델 토로는 클리셰 사이의 인과관계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이 클리셰에서 저 클리셰로 갈아타는 매끄러움을 보여주는데, 이 덕분에 영화는 하나의 클리셰 박물관이자 관객들에게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자뷰의 덩어리인 것입니다. 물론 영화는 그 레퍼런스에 대해서 확실한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퍼시픽 림의 드리프트 설정으로부터 에반게리온을 느꼈겠지만, 동시에 델 토로는 에반게리온을 직접 본적은 없다고 고백을 했죠. 이는 클리셰들이 서로 돌고 돌아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과 유사합니다. 어떤 것이 오마주이고 레퍼런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반복되는 클리셰 덩어리들이 영화 상에서 너무나 뻔뻔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그 고전적인 서브컬처 미학의 재해석과 결부되면서 영화는 정말로 뻔뻔한(스토리 따위는 잊어버리고 이걸 보라고! 내 거대한 예거와 카이주를 보라고!) 경지에 도달합니다.


퍼시픽 림은, 헐리웃 영화라기 보다는 서브컬처 동인지를 헐리웃 영화 산업의 자금력과 시스템을 이용해서 구현한 물건입니다. 이런 작품들은 잘못했다간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죠. 하지만 델 토로는 그런 어설픈 함정에 빠지지 않고도 훌륭하게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퍼시픽 림의 스토리 완성도는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스토리의 완성도로부터 눈돌릴 수 있는 훌륭한 속임수를 부렸고, 이런것들에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속임수에 껌뻑 속아넘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로봇 영화나 괴수영화를 즐기셨다면 꼭 보시길. 후회는 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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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지극히 사적인 감상입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살면서 무수히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렇기에 사람을 한번의 실수로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살면서 선의라도 실수든 뭐든 간에 해서는 절대 안되는 짓들이 있다'는 걸 잘 안다. 고의가 전혀 없는 과실치사처럼 '죽일 생각은 아니지만 실수로 손이 삐끗해서 사람을 죽여버렸어요 데헷★'이라는 변명은 인정될 수 없다는걸,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원더풀 데이즈는 바로 그 살면서 하면 안되는 '실수'에 들어간다. 


사실, 원더풀 데이즈는 객관적으로도 쓰레기지만, 그래도 해어나올 수 없는 나락과 무저갱 속에 갇혀버린 인류의 죄악 옆자리에 놓일만한 물건은 아니다. 1.5배속으로 돌려봤음에도 불구하고 보다가 눈알을 스스로 파내버릴 뻔한 맨데이트나, 자살하지 말자를 외치면서 보는 사람을 자살충동이 들게 만들었던 4요일이라던가, TMA 협찬을 받아서 만든 교복 AV였던 블러드 영화판이나, 지금도 쿠소 영화 원탑으로 회자되는 디워 등등...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병신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산업화된 엔터테인먼트의 평균화와 균질화에 대한 인류의 승리, 휴머니즘의 극치다 라고 이야기할만한 물건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모든걸 돈주고 본 본인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원더풀 데이즈는 그 차고 넘치는 악명에도 불구하고, 극 내에서 이미지들은 봐줄만 했고...또 음악도 나쁘지 않았고...에 그리고 또....뭐 하여간 비주얼적인 측면만 본다면 원데는 상당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만약 이게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서사의 중요성이 낮은 뮤직비디오였다던가, 아니면 정지화면+약간의 움직이는 영상으로 구성된 단순한 일러스트 모음 영상(+음악은 배경으로 깔아주고)같은 거였다면 이정도로 끔찍하지 않을 것이다(아마 트랜스포머 2편 급 정도로 끔찍했겠지...뭐랄까 그냥 지루한 정도?). 원데의 병신성은 전적으로 '스토리와 서사'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감독은 애니메이션, 포스트 아포칼립스 등등의 장르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 예의, 인간성 등등 따위는 걷어차버리고 지꼴리는것만 막 쑤셔쳐넣어버렸다. 게다가 더 용서할 수 없는 사실은, 프리프로덕션까지 합쳐서 '7년'(1년도 아니고 7년, 무려 7년!)의 시간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106억원을 쏟아부은 희대의 프로젝트였다는 것이었다. 이게 어느정도냐면 그 비슷한 시기 개봉한 실미도가 105억원의 제작비로 1000만명의 관객을 모으던 시절이었다.(관련 링크 1, 관련링크 2


원데의 장르적 특성은 기본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기반을 두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대충 망한 세상이지만, 인류는 오염물질로 에너지를 만들어서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인류는 그 에너지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에코반이라는 도시와 에코반에 들어가지 못한 하층민들의 마을 마르에 정착해서 삶을 지속하나, 지구의 자정작용으로 인해서 환경이 깨끗해지자 에코반의 동력원인 오염물질이 모자르게 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에코반의 지도자들은 마르를 불태워서 오염물질을 확보하려 하고, 주인공인 수하는 원래 '푸른 하늘'을 되찾기 위해서 에코반의 인간들과 싸우게 된다.


일단, 이정도까지만 놓고 본다면, 원더풀 데이즈는 그냥저냥 평범한 '환경 SF'일지도 모른다:적당히 환경오염의 위험을 설파하고 환경을 지키자, 중얼중얼중얼...하지만 문제는 원데의 세계에서 환경 오염 문제란 '물 색깔은 구정물 색깔, 하늘은 똥색' 이정도의 테제에 불과하다. 어째 22세기의 대충 망한 인류들은 그렇게까지 힘든 삶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안드는게, 푸줏간에는 고기가 그득하며 똥물에서 낚시도 하고, 술도 마시고 댄서에게 추파도 보내는 등등 그냥 그럭저럭 살고있다. 그렇기에 원데의 환경오염의 문제의식은 인류 생존의 절박함 혹은 지구에 대한 윤리의식의 문제도 아니고, 수하의 도저히 이해안될 정도의 파란 하늘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미학적인' 문제의식 수준 밖에 안된다. 


