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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1월 27일 출시된 다잉라이트 컴패니언 앱은 스마트폰/패드를 통해서 미니게임을 제공하며, 그 미니게임의 내용을 실제 게임과 연동시킬 수 있다. 그리고 다잉라이트 컴패니언 앱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다:사실 이전까지 게임에는 게임과 스마트폰-패드를 연결시키는 다양한 컴패니언 앱들이 존재하였고, 컴패니언 앱이 실제 게임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와치독스처럼 다른 플래이어를 방해하거나, 혹은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처럼 레이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 다잉라이트 역시도 이들과 비슷하다. 컴패니언 앱을 통해서 게이머는 게임 내의 조합용도로 쓰이는 각종 소모재들을 획득할 수 있으며, 이를 게임에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잉라이트 컴패니언 앱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다잉라이트라는 게임의 시스템 덕분이다:다잉라이트에서는 모든 것이 소모재가 된다. 수류탄, 플래어, 표창, 구급약 등등 게임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모든 것들은 소모되는 자원이다. 무기도 수리하는데 자원이 소모되며, 심지어는 무기 그 자체도 결국은 수리가 안되서 부서지기에 '소모되는 자원'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다잉라이트 초반에는 소모재 루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하지만 초반에는 이 필수적인 과정이 잡아먹는 부담과 시간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다잉라이트 컴패니언 앱은 초반부터 끝까지 게이머의 소모재 루팅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즉, 컴패니언 앱이 게임 내에서 게이머가 느끼는 루팅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다잉라이트 컴패니언 앱은 여타 게임들의 컴패니언 앱과 다른 특징을 갖게 된다. 가령, 와치독스나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처럼 실제 게임에 개입을 한다던가 하는 부분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컴패니언 앱 자체의 플래이가 어느정도 부담스럽고(실제 게이머와 겨루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가볍게 꺼내서 플래이하기에는 어렵다) 그리고 자신의 게임플래이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게이머 유인 요소가 적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와치독스나 라이벌의 컴패니언 앱은 '게임의 연장선상'이라기 보다는 '또다른 게임'이라는 인식을 게이머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잉라이트 컴패니언 앱은 소모재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게임 내에서의 루팅을 패드의 미니게임 형식으로 옮겨놓았기에 게임-컴패니언 앱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물론 테크랜드가 어떤 비전이 있었기에 컴패니언 앱 자체를 이렇게 디자인했으리라고는 본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컴패니언 앱-게임의 이러한 관계는 게임을 플래이하고 있지 않아도 게임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게임을 간접적으로 플래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옴니체널'을 형성하고 있지 않나라고 생각을 해본다:옴니체널이란 기업이 다양한 체널들을 통해서 소비자와 분절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통합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신세계 그룹이 이마트, 신세계 백화점 등의 휘하 기업들과 실제 점포, 인터넷 쇼핑몰, 스마트폰 쇼핑몰 등등을 SSG몰이라는 하나의 '체널'을 통해서 묶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다잉라이트의 사례를 넘어서 모든 게임의 컴패니언 앱들은 이전부터 게임회사들이 '옴니체널'이라는 통합된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와치독스나 니드 포 스피드 라이벌처럼 별개의 게임처럼 분절되어 있거나, 혹은 어새신 크리드:블랙 플래그 처럼 복잡하고 귀찮은 시스템으로 엮어버리는 등의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이는 여태까지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잉라이트는 그것이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본 게임 경험의 연장선상으로서의 컴패니언 앱을 설정함으로서 훌륭하게 옴니체널을 구성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잉라이트 컴패니언 앱은 상당히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게임의 경험이 게임이 꺼진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게임 경험 자체를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가? 다잉라이트의 경우처럼 게이머는 실제 게임에 필요한 자원을 폰이나 패드를 통해서 모을 수도 있고, 혹은 게이머가 직장이나 학교에 가있는 사이 게이머는 폰과 패드를 이용해서 게임 내의 케릭터에게 간단한 잡무(채집, 어렵지 않은 사냥 같은)를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데, 옴니체널이 기업이 고객에게 통합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게이머에게 경험 자체를 상품/서비스로 제공하는 게임에게 있어서는 마케팅 전략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게임 이야기



좀비는 언제부터 뛰기 시작했을까? 사실 좀 이상한 질문이기는 하다:나이가 든 영화팬들은 썩어빠진 좀비가 뛰어다닌다는 발상 자체가 좀비에 대한 개념에 대한 이단적인 무언가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좀비는 그 첫등장에서부터 '뛰어다녔었다' 전설적인 좀비 영화 붐의 시작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보면 좀비는 분명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탈리온 같은 경우에는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무전기를 붙들고는 '우리는 (뇌가) 더 많이 필요하다'라고 유인 무전을 때려서 도와주러온 인간들의 뇌를 뜯어먹기도 하였다. 엄밀하게 본다면, 고전적인 호러 영화에서 느릿느릿한 좀비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만 안 뛰어다녔다고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좀비는 언제부터 지금의 형태같은 역동적인 존재가 되었나? 이전부터 그러한 기미는 항상 존재했었다. 하지만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28일 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데니 보일 감독은 아마추어 달리기 선수를 좀비로 기용하였고,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 등에서도 이런 유사한 이미지가 적용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전까지 좀비는 감염으로 자신의 세를 불리며 숫자로 인간을 압박하는 이름 없는 대중이었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인간을 사냥하는 포식자의 이미지로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잉 라이트가 재밌는 점은 바로 하나의 게임 안에 두가지의 좀비가 공존한다는 것이다: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느린 좀비일테고, 두번째는 파쿠르를 하면서 호전적으로 플래이어를 사냥하는 좀비일 것이다. 그리고 게임은 이러한 두가지 좀비의 콘셉트를 '시간의 변화'를 통해서 구현한다. 낮이되면 빛에 약한 좀비들은 느릿느릿하게 기어다닐 뿐이다. 하지만 밤이 된다면? 좀비들은 게이머를 호전적으로 쫒아다니고, 좀비의 압박 역시 더욱 심해진다. 

