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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아 힘들고 우울하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1년, 뉴욕 그 곳에 사랑이 있었을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 엘리스 섬에 도착한 ‘에바’. 동행한 여동생의 입국 거부로 맨하탄의 빈민가에 혼자 남겨진 그녀는 댄스홀 밴디츠 루스트 ‘브루노’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 만남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되고, 삶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한편, 운명처럼 마주친 ‘올란도’는 그녀에게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데…사랑을 가져본 적 없는 호스트, ‘브루노’, 사랑에 흔들릴 수 없는 여인, ‘에바’, 사랑도 가지고 노는 마술사, ‘올란도’. 살기 위해 사랑했던 시대에 만난 세 남녀, 새로운 인생을 꿈꿨던 그들의 운명이 엇갈린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감상을 쓸 때마다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를 인용하고 있지만,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는 오로지 이야기의 반만을 다루고 있다. 이민자는 사랑에 대한 문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전형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대부분은 전형성의 탈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영화적 흐름을 보여주는 일이 많으며, 이것은 더 야즈나 투 러버스의 리뷰에서도 다루었던 부분이기는 하다. 마치 영화 노 맨즈 랜드 같은 씁쓸한 부조리극을 밝은 코미디 극처럼 포장을 했었던 마케팅과 같이, 영화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에게 있어서 장르적 전형성에 근거하여 영화를 홍보하고 설명하는 것은 편리한 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잘못 이해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투 러버스를 감상하는 관객들은 시놉시스를 믿으면서 동시에 믿지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 영화가 어떤 의미와 맥락에서 다루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세계는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그리고 그 공동체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안착하려는 욕구,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섬세하며 오묘한 모습을 제임스 그레이는 포착한다. 이는 가족이 주는 사랑의 이중성에 대한 감독 개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사랑이라는 개념을 양가적이며 중력에 비유(끌여당겨지며, 동시에 그 끌여당겨짐에 저항하는)하는 모습은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가 이러한 복잡 오묘한 세계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로 쓰는 이야기의 구도가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서사라는 것이다:더 야드나 리틀 오데사는 돌아온 범죄자 탕아라는 범죄물의 구도를 다루었다. 그리고 투 러버스는 전형적인 멜로물의 이야기 서사 뼈대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무언가 내용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이야기가 아닌, 선인도 악인도 없는 양가적이고도 섬세하며 축축하게 젖어 무거워진 세계이다. 