그렇다면 이 극을 지배하고 있는 갈등 구조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차적으로는 에코반-마르라는 지배-피지배 간의 계급 투쟁의 문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마르를 불태우는 것은 극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 이로 인해서 에코반과 마르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배-피지배의 갈등구조로도 보기에는 극의 서사는 너무 빈약하다. 에코반은 마르를 불태운다고는 하지만 극의 끝까지 간만보고 결단력이나 실행력이 전혀 없는 허접한 집단이며, 마르의 주민들은 트럭이나 훔치고 다니며 동료가 죽으니까 비장하게 에코반을 친다-훗 그래야 우리 대장이지! 이러는 3류 허접 양아치들에 불과하다. 극의 에코반-마르의 갈등은 전혀 심각하거나 생존의 문제가 아닌, 동네 양아치들의 가오잡기의 연장선상(저새끼가 우리 나와바리 건드렸어!-조져!)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것도 억지로 쥐어짜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준거다. 우리나라 더빙 버전에서는 이 둘의 갈등을 '에코반-마르'라는 단어에 옭아매서 전개를 하는데(마치 팔씨으 르씨으 코쿤으 팔씨으 르씨으 파판 13을 보는듯하다), 이 덕분에 안그래도 동네 양아치들 가오 잡기 싸움으로 격하시켜버린다. 재밌는 점은 본인이 감상한 영어 더빙판은 이들의 관계를 피지배-지배 관계의 계급 투쟁처럼 묘사하기 위해서 단어 선정을 마르가 아닌 일꾼, 워커 같은 개념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노력과 시도는 가상하나, 질펀하게 싸재낀 설사똥 위에 신문지 한장 덮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극이 주목하고 있는 갈등 관계는 무엇인가? 극은 수하-제이-시몬이라는 삼각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한때 친구였으나 제이가 수하를 사랑하는걸 눈치챈 시몬이 수하를 에코반 옥상에서 밀어버림으로서 시몬은 제이를 독차지하게 된다(이게 대충 10살 전후의 일이었던거 같으니 정말 앞날이 창창한 꼬꼬마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먼훗날 시몬과 제이는 살아있는 수하를 만나게 되고, 제이가 다시 수하에게 끌리는 것을 보고 시몬은 다시 열폭하게 되는데...


어디서 많이 본 갈등 구도라고? 그렇다. 이들의 갈등 구조는 매일 우리네 가정의 안방과 거실을 지배하는 막장드라마의 전형적인 연애 삼각구도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드라마에 비교하는 것은 막장드라마에게 크나큰 결례이며 실례다. TV가 안방과 거실을 차지한 후로 근 수십년 동안, 드라마들은 우리네 부모님들과 평범한 대중의 '버튼'을 대놓고 누르는 방법을 축적하였으며 그 수십년 동안 쌓인 클리셰들과 연출, 노하우 등등을 가볍게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교한다면 원더풀 데이즈의 드라마는 씨발 아주...차라리 아내의 유혹이 반지의 제왕급의 대서사시로 보일정도로 허접함을 자랑한다. 어째서 제이는 수하에게 끌리는가, 그리고 파란하늘 성애자 수하는 제이를 거부하는척 하면서 왜 받아주는가, 마지막으로 시몬은 제이를 수하에게 NTR 당할 동안 도대체 뭘 했는가(실수로 꼬마애 한명 쏘고 맨붕하는 병신새끼...) 등등 이야기는 클리셰에 맞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클리셰조차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그래도 그나마 감상자가 의자나 손가락을 씹어먹지 않도록, 원데는 '미려한 그림'라는 최소한의 배려를 해준다. 원데는 그림의 구도로만 봤을 때는 아름다운(특히 엔딩 후에 홀로 날아다니는 글라이더 장면이라던가) 장면들이 생각외로 있으며, 센스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원데는 그러한 미학에 집착한 나머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 특성마저 무시한다. 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그림들의 향연이다. 무슨 낙동강 오리알 마냥 묘하게 둥둥 떠다니는 정지 화상들의 연속을 보기 위해서 관객들은 돈을 내지 않는다. 원데는 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신성모독이자 수많은 선배 애니메이터들에게 빅엿을 날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데의 문제는 미니어처를 이용한 독특한 촬영 방식 등의 기법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에 애니메이션을 무슨 그림 감상용 스크린 세이버로 생각하고 속도감도 뭣도 없는 밋밋한 영상의 연속으로 땜빵해버린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욕을 오라지게 처먹어야 하는 것이다. 덕분에 감상자는 손가락을 씹어먹는 대신에 지루함과 싸우면서 자기 뇌세포를 씹어먹어야 하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도대체 어떤 망할 놈의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은 미학의 과잉으로 가득차있다. 애시당초에 수하가 에코반으로부터 파란 하늘을 되찾겠다는 것은 마르의 해방이 목적도 아니고, 인류가 환경오염에 대해서 응당 책임을 지거나 지배계급의 폭정에 항거하는 필사의 발악이 아닌 그저 '파란 하늘' 그 자체를 되찾으려 한다는 참으로 고상한 목적의식은 원데의 문제점을 전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작자들은 '일단 멋있으니까 다 때려넣어볼까'라는 느낌의 물건들을 막 던지며, 극후반부 에코반의 동력시설의 경우 반중력 장치가 둥둥 떠다니는 초 하이테크 SF적인 물건을 사용하는 모습에서 절정을 찍는다. 도대체 인류는 22세기에 반중력 장치에 원자 분해까지 일으키는 물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찌질하게 마을에 불지르는걸로 쳐싸우고 있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많이 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최악의 사실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실들 보다 더 빡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프로젝트가 무려 7년 동안 106억원의 예산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산업재해다. '산업'이라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대중문화 제작에 있어서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건지 시대의 미스터리다. 물론 엎었다가 다시 만들었다가 엎었다가 다시 만들었다가를 수없이 반복하면 가능하리라는 막연한 추측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욱 분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원데 하나의 실패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 나올 때까지 근 8년 동안 투자자들이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 하나, 그리고 투자자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산업 전반에 빅엿을 날린, 그야말로 더이상 어떻게 쉴드를 쳐줄 수 없는 끔찍한 경지에까지 도달하고 만다.


결론을 내리자면 원데는 그야말로...산업재해이다. 극의 완성도와 이런저런 문제들을 차치하더라도, 과실로 8년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을 박살냈다는 시점에서 이미 이건 원데 하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는 해도 용서 할 수 있는 실수가 있지만 거기에는 '과실치사'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거 하나만으로 원데는 까이고 까이고 또 까여서,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때까지 짓밟아야 한다. 더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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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가정적이고 친절한 남자 ‘톰’(비고 모텐슨)은 어느 날 자신의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를 죽이고 사람을 구한 일로 마을의 영웅이 되어 매스컴에 대서특필된다. 그러나 며칠 후, 거대 갱단의 두목 포가티(에드 해리스)가 찾아와 그가 ‘톰’이 아닌 자신의 적 ‘킬러 조이’라며 가족을 위협한다.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와 아이들 역시 ‘톰’에게서 문득문득 보이는 ‘조이’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며 점점 그를 멀리하고 마침내 ‘포가티’는 ‘톰’의 집에 총을 들고 들이 닥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폭력의 역사는 테이크 쉘터(리뷰는 여기로)의 정반대이다. 외부의 위협으로 피하고 숨기 위한 방공호, 그리고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총, 이 두가지의 독특한(동시에 미국적인) 문화는 위협에 대처하는 미국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중산층의 본질적인 위협과 그에 대한 공황, 그리고 가족이 그 공황을 공유하게 되는 파멸적인 이야기를 다룬 테이크 쉘터와는 달리, 폭력의 역사는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을 침범하는 폭력적인 위협에 폭력적으로 대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비디오드롬, 데드 링어 등등의 B급 호러와 폭력의 대가인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이번 영화 폭력의 역사를 통해서 그의 전공인 SF와 공포 장르를 뛰어넘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장기(섹스와 폭력)를 SF나 호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훌륭하게 구현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물론 중간에 스파이더나 크레쉬 같은 물건도 있었지만)


폭력의 역사는 중산층 내부에 숨겨져 있는 '폭력성'에 주목한다. 평범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가족들도 외부의 폭력적인 '위협'이 도래하자 그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영화는 이러한 중산층 가족의 폭력성이 폭력적 상황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인 톰이라는 인물의 내력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이'라는 존재는 톰이 숨기고 싶은 그의 폭력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극은 톰에게 조이가 될 것을 강요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처음 2인조 무장강도가 톰의 식당에 들어왔을때부터, 마지막 자신의 형이자 모든 일의 원흉과 마주하는 장면까지 영화는 톰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머리통을 박살내야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을 강요하고, 톰은 그럴때마다 주저없이 조이로 돌아간다.