다잉 라이트가 좀비를 구현하는 방식은 똑똑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두가지 게임을 하나에 구현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템포를 삽입한 것이다. 자칫 지루하기 십상일 수 있는 느릿한 좀비의 사냥이 시간이 지나면 위치가 역전되는 형식으로, 그리고 쫒기다가 지치게 되는 좀비와의 숨바꼭질이 시간이 지나면 해소되는 걸로서 양쪽의 벨런스를 맞추고자 노력한 것이다. 문제는 이 '시간이 변한다'라는 콘셉트 보다는 '두 개의 게임 탬포가 각각 완성도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잉 라이트는 극단적인 두 컨셉의 게임 템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제적으로 변화시키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고, 둘 사이에 벨런스가 맞지 않는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새로운 시도인 점과 데드 아일랜드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근접전 콘셉트의 1인칭 좀비 액션 게임이라는 점은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잉라이트는 1/27 발매이며, 한국은 아직까지 발매가 결정되지 않았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주인공 일행의 찬란한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날이이었고 또 별똥별이 떨어진 날이었던 1990년 6월 22일. 멋쟁이 게리 킹은 각양각색의 친구들 네명을 데리고 동네에 있는 열두개의 술집을 하룻밤안에 모두 순례하는 계획을 세운다. 게리와 친구들은 "골든 마일" 을 따라가지만 단 세개의 술집을 남겨둔채 모두들 약을 빨고 술에 취해서 나가 떨어지고 만다. 게리는 그 날이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기억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현재 게리는 지금 생활에 넌더리가 나서 그 옛날 미처 다 하지 못한 술집 순례를 하자며 친구들을 다시 불러오기 시작한다. 티격태격하면서 술집에 가기 시작한 친구들과 게리는 마을사람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1990년 마을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아직도 마을에 남아있었고 이상하게 하나도 안 늙은 술집주인들은 주인공들을 전혀 못 알아본다. 주인공들은 곧 마을 사람들이 파란 잉크로 찬 로봇들로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위험에 처하지만 게리는 술집 순례를 계속해야된다고 우기는데...(엔하위키 시놉시스)


월즈 엔드는 에드가 라이트가 감독하고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두 배우가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일찍이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뜨거운 녀석들을 통해서 과거 액션 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훌륭한 재구성을, 션 오브 더 데드(국내판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통해서는 좀비 영화와 코미디를 능숙하게 합쳤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전의 두 작품이 과거 영화들을 향한 오마주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월즈 엔드의 테마는 어떤 영화들의 오마주도 아니고 드라마에서도 묘하게 앞선 작품들과는 빗나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밑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묘하게 엇나가 있는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월즈 엔드는 이 3부작들 중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히 인상깊고 뜻깊다. 물론 엔딩의 과격함과 아쉬움이 약간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즈 엔드는 3부작의 마무리로써는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월즈 엔드가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 내에서 갖는 독특한 위치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션 오브 더 데드의 어떤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술집 윈체스터로 도망친 션은 자신의 어머니가 좀비에게 물려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좀비에게 물린 그녀가 결국은 '좀비'로 변할 것이기에 머리를 으깨서 죽이자는 친구한테, 션은 제발 그런 이름(=좀비)으로 부르지말라고 항변한다. 흥미로운 점은 션이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좀비를 '좀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적당한 이름이 없으니 그것the Thing이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션 스스로가 좀비를 좀비라 칭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어째서 션은 좀비를 좀비라 부르지 않는 것일까?


본인은 일전에 이런 글을 쓴적이 있다(http://leviathan.tistory.com/1819) 내용은 다음과 같다:션 오브 더 데드에서 션은 좀비가 일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친구, 가족, 직장 동료 같은 구체적인 '개개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에게 좀비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 자체가 좀비이기 때문에 머리를 짓이겨서 죽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손쉽게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영화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션 오브 더 데드는 똑똑한 영화이다:좀비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가 갖는 행위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거부하며 마지막에는 '좀비가 된 친구와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월즈 엔드에서는 아주 정확하게 정 반대의 장면이 등장한다:게리와 그 친구들은 파란 잉크가 가득한 대체된 사람들을 '로봇'이라 칭한다. 그러자 로봇인 그들이 반박한다:로봇은 체코어의 '노예'라는 단어에서 등장한 단어인데, 우리를 보라. 우리가 어딜봐서 로봇, 즉 노예란 말인가? 이러한 그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게리와 그 친구들은 그들을 '로봇'이라 칭하길 포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명 첫번째 작품에서는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극도로 꺼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서, 왜 여기서는 아주 쉽게 무언가를 '노예'라고 칭해버리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하게 어떤 의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것은 영화가 이 대체된 인간들을 일방적인 증오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나름 충격적인 종말 이후, 이 대체된 인간들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간다. 심지어 게리는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데, 이 새로운 친구들 모두가 '대체된 인간'이다. 영화는 대체된 인간 자체에 대해서 영화는 어떠한 편견이나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조롱 가득한 '로봇'과 종말 이후의 대체된 인간들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가장 중요하며 유일한 차이는 바로 '네트워크'의 유무이다:네트워크는 인류를 계몽하여 은하계 사회의 일원에 걸맞는 존재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서 우주에서 온 외계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최첨단 기술을 전파하고, 긍정적인 캐치프래이즈와 더욱 완벽하고 훌륭한 인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을 한다. 


