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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영웅에게 진정한 결말은 죽음뿐이다.
영웅은 목숨이 위태로울지라도 죽음 앞에서 굽히지 않는다.

영웅은 자신도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다.

남겨진 이들이 그의 희생에서 희망을 찾고 그를 알았던 이들이
그의 굽힐줄 모르는 충절과 확고한 신념, 
때가 왔을 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최후의 의지를 말하게 하라.

전설은 살아있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맞이할 뿐.

이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배트맨은 그렇게 죽었다.
This is how it happened. This is how the Batman dies.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트맨 아캄 시리즈를 리뷰하는 데 있어서 숙지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배트맨 아캄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이전에 있었던 훌륭한 게임들이나 대중문화를 모지아크한 게임들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잠입 액션 게임의 은신 기제나 프리 플로우의 배이스가 되었던 페르시아 왕자 시간의 모래 시리즈의 전투들, CSI의 연출을 받았다고 보여지는 탐정 모드 등등에서 아캄 시리즈는 무언가 새롭다기 보다는 검증된 기존의 것들을 끌고 오는데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존의 것들이 따로 겉돌면서 놀지 않고 하나의 게임으로 구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구성이나 게임 플래이 완급 조절 등의 락스테디의 완숙한 개발력 외에도 이들의 요소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배트맨 아캄 시리즈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특히 아캄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아캄 나이트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구심점인 배트맨이라는 케릭터와 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스토리에 대한 고찰이다.


고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배트맨 아캄 나이트가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전제에 대해서 논하여야 한다. 아캄 나이트는 전적으로 편의주의적인 설정들을 전제로 차용하고 있다:스케어크로우의 협박에 의해서 고담 시의 시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고담시를 대피하고 고담시에는 폭동과 파괴를 즐기는 악당들과 스케어크로우와 아캄나이트 일당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자유롭게 고담시를 배트모빌로 박살내면서 돌아다닐 수 있다. 또한 배트모빌로 사람을 치더라도, 치이기 전에 전기 충격으로 사람을 튕겨낸다는 다소 황당하고 편의적인 설정과 묘사를 꺼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한 도시가 모두 대피하는 소동에도 불구하고 초반 고든 청장의 전화를 통해 드러나듯 군대나 연방정부의 개입은 없다. 또한 사람을 자동차로 치고 돌아다녀도 죽는 사람 하나 없다. 뭔가 곰곰히 생각하면 이 설정들은 뭔가 이상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왜 이 '국가적'인 사태에도 불구하고 배트맨과 고담 경찰 이외에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걸까? 어째서 배트맨이 배트모빌로 사람을 치고 돌아다니는데도 악당들은 하나도 죽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편의적인 설정은 배트맨 프랜차이즈에서 자주 발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고담이 지진으로 붕괴된 노 맨스 랜드 이슈를 보자. 하나의 도시가 붕괴하였는데도 미국이라는 정부는 수수방관할 뿐이다. 오로지 배트맨과 경찰들, 그리고 빌런들이 고담의 통제권을 두고 서로 충돌한다. 또한 조커 등의 빌런들의 존재는 어떠한가? 그들이 벌이는 연쇄살인과 범죄의 규모는 고담의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않을 뿐, 사실상 악랄한 범죄이며 FBI나 다른 국가 기관의 이목을 끌만큼 화려하고 잔인하며 문제적이다. 왜 이들의 체포나 통제를 오로지 고담시 경찰과 배트맨에게만 맡기는가? 


배트맨 시리즈에서 이런 편의적인 설정들과 외부적 존재를 배제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케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자 하기 위함이다. 배트맨 아캄 나이트는 배트맨이라는 케릭터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배트맨을 중심으로 재편한다. 심지어 아캄 시리즈는 빌런들조차도 배트맨이라는 케릭터를 묘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배트모빌의 편의적인 설정도 이것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다소 선을 나가버리기는 했지만, 배트모빌로 사람을 쳐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킨다는 것 자체가 배트맨이라는 케릭터가 얼마나 불살을 중요시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캄 나이트는 이러한 전제를 기반으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였을까? 아캄 나이트는 아캄 시리즈의 마지막으로서 배트맨이란 영웅의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그렇기에 영웅은 자신과 같이 싸우고자 하는 몇 안되는 친우들과 함께 몰려오는 아캄 나이트의 군대와 맞서 싸우며, 자신이 여지껏 맞이한 적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아캄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마주하는 빌런들은 배트맨이 마주하는 고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자신의 실패(아캄 나이트=제이슨 토드=레드 후드), 광기(조커의 피를 수혈받아 생긴 광기), 그리고 이 둘로 인해서 배트맨이 느끼는 공포(스케어크로우)까지. 배트맨을 둘러싼 빌런들의 삼각 편대는 이전의 아캄 시리즈에서 보지 못했었던 극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첫번째로 살펴 볼 빌런은 조커이다:사실 아캄 나이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빌런은 조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하게 그는 아캄 시티에서 죽었다. 그의 '육신'은 말이다. 하지만 아캄 시티에서 그는 타이탄 약물의 부작용으로 독극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피를 배트맨과 몇몇 사람들에게 수혈하는데 성공하였고, 아캄 나이트에서는 조커의 피를 수혈받은 사람들은 조커 같은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아캄 시티에서 죽음을 맞이한 조커가 아캄 나이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조커의 피를 수혈받은 배트맨이 게임 내내 조커의 환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정상적인 척을 하다가 조커화 된 사람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배트맨에게 총을 겨눈 헨리는 배트맨을 보고 '가장 순혈의 조커만이 남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살을 한다. 왜 배트맨은 가장 조커에 가까운 존재로 변하게 된 것일까? 이는 조커라는 케릭터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이해하여야 한다.


배트맨 코믹스의 조커는 아마도 코믹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빌런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커는 그의 광기 넘치는 행동과 무질서를 지향하는 행위들, 그리고 기원이 없다는 점에서 신비로움과 함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케릭터는 이야기에서 붕뜨기 쉽다:케릭터는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되어 있기 때문에 완벽한 광기와 무질서의 상징이나 은유, 비유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배트맨 코믹스의 다른 빌런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원'을 갖고 있다. 빌런들은 이 기원에서 시작하여 자신만의 생명력 있는 이야기를 갖게 되며, 독자들은 이들에 매료되게 된다. 하지만 조커는 이들과는 다른 이야기 전략을 취함으로써 이야기에 붕뜨지 않고 안착하며,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화한다. 조커의 광기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변화한다:투 페이스에겐 두명의 인격 중 한 명을 죽이겠다고 위협한다던가, 할리 퀸젤에게는 너는 그저 수많은 할리 퀸 중 한명에 불과하다고 한다던가, 고든 청장에게는 그를 붙잡아두고 발가벗겨진 채 피흘리며 죽어가는 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조커가 광기와 혼돈을 드러내는 방식은 각자의 인물에 따른 '최악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조커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이야기에 안착시킨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생체적인' 케릭터다.


