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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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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패스파인더는 파이조가 만들며, 던전 앤 드래곤 3.5판을 베이스로 하여 던전 앤 드래곤의 방계로 취급받고 있는 TRPG다. 한 때, 던전 앤 드래곤이 4판으로 해매고 있을 동안 파이조는 던전 앤 드래곤의 3.75 버전으로 불리는 패스파인더를 통해서 던전 앤 드래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자적인 파이를 차지하였고, 이제는 판타지 TRPG 중에서는 던전 앤 드래곤의 다음을 차지하는 확고한 2인자 자리를 확보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확고한 자리에도 불구하고, 패스파인더 TRPG는 패스파인더 ACG의 등장 이전까지 여타 TRPG와 다르게 장르 바깥으로의 확장에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패스파인더 ACG와 패드/스마트폰으로 이식된 패스파인더 ACG : 룬로드의 부활은 패스파인더 프랜차이즈의 외연적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인 동시에, TRPG와 CRPG 사이의 회색지대로써 보드게임과 카드게임이 갖고 있는 속성을 잘 표현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패스파인더 ACG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TRPG로 하는 카드게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RPG는 전통적으로 문장으로 이루어져있는 게임이다. 게이머들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플레이어의 입(또는 타이핑)을 통해 자유롭게 구술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TRPG의 속성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에 빠지기 쉬운 자유도라는 개념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자유도가 컴퓨터 게임에 있어 얼마나 플레이어가 자유로운가를 표현하는 애매모호한 정의와 다르게, TRPG의 핵심은 모든 행위가 문장으로 선언되기 때문에 문장에서 발생하는 뉘앙스의 차이, 케릭터의 연기 등의 기존 CRPG 등에서 발견되기 힘든 독특한 성질들이 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질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TRPG는 규칙을 통해 플레이어 구술의 바운더리를 묶어둔다.


 하지만 카드 게임이나 보드 게임은 TRPG 같은 게임들의 갖고 있는 문장으로 발현되는 언어를 컴포넌트라는 제약된 환경에 묶어둔다. 그렇기에 카드게임/보드게임의 언어는 구술되는 문장이 아닌 준비되어있는 언어의 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준비된 언어들은 규칙이라는 외부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를 통해서 문장이 어떤 식으로 배열되는지,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응을 제약하거나 이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다. 카드 게임과 보드 게임의 특징들은 분명 TRPG와 컴퓨터 게임의 중간적 위치라 할 수 있으며, 몇몇 사람들에게는 굳이 TRPG/컴퓨터 게임을 할 것이지 왜 이걸 해야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푸념을 들을만한 소지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TRPG가 자신만의 언어로 TRPG의 규칙 내에서 게임을 풀어나가는데 있어 상당한 훈련과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에 반해서 보드게임/카드게임은 준비되어있는 문장과 규칙을 이용해서 누구라도 쉽게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또한 컴포넌트의 세겨진 일러스트와 피규어의 조형 등은 게이머에게 심미안적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스크린으로 재현되는 것과는 분명하게 다른 질감을 드러내며, 서로 대결하거나 협동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게임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컴퓨터 게임에서 경험할 수 없는 깊이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패스파인더 ACG는 기본적으로 카드게임의 규칙을 가져온다:플레이어들은 자신만의 덱을 구성하고, 장소덱을 한장 한장 확인하면서 빌런과 그 하수인 카드들을 추적하여 제거해야 한다. 각각의 카드는 통과해야 하는 굴림 체크를 갖고 있으며, 플레이어들은 TRPG와 비슷하게 다양한 능력과 장비를 조합해서 주사위 풀을 늘려서 굴림체크를 통과하여야 하며, 굴림체크를 통과한 카드들을 자원으로 재활용하거나 덱빌딩을 통해서 난관을 해쳐나가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카드를 이용하고 주사위 굴림으로 판정을 하거나 판정을 거친 카드가 다시 자원으로 충당되는 일련의 과정을 마치 TRPG를 재현하는 것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예를 들어서 전사의 경우, 손패에 들 수 있는 카드 수가 한정되어 있지만, 그만큼 데미지를 입을 때 버리는 손패가 적고 덱에 변수는 적지만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법사의 경우, 한 번에 들 수 있는 손패가 많지만 동시에 버리는 손패 수도 많을 뿐더러 손패 제한이 늘어남에 따라 덱회전이 빨라서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성직자는 범용 카드인 축복을 이용해 장소덱들을 빠르게 탐험하거나 다른 케릭터들의 주사위 풀을 늘려주는 등의 적극적인 지원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게임은 카드라는 구문 외적으로 규칙을 활용하여 각각의 케릭터 직업이 갖는 플레이 스타일과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패스파인더 ACG는 덱빌딩 게임과 TRPG를 교묘하게 섞고 있다:장소덱들은 몬스터 외에도 장비나 아이템, 마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나리오와 덱의 넘버링이 올라갈 수록 이전에 보지 못했던 강력한 카드를 볼 가능성이 높아진다(기본적으로 장소덱은 시나리오 덱 확장에 포함되어 있는 비슷한 수준의 카드를 기반으로 구성된다) 그렇기에 장소덱을 한장 한장 뒤집어서 확인하는 것은 단순히 빌런과 하수인을 추적하는 지루한 작업이 아닌, 플레이어가 더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라 할 수 있으며, 이 탐험의 재미와 굴림체크 및 카드 확보를 통해서 케릭터가 강해지는 과정이야말로 패스파인더 ACG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CRPG에서 경험치를 통해서 레벨업을 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덱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케릭터가 어떤 존재인지를 묘사하고 애착을 가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TRPG가 기본적으로 케릭터가 연기 등의 내연, 외연적으로 복잡하게 확장되는 부분들을 패스파인더 ACG는 플레이어가 강해지는 부분으로 단순화 시킨다. 준비되어있는 구문과 구문을 연결시키는 점에서 패스파인더 ACG는 카드게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게임의 경험을 구현하는 베이스 장르가 TRPG라는 점은 높게 평가할만하다.


