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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읽는 책




폴란드의 풍차는 장 지오노의 후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장 지오노는 지오니즘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쌓았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인간의 조건으로 유명한 앙드레 말로는 장 지오노를 가장 위대한 프랑스 소설가 중 한명으로 꼽을 정도로 근현대 프랑스 소설가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장 지오노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연친화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초기의 사상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자연에 동화되는 것을 강조했다면, 후기작들은 자연 속에 숨어있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굴해내고 가혹한 자연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폴란드의 풍차는 바로 이 후기작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의 풍차는 기본적으로 코스트가의 수난의 기록이다. 모두가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한 코스트 가의 비극을 소설은 그리스 비극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리스 비극에는 훌륭한 사람들, 또는 위대한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자신의 핏줄 또는 선조의 잘못에 의해서 파멸로 향하게 되는 장르적 특성이 있으며(예를 들자면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근친상간을 하는 배경에는 자신의 죄가 아니었다), 폴란드의 풍차는 그리스 비극의 장르적 특성을 차용하고 있다. 다만 그리스비극이 신이나 신탁이라는 초자연적인 특성에 의해서 일어나는 비극에 가깝다면 코스트가의 비극은 전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본성의 문제'로 인해서 파국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코스트 가 일원들의 '성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1대 코스트 가의 가장의 파멸을 끌어모으는 성격이 '유전'되어(물론 코스트 가가 겪는 일은 유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기는 하지만), 파멸을 재생산하고 또다시 재생산할 뿐이다. 하지만, 중매쟁이 오르탕스 양이나 코스트 가의 말예인 줄리와 결혼하는 조제프 씨 등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멸과 싸우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줄리와 조제프의 자식이 창녀와 도망치고 줄리 역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으로 폴란드의 풍차 영지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장 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는 자연 속에 숨어있는 죽음이라는 요소를 드러낸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으나, 이 작품의 완성도는 장 지오노와 지오니즘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에 비하면 너무 모자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 자체도 '미완성'인 상태로 발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이 2차세계대전이라는 충격을 겪고 자연 속에 숨어있는 파멸적인 운명의 씨앗을 발견하는 그런 문제의식이 결국은 인간은 모두 그 파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은 비극적인 아름다움, 파멸의 쾌감보다는 그냥 이도저도 아닌 애매함(왜 줄리-조제프의 결혼으로 줄리가 구원받는 듯이 묘사하고 조제프가 코스트 가의 일원과 다른 '멀쩡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다시 코스트 가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으로 끝내는가?)을 보여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서 지오노의 작품 세계를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 바로 폴란드의 풍차가 나오고 1년 뒤의 '나무를 심는 사람'을 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애매함과 미적지근함을 지우는 작가 나름대로의 폴란드의 풍차에서 드러난 문제의식의 승화와 완성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무를 심는 사람은 한 사람이 인간의 실패(1, 2차세계대전 모두를 거치는 장대한 시간을 다룬다)와 황무지가 된 자연에 대해서 끝없는 인내와 노력으로 묵묵하게 자연을 다시 살린다는 내용을 보여주는데, 초기 장 지오노의 자연친화적인 사상과 후기의 자연 속에 숨어있는 파멸의 씨앗에 대한 문제의식 이 양쪽을 만족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폴란드의 풍차에 대한 이 감상의 결론은 참으로 기묘한데, 장 지오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대표작'이라는 칭호를 달기에는 대단히 부족한 작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폴란드의 풍차가 보여주는 묘사나 작가가 갖는 문제의식은 거장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거나, 그것을 마무리 짓는데 있어서 대단히 부족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이 아닌 나무를 심는 사람을 통해서 보여준 지오노의 미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살아야 하며 인간이 자연속에 숨어있는 파멸의 씨앗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하는 작가의 모습은 폴란드의 풍차가 보여준 문제의식과 기존의 미학을 훌륭하게 접목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히려 후기의 대표작은 폴란드의 풍차 같이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작품이 아닌 나무를 심는 사람으로 평가를 해야하지 않나...라고 생각을 하나, 아마도 책을 팔아야하는 출판사 사정상 이런 타이틀을 달고 나온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본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유대인 '최종 해결책'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하고, 15년 간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게 체포되어서 예루살렘의 법정에 끌려와 1년여의 재판을 받은뒤 1962년 5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년에 가깝게 거친 그의 공판 과정을 저서로 기록해서 뉴욕 타임즈에 칼럼의 형식으로 기고하던 것을 책으로 정리한 물건이다. 이 책은 발매 당시부터 대단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으로, 특히 유대인들로부터 '사실이 날조되었다'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원색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책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후대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알리는 정치철학 저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책 내용에 먼저 들어가기에 앞서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알아두는 것이 편리하다. 기본적으로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 철학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한번은 생물학적인 탄생이고, 두번째는 사회적인 탄생이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두번째, 인간의 실존을 증명하고 그 실존의 조건이 되는 외부 세계의 존재, 즉 인간의 복수성을 인간의 본질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인간이 타자에 대해서 '행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의 본질이자 기본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나 아렌트는 실존의 표지를 '죽음'이라 보았던 하이데거 보다는 하이데거 철학의 비판적인 변용인 레비나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양존재의 대등한 관계 정립이 불가능한 점과 타존재에 매몰되어 봉사한다는 레비나스 특유의 윤리학은 타자의 존재를 중요시여기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및 윤리학과 많은 접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책의 내용은 아이히만 공판의 기록이자,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의 분석, 그리고 아이히만의 '특기'였던 최종적 해결책,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기록이자 그 분석이며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의 '문제제기'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저서의 초점은 '아이히만이 어떤 인간이었나'라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자신의 죽음에까지 말장난을 하다 죽은' 속물 중의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공판의 주내용은 아이히만이 얼마나 괴물이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노림수(유대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나치 책임자에게 묻는 처음이자, 어찌보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재판)가 다분히 섞여 있는 재판이었기 때문이다.(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은 국제사법재판소의 형태로 재판을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국제 사법재판소는 먼훗날 1992년 1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을 나치즘의 괴물로 만들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보여준 인물성은 지극히 정상(심지어 정신과 의사까지 불러와서 검진했음에도 불구하고)이었다. 오히려, 그는 출세에 눈이 먼 인물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하사관에서 총통까지 올라온 8000만 독일 국민의 자랑스러운 모범'이라고 기술하거나, 자신도 '좋은' 유대인들을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등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화술에는 결정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공판장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떠벌리기를 좋아했는데, 유대인 제거의 프로세스(추방->수용->학살)의 각 단계에 있어서 자신의 공적을 끝없이 이야기하고, 실행 불가능했던 계획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지속적으로 아쉬워하며, 유대인 말살의 과정에서 유대인의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공감은 전혀 없이 자신은 '좋은' 유대인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뱉어낸다.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제거가 독일 사회로부터 유대인을 '타자화'라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진행됨을 이 저서는 보여준다. 저서 자체가 아이히만 공판에 대한 기록을 축약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히만이 살아온 행적, 그리고 아이히만의 '업적'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반유대주의를 나치가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도 있지만, 그 반유대주의를 나치는 국가단위에서 효율적으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인종 청소, 학살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악랄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처음에는 유대인을 '추방'하다가, 그 뒤에는 그들을 한군데 '수용'한 뒤에, 악명높은 반제 회의을 통해 등장한 '최종적 해결책'인 '학살'까지 상당히 머나먼 길을 돌아서 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본질은 유대인을 독일사회로부터 분리하는 타자화의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은, 그 와중에 의외로 존재한 유대인 시오니스트들과 나치의 '협력'(추방-수용의 프로세스에서만)이다. 물론 이들의 '협력'은 나치의 유대인 타자화에 있어서 큰 조류로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타자화'에 있어서 소수의 유대인들이 이득을 보려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시오니스트, 아이히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인들이 서있을 땅을 찾아다니던 이들은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이를 위해서 나치와 국가설립을 위한 논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이 유럽 전 사회로부터 타자화를 당하는 과정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저서는 이러한 타자화에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이것의 정점인 학살이 일어나게된 동력이 아이히만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반제 회의 이전의 유대인 추방-수용의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아이히만과 업적과 성과를 두고 내부 알력을 벌이는 행정 관료들과 그들 사이의 밀고 당기기, 게르만 민족과 좋은 독일을 위해서 아돌프 히틀러를 죽이고 전쟁을 지속해서 좋은 독일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유대인 학살은 의사가 개입되었으니 '의학적 문제'라고 주장하는 나치와 아이히만의 변호사, 전쟁에서 패망할 때 왜 자신들은 총통의 자비로운 가스실 세례를 받지 못하냐고 따지던 독일 국민들(재밌는 점은 이와 비슷한 묘사가 게오르그의 소설 25시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등등까지, 저서가 지적하는 문제는 바로 악의 평범성, '사고의 불능성' 인 것이다. 그것은 타자가 어떠한 상황인지,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지,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타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다.