영화는 '톰'이라는 완벽한 중산층 가정의 가장 속에 숨어있는 '조이'라는 냉혹한 괴물을 독특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명감독이나 창작자들이 행복한 중산층 가정이라는 관념을 미국식 바퀴벌레와 동치시키거나 그보다 더 싫어해서 끊임없이 괴롭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크로넨버그가 '폭력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가족과 그 속에 숨겨진 폭력성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별된다. 이는 비고 모텐슨의 놀라운 연기력 덕분인데, 그는 톰과 조이를 오가면서 마치 파충류 같은 '번뜩임'만으로 두 케릭터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감정의 폭발, 대사, 그것을 드러내는 몸짓 등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현방법이 아닌 비고 모텐슨이 순간순간 보여주는 눈빛의 변화에서 드러난다. 방금전까지 톰처럼 보였던 인간이 순간의 눈빛의 번뜩임만으로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혹자는 조이를 암시하는 톰의 눈빛보다, 마치 멀쩡한 가장인 척하는 톰의 연기가 더 소름끼치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였다) 연기를 한 비고 모텐슨과 크로넨버그의 연출력은 소름끼칠정도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조이'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버지이자, 남편인 이 남자가 과연 내가 알던 그 사람(톰)인가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의심과 두려움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포가티 일당을 죽이고 난뒤에는 확고한 진실이 되며, 가족들은 톰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결국 조이라는 존재,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는 톰에게 역함을 느끼고 구토하는 에디나 조직폭력배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아들이 아버지이게 반발하는 장면 등등은 이러한 폭력의 내력이 가족에게 옮아가서 가족의 관계를 변질시키고 박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톰(또는 조이)을 이중인격자라고 이야기하는 아내의 비난은 전혀 타당하지 않는데, 왜냐면 적어도 조이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처럼 톰 역시도 실재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이 중산층 가장의 실존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들은 역설적이게도 조이로 어쩔 수 없이 화하고 난 뒤의 톰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거칠고 잔혹한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뒤, 이 난장판을 돌아보면서 회의감과 떨림을 보여주는 눈빛 등등에서 영화는 그가 선한 가장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이 아닌 복잡다단한 인물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이렇게 폭력이라는 존재가 어떤식으로 가정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과정은 크로넨버그 특유의 '섹스에 대한 미학'이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크로넨버그를 가리켜서 '뭘 찍어도 내게 있어서 크로넨버그는 섹스의 대가'이라는 칭찬을 하였으며, 초기작들에서도 신체에 이물질을 삽입하고 그 이물질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비디오드롬-미디어, 스캐너스-정신, 크레쉬-자동차 충돌 성애, 데드 링어-쌍둥이 등등...)에 초점을 맞추었고, 폭력의 역사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영화 내의 폭력묘사들은 폭력이 일어나기 전의 긴장감(전희)-폭력의 발생(삽입)-폭력 상황이 끝나고 난 뒤의 허탈함과 그 난장판을 돌아봄(현자 타임) 이라는 지극히 '섹스'스러움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화에 있어서 섹스 그 자체도 중요한 '화두'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시퀸스 중에 에디와 톰이 아이들을 보내놓고 섹스를 하는 장면은 같이 청춘을 보내지 못했던 부부가 추억을 만들려는 귀여운 시도이며, 애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부부 관계가 서로에 대한 공감에 기초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톰이 조이라는 과거를 숨기고 있다가 이것이 가족에게 발각되고 난 뒤, 에디와 톰이 계단참에서 벌이는 섹스씬은 이전의 섹스씬과는 다르다.(강간 씬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영상의 박력은 둘째치더라도 각본가는 강간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것은 기묘한 긴장관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섹스가 끝난 뒤의 에디와 톰이 서로 교환하는 눈빛, 그리고 에디가 톰을 뺨을 어루만지는 부분은 과연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그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몸으로 벌이는 '대화'인 것이다.(어떤분 께서는 에디가 주도하는 정사 라고는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좀 긴가민가하다...하여간) 하지만 필사적인 대화에도 불구하고, 에디가 톰에게서 발견한 것은 알 수 없음이며, 에디가 톰을 밀쳐냄으로서  이들의 관계는 공감이 아닌 알수없는 관계로 변화했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변해버린 가족을 위해서 톰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원인(자신의 형)을 근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가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에게 돌아왔을 때, 영화가 보여주는 광경은 화목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시퀸스에서 보여주는 가족은 폭력과 진실으로 인해 영원히 과거의 행복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는 변해버리고 무너지기 직전이다. 이 마지막 시퀸스야말로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한 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가족이 느끼는 그 무거움과 더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느끼는 피로감과 괴물이 숨어있는 가장에 대한 공포감 등등이 한데 뒤섞인 이 장면은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연하다. 하지만 막내딸이 아버지를 위해서 그릇을 내주고 가장은 다시 식탁에 합류한다. 각본가는 이 마지막 장면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There is hope.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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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악질 범죄자이자 영국 역사상 최장기 복역수인 ‘찰스 브론슨’의 실화를 다룬 영화. 영국 개봉 당시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브론슨은 1974년 강도를 시작으로 수많은 폭력과 범죄행위를 저질러 현재 35년째 수감 중이다. 실제로 수감 중 독특한 예술 활동으로 주목을 받기도 한 브론슨 역을 맡아 폭넓은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톰 하디의 재능이 돋보인다.(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소갯글)


