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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올드리치 립스키의 해피엔드는 한 사형수가 사형당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생애를 거슬러올라가는 것을 역재생의 문법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블랙 코미디 영화다. 사형은 탄생으로, 감옥은 학교가 되고, 결혼의 과정은 역으로 이혼을 위한 과정이 된다. 역재생의 논리는 이미 고전적인 흑백영화나 영화의 테크닉에서 꽤나 많이 사용되었던 테크닉이자 문법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역재생은 ‘기존의 것을 낯설게 한다’ 라는 측면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코미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역재생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면 역재생의 변칙적인 흐름은 어디까지나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라는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흐름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고 더 나아가서 흐름을 예측하게 된다. 흐름을 예측한다는 것은 코미디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상식으로 예측 불가능한 엉뚱함과 논센스야말로 코미디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예측 가능해지는 순간 논센스가 상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해피엔드의 강점은 역재생과 시간을 역으로 구성하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역재생의 변주에 정의 흐름으로 진행되는 흐름을 섞어넣는 것이다. 한 시퀸스를 예로 들어보자:주인공의 아내가 남편 몰래 바람을 피기 위해서 외간 남자를 불러놓고 티타임을 갖는 이 장면에서 아내와 남자는 음료를 마시면서 과자를 계속해서 먹어치운다. 이것이 역재생으로 진행되는만큼 이 둘이 과자를 계속해서 뱉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중요한 점은 과자를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대로라면 차를 뱉어내는 과정을 보여줘야 하지만, 불투명한 찻잔 때문에 차를 마시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마신다‘라는 정방향의 흐름과 ’과자를 뱉어낸다’라는 역방향의 흐름이 공존하게 되면서 예측불가능한 논센스들을 만들어낸다.

해피엔드는 장면 장면을 이렇게 정방향과 역방향의 흐름을 엮어서 묘사하는 것 외에도 역순으로 진행되는 인물의 대사나 큰 이야기의 흐름에서도 말이 되면서 말이 안되는 모순된 흐름을 같이 구성하고 있다. 해피엔드의 시작은 치정살인을 한 주인공의 사형에서 시작되서 주인공의 출산을 끝으로 해서 이야기를 구성한다. 치정살인의 대상이었던 두번째 사랑이자 아내가 주인공의 첫 사랑이자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가 되고, 첫번째 사랑이 주인공이 되찾아야 하는 사랑으로 묘사한다. 해피앤드는 큰 틀에서 첫 사랑에서 느끼는 불완전함을 두번째 사랑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을 치정극의 구조로 표현한다. 중요한 점은, 정방향과 역방향 모두 이야기가 상식적인 흐름에서 말이 되게끔 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재생의 기묘함과 비교되는 정방향의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역재생에서 나오는 코미디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해피엔드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코미디 영화이자, 코미디 영화의 교보재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은 모두 소년이 세상에 나오면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놀라운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는 모두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있을거라 생각하고, 모든 일들이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욕망, 혹은 소년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스럽게 해소해주는 것이 소년만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오랜 과거로 올라간다면 이러한 소년만화의 이야기들은 영웅서사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황금가지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다룬 담론들처럼, 대중 작품에서 다루는 서사의 상당수는 소년의 성장에 모티브를 두고 있으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과 난관들을 서사의 구조로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의 논의에서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성공하는 서사‘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설이나 신화의 단계에서 본다면 영웅이 실패해서 몰락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에서 소년이 실패하는 소년만화란 생각보다 정석적으로 풀어낸 것을 찾아보기 힘든 분야다. 애시당초에 사람들은 대중문화에서까지 실패를 찾고 싶지 않다. 하늘까지 올랐다가 뜨거운 태양에 날개가 추락해 떨어지는 이카로스의 깨달음은 모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고 싶고 열광하고 싶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사이버펑크 2077의 전일담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이 나이트 시티를 활보하는 용병이 되어 성공하고 몰락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엣지러너는 트리거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과감한 연출 방식으로 사이버펑크 2077의 세계를 확장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엣지러너의 성공은 엄청났어서, 심지어 사이버펑크 2077의 엉망이었던 런칭을 덮어버리고 다시 사람들을 사이버펑크 2077을 하게 만드는 동력을 만들었다.

엣지러너의 핵심은 몰락 그 자체다. 어떻게 주인공인 데이빗 마르티네즈는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라가고, 그리고 추락하게 되었는지를 다룸으로써 태양에 너무 가까워진 이카로스의 추락 그 자체를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들이 지극히 ‘소년만화’의 구조에 맞닿아있다는 것이 엣지러너의 훌륭한 점이다. 화려하게 비상한 만큼 모든 걸 잃으며 추락하는 모습조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엣지러너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게임의 클리셰와 전제를 기묘하게 비틀었다는 점일 것이다. 게임을 오랫동안 한 사람들이라면 주인공이 몸에 부하가 걸리거나 위험이 있는 기술들을 어떤 제약이나 패널티 없이 잘 쓰는 것을 자주 본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게임에서 이러한 제약사항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에게 ‘금단의 힘’을 제공하고 금기를 넘어서는 쾌감을 제공해주는 일종의 내러티브를 제공해주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네러티브적인 제한이 플레이어의 힘을 실제 제한하는 케이스들은 상당히 드물다. 하지만 엣지러너는 이러한 클리셰를 교묘하게 이용하다가 뒤틀어버린다.

주인공 데이빗은 크롬(인간을 강화시키는 인공 신체)에 대한 부하를 적게 받는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크롬을 얼마나 많이 달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무력이 결정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데이빗은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셈이다. 이는 엣지러너의 원작인 사이버펑크 2077에서 용병 V와 구도가 비슷한데 크롬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V가 힘과 인연으로 나이트 시티의 최정상에 오르는 것이 원작 게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V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전설이 되었다면, 데이빗은 전설이 되지 못하고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데이빗은 스스로 전설이자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롬의 부작용으로 인해서 멈춰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V가 아니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자Edgerunner에 불과한 거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그는 경계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외인 자신’ 클리셰를 무너뜨리긴 했어도, 주인공 데이빗의 몰락은 극에서 계속해서 예견되었다. 극 중 데이빗을 움직이는 모티브는 모두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들이었다. 가장 큰 모티브는 1화에서 죽어버리는 데이빗의 어머니의 유언 아닌 유언이었다:‘아라사카의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죽기전 데이빗과 싸우는 그 순간에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이 데이빗을 주박처럼 옭아메고, 데이빗이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다가 경계의 저편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 화에서조차 데이빗이 루시를 구하기 위해서 사이버사이코 상태에서조차 ’아라사카 정상까지 가겠다‘ 라는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가 여전히 1화의 주박에 사로 잡혀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에게 기회를 주고 성장할 가능성을 준 또래 집단들도 역설적이지만 그의 파멸을 앞당기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의 롤모델이 되었던 메인 역시 그의 사이버사이코 상태의 환상 속에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크롬을 사용하고 자신을 밀어붙였던 강박적인 심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메인이 망가지는 과정 자체는 데이빗의 몰락과 많은 부분 비슷한데,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다가 주변인들을 내치고, 자신의 연인과 친구들을 모두 잃고 사이버 사이코가 되어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메인의 죽음은 데이빗에게 더 많은 신체를 크롬으로 대체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고, 그의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로 이어졌다. 

그렇기 떄문에 역설적이게도 시리즈가 끝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때까지 데이빗의 심리 상태는 강박과 죽은 자들의 주박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이 없는 자기 파괴적인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그의 연인인 루시와의 관계 조차도 서로 바라보는 벡터가 달랐다. 첫 만남에서 루시는 데이빗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그건 타인의 꿈이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이는 데이빗의 동인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루시가 삶을 살아가는 관점인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빗과 루시는 일종의 상극에 서있는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서로 삶을 바라보는 관계가 다르더라도 데이빗과 루시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순수한 관계라는 점이다. 루시가 데이빗을 위해서 아라사카의 해커들을 제거하고 데이빗의 흔적을 숨기고자 했던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었던 것도 데이빗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데이빗은 루시를 사랑했지만, 그의 사랑은 루시의 그것과 상당히 달랐다:데이빗은 그녀에게 헌신했지만 동시에 루시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 그의 사랑의 형태였다.

