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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어김없이 등장하는 땜빵용 포스팅입니다 ㅠ



올해 가기전에 볼 생각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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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늘 본능에 충실한 거친 삶을 살아온 삼류 복서 알리. 그는 5살 아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누나 집을 찾게 되고 클럽 경호원 일도 시작하게 된다. 출근 첫 날, 알리는 싸움에 휘말린 범고래 조련사 스테파니를 돕게 되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끌려 연락처를 남긴다. 이후,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스테파니는 깊은 절망의 끝에서 문득 알리를 떠올리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감상)


자크 오디아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선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뚜렷한 주제나 드러내고자 하는 현상이나 목표는 없으며, 영화는 불현듯 끝을 맺는다. 예언자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예언자가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야기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 혹은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왜 톰은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는가? 사실, 앞선 두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 제기에 가까웠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물론 영화 두 편만으로 그의 영화세계 전반을 다루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 두 작품이 가져다주는 강렬하면서 비슷한 인상들은 부정하기 힘들다. 여기서 본인이 생각하는 자크 오디아르가 그려내고자 한 이야기는(혹은 프랑스 젊은이들의 현실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뚜렷한 대안도, 해결책도 없기에 영화는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렇기에 러스트 앤 본은 오디아르 영화 세계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러스트 앤 본은 어떤 의미에선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리고자 한 작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연관관계가 없는 두 단편소설을 이어붙였다는 러스트 앤 본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두 개의 갈림길로 쪼개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다리를 잃고 재기하는 돌고래 조련사의 이야기와 떠돌이 같은 삶을 살면서 스트리트 파이트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하류 인생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접점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야기가 두개로 갈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이야기는 명백하게 맞닿아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맞닿는 지점은 바로 알리와 스테파니의 육체이다. 이 둘이 왜 맞닿아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크 오디아르 영화들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자크 오디아르 영화의 키워드를 뽑자면, 본인은 '소음과 분노'라고 요약하고 싶다. 대부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머릿속이 핏빛 안개가 낀것처럼 뿌옇지만 분명한 탈출구나 원인,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 그 핏빛안개는 점점 짙어져서 소음이 되고 불안감이 되며 머릿속을 넘어서 서성임으로 나타나다가, 종국에 가서는 무지막지한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오디아르는 그런 불안을 육체의 형태로 구체화시키는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예언자에서 주인공이 마피아 보스에게 숟가락으로 눈가락이 파일뻔한 장면을 보자. 그 뒤에 주인공은 혼자서 고통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욕지거리를 한다. 맞은 뒤의 빨갛게 부은 상처 부위가 고통과 짜증을 동반하지만 그것 자체에서 탈출할 수 없듯이, 자크 오디아르에게 있어서 육체와 폭력의 관념을 그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와 폭력의 문법은 표현을 넘어서 극을 지배한다:내 심장을 건너뛴 박동을 보자. 톰이 폭력적이고 속물적인 아버지를 벗어나고자 한 피아노로부터 좌절되었을 때, 그는 비트가 강하고 시끄러운 랩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한다. 낮은 음이 베이스가 되어 세계와 단절된 막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 막은 내부의 불안과 분노를 가중시킨다. 아버지 세대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자식 세대는 고독속에 갇혀서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키워나간다. 그것이 결국은 엔딩에서 아버지를 죽인 러시아 마피아를 향한 폭력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러스트 앤 본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법을 따르고 있다:처음 도입부에서 알리와 그 아들이 무전여행하는 장면은 어딘가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다.(남은 음식을 주워먹는다던가, 히치하이킹을 한다던가) 특히 도둑질을 하는 장면에서처럼, 도둑질 직전의 불안감과 도둑질 후에 터져나오는 급박한 상황 등은 불안함과 폭발이라는 힘을 모두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다른 관점에서는 알리의 경제 계층적 상황에도 빗대어 볼 수 있다:고정적인 수입은 없고, 떠돌아다녀야 하며, 기댈 곳도 없다. 그렇기에 항상 주변에는 불안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알리는 '교양있는 지성을 가진 중산층'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불안을 '우아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가 이 불안을 풀어내는 방식은 그가 주로 듣는 박자가 강한 음악처럼 '분출되는 폭력과 섹스'이다.


영화 중반부터 후반까지 알리는 스테파니 이외에도 다양한 여자들과 섹스를 하거나, 불법 스트리트 파이트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가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쫒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겠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그가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과 누나와 매형과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이기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이것이 바로 그가 불안을 이겨내는 방식이다. 그는 생명력이 강하지만 정제되지 않고 불규칙한 리듬을 가진 자신만의 박자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 단순무식한 방법론은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에게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리듬을 선사하게 된다.


알리와 다르게 스테파니는 정적인 템포를 유지한다:그녀는 돌고래 조련사로써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며, 동시에 다리를 잃은 이후에도 경제적인 불안은 없어보인다. 알리가 자신을 둘러싼 여러 환경적 요인의 문제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면, 스테파니의 문제는 육체의 상실로 인한 침묵이다. 다리를 잃은 이후, 그녀는 삶의 원동력을 상실했다.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고 메스를 숨겼다가 뺏기는 시퀸스에서조차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폭발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림으로서 자신의 상처받은 몸뚱이와 고독 속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그녀가 알리와 처음 만났을 때 하였던 것이 바로 클럽에서 남자를 꼬시는 일이었다는 것이다:후에 알리에게 스테파니가 고백을 하기를 남자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에서 자신의 힘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스테파니의 행동과 케릭터는 자칫 넘기기 쉽지만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자신의 육체의 활력은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타자가 느낌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스테파니의 '자신감의 부족'이라고도 볼 수 있다: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그녀가 자신의 외부에서 박자와 생명력을 찾아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로인해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스테파니가 알리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방식이 섹스와 수영이라는 점(덧붙이자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장면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이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알리와의 섹스는 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러스트 앤 본에서의 섹스는 쾌락의 문제라기 보다(물론 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지만) '박자를 몸에 새기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섹스를 할 때 스테파니가 알리에게 천천히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침묵하던 그녀의 삶이 다른 박자를 몸에 받아들이기 거북하고 낮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박자와 리듬을 얻고(그전까지 휠체어를 타다가 의족을 통해 스스로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라),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은 트라우마의 원인인 범고래와도 조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만든다.


(영화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범고래가 사고를 일으키기 전, 물 바깥의 음악소리가 물속에서 웅웅거리는 소음이 되어 불안감과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범고래 역시도 물 바깥의 사람과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침묵에 사로잡혀 있다 새로운 박자를 얻은 스테파니가 범고래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을 넘어서 범고래를 이해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알리는 스테파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신뢰'라는 안정을 얻게 된다:불법 스트리트 파이트 매니저가 스테파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숨었을 때, 알리는 스테파니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스테파니와 알리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전통적인 관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무례한 행위를(스테파니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꼬셔서 나가는 것) 쉽게 저지른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그렇게 제멋대로의 박자에 맞춰서 살던 그가 스테파니의 분노에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와의 이 묘한 관계를 지속하는 쪽을 선택한다. 어찌보면 스테파니가 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의 활력을 찾았듯이, 알리는 스테파니를 통해서 신뢰와 안정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서 알리는 도망가듯이 누나 집을 나오고, 스테파니와의 연락이 끊기게 된다. 자신의 스트리트 파이트의 재능을 종합격투기에서 살리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홀로 연습을 하던 알리는 시합을 하기 직전 아들과 만나다가 아들이 얼음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게 된다. 자신의 주먹으로 얼음을 내려쳐서 아들을 기적적으로 구한 알리는 스테파니의 통화에서 아들을 잃을 뻔한 불안에 대해 토로한다:이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이전까지 자신의 불안을 토로하지 않았던 알리가 스테파니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들의 비정형적인 관계가 사랑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알리와 스테파니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이 사랑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러스트 앤 본에서 사랑은 미사여구나 상용구에 잡혀있지 않았으며 육체와 삶, 그리고 이것이 구체화되는 '박자'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기묘하지만 무게가 있으며, 독특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러스트 앤 본은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른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불안은 안정을 얻게 되고, 내지른 주먹의 고통은 더이상 불안에 의해서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 신체의 일부로서 '거기 있음'을 인정받고 고요한 독백의 대상이 된다. 자크 오디아르는 이전의 영화에서 젊은 세대의 불안과 분노를 훌륭하게 그려내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안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러스트 앤 본을 통해 그려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름다우며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엔딩의 독백을 인용하며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인간의 손에는 뼈가 27개, 그보다 더 많은 동물도 있는데 

고릴라는 엄지손가락 뼈 5개를 포함 총 32개다. 