패스파인더 ACG는 최대 6명의 플레이어를 지원하며, 전체 게임 클리어를 위해서 긴 세션(적어도 몇 주 단위의)으로 진행할 것을 전제로 한다. 게임은 덱빌딩 요소 외에도 다양한 장소와 시나리오를 제공한다. 흥미로운 점은 장소 카드의 특성과 시나리오 카드의 특성의 결합으로 똑같은 장소카드의 규칙이라도 전체 시나리오에 비추어 보았을 때 동일한 플레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게임의 개별 세션이 앞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하지만, 게임의 스토리텔링적인 부분에 있어서 백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가 없는 것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크나큰 단점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고 보여진다.


결론적으로 패스파인더 ACG는 TRPG는 하기 힘들지만 그보다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보드게임으로 살 경우 한 시즌이 20만원 상당이 들어가는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아이패드나 스마트폰 전용으로 출시된 룬로드의 부활은 30달러 전후의 가격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운로드 받아서 처음 무료 부분만 진행해보셔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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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이제 곧 크리스마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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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다소 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에서는 영웅이라는 테마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논리와 규칙을 뛰어넘는 자로서의 영웅. 마츠모토 타이요는 어린아이가 믿을법한 동화 속 세계의 영웅들이 현실의 무서움을, 고통을 뛰어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츠모토 타이요는 그 영웅의 어두운 속성마저도 세심하게 케치해낸다. 넘버 파이브에서 파이브는 자신의 전우이자 형제였던 자들을 한명 한명 사냥해나간다. 철콘 근크리트에서 쿠로는 시로가 없는 세계에서 홀로 폭주한다. 타이요는 자칫 잘못하면 무거워지거나 복잡해지는 이야기를 특유의 흑백의 이분법적인 세계에서 세밀하게 캐치해내며, 어린이들의 발상과 상상력에 기반해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츠모토 타이요는 세상의 복잡한 이야기들을 유치하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단순하게 다뤄내어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만화가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마인드 게임과 케모노즈메,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애니메이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감독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표현과 선들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다른 영상 장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 만의 독특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는 자유롭게 변화하며 모든 것들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살아있지 않은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의 어원인 Animate(강신하다, 살아 움직이게 만들다)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감성을 가진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고 하였을 때, 어떻게 보면 정말로 준비된 감독이 작품을 맡았다 평할 수 있었다.