네트워크라는 빌런의 존재는 기존의 외계인 빌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그들은 인류를 침략하거나 그들 중의 일부로 개종하러 온 것이 아니다. 경쟁이 아닌 유대감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그들은 인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숭고한 사명의식을 갖고 이 땅에 강림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긍정성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마지막엔 기술문명을 붕괴시키는 사태를 초래한 게리 일행이 도덕적으로 '더 나쁜' 집단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그야말로 악의가 없는 순수하게 선한 세계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악의없는 순수한 선이 더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도덕적으로 완벽하기에 반박이 불가능하며, '더 좋은 세계'를 원하기에 반대세력을 쓸어낼 수 있는 추동력을 갖는다. 네트워크가 순수한 인간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수만명의 도시 주민들을 대체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도 과거 나치즘이 우성 아리아 인에 의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아리아 인 이외의 인류를 향해 범한 인종청소라는 범죄의 맥락과 연결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부정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긍정의 세계란 지극히 파시즘적인 세계라고도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감'이나 '더 나은 인간' 같은 자기계발서에서 다룰 법한 가치를 기치로 내건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대체된 인간은 '노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긍정의 세계에 대한 경계가 3부작 중 하나인 뜨거운 녀석들에서도 드러난다는 점이다:마을 장로들은 모여서 영국 최고의 마을 상을 받기 위해서 부랑자, 불량 청소년, 범죄자 등등을 죄다 죽이고 암매장한다. 주인공이 도대체 왜 그런짓을 하냐고 물어보자 더 좋은 선을 위해서For the greater good이라고 대답을 한다. 일견 이 황당해보이는 상황은 의미심장함을 내포하고 있다:영국 최고의 마을상이 공공선Greater good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니, 애시당초에 공공선이라는 것의 이름 아래서 행해지는 배제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감독은 이미 월즈 엔드 이전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비꼬기만 했었던 뜨거운 녀석들과 다르게, 월즈 엔드는 감독 스스로가 내린 결론이 포함되어 있다.


네트워크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게리와 그 친구들을 보자. 특히 게리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이다:우선 그는 완전히 자기 중심적이며, 유치하며, 그의 좋은 시절 추억을 위해서 모든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렸으며, 자기 술친구를 위해 어머니까지 팔아먹는 등 엉망진창인 인간 쓰래기라 평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좋은 시절 추억에 극도로 집착한다: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뒤 느꼈던 충만감과 자신감의 순간에 집착하여, 게리는 술을 마시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 도달한 곳은 친구들을 화나게 만들고 실망시키며, 동시에 그 자신도 알콜중독자일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골든마일 재패에 집착한다. 그것이 그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는 바로 인간의 '병신성' 그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피터는 자신을 괴롭혔던 인간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잊을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Arcade Fire, Windowsill), 인간은 네트워크가 요구하는 것처럼 과거를 벗어나서 미래로 나아가는 완벽하게 긍정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병신짓을 하던 중에 입은 흉터를 드러내거나, 이혼한 아내의 결혼반지임에도 그것을 찾으려는 앤디의 모습, 가장 훌륭했던 자신의 인생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며 친구의 만류에도 술을 계속 마시려는 게리의 모습,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친구들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전적으로 과거에 매여있으며 육체적인 문제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들은 무한 긍정을 주창하는 네트워크에 의해 대체된 인간들과 구분될 수 있다. 어찌보면 이렇게 병신같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의내리는 '무언가'라고 영화는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월즈 엔드의 여정은 무한 긍정의 세계 속에서 병신같은 인류의 면모를 고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계몽'될 수 없다는 것을 안 네트워크는 최첨단 기술들을 모두 파괴하며 지구에서 떠난다:아마도 월즈 엔드에 있어서 껄끄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텐데, 우리는 이미 최첨단 기술 사이에 살고 있기에 그러한 기술의 절멸이 갖고 있는 의미와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지껏 병신같게 잘 놀다가 전 지구급으로 스케일을 키우는 엔딩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본인 역시도 좀더 부드럽고 납득이 되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그 괴리감보다는 영화가 보여주는 '종말 이후'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네트워크가 떠난 뒤 기술 문명의 종말 이후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혼란과 광기와는 완전하게 다르다. 그들은 오히려 더 차분해지고(앤디), 원하는 것을 얻거나(아내와 재결합한 앤디, 스티븐은 피터의 동생과 결합한다), 혹은 종말 이전과 다름 없는 삶(대체된 피터와 올리버는 종말 이전의 생활을 하는것처럼 보인다)을 살게 된다. 네트워크는 인류에게 더 좋은 세계와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한 것만큼이나 우리의 삶의 본질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없더라도 인류는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영화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멸망하였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게리는 술도 끊고 면도도 깔끔하게 한 모습으로 새로운 친구들과 모험을 즐긴다. 게리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이었던 과거의 자신과 일정 정도는 화해하며 자신의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규칙(특히 술을 끊은 모습에서)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영화 월즈 엔드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이어지는 작품이다. 결말까지 이어지는 더 나은 과정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갖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죽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영화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하며 통찰력이 느껴졌던 부분들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결론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월즈 엔드는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며, 이전 작품들과 같이 사람들과 술한잔 하면서 보기에는 딱 알맞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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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오늘도 보람찬 땜방~ 땜빵~





