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에 해당되는 글 5건

게임 이야기







매우 재밌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해보시길.


어제, 5/28에 발매되었습니다.



게임 이야기




*위처 3의 초반 퀘스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5월 중순 발매된 위처 3:와일드 헌트는 폴란드 게임회사인 CD 프로젝트의 회심의 역작이자 서구권 트리플 A 게임들이 가지지 못한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폴란드 판타지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위처를 원작으로 한 위처 3부작은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와 매력적인 세계관 등을 기반으로 근 10년 동안 나날이 발전하며 꾸준하게 팬층을 넓혀왔었다. 그리고 3편은 게롤트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북미-유럽 중심의 트리플 A 게임 이외에 새로운 방법론과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들의 출발인 위처 자체가 바이오웨어의 영웅서사를 뒤튼 것이었지만, 3편은 게럴트라는 케릭터를 다뤄내는 방법과 세계를 구축하는 자신만의 철학, 더 나아가 거대한 공간을 구축하는 '미학'을 공고하게 보여주는, 그야말로 청출어람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통 위처 시리즈의 세계를 표현할 때, 사람들은 '회색세계'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러한 표현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위처  시리즈의 세계를 TRPG인 D&D 특유의 '가치체계'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질서 선~혼돈 악까지 선-중립-악과 질서-중립-혼돈의 격자로 구성된 D&D 특유의 가치체계는 케릭터의 행동이나 가치관을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이를 통해서 케릭터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어떤 인간형인지 뚜렷하게 파악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실제 초기 바이오웨어 게임들(발더스 게이트~매스 이펙트 등등)은 이러한 분류된 가치판단 체계를 게이머의 행위에 적용한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위처 시리즈는 이를 거부한다:위처 시리즈의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단 하나, 행동과 결과이다. 게이머는 행동하고, 그 선택에 결과를 져야 한다. 다만, 비슷하게 원인과 결과를 강조한 텔테일 워킹데드 시리즈와 다르게 위처 시리즈는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잔혹하고 냉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가령, 플래이어는 몬스터 퇴치를 의뢰한 마을을 위해서 지옥의 사냥개를 추적해야 한다. 하지만 게이머는 게임이 진행될수록 까발려지는 추악한 비밀들이, 사실 마을 사람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지옥의 사냥개를 불러온 가해자란 사실을, 더 나아가서 그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애꿎은 마녀를 사냥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게이머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마녀를 사냥해야 하는가, 아니면 칼날을 돌려서 지옥의 사냥개들의 마을을 심판하도록 만들어야 하는가? 게임은 이런식의 도덕적 딜레마들로 가득차 있다. 그 어느쪽을 선택해도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하지만 그 여운이 게임을 곱씹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처 시리즈의 이야기는 여타 게임들과 다른 차별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위처 시리즈는 특유의 원인-결과의 스토리텔링을 다양한 퀘스트의 예기치 못한 연계의 형태로 풀어낸다:3편의 경우, 초반의 정오의 악령 퀘스트는 '도대체 왜 이 여인은 정오의 악령이 된 것인가'라는 의문을 남겨둔채 퀘스트가 클리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의 해답은 이후 다양한 사이드 퀘스트를 통해서 예기치 못한 결과의 형태로 조우하게 된다. 영주의 아들이 동성애자였고 여자의 남편과 갈등이 있었기에 그런 비극이 생겼다는 점, 그것이 NPC와 만남을 갖는 중 예기치 못한 형태로 꼬이기 때문에 플래이어는 흥미진진하게 게임에 몰입하게 된다.