이 '생각없음'의 상태를 지배하는 것은, 나치즘이나 극단적인 증오와 믿음이 아닌 속물적이고 기본적인 사회에 대한 믿음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8000만 독일 국민의 자랑스러운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만큼 성공했기 때문이며, 아이히만이나 다른 나치 고위 관료들이 자신은 '좋은 유대인'들과 친구였으며 그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진술하는 점, 그리고 좋은 독일과 좋은 독일 국민들에 대한 믿음, 칸트를 교양지식으로 '정확하게' 인용할 수 있는 속물적인 허세까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아주 무서운 결론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한 때 역사적인 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나치즘이라는 존재 자체가, 극단적인 혐오와 증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무자비 폭력의 이면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타자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 속물적 사회관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즉,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란 흘러간 시대의 조류가 아닌, 언제 어디서라도 증오가 가해지면 이들을 방조하는 방조적 지원자의 형태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인간의 어두운 본질'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던지는 문제제기에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0년 이후로 몇몇 역사학자들은 아이히만이 자신이 잡힐 것을 미리 알았으며, 재판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였고 재판에서 보여준 아이히만의 모습은 철저한 가면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자신이 재판정에서 보여주었던 속물적인 모습과 달리, 그는 열성적인 반유대주의자였으며 나치 신봉자라는 것이 이들 역사학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두가지 부분에서 크게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그러한 재판의 준비과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공판장에서 왜 속물적인 태도로 자신을 변론했냐라는 것이다. 그러한 속물적인 태도는 효과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재판정의 경멸과 경악을 사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오히려 그의 뜬금없는 곳에서 터지는 발언들(칸트의 인용, 히틀러에 대한 발언 등등)에 비추어 볼 때, 기본적으로 아이히만이 변론의 논리로 이런저런 증거들을 준비한 것외에도 기본적으로 그의 속성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괴물같은 속물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이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의 성향인데, 한나 아렌트의 저서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David Cesarani라는 이 '유대인' '홀로코스트 역사' 전문 사학자의 반론(한나 아렌트는 법정에 4일 정도밖에 나가지 않았다 등의 한나 아렌트가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석을 했다고 비판하고 있는 점. 그러나 재판은 상당히 지리멸렬한 휴정기간을 꽤 갖고 있었으며, 저서가 다루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의 인용,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사형까지의 과정은 실제 1년여의 기간-그중 6개월 가까이는 휴정기간이었다-을 거쳤으며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이히만 측이 총리에게 보낸 탄원서가 거부된 이후 불과 반나절만에 아이히만은 사형되었다.)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판 직후에 제기되었던 엄청난 반발들은, 거의 대부분은 유대인들로부터 나왔다. 이는 이 저서가 얼마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북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는 한나 아렌트의 이 저서를 몇몇 유대인은 '소설'로 취급하기까지 하였으며, 시오니즘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반발(저서 내내 나치를 비판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즉 시오니즘에 대한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을 보여주고 있다)이 이 저서를 '편향'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건국 이후 어떤 행각을 벌였는가를 보면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상당히, 아니 완벽하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그들의 악행은 여기에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여기서 필자가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작품과 사례는 시오니즘 '학살 방조'의 기록은 사브라 사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다룬 바시르와 왈츠를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증오를 지탱하던 중요한 매커니즘 중 하나를 밝힌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치즘은 하나의 메커니즘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복잡한 현상이기는 하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지적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및 책 이야기




대중매체가 발달한 이후로 학자가 자신을 대중매체에 적극적으로 노출시키면서 다양한 논의를 이끄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중권이나, 리차드 도킨스, 마이클 센델, 그리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슬라보예 지젝까지, '스타' 학자는 대중들에게 친숙한 개념이 되었다. 특히 슬라보예 지젝의 경우에는 21세기형 철학자라 극찬을 받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단 한권의 저서로 지젝의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겠지만, '멈춰라, 생각하라'를 통해서 지젝의 관점과 철학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맛을 보고자 한다.