어쨌든 손 하나에 뼈가 27개가 붙어있다니.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다면, 

몸에서 나온 칼슘으로 저절로 뼈가 붙고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지면 절대 완치될 수 없다.


주먹을 날릴 때마다 통증을 느낀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느새 갑자기...

그 고통이 살아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또 찌른다.


-러스트 앤 본.









게임 이야기




정말 오랜만에 보는 디 오더 트레일러인데,

정작 게임은 발매일이 뒤로 밀렸네요(.....)

일단은 땜빵용 포스팅입니다.







게임 이야기




프랜차이즈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원소스 멀티 유즈, 즉 하나의 소재로 여러 분야에 적용을 하고 이를 통해서 소비자에게 통일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포켓몬스터가 바로 이렇게 애니메이션과 게임, 그리고 다양한 파생상품들을 통해서 어린이 및 키덜트 시장에 확고한 성공을 거둔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포켓몬스터의 성공은 단순하게 상품의 성공을 뛰어넘어서 포켓몬스터라는 '문화'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포켓몬스터 게임을 하지 않은 사람도, 애니를 보지 않은 사람도, 포켓몬스터가 무엇인지를 안다. 이는 현재 즐기고 있는 고객층을 넘어서 포켓몬스터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잠재적 고객'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포켓몬스터가 갖고 있는 잠재력은 현재 소비되는 상품 가치의 총합을 월등하게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다.


요괴워치는 이나즈마 일레븐, 레이튼 교수, 골판기 전기, 그리고 건담 AGE(.....)로 유명한 레벨 5의 프랜차이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요괴워치 게임은 요괴워치라는 프랜차이즈의 거대한 일부분이라 할 수 있으며, 게임이 먼저 나오고 애니나 장난감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애니나 장난감이 먼저 나오고 게임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거대한 프랜차이즈의 일환으로써 게임과 장난감, 애니 등이 모두 결합한 형태의 프랜차이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요괴워치는 엄청난 대박을 쳤다:요괴워치 게임은 진타는 발매 이틀만에 130만장, 2편 시리즈(2편, 본가+원조, 진타) 누적 500만장을 돌파하였으며, 장난감은 줄을 서서 사는 것도 모자라 프리미엄에 붙어서 돌아다니고 있다. 혹자는 포켓몬의 아성을 위협할 수 있는(일본 내에서는) 프랜차이즈로 요괴워치를 꼽기도 하는 등, 요괴워치의 기세는 현재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괴워치 진타는 기존의 2편(본가, 원조)의 5개월만에 발매된 확장판이다. 물론 기본적인 베이스는 원조와 본가에 두고 있고 큰 변화는 없기 때문에 5개월 만에 나오는 확장판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괴워치 2 진타는 왜 요괴워치 프랜차이즈가 이렇게 인기가 있는지, 그리고 비교대상인 포켓몬스터 시리즈가 갖고 있지 않는 요괴워치 만의 강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요괴워치는 기본적으로 RPG이다:요괴들을 레벨업을 하면서, 다양한 요괴들과 싸우고, 퀘스트를 받고 해결하며 보상을 얻는 등의 구조는 일반적인 RPG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구조이다. 하지만, 요괴워치가 다른 RPG와 차이가 나는 것은 게임이 세계와 이야기를 구현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켓몬스터와 비교를 해보자:포켓몬스터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마을에서부터 시작해서 포켓몬 마스터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다양한 곳에 있는 도장들을 박살내며 뱃지를 모으며 마지막에는 포켓몬 마스터에 등극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영웅신화적이며 동시에 '직선적'이다. 우선 이야기는 왕도적인 모험극을 따르기에 기승전결과 출발, 끝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게임에 있어서도 진행과정은 직선적이다. 애시당초에 '도로'를 따라서 도착지에 도달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괴워치는 다르다:포켓몬스터가 전세계 누구나가 좋아할 수 있는 일상에서 탈출하는 모험극의 이야기였다면, 요괴워치는 전적으로 '일상극'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에는 메인 퀘스트가 있고, 스토리 라인이 있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끝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요괴워치가 구현하고 있는 '공간'은 포켓몬스터 처럼 도시와 도시, 그 사이를 잇는 도로라는 직선적인 개념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도시라는 '면'적 개념이다. 또한 게임 내의 공간은 여타 오픈월드 게임 같이 게임 상에서 시간과 날씨 등의 요소가 변화하며 소소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 마을에는 상점가, 신사, 폐옥, 터널 등등의 다양한 공간이 있으며 게이머는 이를 탐험하고 다양한 요괴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요괴 친구를 불려나가게 된다.


그렇기에 요괴워치는 포켓몬스터 같은 직선적인 진행 방식이 아닌, 다양한 퀘스트와 심부름 등의 '옆길로 새는' 플래이 방식을 지향한다. 게이머는 스토리 라인 이외에도 다양한 퀘스트와 심부름(반복해서 할 수 있는 퀘스트), 지명수배, 채집 활동, 심령스팟 탐험, 자전거 레이스, 요괴 버스터즈(탑뷰 아케이드 방식의 미니게임)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재밌는 점은 이 모든 것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게이머는 자동차나 나무, 쓰래기 더미 등의 다양한 공간들을 탐색하고 수색할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을 법한 공간에 신경을 쓰고 면밀히 관찰하는 아이들의 습성을 게임 구조에 녹여낸 것이다. 이 때, 게이머는 자신의 요괴 워치를 일종의 레이더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주변에 요괴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서 요괴 워치는 포켓몬의 모험담과는 다른 형태의 게임 경험, 여름방학과 추억이라는 개념을 구현한다.