핑퐁 애니메이션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품이다. 하지만 유아사 마사아키가 만들어내는 핑퐁의 애니메이션은 그저 만화 버전의 복제라고 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점은 핑퐁 애니메이션은 핑퐁 만화버전의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은 전적으로 영웅은 일반적인 사람들, 우리라 할 수 없으며 영웅은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일상에 남아 날아오르는 영웅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비관론이나 열패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고요히 영웅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영웅이 날아오르는 과정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의 매마른 필치로 서술되는 그림들은 어딘가 황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다:타이요는 순간 순간 중요한 장면을 선의 굵기로, 동적인 필치로 감상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분명 영웅을 긍정한다. 모든 논리와 규칙을 뛰어넘는 자, 가장 필요할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며 영감을 주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어떤 패배주의적 감상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타이요는 고요히 영웅이 없는 세계를 그려낸다. 쓸쓸한 바닷가에서 바닷가 너머의 영웅을 반추하면서 말이다.


흑백의 매마른 색조속에서 표현되는 만화 핑퐁의 세계는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총천연색의 새로운 맥락을 지니게 된다. 즉, 매체적 차이에서 오는 맥락의 변화로 인해 우리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똑같이 애니메이션에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유아사의 위대함은 그 장르적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시대의 변화(핑퐁 원작은 90년대 후반의 그려진 작품이지만, 유아사의 작품은 2010년대에 만들어졌다)를 작품에 교묘하게 접합시키며, 더 나아가 약간의 뉘앙스 차이로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원작보다 더 나은 원작을 만들겠답시고 재앙을 불러일으켰던 걸 생각한다면, 유아사의 태도는 실로 존경스럽다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유아사의 핑퐁은 기본적으로 타이요의 핑퐁과 똑같이 영웅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영웅은 존재한다. 영웅은 우리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며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긍정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이요의 핑퐁은 흑백의 세계로 이를 묘사하는데 반해서, 유아사의 핑퐁은 이를 천연색으로 묘사를 한다. 그렇기에 타이요의 핑퐁에는 없는 독특한 생기가 유아사의 핑퐁에는 흐르게 된다. 그리고 유아사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미지와 사고의 흐름은 이를 더욱 가속시킨다. 만화의 칸들을 연상시키듯이 분절되는 시퀸스 내에서 컷을 하나하나 구성하며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탁구공과 라켓이 내는 경쾌한 소리의 리듬은 마치 작품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후반으로 갈수록 유아사의 핑퐁은 탁구공이 오고가는 시퀸스를 애니메이션, 아니 심지어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롱테이크로 만들어냄으로써 작품을 보는 감상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게 된다.


타이요가 어딘가 메마른 감성으로 이를 묘사하는데 집중하였다면, 유아사의 총천연색 자유로운 감성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은 일종의 축제이다:유아사의 핑퐁은 핑퐁이라는 작품 자체를 거대한 축제로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현실의 메마른 논리 속에서 한 명 두 명 조용히 사라졌던 타이요의 핑퐁과 다르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참여의 기회를 주려 한다. 바로 '탁구'로 하나되는 세계, 꿈과 희망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재밌는 점은 타이요가 꿈과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오지 않음을 긍정하는 것을 유아사 역시도 긍정한다는 것이다:결국 페코는 카자마에게 날개가 있음을 증명하였지만, 카자마은 호시노 만큼 날아오를 수 없다. 스마일 역시도 마찬가지며, 결말 역시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유아사는 총천연색의 세계와 함꼐 아주 세밀한 디테일들을 틀어버림으로써 결말의 뉘앙스를 180도 바꾸는데 성공한다. 극 중 모든 인물들은 탁구라는 매체 아래 묶여있으며, 각자의 삶을 산다. 모두가 영웅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영웅이 꾸는 꿈을 함께 꾸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유아사는 믿는다. 그렇기에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다시끔 여름(페코와 스마일이 탁구 대회에 나갔던)이 온다고 이야기하는 타이요의 핑퐁과 다르게, 유아사의 핑퐁은 다시금 (축제의) 여름이 온다고 이야기한다. 장르적 특성을 십분활용함으로써 디테일을 바꿈으로써, 유아사 마사아키는 동일한 작품을 별도의 시나리오 수정 없이 완벽하게 대칭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아니 내게 있어서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본인은 본인 인생에 가장 힘든 순간에 유아사 마사아키의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보았고, 이를 글로 풀어낸 적이 있었다(http://leviathan.tistory.com/1501 5년전의 일이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 어떻게 글을 쓰고 컨텐츠를 소비할 것인가 고민하는 본인에게 핑퐁은 불현듯 다시 돌아왔다(물론 이걸 본 건 재작년의 일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본인이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브컬처는 그저 즐기고 잊어버리는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닐 것이다. 본인이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한 작품이 있었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진 못했더라도 그 순간에 함께 하고 영감을 주었다는 점만으로 영원히 기억될 작품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크나큰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영웅이 될 수 없을지라도, 영웅과 함께 꿈을 꾸고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유아사의 핑퐁은 서브컬처의 세대라 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끝으로 핑퐁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과 가사를 함꼐 올리며 글을 끝내도록 하겠다.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도 바짝 쫄아서 나오려 하지 않아.
길이 너무 곧게 뻗어서 도망칠수도 없어.
선택에도 길이 없어서(명상중!)
혼자서는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서(망상중!)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서 자기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나는 세계에 단 한명뿐이야,
언제나 세계에 단 한명뿐이야.