지젝이 자신의 저술에 특이점이란, 엄청나게 다양한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에서 헤겔, 마르크스, 라깡 등등 철학사에 있어서 500년 정도의 다양한 철학자들을 폭넓게 인용한다. 지젝은 이러한 다양한 인용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는데, 처음에 칸트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 다음에 헤겔과 마르크스로 넘어가고, 이 다음을 라깡으로 변주하여 재해석하는 등 보통의 저자들은 보여줄 수 없는 높은 지식의 적용 범위를 보여준다. 또한 지젝은 이러한 전문적이고도 어려운 이야기를 상당히 쉽게 풀어쓰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 그의 글쓰기 능력은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지젝의 폭넓은 인용과 짜집기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문제를 야기할 수 밖에 없는 글쓰기 방식이라 할 수 있다(http://en.wikipedia.org/wiki/Zizek) 위키피디아 항목 역시 그의 글쓰기 방식에 있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지젝의 팬들과 다르게 지젝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젝의 철학자에 대한 '인용'은 쓰여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지젝의 문제많은 인용방식에도 불구하고, 지젝의 현체제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날카롭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가 대단히 넓으며(이란의 이슬람 정권에서부터 월가 점령의 시위의 본질과 한계까지), 각각의 논제가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글에서 지젝의 관점에 대해서 모두 코멘트를 다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여기서는 지젝의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지젝의 자본주의 종말론은 자본주의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가치 체제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관점이다. MIT 공대생과 인도의 빈민을 대상으로 실험한 '성과급' 실험은 자본주의의 기본 전제인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록, 사람은 더 열심히 일한다'에 대한 부정이라 지젝은 주장하며(물론 그러한 결론 자체는 실험이 의도한 것이라 보기는 미묘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결론을 보조하는 근거로 사용했다), 월가의 보너스 잔치에 대하여 '실패'를 칭찬하는, 그야말로 자본주의 가치체제가 스스로 붕괴하고 있는 과정 자체를 보여준다고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가치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젝이 지적하는 부분은 바로 테크노크라시, 전문기술직과 시스템에 의한 지배를 이러한 현상의 본질이라 보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다르게 '자본가'라는 계급적 분류가 아닌, 전문 경영인(CEO)의 등장과 고액 연봉 부르주아의 등장은 계급적인 갈등관계가 아니라 영원히 존속되는 '구조'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금융 자본주의의 도래와 월가의 보너스 문제 등등은 이러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리만 브라더스와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베이스로 다루고 있는 영화 '마진 콜'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라 할 수 있는데, 기업이 소비자에게 독을 팔아서 시장과 소비자가 모두 절멸하는 사태가 도래하더라도 기업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이윤을 챙긴다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영화는 지젝이 지적한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정확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여러부분에 있어서 지젝의 철학적인 부분(흔히들 라깡을 통해서 역으로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역변증법적인 해석의 선구자 라고 한다....)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으나, 지젝의 현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통찰력은 그의 철학적인 부분보다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자본주의 비판론은 공산주의 체제하에 있었던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듯 하며,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신선하게 분석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만하다 할 수 있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세상을 바꾼 책들과 저작들을 꼽는 리스트가 있다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어떤 리스트에도 꼭 들어갈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사상적인 배경을 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최초로 이념에 의해서 새워진 국가체계인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념을 토대로 세워진 공산주의 국가들은 90년대 이후 도미노 처럼 붕괴하면서, 공산주의라는 사상 역시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동시에 몇몇 성급한 학자들은 인류 진보의 최종단계가 도래하였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저서에서 인류 역사는 자본주의/민주주의 라는 최종적인 단계에 도달하였으며 더이상 역사적 발전이 없으리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한 새로운 문제제기가 등장하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 역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마르크스의 사상의 철학적인 기반과 자본론의 큰 흐름만을 짚고 넘어갈 것이다. 자본론이라는 저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자, 당시 주류 경제학에 대한 반론이자 비판에 가까운 저서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기존의 경제학이 아담 스미스 이후로 사상적인 발전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한다. 즉, 왜 시장은 옳으며 자본은 옳은가? 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자본주의 자체에서는 한번도 행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서 정치역학적인 분석-자가 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을 은폐하기 위한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을 더해서, 당시로서는 새로운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지지하는 요소들은 크게 4가지의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헤겔의 역사 접근 방식(특히 청년 헤겔학파의),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도구,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계급 투쟁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의 경제발전사이다. 마르크스가 학문을 배울 당시에는 헤겔의 사상이 유럽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헤겔은 역사는 절대이성을 향한 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헤겔이 생각한 절대이성은, 모든 것이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이상향(?)을 정하고 있으며, 서로 반대되는 논리와 사상들, 이념들은 변증법적인 절차를 통해서(기존의 논리, 정-새로운 논리이자 반대되는 논리, 반-그 둘이 합쳐진 논리 합) 절대이성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은 헤겔의 관념론적인 세계관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청년 헤겔학파의 문제의식(진보에 대한 요구)과 변증법이라는 방법론(마르크스 역시, 현실과 현실을 은폐하는 기제들, 그리고 그것이 합쳐진 형태라는 점에서 변증법이라는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에 대해서는 큰 영향을 받았다.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모티브라 할 수 있는 유물론은, 포이어바흐가 종교의 탄생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따온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며, 종교에 얽메이는 것이 아닌 인간 근원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종교가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닌, 인간이라는 '물질적인 존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라는 접근을 통했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단순히 영향을 받은 수준을 뛰어넘어서 이를 넓게 확장시켰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차이가 나는 점은 크게 두가지로, 첫번째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이 종교 발생이라는 한정적인 시스템에만 초점을 맞추었는데 반해서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에 대한 확장 적용을 동반하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가령, 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로 이어지는 역사의 변혁과 흐름을 유물론과 결부시키셔 본 것은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역사주의와 결부시켜서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론은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사에 대한 의식은 영국 자본주의 경제 발전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 자본론에서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도래 과정은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사에 근거하고 있는데, 장원에 대한 엔클로저 운동이나 임노동자들의 출현, 그리고 기계에 대한 숙련공들이 어떻게 해서 비숙련공이자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바뀌는지에 대한 설명은 영국 자본주의 발전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 자본주의 발전사와 다르게 유럽의 경우 노동수단을 지킬 수 있었기에 자본주의적인 괴멸이 늦어졌다고 이 책의 저자들(마르크스가 아닌)은 보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을 하자면 '자본주의의 본질이란 영원히 자가 증식하는 자본이라는 가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생산수단의 독점, 노동력의 착취, 무산계급의 출현, 공황 등등의 다양한 요소는 사실상 자가 증식하는 가치인 자본이라는 구조를 은폐하거나 자본이라는 가치의 모순이 드러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본 생산의 도식에 있어서 투입 자본과 산출 자본의 가치는 상이한 것이 당연하며, 기술 발전이나 다른 생산요소의 발전 자체는 산출 자본의 증가에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마르크스는 보았다. 그렇기에 유일하게 착취가능한 노동이라는 요소를 착취함으로서, 잉여 자본이자 잉여가치가 발생한다고 본 것이 마르크스의 관점이었다. 


