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그림자 군단 및 사무라이에 대한 감상 링크를 첨부합니다.(그림자 군단 / 사무라이)


2차대전 중, 독일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은 나치에 의해 점령된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에 주둔한다.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의 주인 노인과 조카딸은 그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저항과 경멸을 표시한다. 매일 저녁 노인과 조카딸이 있는 서재를 찾아간 폰 에브레낙은 자신의 삶과 고향에 대한 이상적인 이야기들로 침묵을 깨뜨리려 시도한다. 하지만 집주인들의 깨어지지 않는 침묵은 결국 그에게 경외스러운 효과를 미치게 된다.(네이버 영화)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고 한다.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기와 거대 스튜디오랑 작업하던 시기. 바다의 침묵은 자신의 이름을 딴 스튜디오에서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 대표작들인 그림자 군단이나 사무라이, 암흑가의 세 사람에 비교하면 기교적인 부분에서는 투박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바다의 침묵은 멜빌 영화의 정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며, 무엇보다도 나치 점령 중의 프랑스 레지스탕스라는 소재를 '레지스탕스' 없이 표현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바다의 침묵은 침묵과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캐치하여 나치즘의 본질에 대한 통찰, 더 나아가서 그에 대한 저항을 폭력이 아닌 굳게 닫힌 부정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다의 침묵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바로 침묵이다:자신의 집에 불현듯 찾아온 나치 불청객에 대해 프랑스인 노인과 조카딸은 침묵으로 저항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이들이 베르너를 무시하는 방법은 고개를 돌리거나 외면하는 식의 '능동적'인 무시가 아니다. 바다의 침묵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노인과 조카딸이 거실의 의자에 앉아있고 베르너가 그들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으로 채워져있다. 하지만 앉아있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베르너를 향한 적극적인 경멸이나 괄시가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독이자 저항이다. 그것은 프랑스를 독일이 점령했을지라도 인정할 수 없고 꺾을 수 없는 정신이 있다는 것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는 이 둘의 모습을 마치 단단한 바위처럼 묘사하였다. 베르너가 자신의 독백속에서도 매번 거북하게 느끼는 것도 거실에 박혀있는 이 바위같은 노인과 조카딸의 존재감 때문이다.


바다의 침묵은 나치즘을 단순한 거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는 나치 장교의 베르너를 로멘티스트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나치라는 색안경을 끼고 판단하지 않는다. 베르너가 노인과 조카딸의 침묵의 저항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그렇기에 반응없는 독백에도 그는 절제된 예의와 양식미를 보여준다. 그 양식미란 프랑스인들의 침묵과 저항을 이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베르너는 그 침묵과 저항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프랑스를 사랑한다. 문학과 사상, 예술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예술가의 섬세함을 지닌 그에게 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 비극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베르너는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며, 독일과 프랑스의 병합을 통해 그 결합이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병합은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인 개념이 아닌 사상의 결합이라고 베르너는 생각한다. 노인과 조카딸이 흔들리는 것도 그의 독백이 진심이기 때문이며, 그가 점령자가 아닌 진정으로 하나됨을 원하는 예술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섬세한 미장센으로 드러낸다. 노인이 내뿜는 규칙적인 담배 연기, 조카딸의 뜨개질, 내리 깐 눈길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움직임들. 영화는 거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연극적으로 풀어낸다. 


연극적인 베르너의 독백은 그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결합을 끌어내기 위한 시도다. 그의 독백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인 동시에, 결합에 대한 열정이다. 영화는 베르너의 이러한 모습을 진심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 이야기가 독일과 프랑스 간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고 시작에 못박는다. 오히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나치즘과 그에 대한 저항이다. 베르너의 로맨틱한 이야기에는 나치즘에 있었던 이상향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그러나 베르너의 믿음은 순진하다:나치즘이 처음으로 유럽에 새로운 태양을, 하나의 국가를 새워서 진정으로 통합된 이상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베르너의 믿음은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 도달하고 그의 동료들을 만날 때 무너진다:나치즘과 파시즘의 핵심은 단순한 점령이 아닌 하나의 사상을 남겨놓기 위해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베르너가 파리에서 본 것은 저항하는 프랑스인들을 죽이고, 경제적으로 비굴하게 만들고, 문화적으로 절멸시키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는 나치 동료들이었다. 거기서 베르너는 자신이 했었던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자신의 독백은 너무 순진했었던 이상론자의 이야기에 불과했으며, 나치즘은 새로운 이상향을 만드는 것이 아닌 절멸과 재앙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불행한 예술가는 자신이 해왔던 행위에 대해서 노인과 조카딸에게 사과한다. 자신은 결합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닌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한 파괴자였단 것을, 그리고 자신이 이야기했었던 것은 정복자의 역겨운 변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순간에, 노인과 조카딸 역시도 그에게 마음을 열기 직전이었다.(노인은 처음으로 이 때 베르너에게 말을 건다) 서로 이해하려는 순간, 그들은 이 결합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섬세한 예술가가 스스로 한 행위를 속죄하는 방법은 격전지로 나아가는 수동적인 자살이었다:프랑스라는 안락한 점령지를 떠나 국가와 나치의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 군인으로써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렇게 떠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메세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 메세지는 침묵 속에서 프랑스 서적의 인용으로 전달된다(국가의 범죄에 군인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가장 긍지 높은 행위다) 그 침묵속에서 베르너와 노인은 서로를 이어짐을 경험한다. 


바다의 침묵은 저항이라는 나치에 저항하는 행위가 단순히 점령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넘어서는 인간 본연의 저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멜빌의 전기를 대표하는 영화라 할 수 있으며, 레지스탕스라는 역사적 맥락을 넘어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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