그렇기에 조커의 피를 수혈받은 사람들은 조커의 인격이 덧씌워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조커가 되어간 것'이었다. 크리스티나 벨은 배트맨을 향한 조커의 집착과 히스테리를, 조니 카리스마는 조커의 매력적인 부분을, 복서는 조커의 폭력적인 부분이 발현되었다. 그렇기에 아이러니 하게도 배트맨은 가장 최고의 조커가 될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미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다양한 코믹스에서 케릭터가 재해석되었듯이, 배트맨이란 케릭터는 그 자신 내부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광기와 분노를 갖고 있는 미치광이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기도 하다. 배트맨의 기원은 범죄에 의해서 부모를 잃었다는 트라우마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러한 트라우마와 함께 범죄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범죄자들이 마땅히 두려워 해야한다는 공포의 상징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움직이는 주요한 동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커는 배트맨의 광기를 깊숙하게 파고든다:각각의 로빈들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비평하며 배트맨의 신경을 긁기도 하며, 끊임없이 부모의 죽음과 탈리아 알 굴의 죽음을 건드려서 배트맨의 죄책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조커는 끊임없이 배트맨이 세운 자신만의 규칙과 원칙들, 고담시를 수호하며 아무도 죽이지 않고 범죄자들에게 대가를 치루게 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그의 내면에서부터 뒤엎어버리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배트맨이 갖고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의 문제이기도 하다:영웅은 사회를 구원하는 자인가, 아니면 법 밖에서 자신만의 철권을 휘두르는 자인가? 그의 규칙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은 대체 누가 보장을 한단 말인가? 자경단원 배트맨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와 아슬아슬한 한계들은 조커가 발현될 수 있는 최적의 양분이라 할 수 있다. 즉, 아캄 나이트의 조커는 조커 인격과 기억의 복사가 아닌 배트맨의 '일부'인 것이다. 


조커의 등장 이후, 배트맨은 그가 점점 조커의 피에 의해서 미쳐가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었던 한계들에 뿌리를 박고 이를 양분삼아 점점 커져만 가는 조커가 자신을 각양각색의 패드립으로 피폐하게 만듬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강철같은 침묵의 부정으로 저항한다. 이는 '게임'이라는 매체에 정말로 어울리는 연출이라 할 수 있다:조커는 모든 이벤트에 머리를 들이밀며 배트맨의 신경을 긁지만, 배트맨은 여기에 답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고 거기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는 배트맨이 했을 법한 행동이기도 하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동시에 배트맨이 갖고 있었던 가장 내밀한 광기와 비밀, 죄책감을 공유하면서 배트맨 역시 인간임을 이해하게 만든다. 배트맨은 강철같은 의지력으로 조커의 도발에 침묵하며 그가 강한 의지력을 가진 인물임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가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기에 배트맨 내면의 조커는 그야말로 천재적인 발상이자 배트맨과 조커의 케릭터 모두를 훌륭하게 이해하는 묘사이기도 하다.


두번째는 아캄 나이트다:아캄 나이트의 존재는 배트맨이 두려워 하는 '실패' 그 자체이다. 조커가 보여주는 환상에서 배트맨은 바바라가 조커의 손에 의해서 반신불수가 되는 모습을, 그리고 2대 로빈인 제이슨 토드가 고문 당하면서 망가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것이 비롯 온전하게 그의 잘못이 아니더라 하더라도, 이러한 배트맨의 실패는 그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긴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주변 사람들이 말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자신이 모든 일을 감당하고자 한다:3대 로빈 팀 드레이크에게 바바라가 죽은 사실을 숨겨서 그가 날뛰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1대 로빈이자 나이트윙인 딕 그레이슨을 잃을 것을 두려워 그에게 고담 시를 떠나있으라고 이야기하기 한다. 또한 바바라가 납치되었을 때, 사실 바바라의 납치는 자신의 잘못임을 고든에게 인정하는 배트맨의 모습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슬픔과 고뇌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배트맨의 실패가 낳은 뒤틀린 결과물이 바로 조커로부터 구하지 못한 2대 로빈인 제이슨 토드=아캄 나이트=레드 후드이다.


아캄 나이트가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하고 있는 복장과 행동들이다:아캄 나이트는 배트맨과 유사한 가면을 사용하면서 전반적으로 배트맨과 유사한 복장을 보여주지만, 배트맨과 차별되게 군대식의 디지털 카모와 총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트맨이 특수부대들이 10년 뒤에나 쓸법한 기술들을 사용하면서도 검은 갑옷과 불살의 원칙, 총을 사용하지 않는 모습들을 통해서 자신을 원칙을 가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캄 나이트는 군대의 문법을 차용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사람을 거침없이 죽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캄 나이트의 가르침을 받은 용병들은 배트맨이 어떻게 싸우고 배트맨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배트맨을 죽이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만으로 배트맨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괴한다. 즉, 아캄 나이트의 방법론과 배트맨의 방법론은 어딘가 유사한듯 하지만 양립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제이슨 토드는 배트맨의 실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배트맨은 그를 구하는데 실패하였고, 망가져버린 제이슨 토드에게는 배트맨이 그에게 전수하였던 원칙과 신념이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제이슨 토드의 미성숙하고 불안정한 모습은 배트맨의 실패에서 비롯된 자신의 트라우마(조커에게 무려 1년동안 고문당하며 몸과 마음이 파괴되었지만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배트맨과 유사하다. 하지만 배트맨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자신의 원칙과 신념 아래 묶어서 통제한 반면, 제이슨 토드는 자신을 구해내지 못한 배트맨을 향해 분노와 증오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쏟아내고자 한다. 결국 신념과 원칙이 없는 방법론은 결국 방향을 잃고 파괴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되며, 배트맨과의 싸움을 통해서 그를 죽이길 포기하였어도 제이슨 토드는 레드후드가 되어서 범죄자를 가차없이 죽이는, 그저 방향성만 달리한 안티 히어로가 된다. 아캄 나이트 제이슨 토드와의 싸움은 배트맨에게 있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아들과도 같은 제자와의 싸움이자 자신의 실패가 만들어낸 그림자와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스케어크로우다:스케어크로우는 배트맨의 실패와 광기에 대한 공포를 파고든다. 배트맨은 외계인도 아니며 초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배트맨이란 영웅의 본질은 재산이나 최첨단 기술, 육체적 단련, 공포를 표상하는 상징이 아닌 자신의 규칙과 원칙을 지키며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범죄자들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인간의 의지'이다. 스케어크로우는 고담 시를 파괴함으로써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의지력의 표상인 배트맨이 고담을 구하는 것을 실패하고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는 영웅 배트맨은 그저 인간에 불과하며, 그의 의지를 꺾음으로 공포를 인간이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전세계에 단순한 화학 작용인 공포 가스 이상의 공포와 절망을 안겨주고자 한 것이다. 


