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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혹시 김기덕 감독의 빈 집이라는 영화를 아시는가? 그 영화에 이런 시퀸스가 있다:빈 집에 들어가 생활을 하는 특이한 취미를 가진 주인공은 빈 집에서 생활하는 도중에 여행에서 돌아온 가족을 만나게 된다. 그 가족들은 가족여행이 계획대로 안됐음을 짜증내며 서로에게 지치고 언짢은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 장면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김기덕의 주요 모티브인 '중산층 판타지의 붕괴'를 저자극적으로 담백하게, 그러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여행이란 것은 마치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여행이란 일탈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라는 것, 그리고 빈 집의 그 장면에서 김기덕은 중산층 가족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짜증과 현실을 짧고 인상적으로 다루어내는데 성공하였다.


파크라이 3과 4의 이야기를 진행하기 앞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음과 같다:파크라이 3과 4는 게임 자체도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지만, 더욱 재밌는 부분은 바로 '스토리'에 대한 게이머들의 비슷한 평가들(찝찝하다)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김기덕 감독 영화의 한 장면, '여행'과 '귀환'이라는 모티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마치 일 보고 뒤 안닦은거 같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파크라이 3과 4의 스토리평가는, 파크라이 3과 4가 기존의 게임 프랜차이즈들의 스토리와 서사구조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게임에서 주인공이 여러 사람들의 부탁을 듣고 좋은 일을 하며 죽어 마땅한 놈들을 총으로 쏴죽인다는 점에서 파크라이 3과 4는 다른 게임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나쁜 놈을 쏴죽이는 것과 별개로 게이머들이 공통적으로 찝찝하게 느끼는 엔딩으로 귀결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만약 게임 스토리가 나쁘다고 판단된다면, 사람들은 '스토리가 나쁘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크라이 3과 4 엔딩 찝찝하네요...'라던가 '4 같은 경우는 차라리 히든 엔딩이 굿엔딩이네요' 라는 식의 평가를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파크라이의 게임 스토리를 '잘못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납득은 되는데 찝찝한 무언가'라고 평가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게임들은 '찝찝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우리는 파크라이 시리즈의 게임 플래이 방식에 주목하여야 한다:파크라이 1편부터 거대한 필드와 자유로운 접근 방식을 통해서 게임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여주었고, 2편부터는 본격적으로 오픈월드 FPS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픈월드 게임들의 대부분이 3인칭인데 비해서, 파크라이 시리즈가 갖는 특징은 바로 FPS라는 점이다. 또한 재밌는 점은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흥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3편에서는 단순하게 '야외'라는 공간을 넘어서 '광기로 벗어난 비일상의 세계'라고 스테이지를 재정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파크라이 3의 게임 경험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초록색으로 빛나는 폴리네시아의 정글은 단순하긴 하지만 경험할 수 있는 생태계가 존재하며, 항정신성 의약품에 근거한 경험들을 게임의 스테이지로 채용하는가 한편, 정신나간 퀘스트들과 맛이간 케릭터들을 게이머는 파크라이 3에서 경험한다. 4편은 이러한 3편의 특징들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모습을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3편과 4편의 주인공들이 모두 이러한 상황에 '의도치 않게' 뛰어들었다는 점이다:3편의 제이슨은 동생의 면허 취득 축하 파티에서 정글로 스카이다이빙 하다 루크섬에 떨어졌다. 4편의 아제이는 어머니의 유해를 고향에 돌려놓기 위해서 생면부지의 고향 키라트로 돌아간다. 재밌는 점은 이 두 이야기의 시작이 '일상에서 탈출한/벗어난 여행'라는 요소에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오픈월드의 정의는 애매하지만, 좀 포괄적인 접근을 더해보자면 '미션이나 스테이지 구성에 얽메이지 않고 내 할일을 찾아내는 넓은 공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광대한 오픈월드의 구체적인 모습과 스테이지 구성은 항상 게임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레드 데드 리뎀션에서는 서부 개척 시대의 종말에 어울리는 세계를, GTA5에서는 현대문화와 서브컬처를 비꼬고 집대성하는 모습을, 어크 시리즈는 역사적 사건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파크라이 3와 4의 시작이 일상에서의 탈출, 그리고 '여행'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만약 그렇다면, 게임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가 '일상에서 탈출해서 즐기는 비일상의 여행'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파크라이 3과 4가 여지없이 보여주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광기'는 여행의 '목적'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파크라이 3과 4의 세계, 루크섬과 키라트는 광기라는 이름의 테마파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게이머는 이 테마파크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원하는 놀이기구(미션 및 활동)를 탈 수 있다. 게이머는 수목원에 들어가서 식물들을 즐기듯이 원시와 고대의 야만성을 즐기며, 공포를 즐기기 위해 유령의 집에 들어가듯이 항정신성 의약품을 한껏 들이킨 스테이지를 체험할 수도 있다. 즉, 파크라이의 세계는 일상의 무료함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게이머를 위한 일탈의 공간이자 출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게임 속의 스토리는 심각하기 그지없다:친구와 형제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다니거나(3편), 막장이 된 모국을 구하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다(4편)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중간중간 드러나는 '태도'이다. 약공장에 불을 지르고는 환각을 보면서 싸우거나, 공중감옥에서 악몽을 보며 탈출하거나 등 게임은 얼핏 진중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부분에 광기와 장난스러움을 덧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파크라이 3과 4는 다른 게임들과 차별적이다.