이민자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한 여인을 매춘부로 만드는 포주에 대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선과 악이 구분되는 세계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내에서 브루노가 진정으로 악한인가? 관객들은 영화 내에서 몇몇 섬세한 장면들(에바의 발에 입을 맞추는 브루노)을 통해서 그가 전형적인 악한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에바에게 빠져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째서 그는 에바를 매춘부로 착취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한국영화인 나쁜 남자(김기덕 감독)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매춘부로 만들어 착취한다는 이야기의 구도는 이민자와 나쁜남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며, 동시에 기존의 멜로드라마 서사에 반하는 불쾌하며 미묘한 지점이다. 하지만 나쁜남자가 사랑에 대한 중산층 서사(사랑은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에 거대한 빅엿을 먹여주는 흐름이었다면(이는 감독의 출신 배경 및 성향에 근거하고 있다), 이민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다르다. 김기덕의 나쁜남자가 중산층의 판타지를 거칠게 부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민자는 대단히 섬세하게 그것을 뒤틀며 장르로써의 멜로드라마에서의 사랑이라는 관념과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의 사랑이라는 관념을 접합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의 사랑은 다음과 같은 제임스 그레이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아버지는 나에게 영화감독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있다." 사랑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하는 사람을 납작하게 붙잡는 힘을 갖기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은 바운더리 내에 묶고자 하는 것, 그것이 때로는 엄청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제임스 그레이는 인지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가족을 증오하기도 하지만(가족을 증오하는 영화는 가족을 사랑하는 영화만큼 수가 많다), 제임스 그레이가 이들보다 더 높게 부상하는 것은 가족(또는 가족과 유사한 커뮤니티)에 대해서 사랑하면서 떠나고 싶은 것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훌륭하게 잡아낸다는데 있다:투 러버스에서 어머니는 떠나는 아들을 축복하며 배웅한다, 더 야드에서 삼촌은 끝까지 자신의 사촌을 감싸안으려 한다, 리틀 오데사에서는 돌아온 탕아는 동생을 사랑한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가 훌륭한 것은 가족이란 커뮤니티의 중력과 그에 얽메이는 감각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 있는 가치가 '진정성 있게' 느껴지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들은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라는 커뮤니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리고 이는 감독 자신의 출신 배경이기도 하다):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 이민자는 제임스 그레이 버전의 대부 2편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1차세계 대전의 전화를 피해서, 핍박받았던 구세계로부터 이민자들은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구세계와 동일한 착취와 핍박이었다. 이는 브루노와 에바로 대변되는 폴란드 계 유대인 이민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국이라는 커뮤니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란 국가란 근본적으로 이민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이민자들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정체성을 지니는 유사 가족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하는 외국인들이 거치는 엘리스 섬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의 시퀸스처럼,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올랐던 에바 자매의 희망이 외부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쉽게 무너지는지(아감벤이 이야기했었던 입국심사장의 난민 같은 호모 사케르적인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바를 외국인이 아닌 이민자의 유사 가족 공동체에 받아주는 브루노를 통해서 어떻게 이민자들의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브루노의 유사가족 공동체는 동시에 '착취'의 커뮤니티이기도 하다:먼저 온 이민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후에 온 이민자들을 착취하거나 구시대적인 명분 아래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내친다. 이는 남성(포주)과 여성(매춘부)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에바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내치는 이모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 내에서 여성 구성원에 대해서 갖는 어떤 공감의 정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권위를 갖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에바의 이모부와 이를 중재하는 여성의 존재인 이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그레이는 그 어느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으며, 답을 내리지 않은채 양가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착취인 동시에 동등한 관계(일을 하면 급여를 받는다)의 위태로운 균형이 브루노와 그의 공동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올란도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복잡하게 꼬여간다. 