마르크스의 시각이 현대에도 의미가 있는 것은, 그건 마치 1이 지배하는 세계 2가 출현한것과도 같은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이라는 이성에 대한 신앙이자 신봉이 팽배한 시점에서, 세상이 움직이는 메카니즘에 대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해설은 엄청난 문제제기였다. 이후, 이성에 대한 반론인 니체나, 철학의 언어라는 문제를 제기한 비트겐슈타인, 존재론 담론을 꺼낸 하이데거나 그의 후예 등등 헤겔의 절대이성의 붕괴와 마르크스의 등장과 함께 철학은 새로운 조류를 맞이했다고도 볼 수있다.


또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모든 것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측면에서 사회과학적인 가치와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듯이 보이는 아름다운 사회현상 밑에도 은폐되어있는 정치메카니즘의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은 경제적/물질적인 기반에서 출발한다는 발상의 전환은 새로운 시각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사회'과학'의 출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 그 현상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에 대한 탐구를 보여줌으로서 학문적 방법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완벽한 이론은 아니지만(계급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다소 순진한 접근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론이 제시하는 방법론은 지금까지도 현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과학도로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잠시나마 맛이라도 본 것은(이 책은 300페이지 전후지만, 원서는 수천페이지 짜리 책이다...) 정말이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설 및 책 이야기




*네타가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격화일로를 치달은 '테러와의 전쟁'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가 개인이 만든 핵폭탄 때문에 소멸된 이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선진국들은 개인정보인증을 이용, 엄격한 관리체제를 구축하여 사회에서 테러를 모조리 쓸어버리지만, 후진국에서는 내전이나 인종청소가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한 일련의 사건 배후에 항상 언급되는 미국인 존 폴. 미 정보군 특수검색군 i분견대의 클라비스 셰퍼드 대위는 체코, 인도, 아프리카의 땅에서 그 그림자를 쫓지만…


학살기관이라는 소설에 있어 소설의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통제와 관리'이다. 특수부대의 나노머신에서부터 테러를 막기 위한 개인정보인증 제도들까지, 학살기관의 세계는 언뜻 보면 과거 디스토피아 소설들에 대한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1984의 정치적 억압자이자 통제자인 빅 브라더나, 인간성을 거세하는 멋진 신세계와 다르게 학살기관의 세계는 다르다. 학살기관이 도달하는 디스토피아는, 정치적인 억압이나 이상향을 가장한 인간성의 말살이 아닌 '합리성이라는 필연적인 운명에 의해 도달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토 케이카쿠는, 냉전 이후의 세계를 영원히 멸망하는 세계로 표현하고 싶었다 라고 했었다. 9.11 테러에 이후, 국가안보는 전세계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지만 정작 국가와 군대가 싸워야 할 적은 안개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공포는 위협에 대한 관리 차원에서 사회에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를 마련하고, 일반 대중에게 이를 적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과정이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리'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며, 대중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는다, 아니 위협에 대한 관리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적응하며 이를 긍정한다. 학살기관에서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바로 합리적 이성에 의해 결론 내려진, 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이성에 의한 관리와 그에 순응하는 인간들의 영원히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에 이토 케이카쿠의 학살기관은 상당히 도발적인 전제를 추가한다. 인간의 언어, 사회, 문화 등등은 사실상 인간의 유전자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개인의 양심이나 영혼, 종교에 대한 믿음 역시 그 연장선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살기관의 전제는 그 위에 인간의 생존과 필요에 의해 '인간에게 학살을 하게끔 명령하는 언어구조'이라는 도발적인 발상을 세워올린다. 노엄 촘스키의 보편적 언어학이자 기저문법에 대한 형식주의적 언어학(언어에는 보편적인 기저 문법이 있다)의 영향에서 영감을 받은 '학살의 언령'은 연역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발칙한 상상력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학살기관의 세계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통제당한다. 개인정보에서부터 셰퍼드의 작전, 그의 육체, 그의 정신, 심지어는 20세기 한때 인류 멸망의 수단이라고 여겨졌던 핵전쟁에서 합리적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학살(존 폴의 학살극은 결국 미국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 판단의 결과물이었다는 걸 상기하면...)까지, 모든 것이 합리적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영원히 망하는 비인간적인 순환고리 내에서, 이토 케이카쿠는 죄의식과 윤리를 핵심 키워드로 제시한다. 셰퍼드의 어머니를 안락사 시킨 죄책감,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암살한 자신을 벌해주기 원하는 벌에 대한 갈구는 모든 것이 통제당하고 관리당하는 세계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소설들이 사회적인 연대나 사회적인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를 결론이자 해결책으로 제시하였다면, 학살기관은 그와 반대로 철저하게 결론을 개인적인 형태로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결말은 살짝 아쉽다. 스스로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이지 못하다'라고 끝없이 자아비판을 하는 셰퍼드가 결국은 학살의 왕 존 폴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세계를 희생해서 평화를 유지하는 미국을 학살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는 결론은, 뜬금없음을 떠나서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라는 의문점이 든다. 물론, 개인의 윤리가 거대한 집단 합리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란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싸움이기는 하지만, 이토 케이카쿠 스스로가 마지막에 좀 안일한(?) 결론을 내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의 문체는, 긍정적/부정적 의미에서 오시이 마모루의 소설이나 코지마 히데오(이토 케이카쿠 스스로도 코지마 히데오의 광팬이라고 밝혔다)의 사변적 연출의 업그레이드/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서브컬처와 학문의 인용, 그리고 사변적인 이야기의 연속은 자칫 잘못하면 드라마의 부재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이토 케이카쿠는 셰퍼드의 어머니 안락사라는 서브 플룻을 통해서 자칫 생기를 잃을 뻔한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물론 쏟아지는 정보량과 대사량들 그리고 사고에 알러지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를 극복하면 충분히 재밌는 소설인 것은 확실하다. 


