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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파 크라이 3가 기존의 FPS 플래이 흐름과는 다른 독보적인 지점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본인은 '활'을 꼽고 싶다:투박하고 원시적이며 한번에 한발 밖에 쏘지 못하는 활이 일인칭 '슈팅' 게임에 들어온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물론 튜록이라던가 등의 과거 FPS에서도 활은 무기로써 등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파 크라이 3가 이들과 독보적으로 다른점은 오픈월드라는 공간에서 활이라는 무기를 구현하고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후속작인 파 크라이 4에서는 자동 쇠뇌의 추가와 활 사냥 시 어드벤티지 추가 등의 소소하게 활 플래이를 밀어줌으로써 게임의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게임의 중요한 한 축임을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왜 활인가? 활은 원시적인 무기이다. 선사시대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활은 화약 병기의 등장과 함께 전쟁 무기 일선에서 취미용 무기로 뒤로 물러났었다. 화약 병기 같이 큰 소리는 내지 않지만, 20-30미터 정도만 넘어가도 맞추기 어려워지며 바람의 영향과 함께 사용자의 힘, 쥐는 자세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야외에서 조용히 사냥을 하는 용도로써 아직도 유효한 것이 바로 활이다. 탄약 자체를 재활용이 불가능한 총과 다르게 탄약 병기와 다르게 화살은 회수하고 사용할 수 있다. 활은 총이 지배하는 현대 무기 체계에서는 제한적인 환경에서는 매우 유효한 무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 크라이 3와 4가 활을 게임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활이 갖는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와 게임의 배경(원시의 야만이 살아있는 정글과 히말라야 산맥)을 이어붙이기 위한 것도 있다. 하지만 활이란 무기가 게임에 들어오면서 활은 게임의 템포를 재정의 하게 된다. 오픈월드 FPS로써 파크라이가 제시하는 세계는 가혹한 세계이다:게이머는 항상 수적 열세에 시달리며, 요즘 게임들 대세인 콜옵식의 자동 체력회복이 아닌 버튼을 눌러서 회복하는 수동 회복의 방식을 체택한다. 회복약은 전투 중에 쉽게 조달할 수 없으며, 탄약은 후반부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항상 부족한 축이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케릭터가 성장하기 전까지는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 적들을 면밀히 마킹하고 루트를 관찰한 뒤에 조용히 처리하는 잠입 위주에 플래이를 하게 되며, 이러한 게임 플래이의 핵심을 구축하는 것은 바로 '활'이다.


파 크라이 3과 4에서 활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어느 부위든 한방만 맞추면 적들(갑옷을 입은 중무장 떡대들을 제외하면)을 눕힐 수 있으며 무성 무기에 숙달되면 상당한 거리 바깥에서 적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 발에서 한 발까지로 이어지는 시간이 길며, 가장 중요한 점은 '탄도학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라는 것이다. 게이머는 활로 50미터 정도 넘어가는 적들은 나름대로의 보정없이는 맞추기 힘들다. 물론 대부분의 FPS 게임들은 교전거리가 50미터가 안되며 소위 장거리 저격의 개념은 잘 구현되지 않는다(배틀필드 멀티 같은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파크라이 3과 4는 오픈월드 FPS며, 50미터 전후에서 적을 관찰하고 교전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활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자주 발생한다.


그런데도 조준하기 불편한 활을 통해서 게임의 템포를 익히게 하는 것은 상당히 재밌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초반에는 적을 끌어들이지 않는 무성무기가 활 밖에 없으며, 초반 사냥(무성무기가 아니면 동물들이 대단히 빠르게 도망쳐서 사냥 효율을 떨어지게 만든다)과 후반 사냥 미션들은 활을 사용하도록 강제한다. 하지만 게이머는 이를 통해서 게임과 게임 속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활은 빗나가면 적에게 발각되기 쉽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고 난뒤에는 재빠르게 움직여라(적이 너를 발견하지 못하게). 적이 너를 발견하기 전에 먼저 적을 해치워라(활의 연사력이 떨어지고, 회복 수단은 제한되어 있기에) 등등. 이렇게 본다면 활은 게임의 컨셉을 이해하게 만드는 주요한 수단인 동시에, 게임의 템포를 익히게 만드는 훌륭한 튜토리얼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느정도 사냥을 통해서 템과 가방들이 완비되기 시작하면, 정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들의 머리통을 부숴버리는 플래이가 유효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중후반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활이다. 재밌는 점은 비슷한 반-오픈월드 FPS인 크라이시스 3에서도 활을 중요한 테마 병기로 내세웠다는 것이다:어찌보면 활이 갖고 있는 특수한 성격들이 오픈월드 FPS에 잘 맞아떨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2014년도 2학기 모대학 종교학 수업 감상문으로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바다 한가운데 좁은 구명보트에서부터 호랑이와 함께 남게 된 소년파이의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파이의 가족들은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민을 준비한다.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로 떠나는 배에 탑승한 가족들은 상상치 못한 폭풍우을 맞이하고 화물선은 침몰하게 된다. 그리고 가까스로 구명선에 탄 파이만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구명 보트에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 그리고 바나나 뭉치를 타고 구명보트로 뛰어든 오랑우탄이 함께 탑승해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놀라게 만든 진짜 주인공은 보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벵갈 호랑이리처드 파커였다.