엘리스 섬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마술을 보여주는 올란도의 모습은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는 미국이라는 공간의 매력이자 이민자들의 희망을 대변한다. 하지만 올란도의 등장에 대해서 브루노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히스테리의 정서는 일반적인 연적 또는 삼각관계에서 느끼는 감성이 아니다:올란도는 이민자의 공동체를 벗어난 미국이라는 희망과 환상에 매료된(그의 직업이 마술사임을 상기하자) 이전 구성원이며, 자신의 공동체의 구성원인 에바를 '미국적 가치'에 오염시킬 것 같은 탕아다. 이런 점에서 에바에 대해서 갖는 브루노의 감정은 여성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공동체를 지배하는 가부장의 권위로도 읽힐 수 있다:즉, 브루노의 사랑은 아버지된 자의 권위로써,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사랑이다. 그가 이끄는 이민자의 공동체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고, 브루노의 질서 내에서 공동체는 가족적인 '사랑'으로 묶인다. 하지만 이 사랑은 진정하긴 하지만 족쇄인 동시에 폭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란도가 빈 총으로 브루노를 위협할 때(어떻게 보면 미국이란 희망이 갖는 과격한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전통과 자신의 출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온 자유로운 구성원에 대하여), 브루노는 우발적으로 올란도를 죽여버리게 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민자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세계에 있어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사랑이 아닌 새로운 요소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고통'이다. 에바가 러시아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브루노는 에바의 고해를 엿듣는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이민선에서 강간당하고 문란한 여인으로 낙인찍혔다는 그녀의 고통을 알게 된다. 또한 에바는 브루노가 누명을 쓴 자신을 위해서 경찰에게 폭행당하고 현금을 갈취당하는 것을 엿보며 브루노의 고통을 목격한다. 에바가 이모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듯, 브루노와 에바는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여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가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시퀸스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또다시 '전통'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고해성사를 고통을 이해하는 모티브로 차용함으로써, 이민자의 전통에서 이민자라는 커뮤니티와 중력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속삭이는 것과 훔쳐보는 것, 엿듣는 것과 같은 극히 은밀하고 섬세한 장면들을 훌륭하게 캐치해낸다. 비단 이민자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 침묵속에서 지친 사람들이 서로 기대거나 섬세한 동작들로 서로와 교류하는 장면들을 잡아낸다. 에바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 첫 손님을 받게 하는 시퀸스에서 관객들은 브루노가 에바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로 에바를 옭아메는 폭력을 가하고 있음을 동시에 캐치해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브루노의 이야기가 감언이설이 아닌 어떤 '진정성'마저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이 상황의 복잡미묘함을 섬세하게 캐치해낸 감독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인 고해성사를 엿듣는 장면 역시, 각자의 고통에 갇히는 것이 아닌 내밀한 고통을 듣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가능성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곳곳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한 커뮤니티의 가장 내밀한 감정의 흐름을 포착해내며, 어느 감정이나 결론에 치우치지 않는 양가적인 감정, 차오르지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마지막, 에바는 동생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떠나고, 브루노는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흥미로운 점은 리틀 오데사에서 도망치듯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주인공이나, 투 러버스에서 결국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과 다르게 에바와 브루노는 분명하게도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해어진다는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가 자신의 영화 인생의 기원(러시아 유대인 공동체이자 미국 이민자 커뮤니티)을 이민자라는 영화를 통해 구현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결말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이제 겨우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였건만, 그들은 이제 서로를 등지고 떠난다. 심지어 같은 프레임 내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는 프레임 너머로 사라지는 이 둘을 관객이 중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공동체이자 가능성의 암시다:가족이나 공동체라는 중력에 얽메이는 것이 아닌 중력을 벗어난 공동체, 그 어디에도 편재할 수 있는 공동체의 가능성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는 그의 영화의 기원이자 영화 인생이 전환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