이로 인해서 엣지러너의 가장 큰 비극이 완성된다:루시와 데이빗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식과 벡터가 달랐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감정이 닿았어도 서로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루시는 자신이 죽더라도 데이빗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을 전했지만, 데이빗은 루시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꿈은 루시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가장 마지막의 순간에서조차 두 연인의 소망은 닿을 듯 말듯 하며 교차해버리고 아련한 감정만을 남긴 채 장대한 파멸을 맞이한다.

트리거는 색체와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 그리고 추락과 상승의 동선 등을 통해 위에서 분석한 엣지러너의 이야기 구도를 훌륭하게 구성한다. 아라사카 타워와 달, 데이빗의 추락, 화려하지만 마치 병든 것 같은 채도 높은 노란색의 이미지, 네온 빛깔로 표현된 산데비스탄의 잔상들과 사이버펑크 도시의 느낌 등은 교과서적인 동시에 통일감을 제대로 구성하였다 할 수 있다. 서사의 완성도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작품으로써 훌륭한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한 이미지와 다르게 본질적으로 엣지러너는 대중매체의 정석적인 흐름을 뒤집고 몰락의 아름다움과 애틋함, 안타까움을 잘 드러낸 탄탄한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풀 한포기 없이No Blade of Grass는 1970년대 영국 B급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 명확하다:환경재해로 인해서 농작물들과 풀이 말라죽는 질병이 횡횡하고, 전세계적인 기아로 인해 문명 사회는 파괴된다. 그리고 이 와중에 주인공 가족들은 도시를 탈출해 농장을 가진 형에게 가는 것이 영화의 주된 플롯이다. 현대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의 시초로 분류되는 이 영화는 매드맥스나 후에 등장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의 전형을 충실하게 따른다. 물론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고 영화적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풀 한포기 없이는 그 괴악한 감수성과 전개로 인하여 나름 B급 영화에서 컬트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풀 한포기 없이의 독특함은 모든 인물들이 폭력을 행하거나 도덕을 버리는 모든 과정들을 거침없고 빠른 속도감으로 처리한다는데 있다. 주인공 일행이 총기상을 털려다가 잡혔을 때 직원을 설득해서 총포상 점장을 죽이고 총기를 터는 과정이 즉문즉답으로 이루어지는 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주인공이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을 데리고 별 망설임 없이 형의 무리를 공격해서 죽이고 농장을 차지하자고 판단하는 등 모든 것들이 신곡하고 효율적이고 즉문즉답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들은 일반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즉문즉답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빠른 판단과 어설픈 플래시 포워드(미래의 시퀸스가 겹쳐보이는 것), 싸구려 배경과 황량한 영국의 풍광과 겹쳐지면서 독특함을 발산한다.

위와 같은 점에서 본다면 풀 한포기 없이는 B급 영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다른 메이저 스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와 미학, 논리 구조 등등은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행위의 과감함에 이끌리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매력들 때문에 소수의 팬들에게 열광받는 이런 영화들을 우리는 컬트 영화라 부른다.

풀 한포기 없이의 컬트 영화로의 매력은 아포칼립스 영화 치고도 극단적인 부분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인 아포칼립스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해방감과 광기들은 '세상이 질서가 무너지고 끝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는가' 라는 부분에서 비롯된다. 아포칼립스 영화의 시조라 할 수 있는(일반적인 아포칼립스 영화인 매드맥스 1,2편보다도 10년 정도 앞섰다) 이 영화는 일종의 해방감(도덕과 질서가 무너졌을 때, 극도의 무질서함에서 얻어지는 쾌감)보다는 절망감에 잡혀있는데, 이는 영화가 나온 70년대의 환경 문제와 당시 영국의 경제 상황 등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환경 파괴로 동식물이 죽어가고 있는 점과 영국 경제의 붕괴로 사회 전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절망감은 멸망 자체를 일종의 해방구로 보기보다는 생존자들을 생존 논리에 맞춰 생각하며 망가지고 거기서 느끼는 절망감에 주력했다.

풀 한포기 없이는 일종의 착취물Exploitation이라 할 수 있는 장르지만, 일반적인 착취물과는 다르다. 착취물의 일반적인 장르 특성 상 살해와 강탈, 강간 등의 다양하고도 자극적인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독특한 논리와 영상 구조라는 것이다. 플래시 포워드와 이상하게 등장하는 스틸 컷의 괴악함, 기존의 도덕을 과감하게 버리면서 빠르고 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구조까지 오히려 가장 극단적인 장면들만 모아두고 유튜브로 편집해서 보여주는 일종의 자극적인 렉카 영상에 가까운 흐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유튜브의 자극적인 부분과 달리 풀 한포기 없이는 더 '뻔뻔함'이 두드러진다 할 수 있다.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에 그런 바보 같고 얼척없는 것들을 마치 정상적인 일인 것 마냥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행한다. 

풀 한포기 없이는 객관적으로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일반적인 영화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허술하고, 쓸데없이 자극적이며, 영화의 내적 논리나 연출 등등 중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뻔뻔함과 괴악함,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짙은 절망감은 다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풀 한포기 없이가 갖게 만들어 주었다. 컬트 영화를 찾는다면, 한 번쯤은 관람해도 괜찮은 작품이라 생각한다ㅏ.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장 뤽 고다르의 영화는 네 멋대로 해라는 기본적으로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와 프랑스 느와르 영화의 패러디였다. 우리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슬래커(현학적으로 노가리를 까며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들)들의 장광설과 점프 컷들, 의식의 흐름과 성에 대한 개방된 의식까지, 60년대라는 배경과 함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장 뤽 고다르라는 영화 감독이 이 세상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순간이자, 그로부터 이어지는 영화의 사조가 등장하게 된 계기였다.

그러나 영화를 직접 봤던 본인에게 있어서 첫 작품인 네 멋대로 해라는 그렇게까지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보는 순서의 잘못일 수 있다:본인은 네 멋대로 해라를 보기 이전에 네 멋대로 해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데이브 홀츠만의 일기, 네이키드, 심플 맨, 스캐너 다클리 같은 작품들을 먼저 봤다. 스타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장 뤽 고다르의 스타일을 흡수시켜서 발전시켰기 때문에 네 멋대로 해라는 투박한 작품이었다.

기본적으로 프랑스 느와르의 패러디라는 문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네 멋대로 해라는 오히려 이후의 작품들에 비해서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보인다:경찰을 죽인 범죄자, 연인, 도주와 파멸까지, 이 모든 것들이 그 이전 프랑스 느와르 영화들의 특징이었다. 여기에 고다르는 자신의 스타일을 집어넣으면서 일종의 느와르 영화에 대한 '조롱'을 만들어낸 샘이었다. 가볍고, 횡설수설하고, 섹스를 탐닉하며, 사회를 겉도는 범죄자는 기존 프랑스 느와르의 범죄자와 달랐다. 이러한 괴리가 그 당시 영화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리고 프랑스 느와르의 진중함과 다른 젊은 예술가의 에고와 자의식이 묻어나왔다. 분명 이 영화가 고다르의 시작이긴 했지만, 동시에 느와르의 패러디라는 장르의 형식을 빌었기에 그런 치기 어림이 스타일로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조금 부족했다.