재밌는 점은 요괴워치에서 요괴를 동료로 영입하는 과정은 포켓몬스터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포켓몬스터는 포켓몬스터의 개발자가 자신의 곤충 채집에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처럼, 전투를 통한 사냥의 메커니즘에 유사하다. 일단 죽지 않을 정도로 팬 다음에, 몬스터볼로 포획한다. 하지만 요괴워치는 요괴를 동료로 들이는 방법이 다변화되어 있다. 먼저 기본적으로 전투 도중 음식을 던져줘서 동료로 꼬시는 요괴나, 개수 제한이 있지만 요괴를 뽑을 수 있는 요괴 가챠, 퀘스트를 통해서 영입할 수 있는 요괴, 특정 던젼에서 랜덤하게 조우할 수 있는 요괴 등등 요괴를 입수하는 방법이 다양하다. 게임은 다양한 방식의 게임 플래이를 장려하고,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게임이 구현하는 게임 경험이나 게임 세계는 포켓몬스터와 확연하게 다르면서도 경쟁력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요괴워치의 전투는 상당히 특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게이머는 각각의 요괴에게 세부적인 명령은 내릴 수 없으며, 요괴는 각자의 성격 등에 따라서 공격-마법-버프/디버프를 자동적으로 건다. 즉, 요괴워치의 전투 방식은 기본적으로 '자동전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괴워치의 전투가 쉽다거나 깊이가 얕다고는 할 수 없다.(참고로 본인은 스토리 마지막 보스전에서 거의 40분 가까이 소비하였다...물론 좀 꼬인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 전투에 요괴는 총 6개체가 투입되며, 이는 전열-후열로 나뉘어져 있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이 전열-후열의 배치를 전투중에 원판 돌리듯이 배치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예를 들어서 게이머가 1-2-3(전열), 4-5-6(후열)로 요괴를 배치했다면, 전투중에 원판을 돌리듯이 자연스럽게 2-3-4, 5-6-1 또는 3-4-5, 6-1-2 등의 배치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종족끼리 인접하면 특정 능력치가 올라가는 등의 혜택이 있기 때문에 게임에 들어가기 앞서서 진형을 어떻게 갖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진형의 이동은 다음 문단에서 다룰 전투에 있어서 게이머의 보조적인 위치와 맞물리며 대단히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요괴워치에서 게이머는 적극적으로 전투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대신에 요괴들을 외부적으로 서포트해줘야 한다:필살기의 발동이나 상태이상의 해제, 어떤 상대를 일점사 할 것인지, 회복 아이템이나 부활 아이템을 언제 쓸것인지 등의 전투외적으로 중요한 행동들을 도맡아야한다. 이러한 행동들을 게임은 하단 터치 패널을 이용한 미니 게임의 형태로 풀어내는데, 간단한 미니 게임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상황을 체크하면서 미니 게임을 하는 등 게임이 좋은 의미로 정신없게 진행이 된다. 종합하자면, 요괴워치의 전투는 진형을 바꾸는 것을 이용해서 적과의 전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동시에 상태이상 해제나 필살기 발동 등의 미니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포켓몬스터와 같은 가위바위보 상성에 기반한 정교한 머리싸움은 아닐지라도, 요괴워치의 전투는 머리를 써가면서 그때 마다의 상황판단을 하면서 임기응변으로 전투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게임 그래픽이나 사운드 측면에서는 딱히 다룰 포인트는 없다. 음악 선정은 무난무난 했고, 전투의 이펙트나 게임 내의 세계 디테일은 3DS라는 기기의 한계를 놓고 보았을 때 납득할만한 퀄리티라 할 수 있다. 다만, 게임 스토리 진행 중에 더 많은 보이스 삽입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은 해본다.


결론적으로 요괴워치 2 진타는 프랜차이즈 작품의 일부로서 뿐만 아니라 게임 자체로써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췄지만 어른에게도 어필하고 즐길 수 있는 요소를 갖췄으며, 게임이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벨런스를 잘 맞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클리어 이후가 오히려 시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콘텐츠를 갖고 있는 것도 높게 평가할만한 사항이다. 다만, 레벨 5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빠른 후속작 발매 등이 걸리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괴워치는 현재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프랜차이즈 관리만 잘된다면 일본 및 아시아 권역에서는 충분히 포켓몬의 뒤를 잇는 프랜차이즈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게임 이야기





젤다의 전설 시리즈를 RPG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엄밀하게 따진다면 젤다의 전설이야말로 RPG라는 장르 공식과는 많이 동떨어져있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Role Playing Game이라는 약어 자체로만 본다면 용사의 역할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RPG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전통적인 레벨링이나 던전, 혹은 화폐 및 물물교환 같은 경제 시스템 등의 다양한 요소에서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크게 엇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젤다의 전설이 어떤 게임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장르적인 특성에 기대서 설명하는 것 보다는 젤다의 전설이 어떻게 게이머와 교류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특히 여기서는 바람의 텍트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젤다의 전설은 거대한 세계가 있고, 각기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핵심적인 장소로 던전이 있다. 그리고 던전은 특징적인 도구를 사용해서 퍼즐을 풀어나가게 만들어놓았으며, 이야기의 진행이 되면 될수록 이 던전들에 과거의 던전에 나오는 퍼즐들이 추가되면서 정교해지며 복잡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람의 텍트 같은 경우, 게이머는 던전에서의 퍼즐들과 도구들의 특징들을 잘 숙지하고 던전의 방을 관찰, 어떻게 게임을 풀어나갈 것인지를 능동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또한 필드에서 게이머는 바람의 지휘봉을 사용해서 바람의 방향을 조종하고 항해를 하여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게임이 일종의 퍼즐 게임에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도구를 사용한 퍼즐은 게임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지만 게임의 전체는 아니다. 퍼즐과 관계없는 전투 같은 부분도 있으며,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보물을 건지거나 세계를 탐색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젤다의 전설 시리즈에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게임이 어떤 장르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이다.


이렇게 본다면 젤다의 전설이 구현하고 싶은 것은 '모험'이라는 경험 그 자체이다. 바람의 텍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들은 일정 파트에서는 게임 내 인터페이스만으로는 어떻게 진행해야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게이머는 탐색을 통해서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거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서 특기할만한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를 탐색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즉, 모험에 있어서 필요한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목표 설정을 게이머가 직접 할 수 있게 만들어 둠으로써, 게이머가 좀더 능동적으로 세계에 빠져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각 던전의 방들은 그 구조에 있어서 작위적인 퍼즐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지만(조금만 관찰해보면 방의 구조가 참으로 요상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위성을 차치한다면 각각의 방 역시 게이머의 능동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모험'의 연장선상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은 어떠한 힌트와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게이머는 여러가지 도구를 조합해서 이렇게 문제를 접근해볼까, 아니면 저렇게 문제를 접근해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능동성에 기반한 퍼즐은 게이머로 하여금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심지어 바람의 텍트가 발매된지 무려 10년이 다되어가는 게임이라는 것을 고려를 하더라도, 바람의 텍트는 요즘 게임들보다 더 세련되고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여타 트리플 A 게임들은 게이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QTE로 어떤 버튼을 누를 것인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등을 너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이러한 친절함이 역으로 게이머가 무언가 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기에 게임에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재미를 죽이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렇게 본다면 젤다의 전설:바람의 텍트는 그런 문제를 우아하게 빗겨나가면서도 어렵지 않게 만든 진정한 걸작이다.