게임 이야기




레프트 4 데드로 4인 협동 코옵 게임의 붐을 일으킨 터틀락 스튜디오의 신작 이볼브가 완전 한글화되어 2월 10일 발매될 예정이다. 이볼브의 게임 규칙은 간단하다:4명의 플래이어는 팀을 짜서 몬스터 역할을 맡은 플래이어를 사냥하며, 사냥꾼들은 사냥꾼들끼리 협동하며 몬스터의 플래이어와 경쟁한다. 하지만 이 간단한 이볼브의 게임 컨셉은 코옵 게임의 대체적인 흐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참신하다고 할 수 있으며, 몇몇 게임들(다잉라이트의 멀티라던가, 페이블:레전드의 멀티라던가 등)에서 발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이볼브는 이러한 경쟁-협동 형태의 멀티 붐의 선두에 서 있는 상징적인 작품인 것이다. 이전까지 보통의 협동 게임에 있어서 협동을 하는 '팀'이외에는 다른 플래이어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대부분의 코옵 게임들은 레프트 4 데드 시리즈처럼 플래이어들은 AI가 조종하는 특수 좀비들과 수많은 좀비들을 해쳐나가면서 게임을 진행해 나갔고, 이는 대부분의 코옵 게임의 정석적인 진행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레프트 4 데드 식의 코옵 방식이 전부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이미 이볼브 이전에도 경쟁 협동 방식의 멀티는 찾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레프트 4 데드에는 경쟁 협동 방식이 들어가 있는데, 4명의 생존자와 4명의 특수좀비로 팀을 나누고 생존자는 탈출을, 특수 좀비는 생존자의 절멸을 노리며 라운드를 진행하게 된다. 재밌는 점은 레프트 4 데드의 경쟁 협동은 경쟁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 '협동'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점이다:나 혼자 잘하면 다른 팀원들도 이끌어줄 수 있는 콜옵 또는 퀘이크 류의 멀티와 다르게, 레프트 4 데드에서 특수좀비들은 '완벽한 습격'을 계획하여야 한다. 각자 장단점이 뚜렷하며, 생존자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단 한명의 활약보다는 팀 단위에서 잘 짜여진 협동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생존자 입장에서는 뭉쳐다녀야지만 개별로 무력화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기에 항상 서로를 시야에 두면서 경계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잘 찾아보면 이러한 사례들은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4인 코옵 이외에도 레포데의 경쟁 협동 멀티 같은 방식이 흔하지 않고, 지금에 외서 이볼브와 기타 다른 게임들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일까? 이는 게임에 있어서 AI가 갖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에 기반한다:AI는 그 패턴이 단순하기 때문에 게이머에게 있어서 큰 장애물이 될 수 없으며, 게이머는 AI를 이해하고 공략하며 그 끝에는 AI를 가지고 놀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AI와 다르게 멍청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항상 신선하고 재밌으며 대결하는 상대방과의 심리전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AI 대신에 인간과 경쟁하는 것은 게이머에게 있어서 매력적이면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한 같은 인간과 대결하여 정복한다는 원초적인 쾌감 역시 게이머를 매료시킬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협동의 붐이 일어나던 시점에서 이볼브 같은 경쟁 협동 멀티는 흔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경쟁 협동 멀티는 필연적으로 비대칭적인 게임 규칙 구조를 수반한다. 레포데의 경쟁 협동 멀티에서 볼 수 있듯이, 게이머는 두 개의 완벽하게 다른 경험을 체험한다. 한 쪽은 협동 모드의 일반적인 생존자의 경험이고, 다른 한쪽은 기존의 생존자의 플래이와는 다른 특수좀비들의 플래이 방식이다. 게임은 그렇기에 하나의 공간과 시간을 두고 서로 다른 두 경험이 공존하게 되며, 이로 인해서 게임은 다채로워지지만 동시에 복잡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면 협동 요소를 강조하면서 대칭적인 게임 플래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도 그러한 시도가 바이오하자드:오퍼레이션 라쿤 시티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본인은 기억한다. 스펙옵스와 엄브렐라 용병들이 좀비가 돌아다니는 맵을 가운데 끼고 서로 경쟁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멀티플래이 방식이지만, 문제는 게임 자체가 망해서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장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대칭적인 경쟁 협동 게임 구조를 상상한다 하더라도, 대부분 게임의 멀티들이 그런 상대팀과 우리팀 사이의 '대칭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대칭적 구조에서의 협동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협동이란 승리를 위해서 서로 각기 다른 역활을 맡으며 이 과정에서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필요로 하는데, 대칭적인 대결 구조에서는 서로가 동등한 능력과 위치에 서있어야 하므로 팀의 구분의 의미가 다소 퇴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볼브의 컨셉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비대칭적인 구조는 두 경쟁 상대 사이의 힘의 균형을 조절해야하며, 동시에 게이머는 양쪽의 게임 템포를 모두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레프트 포 데드에 있어서 특수 좀비에 익숙하지 않은 게이머들이 협동미션을 거치면서 게임에 능숙해진 상대에게 휩쓸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으며, 이는 '인간에게 걸맞는 상대'라는 개념을 오히려 인간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실패상태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볼브는 게임의 템포를 3페이즈로 나누고(몬스터의 진화 단계에 따라, 몬스터<헌터인 1단계, 몬스터=헌터인 2단계, 몬스터>헌터인 3단계), 데미지나 다운 상태를 누적시켜서 체력 관리를 중요하게 만들며, 동시에 시간 제한 등의 다양한 제약을 걸어서 싸움을 유도하기도 한다. 


사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볼브의 성공 가능성은 손에 직접 쥐고 직접 판단해보기 전까지는 감이 안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볼브는 경쟁 협동 멀티플래이가 대중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는 것, 콜옵이나 퀘이크 식의 대칭적인 결투가 아닌 게이머와 게이머 사이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멀티가 큰 흐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볼브의 완성도와 흥행을 둘러싼 상황의 추이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야쿠자 보스 무토는 인맥을 동원해 아내의 소원인 배우 지망생 딸을 영화에 데뷔 시키려 하지만 딸의 말썽으로 촬영이 무산된다.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토는 직접 제작자로 나서 야쿠자 조직원들을 스탭으로 동원한다. 얼떨결에 무토의 딸과 엮여 영화 감독으로 소개 된 코지는 강제로 이 영화의 연출 의뢰를 받게 된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코지는 일생의 영화를 찍는 게 소원인 영화광 히라타와 3인방 '퍽 바머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는 리얼리티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마침 앙숙인 두 야쿠자 '무토파'와 '이케가미파'의 결전을 실시간으로 찍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영화다:액션 영화에 미친 아마추어들은 전통복에 환장한 야쿠자와 출소하는 아내를 위해서 항쟁 당일 영화팀을 꾸리는 야쿠자 두목의 도움을 받아서 서로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영화에 담는다. 영화는 2시간 동안의 러닝타임 내내 산지사방에 피를 흩뿌리며, 온갖 골때리는 연출과 황당한 상황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2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는 관객을 흡입하는 힘이 강한 작품이며, 재미로 영화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도 무난하게 추천해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금 색다른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메인 플롯은 야쿠자나 갱스터 물에 가까운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러한 메인 플롯에 영화광인 히라타와 퍽 보머스Fuck Bombers의 존재를 이중나선처럼 연결지은 것일까? 그리고 왜 제목은 '지옥이 뭐가 나빠'인 것일까?