미쉘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이런 논지의 이야기를 했었던걸로 기억한다:국가가 과격한 신체의 손괴를 유발하는 형벌 대신에 교화와 수감형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바는 국가의 신체의 통제가 국가 권력의 과시에서 보이지 않는 통제와 공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푸코의 명제와 이 영화를 21세기의 시계태엽 오랜지(제도를 통해 인간을 길들이는 것의 폭력성, 자세한 내용은 모두의 친구 엔하위키를 참조하시라)에 비유했던 누군가의 평가를 결합하면 장기수 브론슨의 고백의 미학이 완성된다. 장기수 브론슨의 고백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위대성을 발견한 한 야만인의 이야기며, 그 야만인에게 열광하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의 미학은 니콜라스 윈딩 레픈 특유의 영상미와 과대망상증 환자이자 제도적 억압에 끝없이 헤딩하는 야만인을 열연한 톰 하디를 통해 위대하고 장엄하게, 그리고 동시에 유치하게 완성되었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브론슨의 독백(그리고 이를 듣는 익명의 관객들)과 그의 소명이 다름아닌 '감옥'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초반의 선언은 영화의 미학적 전제를 제시한다. 왜 감옥인가? 감옥은 아무곳도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감옥에서 무언가를 이룩할 수 없다. 감옥은 자유를 억압하는 공간이며, 범죄자들을 재사회화시켜서 사회에 맞는 인간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공간에 불과하다. 감옥은 그 어느곳도 아니다. 하지만, 브론슨은 감옥을 호텔방에 비유하고 감옥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고 토로한다. 이러한 브론슨의 별난 고백은 앞서 이야기한 푸코의 명제를 전제로 깔고 해석을 해야한다:즉, 감옥은 범죄자들에 대한 국가와 제도의 숨겨진 억압이 실제로 실현되는 곳이다.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감옥은 국가와 제도의 억압이 실제적으로, 그리고 유이하게(이는 후술할 정신병원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낸다. 그렇기에 감옥이야말로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야만인이 사회에 온몸을 던져 저항할 수 있는 실질적인 최후이자 최초의 전초지, 파이널 프론티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브론슨이 발견한 자신의 소명은 이 사회라는 폭력에 실제적인 폭력으로 저항한다라는 것이다. 재사회화를 위한 직업교육에 대해서 꺼지라고 대답하는 그의 모습과 그를 제지하는 간수에게 주먹을 날리는 그의 모습은 이러한 영화의 주제의식을(혹은 브론슨 스스로가 발견한 소명의식)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상당히 즐긴것 같다. 무장강도 7년 복역이 26년으로 뻥튀기 된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제도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정신이 이상하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브론슨은 멀쩡하며(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자신을 끝없이 온순한 양(사고조차 불가능한)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잭 니콜슨이 둥지 위로 날아간 뻐꾸기에서 감옥을 탈출해서 정신병원으로 왔다면, 브론슨은 역으로 정신병원에서 탈출해서 자신이 투쟁할 수 있는 감옥으로 탈출하길 꿈꾼다. 정신병원의 문제의식은 미친 사람을 치유하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게 해서 사회에 맞게 길들이는 교묘한 폭력의 공간이며, 이는 브론슨이 발견한 자신의 재능(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는 그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살인을 시도한다. 물론 실패로 끝나지만.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다른 정신병원으로 이감되었을 때, 거기서 탈출해서 교도소 지붕을 오르는 기행을 벌여서 가석방을 받는데 성공을 한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찰스 브론슨이라는 케릭터를 제도에 저항하는 '성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의 정신세계를 대단히 '유치'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그려낸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만 이를 억누르지 않고 브론슨을 두둔하는 부모의 모습이나, 가석방 후 어렸을 때 자신이 잤던 침대에 집착하는 브론슨의 모습, 그리고 그렇게 폭력적인 인간이 여자에 대해서 숙맥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당신보다 덩치가 큰 사람을 흥분시키면 안돼) 등을 통해서 브론슨이 갖고 있는 체제에 대한 저항의 소명의식이 다소 유치한 10대의 반항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그가 대단히 폭력적이지만 '순수'하다는 인상을 지속적으로 심어준다. 교도소 사서를 납치하고는 고작 하는 짓은 간수와 몸싸움을 벌인다는 점이나, 자신을 차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여성을 위해서 반지를 선물하기 위해 가석방 중임에도 보석점을 터는 등등을 통해 드러나는 브론슨의 '어린이' 같은 순수함을 강조함으로서 이 '시대의 야만인'을 기존의 마초나 음험한 야만인들의 이미지와 다른 독특한 케릭터로 승화시킨다.


결국 반지를 훔치고 다시 감옥에 돌아온 브론슨은 자신의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그림을 배우게 된다. 예술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합법적이고도 용인된 방법으로 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로서, 어찌보면 브론슨이 예술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교도소장에 의해서 제지되고 그의 예술은 꺽이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그가 잘하는 짓, 다시끔 간수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저항을 시도한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 온몸에 흑칠을 하고 간수들과 주먹다짐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미학이자 브론슨의 소명의식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찰스 브론슨 역을 맡은 톰 하디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하며, 감독 윈딩 레픈의 영상은 인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특히 톰 하디의 열연은 그의 커리어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론슨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야만인의 이미지와 단지 주먹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폭발할 것 같은 아우라를 발산하는 그의 연기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맛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이 영화는 브론슨이 익명의 관객들을 향해서 이야기를 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도대체 이 관객들은 누구인가? 그의 야만적인 반항에 열광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 익명의 관객들은 바로 우리다. 이 어린아이 같은 야만인이 교도소 콘크리트 바닥에 두개골 경도 테스트를 할 떄마다 환호성을 지르는 관객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구성된 현대 사회에 숨이 턱턱 막히는 질식 속에서 해방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날 세상이 당신을 압박해서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가 찾아오면, 영국의 장기수 찰스 브론슨을 기억해달라. 알몸에 버터칠을 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는 복역수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간수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한 야만인을. 세상의 실제적 억압에 폭력으로,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이 유치한 야만인을.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좀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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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미군 포로로 잡힌 무하마드(끝까지 이름이 나오지도 않고 대사도 없으나, 이는 스탭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는 포로 이송 중에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탈출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익숙한 중동의 황무지가 아닌 눈으로 뒤덮인 북유럽의 낯선 자연환경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를 쫒아오는 미군들을 피해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땅을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에센셜 킬링은 문명과 문명의 충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포로로 잡힌 아랍인이 눈을 떴더니 이역만리 설원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다소 초현실적인 이야기의 구도는 스콜리모프스키 감독 본인이 조국 폴란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뉴스(폴란드에 미군 기지가 있는데 거기서 아랍인 포로들을 고문하고 있었다)를 보고 얻은 영감에 기초하고 있다. 이역만리 타국 낯선 환경과 적들에게 둘러싸여서 홀로 탈출을 감행한다는 액션 장르에서 자주 써먹는 클리셰를 영화는 주인공이 겪는 고독과 소외에 대한 실존주의적인 스릴러로 바꿔버렸으며, 또한 명백하면서도 압도적인 구도와 이미지(아랍인과 유럽의 낯선 세계, 그리고 소리)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아랍-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의 충돌을 겨울 폴란드의 숲(실제로 영화의 배경은 폴란드이다. 영화에는 그 어떠한 설명도 안나오지만)이라는 평범한 동구 유럽의 자연 경관을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명백한 환경과 주인공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눈덮인 설원과 숲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고독감, 그리고 위협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 주인공이 한겨울의 폴란드로 끌려가는가? 영화는 주인공이 처하는 상황에 대해서 한마디의 설명도 하지 않음으로서 대립구도를 만드는 것이 아닌 던져지는 상황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관객들은 주인공이 차에서 튕겨져나와서 눈밭에 내던져졌을 때 느꼈던 충격과 공포를 같이 느끼게 된다. 