그리고 플래이어의 시점이 '1인칭'이라는 점도 유념해둘만 하다. 파크라이 3과 4가 다른 오픈월드 게임들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가장 극명하게 차이가 있는 점이 바로 이 FPS라는 장르적 특성인데, 재밌는 점은 이 FPS에서는 '케릭터의 수동성'이 강조되기 쉽다는 것이다:구체적인 이유는 여지껏 설명된 적이 없지만, 어찌보면 FPS의 케릭터는 '내가 바깥에서 보고 인간형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내 자신의 분신으로써 존재하는 카메라맨'의 성격이 더 짙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프 라이프의 고든 프리먼 같이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케릭터도 있지만, 파크라이 3의 제이슨이 수동적인 부분이 강해서 아쉬웠다 라는 평이 은근히 존재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그런 부분을 보강한(좀더 적극적인 리액션을 보여준다) 4편의 아제이도 '아쉬울 수 밖에 없는' 인상이란 점은 3과 4편의 스토리텔링의 문제라기 보다는 'FPS'가 갖고 있는 장르적 한계와 후술할 여행이 갖는 본질적 한계와 맞물리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파크라이 3과 4가 스토리와 게임 진행의 측면에서 '일탈적 여행'이라는 지점을 강조했기에 역으로 게이머가 갖는 한계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여행을 온 관광객은 어디까지나 '외부적 관람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편의 제이슨은 자신이 루크섬의 광기와 야만에 점점 물들고 거기에 알맞은 인간으로 변화하게 되지만, 정작 본질적으로 그는 외부인이기에(어떤 현지인은 그를 '백설공주'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완벽하게 동화될 수 없으며 찝찝한 두 엔딩 역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4편의 아제이 역시도 아미타와 사발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만, 그 어느 선택도 해답이 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점점 그들과 겉돌게 되는 아제이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결국 엔딩의 찝찝함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분명하게도 주인공들이 이 광기로 알록달록한 테마파크의 관객이기 때문에 생긴다:관람객은, 테마파크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다. 모든 것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테마파크 자체를 상호작용하여 바꿀 수 없다. 