경멸은 그런 의미에서 본인에게 어떻게 보면 '감독으로 고다르'를 확인할 수 있던 작품이었다. 극작가 남성이 아내로부터 경멸 받고 버림 받는 과정을 다루는 이 영화는 고다르가 어째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 다양한 상징들과 장면들이 직교하여 영화의 형태로 컨텍스트를 구축하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다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게끔(번역의 문제, 예술의 문제, 뮤즈의  남자와 여자의 문제 등등) 여지를 만들어 둔 작품이었다.

하지만 경멸의 특이한 부분들은 그렇게 다양한 컨텍스트를 언어로 풀어내기 보다는 영상과 대화의 형태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러한 야망을 가진 작품들이 엄청나게 많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영화 내에 우겨넣고 감상자가 소화해내기를 강요한다면, 경멸은 대화의 텍스트가 어렵지 않고 반복적이지만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 속에서 무언가가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심한듯이 툭툭 던지는 이미지들(샤워 후 입는 토가의 이미지, 가발 등등)과 서로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엇나감의 골이 깊어지는 과정들, 인물과 컷이 변화하는 과정들까지 미묘한 부분들을 잘 짚어내고 있다. 

경멸의 생뚱맞은 이미지들의 배치(일리어드, 오딧세이, 호메로스 등등)이나 초현실적인 분위기들은 어떤 의미에서 루이스 부뉴엘을 연상케하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부뉴엘에게서 느껴지는 허무감과 극단론과 달리 고다르의 이미지들은 좀 더 정교하고 정제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현실적이지 않고 이미지 중심으로 컷과 시퀸스를 구성하는(필름 통을 원반 던지기 하듯이 갖고 노는 미국인 제작자, 유리없는 뚫린 문을 오가는 주인공 부부 등등) 부분들은 분명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할 수 있다.

후기로 갈수록 실험적인 이미지를 시도한 고다르의 작품을 봐야겠지만, 경멸은 고다르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제임스 그레이만큼 하나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재생산하는 감독도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마치 지알로의 거장인 다리오 아르젠토처럼 그의 영화는 단 하나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타자로 살기, 우울함과 축축함, 가족과 자신을 둘러싼 문화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등등까지 리틀 오데사에서부터 아마겟돈 타임까지 제임스 그레이는 일관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 재생산했다. 보는 사람으로써는 그의 일관성에 질릴 때도 있기도 하고, 그의 집념에 존경을 느낄 때도 있는, 그야말로 양가적인 감정을 제공해주는 것이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묘미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중 아마겟돈 타임은 가장 근원이자 변칙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어떻게 제임스 그레이라는 인간이자 예술가가 만들어진 최초의 모티브를 다룬다:벗어나고 싶은 현실, 부모의 사랑과 감정적인 억압, 자신을 둘러싼 문화적 환경, 탈출하고자 하지만 좌절하고 다시 중력에 사로잡혀 떠내려올 수 밖에 없는 무겁고 축축한 슬픈 결말까지. 제임스 그레이가 실제 겪었던 자신의 삶의 사건들이자 모든 자신의 영화의 모티브를 다루는 영화인 만큼 여지껏 나왔던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모든 것들이 다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마겟돈 타임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가장 변종과도 같은 작품이며, 자신의 삶 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루는 작품이다.

아마겟돈 타임에서 눈여겨봐야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이다.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 통상적으로 보여주던 유대계 이민자의 문화 외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도 주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펑크, 디스코, 레게나 아프리카계 미국 빈민층들의 하위 문화들, 차별받고 억압받는 문화 등등까지 이러한 이야기들이 서브 플롯으로 주요하게 등장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비주류긴 해도 백인이기에 덜 차별받고 주류 사회에 낄 수 있는 이주 유대인들의 위치와 다르게 아프리카 미국인들은 절대 주류에 낄 수 없었고, 그러한 차별들을 공공연하게 받았다. 주인공과 친구는 탈출하는데 실패하고 절도로 경찰에 잡히지만, 주인공이 운좋게 빠져나가고 주인공 친구가 잡혀서 소년원에 가는 것은 이 둘의 계급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한 단순히 가족 공동체를 넘어서서 세대 간의 공감대와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이전의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중재자와 희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본적으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 드러나던 중재자인 어머니의 역할을 더 넘어서 세상을 알려주는 동시에 주인공에게 롤모델 역할을 수행한다.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갖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중재할 수 있었던 것이 할아버지라는 것이다:할아버지의 존재를 통해서 이전의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았었던 서로 다른 두 성향의 조화(아버지와 어머니, 부성과 모성의 갈등)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가 골암으로 죽었을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자신이 그런 역할을 대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가족에서 구심점을 잃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독특한 점은 아마겟돈 타임 이전까지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는 유대계 이민자의 삶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였고, 자신이 어째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다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종, 문화적인 특수성에 천착하여 영화를 만들었고, 모든 이야기들이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유대 이민자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마겟돈 타임에서는 자신의 문화적, 인종적인 정체성과 가족이라는 집단을 벗어나서 새로운 존재인 또래 친구 집단을 등장시킨다. 함께 일탈을 하고,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주류 사회에 포섭되지 않았다는 소외감을 느끼는 것 등등까지 많은 부분에서 공감대를 느끼는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영화는 섬세하게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대중문화와 음악을 배치하면서 제임스 그레이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아마겟돈 타임이 다른 제임스 그레이 영화보다 높게 비상하는 부분은 단순히 타집단에 소속된 사람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집단이 격차를 느끼는 것, 그리고 부조리하고 무례한 세상까지 넓게 바라봤다는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영화에 선역, 악역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있게끔 양가적인 요소들을 집어넣었다. 자신의 과거를 형성했던 모든 사람들과 화해하는 과정이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핵심이다. 하지만 아마겟돈 타임에서는 제임스 그레이가 '거부'하고자 하는 요소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사립학교와 트럼프를 위시한 상류층 인물들의 차별적인 발언들, 유대인이 고통받았던 역사 등까지 이전의 제임스 그레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일종의 '악'의 개념이 등장한다. 

아마겟돈 타임에서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임스 그레이가 경험했던 백인 상류층과 엘리트의 무지이자, 편견, 그리고 억압이다. 이들이 드러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유대계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들은 단순히 오해와 선의, 혹은 그레이가 이전까지 다뤘던 문화적 무거움과 공동체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완전히 다르다. 제임스 그레이가 이들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절망이다:레이건이 당선되었을 때 핵전쟁Amaggedon Time이 일어날 것이라고 절망하던 가족들의 모습처럼 세상에 무지와 차별이 승리할 때마다 거기에 대해서 느끼는 무력감과 분노를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인공은 그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주인공은 어리고, 나아가 운이 좋았기 때문에 파멸적인 상황을 벗어난 것 뿐이다. 세상에 무지와 무례는 넘쳐나고 할아버지는 죽어 가족은 구심점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할 수 있는 것은 좋았던 기억들을 간직한 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무지와 무례함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것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강당의 연사를 뒤로 하고 주인공이 떠나는 장면과 지나쳤던 다양한 사건들이 오버랩 되는 장면은 그의 유년시절을 뒤로한 채 성장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연장에 있지만, 가장 크게 변화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전까지 제임스 그레이 영화들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자기 인생의 모티브에 맞춰서 우울하고 축축하며 무거운 감수성으로 다뤄왔다. 그러나 아마겟돈 타임은 그러한 원점으로 돌아가서 본질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서 그 세계를 넓히는 과정을 다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모티브가 이어지면서도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주체들이 등장할 수 있었고, 그의 영화에서 나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드러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아마겟돈 타임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를 본다면 꼭 추천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조던 필 감독의 놉은 여러모로 장르적으로 기괴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UFO를 다루는 이야기처럼 시작되던 이야기는 크리처 물로 방향성을 선회하던가, 동물, 영화나 찍는 것에 대한 상징과 은유, 인종에 대한 이야기 등등 많은 부분들이 버무려져 있다. 언뜻 보기에 영화 내에서 하나 하나 상징이 갖고 있는 무게감을 생각한다면 놉의 이야기는 너무 거대하고 장황하게 잡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 하나 풀어서 놓고 본다면 놉의 이야기는 그렇게까지 장황하지도 허황되지도 않고, 오히려 조던 필의 영화들(겟아웃, 어스)에서 이어지는 분명한 경향성과 계보를 걷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과도하다 느껴질 때도 있지만, 감독은 장르적인 문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요소들을 비틀어 배치하고 관객에게 그걸 엮는 재미와 영화를 감상하는 재미를 동시에 선사하려 한다.