그런데 하는게 좀...

나만 할 수 있는 일 같은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야?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냐고?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 같냐고!

뭐라든!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을 알고 싶은것 뿐이야!

게임 이야기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가 만든 엑스윙 미니어처 게임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흥미로운 조언이 있다: 언제나 아미 로스터를 짤 때는 그 '지역 매장'의 메타를 생각하면서 짜라. PC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표현은 대단히 생소할 것이다. 물론 메타라는 단어 자체는 이미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익숙한 개념( 게임에 있어서 우세한 전략이나 전술, 게임 운영법 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역 매장'의 메타를 항상 염두에 두라니? 하지만 이러한 조금 이해가 안되는 조언은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미니어처 게임은 어디까지나 실물의 미니어처를 사용해서 게임을 진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게이머가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장소와 환경이 필요로 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미니어처 게이머들은 이러한 장소와 환경을 모두 충족하는 결절 지점(지역 보드 게임 및 미니어처 매장)으로 모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엑스윙의 메타는 절대적으로 우세한 메타를 지니는 PC 게임들과 다르게 지역단위로 쪼개질 수 밖에 없다:미니어처 게임이라는 물리적/게임 장르적 특징들이 게이머가 만날 수 있는 상대와 전략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인프라의 발달은 미니어처 게임이라도 메타의 연구와 공유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엑스윙 미니어처의 사례와 같은 종종 게임을 둘러싼 유형/무형의 환경이 게임의 내연과 외연을 확장하는 것(혹은 역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우리는 이것을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라고 지칭할 수 있으며, 이러한 문화의 가능성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플레이하지 않는 게임에서는 새로운 문화는 등장할 수 없다:문화란 공유되는 속성이기 때문에 집단의 규모가 작아지면 작아질 수록 그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게임 회사들이 자신들만의 '자체 플랫폼'에 게이머들을 얽메어 두려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플랫폼이란 단순히 게임과 서비스가 유통되는 파이프라인이 아니다:플랫폼은 게임 제작사들이 게이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규정하는 의사소통과 사고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게이머들이 같은 플랫폼 아래서 묶여있다면, 제작사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소비자들이 자신의 한 게임에서 다른 게임을 소비하는 것을 유도할 수 있다.