실제 스케어크로우는 거의 성공하였다:스케어크로우는 공포 가스를 흡입한 배트맨에게 머릿 속의 조커라는 끔찍한 광기를 발현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으며, 아캄 나이트인 제이슨 토드는 배트맨의 가면 아래 숨겨진 정체의 비밀을 이용하여 배트맨에게 실패에 대한 고통을 안겨주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배트맨이 느끼는 최악의 공포는 자신이 지켜왔던 가치와 규칙을 스스로가 무너뜨리는 것이다. 실제 클라이맥스 직전에 배트맨은 스케어크로우에게 끌려가는 도중 자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 환영을 보게 된다. 그는 무수히 덤벼오는 조커들과 싸우다 조커의 목을 꺾어 죽이는데, 비록 환상속이긴 하지만 배트맨은 그의 의지로 그의 원칙중 하나였던 불살의 원칙을 어기게 된다. 그리고 원칙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혼돈(=조커)을 수반한다. 배트맨 자신이 갖고 있었던 광기의 잠재력이 이 원칙의 붕괴로 인해 가속화되며, 스케어크로우에 의해서 처음 공포 약물을 투약당했을 때 그의 내면 속에 있었던 조커가 배트맨의 육체를 지배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끔찍한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 꺾이지 않는 인간의 의지력이 있다.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를 예로 들어 보자:한순간에 자신의 아내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조커와 부모를 잃어버린 배트맨이 그들의 트라우마로 인해서 그 트라우마의 영향 아래 각자의 길을 걷게 되고, 조커와 배트맨의 기원을 통해서 서로의 동질감을 느끼게 만든 것이 킬링 조크의 훌륭한 점이다. 그러나 조커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최악의 하루를 경험하면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고든을 미치게 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또한 배트맨은 그의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과 신념, 그리고 이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서 망가지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아무리 끔찍한 일을 당하더라도 꺾이지 않는 신념과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킬링 조크는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커의 인격이 나온 배트맨을 보며 당황한 스케어크로우가 배트맨에게 두번째 약물을 투여할 때, 배트맨은 망각이라는 조커의 최악의 공포(조커가 기생체적인 케릭터라면, 역으로 그는 사람들이 망각하는 것, 혼돈과 광기를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진정으로 두려워 할 것이다)로부터 되돌아 온다. 나는 복수다, 나는 밤이다, 나는 배트맨이다I am the Vengeance, I am the Night, I am the Batman이라는 배트맨의 선언은 악인이라면 마땅히 두려워 해야하는 공포이며 선인에게는 어둠 속에서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영감과 희망을 주는 배트맨이란 영웅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 배트맨이란 케릭터를 락스테디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게임의 마케팅을 위해서 만들어진 배트맨이 되어라Be the Batman라는 트레일러가 있다:여기서 평범한 사람들이 공포와 불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잊고 옳은 일을 하는 모습을 게임 속 배트맨의 모습과 연결시킴으로서 배트맨과 플레이어를 등치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트레일러나 마케팅을 통해서 락스테디는 배트맨이 이야기한 대사에서 주어인 나 'I'(=배트맨)를 제외하고 복수가 되어라, 밤이 되어라, 배트맨이 되어라Be Vengeance, Be the Night, Be the Batman이라는 구호를 씀으로써, 누구나 배트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락스테디는 아캄 나이트를 통해서 배트맨의 본질이 재산도, 단련된 육체도, 공포의 상징인 그의 가면이 아닌 바로 자신의 원칙과 신념,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의지력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플레이어들에게 경험하게 하고자 만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배트맨은 원칙이자 신념이며 상징이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다:그의 가면이 벗겨짐으로써 그가 범죄자들이 마땅히 두려워 해야하는 인간 이상의 상징이 아닌 인간임이 증명되었을 때, 그는 인간의 법과 원칙에 얽메이게 된다. 배트맨의 가면은 그의 진짜 신분을 숨김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법 바깥에서 법을 수호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면이 더이상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을 때, 그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그를 법과 도덕의 심판대에 놓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웅은 스스로 법과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 헌신하였고, 그러한 심판을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자 한다. 문제는 인간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이 그의 전설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설은 살아있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맞이할 뿐Legends live on. Only Man comes to an end라는 표현처럼, 영웅의 최후의 임무는 자기 자신을 배제하고 상징만을 남겨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배트맨은 나이트폴 프로토콜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배트맨 가면 밑의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물을 지워버린다. 그의 지위, 재산, 친구 등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궁극의 희생을 통해서 그는 배트맨이라는 상징을,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영감을 얻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스토리 측면에서 아캄 나이트는 배트맨 코믹스에 대한 훌륭한 해석과 케릭터에 대한 존중을 통해서 만들어진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락스테디는 배트맨이 마주하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을 배트맨을 중심으로 훌륭하게 묘사함으로써, 영웅이란 단순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였다. 그렇기에 배트맨 아캄 나이트는 트릴로지에 있어서 최고의 마무리라 할 수 있다.







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락스테디의 배트맨:아캄 시리즈는 케릭터 프랜차이즈 게임에 있어서 새로운 기준과 지평을 제시한 프랜차이즈였다:이전까지의 케릭터 게임들은 기존의 프랜차이즈의 인기에 힘입어서 행해지는 부가적인 사업 아이템에 불과하였다면, 아캄 시리즈는 기존의 프랜차이즈를 집대성하여서 프랜차이즈의 후광을 등에 입는 것이 아닌 프랜차이즈에 걸맞는 케릭터 게임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아캄 시리즈에서 플레이어는 배트맨이 되어서 게임 내의 빌런들과 싸우고, 사건들을 수사하며, 악당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등의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캄 시리즈의 플레이 시스템들은 기존의 게임 시스템들을 보기 좋게 정리한 것을 뛰어넘어서 배트맨이라는 케릭터를 구심점으로 응집력이 높은 게임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으며, 특히 프리플로우로 알려져 있는 전투 시스템(정확하게는 페르시아의 왕자:시간의 모래에서부터 영향을 받은)은 다양한 게임의 전투 시스템의 근간을 성립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아캄 나이트는 락스테디의 아캄 프랜차이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며, 그렇기에 락스테디의 야심이 여기저기 보이는 작품이다. 맵은 아캄 시티에 비해서 몇배로 커졌으며, 새로운 이동수단인 배트모빌의 등장과 함께 배트모빌을 사용한 전투와 도전이 추가되었다. 또한 전투와 사냥꾼 플레이 시스템에 소소한 변화가 생겼으며, 배트맨 아캄 프랜차이즈의 대미를 장식할 게임 답게 스토리 측면에서도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이기도 하다. 다만 아캄 나이트는 다소 어딘가 미묘하게 껄끄러운 부분이 남아있는 아쉬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토리의 측면에서 아캄 나이트는 여지껏 나왔던 아캄 프랜차이즈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최고의 작품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배트맨:아캄 나이트를 정확하게 리뷰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트맨'이라는 케릭터를 이해하여야 한다:부모가 범죄자의 손에 죽은 브루스 웨인은 범죄와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기고, 범죄자들을 이해하여 그들에게 공포를 주는 상징이 되는 전략을 사용한다. 또한 배트맨은 보통의 미국 코믹스의 영웅들과 다르게 초능력 없이 오로지 자신의 기술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철저한 분석과 냉철한 지능을 사용하여 싸우는 전법을 구사하거나, 최첨단 장비를 이용한 분석을 통해서 범죄 수사를 하기도 한다. 아캄 시리즈는 이러한 배트맨이라는 케릭터의 특징에 기반하여 몇가지 게임 플레이 파트로 분류한다:맨손 격투를 하는 전투 파트와 무장한 적들을 공포로 동요하게 만들고 조용하게 하나씩 처리하는 사냥꾼 파트, 일종의 과학수사 퍼즐이라 할 수 있는 탐정 파트, 다양한 빌런들과 맞붙는 사이드 퀘스트 등으로 말이다.


아캄 프랜차이즈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파쿠르와 전투를 혼합한 페르시아의 왕자:시간의 모래의 변용이다. 플레이어는 전투중에 방향키와 공격버튼을 혼합해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비무장한 적들을 공격하거나 상대에게 반격을 가하고, 공격을 끊지 않고 최대한 쌓아서 테이크다운 등의 특수 기술로 변용할 수도 있다. 프리 플로우라 불리는 아캄 프랜차이즈의 전투 시스템은 단순한 버튼 조합으로도 화려한 콤보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적의 조합 등에서 전투의 깊이를 더한다는 점에서 입문과 깊이 모두를 만족시키는 전투 시스템으로 호평받고 있다. 