또한 게이머는 플래이타임 내내 거대한 망망대해를 항해하면서 섬들과 난파선, 유령선, 던젼, 거대괴수 등의 다양한 것들과 조우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게임은 거대한 공간에서 마음껏 뛰노는 오픈월드의 장르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GTA나 다른 오픈월드 게임들과 달리 바람의 텍트는 그 지향점이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의 텍트 같이 바다를 항해하는 게임인 어새씬 크리드 4 블랙플래그를 예로 들어 비교해보자:블랙 플레그는 해적질이라는 경험을 살리는 것이 게임의 핵심이자 주요 컨텐츠이기 때문에, 게이머는 바다에 랜덤하게 떠다니는 배들을 노략을 하고 배를 이용한 다양한 활동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바람의 텍트 같은 경우에는 바다에서 즐길 수 있는 대부분의 활동들이 '발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해도에 기록되지 않은 저 너머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라는 호기심과 모험에 대한 욕구가 이러한 발견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조금은 묘한 이야기지만,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젤다의 전설은 다크소울 시리즈와 유사하다:게임 내의 공간은 수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으나 게임은 게이머에게 '친절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로지 게이머가 스스로 면밀하게 관찰하여 생각하고 판단하여야 한다. 하지만 다크소울 시리즈가 죽음이라는 시행착오를 통해서 게이머에게 오기를 유발케 했다면, 바람의 텍트에는 그러한 요소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젤다의 전설이 소울 시리즈만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소울 시리즈가 죽음이라는 요소를 통해서 반복 학습을 유도한 것이 몇몇 하드코어 게이머에게만 먹히도록 심리적인 허들을 높였다면, 젤다의 전설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친절한 형태로 그 허들을 낮추었을 뿐이다. 오히려 젤다의 전설 같은 경우, 전연령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 시스템적 요소 및 이야기적 요소(용감한 용사가 마왕과 싸워서 세계를 지켜낸다)와 함께 게임의 아트 스타일 등이 다양하게 접합되면서 여타 RPG가 아닌 '젤다의 전설'만이 가능한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전투 부분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Z 주목을 이용한 편한 조작과 몰입감 있는 카메라 연출을 통해서 긴장감을 잘 주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전투 타격음에 일정한 '음'을 부여했다는 것이다:검을 연속적으로 휘두르고 이것들이 적에게 맞는 순간, 타격음이 일정한 '멜로디'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전투에 몰입감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리듬 액션 게임마저 연상되는 흥겨움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투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점은 도구가 단순히 퍼즐을 푸는데 쓰이는 이벤트적 도구가 아닌 게임의 다양성을 보장해주고자 한 제작자들의 배려로도 볼 수 있다. 


특히 바람의 텍트 같은 경우 다른 젤다의 전설과 비교하여 특기할만한 부분은 바로 '툰링크'가 최초로 출현했다는 것일 것이다:역사적인 작품 시간의 오카리나의 이후, 젤다의 전설이 두 스타일로 분화되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나는 황혼의 공주 같은 리얼 젤다와 또 다른 하나는 바람의 텍트 같은 만화풍의 젤다의 전설(몽환의 모래시계와 대지의 기적이 여기 포함된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식적인 분류는 솔직히 전체 젤다의 전설 시리즈를 관통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오카리나 이후에 나온 스카이워드 소드나 무쥬라의 가면은 어떻게 접근해야할까? 일단 그러한 '계보학'적인 설명은 차치하더라도, 바람의 텍트의 아트 스타일이 대단히 특이하다는 것은 분명하다:사실적인 묘사보다는 파스텔 톤의 화사한 색깔을 이용해서 디테일을 억누르고, 화사한 색감과 단순화된 선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게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바람의 텍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현대적인 트리플 A 게임들에 꿀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정말이지 '최소한의 용량(HD버전은 2기가 바이트에 불과하다! 요즘 게임들이 40기가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는걸 생각한다면...)과 기능'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유의 성능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래픽 디테일은 다른 현세대 콘솔(PS4, XO)와 비교할 바가 못되는 것이 정석적인 결론일 것이다. 하지만 바람의 텍트는 그저 그렇게 양산되는 트리플 A 게임들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필요한 것(화사한 색감, 단순화된 선)과 필요하지 않은 것(자세한 디테일 텍스처)을 분명하게 나누는데 성공함으로써 기술적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인상적이면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기술과 고해상도 텍스처를 덕지덕지 바르면서 그 속에 어떠한 미학적 성취도 존재하지 않는 상당수의 트리플 A 게임들에 비교하여 본다면, 대단히 중요한 경종을 울리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훌륭한 그래픽을 뽑아내는데 있어서 절대적 기술 우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물론 누군가는 젤다의 전설:시간의 오카리나 이후로 젤다의 전설은 오카리나의 반복이자 모티프의 재생산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오카리나가 최초로 3D 게임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혁명적이고 역사의 신기원을 정립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혁명이 매 시리즈 매 작품마다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은 솔직히 도둑놈 심보에 가깝지 않나 생각해본다. 또한 젤다의 전설이 시리즈 내부적으로는 모티프를 재생산한다고 하지만, 바람의 텍트와 몽환의 모래시계가 황혼의 공주와 다르고 무쥬라의 가면이 다른 젤다 게임들과 다른 템포를 보여준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과연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다 비슷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본인은 의심스럽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젤다의 전설:바람의 텍트 HD는 시대를 뛰어넘는 진정한 걸작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닌텐도가 소프트웨어로써 게임을 만드는데 있어서 왜 세계 최고인지, 그들이 일종의 철학집단으로써(게임은 이러해야 한다) 닌텐도만이 가능한 게임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게이머는 바람의 텍트 HD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다. 시대를 넘어서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는 게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어떤 것이든 새롭고 다른 것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끝이 아니다"

-키스 해링





키스 해링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쿠츠타운(Kutztown)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흥미를 가졌으며 1976년 피츠버그의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1978년 뉴욕으로 이사를 와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에 입학하였다. 그는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어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의 벽을 캔버스로 삼기 시작했다. 그의 간결한 선과 생생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기법들은 뉴욕 지하철의 분필 그림으로서 처음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되었고 1981년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해링은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그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활동 중 마돈나(Madonna)와 앤디 워홀(Andy Warhol)과도 친분을 쌓았다

1985년에 해링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보르도(Bordeaux) 현대 미술관에 작품 전시회를 열고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1986년 해링은 소호(SoHo)에 팝 가게(Pop Shop)를 열고 자신의 예술품들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등으로 상품화하여 팔기 시작하였다. 그는 상위 예술과 하위 예술의 장벽을 무너트리려 노력하였으며, 팝 가게의 개점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더욱 더 에이즈(AIDS) 인식, 코카인 전염병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인 주제들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1988년 해링은 에이즈 진단을 받았으며, 1989년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단체와 어린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에이즈에 대한 경각성을 일깨우는 데에 힘썼다. 같은 해 6월에 피사 Sant'Antonio의 교회의 후면 벽에 마지막 작품인 토투몬도(Tuttomondo) 벽화를 그렸다. 1990년 2월 16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위키피디아, 키스해링 항목에서 발췌)


어떤 특정한 시기와 인물의 예술작품을 두고 예술 전체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예술이란 단순하게 현재 여기 존재하는 이미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유파와 사조나 당대의 분위기 상황 등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복잡다단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좀더 단순하게 접근하여 예술이 미를 다루는 개념이라고도 보고 각기의 예술가들은 이를 추구하였다고 주장한다:하지만 미학이 지금까지 미를 정의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그 어떤 단순한 개념으로도 미를 정의하고 요약하지 못했었다. 예술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개별 집합의 요소들은 존재하지만(이 사람은 예술가야, 혹은 이것은 예술작품이야) 그 전체를 아우르는 '본질적'인 핵심은 관통하는 개념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키스 해링의 접근 방법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색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키스 해링의 예술 작품에 대해서 논하기에 앞서서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던 팝아트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팝 아트는 통속적인 이미지를 예술에 끌어들인 사조를 칭한다. 보통은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깡통이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등이 이 팝아트의 사조에 들어가며, 싸구려 대중문화의 이미지가 소위 '고급예술'에 편입되면서 '이딴 것도 예술로 취급받다니'라고 하며 비분강개하는 사람들이 많았었고 현재에도 많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팝 아트는 시대의 핵심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흐름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고 그 기저에 보유하고 있다.