이러한 환경의 압박, 쫒아오는 미군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낯선 환경들이 합쳐져서 만들어내는 영화의 구도는 전적으로 아랍 세계가 서구 문명에 대해서 느끼는 압박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압박감은 주인공 역을 맡은 빈센트 갈로의 연기에 의해서 완성이 된다. 빈센트 갈로의 연기는 불쌍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근 10년동안 이 세상에서 불쌍한 케릭터 TOP 10을 꼽을 때 꼭 집어넣어야 할거 같은 의무감 마저 들게 만드는 마스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헌트에서 메즈 미켈슨이 관객에게 호소하는 사슴의 눈망울 보여준것과 반대로, 빈센트 갈로의 연기는 전적으로 낯선 환경과 절박한 상황에서 느끼는 압박감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대사 '한 마디'도 없이 신음 소리와 다급함, 피곤함, 굶주림의 다양한 원초적인 고뇌를 연기와 숨소리로 구현하는 빈센트 갈로의 연기는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대립구도의 원인을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상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리의 형태로 구현된다. 초반의 이명 현상으로 심문하는 미군의 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점이나, 폴란드 어-영어-아랍어가 모두 존재하지만 서로서로를 향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대사를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점과 중저음 또는 굉음에 가까운 BGM을 사용하여 주인공의 다급함, 절망감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 있어서 주인공이 살인을 하는 3번의 살인 장면은 모두 소리라는 표현이 배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제로 사용되며 주인공이 느끼는 서구 문명에 대한 압박감과 소통불가능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 군견의 울부짖음, 벌목 현장에서 엔진톱들이 낸는 굉음) 재밌는 점은 아랍 문명의 세계관을 잠든 주인공의 꿈속에서 낭송되는 꾸란의 형태로 구현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꾸란에 대한 이미지와 서구 문명에 대한 적대감의 근원적인 모티브를 어렴풋하게 제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성스러운 모티브와 반대로 살인을 할 때 주인공이 보여주는 처연하고 불쌍한 모습은 결과적으로 그 역시 그러한 이슬람의 모티브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강렬한 소리의 이미지가 주요한 모티브로 제시되는 영화의 세계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대안은 '언어와 소리가 필요없어도 소통할 수 있는 침묵의 세계'이다. 주인공 스스로도 대사 한마디 없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그를 보듬어주는 존재가 '귀머거리면서 벙어리'라고 규정함으로서, 영화는 자신의 문제 의식에 대해서 기묘한 미학적 대안을 내놓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와 소리로 소통할 수 없는 세계에 있어서, 정상적인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변두리 존재들의 동류의식, 동질감 혹은 고통에 대한 근원적인 공감을 통해서 소통의 가능성을 언뜻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이 벙어리 여인이 죽어가는 주인공을 백마에 태워보내는 일종의 장례의식을 치룸으로서 영화는 이 소통할 수 없는 세계에 있어서 유일하게 남은 침묵의 휴머니즘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백마를 타고 선혈을 토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에센셜 킬링은 초현실주의 영화라고 보기에는 현실적인 영화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영화라고 보기에는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이미지와 빈센트 갈로의 명연기로 그 어디에도 붕뜨는 애매한 이미지 영화가 아닌, 문제의 핵심(두 세계의 소통불응)에 대해 강력하게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덧.재밌는 점은 영화 케스팅에 있어서 빈센트 갈로는 공화당 지지자, 벙어리 여인으로 나온 엠마뉴얼 자이그너는 사르코지 지지자, 심지어 영화에서 이스라엘 출신 유대인까지 기용되는 등 영화의 메세지와 성향과 정반대라 할 수 있는, 노리고 한 독특한 캐스팅이라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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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냉혈하지만 뜨거운 남자 킬러조와 한 가족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 생명보험금을 위해 엄마의 죽음을 바라는 가족.  엄마의 죽음을 위해 돈 대신 담보로 잡힌 매혹적인 여동생.  그리고 매혹적인 여동생을 위해 살인을 청부 받고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킬러조까지. 지금부터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를 계속 인용하고 있지만, 사실 네이버 영화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고, 인용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거 시놉시스 정리하는 사람은 1)시놉시스 쓰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2)영화에 대한 별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 이렇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듯 하다. 연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킬러 조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가족에 이방인이 끼고, 그 이방인으로 인해서 가족이 겪는 괴이한 체험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영화와 다르게 킬러 조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이입할 수 없는 인간 쓰레기 군상들의 이야기이며 자업자득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킬러 조는 감독 윌리엄 프레드킨이 자신이 감독한 엑소시스트 이후로 오랜만에 높은 평가를 들은 작품인데, 여러 부분에 있어서 킬러 조와 엑소시스트는 묘한 대칭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킬러 조의 인물군상들은 도저히 어떻게든 쉴드를 쳐줄 수 없는 쓰래기들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크리스가 자기 아버지 안셀과 함께 킬러 조를 고용해서 자기 엄마이자 전처를 어떻게 죽이고 보험금을 타먹을지 궁리하면서 시작하는데 이 근친살해라는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이 도입부의 충격적일 정도로 부드러운 전개는 가족들의 상황이 얼마나 막장에 다달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생각없고 무능력하며 저능아처럼 보이는 가장 안셀, 자기 자식들 앞에서 알몸으로 다니면서 수치심 하나 없고 뻔뻔하게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는 샤를라, 정신병을 앓고 있는것처럼 극과 극을 오가는 도티, 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도티를 향한 근친상간에 빠져있는 크리스까지 이들 가족들은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장의 극치를 달리는 쓰래기들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초점은 이방인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인해서 원래 와해되기 일보직전이었던 가족이 어떻게 완벽하게 박살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여기에 이방인, 킬러 조가 등장을 한다. 그는 경찰이며 부업으로 살인청부업을 하는 프로 킬러인데,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프로페셔널한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들과 다르게 그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느글느글하고 역겨운, 기름낀 남부 텍사스 마초쪽에 가깝다. 하지만 킬러 조는 일반적인 마초의 음험함,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관음증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행자이자 가족이 쳐부숴야 할 위협이라기 보다는 이 시궁창 같은 가족 사이에 위에 자연스럽게 얹힌 기름 같은 이물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매튜 매커니히의 이 겉돌지만 자연스럽게 시궁창을 더럽히는 지저분한 케릭터의 연기는 절정에 달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가 도티를 탐하고 범하는 장면은 성적인 긴장관계 보다는 기름이 넘쳐흘러서 느껴지는 역함만이 남았다.