그리고 아캄 나이트의 전투 파트는 전적으로 아캄 프랜차이즈 및 아캄 시티의 확장 변용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캄 시티가 다양한 테이크다운 기술과 도구 사용 간소화 등의 대대적 시스템 변화를 보였다면 아캄 나이트의 변화점은 소소하다고 할 수 있다:무기를 집어서 쓸 수 있다던가, 타이밍 좋게 카운터를 쓰면 던지기가 나간다던가, 소생을 시키는 적이 생겼다던가, 배트모빌을 사용하거나 몇몇 이벤트 전투에서 동료와 함께 테이크다운을 하는 등의 소소한 변경점들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무장한 적들을 상대하는 사냥꾼 플레이는 어떤 점에서는 잠입 액션 게임의 흐름과 유사하다:플레이어는 무장한 적들의 화력 앞에서는 빠르게 죽기 때문에 최대한 적과의 교전을 피하고 높은 고지를 점하면서 무장한 적들을 한 명씩 끊어먹는 전략을 구사하여야 한다. 게이머는 탐정 모드를 이용해서 적을 제압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형지물을 찾고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한 명 한 명 쓰러질 때마다 공포에 물들어가면서 당황하는 적들을 제압하는 긴장감과 쾌감이 살아있는 사냥꾼 플레이는 악당을 사냥하는 배트맨의 시점을 훌륭하게 묘사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아캄 나이트는 아캄 시티에서 여러 변칙적인 요소들을 도입(배트맨의 탐정 모드를 막는 도구를 든 적이라던가)한 것을 그대로 따르지만, 동시에 아주 중요한 시스템 변화를 부여한다. 아캄 나이트에서 플레이어는 연속 테이크다운을 통해 3명에서 5명까지를 단 번에 제압할 수 있다. 이러한 제압은 적의 숫자를 단 번에 줄여버릴 뿐만 아니라, 전작들에서 다루기 까다로웠던 '서로의 시야를 보완하면서 움직이는 적들'을 쉽게 처리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 연속 테이크다운의 등장으로 인해서 사냥꾼 플레이는 전작들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쉬워진다. 물론 제작진들도 이 점을 인지하였는지 무음 기습 테이크다운으로 연속 테이크다운을 재충전하는 기믹과 함께 테이크다운으로 처리할 수 없는 떡대 덩치나 무인기 드론, 탐정 모드 역탐지 적 등을 도입하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배트맨의 가제트도 강화되어서(음성 변조를 통한 명령, 원격 무장 해제, 드론 해킹 등) 사냥꾼 플레이의 균형이 완전히 배트맨 쪽으로 기울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기에 아캄 나이트와 비교하여 배트맨이 강해지긴 했지만 동시에 상대의 전술도 만만치 않게 변화한 아캄 시티가 사냥꾼 플레이에 있어서 벨런스 포인트를 잘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아캄 나이트가 전작들로부터 계승한 시스템이다. 이제부터는 아캄 나이트만의 시스템인 '배트모빌'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배트맨이 세계 최고의 거부이기에 가질 수 있는 기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배트모빌은 게임 내에서도 자동차라 불리기 보다는 '탱크'라고 불리는 중후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 강한 영향을 받은 디자인이다. 배트모빌은 주행 모드와 전투 모드로 나뉘어지며 주행모드에서는 이동과 추격을, 전투모드에서는 드론들을 상대하는 플레이 양상을 보여주며 본작 아캄 나이트에서 락스테디는 배트모빌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할 거리들을 집어넣었다. 일단 게임 개별 시스템으로만 본다면 주행 모드와 전투 모드 양측 모두 합격선에 든다고 평가하고 싶다:배트모빌의 중후하고 단단한 특성이 주행 시의 장애물을 거침없이 돌파하는 상쾌한 플레이를 가능케 하며(물론 ㅁ버튼이 후진/브레이크 인건 여전히 적응이 안된다), 전투 모드의 경우에는 적의 사선을 보고 공격을 피하면서 상대를 격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엄밀하게 본다면 각각의 게임 플레이는 나름대로 준수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배트모빌과 관련된 시스템의 문제는 플레이 자체보다는 전체 게임과의 조화, 분량과 난이도 배분에 있다.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과 시티에서 전투와 사냥꾼 플레이 모두는 배트맨을 직접 조작하는데 많은 비중을 할애하였다. 그리고 아캄 나이트에서는 기존의 전투와 사냥꾼 플래이에 배트모빌 운용을 덧붙이면서 게임 플레이를 다체롭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다. 문제는 아캄 나이트에서 배트모빌은 여타 게임에서의 이동수단의 개념이 아닌 '필수적으로 플레이 해야 하는' 강제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새로운 시스템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난이도와 분량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캄 나이트의 문제는 배트모빌 플레이가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차라리 배트모빌의 분량을 줄이고 다른 콘텐츠를 보강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탐정 파트와 사이드 퀘스트에 있어서 아캄 나이트는 전작들의 강점을 계승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사이드 퀘스트에 등장하는 빌런의 수가 전작들에 비하면 다소 부족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사실, 별도의 글에서 서술하겠지만 아캄 나이트에서 주요한 이야기는 3명의 빌런이 배트맨을 각자가 맡은 파트에서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리들러 첼린지의 경우 배트모빌을 사용하는 기믹이 추가되서 전작들 보다 더욱 짜증나는 물건이 되어서 돌아왔다.


아캄 나이트의 스토리는 분석하는 순간 스포일러 덩어리가 되기 때문에 다른 글로 분리해서 접근하고자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캄 나이트의 스토리가 배트맨이라는 케릭터의 끝을 다뤄내는데 있어서 훌륭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캄 프랜차이즈 특유의 문제점인 배트맨을 둘러 싸고 있는 다양한 빌런들의 개성을 모두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여전히 있다. 하지만 배트맨의 마지막을 다루기 위해서 배트맨을 압박하는 빌런들의 협공과 이를 묘사하는 락스테디의 능숙한 연출은 훌륭하였으며,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질주하는 이야기의 전개는 게이머가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배트맨 아캄 나이트는 다소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마무리를 잘 지었기에 그러한 아쉬움을 충분하게 커버하고도 남는 훌륭한 작품이다. 락스테디가 배트맨 코믹스와 프랜차이즈에 대해서 보여준 애정과 존경심은 경이로우며, 더이상 프랜차이즈를 무리하게 늘리려 하지않고 적절한 선에서 끝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이후의 스토리 분석은 다음 글로 넘기도록 하겠다.








게임 이야기




빨리 클리어하고

리뷰로 찾아뵙도록 하죠.




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완전히 새로운 게임이라는 것은 만들어지기 힘들다:모든 것에는 원형이 있고, 원형에서 변형이 가해질수록 게임은 점점 더 발전한 형태로 변화한다. 하지만, 가끔씩 무엇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거나 이전에는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형태의 장르 결합이 이루어지는 게임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스플래툰을 예로 들어보자. 스플래툰은 물총으로 벽과 바닥을 색칠하는 게임이다. 하지만 블롭이나 마리오 선샤인 같은 스플래툰이 영향을 받았을 법만한 게임들은 찾아볼 수 있겠지만, 정작 스플래툰 자체의 원형이라고 여겨지는 작품은 찾기 힘들다. 이런 신선한 작품을 만날 때의 쾌감은 게이머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미들어스:쉐도우 오브 모르도르 역시 그러한 범주에 포함된다. 