또다른 위처 시리즈의 게임 서사의 강점은 세계관을 '설명'하려기 보다는, 게이머가 몸소 체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가령 몬스터 사냥꾼인 위처의 핵심 임무인 몬스터 사냥은 선형적이긴 하지만 몬스터를 사냥하는 과정을 실제로 체험하게 만듬으로서 지금 내가 사냥하는 몬스터가 단순하게 텍스처 덩어리가 아닌 이야기가 있고 각기 특징이 있는 생물임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위처 시리즈의 전투는 대대로 미묘한 재미를 보장하는 미묘한 시스템이며, 3편 역시 전투가 좀 미묘한 편이다:하지만 게임 시스템에 있어서 준비과정(기름 및 포션, 폭탄의 준비, 칼갈기 비석 등 버프의 준비)의 강조를 통해 상대적으로 노가다가 될 수 밖에 없는 약초 채집과 재료 수집 등에 동기를 부여한다. 전투 자체는 평범하지만 전투를 둘러싸고 있는 몰입과 동기의 부여 측면에서 위처 시리즈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러한 위처 특유의 게임 서사와 스토리텔링의 중심에는 리비아의 게럴트라는 전설적인 위처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게럴트는 영웅이 아니라는 것이다:전쟁의 폐허를 지나치면서 전쟁이 빨리 끝나면 우리 모두에게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베스미어에게 '우리에게 편이 있습니까?'라고 냉소하듯이 툭 던지는 게럴트는 모두를 구원하러 온 영웅이라기 보다는 진짜 필요한 순간에 나타난 유쾌하지 않은 이방인, 하지만 공동체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불청객이라고 보는 쪽이 더욱 적합하다. 기묘한 것은 이 냉소적인 남자가 중세 수준의 야만적 인권 감수성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도 현대적인 인권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냉소적인 자세와 함께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자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에 머리를 들이밀어서 자기 화를 자초한다는 점에서 게럴트는 매드 맥스의 주인공 맥스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언젠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위처 시리즈에 있어서 1편이나 2편과 다르게 3편이 완성형이라고 칭할 수 있는 뚜렷한 특색이 있다는 것이다. 3편에서 CD 프로젝트는 '오픈월드'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세계를 구현해내는데 성공하였다. 혹자는 스카이림 같은 자유도가 없다는 점에서 '세미 오픈월드'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오픈월드라는 장르의 정의를 '거대한 풍경에 근거한 미학'이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위처 3 역시도 오픈월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또 이 오픈월드의 '모호한 정의'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위처 3의 오픈월드는 대단히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위처 3와 비교할 사례로 스카이림이나 인퀴지션의 사례를 들여다보자. 스카이림이나 인퀴지션의 공간은 수평적인 넓이와 함께 '수직적'인 높이가 게임 내의 오픈월드를 구성한다. 수십미터가 가볍게 넘는 구조물이나 산맥들, 자연물들 등등을 통해서 이들 게임은 '신화적인 판타지'그 게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위처 3는 다르다:게이머가 벨렌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게이머를 위압하는 거대한 공간이나 자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낮은 구릉과 언덕들, 오솔길들, 그리고 지저분한 늪과 개울들이 게이머를 반긴다. 위처 3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오히려 '목가적'이며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러한 다른 판타지 게임들의 위압적인 거대한 구조물과 위처 3의 목가적인 분위기는 게임이 만들어내는 지향점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위처 원작 소설은 동화와 우화에 대한 블랙코미디, 비틀기에서 시작하였으며 게임 위처 시리즈 역시도 그러한 동화, 우화, 그리고 그들을 포괄하는 '전설'이라는 장르 구분에서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설의 대척점에는 신화가 있다:신화는 어떤 사회나 가치가 시작되는 지점의 이야기다. 신과 영웅은 손가락을 들어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는 그에 따라서 만들어 진다. 하지만 전설은 다르다. 이미 전설에서 사회는 구성되어 있으며, 전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웅장한 비전이 아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교훈이다. 그렇기에 전설이라는 분위기를 지향하는 위처 시리즈에 있어서 신화적인 거대함과 웅장함, 수직적인 이미지는 불필요하다. 게럴트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러러 보아야할' 정도로 높은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위처 3가 보여주듯이 얕은 언덕들과 구렁들처럼, 게이머들은 위를 바라다 보는 것이 아니라 밑을 내려다 봄으로서 그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대상과 미학(전설로서의 위처, 회색의 세계, 무엇을 판단할 것인가)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위처 3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게임이다:이는 거대한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위처 시리즈가 성취한 미학적인 성과와 함께 위처 3가 그에 알맞은 공간과 이야기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위처 3의 존재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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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어느 날 지도 한 장을 들고 홀연히 할리우드에 나타난 미스터리 소녀 ‘애거서’. 그녀가 여배우의 매니저 일을 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나타난 후 모든 이들과 실타래처럼 엮이면서 그들의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번 배역만은 꼭 따내야 하는 위기의 여배우 ‘하바나’, 최고의 아역스타였지만 이제는 한물간 ‘벤지’와 그의 부모,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렌트카 운전 기사 ‘제롬’. 그들과 ‘애거서’의 엉킨 이야기들이 하나씩 풀어지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벤야민은 일찍이 기술복제 시대와 예술작품이라는 소논문을 통해서 영화의 가능성과 위험을 다룬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영화 제작 시스템, 특히 헐리웃 스타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영화의 가능성은 아우라의 거세를 통해서 수많은 대중이 작품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헐리웃 스타 시스템은 이러한 영화의 아우라 거세를 숨기고, 마치 배우에게 실제 아우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속여서 대중을 거짓된 환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적용되는 명제이다:벤야민이 주목한 영화의 계몽 가능성과 함께 배우에 대한 광적이며 물신적인 집착의 위협이 여전히 영화를 둘러싸고 팽팽한 길항 작용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 맵 투 더 스타즈는 그러한 길항 작용에 대한 이야기다:헐리웃과 스타의 삶이라는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친상간'이라는 키워드가 그것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근친상간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운명 사이의 파국이 불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일찍이 B급 SF 호러에서부터 폭력과 섹스를 붓과 캔버스 삼고 새로운 영화 세계를 구축한 거장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신작인 맵 투 더 스타즈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놓고 비교해 본다면 스파이더(근친상간을 주제로 한 영화)와 데인저러스 메소드(새로운 인간이기를 꿈꾸는) 사이의 어느 중간에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기나긴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에 최초로 입성한 크로넨버그가 헐리웃을 바라보는 시선은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고 암울하다.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두 축을 두고 전개된다:한 쪽은 화재로 사망한 전설적인 여배우 어머니를 두고 그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하바나, 다른 한쪽은 화상자국이 심하게 남은 애거서이다. 불이라는 이미지는 이 둘을 엮어주는 중요한 매게이다. 그리고 이 '불'의 이미지는 헐리우드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매력(꿈의 실현)과 파괴 양 측면을 모두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둘이 '근친상간'이라는 이미지로 엮여있다는 것이다:하바나는 어머니를 '성적으로' 사랑했으며, 애거서는 어렸을 적 자신의 동생 벤지와 결혼식을 올리다가 화상을 얻었으며 부모 결혼의 비밀(근친상간에 의한)을 앎으로써 아름다운 근친상간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근친상간의 이미지가 둘러싸고 있는 시놉시스의 뼈대는 바로 하바나 어머니가 출연한 전설적인 영화의 리메이크를 둘러싼 갈등을 형성한다. 이 리메이크라는 개념 자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근친상간'적이라 할 수 있다:과거의 작품을 '과거의 이야기+현대의 배우, 방법론'으로 만들어냄으로서 과거의 산물인 현대의 영화 산업이 자기 부모와 결합하여 자신을 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리메이크라는 개념 자체가 갖고 있는 근친상간적인 함의가 현재의 영화 산업에 있어서는 대세적인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21세기, 정확하게는 2010년대 전후로 들어오면서 유명한 과거 작품의 리메이크는 대중문화의 핫한 트랜드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리부트'라고 칭하고 있다:하지만 이 리부트 열풍의 근간에는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배우 그리고 각색을 첨가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근친상간적인 이미지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 리부트 열풍이 일어나는 것일까? 혹자는 21세기 인터넷으로 만들어진 대중 문화가 더이상 새로운 것을 꿈꾸지 못하고, 과거의 추억을 소비하는 아카이브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본인도 여기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좀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자:벤야민은 헐리웃 스타 시스템이나 영화산업이 배우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를 낳고 이를 통해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러한 배우와 작품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가 무너질 수 없는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낸다면, 그 전설을 자가복제적으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근친상간적인 리부트는 헐리웃 스타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근친상간이라는 테마와 함께 이 영화의 제목, 스타를 향한 지도Map to the Stars에서도 드러나듯이 영화는 단순하게 헐리웃의 현재 관점에서의 자가복제적인 이미지의 재생산을 넘어서 대중문화의 역사 전반에 깔려있는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애거서는 근친상간적인 결합 자체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실제로도 영화 산업 이전에도, 인류는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적인 관점에서 복제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왔다. 애거서가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듯이 인류가 자신이 영향을 받고 시작했던 이미지와 결합하여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런 자가복제적인 이미지를 근친상간의 형태로 표현한 것은 이미 '그 자체에 파국을 내포하고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일찍이 사드가 그의 저서에서 자동기계적인 육체와 섹스를 통해 보여주었듯이, 섹스는 그 자체에 어떠한 제한을 두지 않으면 스스로 극단적인 파멸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영화는 이를 두가지 형태로 보여준다:첫번째는 애거서가 하바나를 죽이게 되는 계기 자체가 하바나와 제롬과의 섹스를 목격한 것이었으며, 두번째는 애거서와 벤지가 갖고 있는 환각으로 대표되는 정신병(근친상간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의 이미지이다. 이 두 이미지들은 근친상간이라는 형태가 자체가 파멸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는 숙명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에는 불에 대비되는 '물'의 이미지가 은연중에 깔려 있다:불로 대변되는 열정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물의 이미지는 은연중에 이 불과도 같은 결합이 파멸할 것을 암시한다. 욕조에서 물을 뒤집어쓴 채 등장하는 하바나의 어머니 환영, 수영장에서 익사한 배우의 아들, 수영장에서 나오는 죽은 아이들의 환영, 수영장 근처에서 분신하는 벤지와 애거서의 어머니(그리고 분신하기 전엔 욕조 안에 물을 받아놓고 홀로 흐느낀다) 등등. 영화는 불과 물의 대비를 통해서 자기 파괴적인 아름다운 불꽃과 차갑고 축축하며 기분나쁘게 끈적한 물의 정적인 이미지를 동치시킨다. 영화의 결말 역시 이러한 숙명에 의해서 애거서와 벤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별을 바라보며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 남매의 결말은 근친상간적 자기 복제가 가져다 줄 파국 그 자체인 것이다.