이것도 삼...

언차티드 4, 둠, 배틀본에 이어서 오버워치까지 리뷰를 써야하는 상황...




게임 이야기


우리는 한번쯤 왜 거의 대부분의 aos 게임에서 온갖 이상한 케릭터들이 활보하는 게임 내에서 꼭 '활든 여성/남성' 스테레오 타입이 등장하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케릭터가 등장하는 배경과 이유야말로 aos 장르라는 게임을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Aos 장르는 클래스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케릭터'가 등장한다:클래스와 케릭터를 구분하여 게이머의 개성과 플레이스타일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그 속에서 온라인 rpg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밀도 높은 성장과 장비 구입, 팀원과의 협동 및 경쟁이 모두 한 데 집약하여 만든 것이 바로 aos 장르인 것이다. 그리고 AOS 장르는 장르 구분에 있어서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독특함을 보여준다:각각의 게임 장르는 하나의 '표현 양식'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게임 문법과 규칙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FPS의 경우에는 1인칭 슈터라는 아주 명확하고도 제한적인 장르 구분을 지칭하며, TPS는 3인칭 시점의 카메라를 사용하는 게임으로 구분된다. 물론 장르간의 벽을 허무는 다양한 게임들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그 장르적인 인용의 출처는 명확한 편이었다. 하지만 AOS라는 장르가 등장하게 되면서, 게임에 있어서 전통적인 장르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우리의 의문으로 돌아와보자:어째서 클래스가 아니라 케릭터인것인가? AOS에서 각각의 케릭터들은 하나의 '기성품'으로서 소비된다. 하나의 케릭터가 MMO 장르에서 완성되려면 수많은 시간이 소비가 된다. 하지만 AOS를 표방하는 게임에서는 길게는 한시간에서 짧게는 20분 사이에 하나의 '케릭터'가 완성된다. 이들은 각기 짜여져 있는 특성과 제한되어있는 장비 풀 내에서 자신의 게임 스타일을 대변하는 존재를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게이머가 MMORPG에서 자신의 케릭터에 애착을 갖게 만들기 위한 과정을 단시간 내에 풀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어느정도 완성되어 있는' 양식을 갖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식들은 게이머가 그 케릭터를 보고 케릭터의 육성에서 운영까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충분히 '기성화'된 형태를 띄게 된다. 그렇기에 AOS 장르 내에서 DOTA에서 나온 케릭터가 LOL에서 나오고, LOL에서 나온 케릭터가 다시 다른 AOS 게임에서 나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활을 쏘는 케릭터가 aos에 꼭 한명씩 등장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도타 같은 초기 작품에서 등장한 영향도 있겠지만 aos 장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워크래프트 방식의 rts장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기본 원거리 케릭터(궁수)라는 점도 한 몫할 것이며, 소위 '스나이퍼' 또는 원거리형 케릭터로 분류되는 플레이스타일의 가장 기본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똑같이 AOS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지는 오버워치(게임의 플레이스타일 보다는 클레스가 아닌 케릭터로 기성화된 게임 시스템 부분에서)나 배틀본에서는 똑같이 활을 쓰는 케릭터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AOS 장르에서 보여주던 활 쏘는 케릭터와는 사뭇 다른 독특한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오버워치의 한조는 트리키한 파쿠르 움직임과 적 감지 능력, 그리고 파괴적인 화력을 갖고 있으며, 배틀본의 쏘른은 생존력이 떨어지는 대신에 다른 케릭터에 비해 단일 타겟 및 광역 공격 양쪽에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존 AOS 장르의 활든 케릭터들과 이들이 다른 이유는 간단하다:기존의 AOS 장르들이 워크래프트 방식의 탑뷰 방식의 RTS 를 취하고 있다면, 오버워치나 배틀본은 AOS의 장르적 특색을 끌어오면서도 FPS라는 표현방식을 통해서 이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장르 구분하에서 본다면 우리는 보통 이 두 형태의 게임을(RTS 장르 형식 상에서의 AOS, FPS 장르 형식 상에서의 AOS) 다른 형태의 게임 장르(RTS와 FPS)로 봐야할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AOS 장르라는 '단일한' 장르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AOS 장르를 두고 해당 장르의 정체성 문제에 있어서 많은 설왕설래가 오고 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AOS 장르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이것이 AOS 장르다'라는 뚜렷한 키워드가 없다. 앞서 이야기한 AOS 장르의 정의는 뜯어본다면 게이머가 '받아들이는' 경험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FPS나 TPS, 퍼즐, 액션 같은 장르적인 전통과 구분이 아닌, 어떠한 특정 경험(MMO 상에서 케릭터를 키우고 강해지는 과정을 압축하는 것)을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즉, AOS 장르는 게임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문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간장르적 장르(하나의 경험을 실현하기 위해서 다양한 장르를 뒤섞는 것)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활을 든 케릭터는 어떻게 본다면, 게이머가 갖고 있는 게임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AOS 장르라 규정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어떤 고정된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을 만들어내기 위함을 고려한다면 AOS 장르는 여지껏 시도해본적이 없는 독특한 영역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FPS와 AOS가 결합되는 것을 넘어서, TPS와 AOS의 결합도 가능하고 심지어는 퍼즐이나 어드벤처, 플랫포밍과 AOS 장르와의 극단적인 결합도 가능하다 할 수 있는 것이다.(물론 AOS와 TPS가 결합한 에픽 소프트의 파라곤의 경우도 있지만, 파라곤은 AOS라는 장르가 하나의 고정된 형태라는 착각에 빠져서 너무나 충직하게 LOL이나 도타를 인용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즉, 게임은 3인칭 액션 게임보다는 LOL을 3인칭 시점으로 옮기고 그래픽을 업그레이드한 모습처럼 보인다.) 물론 AOS는 완전한 가능성만을 갖고 있지 않다:AOS는 짧은 시간 내에 성장-경쟁-승리를 얻어내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게임들보다도 게임 집중도와 요구 기술숙련도가 높고, 그에 비레해서 피로도도 높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가볍게 즐기는 AOS(히오스 같은?)들도 존재한다고 하지만, AOS의 본질이 짧은 시간 내에 하나의 게임 사이클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AOS 장르가 본질적으로 '가벼운 장르'인 것인지는 의문이라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이번 주는 글 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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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으앙 출근...