게임이 DLC와 업데이트를 통해서 하나의 완결된 상품이 아닌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 개념으로 이행함으로써, 제작사들은 직접적으로 매출에 기여하지는 않지만 게이머들이 게임 외적으로 즐길 수 있는 즐길거리들을 게이머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보통 이러한 것들의 일반적인 결과물들이 바로 E스포츠라 할 수 있을 것이다:E스포츠는 그야말로 게이밍 문화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무언가라 할 수 있다. 이기기 위해서 시스템의 헛점과 한계를 교묘하게 이용하기 까지 하는(스타크래프트 1 리그에서 버로우한 럴커를 시즈 탱크 스플래시 사격으로 죽이듯이) E스포츠는 멀티플레이라는 게이밍 환경이 보급된 이후 근 20년간 게이밍 문화를 설명하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야심찬 게임 제작사들은 자신의 게임을 E스포츠화 하는 것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게이밍 문화는 변화하고 있다:더이상 이기기 위한 메타와 E스포츠는 모든 게임 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기제가 될 수 없게 되었으며, 특히 게임 방송의 등장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즐기는 게이밍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더이상 게이머는 다른 게이머의 경쟁상대거나 협동상대가 될 필요가 없어졌다. 한 게이머는 방송으로 다른 게이머의 관객이 될 수 있으며, 게이머는 게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관객의 수요에 상응하는 배우가 된다. 많은 유튜브 게임 스트리머들이 어느 면에선 훌륭한 배우(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희곡 배우와는 다르지만)의 자질을 띄는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초기 게임 영상물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제임스 롤프(AVGN)가 아마추어 영화 감독이었고, 그의 영상물에 B급 영화의 문법과 페러디들을 결부시킨 것도 단순히 넘겨짚을 사항은 아닐 것이다. 즉, 이제 게임은 경쟁/협동 뿐만 아니라 게임을 즐기는 환경과 문화,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게이머들이나 자신마저도 게임을 즐기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게임을 즐기는 방법은 '승리'만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물론 여전히 타인과의 경쟁/협동은 게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이러한 대전제가 바뀔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공유'하기 위해서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가령, LOL에서 징크스의 등장과 함께 많은 게이머들이 징크스의 '성능'과 별개로 징크스를 플레이해보고 싶다라고 적극적인 의사를 표했었던 경우를 보자. 이 때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들이 게임물을 흐린다고 욕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눈살찌푸려지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였지만, 핵심은 '이기기 위해서 플레이 하는 것'이 아닌 '케릭터가 마음에 들어서 플레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항상 있었던 부분이기도 하다:게이머들은 게임뿐만 아니라 게임에 있는 콘텐츠나 표현 양태에 끌려서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SNS 등의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서 빠르게 전파되고 공유되는 양태는 이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인프라의 발전이 일구어낸 게이밍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버워치나 동방 프로젝트의 경우는 게임 위에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덧대여져 만들어진, 그야말로 게임과 게이밍 문화의 복합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복잡한 맥락과 소비 양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에 알고 있었던 게임의 컨텐츠의 방향성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스팁의 사례를 보자. 스팁은 SSX나 토니 혹스의 프로 스케이터 같은 묘기를 부리는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이 다뤄지는 양태는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독특함을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스팁은 전적으로 고프로(몸 등에 붙여서 스포츠, 격한 상황을 촬영하는데 사용하는 액션캠 브랜드) 감성에 근거하고 있다:게임의 모든 시도와 실패, 성공들은 녹화되고 기록하기 편하게 관리되며, 게임은 넓은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을 독려한다. 게임은 짧지만 반복적인 단위로 끊어지며, 게이머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더 나은 묘기를 시도하게 된다. 기존의 게임들이 긴 호흡으로 영화 같은 플롯과 장엄함을 강조한 나머지, 게임 방송으로써는 부적합한(한번 체험한 이후 그 컨텐츠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양태를 띄었다면 스팁 같은 게임의 경우 게임 방송이나 영상물 제작을 많은 부분 염두에 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게임 문화의 변화는 우리가 이전에는 보지 못했었던 게임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다큐멘터리 장르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루한 영화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는 어떤 극적 구성이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반전도, 충격적인 진실도, 징벌과 포상받아 마땅한 선과 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는 오로지 사실만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다큐멘터리가 갖는 이 장르적 특징이 다큐멘터리를 가장 보기 힘든 지루한 장르로 만들었다. 또한 사실의 나열이라는 측면에서 다큐멘터리는 다른 매체들(책과 같은 기록 매체)에 비해서 하등 나아보일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는 '영화' 장르는 다른 사실의 기록 매체들과 다른 힘을 갖고 있으며, 몇몇 다큐멘터리들은 종종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경계를 벗어나기도 한다.


밤과 안개는 유대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처음 공개될 당시, 영화 속에 담겨 있던 끔찍한 기록 영상들은 수많은 논란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30분에 불과한 이 짧은 다큐멘터리는 유대인 학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공개된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밤과 안개는 다큐멘터리의 걸작이자 우리에게 무거운 울림을 가져다 주는 작품이다.