크로넨버그의 최초 헐리웃 입성작인 맵 투 더 스타즈는 그야말로 헐리웃으로 대표되는 영화산업 및 대중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니들은 죄다 근친상간범들이야!'라고 외치는 크로넨버그의 독기와 자신의 이미지를 내다버리는 혼신의 연기를 줄리안 무어의 연기는 이 영화를 빛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생각하는 크로넨버그 영화의 최대 걸작에는 못미치지만, 리부트 열풍이 부는 요즘같은 시대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매드맥스 3부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매드맥스 프랜차이즈의 최신작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2015년 5월에 개봉하였다. 사실 전세계적인 리부트 열풍을 감안한다면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등장은 다소 뜬금없기는 하지만, 아주 이상한 현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현상은 영화의 개봉 직후에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여성이 중심이 된 영화이며, 심지어는 '패미니즘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들었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마초영화에 감히 패미니즘 따위가!'라고 광분하며 길길이 날뛰기도 하였지만 대체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라는 이미지를 정립하고 그 빛이 퇴색해버린 오래된 프랜차이즈에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였다는 점에서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두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첫번째, 매드맥스 시리즈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마초적'인 프랜차이즈인가? 그리고 두번째, 매드 맥스 프랜차이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정립한걸 제외하면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이 없었던 것일까? 이 칼럼에선 이러한 두가지의 질문을 토대로 매드맥스 삼부작을 되돌아보고, 더 나아가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를 리뷰하기 위한 밑바탕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첫번째로 매드맥스 시리즈가 마초적인 작품이냐는 질문에 대한 고찰이다. 일단 답을 먼저 내리자면 1편이 마초적인 색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들지만, 시리즈 전체와 더 나아가 조지 밀러라는 감독이 하고 싶었던 바를 생각하자면 매드맥스 시리즈는 오히려 비마초적인 영화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특히 1편과 2편의 맥스의 모습과 도로라는 공간을 그려내는 방법론을 집중적으로 비교 분석해야 한다. 먼저 1979년에 호주 B급 영화로 만들어진 매드맥스 1편은 대충 망해가는 세상을 배경으로(그야말로 완전히 망한것도 아니고 정상적인 것도 아닌 '대충 망한') 고속도로 경관인 맥스 로카탄스키가 무법 폭주족인 토커터에게 아내와 자식을 잃고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1편은 이러한 과정을 예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인상깊은 형태로 구현한다:2차선의 도로는 지극히 좁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고속도로 경관인 맥스)이 다른 한쪽(바이커들)을 배제할 수 밖에 없는 충돌의 공간이다. 자동차에 카메라를 달고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찍은 영화의 많은 시퀸스들은 달리는 것 자체의 아슬아슬함과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동시에 매드맥스 1편에서 도로는 도달하는 곳이 정해져있는 광기의 공간이기도 하다: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바로 토커터 일당이 맥스의 아내와 자식을 바이크로 쳐버린 뒤, 맥스가 맨발로 도로를 달리면서 아내와 자식의 유체를 바라보며 오열하는 장면일 것이다. 여기서 도로는 일직선으로 뻗어있으며, 카메라는 멀치감치서 달려가는 맥스를 잡아낸다. 그리고 도로의 끝에서, 맥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비극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맥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의에 가까운 복수를 집행하는 분노의 사자가 된다.