왜 제목이 '지옥이 뭐가 나빠'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옥'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제목에서 지옥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를 선정하긴 했지만, 정작 극 내부에서 지옥이라는 키워드에 대응되는 뚜렷한 무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지옥이라는 키워드가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전설적인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과 지옥이 뭐가 나빠를 대칭시켜야 한다. 시네마 천국은 어렸을 적에 영사기사 알프레도에게 영사기술과 영화를 배운 토토가 영화와 함께 성장하면서 사랑과 슬픔,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네마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토토와 영화의 관계일 것이다:영화는 그의 삶에 있어 중요한 순간을 차지하였으며, 다양한 고전 영화들이 그의 삶을 관통하듯이 지나간다. 마치 다시 손에 잡을 수 없는 빛바랜 추억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옥이 뭐가 나빠는 다르다. 지옥이 뭐가 나빠가 직간접적으로 인용하는 영화들은 우리가 '고전영화'라고 부르는 그런 고상한 것들이 아니다:이소룡의 용쟁호투의 직접적 인용과 파일럿 무비에서 드러나는 챤바라 물(베고, 베고, 베고, 또 벤다!), 야쿠자물의 인의와 시대착오적인 시대극의 모습들, 코카인을 한껏 들이키고 보이는 싸이키델릭한 환상이나 신체절단이 난무하는 고어 영화의 영향 등등 그야말로 '입에 차마 담기에는 너무나 천박하고 유치한' 물건들 뿐이다. 그렇기에 지옥이 뭐가 나빠의 히라타와 그 친구들은 토토와 정반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토토는 영화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였고(어렸을적 부터 그는 영사기사를 했었다), 성공을 하여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지위를 성취하였다. 하지만, 히라타와 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로 삶을 연명하며, 한때 자신들의 아지트였지만 지금은 망해버린 극장에서 스크린도 아닌 브라운관으로 만든 파일럿 무비를 보고, 또 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영화는 히라타와 그 친구들에게 '지옥'이다. 처음 사카키와 만난 이후, 10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채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결국 사카키가 무위도식하는 자신들의 상황에 분노하여 히라타 일행과의 절교를 선언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영화를 정말로 사랑하지만, 그들이 메인스트림에 오를 수 없다는 점에서(10년이 지나 폐허가 된 극장과 오락기기들처럼) 영화는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굴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굴레에 대해서 늘어놓는 히라타의 장황하면서 바보같은 신념이다:이런 시궁창 같은 상황에서도 영화의 신은 우리에게 어떤식으로 기회를 줄지 모른다. 히라타가 말하는 영화에 대한 사랑은 바보같고 장황하며 앞뒤가 안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하며 확고한 열의와 철학이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10년 전과 현재를 오가면서 리드미컬하게 진행된다:무토를 습격하려다 오히려 무토의 아내에게 당해서 실패한 이케가미는 무토의 딸인 미츠코를 만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동시에 무토는 자신의 아내 덕에 습격에서 살아남았다는 빚을 졌으며, 동시에 일련의 항쟁으로 CF로 잘나가던 딸의 성공가도를 망친다. 재밌는 점은 이 둘의 주된 행동 원인이 미츠코라는 케릭터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케가미는 자신에게 살아나갈 수 있는 동력을 준 미츠코를 숭배(?)하고는 남자의 결단은 기모노다! 라 외치며 시대착오적인 야쿠자를 꾸리며, 무토는 야쿠자의 인의에 대한 일장설교를 늘어놓으며 일생일대의 결전을 앞두고 아내에 대한 인의를 지키겠답시고 영화팀을 만들어버린다. 미츠코로부터 시작된(엄밀하게 본다면 그 바보 같은 CM 덕분일 것이다) 이 비상식적인 황당한 행동들에는 히라타 같이 바보같지만 확고한 열의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의 바보 같은 행동들은 야쿠자 영화의 클리셰에 대한 비틀기이다:조직원 사이의 의리라는 클리셰는 바보같은 영화 만들기로 바꾸며, 남자의 결단은 시대착오적인 기모노를 향한 결단이 된다.


그리고 히라타, 이케가미, 무토 외에도 영화에는 바보와 또라이들이 가득하다, 아니 바보와 또라이들 밖에 없다:얼떨결에 영화감독이 된 코지는 코카인을 한껏 흡입하고는 이마에 칼을 박고 몸개그를 하지 않나, 미츠코는 10년전 어린 시절부터 피웅덩이 가득한 바닥을 바라보며 시체 청소부를 부르고 성장한 뒤에는 맥주병 키스를 하는 등의 광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을 바라보라며 히라타와 싸우던 사카키는 기회가 생기자 다시 그 바보같은 노란 추리닝과 쌍절곤을 들었으며, 사카키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점장은 자신의 음식점에서 깽판을 치던 사카키를 바라보며 따봉을 외쳐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하며 바보같은 자기 미학과 철학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서 진행된다. 


왜 영화는 이렇게 확고하면서 바보 같은 미학과 철학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일까? 여기서 다시 히라타의 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친구들과 야쿠자들이 경찰에 의해 죽어버린 후 겨우 필름과 녹음 테이프를 회수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한 히라타는 달려나가면서 해냈다! 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의 환상속에서 히라타 일행의 아지트였던 극장이 부활하고 여지껏 등장한 배우들과 함께 환호하는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부와 명예에 국한된 영화가 아니었다(그는 그런 쓰레기 같은 영화는 자신은 안 만들겠다고 극 중 내내 반복한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그의 유년시절의 쿨했던 영화들의 존경이자 그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미학의 결정체였다. 그렇기에 그가 찍은 영화, 지옥이 뭐가 나빠에는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바보들이 가득한 것이었다.