이 소설에 있어 참으로 아쉬운 점은, 이토 케이카쿠가 2009년 폐암으로 별세했다는 것이다. 학살기관으로 작가 데뷔를 한 때는 2007년. 앞으로 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였을지도 몰랐는데, 매우 아쉽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스포일러 포함되어있습니다.

*가족 독서 토론에서 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 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소설로 유명한 소설이다. 세계 전쟁 이후, 지구는 오염 낙진으로 생명체가 살기 힘든 행성이 된다. 대부분의 동물은 멸종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물을 키우는 것이 신분의 척도가 된 세상. 경찰서 소속 안드로이드 사냥꾼 릭은 가짜로 만들어진 전기 양 대신 진짜 양을 사고 싶어한다. 어느 날 잘 나가는 선배 사냥꾼 데이브가 안드로이드에 의해 중상을 입게 되자, 릭은 데이브 대신 일을 처리하여 그 보상금으로 진짜 양을 살 계획을 세운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나 흐름은 성기다고 할 수 있으나,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분위기와 주제의식은 다른 소설들과 차별된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식은 바로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원작의 바이센티니얼 맨의 경우에는 인간의 정신을 우연히 얻은 로봇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과 인간과 생명의 끝이자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모방함으로서 인간의 경지에 도달했고, 스탠릭 큐브릭/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는 프로그래밍 된 사랑이 초지일관 변화하지 않고 끝까지 감으로서 인간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공각기동대의 경우에는 기억과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지을 수 있는 자아의식의 무언가인 고스트를 설정하였다. 하지만, 소설은 특이하게도 인간의 정의에 대해서 관계론적인 개념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정 이입'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보이그트-캄프 테스트는 생명이 다른 생명에 대해서 감정이입하는지 여부를 테스트 해서 기계-인간의 여부를 결정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 또는 인간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으나, 기계는 그러하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 내에서 등장하는 머서주의(머서 라는 구세주에게 감정이입기를 통해서 전 우주의 인간들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가 주창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감정 이입을 제시한다. 어찌보면 들뢰즈-가타리가 이야기한 몸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통해서 다른 이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라는 문제제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설에서 인간의 감정 이입 능력은 '허구'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소설 전반적으로 인물들이 감정이입기를 이용해서 감정을 조절하는 점이나 머서주의를 체험하는 방안으로서 범우주적인 감정 네트워크를 통해 타자의 감정을 자신에게로 이입시키는 기계를 사용하는 점, 마지막으로 머서주의는 허구였다는 점 등등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기계와 허구에 의해서 감정을 제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소설은 제대로 감정이입을 하는 존재이자 가장 순수한 존재인 이시도어를 죽어가고 사라져가는 존재인 특수자로 규정지으면서 사실상 진실한 인류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냉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 내에서 안드로이드는 점점 인간을 닮기 시작하고, 보이그트-캄프 테스트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심지어는 자기들끼리 감정이입(혹은 애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경찰서 장면은 이러한 인간-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경계 어그러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다. 현재의 기계는 인간을 완벽하게 복제할 수 없었지만(거미 고문 장면), 레이첼이 현재의 데이터들을 수집해서 더 나은 기계,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암시하는 부분은 결국은 그러한 테스트나 구조적인 결함을 언젠가 기계는 뛰어넘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들은 '진짜'를 갈구한다.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진짜 동물들을. 릭 데커드 역시 소설의 주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6인의 안드로이드 사냥의 동기가 바로 진짜 양을 사는 것이었다. 재밌는 점은 진짜 동물을 대체할 수 있는 가짜 동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극도로 혐오감을 느낀다. 왜냐면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목,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 는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고 싶지만, 결국은 될 수 없는 가짜의 숙명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혼란감과 피로감, 그리고 마지막에 머서와 융함했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기계와 허구가 아닌 인간이 진실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데커드와 레이첼 사이의 정사나, 안드로이드에 대해서 느끼는 데커드의 심리와 사냥꾼을 그만두는 점, 그리고 마지막 감정이입 기계 바깥에서 머서와의 융합 체험과 두꺼비의 발견(물론 가짜였지만) 등은 데커드가 사냥의 과정을 통해서 기계 바깥에서 타인(그것이 기계일지라도)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 아닌가 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은 상당히 느슨한 이야기 흐름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흐름의 사이에 작가는 기묘한 분위기를 채워넣는다. 중년의 찌든 피로감이나 고독함 등은 높게 평가할만한 부분이다. 그리고 작가가 제시하는 인간의 조건, 그리고 기계 같아지는 인간과 인간 같아지는 기계, 그 둘의 차이와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한번쯤 고민해볼만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가족 독서토론에서 다뤄진 내용을 요약한 감상입니다.


1957년 10월 4일, 구소련은 우주에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렸다. 그리고 12년 뒤, 인류를 달에 보내겠다는 아폴로 계획은 아폴로 11호를 통해 실현된다. 7월 20일, 인류는 달에 첫발을 디딛으며 달에 사는 토끼를 모조리 멸종시키는데 성공시켰으며, 이 모든 과정은 전세계로 생방송되어 미국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성공한다. 스푸트니크로 시작된 우주 개발 경쟁은 스푸트니크 쇼크로 불리며 이후 50년 가까이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기술 개발의 장을 열었다.