하지만 2편에서는 이러한 미학들이 180도 바뀌게 된다:우선, 도로라는 공간과 자동차라는 미학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뀐 것은 도로라는 공간의 속성과 맥스라는 케릭터의 특징일 것이다. 1편에서 가족을 잃은 맥스는 이제 지켜야 할 가족도,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유능하고 빠르지만(8기통의 블랙 인터셉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냉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겁탈당하는 여인을 두고도 기회를 엿본다던가) 멜 깁슨 특유의 어딘가 휙하면 돌아버릴거 같은 분위기와 함께, 맥스는 무미건조한 태도 속에 느글거리는 광기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런 그가 여타 도로의 무법자 갱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기본적인 원칙들, 계약의 이행이나 신뢰 같은 가치를 여전히 믿고 따른다는 점에 있다. 즉, 1편에서 분노한 남자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2편에서는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이미지를 맥스는 갖게 되었다. 그리고 도로라는 공간도 그에 맞춰서 변화하게 된다:후술하겠지만 2편에서 도로는 단순한 마초들의 광기와 물리적 충돌의 공간이 아닌 방향성의 문제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더이상 자동차의 속도감만에 집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공중에서 자동차들의 추격씬을 다루거나, 와이드캠으로 파노라마를 구축하는 주력한다. 2편은 마초들의 광기어린 충돌, 어느 한쪽이 살아남는다라는 감각이 아닌 '방향성'의 문제,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문제를 보여준다.