팝 아트는 '대중문화'의 출현과 맥을 함께한다. 2차세계 대전 이후 안정된 사회와 소비 문화의 범람(1950년대 미국의 풍요롭지만 공허한 이미지 같은)은 현대적인 의미의 대중문화의 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문화의 핵심은 바로 '대량생산'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부유한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가 아닌, 수백 수천만의 대중을 상대로 소비되고 수익을 내는 문화이기 때문에 복잡한 감상 전통(박물관, 살롱 같은)을 벗어던지고 언제 어디서나 소비할 수 있는 형태로 정향진화한 것이 바로 대중문화인 것이다: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한때 글자는 (책과 노트 같은 곳에) 누웠었지만, 미래의 글자는 (간판이나 광고, 스크린 같은 곳에) 서있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적이 있으며 이러한 문화의 변화, 사회 환경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팝 아트는 당시 변화하는 세계,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등장과 그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사조였다. 앤디 워홀은 실크 스크린 판화를 이용해서 유명인과 유명한 이미지들을 똑같은 형식으로 복제-재생산하였다. 그가 그의 화실을 공장Factory라 부른 것은 현대의 이미지들이 쉽게 재생산되고 복제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이용한 것은 만화가 갖고 있는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미지의 간략화와 특징을 잡아 형태를 왜곡시키는 것(데포르메) 등의 특징들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복잡한 전통으로 이미지를 이해해야 하는 고전적인 예술 작품들(예를 들자면, 아테네 학당 같은 작품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각자의 방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어떤 포즈를 취하고 누가 어떤 철학을 설파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과 다르게 직관적이며 단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의도된 공허함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즉, 팝 아트는 단순하게 시류에 영합해서 작품을 만들어낸 사조가 아닌 그 시대와 대중문화가 갖고 있는 특징을 짚어낸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키스 해링 역시도 이러한 팝 아트의 사조에 부응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물론 키스 해링 본인은 스스로 어떤 사조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1960년대 말, 미국의 찬란했지만 텅비었던 황금기가 끝나가며 TV와 애니메이션, 만화,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순간에 키스 해링은 태어났다. 그렇기에 그의 예술 작품들이 많은 부분 만화와 같은 부분에 기반을 둔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예술 작품들이 특별했었던 것은 그가 지향하고자 했었던 예술 작품들의 지향점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키스 해링은 생전 자신의 예술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받았으나, 이에 대해서 어떠한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자신의 작품을 어떤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감상자가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작품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일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예술 작품과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예술이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키스 해링의 주장은 여지껏 대중이 생각해왔었던 예술에 대한 일반 관념을 완벽하게 뒤흔드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대중은 예술에 의미라는 정답이 있으며, 그리고 거기에 도달함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해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키스 해링은 자신의 예술 작품에 대한 의미 부여를 거부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가장 높은 권위자인 창작자의 권위를 스스로 포기한다. 


물론 키스 해링이 최초는 아니겠지만, 이러한 키스 해링의 소소한 저항(?)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예술에 의미가 없다면 예술에 어떤 존재의의가 있단 말인가?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주창한 순수성의 개념과 이야기를 끌어오고자 한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는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캄비세스는 그 포로를 능욕하기 위해서 페르시아 병사들의 승리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세워두라고 명령했다. 그러고서 그는 그 포로가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항아리를 갖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모습을 보게 했다. 모든 이집트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고 비탄에 잠겨있을 때, 사메니투스만은 아무 말도 없었고 미동도 하지않았으며 눈을 바닥에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처형당하러 가는 행렬 속에 자신의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뒤 그가 자신의 시종, 한 늙고 초라한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드러내는 온갖 표현을 해 보였다.”


-역사 제 3권 14장




벤야민이 주목한 순수함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순수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벤야민은 '목적에 종사하지 않는 수단 그 자체'를 순수라고 규정하였다:순수한 법은 정의라는 목적에 의해 구성되지 않으며, 분노는 어떤 이유나 의도없이 순수하게 분노 그 자체로써 현현한다. 이러한 개념은 어찌보면 현실감 없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벤야민이 주목한 좋은 이야기들의 사례, 위에서 인용한 사메니투스의 사례를 예로 들어본다면 좀더 명확해진다. 헤오도토스는 이 이야기에서 어떠한 자신의 해석과 감상을 붙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사메니투스의 느닷없는 슬픔과 절규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야만 한다. 근대적 소설이 화자의 존재와 소설가의 존재를 통해서 은연중에 숨겨진 주제를, 도달해야 하는 지향점과 목표를 설정했었다면, 고전적인 이야기들은 주제나 화자의 존재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체화하는 뼈대만 남은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키스 해링이 벤야민을 읽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중요한 점은 그의 작품에 대한 의도적인 설명의 거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술은 관객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벤야민이 주목한 이야기와 예술에 많은 유사점이 있다. 또한 재밌는 점은 키스 해링이 끊임없이 그림과 언어 사이의 연관관계를 찾고자 자신의 일기에 노트를 남겼다는 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그의 작품들은 그려지는 화풍이나 존재양식(어디에 그려졌는가 같은)에서 낙서와 만화에 베이스를 두고 있지만, 많은 점에서 이야기와 언어에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그의 작품은 캔버스나 화폭 같은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그 어느 공간에나 존재할 수 있으며 메세지를 발신할 수 있다. 책 구석의 낙서처럼 끄적여 놓은 낙서에서부터 지하철 벽이나 건물 벽에 그린 거대한 그림까지, 키스 해링의 그림들은 그 어느 장소에 놓여도 알맞은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완벽하게 시대에서 유리되었다고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키스 해링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모티브는 대부분 그가 마주했던 당시 시대에 문제가 된 이슈들이었다. 섹스, 어린 아이, 외계인, UFO, 에이즈, 핵, 동성애, 인종차별 등등...이러한 요소들을 키스 해링은 능수능란하게 작품에 녹여낸다. 하지만 작가가 왜 그러한 소재들을 선택했는가와 별개로, 키스 해링의 그림들의 대부분은 그 자체로 '재미'있다. 그의 그림들 속의 인물과 사물들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모든 것은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정말로 필요한 위치에 존재하여 전체와 균형을 이룬다. 무엇보다 그의 그림에는 주제나 찾아야 하는 의도가 존재하지 않기에, 감상자는 이를 통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그리고 자신만의 교훈을 즐겁게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키스 해링의 작품의 특징은 그가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양식'에서 극대화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뱃지나 티셔츠 등의 다양한 상품에 넣고자 노력하였고, 이는 '팝샵'이라는 아틀리에 겸 상점의 형태로 드러난다. 키스 해링은 자신의 일기에서 자신이 취하고자 하는 길, 순수한 예술과 대중 예술 사이의 좁은 문을 걸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한 고초를 자주 토로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화랑에 국한되지 않고 대중과 함께 살아 숨쉬기를 원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과 언어의 관계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서 구축하고자 한 이야기들이 대량생산의 혜택을 받아 대중에게 전파되는, 그야말로 과거의 예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현대적 예술을 지향한 것이었다. 이는 팝아트 사조가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한 동시에, 팝아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키스 해링만의 고유한 특질이라 할 수 있다.


키스 해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예술이란 자기 완성적인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 같은 것이다. 훌륭한 이야기가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맥락을 벗어나서 후대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교훈과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훌륭한 예술들, 고전들이라 불리는 작품들도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의 맥락을 벗어나서 새로운 맥락과 교훈,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키스 해링의 작품들 역시 그러하다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의 시도를 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혼에 안식이 깃들길.




"나는 그림을 지독히 사랑한다. 색을 지독히 사랑한다. 보는 걸 지독히 사랑하고, 느끼는 걸 지독히 사랑한다. 예술을 지독히 사랑한다...."