게임 이야기






배틀필드 1과 콜 오브 듀티:인피니트 워페어가 공개되었다. 콜 오브 듀티 인피니트 워페어는 트레일러 중간에 우주로 올라가면서 게임의 무대가 지구를 넘어서 태양계(토성의 고리가 보인다)로 전쟁의 범위를 넓혔으며, 배틀필드 1은 메이저 게임 회사들이 다루지 않았던 1차세계대전을 다루었다. 평상시라면 이러한 발표는 빅 뉴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지금의 흐름에서 이들의 판단이 그렇게 놀라운 것은 아니다:현대전은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이후로 10년간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왔었고 그 콘텐츠의 수명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콜옵 시리즈 자체도 블랙옵스 2 이후로 현대전을 탈피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배틀필드 마저도 현대전이 아닌 '현대 경찰전'인 하드라인을 만들어냈다.


콜옵이 이러한 흐름을 보여준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본인이 자주 이야기했었던 것은 의외로 콜옵은 진보적인 축에 포함되는 게임이며, 미래전을 선점하고자 했었던 콜옵의 노력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배틀필드 1의 등장이다. 배틀필드가 늦든 빠르든 콜옵과의 경쟁에서 새로운 카드를 꺼내야할 필요성을 다이스나 게이머나 모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은 예상치 못한 카드였다:현대전의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의 참호전과 가스, 그리고 실험무기로써의 탱크가 존재했었던 전쟁을 배틀필드 1은 당당하게 자신의 다음 무대로 선정한 것이었다. 이것이 훌륭한 선택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배틀필드 3와 모던 워페어 3의 대접전이 일어났던 5년전의 상황이 지금 현재 2016년 다시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고 흥미로운 점은 단순하게 두 프랜차이즈가 접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 과거와 미래라는 극단적인 두 트렌드의 충돌인 것이다.


어째서 과거와 미래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너무나 단순하다:이제 더이상 현재의 FPS 트렌드에서 보여줄 것이 없다. 모던워페어와 팀포 2, 바이오쇼크 같은 게임들이 현재의 FPS를 규정하였던 2007년 이후로 FPS 게임들은 그들의 틀 내에서 자신만의 해석과 새로움을 덧대어서 발전해나갔다. 그것이 점점 쌓여나가고, 기술과 소비 계층의 발전 역시 쌓이게 되니 이제 구태의연한 과거를 반복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둠의 등장, 타이탄폴-데스티니-이볼브로 이어지는 새로운 FPS의 시도들은 이러한 흐름이 배틀필드 1과 콜 오브 듀티 인피니트 워페어로 이어지는 FPS 양대 산맥의 충돌로 이어지게 되었다. FPS 장르나 게임의 정의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이제 일반 게이머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시화 되고 있다. 과거와 미래의 간극은 바로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자 패러다임 변화의 징후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2011년 콜옵 3와 배틀필드 3의 충돌이 싱거웠던 결말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이벤트들이 뭔가 극단적이고도 드라마틱한 결과로 쉽사리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것도 노련한 게이머라면 눈치채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제 게임은 작년과 같고 재작년과 같았던 비슷한 것들이 지배하던 시기가 이제 곧 끝나고 새로운(혹은 우리가 새롭다고 느껴질만한) 트렌드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콜옵과 배틀필드 신작은 올 하반기 발매예정이다.




게임 이야기



*블러드본 리뷰(http://leviathan.tistory.com/2065)와 다크소울 2 리뷰(http://leviathan.tistory.com/1856)에 베이스를 두고 있습니다.