이러한 두 영화의 차이는 기본적인 공식(맥스와 도로, 자동차)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상이한 결론에 도달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렇게 접근할 수 있다:기본적으로 매드맥스 1편은 '그렇게 성공할줄 몰랐었던' 작품이다. 그렇기에 적은 예산을 토대로 만들었어야 하는 작품이었기에 장르 영화의 공식(마초적인 색체)을 따르면서도 최대한 예산을 아껴야 했을 것이다(공중 촬영으로 와이드 캠으로 찍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하지만 1편의 예상외의 성공은 2편을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감독이나 제작진의 재량에서 자유롭게 접근할 여지를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즉, 2편은 시리즈 전체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들이 모여있는 작품이며, 1편은 감독이 제한된 환경과 타겟 관객층을 정해놓고 만들었어야 했었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감독은 지속적으로 1편의 설정(고속도로 경관이었던 맥스, 1편 마지막 다쳤던 부상의 여파인 다리 보철)을 시리즈 전반에 삽입함으로서 1편을 원류이자 출발점으로써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2편이 감독이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라 가정하고 매드맥스 시리즈의 구심점이라 결론내렸을 때, 이 영화 프랜차이즈를 마초적이라 부를만한 여지는 줄어들게 된다. 마초란 '남자다움'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2편의 맥스에게 있어서 그런 지향해야 하는 가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가솔린으로 표상되는 '생존'에의 의지다. 그런 생존에의 의지와 함께 매마른 감정과 가슴 깊숙이 남아있는 가족의 상실이라는 상흔이 지배하는 맥스를 우리는 생존자 또는 망령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맥스의 모습을 2015년 9월 발매 예정인 아발란체 스튜디오의 매드맥스 게임 트레일러에서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끝낼 영웅이 오리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그가 있다. 맥스라 불리는 남자가. 