-키스 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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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문제의 그 장면, 물론 승급 연출은 삽입된 것이다)




Quick Time Event, 통칭 QTE는 근 몇년 동안 게임에 있어서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해왔었다. 최근의 게임들은 지향점을 영화에 맞추고 화려하고 다양한 동작과 사건들을 게임의 구조에 삽입하고자 하였고, 그리고 QTE는 '미니 게임의 형태로써 게임의 형태를 갖추되 동시에 영화적 연출을 만족시키는 시스템'으로써 활약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QTE는 그 문법과 시스템이 게임에 이질적일 수 밖에 없었다:QTE는 기본적으로 대본이 정해져있는 영화적 연출에 가까운 기법이고, 기본적으로는 그 어떤 게임에 삽입을 하더라도 게임에 유리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띄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분야에 있어서 가장 끔찍한 사례는 아수라의 분노일 것이다:게이머들은 대본에 따라서 버튼을 누르는 게임을 즐기지 않는다. 그것은 게임이 아니라 인터렉티브 무비에 가까우며, 게이머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위 영상에서 나오는 콜옵:어드벤스드 워페어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은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버튼을 눌러서 XX를 하세요' 같은 QTE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콜옵:어드벤스드 워페어의 QTE 연출은 그렇게 새롭지도, 더 엉망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QTE에 대해서 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렇게 접근해보자:우리의 행동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표면상에 등장하는 정보 이외에도 다양한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타인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몸짓을 하는 제스처이든, 혹은 숨기고 싶지만 자신의 눈빛 등을 통해 드러나는 비언어적 정보들이 존재한다. 인간의 언어와 의사 전달 과정은 그야말로 복잡 미묘한 문제이며, 동시에 그러한 과정 중에 느끼는 인간의 감정이란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게임에서 케릭터를 조작하는 것, '버튼을 눌러서' 게이머의 의사를 표지하는 것은 이러한 복잡미묘한 감정과 의미들을 거세시킬 수 밖에 없다:일전에도 본인이 글에 풀어놨듯이, 게임 속의 케릭터와 게임 바깥의 플래이어는 서로 유리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중간 매게자로써 컨트롤러가 플래이어의 의사를 게임의 문법으로 번역하여 게임 내의 케릭터에게 전달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 컨트롤러는 어떤 복잡한 행동이나 뉘앙스를 표시하는 것이 아닌, 동사 단위의 '행동'을 게임 내에서 구현한다:어떤 버튼을 누르면 케릭터가 '뛰어오른다', 어떤 버튼을 누르면 케릭터가 '총을 쏜다' 등등...즉, 인간의 복잡미묘한 감정과 드라마를 재현하기에는 게임을 조작하는 컨트롤러와 케릭터 사이의 문법은 너무나 '투박하다'는 것이다.


다시 콜옵으로 돌아와보자. 주인공 케릭터 미첼은 첫번째 미션에서 동료를 잃었다. 설정으로 보자면, 평생을 함께한 친우가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내걸었고 그리고 주인공은 상실감과 박탈감, 무력감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케릭터가 동료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동료에게 경의를 표할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감정을 가질까? 그것은 쉽게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감정에 플래이어가 이입하려는 순간, 게임 스크린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띄운다:X버튼을 눌러서 죽은 동료에게 경의를 표하세요. 이는 여태까지 몰입을 방해할 뿐더러(마치 영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나레이터가 아아 님은 갔습니다, 라고 변죽을 울리는 것과 같다) 그 복잡미묘한 감정이 발산되는 방법이 너무나 단순하고 정형적인 형태로 구현됨으로써 플래이어의 감정을 차게 식히는 문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이머는 X버튼을 누르기를 거부함으로써 더이상의 게임의 진행을 거부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게임의 모든 드라마가 허위와 가식이 된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는 QTE가 대본이 정해진 상태에서 대본을 읽는 것과 유사하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버튼을 누르지 않고 주변을 무의미하게 뛰어다니면서 자신이 맡은 대본 속의 역할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게임이 갖고 있는 드라마는 순식간에 허구가 된다. 


사실, 콜옵의 이 QTE 장면 같은 경우 그냥 자동진행으로 QTE를 삽입하지 않았다면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QTE를 삽입함으로써 QTE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그대로 까발리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제작자들은 게임에 이런 문제가 많은 QTE들을 삽입하는 것일까? 조금은 별개의 이야기지만 본인은 QTE의 출현이 게임이 영화적 연출을 지향하는 것과 함께 콘솔 게이밍이 대중화되면서 공통된 컨트롤러 문법으로서의 '패드의 출현'도 큰 한 몫을 했다고 생각을 한다. 과거의 게임들은 콘솔에서 다뤄질 수 있을만큼 단순한 조작 형태를 취하거나(슈퍼 마리오처럼 점프 버튼만으로 클리어 가능하듯이) 혹은 좀더 복잡한 게임의 경우에는(이 경우 대부분 PC라고 할 수 있다) 키보드를 이용해서 다양한 형태로 상호작용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스템 쇼크 1편이나 2편 리뷰 영상들(http://youtu.be/Vnh0l_Ecpx4)을 예로 들어 보자. 여기서 우리는 현재의 게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움직임들이나 인터페이스 구조, 그리고 이를 통제하는 복잡한 조작 체계는 조작 문법이 통일되기 이전에 다양한 형태로 세계와 소통하는 게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게임에 영화라는 지향점이 잡히고, 이를 실현할 플랫폼으로써 고성능 콘솔이 등장하면서 현세대 콘솔에 있어서 대중적 게임(소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밀리터리 FPS 같은)이 등장하자 다양한 형태의 상호작용의 문법은 하나의 문법의 형태로 통일되게 되었고, 그와 함께 모든 형태의 다양한 상호작용(그것이 설령 동사 단위의 단순한 상호작용이라 하더라도)들은 콘솔의 패드라는 컨트롤러에서 구현될 수 있을 정도로 축약되었다. 그 결과, 다양한 버튼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주류에서 밀려나 변두리로 쫒겨나게 되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다양한 게임의 다양한 QTE들이 형식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실제 게임을 플래이할 때의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은 패드라는 컨트롤러의 문법이 통일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게임들이 QTE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문법을 통일한 것은 아니다:PC 게임들은 이러한 흐름에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며(여전히 키보드에는 키가 넘쳐난다), 닌텐도는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몸의 움직임'이라는 요소를 게임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또한 스마트폰 및 타블렛이 게이밍의 수단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스마트폰과 타블렛은 유저 인터페이스나 조작방식에 있어서 '폭넓은 수용'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뚜렷하게 갖고 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게임에 접근하고, '들고 다니면서' 플래이하거나 혹은 컨트롤러를 잡고 다양한 자세를 편하게 취할 수 있는 등 활용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콘솔 패드 컨트롤러의 문법이라는 패러다임이 쉽게 바뀌리라고는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이러한 다양한 외부적인 문법들에서 새로운 문법이 도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등장할 수 있으며 이를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게임 이야기/PSP 관련 뉴스




드디어 올것이 왔군요...

PS4 독점이 더 인상적인...





덧)한 1~2주 가량 잠수타겠습니다.