인류가 달에 가기 1년전인 1968년, 스탠릭 큐브릭과 아서 C 클라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공동 작품을 낸다. 스탠릭 큐브릭의 동명의 영화와 아서 C 클라크의 소설은 인류의 진화와 외계 생명체 조우, 그리고 새로운 인류 문명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달에 가기 1년전에 인류의 달기지 건설과 우주 진출이라는 예측한 이 SF 작품은, 소설 전반적으로 앞으로 도래할 미래에 대한 선언적인 예언들로 가득차있다. 소설이 보여주는 하드 SF(철저한 고증에 바탕을 둔)적인 성향과 과학기술 묘사를 제외하면, 소설은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의 시초는 최초의 모노리스와 접촉하고, 스타게이트의 실험을 통해서 지능을 가진 현생 인류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2001년, 달기지에서 인류는 TMA-1(모노리스)와 접촉하고, TMA-2(스타게이트)를 알아차린다. 인류는 과연 TMA-1의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토성 부근의 TMA-2를 조사하기 위해 디스커버리 호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최첨단 장비와 HAL 9000이라는 AI를 탑재한 디스커버리 호는 HAL의 폭주로 선장 데이브를 제외한 전원이 전멸하게 되고, 더이상 잃을게 없었던 데이브는 TMA-2 스타게이트로 진입해서 새로운 세대의 인류, 스타차일드로 각성한다.


우리가 이 소설을 다루기 전에 알아둬야 하는 사실은, 이 소설이 우주개발의 정점에 이르던 시기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아서 C 클라크의 이러한 선언적인 예언은 현시점에 있어도 SF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폴로 계획 이후로 인류는 상업/군사적 목적을 지닌 위성 개발을 제외하고는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린 경우가 극히 드물다. 이는 1970년대 이후, 미국-소련 사이의 데탕트의 도래로 무한경쟁적인 우주개발의 이유가 사라진 점, 우주개발의 또다른 목표였던 ICBM(Inter-Continental Balistic Missile,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개발 완료, 무엇보다 들어가는 돈에 비해서 홍보 말고는 성과가 없었던 우주개발의 진실 등등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들어갔기 때문이다. 사실, 아서 C 클라크가 이러한 모든 정황을 파악했을리는 전무하고, 우주개발이 결국 정치적인 생명과 함께 끝장날 것을 예견하지 못했었다. 물론, 그걸 아서 C 클라크가 알았다면 그는 이미 신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 C 클라크의 이 선언적인 예언은 지금 관점에서 봤을 때도 상당히 정교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상이 아닌 확고한 과학기술적인 신념과 가능성으로 채워넣어졌다. 우주정거장에 대한 묘사, 달기지, 디스커버리 호, AI, 냉동수면 등등 그는 우주개발에 있어서 필요한 장애물과 해결책에 대해서 공학적인 상상 대안들을 제시한다. 원래 출신 자체가 기술자였던 아서 C 클라크는 스토리를 다소 희생시키면서 까지 이 과학기술과 가능성을 표현하는데 대부분을 소비하였으며, 그렇기에 소설적으로는 스토리가 성기지만 SF 적인 재미와 치열함에 있어서는 다른 SF명작들에 꿀리지 않은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과연 인류에게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예견한 세계가 도래할 것인가? 우주개발이 다시 한번 대 유행을 타게 될 것인가? 이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주개발은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언가라는 점이다. 인류는 항상 미지의 것을 동경해왔다. 모든 사람이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는 순간에도 마젤란은 세계를 한바퀴 돌았으며,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고, 라이트 형제는 사람이 날 수 있다는 것을 공학적으로 증명해냈다. 인류에게 있어서 우주는 이제 얼마 안남은 미지의 영역이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불에 이끌리는 불나방 마냥 사람들은 우주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친다. 재밌는 점은 인류의 우주 개발을 가로막는 것은 기술적 한계가 아닌 바로 '비용'의 문제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들은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단돈 '30억원'이면 러시아 우주비행센터에서 훈련 받고 ISS(국제 우주 정거장)에 채류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모든 인류가 30억원을 단지 관광 목적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갑부는 아니다. 우주 개발의 문제는 이러한 '비용'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이 비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사실, 수많은 밴처 사업가들과 몽상가들(이라 쓰고 맨땅에 헤딩하는 개척자들이라 읽는다)은 이 비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많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 지구 중력을 탈출해서 대기권을 돌파하는 제 1 우주속도를 넘기기 위한 가장 전통적인 방법인 탄도체(쉽게 이야기하면 로켓)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들인데, 지상에서부터 대기권 바깥까지 거대한 구조물을 세워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기권을 돌파하는 궤도 엘레베이터(재밌는 점은 이 방법은 아서 C 클라크가 처음으로 상상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일정 고도까지 제트기를 타고 올라간 다음에 비행체를 이용해서 대기권을 돌파하는 방법, 콩코드 여객기 처럼 단독 기기로 대기권을 돌파하는 방법, 심지어 초거대 구경의 '대포'를 이용해서 우주로 나가는 스페이스 건 같은 방법 등등 실패 여부를 떠나서 인류는 아폴로 계획 이후 전통적인 탄도 역학에 의한 지구 탈출의 방법이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의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모든 방법이 실제 성공한 것은 아니나, 몇몇 방법들(특히 제트기-비행체의 경우) 비용을 어느정도 절감하는데 성공해서 관광객들이 단독 '3억' 정도만 들이면 대기권 바깥에서 무중력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실험적인 방법들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진행되다 보면, 임계점을 돌파해서 인류가 우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소설의 하드 SF 적인 성향과 달리, 아서 C 클라크는 '이미 육체나 정신 따위는 옛저녁에 초월해버린 존재가 인류나 다른 문명을 선도한다는' 기묘한 SF 사조를 만든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도 모노리스를 만든 종족들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진화의 정점에서 자신들이 걸어온 길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앞으로 다른 덜 진화된 종족들을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한 표현물로서 모노리스를 만들었다 라고 묘사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라는 소설 자체는 인류의 흥망성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모노리스와 접촉한 인류가 지능이라는 요소를 이용해서 우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마지막에 스타게이트를 통과하고 신인류가 된 데이브가 인류를 말살함으로서(물론 영화판에서는 좀 다르다고는 하지만) 구인류의 몰락과 신인류의 등장을 다루고 있다. 재밌는 점은 이 과정에서 모노리스가 인류에 개입한 것은 바로 인류라는 종의 한계 상황 혹은 임계점인 부분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원숭이 인간들은 지능이 없었으면 멸망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TMA-1을 발견한 인류 역시 달까지 개발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실상은 문명에 있어서 '임계점'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TMA-1을 발견해서 TMA-2를 조사하기 전까지는. HAL 9000에 대한 묘사(기계적이며 관료주의적인 세계의 한계와 종말?), 60억 인구가 있지만 식량 문제로 조금씩 인류의 존망이 위협받는 상황 등은 2001년의 미래가 장밋빛이 아님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시점에서 아서 C 클라크가 묘사한 어떤 '외부적'인 터닝포인트에 의한 인류의 반강제적 진화는 어찌보면 고깝게도 보일 수 있는 시선이기도 하다. 몇몇은 백인 우월주의와 식민지 세계관의 발로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동생의 의견에 따르면) 기독교적인 메시아 사상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진화의 다양성(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물이 아니라, 인간-바퀴벌레-원숭이 등 각자가 현시점에서 가장 진화되었기에 서로 동등하다 할 수 있는)을 무시하고, 진화에 방향성과 단계성을 부여하였다 할 수 있는 아서 C 클라크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제국주의 논란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모노리스를 만든 이 외계종족이 아서 C 클라크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의미의 '신'의 존재를 대리한다고 볼 수 있는가? 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아서 C 클라크의 세계관에서는 이들은 '신에 가장 유사한' 존재기는 하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인지범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무언가 라고 상정할 때, 이들의 존재는 오히려 '인류의 다음 단계' 혹은 '머나먼 인류의 미래'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개념이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아서 C 클라크의 선지자 종족들은 유물론에서 시작해서 유물론을 아득하게 뛰어넘어버린 미래 그 자체라 표현할 수 있다. 결국 SF의 먼 미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칼 세이건이 이야기한 '우주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외계인이 있거나, 외계인이 없거나. 어느쪽이든 우리에게는 끔찍한 일이다.'라는 유명한 격언과 아서 C 클라크의 세계관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아서 C 클라크는 신이라는 종교적인 요소를 철저하게 배제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은하 내에 얼마만큼의 지적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드레이크 방정식에 근거해서 보았을 때,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합리적으로(다른 표현으로는, 부정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0'에 수렴한다 할 수 있다.(물론 드레이크 방정식에 가장 긍정적인 상수를 대입하면 상당한 숫자가 도출된다고는 하지만) 한마디로, 우리와 같은 존재가 저 밖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종교적인 기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서 C 클라크는 여기에 종교적인 신비성이 아닌, 우리가 존재해야할 '과학적 당위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SF적 상상력의 결정체인 '모노리스'와 먼저 온 '선지자들'의 존재인 것이다. 선지자들은 은하를 떠돌아다니면서 지성을 지닌 종족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그 진화 과정을 옆에서 도와서 방향성을 잡는다. 어찌보면, 이 기적과도 같은 확률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그리고 SF적인) 설명'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면 선지자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사실상 신의 자리에 선지자들과 과학을 대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가 라는 비판이 존재할 수 있으며, 실제로 아서 C 클라크의 세계관(과 그 이후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SF 작품들)은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SF 장르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아서 C 클라크가 쓴 유년기의 끝, 낙원의 샘의 마이너 카피에 불과한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신념이 가득찬 확고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아서 C 클라크가 보여준 인류 문명의 기원은 '과학적인'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지만, 어찌보면 종교적인 관점에 과학적인 가능성을 덧붙인 것이 아닌가 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이는 아서 C 클라크 소설의 전반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으나, 사실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SF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기믹(인류의 기원과 선지자적인 외계인의 존재)이라는 점은 여전히 아서 C 클라크의 세계관을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했다 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아서 C 클라크가 만들어낸 이러한 사상은 먼훗날에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 깨지게 된다. 테드 창은 그전의 SF 작가들이 하지 못했던, 비과학적인 세계를 과학적인 시스템과 체계를 도입해서 과학적인 세계로 재정립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전에 앞서서 아서 C 클라크와 위대한 SF 작가들이 만들어낸 SF 세계가 밑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바로 그러한 밑바탕을 깔아둔 위대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및 책 이야기/읽는 책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진구지 사부로)