영화는 진부한 클리셰인 '계획대로 되는 일은 이세상에 없다. 특히 그게 영화면 더더욱'라는 명제를 그대로 따라간다. 보험금은 날아갔으며, 킬러 조는 자신의 담보(도티)의 소유권을 요구한다. 충격적인 닭다리 장면에서부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의 가장의 흉내를 내는 조의 모습은 영화의 깔려있는 기저구조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내가 이 가족을 지배한다고 선언하는 조는 이 막장 가족에게 있어서 가장, 아니 알파-메일이자 우두머리 수컷으로 군림한다. 재밌는 점은 그 바로 다음 장면인 식사 장면에서 조는 마치 자신이 가장인 듯 행동하면서 '누가 기도를 올릴까?'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며, 크리스를 제외한 가족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에 화답한다. 이 장면에서 보통이면 느낄 수 있는 인물들 간의 폭력적인 긴장관계(충격적인 닭다리 장면이 지나간 다음인데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마치 힘쌘 우두머리 수컷에게 복종하는 비참한 하이에나들(샤를라와 안셀)의 동물적인 굴복감이 장면 전반에 깔려 있으며, 그 와중에 조를 노려보는 크리스의 눈빛에서는 암컷(도티)을 두고 경쟁하는 젊은 머저리 수컷의 동물의 느낌을 드러냈다. 이와같이 전통적인 미국 가족 식사와 기도를 인간 이하의 짐승들의 인간인척 하는 인외마경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 킬러 조의 클라이맥스는 멋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킬러 조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감독의 호러 명작 엑소시스트의 대척점에 서있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엑소시스트는 가정 내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신부(Father)가 들어오는 형태였다면, 킬러 조는 그와 반대로 문제를 드러내고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 외부에서 문제가 가족내로 기어들어오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연극이 원작이기 때문에 감독이 철저하게 100% 의도했다고 보기는 힘드나, 가족의 회복을 암시하는 엔딩으로 끝냈던 엑소시스트와 다르게 가족이 완벽하게 파국을 맞이하는 킬러 조의 엔딩은 기묘하게 서로를 떠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킬러 조는 절대 유쾌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만들어내는 동물적인 파국의 결과는 매력적이라 할 수 있으며, 매튜 매커니히의 신들린 연기만으로도 멋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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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신작 '신만이 용서하리라'(Only God Forgives) 칸느 공개 기념으로 쓰는 감상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직 드라이브에 삶의 의미를 두고 조용히 살아가던 한 남자(라이언 고슬링). 또 하나의 삶의 의미가 된 여인(캐리 멀리건)이 위험에 빠지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비극적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숨막히는 폭력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던 그는 서서히 자신의 숨겨져 있던 냉혹한 본성과 마주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어떤 인간이 저 시놉시스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루 정도는 골방에 가두고 밥안주고 굶겨서 반성문을 쓰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본인은 느끼고 있다. 드라이브는 '자신의 숨겨져 있는 본성'과 마주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라이언 고슬링이 맡은 이 '운전수'(크레딧에조차 그렇게 적혀있다.)라는 케릭터의 본성은 폭력적인 마초 그 자체이며, 영화는 시작 시퀸스부터  끝까지 그의 '뭔가 알 수 없는 괴물'같은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운전수의 이러한 냉혹한 마초 케릭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지만, 드라이브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마초의 액션 영화가 아닌 남성 판타지가 응축되어있는 드라마 쪽에 가깝다.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운전수 라는 케릭터를 통해서 보여주는 남성 판타지의 정점이다. 하지만, 기존의 피튀기고 섹스가 넘쳐났던 남성 마초 판타지과 다르게 드라이브의 최대 장점이자 미덕은 폭력과 섹스의 절제에 있다. 분노의 질주 같은 물건을 생각하고 영화를 봤다가 분노한 관객이 소송을 건 케이스가 있을 정도로 드라이브는 액션 영화로서의 '기본'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액션 장면이라 하기도 미묘한 폭력 장면 파트가 영화에서 손을 꼽을 정도다) 하지만 드라이브는 과도한 액션이 주는 스펙타클과 아드레날린이 아닌, 폭력의 절제되고 응축된 정수만을 뽑아내는데 집중하였으며 그 결과 영화는 이야기의 소재인 주된 마초의 이미지를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기본적으로 영화가 운전수라는 인물을 형성하기 위해서 취하고 있는 표현 방법은 '고독'이다. 영화 내내 그는 대사는 거의 없고,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심지어는 카메라 속에서도 홀로 있는 구도를 자주 보여준다. 하지만 운전수의 고독함은 그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해서 라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보호기제 쪽에 가깝다. 웅크린체로 세상을 경계하는 야수처럼, 그가 외부에 대해서 취하는 최소주의적이며 기계적인 태도들에서 이러한 그의 의도된 고독감이 잘 드러난다. 초반 도입부에서 동승자에게 자신의 룰을 설명하는 부분처럼, 그에게는 명확하고 간결한 룰이 있으며, 이를 지키는 한도 내에서는 그에게 어떠한 문제도 없다. 하지만, 그 룰 혹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는 최소주의적이지만, 동시에 무자비한 폭력을 최대한도로 수행한다. 한번 동승한 동승자(주로 범죄자)와는 다시 동업하지 않는다는 룰을 깨려는 바보에게 무지막지한 협박을 하는 부분이나 그가 등장하는 폭력 장면 등을 보면,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효율적인 수단(주로 폭력)을 써야하는지 알고 있는 인물이며 어디까지 자기가 개입하고 어디까지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가 분명하게 선을 그을 줄 아은 인물이다.


이러한 기계적이고 최소주의적이면서 심지어 신비주의(그는 이름조차 없으며, 출신부터 기원까지 알려진 바가 전무하다)로 점철된 이 운전수라는 케릭터가 극에서 붕뜨지 않고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케릭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장치는 바로 아이린이라는 여인을 향한 운전수의 사랑이다. 하지만 다른 폭력영화에서 마초들의 퇴폐적이면서 음험한 사랑과는 다르게, 운전수의 사랑은 10대 소년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에 가깝다. 유부녀인 그녀와 함께 있는것 만으로도 좋아죽을것 같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은은하며 행복에 가득찬 미소로 표현하는 장면이나, 심지어 교도소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돌아와서 곤란을 겪자 그의 원칙을 깨가면서 그 남편을 돕는, 영화 내내 운전수는 아이린을 향한 플라토닉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법칙이 항상 그렇듯, 원칙을 깬 순간부터 그의 최소주의적인 삶은 꼬이기 시작한다. 영화 그의 냉혹하고 절제된 마초의 이미지와 아이린을 향한 소년적인 풋풋한 이미지의 기묘하면서 상반된 공존을 통해 다른 영화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도 대단하다 할 수 있는데, 아이린과 있을 때 조용하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온세상의 행복을 다 얻은 것처럼 굴다가도, 그다음 장면에서는 냉혹하게 장도리로 사람의 이빨을 까버린다.(명백하게 올드보이의 오마주라고 생각되던 장면) 이러한 영화적 장치는 밑에 유튜브 클립으로 달아놓을 엘레베이터 씬에서 극대화된다.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가 같은 엘레베이터에 탄것을 확인한 운전수가 아이린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뒤에 두고, 돌아서서는 소년처럼 수줍게 키스를 한뒤에 암살자의 면상을 무자비하게 박살내버리는 이 장면은 드라이브의 모든것이 응축되어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황홀하고 아름다우며, 동시에 거칠고 잔인하다.