게임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시리즈 글은 http://leviathan.tistory.com/1919 입니다.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시작은 엑소수츠를 소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다:엑소수츠야말로 어드밴스드 워페어가 다른 콜옵과 차별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재밌는 점은 엔딩에서 시작된다:엔딩 직전에서 미첼은 엑소수츠를 벗어던진다. 그러고는 미첼은 자신의 의수에 메달린 조나단 아이언스에게 잘라줌으로써 게임을 마무리 짓는다. 엑소 수츠를 벗어던진 것은 연출적인 측면이라 퉁칠 수 있지만, 재밌는 점은 조나단 아이언스에게 받은 의수를 왜 다시 조나단 아이언스에게 돌려주는 그런 연출을 취했는가 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이보그 의수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는데도 왜 마치 강철의 깁스를 한것처럼 보이는 엑소 수츠를 고집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기계는 인간의 신체의 연장으로써 존재해왔었다. 그리고 이 기계는 인간의 육체와 밀접한 연관을 지으면서 인간의 사고를 바꾸게 된다:장자의 도르레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우물에서 불편하게 물을 길던 사람들을 위해서 도르레를 만드는 법을 가르켜 준 공자의 제자는 노옹에게 크게 혼난다. 그러한 편리를 추구하게 된다면 그러한 편리가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기술은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그것이 없으면 삶이 불가능해진다'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삶에 밀접하게 침투한 스마트폰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본인은 색다른 생각으로서 모든 기계는 인간 신체의 연장이며 동시에 인간은 첫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기계와 인간은 결합되어 있는 넓은 의미의 '사이보그'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외골격 강화복, 통칭 엑소 수츠는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애매한 포지션의 사이보그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몸에 가깝게, 더욱 휴대하기 쉽게, 그리고 편리한 형식으로 신체의 연장으로써 기계를 발전시켜왔다. 그렇기에 종국에 가서는 인간의 몸에 '내장'하는 기계, 더 나아가서는 기계와 인간의 신체가 구분이 불명확해지는 세계가 올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SF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보그'의 형태를 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엑소 수츠는 바로 기계가 몸에 기거하기 직전의 사이보그다:몸에 들어가기에는 기술력이 미묘하지만, 동시에 가장 사이보그가 추구하는 최첨단의 기술력을 쉽게 '몸에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엑소 수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엑소수츠가 SF 문화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엑소 수츠가 현실화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드밴스드 워페어나 다른 SF 밀리터리 물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형태인지는 미지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엑소수츠가 사이보그의 과도기로써의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가 엑소 수츠와 사이보그 사이에 존재한다:사이보그는 그 자신과 기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엑소 수츠는 벗음으로써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다. 90년대 초 공각기동대와 그 후속작 이노센스, 매트릭스 같은 대중문화들이 인식론 상의 모호한 경계를 들고 나왔을 때, 즉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는 내가 아닌 기계일까의 문제를 제기하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이후 사이보그와 기계의수를 부착한 인간이 나왔을 때 크게 이슈화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엑소 수츠는 힘이 자신의 외부에 있음을 분명히 하여서 '나와 기계는 다르다'라는 분명한 구분을 짓는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두 구분이 혼합되어 생기는 문제를 단순하게 극복한 사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찌본다면, 사이보그의 우울증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드밴스드 워페어는 이러한 엑소 수츠의 함의를 제대로 살려내었다. 게임이 추구하는 모토가 힘은 모든 것을 바꾼다Power can change everything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엑소 수츠를 통해서 바뀐 게임 플래이를 보여주는 것은 그것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게이머는 엑소 수츠에 의해서 바뀐 게임 플래이에 아주 쉽게 적응한다:혹자는 콜옵 with 더블 점프라고 하지만, 동시에 그 더블점프가 가져다 주는 신기함과 재밌음, 더 나아가 그것이 없어질때의 불편함까지 게임에 도입된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시야와 재미를 제공한다. 멀티플래이에서도 수많은 게이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더블 점프를 쓰면서 경쾌한 움직임을 즐긴다.


하지만 힘은 모든 것을 바꾼다는 모토가 엑소 수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앞서 시나리오를 다룬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여기서 힘은 조나단 아이언스가 휘두르는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동시에 미첼에게 있어서는 조나단 아이언스가 준 '두번째 기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미첼은 첫 임무에서 한쪽 팔을 잃었고, 제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조나단 아이언스는 그에게 힘을, 두번째 팔을, 두번째 기회를 준다. 그렇기에 콜옵의 이야기가 성립하게 된다. 하지만 미첼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자본의 힘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도 볼 수 있다:과연 미첼이 엑소 수츠를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엑소 수츠가 미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이렇게 본다면 상당히 재밌는 지점이 있다:엔딩 전 미션에서 미첼은 조나단 아이언스에 의해 팔이 부숴진다. 이로 인해서 미첼은 오른팔만 써서 탈출을 해야하는데, 이 때 게이머는 여지껏 잘 사용해왔던 의수 왼팔의 존재가 대단히 낮설고 껄끄럽게 느껴지게 된다. 여지껏 잘써왔던 자신의 팔을 불현듯 낮설게 만든 게임은 조나단 아이언스의 단 한번의 해킹에 무력해지는 강철 깁스로써의 엑소 수츠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마지막에 엑소수트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의수를 스스로 잘라내버린다. 이 두 행위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엑소 수츠가 기술의 힘인 동시에, 여지껏 국가가 비워왔던 공허함을 채워주는 외부적 힘, 즉 자본이라면 미첼이 이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행위는 그러한 것에 대한 '거부'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왼팔을 조나단 아이언스에게 돌려줌으로써 '나는 내가 준 힘을 거부한다'라고 직접적인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면 국가도 기업도 채워주지 못하는 공백과 공허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 것일까? 게임은 이 부분을 물음표로 남겨둔다(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야) 물론 콜옵이 그정도로 인류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을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드밴스드 워페어는 콜옵 치고는 괜찮은 스토리였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마지막의 엑소 수츠가 갖고 있는 함의를 잘 뒤집었으며, 그것을 벗어던지면서 영리하고 이를 뒤틀줄 알았기에, 차후의 콜옵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가가 기대된다고 할 수 있다.





게임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콜옵 고스트의 악몽은 다음글을 참조해주시라(http://leviathan.tistory.com/1842)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시작은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에서 출발한다:주인공인 미첼은 북한에 의해서 점령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게이머는 친구인 윌 아이언스와 함께 이 미션을 진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게이머는 윌의 아버지가 세계적인 PMC 회사인 아틀라스의 운영주이자 CEO 조나단 아이언스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윌이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서 자원입대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미션의 마지막, 윌은 미첼의 친우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하게 전사한다.