기본적으로 놉은 통상적으로 이야기되는 '괴수물'이다. 그것이나 에일리언, 프레데터와 같은 영화들처럼 사람들을 죽이는 그로테스크한 괴수가 등장하고, 그것과 싸워 살아남는 과정을 영화는 다루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놉이 괴물이 나오는 괴수물의 장르 공식을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놉은 영화의 중간까지는 외계에서 온 존재와 외계인이 일으키는 미스터리에 대해서 다루는 것처럼 이야기를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SF 장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본다면 외계인과 괴물이라는 요소들은 묶일 수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외계인을 다루는 이야기는 어떤식으로든 '아젠다'가 존재하고, 그것이 괴수물과 다른 부분이다:예를 들어 고전 SF 영화인 지구 최후의 날을 보자. 외계인은 화평을 가져오려 했지만,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 공포가 파멸을 부른다는 이 고전 SF 영화에서 외계인이 들고온 이 아젠다는 분명하게 냉전, 핵전쟁과 멸망의 공포에 근거한 아젠다였다. 이런식으로 외계인의 등장은 우리가 갖고 있는 내부적인 아젠다와 우리 자신을 대면시켜 모순 또는 조화를 이루는데 많은 방점을 찍는다. 이러한 아젠다는 문명화된 존재가 아니면 세울 수 없는 추상적이거나 고차원적인(정복, 평화, 공존, 전쟁, 갈등 등) 것들이 상당수인데 이는 문명과 문명의 충돌을 통해 사회가 갖고 있는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거나 드러내어 관객의 공감을 유발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수물은 다르다. 괴수물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기원(외계에서 왔는가, 아니면 원래 이 세계에 숨어있는가)이 아닌, 그것이 작동하는 메카니즘이다. 그들은 분명하게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고, 그 생태계는 현실의 생물들의 메카니즘을 모방한다. 하지만 그 모방의 과정에서 몇몇 요소들을 그로테스크하게 확대 재생산하여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부여한다. 에일리언의 예를 들어 보자:에일리언에서 제노모프는 복잡한 생식 과정(알 -> 페이스 허거 ->체스트 버스터->성체 제노모프) 거치며, 제노모프의 디자인 자체가 남성기와 여성기의 뒤틀린 이미지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성과 생식, 탄생이라는 전체 프로세스의 뒤틀린 메타포라는 것은 분명하다. 즉, 괴수물은 현실 생물이 갖고 있는 요소들을 기괴하게 비틀어서 재생산하며, 그것은 생물이 갖고 있는 생태라는 규칙에 얽메인다는 것이 핵심이다.

다시 영화 놉으로 돌아와보면, 이 영화가 어째서 외계인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고 괴물을 다루는 영화인지 분명해진다. 진 자켓에게는 아젠다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사냥하고 포식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조던 필이 여기에 '아젠다 없음'과 '괴수의 생물적인 부분'을 '영화사'에 결합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감독의 독특한 관점이 놉을 다른 괴수 영화와 다른 독특한 분위기로 만들어낸다.

놉이 분명 영화사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인용(최초의 영화, 말 목장과 동물 스턴트, 동물 배우 등)하고 있긴 하지만, 정작 그것이 진 재킷이라는 괴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연결고리가 뚜렷하게 보여지진 않는다. 하지만 몇몇 상식적인 가정과 영화사적인 접근을 전제로 하고 본다면, 놉의 전체 그림이 명확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놉이 괴수물이라 해도, 놉에서 주인공 집단의 목표는 일반적인 괴수물에서 보여지는 괴수의 사냥과는 차이가 있다. 주인공 아버지는 분명 괴수에 의해서 죽었지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사고였고, 원한을 갚자고 이야기하기에는 어중간한 시간(6개월)이 흘렀기에 영화는 진 재킷을 향한 직접적인 분노의 감정선을 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괴물을 추적하는 것은 괴물이 '실존한다'라는 것을 증명하여 유명해지고자 하는 일확천금의 접근이 더 강하다. 이들의 촬영기법이 발전하고 이해도가 올라갈 수록, 그들의 목표인 진 재킷의 촬영과 부와 명성에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서사의 과정들에서 촬영감독과 수동 크랭크식 촬영장비가 등장하면서 확연하게 영화사와 영화 놉 사이의 맥락이 선다는 것이다.

어째서 최초의 영화(흑인 기수가 말을 타는)와 영화적인 의의, 동물과 괴수의 존재가 놉이라는 영화에서 한 데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일까? 놉에서의 주인공들이 찍으려 하는 영상은 고전적인 영화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기원에서 출발한다. 다른 영화사적 사례로 뤼미에르 형제가 찍어 올린 기차의 출발을 예로 들어보자:단지 기차의 출발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수많은 관객들은 충격을 받거나, 실제 기차가 관람석을 향해 돌진하는줄 알고 도망치는 등의 해프닝을 보였다. 초창기 영화들은 이런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서사가 있는 영화라기 보다는 일종의 첨단 어트렉션이었다. 최초의 영화인 달리는 말과 흑인 기수, 혹은 기차의 출발처럼 말이다. 일상에서 보기 드문 상황을 찍어서 유희거리로 소비하는 것, 그것이 주인공들이 하려는 촬영 행위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런 어트렉션으로서 초창기 영화가 놉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촬영감독이 편집을 하고 있는 육식동물의 포식장면들은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나라하고 포르노라고 하기에는 너무 투박하고 날 것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초창기 영화들처럼 편집없는 단순한 행위의 재현이라 할 수 있는데, 촬영감독이 앞으로 찍을 진 재킷의 포식장면들에 대한 은유이자 복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트랙션으로 분명하고 뚜렷한 메타포는 놉 내에서 동물을 소비하는 사건이나 상황들이다. 주인공이 헐리웃 영화를 위해서 말농장을 운영하는 점, 유명한 시트콤에서 침펜지 고디가 사람에게 잔혹한 폭력을 가한 점, 주프가 죽기전 말을 이용해서 진 재킷을 끌어들이려 하는 점 등등이 그러하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진 재킷 외에도 고디와 말 농장의 다른 말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보여주며 이러한 영상 - 어트랙션 - 동물 - 소비에 대한 의미망을 구축하려 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는 바로 '나쁜 기적'이다. 극중에서 주인공이 주인공 여동생에게 묻는 것처럼, 나쁘지만 기적처럼 사람을 매혹하는 관념이나 현상을 영화에서는 나쁜 기적이라 이야기한다. 영화 놉에서는 그것이 진 재킷이고, 진 재킷은 고디로, 다른 말들로, 그리고 동물의 포식으로, 촬영감독이 보는 투박한 초기 영화로 거대한 의미망을 구축한다. 이 의미망을 따라가보다 보면 나쁜 기적이 의미하는 바가 다소 명확하게 드러난다:나쁜 기적은 일어나면 나쁜일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시각을 매혹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자극이다. 촬영감독이 찍는 영상들처럼, 우리는 거대한 동물을 먹는 뱀의 포식장면들처럼 현실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극적이며 날 것이지만 우리의 눈을 때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에너지의 과잉과 파괴,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 순환 사이클의 극단적인 확대 재생산 등등, 우리는 이러한 나쁜 기적의 개념을 '그로테스크'라는 다른 단어로 칭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삶과 죽음을 극단적으로 뒤튼 것을 총칭한다. 그리고 그로테스크를 즐기는 문화는 신화에서부터 근대로, 그리고 현대로 이어진다. 근현대 대중문화에서 그로테스크의 소비는 꽤나 역사가 깊었다:죽은 사람을 관람하는 프랑스 파리의 부검소 문화나 피와 폭력을 묘사했던 그랑 기뇰 등등은 대중문화가 확립되는 초창기에도 그로테스크는 중요한 소비 요소 중 하나였다. 어떻게 보면 기차의 도착과도 같은 초창기 영화들도 기차가 들어오는 충격적인 장면을 재현함으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는 어트랙션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재현이나 구성 이전에 그로테스크를 필름에 담아두는 원시적인 영화의 개념이 영화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미지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이 진 재킷의 영상을 찍고자 하는 것은 일확천금인 동시에 초기 영화를 만들었던 제작자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 감독은 인종과 공간을 추가적으로 설정한다:흥미로운 점은 영화에서 주 동력을 구성하는 인물들이 미국 사회의 메인 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백인이 아닌 흑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히스패닉, 아시아인이라는 점이다. 물론 촬영감독이 백인이긴 하지만, 그가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외부인'이자 '영화계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의 인물로 볼 수 없다. 또한 헐리웃과 서부라는 공간과 맞물리면서 추가적인 맥락을 형성한다:대중 영화의 공간인 헐리웃과 일확천금의 공간인 서부가 결합하면서, 이는 일종의 서부극적인 맥락을 갖게 된다.