 

시간이 갈수록 배고픔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이 배에 남게 된다. 파이는 배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점차리처드 파커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태평양 한가운데서 집채 만한 고래와 빛을 내는 해파리, 하늘을 나는 물고기, 그리고 미어캣이 사는 신비의 섬 등 그 누구도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들을 겪게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재밌는 점은 영화의 말미에 밝혀지듯이 파이의 이야기에는 두가지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첫번째는 파이가 들려준 호랑이와 조난 당한 이야기, 두번째는 사람들과 조난당하고 난 뒤 끔찍한 경험을 한 이야기. 보통 인터넷 등지에서는 어떤 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가, 혹은 파이가 끔찍한 행위를 했는가 여부를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오간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의 접근방법에는 중요한 결점이 있는데, 바로 두번째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의 극초반 시퀸스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동물들(호랑이=파이, 하이애나=주방장, 얼룩말=다친 선원, 오랑우탄=어머니)이 어떻게 해서 모두 죽고 파이(=벵갈 호랑이) 홀로만 남았는지는 설명해주고 있지만, 첫번째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이와 벵갈 호랑이가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공존하는 노력은 두번째 이야기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파이는 두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일까? 어느쪽이 과연 진실인 것일까? 일단 결론을 먼저 내리자면, 진실은 어느 한쪽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파이가 이야기한 두가지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선 모두 사건에 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파이가 벵갈 호랑이와 함께했던 표류기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동물성 또는 야수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위험한 순간에, 그의 이성(아버지가 이야기했었던)과 그의 야성이 갈등을 벌이다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화해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한다(파이는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고, 호랑이는 파이에게 식인섬의 위협을 가르켜 준다)

 

하지만 호랑이와 파이의 표류는 단순하게 표류 자체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파이의 일생과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종교가 놓여있다:파이는 종교에 관심이 많았고 이슬람과 기독교, 힌두교 등을 다양하게 접하고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현재 자신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추구하는 행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종교 자체에 관심을 잃는 것은 리차드 파커와 교감을 하려 했었던 경험이 아버지에 의해서 좌절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왜 종교에 대한 관심을 잃는 것이 호랑이의 야수성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일까? 여기서 이단적인 철학자인 조르주 바타유의 이론을 끌어들여보고자 한다:바타유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이라는 의식적인 행위로 인해서 인간은 여지껏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도 경험하지 못하는 불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노동으로 대변되는 이성은 모든 것에 질서를 구축하고자 한다. 하지만 육신이라는 한계에 갇혀있는 인간은 항상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성욕, 식욕, 파괴욕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인간은 금기를 만들었다:금기는 절대로 어겨서는 안되는 법칙이 아니라 어길 수 밖에 없는법칙,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법칙을 어기고 돌아오는 사람들(전쟁에서 상대 군인을 살인하는 것)을 위한 가이드라인으로서 존재한다(전쟁에서의 살인을 속죄하고 그 살인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는 것이 바타유의 해석이었다.

 

그렇기에 동물을 숭배하는 초기 종교들의 모습을 바타유는 인간의 금기에 대한 특이한 사고에 기반하였다고 보았다:원시인들 또는 고대인들은 아무렇게나 먹고 사냥하고 죽이고 성교하는 동물들이 인간이 구속되어 있는 금기를 모를 리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고대인들은 동물들이 그 금기를 알면서도 자유롭게 어기고 있으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바타유는 이러한 동물의 신성함이 초기 종교 의식에 있어서 동물을 사용한 희생제의가 흔하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동물이라는 신성한 존재와 생명을 열어재낌으로써 닫힌 존재를 순환되는 연속체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 그렇기에 인간은 경험할 수 없는 연속된 세계의 안정감을 잠시나마 느끼고자 했다는 것이 희생제의의 의의라는 것이다.