이러한 어드벤스드 워페어의 첫 미션은 정석적이라 평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기존의 콜옵들과는 다른 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모든 콜옵은 미국 또는 절대적인 선이라 지칭할 수 있는 집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모던워페어 시리즈에서는 태스크 포스 141이었든, 블랙옵스 시리즈에서는 메이슨 부자와 그 동료들이었던, 고스트에서는 전설적인 특수부대 고스트였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시작은 바로 '소실'이다:'아버지'가 아니라 국가라는 전통적인 가치에 충실하겠다고 한 친구의 죽음과 팔을 잃어버린 미첼이 느끼는 상실감, 공허.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첫 미션은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시작이다(블랙옵스 시리즈 같은 특이한 물건도 있긴 하지만):국가에 충성하는 가치는 죽었다. 그리고 우리(미국)가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벌이는 전쟁으로 얻은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어찌보면 이러한 질문은, 앞서 다루었던 내용(http://leviathan.tistory.com/1859)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조나단 아이언스는 '민주주의'를 비웃는다. 총알과 폭탄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 미국의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서 이루어진 민주주의. 후술하겠지만 조나단 아이언스는 그 위에 '관리되는 평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세계를 통치하고자 한다. 이러한 야심을 가진 대적자를 선정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전혀 콜옵스럽지 않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게임들은 이미 시도하고 있지만, 어드밴스드 워페어가 본격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미국의 전통적인 팍스 아메리카나의 정책이 가져온 피해들(베트남전부터 이라크 전, IS 까지)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상실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허와 상실감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아틀라스, 사설 군사 기업Private Military Company다. 혹자는 PMC가 이렇게 전면에 중요하게 등장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던 워페어 이후로 PMC는 메인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왔으며, 블랙옵스 2에서는 PMC가 주요한 적으로도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기존의 콜옵 시리즈와 어드밴스드 워페어가 차이가 나는 지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기업 Company'의 강조이다:국가가 실패한 자리에 기업이 들어선다. 기존의 PMC들은 어떤 음모를 위한 도구나 배경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어드밴스드 워페어 에서 아틀라스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도 아틀라스는 국가와 법의 경계에 얽메이지 않는다:이는 요즘 사람들이라면 모두 인지하는 다국적 기업의 대표적 특징일 것이다. 타국에서의 군사 작전에 누구의 권한으로 작전을 행하는가?라고 묻는 국방장관에게 내 권한으로! On my Authority!라고 대답하는 조나단 아이언스의 모습처럼, 그는 그 어느 상위 권력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조나단 아이언스는 '왕'이자 '군주'이다. 그렇기에 그가 테러 이후의 세계에 자신과 아틀라스가 선택한 인간들을 위한 세계, 그리고 그외 나머지 인간들은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끔찍한 형태의 수용소에 쳐박아서 천천히 잔혹하게 죽여나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어찌보면 '절대권력을 가진 절대군주'가 꿈꾸는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에 빗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아틀라스가 전세계에 침투해나가는 방식이다. 전세계적인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난 이후, 아틀라스는 그 자리에 치안과 함께 전후재건 사업을 통해서 전세계의 물자공급 및 인프라 망을 장악한다. 여기서 아틀라스의 PMC적 측면보다는 '기업'적인 측면이 부각된다:즉, 아틀라스는 국가의 실패(테러의 발생)로 생긴 공백을 비집고, 국가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는 어찌보면 현 상황을 은유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 등으로 개별 국가는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은 어떠한가? 기업의 이익과 미래는 창창하며, 매년 실제 사람들이 경험하는 경기는 악화됨에도 기업은 천문학적인 이윤을 내고 있다. 아틀라스는 그러한 기업의 가장 창창한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어드밴스드 워페어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아틀라스라는 기업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의 부상, 그리고 기업이 꿈꾸는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아니다. 블랙옵스 2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야기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킨다. 첫 미션이 끝난 이후, 게이머는 '버튼을 눌러서 동료에게 경의를 표한 뒤'(이건 좀 심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글로 다룰 수 있을지도?) 자식을 잃은 아버지 조나단 아이언스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후 일련의 재활과정 등을 거치면서 조나단과 미첼의 관계는 고용주-피고용자의 관계가 아닌 유사 '가족'처럼 보이는 지점이 생기게 된다. 심지어, 아들의 상실 이후 나는 더 잘할 수 있다는 오만을 토로하는 인텔 파일이나, 시나리오 종반부의 유사 아버지가 유사 아들에게 '아들처럼 대해줬는데...실망했다'라고 이야기하는 모습까지, '가족의 상실과 분노, 복수'라는 전통적인 드라마의 형태를 어드밴스드 워페어는 그대로 따르고 있다.


무엇보다 더 재밌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게이머는 싱글 종반부의 수용소 파트를 진행할 때, 조직적이며 비인간적으로 행해지는 학살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 책임을 게임은 아틀라스와 조나단에게로만 돌려버린다. 조직적 학살을 적극적으로 돕거나 방조한 사람들, 혹은 그것이 가능케 된 환경이나 사고, 문화 등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비극은 힘을 갖고 통제불가능해진 미치광이 왕이 만들어낸 비극에 불과하다.


하지만 더욱 깊숙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복잡하게 꼬여있다:그렇다면 왕이 갖고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중세시대 절대왕정의 시기에는 왕권은 신이 부여한 절대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며, 주권의 개념은 왕의 몸에 기거하는 것이었다(보댕의 왕권신수설 및 장례를 두번 지내는 절차 등등) 하지만 조나단 아이언스는 왕처럼 굴지만 '왕'은 아니다:그렇다면 조나단 아이언스가 휘두르는 권력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돈'이고 '이윤'이다. 조나단 아이언스는 왕이 아니라 CEO이고 기업 소유자이다. 하지만 게임은 힘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Power can change everything이라 하지, 돈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Money can change everything이라 하지 않는다. 물론 둘은 동치관계가 아니다:하지만 기업이 세계적 권력의 주체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은 돈,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와 이윤의 논리가 세계적 권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베이스가 되었다 라고 판단할 수 있다. 심지어 아틀라스는 단순하게 군사력만을 제공한 것이 아닌 전후 복구사업까지 제공하는 토탈 솔루션(?)을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즉, 이들은 단순하게 '군사력이 강한 용병집단'이 아니라 '군사력을 밑바탕으로 이윤을 내고 지속가능한 형태로 발전하는 기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은 철저하게 이러한 기업과 이윤의 문제를 '힘'의 문제로 뭉뚱그려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갖고 있는 조나단 아이언스는 최고 경영자Cheif Executive Officer가 아닌 주권을 가진 왕의 모습으로 묘사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게임이 '돈'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면, 게임 시나리오는 더이상 '콜옵'이 아니게 된다:게이머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한때 민주주의의 이식이 불가능했었고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 정책이 철저하게 실패했었던 이라크의 바그다드라던가(심지어 그들도 이렇게 이야기한다:50년 전이었으면 꿈도 못꿀 세상이었다고), 자신의 파티에 초대된 귀빈들을 드론으로 감시하는 미얀마 미션이라던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신입 사원(?) 채용활동하는 아틀라스라던가...이러한 풍경들은 단순하게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다. 국가, 즉 미국이 근원적으로 하지 못했었던 전세계의 평화가 '돈과 자본'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의 시나리오가 근원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렇다면 그 막강한 절대권력은 누가 감시하는가?'이다:실제로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조나단 아이언스의 오만이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일련의 비극을 만들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왜 아틀라스사의 직원들이 작중 시점으로 100년도 더 되었던 끔찍한 역사를 되풀이 하는가(대량학살, 전쟁, 집단수용소 등등)는 대답하지 못한다:왕에게는 왕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외의 99%의 인원들이 왕의 장단에 맞춰서 놀아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더 끔찍한 이야기가 숨어있다:힘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게 아니라, 아틀라스가 기업이라는 것, 그리고 기업이 그들의 피고용인에게 무엇을 주는지를.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세계는 국가가 거의 구시대의 유물에 근접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왜 디트로이트에서 테러 복구 사업을 국가가 아닌 아틀라스가 지휘하는가? 왜 전세계의 인프라망을 아틀라스가 지배하는 것처럼 묘사하는가? 전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의 커뮤니티는 파괴되었다:국가, 지역 사회, 학교, 친척, 가족 등등...그리고 어떤 사회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기업은 무기력한 개인들을 흡수하고 그들을 기업의 부품으로써 활용한다. 게이머가 디트로이트 미션을 눈여겨 살펴본다면 아틀라스가 지속적으로 인원을 충원하고 확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러한 테러 후 재건사업의 공로로 아틀라스는 역사상 최초로 'UN 안보리 이사회의 일원'으로 발탁되게 된다. 어찌보면 이는 소름끼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국가는 실패하였다, 이제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커뮤니티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되든 신경 쓰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뿐이다. 그렇기에 돈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다Money can change everything.


그렇기에 개개인으로 쪼개진 인간은 무기력하다:더이상 시스템에 반항하거나 자기 생각을 표출하기에는 너무나 잘개 쪼개지고 자신이 없고 무력하기에 그들은 그런 엄청나게 끔찍한 일들을 행하는데 대해서 어떠한 이의를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어드밴스드 워페어가 추구한 이야기라고는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어드밴스드 워페어가 묘사한 세계와 의도적으로 은폐한 이야기, 더 나아가서 그것이 갖고 있는 맥락들을 연결시켜보았을 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덧.엑소 수츠와 엔딩의 함의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빼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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