유념해야 하는 점은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전적으로 액션 게임이라는 것이다:게임은 배트맨 아캄 시리즈의 프리 플로우 형태의 전투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오픈월드라고 하기에는 좁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스테이지에서 게임을 진행한다. 또한 어크2 표절 시비로 문제가 되었던 파쿠르 시스템이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잠입 시스템, 넓은 필드에서 다양한 할 거리를 제공하는 오픈월드-샌드박스식 게임 플래이 등등이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의 기본적인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시스템들은 이미 과거에도 수없이 봐왔었던 것들이다.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의 핵심은 게임의 전투가 아니라 게임 내의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에 있다.


게임은 이를 '네메시스 시스템'이라 부른다:쉐도우 오브 모르도르에는 게이머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독립된 오크 사회가 존재한다. 게임 내의 첨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게이머가 전투중 오크에 의해서 사망한 경우에는 이 오크 사회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게임 내에서 오크들은 잡병-캡틴-워치프로 계급화되어 있으며, 캡틴 급에서는 자기들끼리 결투를 하거나 세력 확장을 위해 신병을 끌어들이거나 연회를 벌이고 진급을 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한다. 또한 게이머를 죽임으로서 캡틴이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잡병 오크가 캡틴으로 승진하는 등의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서 오크 사회는 일정한 규칙성을 갖고 움직이게 되며 게이머가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게임은 오크 캡틴들에게 독특한 개성을 부여한다. 기본적으로 오크 캡틴들은 같은 특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랜덤으로 짜여진 강점과 약점, 분노 요인, 전투 특성 등을 지닌다. 가령 어떤 오크 캡틴은 암살로 한 방에 죽일 수도 있지만 원거리 공격 자체에 면역되어 있고, 또 다른 오크 캡틴은 암살 및 근접 공격에 면역이지만 원거리 공격에 취약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은 이러한 특성들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게이머는 오크 캡틴을 공략하기 이전에 그 캡틴의 이름도, 특성도, 심지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보이는 캡틴에게 덤비는 것은 자살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캡틴을 공략하기 전에 먼저 캡틴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이는 돌아다니는 오크를 심문하거나 등장하는 문서를 통해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정보들이 있다:이러한 정보들은 오로지 밀정이나 캡틴들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하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자신의 적을 알기 위해서 맵 여기저기 랜덤으로 생성되는 밀정을 심문하는 과정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사전 준비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이렇게 캡틴의 특성과 위치를 파악하였다면, 이제 오크 캡틴을 사냥할 차례가 온다. 게이머는 일정 지역을 순찰하는 오크 캡틴을 제거할 수 도 있지만, 오크 캡틴들의 활동에 난입하여서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다:게임 상에서 오크들은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이 활동 이벤트들이 맵상에 미션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런 이벤트의 경우, 특정한 연출과 법칙에 따라서 진행되기에 플래이어는 다른 상황에 비해서 수월하게 오크 캡틴을 암살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가령, 연회 이벤트의 경우 오크 캡틴이 홀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데, 오크 캡틴이 만약 잠입 살해에 약한 경우에는 단번에 오크 캡틴을 살해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몇몇 이벤트는 특정 오크 캡틴을 강하게 만들기도 한다:카라고르 등의 몬스터를 싫어하는 캡틴의 경우, 증오 버프를 받아서 처리하기 더 껄끄러워지기도 한다. 즉, 여러가지 속성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오크 캡틴의 존재가 스크립트로 자여진 이벤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캡틴을 제거하면 게이머는 무기에 장착할 수 있는 룬을 획득하게 된다. 이 룬은 일종의 패시브 스킬로써 게임 플래이를 유리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고 있다. 특히 몇몇 전설급 룬들은 게임 플래이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갖고있기도 하다. 룬의 성능은 캡틴의 파워 레벨에 비례하는데, 파워 레벨의 경우 캡틴의 활동에 따라서 상승하기도 한다. 이러한 네메시스 시스템 덕분에 게임은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드럽고 유연하고 나름대로의 재미를 갖게 된다. 특히 일정 수의 오크 캡틴 및 워치프 암살을 목표로 하는 첼린지 모드의 경우, 매번 할때마다 다른 상황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래 플래이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네메시스 시스템의 화룡정점은 이러한 오크들의 사회 및 생태계에 게이머의 '대리인'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게임의 중반 이후 게이머는 오크를 세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이 능력을 토대로 밑바닥의 캡틴을 세뇌해서 최고 계급인 워치프까지 육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이렇게 세뇌한 오크의 경우도 이벤트 미션이 등장하며, 게이머는 이를 진행할 수도 있다. 재밌는 점은 이 이벤트 미션에 있어서 게이머의 위치다:게이머는 자신의 오크 캡틴을 암살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하고 지켜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오크 캡틴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플래이어는 생태계의 최고의 포식자이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관찰자의 위치를 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벤트 미션의 구조와 오크 캡틴의 육성 등은 게이머에게 할 수 있는 거리의 증가와 함께 독특한 재미를 부여한다. 


게임은 완벽하게 게임 내의 생태계인 네메시스 시스템과 함께 검증된 게임 시스템들(프리플로우, 파쿠르, 잠입 등등)을 훌륭하게 섞어낸다. 그 결과, 게임을 플래이하는 게이머는 쉽게 게임을 익혀나가면서 동시에 네메시스 시스템이라는 게임 내의 생태계를 차근차근 익혀나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 게임이 굳이 '반지의 제왕' 프랜차이즈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스토리가 뜬금없고 불친절하다는 점에서 아쉽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오크 육성에 있어서 워 치프 이후에는 더이상 할 거리가 부족하며, 더 나아가 보스전 부분이 네메시스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오크 캡틴들과의 싸움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매우 아쉽다는 인상을 준다. 스토리 부분에서 프랜차이즈를 좀 더 유기적으로 사용하고 뒷 마무리를 좀 더 깔끔하게 하였다면 게임은 더 훌륭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이 미들어스: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를 깎아먹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게임 재미와 함께 게임 역사에 하나의 족적을 남긴 게임이라 할 수 있다:게임 내의 자립적인 생태계와 게이머의 행위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서 여지껏 보지 못한 새로운 재미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앞으로도 계속 플래이 될 작품이라 생각된다.