영화가 다루는 폭력은 폭력의 역동적인 모습보다는 정적인 모습에 더 집중한다. 스트리퍼가 정적인 사물처럼 동작을 멈추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조폭의 이빨을 장도리로 까는 장면, 흑막 중 하나를 파도치는 밤바다에 수장시키는 장면 등등에서 영화의 미장센은 극단적이라 할 수 있을정도로 정적이다. 심지어 모텔에서 2인조 괴한이 운전수를 습격하는 장면에서조차 슬로우모션으로 운전수의 침착함과 능숙함을 간결하면서 깔끔하게 표현한다.


영화 드라이브는 폭력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과도한 폭력의 사용이 아닌 폭력의 절제와 응축, 최대한 가다듬기를 통해서 도달한 신경지이며, 동시에 남자들의 마초 판타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트레일러가 공개된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신작인 '오로지 신만이 용서하리라'도 이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기대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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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로서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 커티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시작된 악몽은 평온했던 그의 일상을 뒤흔든다.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는 악몽은 현실 깊숙이 침투해 커티스를 괴롭히고, 그의 이상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사만다와 동료들은 그를 외면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커티스는 폭풍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뒷마당에 방공호를 짓기 시작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테이크 쉘터는 중산층의, 중산층을 위한, 중산층에 의한 코스믹 호러 영화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던 중산층 가장 커티스가 미쳐서 점점 이상한 행동을 일삼다가 가족 전체가 가장의 망상을 공유하게 된다는 끔찍한 결말로 귀결되는 영화는 영화 자체의 폭력성 보다는 커티스가 그 이유없이 미치는 과정과 그 광기로 인해서 평온했던 중산층의 삶이 붕괴하는 점, 그리고 그 완벽하고 평화로웠던 중산층의 삶이 사실은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물건이라는 것을 까발리는데 초점을 맞춘다. 재밌는 점은, 테이크 쉘터는 이런 이야기를 구현하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맥락들(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등등의 중산층과 밀접하게 연관된 금융 위기)을 배제하고 오로지 '보편적이고 막연한' 이야기들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산층'이라는 판타지를 완벽하게 깨부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커티스의 공포와 공황의 원인은 대단히 막연하다. 아무도 보지 못한 폭풍이 몰아칠 것이고, 그 폭풍이 오면 사람들은 미쳐날뛰게 된다는 커티스의 공포는 상당히 막연한 환상과 꿈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의 주요 모티브인 커티스의 꿈과 환상을 영화는 중산층 가장이라면 누구라도 공포에 떨만한 '현실적인' 종말론적인 이미지로 구성한다. 기르던 개가 갑자기 흉포해져서 자신의 팔을 물거나, 낮선 사람들이 자신의 딸을 납치하거나, 가택 침입을 시도하거나, 친구와 아내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낮선 타자로 변하는 등 영화속에서 커티스의 공포는 행복하고 완벽한 가정을 깨부수고 들어오려는 '침입자'와 '이방인' 형태로 드러난다. 영화는 이러한 침입자와 이방인의 이미지를 비와 폭풍우, 천둥, 번개 같은 일반적인 소재를 이용해서 묵시록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대단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환상에 대해서 커티스가 취하는 태도는 이중적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공포와 불안이 30대라는 비슷한 나이대에 정신분열증을 겪고 정신병원에 들어간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 또한 정신분열증이 높은 확률로 유전된다는 점을 고려해서 그 자신 역시 정신분열증에 걸렸을 확률이 높은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커티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어머니를 만나서 어머니의 첫 증세가 어떠했는지 물어보고(재밌는 점은, 어머니 역시 '막연한 불안감'이 트리거가 되어서 정신분열증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커티스의 악몽으로 대변되는 중산층의 공황이 커티스나 우리세대만의 문제가 아님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상담사를 찾아다니며, 가벼운 진정제를 먹고, 정신분석학 책을 읽는 등의 자신의 병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병이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치유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이 이유는 후술한 내용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면서도 합리적이지 못한 공포와 타협하는 기묘한 자세를 취하는데, 그러한 공포를 해결하고자 하는 발로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방공호'이다. 재밌는 점은 미국이란 나라가 총기 소유가 자유롭다는 점, 그리고 가정 침입을 막기 위한 총기 소유가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커티스가 선택한 방법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방어'하는 기제를 선택한다. 


왜 그는 '제거'가 아닌 '방어'를 선택했을까? 이는 본질적으로 그가 처해있는 상황이 '제거'할 수 없는 속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환상에서 조차 그는 저항하지 않고 도망가거나 피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렇게 막연한 공포로부터 가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커티스가 취하는 수단인 방공호 건설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공포로 떨어야했던 원인들을 까발리는 장치로 변화한다. 방공호 건설 중에 회사 기기를 끌어다 쓴게 들통나면서 회사에서 잘리고, 방공호를 만드는 자금으로 안그래도 대출받아 산 집과 차를 저당 잡아서 추가 대출을 받은 점, 그리고 회사에 잘리면서 딸의 청력 보조 기기 수술에 필요한 보험까지 위태로워지는 등 그의 막연한 불안은 가족에게 점점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영화가 지적하는 것은 '중산층'이라는 개념의 취약성이다. 중산층이 소유하는 것과 그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외부의 것(보험, 대출, 봉급 등등)을 빌리고 있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하면 '봉급을 얼마나 받든 간에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에 예속된 프롤레타리아일 수 밖에 없다'라는 명제와 맥이 닿아있는데, 이처럼 '내 것이 아닌 삶'이라는 측면에서 중산층의 삶은 위태롭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공포는 본질적으로 그런 위태위태한 '소유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중산층이라는 계층은 이 모든 것이 사라질수도(역으로 은행, 보험, 직장 등등의 가정 외부의 것들이 가정으로 침입하고 위협할 수 있는) 있다는 막연한 공포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커티스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본질적으로 그가 갖고 있는 것들은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들이니까.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커티스가 라이언스 클럽에 모인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중산층)을 향해서 소리치는 부분-폭풍이 몰려오고 있어! 한번도 본적이 없는 폭풍이!-은 커티스 이외에도 모든 중산층이 갖고 있는 불안함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망상은, 어디까지나 그의 정신병적인 망상에 불과하며, 폭풍이 지나간 뒤에 아내 사만다의 도움을 받아 방공호 문을 나서는 장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산층 가족이 갖는 가치관을 긍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더 끔찍한 결말로 이어지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이후 커티스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전문의와 상담을 하고,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결국은 커티스 가족은 그들이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경제적인 파멸이 올 수 밖에 없는(집과 차의 대출금, 방공호 만드는데 들어간 대출금의 근저당권, 가장의 부재로 인한 경제력의 공백 등등) 상황을 마주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족들은 커티스가 보았던 환상 그대로 목격한다. 그것이 현실이든, 아니면 환상이든, 그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그들은 이제 가장이 겪었던 불안과 공황, 광기를 다같이 공유하게 되었으니까.