밤과 안개의 미학적 핵심은 사실의 '재현'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재구성이나 다큐멘터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고발과는 다르다. 우선, 극적인 재구성은 일정한 흐름(플룻)에 따라서 이야기의 화소를 재배치하고, 프레임과 컷, 쇼트를 구성한다. 물론 밤과 안개 역시도 유대인이 '처리'되는 과정을 기록물 영상에 따라 배치함으로써 추방-격리-처리라는 나치 독일 유대인 '처리' 프로세스 3단계의 큰 그림을 보여준다. 하지만, 밤과 안개의 그것은 작품을 만든 창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밤과 안개에서 기록물과 나래이션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최대한 담담하게 서술하고자 하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태가 마치 일상적으로 있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묘사한다.


그렇다면 밤과 안개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고자 한 것일까? 물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미덕 중 하나는 숨겨져있던 사실을 재조명하여 고발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고발이란 보통 단순한 과거 사실의 폭로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저 과거 사실의 고발이란 현재의 사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우리는 나치 독일의 부역자들이 적극적인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소극적인 동조자들, 나치를 막지 않았던 독일의 일반 시민들, 더 나아가서 그들이 그 지경에 이르기 까지 침묵으로 동조했던 세계의 열강과 국제 정세, 사상적 흐름, 시대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들을 나치와 히틀러라는 표상에게 뒤집어씌우고 수많은 이들이 침묵했었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은연중에 나마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밤과 안개는 이를 지목하고자 한 것일까? 어느정도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밤과 안개는 우리가 눈돌리고자 했었던 비인간적인 행태를 다루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사실을 고발하여 지금 현재의 구체적인 사실을 고발하고자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적 고발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과거의 사실로부터 새로운 현재의 사실을 이어서, 충격과 깨달음을 주는 일종의 계몽적인 역할을 자처하였다면, 밤과 안개에는 현재의 구체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 진술하였던 '재현'으로 돌아와서 집중하여야 한다:영화는 컬러로 표현된 현대의 수용소에 도착해서, 그 위에 흑백의 영상을 덧입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밤과 안개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킴으로써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데 집중한다. 그것은 마치 현재와 과거는 연결되어 있고, 과거의 끔찍했었던 경험들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같이 살아숨쉬고 우리를 짓누르는듯이 느껴지게 만든다. 알렝 레네가 밤과 안개를 통해서 만들어내고자 한 것은 과거의 사실이 현재의 사실로 1대1 대응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 사실에 대한 고발도,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사실의 재구성도 아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현실에 입히는 것, 그것이 여전히 현실에 맞닿아있으며 이후의 우리들은 어떤 도덕적 책임을 져야하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이 밤과 안개가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재현은 때로는 우리에게 사실의 고발보다 더욱 무거운 질문을 맞딱뜨리게 만든다: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독재정권에 납치당한 사람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광활한 사막을 하염없이 해매이던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은 어떠한 도덕적 규탄을 주장하지 않고, 사실을 고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무거움이 프레임 바깥의 감상자들에게 전달된다. 또한 침묵의 시선에서 학살자들의 추억을 조용히 지켜보는 프레임 바깥의 희생자 가족의 모습을 보라. 그가 갇혀 있는 무거움은 단순히 학살자들에 대한 규탄과 비난과는 다른 무거움, 그들이 인고했어야 했었던 크나큰 고뇌를 전달한다. 바시르와의 왈츠를은 어떠한가? 현실에 덧입혀진 애니메이션을 벗김으로써, 나도 거기 있었다 라고 학살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목격자의 증언을 현실과 이미지를 절묘하게 섞어서 그 충격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조류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부분들은 바로 도덕적 규범에 대한 훈육이 아닌, 가장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을 침잠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덧씌우고 그것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재현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알렝 레네의 밤과 안개는 컬러와 흑백을 오가며 마치 이 모든 참혹한 현장들의 현재 일어나는 것과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구체적인 사실의 고발이 아닌 불연속적인 시간을 마치 연속적인 것처럼 연결지어 시적인 슬픔을 불러일으키며, 어떤 주의나 사상, 이념을 넘어 우리가 인간으로써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도덕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갖게 만든다. 그 어떠한 고발보다도, 그 어떠한 드라마보다도 밤과 안개가 그려내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기억은 현재에도 그 고통스러운 기억과 질문, 고뇌를 훌륭하게 현대적으로 재현해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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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연속 땜빵이라니 퍽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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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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핳하 땜빵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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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마가 또 영문 모를 것을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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