게임 이야기




올해 닌텐도 컨퍼런스가 실망스러웠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마리오 30주년을 기념한다면서 영양가 없는 마리오 메이커나 각종 이벤트성 영상들, 털실 요시, 스타폭스, 그리고 아미보 홍보까지. 작년의 닌텐도 컨퍼런스가 올 상반기의 위유 라인업을 그나마 충실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 했다는걸 생각한다면, 올해는 드라마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후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예정된 수순이기도 하였다:닌텐도는 내년 발표를 목표로 Wii U와 3DS를 대체할 차세대 콘솔 플랫폼인 NX를 제작중에 있으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해서 현재 대부분의 인원이 Wii U에서 NX로 넘어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야모토 시게루가 참여한 스타폭스 조차도 플래티넘 게임즈에 외주 형태로 개발을 맡기는 등을 통해서, 현재는 NX를 위해서 인력을 아끼되 스플래툰이나 대난투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하여서 Wii U의 가동률을 높인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E3 2015에서 보여준 닌텐도의 방어적 버티기 전략과 별개로 유심히 살펴봐야하는 닌텐도의 주력 상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미보다:아미보는 소위 스마트 토이로 분류되는 상품으로, 게임과 작은 실제 피규어를 연동시키는 상품이라 할 수 있다. 스마트 토이의 범주에 들어가는 프랜차이즈로써는 아미보와 함께 엑티비전의 스카이랜더스나 디즈니의 인피니티 같은 상품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장난감 전통의 강호 레고가 가세하는 등, 스마트 토이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성을 단순하게 '어린애의 코묻은 돈을 뜯어먹는 상술'로 치부하기에는 스마트 토이 시장이 갖고 있는 성장 동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크로스 플랫폼'이다:콘솔이나 스마트폰, 타블렛 등 하나의 플랫폼에 국한되어 있는 게이밍 경험을 플랫폼을 넘어서 하나로 통합시키는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스마트 토이는 그러한 크로스 플랫폼(게임과 장난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의 가능성이 상품화된 미래의 시장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미보가 다른 스마트 토이와 비교하였을 때 갖는 차별성이다:기존의 스마트 토이 프랜차이즈들은 하나의 소프트-스마트 토이 라인업이라는 1:1 대응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즉, 하나의 프랜차이즈 내에서만 스마트 토이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미보는 아미보 하나가 여러 개의 소프트에 대응된다;예를 들어서 마리오 아미보의 경우, 슈퍼 마리오 시리즈, 마리오카트 8, 대난투 및 기타 게임 프랜차이즈에 적용된다. 닌텐도 하드로 발매되는 소프트웨어(퍼스트든 서드 파티든)는 그 어느 누구라도 아미보를 지원하는 게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소프트웨어를 넘나들어 적용된다는 점에서 아미보는 크로스 DLC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다양한 프랜차이즈 및 소프트와 연동된다는 것이 아미보의 특징이 아니다:아미보의 또다른 특징은 게임 콘텐츠의 종적 확장 및 횡적 확장을 모두 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아미보는 피규어 자체의 NFC 기능을 이용하여서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한 스마트 토이인데, 이것이 가능한 소프트웨어는 현재 '대난투' 밖에 없다. 그외의 게임 소프트웨어에서 지원하는 아미보 기능은 아미보의 정보를 '읽는' 기능 밖에 없다. 즉, 대난투를 제외하면 아미보는 일종의 ULC(Un-lockable Contents)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대난투가 위유 콘솔에서 갖는 위상과 아미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대난투는 수많은 게임 프랜차이즈의 케릭터들이 등장하는 격투 게임이며, 현재 스플래툰, 마리오카트 8과 함께 위유를 지탱하고 있는 타이틀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아미보는 다른 게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게이머가 아미보를 소환하여서 게임을 진행하면, 아미보가 게이머의 플래이를 학습하고 점점 더 강해지게 된다. 또한 게임을 통해서 아미보의 장비나 필살기 구성 등을 설정할 수 있는 등 세부적인 커스터마이징까지도 가능하며, 3DS나 위유 대난투를 오가면서 양쪽 모두에 사용할 수 있다는 강점도 갖고 있다. 또한 초창기 대난투 아마추어 대회에서는 플래이어가 아니라 아미보가 결승전까지 오르는 등 아미보 자체의 실력도 뛰어나다. 이는 게임 소프트의 지원 덕분이기도 하지만, 대난투야말로 아미보가 갖고 있는 가능성을 드러나게 만든 게임 소프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미보와 대난투의 관계는 게임을 깊이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종적인 확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타 다른 ULC 형태로 아미보를 지원하는 것은 넓고 얕게, 즉 횡적 확장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대난투는 이러한 횡적 확장의 중심축을 담당하고 있다:다양한 프랜차이즈의 케릭터들이 참전하여서 격투를 한다는 대난투의 컨셉을 기반으로, 이를 아미보의 형태로 물질화 시키고, 아미보를 통해서 다양한 게임 프랜차이즈의 형태로 확장한다. 즉, 아미보는 단순하게 피규어를 팔아먹는 것을 넘어서 중심축인 대난투와 함께 다른 게임들을 연결하는 일종의 노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느슨하게 연결된 게임이라는 관념과 함께 지속적으로 다른 닌텐도 플랫폼의 게임을 구매하고 플래이하게 만드는 유인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NX의 이상향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NX가 지향하는 플랫폼 및 로드맵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휴대용 플랫폼과 거치형 플랫폼의 밀접한 연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 게임 플랫폼 회사와 밀접한 연계를 맺는다던가, 통합형 아키텍처를 쓴다던가 등의 소문은 무성하지만, 아미보가 게임 소프트웨어를 연결하는 하드웨어적인 브릿지 역할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아미보의 역할은 통합형 플랫폼이 될 것이라 예상되는 NX에 있어서 더욱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참신한 소프트웨어 보다 아미보에 방점을 찍었던 2015 E3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연결망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크로스 플랫폼은 게임이 없이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미보의 존재는 단순한 상술이 아니라 닌텐도의 상품 전략에 있어서 중요한 반석이 될 것이라 본인은 본다.



게임 이야기



무기는 본능이 없다.
무기는 충성하지 않는다.
무기는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병사는 다르다.

그러나 병사가 무기가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기술이 우리를 밀어내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나 기술로 진보할 수 있는가?



작년에는 콜옵이라는 프랜차이즈에 많은 이변이 일어났었다. 게임을 인피니티 워드, 트레이아크, 슬렛지해머의 3 스튜디오 체제로 변화, 본격적인 미래전이라는 새로운 트렌드의 시도, 슬렛지해머의 데뷔, 본격적인 차세대 콘솔 데뷔 등등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고스트의 실패 이후 슬렛지해머를 향한 불안한 시선들을 슬렛지해머는 어드밴스드 워페어라는 다소 변칙적인 방법론으로 해쳐나가는데 성공했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미래전은 콜옵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트라이아크의 블랙옵스 프랜차이즈들은 '검은색'이라는 이미지에 많은 방점을 찍었다. 블랙옵스는 어둠속에서 일어났던 기록되지 않은 역사로서의 전쟁, 특수전을 서류 위에 덧칠되는 검은 선의 형태로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블랙옵스 2는 데뷔 트레일러에서 보여준것과 같이 어둠으로의 귀환Back in Black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를 오가고, 미국의 안녕을 위해서 과거의 어둠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로 생겨난 미국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어떻게 미국을 위협하는가를 간략하게나마 다루었다. 그렇다면 블랙옵스 3는 무엇을 다룰까? 흥미롭게도 블랙옵스 3는 더 미래로 나아간다. 블랙옵스 3는 블랙옵스 2의 단순하게 미래형 가젯을 다루는 것을 뛰어넘고 어드벤스드 워페어의 액소 수츠를 뛰어넘어서 기계를 내부로 삽입하는 사이보그를 출현시켰다.