맥스는 마초는 아니며, 더더욱이나 영웅은 아니다. 그는 공동체에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나 영웅이 아니며, 자신이 조우한 공동체와 함께 투닥거리면서 갈등하고 자신의 잇속을 채우려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2편과 3편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동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관객들은 그에게서 신비함을 느끼는 동시에 어딘가 믿을 수 없는 긴장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항상 영화의 마지막에 맥스는 공동체를 위해서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그것은 자신의 생존의 확률을 높여주기에(2편의 클라이맥스인 유조차 시퀸스),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3편에서 사반나를 구하러 가는 시퀸스), 혹은 자신의 트라우마가 되풀이 되는걸 막고자 하는(4편의 클라이맥스) 형태로 다양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맥스라는 케릭터가 갖고 있는 독특함이다:그는 생존의지가 강하고 그로 인해 때로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낼때도 있지만 그 속에는 한줄기 희망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그러한 일련의 인간에 대한 믿음과 함께, 맥스 스스로도 자신이 갖고 있는 상흔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2편에서부터 4편까지, 그는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곁에 남지 않고 다시 도로로, 황무지로 떠난다. 혹자는 여기서 서부극의 영웅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서부극의 영웅들은 모든 상황이 종결된 이후,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자연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맥스는 그러한 서부극의 엔딩의 좀 더 어두운 형태다:맥스는 자신이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공동체가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을 믿지만, 그 속에 과거의 상흔에 사로잡힌 자신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다시 광기의 공간인 도로에 남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맥스는 철저하게 '망령'이라 할 수 있다: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마음 한편으로 믿지만, 과거의 상흔이 그를 새로운 출발선에 서지 못하게 만드는 가련한 존재. 맥스는 그렇기에 독특한 케릭터이며 동시에 마초적이거나 영웅적인 색체가 옅은, 그러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케릭터가 된다.




3.


두번째는 매드맥스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로서 갖는 독특함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매드맥스 2편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폴아웃 시리즈나 북두의 권 같은 작품들은 노골적으로 매드맥스 2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30년 이상된 이 프랜차이즈가 30년 동안의 공백기 동안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에 영향을 주었다면, 여기에는 더이상 '새로운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게임 레이지나 보더랜드 같은 작품에서는 매드맥스에서의 '탈 것'의 개념을 충실하게 구현하기도 했었다.


매드맥스만의 독특한 미학을 다루려면 먼저 속도와 속력의 개념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속력은 한 물체가 지니고 있는 운동량을 의미하며, 속도는 속력에 백터량 즉 방향성이 합쳐진 개념이다.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1편이나 2편, 3편, 그리고 4편까지 이 속력과 속도의 구분과 도로에서의 방향성을 통해서 케릭터들의 특성이 분명하게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1편의 경우에는 방향성이 있는 속도 보다는 속력이 더 강조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도로를 달리면서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토커터의 동선은 방향성이 있다기 보다는 방향성이 없는 광기의 속력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맥스는 도로 경관일을 계속하면 자신 역시 언젠가 그런 미치광이 같은 작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그것은 일방통행이자 양보의 여지없는 2차선 도로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위험한 가능성 때문이기도 한다.(어떻게 보면 그가 단순한 마초가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그러한 광기와 위험성으로부터 도망가고자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다. 이러한 그의 움직임에는 가족이라는 지켜야하는 가치와 믿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방향성이 있으며 이는 속도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커터에 의해서 가족이라는 집단이 파괴되자, 그의 방향성은 무자비하게 토커터를 향하고 그리고 그들을 박살냄으로써 그는 속도의 방향성은 상실한다: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그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2편에서는 이러한 속도와 속력의 방향성이 아주 극명하게 대비된다. 방향성을 상실한 맥스는 뛰어난 속력(V8 블랙 인터셉터)과 그에 걸맞는 운전실력과 반사신경(맨손으로 뱀을 잡는), 생존의지를 보유한 능력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휴몽거스의 깡패들과 아슬아슬한 선을 타는 인물이기도 하다:휴몽거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정유시설 생존자 집단의 석유를 원한다. 또한 정유시설의 생존자들 역시 휴몽거스의 깡패들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들은 아니다:클라이맥스의 반전이나, 내분이 일어나는 모습, 석유를 독점하는 모습 등을 통해서 이들이 이상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맥스나 휴몽거스나 정유시설 공동체들을 서로 구분짓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방향성'의 문제일 것이다:정유집단의 생존자들은 정유시설을 떠나서 저 멀리에 있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길 꿈꾸며, 안(정유시설)에서부터 밖(저 멀리의 이상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석유는 생존을 보장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정유시설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뒷받침하는 동력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로는 그러한 방향성을 위한 거쳐가는 공간이자 수단이다. 하지만 휴몽거스 집단에게 있어서 도로는 세계가 멸망한 이후 그들의 광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며 그들은 더 나은 미래나 인간적인 삶 따위에는 전혀 안중에도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석유는 광기의 추동력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은 바깥에서 안(정유시설)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이 두 백터가 팽팽하게 충돌함으로서 영화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여기에 맥스가 끼어든게 된다.