또한 지옥이 뭐가 나빠는 영화 바깥의 현실과 교차시키는 메타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서 바라볼 수도 있다:지옥이 뭐가 나빠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의해 성공하고 거기까지의 과정을 반추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장년층의 시네마 천국이 아닌, 소위 싸구려 영화에 심취하여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지도 못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위해 오늘과 미래를 내던져버리는 요즘 시대의 청년층의 시네마 지옥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히라타와 그 일행들은 오히려 되묻는다:그런 시네마 지옥이 뭐가 나빠?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 사랑은 B급 영화의 매력처럼 바보같지만 멋있으며 폼에 죽고 폼에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지옥이 뭐가 나빠의 B급 정서에는 '음험함'이 대단히 옅다:영화의 유쾌함도 유쾌함이지만, 동시에 영화가 피가 엄청나게 난무하는 성인용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섹스에 대한 묘사가 적은 점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케가미의 미츠코를 향한 사랑은 전적으로 동경 또는 숭배에 가까우며, 무토는 자신의 연인을 아내에 대한 의리 때문에 내친다. 야쿠자들은 두목의 황당한 요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칼 싸움을 넘어서 총을 꺼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마저도 유쾌하고 즐거운 놀이처럼 묘사한다. 즉, 영화는 피와 절단이 난무하는 B급 영화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런 어떤 '음험함'이 들어갈 요소를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배제하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옥이 뭐가 나빠는 소노 시온의 자전적인 영화라고도 생각하기도 한다. 히라타가 마지막에 달리면서 외친 해냈다! 라는 기쁨의 함성은 소노 시온 스스로의 외침일지도 모른다:나는 이런 바보 같은 영화를 드디어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바보'라는 수식어는 욕설이나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애정어린 칭찬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옥이 뭐가 나빠는 정말로 좋은 의미에서 바보 같은 영화이며, 그런 바보 같은 것에 애정을 가진 젊은 세대를 위한 시네마 천국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다.






끝으로 지옥이 뭐가 나빠 엔딩곡을 첨부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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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발매입니다.


그리고 뉴 삼다수 전용 제노블래이드는 4월 2일 발매라고 합니다.