블랙옵스 3의 사이보그 기술은 어드벤스드 워페어의 엑소 수츠와는 비슷한 것 같지만 분명하게 다른 컨셉이다. 엑소 수츠의 핵심은 입는다는 것이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스타쉽 트루퍼스부터 그 맥락을 이어온 엑소 수츠의 개념은 입는 형태의 갑옷을 통해서 인간의 지구력이나 능력을 향상시킨다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엑소수츠는 인간의 몸에 기계를 삽입하는 사이보그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엑소수츠는 '벗을 수 있다'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엑소수츠와 나는 분리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서 생기는 괴리와 안전장치들이 있다:아이언맨 3 같은 작품에서도 드러나듯이, 과연 아이언맨을 만드는 내가 아이언맨인 것인지 아니면 나는 그저 아이언맨이라는 엑소 수츠의 부속품 같은 존재인지에 대한 고민처럼, 엑소수츠를 벗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과연 내 힘인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더 나아가서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어드벤스드 워페어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엑소 수츠를 벗어던지는 연출을 넣는다던가)


하지만 사이보그는 다르다. 사이보그의 존재는 전적으로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이보그는 엑소 수츠처럼 편리하게 분리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해서 다양한 갈등과 문제들이 발생한다:과연 사이보그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그도 아니면 둘 다 아닌걸까? 사이보그의 문제는 전적으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서' 온다. 하지만 엑소수츠와 다르게 기계와 내가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은 풀릴 수 없는 하나의 우울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데이어스 엑스:휴먼 레볼루션의 '나는 이러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아담 젠슨이나,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에서 보여준 등장인물들의 우울하고 냉소적인 모습들에서 보이듯이 내가 아닌 것과 나인 것이 육체를 통해서 하나됨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기계와 인간의 관계론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그런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블랙옵스 3가 복잡한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라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블랙옵스 3가 대중에게 무엇을 보여주지 않고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취사선택의 여부가 더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트레일러에서도 보여주었듯이, 군인과 병기의 차이, 본능과 의지, 충성심이라는 전통적인 가치와 기계적인 육체 사이의 괴리를 다루고 이를 통해서 앞으로 도래할 칠흑과도 같은 미래를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군대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보여줄 것이다. 


이 부분은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며, 언젠가 글로도 다뤄볼 수 있을 것이다. 블랙옵스 3는 2015년 11월 발매 예정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얼마 남지 않은 물과 기름을 차지한 독재자 임모탄 조가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한다. 한편,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사막을 떠돌던 맥스(톰 하디)는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가고, 폭정에 반발한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임모탄의 여인들을 탈취해 분노의 도로로 폭주한다. 이에 임모탄의 전사들과 신인류 눅스(니콜라스 홀트)는 맥스를 이끌고 퓨리오사의 뒤를 쫓는데... 


시대는 리메이크와 리부트를 요구하고 있다:한때 시대를 풍미했었던 대중문화 작품들은 다시 한번 시대적 해석을 통해서 재탄생되어서 그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경향이 이 시대가 갖고 있는 한계,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창의력의 고갈과 새로운 옛 것의 발견을 통해서 과거로 회귀하려는 흐름으로도 보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해석이 맞을 수도 있거나, 틀릴 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가 모르는 제 3의 요인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역시 그러한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과 경향성을 재쳐두고 본다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는 프랜차이즈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그 구태의연함이 갖고 있는 우직함이 현대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주장하고 더 나아가 그 이상을 작품이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겠다: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서브컬처 상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로 분류되는 수많은 작품들뿐만 아니라 장르를 뛰어넘어서 '종말'의 이미지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해왔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종말'이라는 테마에 매료되었던 것은 그 '종말'을 통해서 인간이 갖고 있었던 절망이나 희망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인간은 종말에 의해서 절망하고 미쳐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종말로부터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기도 한다:인간을 옭아매고 있었던 가식적인 제도, 문화, 시스템 등을 무너뜨리고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종말한다면 과연 문자의미 그대로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난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순진한 희망을 가진것 뿐일까. 혹은 더 끔찍하게도,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신세계의 밑거름이 되는 종말의 잿더미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영원히 조금씩, 더 끔찍한 방향으로 망해버리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이토 케이카쿠의 소설들(학살기관이나 하모니)을 보자:세상이 멸망할 것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인간들은 그 멸망과 종말에 적응해나간다. 그리고 그 종말을 마치 '일상적'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혹은 J.G. 발라드의 소설을 보자:물에 빠진 세계에서 인간들은 종말에 도취되며 종말의 더위 속으로 녹아서 사라진다. 발라드의 멸망 3부작에서 종말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아니다. 여기에서 종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융합'되는 것, 익숙해지는 개념에 가깝다. 즉, 어떻게 본다면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이나 새로운 시작이 아니다:종말은 그저 환경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환경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적응'을 수반한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도 그러하다:관객들이 마주하는 매드맥스의 세계는 의외로 '정상적'인 세계이다. 제한된 자원인 물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쥔 이모탄 조는 물을 자원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다:자식들이자 병사들인 워보이나, 워보이를 생산하는 여성들인 브리더, 여성 모유를 착유해서 식량을 쥐고, 물을 자원으로 무기 농장의 무기나 가스 타운의 석유와 교역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마치 정상적인 사회가 작동하는 것처럼, 이모탄 조가 지배하는 분노의 도로는 마치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이모탄 조가 죽고 퓨리오사가 리더로 되는 것이 시터델의 필연적인 멸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도 결론내리기도 하였다. 이모탄 조의 방법론은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으로 제한된 자원을 통제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는 인류의 '생존'이라는 '거시적'인 목표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방식의 접근이다:멸망과 그에 대한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이모탄 조가 만들어낸 분노의 도로는 구세대의 절망, 아니 인류 역사 이래 계속되어 왔었던 절망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적응 변화시킨 사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모탄 조의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는 종말 이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구시대로부터 이어내려져 온 반복된 절망, 우리가 오랫동안 적응해왔었던 오래된 종말의 모습에 대한 것이다:빈부의 문제, 남자와 여자의 문제, 전쟁의 영광과 약탈의 문제 등등. 인간은 항상 이런 미친 것들에 적응해왔었다, 그리고 순종하였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효율적인 세계의 종말 아래서 인간은 착실하게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미쳐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세계는 그야말로 구시대적이며, 이러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특유 아래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 특유의 막나가는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의 말초적인 행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종말 이후 각자의 방식대로 미쳐버린, 아니 세상에 '적응'해버린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차용하고 있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점은 전적으로 패미니즘 담론이다:남성은 파괴하며, 여성은 생산한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1980년대스러운 오래된 담론(패미니즘도 항상 변화하고 있다. 이 점을 숙지하여야 한다)을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그대로 써먹고 있다. 메인빌런에서부터 거대한 가족을 이끄는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모탄 조), 사람을 잡아먹는 양복입은 식인종 자본가(피플 이터), 사람을 고문하기 좋아하는 폭력적인 무기상(무기농장 주인)을 설정해놓고, 그와 대칭되게 도망가는 자들을 '여성 브리더'로 설정해놓은 점에서부터 이미 철저하게 스테레오 타입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은 오히려 영화를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만드는데 주요한 동력이 된다. 이전 칼럼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매드맥스 시리즈의 이야기는 도로라는 공간과 함께 속도와 속력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칼럼을 요약하자면 도로라는 공간 끝에 놓여있는 도착지, 그리고 그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방향성이자 운동량인 속도가 매드맥스 시리즈 속의 케릭터들을 움직이는 주요한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원화된 케릭터 군상들은 강력한 대비를 이루며 방향을 가진 운동을 완성한다:여성들로 구성된 브리더와 퓨리오사, 그리고 맥스는 시터델을 등을 진 체 희미한 희망을 쫒아 녹색의 땅을 향해서 정처없이 나아간다. 그리고 이들을 남자들로 구성된 파괴적인 악당들이 뒤쫒는다. 


