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로 동거를 함으로써 연방의 평화와 존엄을 위배했습니다. 유죄를 인정합니까? 1958년, 타 인종간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미국 버지니아 주 서로를 영원히 지켜주고, 언제든 함께하기로 맹세한 ‘러빙 부부’가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러브 스토리.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제프 니콜스의 영화의 축을 이루는 두가지 테마는 가족과 사랑이다. 테이크 쉘터에서는 경제적 아포칼립스 아래 사랑하는 가족이 종말을 목도하는 이야기를, 머드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사랑과 가족의 형태를, 미드나잇 스페셜에서는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사랑으로 가족이 되고 더 나아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본다면 제프 니콜스의 영화는 요즘 시대에 있어서 대단히 '반동적'인 영화라 할 수 있는데, 제프 니콜스가 기반하고 있는 가족과 사랑관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음에도 어딘가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다. 이는 그가 보여주는 영화적 스펙트럼이 미국의 아칸소 같은 시골의 자연풍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선배격이라 할 수 있는 테렌스 멜릭이 거대한 자연 풍광을 통해 인간과 섭리가 하나로 이어짐을 이미 선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릭이 트리 오브 라이프로 자신의 장점을 바람 앞의 티끌마냥 흩날려버릴 동안, 제프 니콜스는 정직하게도 자신이 바라본 것, 자신이 믿는 것만을 이야기하였고 이런 점에서 자신의 스승이자 원본을 넘어섰다.


러빙은, 물론 영화 제작 당시에는 의도치 않았지만, 혐오와 차별이 들끓는 작금의 세태에 정말로 시의적절한 영화다. 금지되어 있는 인종간의 결혼, 거기 정면으로 저항한 부부,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사랑까지. 러빙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드라마'가 들어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러빙의 이야기는 인간과 체제가 맞부딪히는 정치 드라마가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종 간 결혼의 이야기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영화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먼 거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러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권과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닌 지근거리에서 일어나는 러빙 부부의 구체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이야기로부터 영화는 거대한 담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도록 이끌어낸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인내'며, 인내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하지만 러빙의 사랑은 언어적이거나 서사적이지 않다:제프 니콜스는 과거 자신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자연 풍광의 파노라마를 러빙 부부의 포옹 등의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서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전 작품들에 비하자면 러빙은 두 인물을 한 프레임에 담아내는 장면들이 많다. 특히 영화는 두 인물의 시선이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이 많이 배치함으로써 언어적인 표현 없이 두 인물의 감정적 유대감을 표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러빙은 인물이 중심이긴 하지만, 이 두 인물을 다뤄내는 방식은 마치 자연풍광을 다뤄내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조용히 포옹한채로 서로를 응시하고 쓰다듬는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만든다. 마치 이들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과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러빙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소 '반동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는 것이다:러빙 부부는 자신들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버지니아를 떠나 인종간 결혼이 합법이었던 워싱턴으로 갔다가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온다. 인종간 결혼이 합법이었던 곳에 머물렀다면 자신들의 사랑에 어떠한 장벽 없이 그대로 아이들을 기르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러빙 부부는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간 것일까. 물론 영화가 기반하고 있는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영화가 러빙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고자 한 것은 역사를 바꾼 혁명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그러했었던 자연의 섭리대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와 사회에 급진적으로 저항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아닌 농촌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것들이 가장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영화에 그런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러빙 부부의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점이다:러빙 부부에게 연방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고 올라가자고 이야기하는 변호사가 처음 등장하는 시퀸스를 보자. 그의 첫등장은 우스꽝스러우며 '가식적'이다. 그는 연방 대법원까지 소송이 진행되는 것, 더 나아가 소송에 따라서 헌법 그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나, 영화는 그를 러빙 부부와 대비되는 존재로 그려낸다. 어딘가 도회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번잡한 사람. 흥미롭게도 이 번잡한 사람들, 도회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러빙 부부가 대하는 태도는 상반된다. 남편은 이들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을 지킬 수 있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내는 다른 것을 본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타인에게 희망과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영화는 이 둘이 소송을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대비되게 그려내지만, 그것이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게 만든다. 부부는 사랑으로 이어져있지만,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것은 갈등이 아니라 공존이며, 이 공존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이어져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연방 대법원은 러빙 부부의 손을 들어주고 미 연방의 헌법은 이로 인해 새로운 수정 조항을 추가하게 된다. 미국의 역사에 길이남을 순간, 그리고 러빙 부부이 겪어온 오랜 고난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에 영화는 어떠한 클라이맥스나 극적 감정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는 장면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부부가 처음 결혼을 약속하고 집을 짓기로 한 그 장소로 돌아와 집을 짓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마치 원래 그러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러빙은 다소 반동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중력을 갖고 있는 영화다:그것은 연어가 고향을 찾아 회귀하듯이,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 아래서 가족을 구성하고 서로 다른 사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장 원초적인 공존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과 인내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러빙은 제프 니콜스의 필모그래피에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빛날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