종합하자면 영화 놉은 일종의 초기 영화에 대한 헌사를 괴수물의 형태로 풀이한 영화이며, 추가적으로 거기에 미국 사회의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문화와 관점을 담아 해석한 작품이다. 겟 아웃에서 어스까지 조던 필 감독은 자신이 본 것들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합쳐서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냈고, 그것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영화사적인 맥락이나 다른 이미지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놉은 괴수물로 훌륭한 영화이다. 그리고 놉의 미덕이란 '뻔뻔함의 미학'이다:영화가 처음 시작될 때 보여지는 사각 물체가 사실은 진 재킷의 눈동자고, 그 진 재킷의 사냥 메카니즘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감지하여 사냥을 한다'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영화 미드소마의 테피스트리 처럼 뻔뻔하게 전체 영화를 관통하는 메카니즘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미드소마가 복잡한 이미지를 엮어서 기괴함의 컨텍스트를 구축했다면, 놉의 경우에는 연출과 카메라, 그리고 사운드 디자인에 많은 방점을 찍는다. 전자기기를 멈추게 하는 진 재킷의 능력 때문에 기괴하게 느려지는 효과음과 음악들, 바람부는 날에 한 점 움직임 없는 구름, 전혀 유기체라 느껴지지 않는 진 재킷의 디자인과 그것의 포식장면 등등은 어떤 사전지식 없이도 훌륭하게 기묘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가장 압권인 것은 진 재킷이 큰 소리 없이 부드럽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광경들일 것이다. 거대한 UFO처럼 보이는 육식 동물이 뻔뻔하게도 산등성이와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광경들은 마치 호랑이와 같은 거대한 육식동물의 날렵함과 은밀함을 금속과 비행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로 뻔뻔하게 구현하여 매우 인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더 뻔뻔하게 진 재킷이 자신의 유선형 몸체를 드러내는 광경에는 독특한 인상을 심어준다.

결론적으로 영화 놉은 훌륭한 괴물 영화이며, 조던 필의 영화 연출과 이미지 구성 등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는 많은 이미지들과 유기적인 관점들은 상당히 흥미롭긴 하지만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무언가는 아니다. 단순히 괴물 영화로 봤을 때도 훌륭한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추천하는 바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류사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다른 문화'와 '우리 문화'를 다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의 신화들은 지역과 부족 단위로 쪼개져 있었고, 세상에 대한 설명은 지역적이었다. 심지어 같은 신화와 종교를 믿는 부족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같은 뿌리를 두되 다른 신화와 해석을 믿는 타인으로 분화되었다. 볼 수 있는 세계가 한정되고, 교류할 수 있는 반경이 작기 때문에 중세와 고대 사회는 현대사회에 비교해서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폐쇄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특수성과 폐쇄성이 현대 사회에 비해 중세와 고대사회가 더 '다양하고 잘게 쪼개진 사회'가 될 수 있었다는 점도 존재한다: 현대사회가 세계적이고 과학에 기반한 해석,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믿음 등에 기반하여 '보편적인 뿌리 위에 세워진 다양성'이라는 가치 체계를 만들었다면, 고대와 중세는 오로지 '우리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는/혹은 무가치한' 가치 체계에 기반하여 자기 믿음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고대 중세 사회의 개개인이 타인과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별개로 고대 중세 사회가 갖는 다양한 집단으로 만들어진 스펙트럼이란 현대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현대사회가 빛이 다양한 색상과 파장을 지닌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걸 안 상태에서 빛을 다양성을 지닌 구조체로 인식한다면, 고대 중세 사회는 빛의 한 색상만 보고 그것이 빛의 전체라고 인식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부분은 빛이란 서로 다른 색상(붉은색이다, 푸른색이다)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섞이거나 충돌할 때 발생하는 일들일 것이다.

로버트 애거스 감독의 노스맨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모티브가 된 암레트 왕자의 전설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 중세 봉건 왕조의 이미지를 베이스로 한 4대 비극의 햄릿과 다르게 영화는 바이킹 문화권인 암레트 왕자의 원전 이야기를 다루는데 주력한다. 감독의 주 관심사가 현대 이전의 시대(더 위치 - 중세~근대, 라이트하우스 - 근대)의 이미지들을 다루는 것인만큼, 바이킹 문화를 다루는 노스맨 역시 감독의 주 관심사의 연장선에 놓인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노스맨은 감독의 전작들(더 위치, 라이트하우스)에 비해서 미학과 서사적으로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노스맨은 기본적으로 신화를 다루는 작품이다. 하지만 노스맨의 '신화'의 개념은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신화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신화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이라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같은 작품들은 특수효과나 분장들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묘사한다. 기괴한 것, 웅장한 것, 아름다운 것 등등 인간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들이 신화적 세계를 구축하는데 사용되었다. 노스맨에도 그러한 비현실적인 요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노스맨의 신화에 대한 묘사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과 거리가 멀다.

노스맨의 신화적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가 고대 ~ 중세 사회의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고대~중세인들에게 있어서 신화란 단순히 거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다. 신화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였다. 대중문화와 신화의 관계를 논한 조셉 켐벨의 신화학이나 기독교와 이단 종교 사이의 관계를 다룬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인간의 믿음과 공간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대한 공간 미학 담론 토포필리아까지, 수많은 저서들과 분석들이 과거인들의 신화가 그저 단순한 우상숭배나 미개한 믿음이 아닌 그 시대의 사유방식을 다룬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속성들이 있지만, 그중 여기서 눈여겨 보고자 하는 것은 신화의 '강박적'인 속성일 것이다. 신화에서의 강박이란 신화가 정의내리고 있는 구조에 대한 집착이자 모든 것을 그 구조 아래 묶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주문처럼, 반복적이고 특정한 언어 사용을 통해 자연과 정령, 더 고차원적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간의 강한 믿음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믿음은 신화적 구조 아래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애거스의 작품들은 현대 이전의 인물 군상들의 심리와 세계를 강박적인 이미지의 구조로 재해석하고 다룸으로써 현대인들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드는데 맞추고 있다. 더 위치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기독교적인 차별과 착취로 어떻게 근~중세 시대의 여성이 마녀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는지를, 라이트하우스에서는 고립된 환경에서 어떻게 근대인들이 미쳐가는지를 다루었다. 이들 작품의 핵심은 현대 이전의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았다'였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단순히 대사나 서사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구현하여 여타 작품들과 다른 독자적인 작품들을 구축하였다. 