영화의 케릭터 조형은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단순해진 대신에 '깊이'를 더한다. 깊이를 가진 다양한 케릭터들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케릭터는 맥스와 퓨리오사일 것이다. 먼저 퓨리오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기존의 대중문화에서도 싸우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항상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싸우는 여전사를 다룰 때 '헐벗은 눈요깃거리'나 '모성성' 등의 스테레오 타입에 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었다. 퓨리오사의 신선함은 그런 성적인 매력이나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전통적인 '전사'의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 퓨리오사는 영화의 처음에는 이모탄 조의 소유물을 빼돌려 그를 분노케하려 하지만, 녹색 땅에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희망에 벅차오르다 좌절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동인 자체는 분노Fury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인간을 향한 개인적인 분노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에 찬 밝은 불꽃같은 분노까지 그녀는 전적으로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케릭터이다. 


재밌는 점은 몇몇 사람들이 퓨리오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칸느 영화제 시사회 GV에서 기자는 '여자가 이렇게 분노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샤를리즈 테론에게 던졌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밑도 끝도 없이 멍청한 질문을 영화/연예 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이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여자가 분노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하지만 퓨리오사라는 케릭터가 갖는 특수성은 영화 내적인 것이 아닌 영화 외적인 것이다. 여지껏, 분노에 이끌려서 싸우고 투쟁하는 여성 케릭터는 흔치 않았다. 더욱이 삭발을 하고 한 팔을 잃은 채 눈가에 엔진오일을 바르는, 기존의 성적인 코드를 제거한 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성 케릭터 자체가 드물었던 것이다. 물론 퓨리오사의 케릭터 자체도 깊이가 있는 뛰어난 케릭터인 것도 한몫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맥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기존 시리즈에 등장한 멜 깁슨의 맥스는 정상적이고 능글맞은 마스크 밑에 폭발할 것 같은 광기를 숨기고 있는 케릭터였었다. 하지만 톰 하디의 맥스는 그와는 다르다:톰 하디의 맥스는 광기가 폭발할 거 같은 위험을 느끼기 보다는 어딘가 망가져버린 이미지, 전쟁통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전장을 떠도는 군견과도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지켜야할 것도 잃어버린 채, 오로지 생존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톰 하디의 맥스는 환영이나 환청 등의 형태로 구현된 '죄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멜 깁슨의 맥스와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맥스의 언어사용일 것이다. 톰 하디의 맥스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단문이나 툴툴 거리는 목소리로만 의사소통을 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톰 하디의 맥스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톨이 같은 모습을 더욱 강화한다.


기존 시리즈의 맥스는 협상을 하는 솜씨 좋은 해결사의 이미지가 강했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기술을 판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에 득이 되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그가 자신의 생존의 측면에서 기술을 팔아먹고 사는 해결사 같은 인물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가 공동체가 갖고 있는 방향성과 비전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득이 될 것 없는 '자원봉사'로 공동체를 위기에서 끌어낸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이 맥스 역시도 강하다. 다만 맥스는 그 자신이 공동체에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에 맥스는 항상 공동체를 뒤로한 채 도로 위에 남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왜 맥스는 항상 떠나는 공동체를 뒤로 한 채 도로 위에 남기를 선택하는가? 톰 하디의 맥스는 그것이 환영이나 환청의 형태로 등장하는 죄책감으로 묘사한다. 그의 실패로 인한 죄책감과 자신은 공동체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학이 그를 언어를 잃어버리고 생존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인간형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전적으로 기존 시리즈에서 출발하였지만 새로운 방향성으로 재해석된 케릭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가 다른 시리즈의 맥스와 차별화되고, 더욱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맥스가 사람들의 방향성을 '반전'시킨 것이다. 여지껏 시리즈에서 맥스는 공동체의 비전과 가능성에 조력하는 모습을 보여왔만 그 자신이 어딘가에 뛰어들어서 무언가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는 헛된 희망에 걸어서 실패하고 그로 인해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쳐왔었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공동체에 조언을 한다:소금 사막 너머의 무의미한 희망에 걸지말고, 시터델을 점령하여 우직하게 정면으로 승부하라고. 그것은 맥스 자신이 과거에 하지 못했었던 것에 근거한 조언이다. 이 방향성의 반전과 함께 도망자들과 추적자들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이제 여지껏 도망자들을 압도한다고 생각했었던 이모탄 조와 그 일당들은 자신의 소유물들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고, 반대로 도망자들은 헛된 희망이 아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손에 쥐게 된다.


영화의 모든 액션씬들이 잘 짜여져서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이 클라이맥스의 추격씬은 그야말로 예술적이라 할 수 있다. 클라이맥스 이전의 러닝타임까지 도로는 도망의 공간이었으며, 어디론가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정처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방향성을 반전시킴으로써 도로는 이제 근거없는 희망의 공간이 아닌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공간으로, 더 나아가 최후의 결전에 걸맞는 공간이 된다. 그리고 맥스는 클라이맥스 시작에서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능동적인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의식과 마주하여 사람들을 이끈다. 혹자는 이 영화를 퓨리오사 일행과 이모탄 조 일당들의 싸움이고 맥스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지만, 단 한 번의 조언으로 맥스는 기존의 매드맥스 시리즈의 맥스 케릭터들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압도해버린다. 


하지만 퓨리오사의 시터델 점령이 성공한 이후, 맥스는 일행과 함께 남기를 선택하지 않고 다시 떠나기를 선택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였지만, 정작 스스로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조지 밀러 감독은 톰 하디와 함께 매드 맥스 시리즈를 3편 더 찍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3편의 매드맥스를 통해서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 본인은 그것이 맥스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3부작에 걸쳐서 맥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방황 끝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정착? 죽음? 구원? 본인은 맥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은 아마도 희생이나 죽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예정된 비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화에 있어서 영웅의 몰락은 예정된 결말의 일부이다. 그러나 맥스는 영웅이 아니다. 앞서 칼럼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매드맥스 시리즈는 '영웅은 아닌, 맥스라 불린 남자'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본인은 매드맥스의 이야기를 '전설'이라고 생각한다: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져오는 사람, 문제를 해결하지만 스스로는 정착할 수 없는 슬픈 숙명을 가진 한 남자에 대한 전설. 그리고 그 전설은 우리에게 세상의 질서나 이상을 교육하는 신화가 줄 수 없는 무게를 준다.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고뇌한 사람, 더 나은 세계를 꿈꾸었지만 정작 그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그 무게와 교훈은 신화의 압도적이고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간적인 세계에 대칭되며 사람의 손에 잡히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에 본인은 만약 새로운 매드맥스 시리즈의 3부작이 마지막에 맥스가 죽는다면, 그 끝을 어느정도는 얼버무리듯이 끝났으면 좋겠다. 좋은 이야기들은 끝을 열어놓아서 사람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살아 있다”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게임 이야기


다음주 화요일에 하반기 최종 면접 하나 있습니다.

그거 끝나고 다시 돌아와서 몇자 끼적거려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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