폭풍,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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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And I heard, as it were, the noise of thunder. One of the four beasts saying, 'Come and see.' and I saw, and behold a white horse"

-자니 케쉬, When the Man comes around.

어느 날, 정체불명의 도둑들에 의해 거액의 도박판 강탈 사건이 발생한다. 도박판의 주인 마키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가운데 범죄 조직들은 범인을 찾기 위해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을 고용한다. 믿는 것은 오직 자신과 돈 뿐인 잔혹한 킬러 ‘잭키 코건’. 도둑들의 뒤를 쫓으며 점차 수사망을 좁혀가던 그는 도둑들에게 또 다른 배후세력이 있음을 감지하고, 도둑들 또한 자신들의 뒤를 쫓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과연, 그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발췌)


킬링 뎀 소프틀리는 기묘한 영화다. 기본적으로 범죄라는 소재와 범죄에 손을 댄 인간들의 숙명적인 파국이라는 결론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정작 영화의 본질은 마진 콜에서 보여준 이야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적어놓은 시놉시스에 속지마시라. 영화에는 '갈등'이라고 부를만한 인물들간의 충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오히려 잭키 코건(브레드 피트)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인물이 나와서 모든 문제를 '부드럽게' 해결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영화 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허위의식'이다.

영화의 주된 모티브는 '심플플랜'이다. 계획은 단순하다. 도박판을 털어서 돈을 번다, 하지만 범인은 우리로 지목되지 않는다. 의심받을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하지만 영화의 초반 시퀸스들은 이러한 '간단한 계획'조차도 상당히 어설프게 진행됨을 알 수 있다. 계획에 끌어들이려고 한 친구는 개를 끌고 다니면서 지저분한 차림새로 너저분한 성적인 농담을 던진다. 그리고 그런 차림새로 '나는 거물이니까'를 주장하는 친구의 모습은 보고 있는것만으로 짜증이 올라온다. 또한 회상 장면에서 나오는 마키의 도박장 강도 사건과 주인공들이 나와서 벌이는 도박장 강도질을 비교해서 보면 그들의 강도질은 어설픈 티가 팍팍 난다. 얼굴을 가릴 의도로 뒤집어쓴 스타킹은 오히려 개그 영화에 나올법한 느낌이며, 바짝 쫄아서 도둑질 하나 제대로 못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런 머저리들에게 숙명적인 파멸이 다가온다. 쟈니 케쉬의 The Man Comes Around와 함께 등장하는 잭키 코건은 노래의 가사처럼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지, 누가 자유로워질건지'를 결정하는 중간관리자(동시에 이 노래는 묵시룩의 4기수중 한명인 하얀 기수, 죽음에 대한 노래이기도 하다)이다. 그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상당히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는 실무 중간관리자로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위치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잭키의 포지션이 영화의 배경에 깔아두는 경제위기 극복에 대한 정치인들의 연설(특히 오바마)과 영화 내에서 잭키와 주변 인물들의 기묘한 언어 사용과 맞물려 들어가면서 영화는 평범한 범죄물과는 다른 기묘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것은 현재의 경제 위기와 중산층의 몰락을 허위의식이 가득 찬 인물들이 저항해볼 사이도 없이 결정된 파멸을 맞이하는 과정이라고 서술하는 듯 하다. 실제로 젝키가 만나는 인물들(러셀이나 믹키 같은)의 대화 장면은 공허한 헛소리의 연속이며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이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허세를 부리는 쪽이라 할 수 있다.(재밌는 점은 이러한 대화의 연속에 있어서 잭키의 포지션은 오로지 듣는 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무기력하고 현재 상황에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한체 얻어 맞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마키 트랫맨 같은 케릭터도 존재한다. 

이는 마진 콜의 분석을 빌려오자면, 킬링 뎀 소프틀리 역시 금융 자본주의로 인해서 중산층의 거품이 금융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중산층이 파멸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어설프게 한탕 벌이는 멍청한 중산층들이 자신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다가 실제적인 파멸(잭키)이 다가오자 순식간테 빌빌거리면서 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 내에서 케릭터들이 보여주는 언어 구사 역시 이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소통 없이 자신을 과장하는, 혼자 떠들기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이야기에 있어서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믹키가 잭키에게 자신의 애널 찬양론(?)을 외치다가 다 니놈들 문제야 라고 외쳤을 때, 잭키가 뭐라고? 라고 되묻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믹키는 곧바로 이어서 아, 별거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잭키와 운전수(영화 내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의 대화는 음모자들의 전형적인 음모 라기 보다는 윗사람과 멍청한 아랫사람에 끼어버린 중간관리자들의 대화의 연속이라 할 수 있는데, 재밌는 점은 이들의 대화에서도 '지칭되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믹키의 대화와는 다른 형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대화에서 배후 세력(또는 윗사람)의 존재를 붕 뜨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잭키와 운전수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그들'은 누구인가? 잭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존재,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을 배부르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들을 죽이며, 그들에게서 거둬가는 현세계의 신. 그리고 운전수가 불황이라며 돈을 적게 주려고 하자, 이에 발끈하면서 하는 잭키의 마지막 대사는 이러한 숨은 동력을 까발린다.


내 친구 제퍼슨은 미국인 천사지, 왜냐면 그가 쓴게 있거든: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건 그가 절대 믿지 않는거야. 그가 노예제도를 선택한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놈은 그냥 영국놈들에게 세금내기 싫은 돈많은 와인 제조업자였을 뿐이야 그래 맞아, 그놈은 그냥 그럴듯한 문장 몇개 만들고 폭동이나 일으킨 놈이지. 그 사람들은 그걸 위해 나가서 싸우다 죽었는데도 말이야, 아마 그동안 그 놈은 앉아서 와인이나 마시면서 자기 노예여자나 따먹고 있었을 거라고. 저자식(오바마)은 우리가 한 공동체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 웃기지 말라 그래. 난 미국에 살아. 그리고 미국에서는 자기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하는거야. 미국은 국가따위가 아니야, 그냥 하나의 사업이지. 그러니까 이제 돈이나 내놔.-재키(브레드 피트), 킬링 뎀 소프틀리에서


물론 영화의 나름대로 메세지나 이야기 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킬링 뎀 소프틀리가 효율적이라던가 그걸 대단히 잘 구현했다고 보기는 좀 미묘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허위의식이 너무 장황한 나머지 어느정도 극의 템포를 갉아먹는 느낌도 있고, 영화는 잭키의 존재감이 대단히 강한 덕분에 나머지 인물들은 쩌리(실재로도 쩌리지만)로 취급되는 그런 느낌도 난다. 그래도 나름대로 영화는 즐길만하며, 한번 기회가 된다면 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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