게임 이야기




쿠키클리커란 게임을 아시는가?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이걸 게임이라 분류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쿠키클리커란 물건을 어떤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면 본인은 주저없이 게임의 범주에 이를 포함시킬 것이다. 게임은 단순하다:클릭을 통해서 쿠키를 모으고, 모은 쿠키를 통해서 더 많은 쿠키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구입하고 천문학적인 숫자의 쿠키를 모은다. 이 과정에서 게이머는 쿠키를 굽는 할머니, 공장, 광산, 연금술 시설, 쿠키 행성, 로켓, 심지어는 쿠키 악마를 소환하는 악마의 문까지(.....) 만들게 되며, 점점 모든 것이 세계와 우주가 게이머가 만든 쿠키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게임이 이정도로까지 성공하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쿠키클리커는 묘한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떻게 보면 이 게임은 전통적인 게임 장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전혀 게임이라 부를 수 없다:게이머가 할 수 있는 행위는 오로지 생산건물을 증축하거나 업그레이드를 하는 일과 쿠키를 클릭해서 쿠키를 생산하는 일 뿐이며, 이는 단순하고 지루하며 반복적인 노동의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굳이 게임에서 재미를 찾아야한다면, 손가락 아프게 버튼을 누르는 노동같은 게임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쿠키 클리커가 게임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쿠키클리커가 아주 단순하기는 하지만 게이머의 행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존의 게임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떠한 '요소'와 맥락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마계전기 디스가이아 라는 게임 프랜차이즈는 일본 SRPG의 명맥을 잇는 프랜차이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노가다와 퍼즐적인 지형 활용, 파고들기 요소로 악명높은 디스가이아 시리즈에서 특기할만한 부분은 바로 '천문학적인 수치'이다. 게이머는 케릭터를 레벨 9999, 환생 포함 레벨 19998까지 키울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 중에서 체력, 능력치, 입히는/주는 데미지도 천문학적인 수치로 뻥튀기 되게 된다. 디스가이아의 중독성이 이 '수치'에만 근거를 두고 있다면 어불성설이지만, 이 천문학적인 수치가 주는 압도감, 거기까지 도달할 때 느낄 수 있는 달성감이 게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치에 대한 매료됨은 다른 게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슈로대 시리즈나 16비트 게임에서 최대 데미지 수치인 65535를 뽑아내기 위해서 게이머들이 들이는 노력이라던가, '이론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최대의 수치'를 뽑아내기 위해서 게이머들이 실험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은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게이머는 '숫자'에 매료되는 것일까? 사실 이에 대한 어떤 확고한 이론이나 명확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다. 보통의 게임에서는 높은 수치가 높은 효율과 압도적인 힘으로 직결되기도 하지만(실제 디스가이아 같은 게임에서는 이렇게 볼 수 있다), 쿠키클리커 같은 게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접근해볼 수도 있다:근대 이후 인간은 모든 것을 계량적인 수치로 접근하는 사고가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숫자는 근대 이전처럼 더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개념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천문학적인 숫자는 근대적 인간에게 있어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의 풍경처럼 인간을 자극하고 흥분시킬 수 있는 '풍경'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쿠키 클리커는 지극히 현대적인 스펙타클이라 할 수 있다:수천, 수만, 수억, 수조의 쿠키를 긁어모아서 또 다른 쿠키를 만들기 위한 시설을 짓고, 이를 통해 쿠키는 쿠키를 낳으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쿠키 클리커의 게임 메커니즘과 중간중간 쿠키에 의해서 망가지는 세계(할머니를 괴물로 만들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가치체계를 무너뜨리며, 심지어 과거의 쿠키를 미래로 가져와서 가져다 팔기까지한다)의 은유는 어떻게 본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훌륭한 풍자로도 그려진다:자본은 끊임없이 자가 증식하며, 모든 가치 질서와 관계망을 무너뜨린다. 쿠키 클리커는 근대의 수치가 갖는 스펙타클과 자본주의의 병폐를 서브컬처적인 미학(아포칼립스와 러브크래프트식의 코스믹 호러 같은)으로 은유함으로써 사람들을 매료시키는데 충분히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쿠키 클리커가 가져다 준 새로운 가능성과 은유는 다른 게임 제작자들에게 썩 좋은 기제로 적용되지는 못했나 보다. 최근 본인은 쿠키클리커를 명확하게 밴치마킹한 탭 타이탄스Tap Titans라는 게임을 플래이 해보았고, 많은 실망감을 느꼈다. 사실 쿠키 클리커류의 최대 맹점이란 결국 게이머가 지쳐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면 게임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엔딩도 없고, 달성해야하는 목표도 없다(도전과제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렇기에 게임은 게이머에게 남기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쿠키클리커는 그러한 공백을 독특한 자본주의 메타포를 통해서 극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탭 타이탄스는 기본적으로 쿠키클리커의 메카니즘과 매력 포인트를 끌고 들어오지만, 게이머를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광고와 과금의 유혹에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게임이다. 게이머는 탭을 통해서 몬스터에게 데미지를 입히며, 몬스터를 쓰러뜨려서 돈을 벌고 이 돈을 통해서 다양한 영웅을 고용하고 레벨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부분유료화 게임 답게 단순하고 무미건조하게 탭을 열심히 하는것 만으로는 게임이 진행된다고 할 수 없으며, 돈을 쓰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수월하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빡빡하게(혹은 느리게) 진행된다.부분유료화 이외에도 게임은 일종의 보너스인 요정을 이용해서 '광고 보고 돈 좀 받아볼래?' 같은 유혹을 끊임없이 게이머에게 제시하며, 보스 몬스터가 영웅을 죽여서 일정시간 DPS를 확 낮추고 '영웅을 살리려면 보석(=돈)을 쓰세요'라고 반강요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어떻게 본다면, 전형적인 스마트폰-패드 부분유료 게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분유료화가 나쁜가? 사실 부분유료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스마트폰 게임의 과금체계를 오락실에서 동전을 소비하는 개념으로 접근하거나, 온라인 게임의 부분유료화의 형태로 밴치마킹하는 케이스는 많이 접할 수 있다. 많은 게이머가(대부분 패키지를 구매하는 콘솔 게이머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부분 유료화를 비난하지만, 서비스로서의 게임 개념의 등장을 고려해본다면 '적정한 가격에 적정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전제만 지켜진다면 나쁠 것은 없다고 본인은 생각한다(비록 본인의 취향은 아니더라도) 그러나 탭 타이탄스는 근원적으로 '남는 것이 없는' 쿠키클리커의 시스템을 들고와서, 그것을 게이머에게 돈을 쓰라고 강요하는 서비스 시스템과 결합을 한 것은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훌륭한 스마트폰-패드 게임도 존재한다는 것이나 모두가 그렇게까지 사람을 벗겨먹으려고 환장하지는 않았다는 것, 게임으로서 스마트폰-패드 게임은 패키지 게임과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본인도 잘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텝 타이탄스 같은 게임은 본인에게 있어서 실망스럽고 조금은 슬프게 느껴지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게임 이야기





브레이블리 디폴트의 후속작인 브레이버리 세컨드가 4월 23일에 나온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전작을 상당히 즐겼던 만큼 이번작도 많이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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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친구들을 대신해서 체포되어 교도소에 복역되었다가 출소한 후, 레오 핸들러는 이제 그의 인생을 다시 제대로 되돌려 놓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전과자에게 녹녹하지 않고 사촌이자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던 에리카는 이미 자신의 오랜 친구 윌리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어있는데. 레오는 지하철 회사를 운영하는 삼촌, 프랭크를 만나 윌리와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만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에 빠져들며 살인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 그는 이 세계 속에서 가장 냉혹한 조직의 공격대상이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음모를 발견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더 야드의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는 대국민 사기극에 가까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평범한 장르 영화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들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과정과 방점을 찍는 부분에서 여타 장르 영화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들은 기존의 장르영화의 공식에 비추어 보면 전적으로 '엇박자'에 가까운 영화들이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가 갖고 있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박자로 만들어진 그래이의 영화는 다른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깊은 향기를 갖고 있다. 더 야드 역시도 그러한 부류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유대인 가족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배경 때문에 영화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할거라는 반대를 부모로부터 받았었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감독의 길을 걸었던 복잡한 성장배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성장배경이 그에게 있어서 가족에 대한 악감정과 트라우마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리틀 오데사나 투 러버스에서처럼, 가족을 향한 그의 감정은 트라우마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긍정적인 감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즉, 가족이라는 테마를 다루는데 있어서, 제임스 그래이의 접근방식은 '양가적'이다. 그리고 이 양가적인 접근이 서로를 양 끝으로 잡아당기면서 극에 붙잡혀 있는듯한 축축한 감성과 중력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적어도 본인에게 있어서 제임스 그래이는 최고의 가족 영화 감독이다.