*엔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하나의 게임를 구성하는 '테마'는 매우 중요하다:게이머가 게임을 통해서 얻는 경험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다크소울 1과 2는 게임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테마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소울 시리즈는 단순히 어려운 것을 넘어서 실패를 통해 학습하고 더 나은 실패를 하며, 더 나아가 실패를 뛰어넘어 성공을 거두고 성취감이라는 쾌감을 달성하는 게임의 가장 기본적인 재미와 구조를 극대화시켰다. 그리고 프롬 소프트는 죽음이라는 테마를 통해서 이러한 경험을 하나로 엮어낸다:불사의 저주를 받은 망자와 반복되는 죽음, 빛바래고 뒤틀려버린 게임 속의 세계, 인간성에 이끌리는 백령과 인간성을 찬탈하기 위해 침입하는 암령이라는 설정과 멀티플레이 시스템 등등. 게임 내의 모든 요소들은 세계관과 게이머의 경험과 함께 맞물려 들어가며 하나의 잊지 못할 기억을 게이머들에게 선사한다. 소울 시리즈가 단순히 '어려운' 게임이라는 것과 불친절하고 죽기만 더럽게 죽는다는 악명을 뛰어넘어 게이머를 끌어들이는 위대함을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들일 것이다.


다크소울 3는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전환점이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다크소울 3의 게임 플레이가 기존의 소울 시리즈에 비교한다면 무기의 개성이 뚜렷해지고 무기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전기가 추가된 것을 제외한다면(이러한 무기의 개성이 뚜렷해진 것은 블러드본에서 이루어진 실험도 한몫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다크소울 2가 다크소울 1편의 훌륭한 '후속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처럼, 게임 플레이는 여전히 '소울 시리즈' 스러운 악의와 어려움으로 변함없이 가득차 있다. 또한 여전히 다른 게이머들이 남긴 흔적들을 잘 관찰하고 천천히 게임을 풀어나간다면 게임이 오히려 '부드럽게' 풀린다는 점도 기존 소울 시리즈와 유사하다. 그러나 다크소울 3가 소울 시리즈의 전환점이라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게임 시스템의 변화한 것 때문이 아닌 게임의 '테마' 자체가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테마를 다루기에 앞서서 3편에서 대대적으로 변화한 무기 시스템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전기는 각 무기마다 존재하는 일종의 '필살기'와 같은 개념으로 집중력(FP, Focus Point)을 소모하여 발동할 수 있으며(집중력 포인트가 없어도 발동할 수 있지만, 그 위력이 심히 떨어진다.), 전기의 추가에 따라 다크소울3는 무기에 따라 전기, 모션과 리치 등이 다양하게 분화시켰다. 일견 블러드본의 변이 무기 시스템과 각각 무기의 개성이 뚜렷한 점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블러드본의 극단적인 변화와 구분되게 다크소울 3는 여전히 소울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스태미너 회복속도는 블러드본에 비해서 느리며, 회피를 난타하기 보다는 정확한 순간에 회피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굳건한 가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크소울 3가 블러드본을 받아들이면서 취하고자 했던 것은 완벽한 새로움이 아닌, 기존 소울 시리즈의 게임 플레이 스타일을 좀 더 다양하고 세련된 형태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전기나 모션의 변화는 게임 내의 PVE 콘텐츠에 대해서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었다고 평할 수 없다.