 

물론, 바타유의 견해는 극론이며 객관적인 자료나 관찰에 근거하였다기 보다는 추상적인 이론과 이단적인 사고 실험에 근거하고 있는 이론이다.(바타유 스스로도 자신의 이론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심지어 이런 극단적인 발상을 하는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닐까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유를 인용한 것은 바타유가 종교와 인간 본성에 대해서 보여준 광인의 번뜩임과도 같은 통찰력이 날카롭게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도 리차드 파커와 파이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쓸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성을 중시하였던 아버지는 리차드 파커의 파괴적인 야수성을 아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낸다. 재밌는 점은 바로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에서 표류자들이 잡아먹은 선원의 이름이라는 것이고, 실제로 1884년 표류중에 벌어진 굶주림으로 벌어진 인육취식 사건의 피해자 이름이라는 것이다. , 리차드 파커는 단순하게 호랑이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 두려워하는 야수적 본질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파이가 리차드 파커의 잔학한 모습을 보고 소통의 가능성 자체가 없다고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파이가 종교 자체에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은 이해하고 화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연적인 야수성을 확인한 것이었고 그 역할에 있어서도 종교 역시도 무의미한 무언가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와 호랑이는 공존하며 소통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러한 화해의 과정에 있어서 종교의 힘은 강하게 드러난다:비슈뉴 신과 예수와 알라를 한 데 뒤섞어서 파악하는 인도인다운 종교관념은 상당히 인상깊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에게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 파이는 하나의 사건을 두 개의 이야기로 쪼개서 설명하는가 라는 지점이었다. 만약 그가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이야기하고 싶었더라면, 굳이 호랑이와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얼룩말이 나와서 미어켓과 식인섬이 거쳐가는 판타지 미스터리 활극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진짜 처음 일어났었던 일에 대해 덧붙여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러한 과정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인터넷 등지에서도 어느 한쪽이 오롯하게 진실인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심한 것을 생각하면(물론 대부분은 전자가 진실이라고 단정한다) 파이의 이야기는 다소 혼란스러운 감이 있다. 하지만 파이가 이야기를 두 개로 쪼개서 이야기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그것은 바로 경전과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소설과 서사가 모든 것을 일방향적으로 정의한다고 규정하고, 그에 대칭되는 고대에서 중세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전통에 주목한 적이 있다. 소설에는 화자가 있고, 작가가 있으며, 의도되어있는 주제가,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결론이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소설은 근대적인 산물이었다:고독하게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서 홀로 읽는 개념의 텍스트가 바로 소설이었으며, 고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국민들로 구성된 근대 국가에 프로파간다를 설파하기 위한 텍스트 구조 및 문법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이야기는 오로지 뼈대만으로서 전달해야 하는 정보주제없이 교훈을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의 서사가, 의도되어있는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은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는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캄비세스는 그 포로를 능욕하기 위해서 페르시아 병사들의 승리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세워두라고 명령했다. 그러고서 그는 그 포로가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항아리를 갖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모습을 보게 했다. 모든 이집트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고 비탄에 잠겨있을 때, 사메니투스만은 아무 말도 없었고 미동도 하지않았으며 눈을 바닥에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처형당하러 가는 행렬 속에 자신의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뒤 그가 자신의 시종, 한 늙고 초라한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드러내는 온갖 표현을 해 보였다.”(역사 제 3 14)

 

이 이야기에서 헤로도토스는 사메니투스가 왜 슬퍼하였는지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지 않다. 판단과 해석은 오로지 독자의 몫인 것이다. 벤야민이 주목한 이야기의 미덕이란 바로 정보가 아니라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공백또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여백의 문제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만이 이러한 이야기의 미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뛰어난 소설과 대중매체 작품들은 자신의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감상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들을 고전이라 지칭한다.

 

종교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우리가 종교의 경전이라는 텍스트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절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대명령이거나 영원불멸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곱씹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왜 기독교와 이슬람, 불교, 힌두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종교였기 때문에? 아니다.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종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소위 세계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들이 경전이나 가르침을 통해서 전파하고자 한 이야기들은 인간에게 묵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기에 그 가르침과 경전에 무게가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 경전은 완성된 진리 및 정보가 아니라 인간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텍스트, 즉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파이가 두가지 이야기를 해준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그것은 어느 한쪽 버전의 이야기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닌, 두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보고서 말미에 ‘…그 어느 누구도 뱅갈 호랑이와 함께 오랫동안 표류해서 살아남지 못했었다라는 결론 역시도 중의적이 된다:파이는 그러한 끔찍한 재앙을 겪었음에도 야수성과 이성 어느 한쪽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라고.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경험했던 그가 영화 엔딩에 가족과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살아남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문학이나 예술, 더 나아가서 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이 감상을 끝마치기 전에 한 가지 궁금점이 남아있다:그렇다면 정글 속으로 사라진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 벤야민이 적절한 어구를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을 끝으로 이 감상을 끝마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살아 있다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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