더 야드 같은 경우에는 제임스 그래이 버전의 '대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여기에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온 탕자(레오)가 있고, 그 탕자는 가족 사업에 뛰어들면서 이런저런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대부와 더 야드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전적으로 '가족'이라는 집단 내에서의 관계론의 문제다. 대부에서 콜레오네 패밀리의 관계는 돈 콜레오네-마이클 콜레오네라는 아버지와 그 밑의 자식들과 방계의 형제들(또는 조직원들)의 가부장적 관계가 중심이다. 제목인 대부Godfather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가족의 수장이자 고독한 폭군이 주변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며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것이 대부의 이야기 핵심축이 되며, 그렇기에 대부에 있어서 조직과 가족은 가족의 형태를 넘어서 작은 사회, 더 나아가 인생의 은유로서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제임스 그래이의 더 야드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더 야드에 있어서 가족의 관계는 가족의 수장과 그 밑의 하부 구성원들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분명히 레오의 이모부 프랭크가 회사와 가족을 이끌며 가족-정치의 구심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랭크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오히려 그는 자신의 의견과 반하는 레오나 레오의 어머니의 견해에도 화를 내지 않으며,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오히려, 가족 내부에서도 배신과 음모가 판을 쳤던 대부의 가족과 다르게 더 야드의 가족은 분명하게도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오가 일을 망쳤을 때도 프랭크는 그를 제거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가족으로서 뒤를 돌봐주려 했었고, 망가지기 전의 윌리와 레오의 관계 역시도 서로의 뒤를 봐주는 밀접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더 야드의 인물 관계는 전적으로 '수평적'이다:프랭크와 그의 가족들, 레오, 윌리는 서로를 사랑하며 진심으로 위하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제임스 그래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다:가족의 사랑이란 감정적인 지원과 함께 무시무시한 감정적인 파괴를 수반한다고. 더 야드에 있어서 관계는 역으로 모든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윌리는 레오를 친구와 친척으로서 사랑하지만, 동시에 에리카와 레오가 사촌 이상의 밀접한 관계일 수 있다는 의심이 레오와의 관계를 뒤틀어버리게 된다. 또한 프랭크 자신과 가족의 파멸, 에리카의 죽음 역시도 이러한 사랑의 양면적인 부분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더 야드의 가족과 인물관게를 넘어서 암흑가와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 역시도 '수평적인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윌리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레오에게 설명할 때,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다'라는 호혜적이면서 단순한 원칙으로 묘사한다. '내가 거절못할 제안을 하지'라고 이야기하는 대부의 관계와 다르게(왕과 신하의 관계) 더 야드의 암흑가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해주면서 지속되는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이 수평적인 관계는 서로에 대한 '평등한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윌리와 거래하는 위원장이 도청을 두려워하여 옷을 벗고 알몸으로 거래를 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바깥의 세계는 호혜관계로 유지되지만 동시에 그 관계는 호혜가 끊기게 될 때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이야기의 균형이 무너지고 위험에 처해지는 순간은 경쟁사에게 매수당해 윌리의 제안을 거부하는 역사 관리인이 등장할 때와 같이 '더이상 서로에게 필요가 없어질 때'이다. 


이렇게 영화는 가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윌리와 레오라는 두 주인공을 통해서 풀어나간다. 레오는 여타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그는 항상 우울하며 아버지(아버지에게 부재한 그에게 있어 이모부인 프랭크라고도 볼 수 있겠다)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리를 두려하며, 어머니와 가족 내의 여성들에게 공감하기는 하지만 세계는 냉혹한 아버지의 방식으로 유지되기에 이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레오는 귀향 이후 성실하게 살고자 했었다:하지만 범죄자라는 낙인이 그에게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게 막았으며, 그리고 이모부의 호의를 쉽게 질 수 없었기에(누구라도 가족과의 관계에서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해본다) 윌리와 함께 암흑가에 발을 담게 된다. 재밌는 점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레오는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파악하고 자신을 둘러싼 일들을 주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면 월리의 경우에는 레오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생은 역사 관리인을 죽이기 전까지는 탄탄대로였었으며 레오와 다르게 쾌활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일처리에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도 잠재되어 있는 불안 요소가 있다:그것은 바로 그의 외부자적 신원이다. 경쟁사 직원이 윌리를 도발하면서 '너는 절대로 그들처럼 될 수 없어'라는 말 한마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그는 라틴 계열이며 명백하게도 프랭크와 레오의 가족의 일원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에리카와의 결혼을 통해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안정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 관리인과의 관계가 틀어지듯이 그의 업적은 단 한번의 실수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윌리와 레오라는 케릭터는 어찌보면 제임스 그래이의 개인적인 경험이 두명의 케릭터로 쪼개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늘 우울한 모습에 가족과의 사랑, 안정, 그리고 험악한 세상을 알아나가는 탕자의 경험을 레오가, 그리고 유대계열로서 사회에서도 겉돌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에 불안정했던 자신의 삶의 경험을(투 러버스가 개인적인 경험을 구체화 시킨 것이었다는 진술을 믿는다면, 제임스 그래이의 경험과도 이는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윌리가 이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직접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부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이면서 탈정치적이다. 이주민(유대인 또는 윌리 같은 라틴 계열)이라는 배경은 영화 내에서 서사를 구축하지 않지만 영화는 은연중에 그러한 배경을 깔아둠으로서 '이야기를 형성하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이야기의 배경에 존재하면서 하나의 '중력'을 형성한다: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케릭터들은 이러한 중력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한다. 투 러버스나 리틀 오데사 같은 영화에서는 한명의 인물이 겪는 이 양가적인 감성은 배경에 젖어들어가며 탈출이 힘들어지는 축축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구축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더 야드는 두 영화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한 명의 케릭터가 감당하는 이야기의 무게는 두명의 케릭터가 나눠서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 홀로 남겨진 레오가 지하철에 다시 앉아서 카메라 너머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다른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기묘한 여운을 느낄 수 있다:레오는 아버지의 방식(프랭크의 방식)을 거부하였고, 모든 사건들은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다시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에리카는 죽었고, 윌리는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났다. 오히려 둘이 함께함으로서 갖고 있었던 안정과 균형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말미의 레오의 응시는 단순한 응시를 넘어서 어떤 무게를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더 야드는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최고는 투 러버스라고 생각하지만, 더 야드 역시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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