맥스는 이 두 집단과 벡터의 충돌 속에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는 이 팽팽한 두 방향성의 사이에 끼어들어 자신의 재능을 팔아 석유를 얻고, 그리고 다시 생존자 집단을 떠나려 한다. 애시당초에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상흔 때문에 어딘가에 정착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위기가 그를 찾아온다:그는 놀라운 재능과 속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자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휴몽거스의 행동대장은 니트로 차저를 이용해서 맥스의 블랙 인터셉터를 따라잡는다.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그의 속력이 따라잡히게 되면서 그의 차는 부서지고 동료인 개는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조차도 너덜너덜하게 된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맥스를 공동체로 이송한 후, 맥스는 공동체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자신이 유조차를 몰고 미끼가 되는 것으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맥스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의 일부로도 볼 수 있다. 가장 유능한 사람이 트럭을 몰고 미끼로 활동하여 최대한 시간을 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맥스가 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상과 방향성에 대해서 긍정하고 있음을 전제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속력에 벡터를 추가해서 속도를 만들어내게 된다. 2편 클라이맥스의 유조차 추격씬이 갖고 있는 긴장감은 바로 그런데 근거하고 있다. 한쪽은 쫒아오고 다른 한쪽은 추격한다. 거대한 유조차는 단순하게 거대한 것을 뛰어넘어 맥스가 부담하는 심리적 물적 부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휴몽거스가 니트로 차저를 키고 전속력으로 맥스의 유조차와 정면에서 부딪히면서 이 추격씬은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충돌 이후, 맥스는 살아남는데 성공하지만 공동체가 도로를 따라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맥스는 그들의 뒤에, 도로의 위에 남아있는 것을 선택한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는 공동체와 인간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믿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갖고 있는 상흔이 그를 어딘가로 향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다. 4편에서의 맥스의 독백처럼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서 쫒기는 자'라는 표현처럼, 죄책감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 그를 어디로도 향할 수 없는 도로 위에서 서서히 망가뜨리고 궁지로 몰아가게 한다. 


3편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망한 작품이기도 하다:기본적으로 가식(교역 도시)과 순수(어린이들의 마을) 사이를 맥스가 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여기에는 '도로'라는 공간과 그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향성은 뜬금없는 방향으로 꺾여지며(왜 사반나를 구한 뒤에 마스터를 구하러 가는가? 영화는 그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하다), 매드맥스 1편이나 2편이 가졌던 메마르고 잔인했던 정서는 잘려나간 3편은 마치 만들다 만 가족 영화의 슬랩스틱 코미디 정서마저 느껴질 정도로 유치함이 느껴진다. 영화의 각 요소들은 괜찮은 부분들이 있지만, 점과 점으로써만 존재하고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산만하게 흩어져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드맥스 3는 케빈 코스트너의 희대의 괴작 워터월드를 떠오르게 만들고, 워터월드를 잘만들면 매드맥스 3라는 결과물이 나오게 될거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엄밀하게 보자면 워터월드가 시기상으로 앞선 매드맥스 3를 벤치마킹한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3편에도 건질 장면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추격대가 맥스 일행을 향해 달려오고, 맥스 일행의 비행기는 이륙하기 위해서는 추격대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리고 맥스는 자원하여 트럭을 몰고 사반나 일행이 이륙할 수 있는 활로를 뚫는다. 이 두 집단의 충돌의 긴장감과 비행기 이륙까지의 스릴은 이 영화가 매드맥스 프랜차이즈에 속해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동시에 맥스라는 케릭터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도로와 방향성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1,2,3편 모두를 통털어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탈 것이 그 케릭터의 성격을 묘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맥스의 8기통 블랙 인터셉터는 그가 빠르고 고독하며 유능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리고 자이로콥터를 타고 다니는 남자는 변칙적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가 맥스와 같이 빠르고 강한 것은 아니지만 약삭빠르고 영리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휴몽거스의 경우에는 그의 논리적이고 달콤한 감언이설과 별개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차 범퍼에 달고 다니는 모습과 어딘가 야만적인 인상을 주는 자동차의 디자인을 통해서 그의 말과 다르게 그의 본질이 잔인하고 야만적임을 알게 만든다. 이와 같이 '자동차'라는 현대문명의 이기를 다채롭게 개조하여 광기의 표현물인 동시에 케릭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썼다는 점에서 매드맥스는 인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4.


4편 분노의 도로는 이러한 기반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노의 도로 리뷰는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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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급한대로 내일부터 리뷰 몇개 올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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