노스맨 역시 그런 작품이다. 분화하는 화산을 보여주며 이야기의 끝을 암시하는 영화는 대칭적인 이미지들과 상징들을 보여주면서 신화 이전의 강박을, 더 나아가 강박이 어떻게 신화를 구축하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장면에서 이는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장면은 영화의 초반 시퀸스에서 아버지가 삼촌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암레트가 주문처럼(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어머니를 구하고, 원수를 죽인다) 자기 암시를 거는 부분일 것이다. 강박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되새김질하면서 먼 바다로 출항하는 장면에서 장면은 바다로 나가는 바위가 좌우로 놓여 있어 마치 소년 암레트가 관문을 지나 어른이 되는듯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한 그 좌우 대칭의 구조를 통해서 반복적이고 대칭적인 구조와 강박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도 주력한다.

노스맨에서의 신화의 강박증은 비단 작품의 컷이나 주인공의 심리를 구성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이 있다. 그것은 신화와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스맨에서도 신화를 다룰 때 필수로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다소 모호하게 그려진다는 것이 흥미롭다:가령, 복수를 위한 칼을 가지기 위해 시체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컷의 모호한 구성(되살아난 시체의 목을 내려친 후,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칼을 줍는 첫 상황으로 돌아와 마치 그것이 인물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환상처럼 다루었다)이라든가, 처마에 묶인 암레트를 구하는 까마귀(오딘은 지혜를 얻기 위해 세계수에 스스로를 교수형하였으며, 까마귀는 오딘의 상징이기도 했다) 같은 것들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암시하지만 그것이 실제 초자연적인지 아니면 그저 인물의 믿음에 따라 세상을 그렇게 해석한 것인지 알 수 없게끔하는 모호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모호함이 신화의 장엄함과 위대함보다도 신화의 가장 뼈대라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강박적인 믿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암레트 왕자의 복수극을 영화는 여러 신화를 믿는 공동체의 충돌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암레트는 오딘을 주신으로 믿는 오딘 계열을 따르지만, 복수의 대상인 삼촌은 오딘이 아닌 여신 프레이야를 믿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화를 분석하는 일부 학계에서는 원래 아스 계열(오딘이 주신인)과 바냐르 계열(프레이야가 주신인)이 서로 나뉘어져있다가 합쳐진 것으로 해석하는데(구체적인 근거가 없기에 어디까지나 가설로만 존재하는 학설이다), 영화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암레트와 삼촌의 대립을 남성적인 오딘과 여성적인 프레이야의 대립으로 치환시킨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암레트의 어머니다.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암레트의 다짐은 사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삼촌을 끌어들여 왕위를 찬탈했다는 사실에 무너진다. 세계에 대한 하나의 설명(아버지에 대한 복수, 어머니의 구출, 배신자의 복수)이 무너지는 순간인데, 영화는 도입부의 어머니 방의 장면과 아버지의 가르침(여자는 방에 비밀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 교차하면서 복선을 깔아두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의 문화권 내에서도 모계(어머니와 프레이야를 모시는 바나르 신족 계열)와 부계(아버지와 오딘을 모시는 아스 신족 계열)의 싸움으로 치환되어 들어온다. 하나의 세계와 사건을 두고 두가지 상반된 진실이 충돌한다는 점을 감독은 일종의 고대인들의 다문화(?)적 관점으로 다뤄내고 있다.

하지만 노스맨이 로버트 애저스의 다른 영화보다 뛰어난 점은 비단 이미지만 제공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묶어서 하나의 독특한 메세지로 만드는데 있다. 세계를 설명하는 신화와 기저에 깔린 강박은 새로운 해석을 만나면서 흔들리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암레트와 같이 노예로 팔려온 슬라브 족 여인이 그의 복수를 돕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고, 그 복수와 파멸이라는 결말에서 다른 길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 역시 암레트의 미래를 점칠 때 신화적인 관점을 곁들여서 바라본다는 것인데, 북구 신화가 아닌 슬라브 계통의 신화에 근거하여 신탁을 듣는다. 서로 다른 두 믿음을 가진 세계가 화합하여 공존하는 점에서 신화적 이미지가 가진 편협함과 강박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암레트는 여인이 자신의 쌍둥이 자식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본 신탁을 재해석한다:처음에 그는 주신 오딘의 신탁에 따라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어머니를 구출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인이 자식을 회임한 후에는 자신의 원수인 삼촌으로부터 자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위협을 제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강박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 자식이라는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발견하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해석으로 바뀔 가능성을 가진 운명을 재해석 하여 바뀌지 않는 결말을 가진 숙명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점은 신화와 삶을 받아들이는 고대인의 독특한 시각이자 삶에 대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만든다.

그렇기에 로버트 애저스의 영화 노스맨은 신화적 이미지의 재해석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신화를 남겼을 때, 가장 근저에 남아있는 세계를 향한 강박과 삶에 대한 희로애락,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 성숙해지고 더 나아가서 끝에 남은 파국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뒷세대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거대한 드라마다. 노스맨은 강렬하고도 강박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며 그것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고대인을 다룸으로써 대중문화에서 신화들을 교차하여 재해석한다. 이전작들이 이미지를 정교하게 다루는데 집중하였다면, 이제 감독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지로 독특한 감수성과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감독들이 자신이 잘하는 것에 천착하다 커리어를 마무리 짓는걸 생각한다면 로버트 애저스는 노스맨을 통해 한 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노스맨은 훌륭한 영화다. 물론 캐스팅에 비해서 대중적이지 않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고, 일반적인 신화를 다룬 영화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낯설고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낯섬과 생소함 속에서 영화는 신화의 근저에 깔려있는 감수성을 다루고, 그것을 신화의 특수성이 아닌 좀더 인간사의 보편 타당한 경험으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아닐진 몰라도, 노스맨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한번쯤은 감상해보는 것을 추천하는 영화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인류사와 지방사의 관계는 단순히 부분과 집합의 관계로 정의내릴 수 없다. 어떤 범인류사의 흐름들은 지방사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며, 어떤 지방사의 사건들은 그 지방만의 특수한 사건들로만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류사와 지방사는 서로 논리적으로 등치 불가능하며 서로의 정합성을 담보하지 않는 독립적인 명제다. 하지만 그러한 범인류사와 지방사를 뒤집어서 등치시키는 예술작품들이 있다:그러한 작품들은 논리적으로 등치될 수 없는 두 명제를 등치시킴으로 이런 예술 작품들은 단순히 한 지방, 집단, 개인의 경험이 아닌 범인류적인 경험과 공감을 끌어내는 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이 논의는 논리학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한 두 명제, 범인류 보편사를 지방사로 특수화하기, 혹은 지방의 특수사를 범인류사로 보편화하기라는 모순적 명제가 예술 작품의 미학 내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적 명제들이 참으로 성립할 수 있는데는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거나 특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명제와 조건에 대한 숙고와 통찰력, 더 나아가서 각 보편 명제와 특수 명제 사이의 논리적 관계망을 뛰어넘는 유비추리적 관계망, 미학적 통찰력과 감상, 공감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요컨데 뛰어난 예술적 통찰과 미학적 성취는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명제들을 연결하고 이들을 관통하는 주제와 담론을 생산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에드워드 양이 감독하고 대만 계엄령 시절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는 최초의 대만 청소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고, 어떻게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로 다루면서 중국 본토에서 도망나온 사람들의 암울했던 삶을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영화 팬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치일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한국의 영화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명작으로 칭송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틴 스콜세지가 복원을 지원했을 정도로 영화팬들 사이에서 이 영화에 대한 공감대는 대만을 넘어서 전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기법이나 이야기를 다루는 관점에서 훌륭한 영화였다. 영화는 막막한 미래와 암울한 대만의 분위기를 섬세한 필치로 훌륭하게 다뤄낸다. 예를 들어 청소년 시절의 풋풋한 이미지와 대만의 암울한 상황(지나가는 탱크, 행군하는 군대, 군복을 입은 교련 선생 등등)들을 같은 컷 안에 배치하되 문이나 버스의 차창 같은 하나의 막을 두어 분절시키는 구조를 취하여 주인공들의 청소년 드라마를 둘러 쌓고 있는 암울한 시대상을 드러낸다. 그 외에도 대만을 지배했던 일제의 유산들을 소품처럼 배치하거나,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탈출구로써의 도미 유학, 지식인의 사상검증과 청소년 계층의 갱스터 문화 등등 다양한 것들을 다룬다. 그것들이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영화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4시간의 러닝 타임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다.