이러한 전기와 차별화되고 개성적인 무기군이 진면목을 드러내는 분야는 바로 PVP다:오른손 무기의 전기, 패리되는 방패와의 조합, 양손 잡기, 쌍수 무기 등의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지고, 건실한 가드와 틈 노리기가 중심이 되는 PVE와 다르게 상대에 따라서 변칙적인 무기 운용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 PVP의 경우 전작들에 비해서 플레이 스타일을 다변화하였다 할 수 있다. 특히 PVE 중엔 NPC들과 싸우는 곳에서 무기의 다양한 개성이 드러난다고 평할 수 있는데, 방패를 들고 가드를 하면 전기를 이용해서 가드를 부수고 치명공격을 한다던가 등의 다양하면서도 개발자들이 생각하는 '표준적'인 움직임을 NPC들이 보여주고 있으며, 게이머 역시도 이들과 싸우면서 이들의 움직임이나 자세, 플레이 스타일을 따라하거나 다른 방법을 쓰거나 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좀 더 시간이 지난다면 전기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싸우는 모습을 PVP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현재 자검+대방패 나 직검류(특히 다크소드)의 강세 등 벨런스 이슈가 있긴 하지만, 과거 시리즈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벨런스가 맞춰졌음을 고려한다면 지금 현재의 상황을 고정적이라 평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이 바뀐것 보다 다크소울 3에 있어서 더 중요해진 것은 바로 '게임 테마의 변화'이다:다크소울 1편과 2편에서는 '죽음'이라는 테마는 서사나 게임 시스템, 심지어는 마케팅 부분에 있어서도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키워드였다. 게임 내의 케릭터는 죽을 수 없는 망자이고, 반복되는 죽음의 순환과 멸망하는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렇기에 게임 내에서 죽음은 실패가 아닌 학습이며 반복의 기제로 작용한다:몇몇 구간은 아예 죽어야만 도달할 수 있으며, 죽지 않으면 도저히 간파 불가능한(물론 다른 사람들이 남긴 메세지를 잘 관찰하면 되기도 하지만) 함정과 적들의 움직임 등이 도처에 넘쳐난다. 그렇기에 게임은 마케팅을 통해서 죽을 준비를 하라(Prepare to Die, 다크소울 1)와 죽음을 넘어서라(Go beyond Death, 다크소울 2)라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계속되는 죽음에 피폐해지는 케릭터의 모습과 게이머의 정신 상태, 인간성에 이끌리는 암령과 백령, 그리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성취까지 소울 시리즈는 죽음이라는 테마를 통해서 모든 것을 구축하고 게이머를 매료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다크소울 3가 다크소울 1이나 2의 테마를 완전히 폐기한 것은 아니다:오히려 다크소울 3는 이러한 테마를 정면으로 계승하여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낸다. 다크소울 3의 주된 테마는 재와 잔불이다. 게이머는 재의 전사로써 이제 완전히 망해가는 세계 속에서 세계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불을 구하기 위해서 장작의 왕들을 사냥해야 한다. 소울 시리즈는 대대로 '불의 계승'이라는 테마 자체가 중요하게 등장하였지만, 다크소울 3가 특이한 부분이 있다면 불의 계승과 함께 '재'라는 테마는 매우 중요하게 등장시키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 서사적인 부분에서 스테이지 배치에 극도로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게이머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한때는 웅중하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었겠지만 천천히 쇠락하며 빛바래가는 세계를 목도하게 된다. 마치 다 타버린 장작 더미 속의 재처럼, 세계의 모든 것은 시간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말라붙고(그을린 호수) 얼어붙었으며(아노르 론도와 이루실), 부패하여 가라앉거나(팔란의 성체) 하는 등의 다양하지만 통일된 테마를 게임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다크소울 3가 이전 소울 시리즈와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뛰어나다고 평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테마의 통일성과 함께, 이를 구현하는 기술적인 쾌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러드본을 통해서 보여준 기존 소울 시리즈와 차별화된 거대한 스테이지와 배경 구조물 등등이 다크소울 3에 접목되었기에 매력적인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게이머는 망자를 넘어서 불꺼진 재로써 불을 원하는 존재로 변모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 시리즈의 '망자' 설정과 개념,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하긴 한다:그것은 숨겨진 엔딩과 관련이 있는 서사로써, 불의 시대 이후에 올 어둠의 시대에 대한 서사와 시스템이다(검은 구멍에 의한 공짜 레벨업, 이벤트 등등) 하지만 기본적인 서사는 불 꺼진 자들이 불의 온기와 힘을 원하여 자신보다 더 거대하고 위대한 존재들에게 도전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서 세상의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징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전 소울 시리즈와 차별화되는 다크소울 3만의 특징은 '능동성'이다:3편의 캐치프레이즈는 재는 잔불을 원한다(Ash Seekth Ember)이며, 이전 시리즈들이 죽음이라는 피동적이며 가학적인 상황에 맞서서 살아남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다크소울 3는 마치 재의 귀인들이 장작의 왕이라는 거대한 도전과 시련에 이끌리고 매료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게임은 이전의 시리즈에 비해서 '성숙해진'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게임이 게임 내의 서사와 게이머의 능동적인 경험(이전의 시리즈에서 경험하였던 경험까지 포함하여) 사이의 간극을 침묵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시적인 감성들이다:엘드리치에 의해서 황폐해진 아노르 론도의 모습, 로스란의 높은 벽에서 바라보았던 로스란 왕궁을 게이머가 직접 올라갔을 때의 성취감, 이루실에 걸려있는 회화들(1편부터 3편까지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등등 게임은 게이머가 절경과 슬픔, 소울 시리즈의 역사를 침묵하여 받아들이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서사를 곳곳에 마련하였다. 다크소울 3의 서사는 이전 작들에 비해서 더욱 게이머의 능동적인 감상을 유도하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종합하자면 다크소울 3의 성취는 단순한 소울 시리즈의 종착점,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블러드본의 극단적인 변이를 통해서 소울 시리즈 기반의 게임이 어떻게 새로운 모습을 띌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면, 다크소울 3는 소울 시리즈가 더이상 고전적인 게임 경험(가학적일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와 불친절함, 반복되는 죽음, 그 사이에서 게이머가 게임을 자발적으로 학습하고 극복하여 성취감을 얻어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도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즉, 다크소울 3는 소울 시리즈의 테마를 뛰어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며, 프롬 소프트가 소울 시리즈를 통해서 거둔 성취와 완숙함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게임 개발자들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성숙을 의미하기도 한다:다크소울 3은 소울 시리즈를 즐긴 사람들에 대한 헌정인 동시에, 소울 시리즈를 처음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피동적으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닌 도전적으로 게임에 뛰어드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보장하는 게임이다. 이는 게이머들이 죽음이라는 실패를 짜증나는 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걸맞는 호적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정착되었기 때문에 다크소울 3 같은 완숙한 게임이 등장하게 된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다크소울 3는 더이상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임'이란 타이틀을 갖는 것이 아닌 '도전적이고도 어렵지만 동시에 게이머가 능동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게임'이란 타이틀이 소울 시리즈에 적합하다는 것을 제작자들과 게이머들 모두의 노력으로 멋지게 입증하였다. 