아도르노의 문학 이론은 상당히 순진하지만, 어느정도는 진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선사시대 이후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경험하는데, 문학이란 그 이상으로의 회귀에 대한 이야기라고. 물론 모든 문학 장르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드 보일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상당히 쓸만한 이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조보다도 하드보일드는 이상적인 순수한 세계에 대한 갈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들이나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레이먼드 첸들러의 '안녕 내사랑'처럼 말이죠.


필립 말로, 너무 유능해서 잘린 전직 조사관이자 사설 탐정, 바바리 코트에 담배, 시니컬한 성격, 더러운것과 어울리지만 동시에 그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는 묘한 케릭터성,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사설 탐정의 모든 것을 갖춘 케릭터죠. 오죽하면 어떤 평론가는 '필립 말로 덕분에 많은 탐정 소설의 주인공들이 전직 조사관에 시니컬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라고 할 정도니까요. 필립 말로가 지금까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경계선에서 세상의 추함을 시니컬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어느정도 선을 지키는 미묘한 케릭터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이먼드 첸들러는 이렇게 표현했죠:현대를 사는 정의의 기사 같은 느낌이라고.


'안녕, 내 사랑'은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밀고한 애인 때문에 감옥에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한 한 남자, 애인을 배신하고 자신의 출신을 속여서 부를 거머쥔 여자, 비굴한 헐리우드 연애 매니저와 수상한 점쟁이, 그리고 마지막 인물인 사설 탐정. 소설은 살인과 음모, 범죄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만, 재밌게도 소설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남자는 애인이 배신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만나고자 했죠. 살인, 추적, 음모, 그리고 그 끝에서 필립 말로가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했을 때, 여자는 남자를 총으로 쏴죽이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총에 맞기 직전까지, 남자는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목격하고 이해한 단 한 사람, 사립탐정 필립 말로만이 조용히 지켜볼 뿐입니다.


주인공 필립 말로는 인간의 욕망과 추악한 모습이 들끓는 LA와 헐리우드를 배회하면서 남자, 그리고 진실을 추적합니다. 아무도 진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을 때, 유일하게 진실을 추적하죠. 이러한 과정을 레이먼드 챈들러는 거의 '시'의 경지로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필립 말로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사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 역시 완벽하게 선할 수 없기에, 악과 타협하면서 적당히 살아가죠. 하지만, 필립 말로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시니컬해지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겠지만, 그는 진실만을 추구하죠. 어찌보면, 선과 악이 모호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영웅이라 할 수 있죠.