허나 흥미로운 점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대한 세계적인 찬사일 것이다:분명 영화는 기법적으로 잘 만들어진 부분들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근 40년간의 대만의 계엄령 시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감수성은 대단히 특수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눈여겨 보아야할 점은 이 영화가 대단히 특수한 감수성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깊이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역으로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는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에서 가장 의외인 부분은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갱스터' 영화라는 점일 것이다. 아이들은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불량 서클을 만들고, 거기서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면서 친밀감을 갖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단순한 탈선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영화속에서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갖혀 사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위에서 언급한 한 공간을 둘러싼 두 층위의 현실처럼 이 둘은 서로 섞이진 않지만 서로에게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부모 계층은 때로 자식 세대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주인공 아버지가 주인공과 나란히 서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모 세대는 이미 시대의 어두운 부분들(사상검증이나 변화해버린 주변 환경, 먹고 살아야하는 어른으로서의 책임 등)을 감당하기 벅찬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백에 동년배들의 변두리 문화가 들어선다. 영화는 이들이 무대를 잡고 장사를 하거나, 미국 팝송을 부르거나, 당구를 치는 등 마치 '어른인 것마냥'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어디까지나 청소년들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도 암시한다. 가장 단적인 부분들이 '폭력'에 대한 부분들이다. 영화에서 청소년 갱들이 서로를 린치하는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이들의 폭력들은 대단히 부드럽다. 반대의 사례를 뽑는다면 한국의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작품이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다루는 한국 영화의 폭력의 사실성과 극단성에 비교해본다면, 이들의 폭력은 어딘가 어설프다. 물론 그것이 점점 고조되면서 살인까지 도달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긴 말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영화는 갱스터 영화라는 측면에서 단순히 대만사라는 지방사에서 세계사적인 보편성과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사회의 변화와 혼란, 부모세대 권위의 몰락,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체 문화들(갱스터에서 서브컬처, 대안 집단 등등)은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대체 문화는 어떻게 본다면 반항인 동시에 그 권위의 공백을 채우는 존재였다. 다른 영화 예재들을 보자. 전설적인 영화 대부는 주인공은 부모의 부도덕한 불법 비즈니스 왕국을 물려받기 싫어하는 반항아에서 왕국의 적장자로 떠오르는 이야기를 다룬다.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지 해야 했었던 이민자 사회의 어둠과 결국 부모세대를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숙명론까지 대부 시리즈는 그저 범죄 영화의 교과서를 넘어서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만들었다. 핵심은 각각의 지방적인 영역들(역사, 문화, 이야기, 전설 등등)에 대한 깊은 통찰은 때로는 인간에 맞닿아있는 근원적인 본질들을 건드렸기 때문에 단순히 지방이나 지엽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번뜩임을 보여주었다.


다시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으로 돌아와보자. 영화는 그러한 시대가 갖고 있는 공백을 채워넣기 위해서 젊은 세대가 방황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소년 갱들과의 알력이나 방황이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국 근원적인 공허를 채워넣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사랑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그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공허와 방황 끝에서 소년은 우발적으로 소녀를 살해한다. 이는 대만의 젊은 세대에 대한 은유(탈출구 없이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는)인 동시에, 섬세한 영혼을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기도 한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맨(2022)은 엑스 미카나와 서던 리치 영화를 찍었던 알렉스 가랜드의 신작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폭력적이고 가스라이팅을 하던 남편이 아내 앞에서 자살을 하고, 아내는 기분 전환을 위해 시골으로 휴양을 갔다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맞이한다. 불쾌한 남성의 미소가 알려주듯이, 영화는 유해한 남성성을 소재로 한 영화다. 엑스 마키나나 어떻게 보면 서던 리치까지 여성의 관점과 이야기를 다루어내려고 한 감독의 일관성이 느껴지는 부분인데, 멘은 그것이 매우 노골적이다. 2000 ~ 2010년 이후로 수위로 떠오른 여성 혐오와 유해한 남성성,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려는 멘은 한가한 영국의 시골과 아름다운 풍광들, 고대의 이미지와 종교, 더 나아가서 문자 의미 그대로 재생산되는 남성성의 유해함을 하나로 엮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까지 성공적이진 않다.

멘은 유해한 남성성의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물론 영화는 장면마다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사례들을 충실하게 넣어두었고, 이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감 불쾌한 느낌을 주게 만든다. 시골에 도착하는 시퀸스를 예로 들어 보자: 사과를 주워먹는 주인공을 보면서 금지된 과일이니 먹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불쾌해하다가 갑자기 농담이라고 이야기하는 제프리의 모습은 기록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가스라이팅인 성경의 선악과(=사과)에 대한 이야기다. 제프리의 수동 공격성이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편견들 등등은 이 영화가 무엇을 다루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스토커하는 알몸의 남성의 그로테스크함, 종교적인 이야기를 들먹이며 가스라이팅을 하는 신부, 이유없이 여성에게 욕하는 소년, 스토커를 죄없이 풀어주는 경찰 등등까지 모든 것이 유해한 남성성의 전형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유해한 남성성들(소년 역을 제외하고)을 하나의 배우(제프리 역의 배우)에게 1인 다역을 맡김으로써 '결국은 하나의 남성성의 전형'에 집중한다. 이 부분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양한 아키타입들이 같은 페이스를 공유함으로 유해한 남성성이라는 분명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지는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 장면은 문자의미 그대로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을 집약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멘에서 눈여겨 볼 또다른 점들은 영국 시골의 자연풍광을 영상으로 잡아내는 감독의 시선이다. 멘에서 보여지는 영국 시골의 풍광은 유해한 남성성의 '역사성'을 부여한다. 폐허가 된 터널, 교회, 흐르는 구름과 밭들, 더 나아가서 석상과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 썩어가는 사슴의 사체 등등을 유해한 남성성 테마 아래 하나로 엮는다.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을 일종의 정액과 정자의 메타포로 이용하여 사슴의 사체 새까만 눈구멍 속으로 들어가서 석조에 새겨진 고대 남성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장면 등 상당히 강렬하다. 이는 감독의 전작인 서던 리치에서 보여준 강렬한 이미지를 이어받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의 강점이 거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이것을 하나로 묶는 맥락Context는 상당히 부족하다. 엑스 마키나의 예를 들어보자. 엑스 마키나는 인형의 집을 SF와 가이노이드(여성형 안드로이드)라는 아키타입, 그리고 백마 탄 왕자라는 판타지를 뒤트는데 집중한다. 영화는 여성 서사와 남성성의 유해함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너무 크게 벌리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엮어냈다. 엑스 마키나에서 중요한 부분은 자신을 구해주려는 판타지(성적인 것과 함께)를 가진 남성을 거부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 주동적인 여성 주인공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 주동적인 여성의 존재가 엑스 마키나의 성정치적인 맥락들(남성의 시선으로 극을 이어나가다가 반전을 맞이하는 것)을 완성하며 무기질의 영상 톤과 서사를 유기적으로 엮어낸다.