다크소울 3의 엔딩은 그렇기에 한 프랜차이즈를 종결 짓는데 있어서 완벽한 형태를 띄고 있다. 다크소울 3에는 다양한 엔딩이 있지만, 그 중에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하는 엔딩은 화방녀를 불러 불의 시대를 종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불을 다시 불러오려 한들, 불은 이미 사그라들었다. 그렇기에 화방녀가 눈을 갖고 바라본 세계는 불이 완전히 사그라든 어둠의 세계이며,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불의 계승자들은 계속해서 계승의 순환고리(장작의 왕을 사냥하는 재의 귀인, 불의 계승, 그리고 다시 반복)에 집착한다. 하지만 불을 거두면서 도래하는 어둠의 시대로부터 위대했던 왕들이 계승하였던 잔불들이 다시끔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종말이 단순하게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는 것을 게임은 은연중에 암시한다. 소울 시리즈는 다크소울 3를 통해서 끝날지언정, 그것이 진정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프롬 소프트가 소울 시리즈가 아닌 다른 게임을 만들든 혹은 소울 시리즈로부터 영감을 받은 다른 게임이 그들의 유지를 계승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크소울 3는 진정으로 소울 시리즈 최후의 작품에 걸맞는 아름답고 장엄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태초의 불이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이제 곧 암흑이 찾아오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암흑 속에 작은 불꽃들이 나타날 겁니다. 왕들이 계승해온 잔불이.


재의 귀인이여, 아직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화방녀, 불의 계승의 끝 엔딩에서

게임 이야기



리뷰하고 글은 착실하게 쓰고 있는 중...

다만 책읽는거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 오늘 글은 안올라옵니다.

대신 5/6일에 쉬게 되니 그때가서 글 올리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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