흠, 개인적으로는 시간 죽이려고 본 작품인데, 마음에 드는 시리즈입니다. 모두 찾아볼 거 같군요 ㅎ   






소설 및 책 이야기/읽는 책



 클라이브 바커는 같은 계열의 작가인 스티븐 킹에 비해서 몇몇 매니아들을 제외하면 국내에 덜 알려진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소설 보다는 영화 헬레이져 등으로 더 알려져 있으며, 게이머 에게는 '클라이브 바커의 언다잉'이나 '제리코'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특이하게 소설 보다는 다른 것으로 더 알려진 케이스라고 할 수 있죠. 사실, 국내에 소설이 거의 수입이 안되서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니, 소설이 몇개 수입이 되기는 했지만, 죄다 아동용 판타지 소설(.....)로 호러 소설가 보다는 오히려 아동 소설 전문가로 유명(?)합니다.

 '피의 책'은 그가 1980년대 소설가로 데뷔하면서 낸 여러 권의 단편 모음집으로써, 한국에는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 영화 수입으로 여태까지 나온 단편들 중에서 완성도가 높은 것만을 실어서 낸 일종의 컴필레이션 입니다. 실상, 클라이브 바커의 호러 소설 중에서 정식으로 수입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죠.

 일단, 클라이브 바커의 소설을 단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잔혹하고 피가 낭자하지만, 그걸 넘어선 뭔가 있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소설 속의 묘사나 표현은 끈적거리고 자극적이거나 엽기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이를 자극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신비한 느낌으로 표현합니다. 특히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 중에서 최고라 할 수 있는 '언덕에 두도시'는 포폴락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보는 독자를 경악과 경외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단편들은 각각 내용적으로도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피의 책에서 그의 단편들은 호러 소설이라기 보다는 잔인한 묘사가 나오는 판타지 소설로 분류하는게 타당하다고 봐야합니다. 실상, 소설의 내부에서 그 일을 겪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만한 공포도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인과관계가 뚜렷하며 겉으로 보기에는 뒤틀렸지만 그 속에는 일종의 질서와 법칙 같은 것이 내부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산 사람을 연기한다는 예술에 대한 풍자극인 '별빛, 섹스, 그리고 죽음', 문명의 선조들을 자신의 후예의 고기를 먹는 야만성으로 묘사한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 무자비한 죽음과 야만성이 생명의 여성성에 의해서 죽는다는 '로헤드 렉스', 망자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하는 '스케이프 고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 유기체론에 대한 신랄하고도 우아한 반박인 '언덕에 두도시'까지,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호러'라기 보다는 '호러'라는 장르적 표현을 빌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영원히 살고 싶어한 소년의 뒤틀린 이야기 '피그 블러드 블루스'나 인간이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드레드'는 전형적인 호러 소설에 가깝습니다.[각주:1] 하지만, 단편집의 전반적인 성향과 작가 서문, 그리고 그가 여태까지 쓴 모든 소설들(아동 소설까지 종합)을 보았을 때, 그에게 있어서 호러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단편이기 때문에 좀더 긴 스토리에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가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을 빼면요. 실상, 그가 영화를 맡은 '헬레이져'의 원작 소설 등의 장편을 봐야지 소설가로서 그가 얼마나 완성도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덧.클라이브 바커는 동성애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간의 정사 장면은 잘 캐치하더군요.
은근히 동성애자가 이런데 강한가;
  1. 하지만 잭과 야터링은 호러 소설이라기 보다는 어린이 동화에 가깝습니다. 고양이가 '뻥'하고 터져 죽는것이 어린이 동화라고 보기에는 좀 그렇다는 점을 빼면요. [본문으로]
소설 및 책 이야기



 마이클 코넬리의 스릴러 소설 '시인'은 성범죄 전담 수사 경찰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소설입니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기자이자 피해자의 동생인 주인공 잭 맥커보이의 시점에서 자신의 형을 죽인 연쇄 살인마 시인을 쫒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단, 전체적인 감상평을 이야기하자면 소설 '시인'은 잘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끝이 너무 흐지부지하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소설 '시인'의 가장 좋은 장점은 바로 주인공 잭 멕커보이의 성격 묘사 및 심리를 잘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소설은 철저하게 주인공의 시점과 심리묘사에 할애하고 있고, 이부분의 완성도는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이야기 잭이 형이 죽고 난 다음에 이를 기사로 다루려 하는 욕망과 형을 죽인 살인자를 잡으려는 복수에의 욕망이 서로 부딪히는 장면이나, 형을 죽인 연쇄살인범을 쫒는 와중에서도 특종만을 생각하는 속물적인 본성 등은 잭이란 케릭터의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이는 소설가인 마이클 코넬리가 실제로 기자로 활동한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자가 특종을 잡으려는 욕망이나 취재원과의 미묘한 심리전 등은 소설에 생동감과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덕분에 분량이 몇백페이지가 넘고 1인칭이라는 제한된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소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연쇄살인범 '시인'의 케릭터성입니다. 사실, 소설은 반전으로 '범인은 한명이 아니라, 두명'을 두고 있습니다만, 어느정도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시인'과 글래든의 패턴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인'이라는 연쇄살인마의 케릭터성이나 동기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러한 모습이 제대로 나오기도 전에 소설이 끝난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이는 시인이라는 대단히 변칙적인 연쇄살인마를 묘사하려고 하다보니까 생기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글래든이라는 전형적인 연쇄살인마에 비해서 '시인'은 대단히 변칙적이고 연쇄살인마들의 원칙이나 법칙에서 크게 어긋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왜 연쇄살인마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작가는 기존의 연쇄살인마의 탄생에 대한 이론이나 이야기를 끌어들일 수 없었고, 결국은 그 부분에 대해서 공란으로 비워두고 소설을 마무리 짓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결말부분이 대단히 성급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죠.

 결과적으로 마지막의 결말을 제외하고는 대단히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마무리가 너무 성급하고 미흡했기에 완성도에 큰 오점을 남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작품들이 발상이나 아이디어는 좋은데, 마무리가 성급한 것들이 많아서 아쉽더군요; 소설 '시인'도 그러한 작품 들 중에 하나라고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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