하지만 멘은 그렇지 못하다. 멘에서 여성 주인공은 유해한 남성성의 피해자이지만, 남성성의 가해에 맞서서 그 여성 주인공을 위한 서사는 마련되지 않았다. 멘에서 여성 주인공의 서사는 자살한 남편을 떨쳐내는 과정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유해한 남성성이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유해한 남성성은 고대(알몸의 남성)로부터 중세(성경과 종교)로, 그리고 현대의 시스템(경찰)으로까지 이어자고, 여성에 대한 구애와 사랑, 왜곡된 관계에의 요구로 이어진다. 그것이 남성의 출산과 재생산을 거쳐서 자살한 남편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유해한 남성성이란 분명한 메세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가 유해한 남성성에 천착하여 그의 대척점인 여성 주인공을 단순한 피해자으로만 느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분명히 친구가 이야기했듯이 '그 망할 남자놈의 거시기를 도끼로 잘라주겠어'라고 한 말을 주인공이 실현 했으리라 보여지는 엔딩의 장면은 전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을 보여주면서 성기 절단씬을 보여주지 않은데는 어떤 '모호성'을 엔딩에 주기 위한 감독의 복안이 있으리라 느껴지긴 하지만, 그러기에는 영화의 맥락은 풍광의 모호한 이미지들과 남성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묻혀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유해한 남성성의 반대편에 놓여있는 여성 주인공에 대한 서사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멘은 샘 페킨파의 인간 혐오 영화 스트로우 독의 남성 혐오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멘과 비슷하게 영국 시골을 배경으로 한 스트로우 독에서 샘 페킨파가 여성을 혐오하긴 했지만 남성 마초의 파괴성과 광기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을 다루었고, 멘 역시도 여성을 향한 남성의 유해함과 그로테스크에 맞서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도끼로 절단한다로 결론 내리기 때문이다. 다만 스트로우 독 자체가 갖고 있었던 깊은 니힐리즘이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준것에 반해, 멘의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이란 그로테스크한 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어딘가 밋밋하다. 스트로우 독이 샘 패킨파의 니힐리즘과 인간 혐오이라는 강렬한 테마에 갖고 있었던 것에 반해, 멘의 테마는 분명 그로테스크하긴 하지만 어딘가 트위터의 '핸냄저 썰 푼다 ㅡㅡ' 수준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영화 멘이 결국 위에서 이야기한 주동 세력과 반동 세력 모든 것을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 없이 한쪽을 향한 혐오로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엑스 마키나처럼 유해한 남성성의 대척점에 저 너머를 바라보는 희망과 비전, 혹은 그것 조차 압도하는 공허함과 분노가 있었다면 영화가 그로테스크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멘은 남성성의 그로테스크함과 기분 나쁜 부분들을 잘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렬한 이미지들과 풍광들은 존재하지만 여성 주인공의 서사를 무게감있게 다루지 않은 부분이 패착이라 할 수 있다. 서던 리치나 엑스 마키나 같은 작품들을 찍은 감독인 만큼 그 다음 작들은 기대해볼만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작품에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복안을 두고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반지의 제왕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블록버스터 영화의 흐름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스타워즈:보이지 않는 위협을 예로 들어보자. 스타워즈:보이지 않는 위협은 컴퓨터 그래픽을 대규모로 적용한 블록버스터였는데, 가장 유명한 자자 빙크스나 마지막 클라이맥스 전투장면에서 수많은 드로이드 병사들과 주인공 일행이 격돌하는 CG 장면들을 대거 채용하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미적지근할 수 밖에 없었는데, 본질적으로 CG와 배우들의 연기 사이에 비롯된 괴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자 빙크스는 아직까지도 팬덤의 증오를 받는 케릭터로도 악명을 떨쳤는데, 이는 케릭터의 성격 뿐만이 아니라 배우들 사이에서 묘한 어색함을 만들어낸 이유도 한몫했다. 하지만 CG의 등장은 블록버스터 영화 업계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반지의 제왕이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은 CG를 이용하면서도 '대규모 전투나 특정 부분에서 특수분장'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수분장 자체는 00년 이전 고전적인 헐리웃 영화나 B급 영화나 고어 영화 등에서 자주 사용했던 테크닉으로 어떻게 보면 진부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이 오래된 전통을 훌륭하게 살렸을 뿐만 아니라(카메라 앵글 내에서 주로 일어나는 전투들은 모두 특수분장과 액션으로 묘사하되, 규모가 큰 행군 장면 같은 부분들은 CG로 처리) CG에 비해서 오히려 값싸게 촬영함으로써 여전히 특수분장이 현역임을 과시하였다.

반지의 제왕의 케이스와 스타워즈의 케이스를 서로 비교해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질감'의 차이일 것이다. CG로 만들어진 드로이드들의 쨍하고 깔끔한 느낌은 어딘가 기존 배우들이나 세트의 질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소품이나 분장 등으로 구성할 수 없는 물건이나 씬의 구성 등은 분명 CG밖에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특수분장과 창작자들이 만든 소품들은 CG로 만들어진 물건들의 분위기와 다르며, 무엇보다 현실의 배우나 세트의 질감과 통일감을 이루게 되어 독특함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이런 것들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들이 고어와 끈적거리는 것들에 대한 질감일 것이다:살의 번들거림, 내장의 축축함, 오물의 탁한 색깔 등은 CG로 만들어질 때와 특수분장으로 만들어질 때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한 때 과거의 주류였지만 이제는 사라져버린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찰흙이나 인형들을 이용해서 컷단위로 사진을 찍어 촬영한 후, 그것을 이어서 마치 인형이 움직이게끔 구성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로보캅이나 스타워즈와 같은 과거 영화들의 특수효과 전반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뚝뚝 끊기는 질감과 다른 세트와 별개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질감은 결국 더 나은 기술인 CG로 넘어가는 이유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질감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완전히 절멸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인 매드갓은 그러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정점에 선 필 티펫 감독의 작품이다. 로보캅이나 스타워즈 같은 작품들의 특수효과를 만든 이력이 있는 필 티펫은 이 매드갓을 찍기 위해서 30년을 투자하였다. 바벨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레위기로부터 시작하는 매드갓은 파괴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구성하였다. 축축한 고기덩어리와 점액질의 끈적함, 탁한 액체들 등으로 구성된 매드갓의 디스토피아는 극단적인 신체의 변질과 분해, 전쟁, 파괴, 죽음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매드갓에서의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쓰레기와 폐기물'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깃덩어리로 만들어진 덩어리들은 구역질나는 점액질들을 뱉어내며 먼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핍박하고, 의사는 병사의 몸에서 피에 젖은 귀금속들을 뜯어낸다. 매드갓의 강렬한 이미지들은 전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물건들의 질감'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의 질감을 잘 살려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질감이 실제의 인물이나 세트의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어딘가 이질적이고 뚝뚝 끊겨보이는 움직임, 그리고 그로테스크하게 부풀어 버린 살덩어리나 인물들의 움직임을 이질적으로 구성한다. 

혹자는 매드갓의 메타포가 죽어버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기도 한다:한 때 시대를 풍미했었던 스톱 모션은 이제 매이저 스트림에서 벗어나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고 있는 강력한 이미지들은 여전히 지금에도 통용된다. 잔혹하게 해체된 병사에게서 때어낸 기괴한 태아는 곱게 갈려나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쇠락하는 프로세스를 다시 구성한다. 대사나 나레이션 없이 도달하는 매드갓의 강렬한 이미지들은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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