그렇기에 광기와 일탈의 테마파크는 언젠가 끝을 맞이해야 한다. 테마파크에서 영원히 살 수 없듯이, 게이머 역시도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언제가 되어야 할까? 가장 적당한 순간은 바로 '엔딩'일 것이다: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가야하는 순간. 그리고 게임은 광기와 현실 사이에서 괴리된 찝찝한 엔딩을 제공한다. 게이머들이 대부분 느끼는 찝찝함이란 바로 그것일 것이다:즐겁게 뛰놀았던 광기의 세계는 결코 현실의 이성과 합리가 대입될 수 없는 완벽한 일탈의 세계였다는 것, 결국은 게이머는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게이머 자신이 게임이 끝난 이후에도 현실에서 광기에 미쳐서 날뛸거라고 생각하고 이런 엔딩을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게임이 이러한 스토리 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관광객과 테마파크의 위치'를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완결성, 자신의 문법을 그대로 관객에게 드러냄으로서 이것이 마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마술사의 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엔딩의 찝찝한 여운은 빈 집의 그 장면과 유사하다:여행은 항상 즐거울 수 없으며 완벽한 여행이란 없다. 그것이 의도하든, 혹은 의도치 않든 간에 파크라이 3과 4의 이야기는 관객을 즐겁게 속이고는 자신의 속임수를 관객에 내보이고 퇴장하는 마술사의 모습이 연상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



차세대 버전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이미 80시간 정도 진행한 플삼버전이 있어서 갈등되네요...


방송하려면 플4가 더 좋은데 세이브 파일 공유 안되려나...









게임 이야기





본인은 이전에 디아블로 3에 대해서 기술의 자유로운 커스마이징과 함께 정해진 스킬트리로부터 자유로워진 새로운 시대의 핵 앤 슬래시 RPG가 탄생하였다고 규정한 적이 있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 평가는 '반'만 들어맞은 샘이었다:디아 3 오리지날은 고질적인 아이템 루팅 문제(소위 쓸모 없는 아이템인 폐지 줍는 게임)와 접속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콘텐츠 분량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보였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제작진들이 예측했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물론 본인도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디아 3는 수백만명의 유저들이 수천만 시간을 쏟아부어서 플래이하는 게임이 될 것이었고, 또한 온라인 게임 같은 기믹을 도입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준비를 했어야 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디아블로 3는 미흡한 대처와 슬럼프에 늪에서 허우적 거렸다. 이후 콘솔판 디아 3를 만든 조쉬 모스키에라 디렉터가 디아 3 총괄 디렉터가 되면서 일련의 문제들은 점차 해소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러한 조쉬 디렉터의 기조가 디아 3 확장판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확장팩에서 추가적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직업이 하나 추가되었고, 파라곤 레벨이 추가되었다. 전반적으로 디아 3라는 게임의 템포를 반복플래이에 걸맞게 다듬는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모험모드와 균열모드로써 반복플래이에 특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게이머는 모든 스토리가 끝난 이후, 모험모드를 통해서 각각의 액트에서 반복적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과거 같이 일정 이벤트를 반복하여서 꼼수식으로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는 것이 아닌 반복적인 퀘스트를 통해서 보상과 균열석 조각을 모으고, 이를 이용해서 더 큰 보상을 노릴 수 있는 균열을 도는 형태로 게임 흐름을 굳힌다.


이러한 변화들은 디아 3에 있어서 반복플래이를 강조하고 보완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이러한 반복 플래이에 대한 강화 기조가 왜 디아 3 원판이 아니라 확장판에서 시작되었어야 했는가? 사실 디아 3의 치명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디아 2의 전통을 게임에 접합시키려 했다는 것에 있다. 스토리 모드만 존재하며 게이머가 액트를 순서대로 클리어하며 상위 난이도를 해금하는 것을 기조로 삼은 디아블로 2에서 어떤 '다른 게임이 갖지 못하는 전통'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역으로 디아 3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옭아맸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디아 2의 미덕은 다른 핵 앤 슬래시 RPG들이 훌륭하게 계승하였다. 타이탄 퀘스트나 세이크리드, 토치라이트 등등의 다양한 게임들이 디아 2가 제시한 핵 앤 슬래시라는 컨셉을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하여 자신의 게임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 어느누구도 디아 2의 요소를 완벽하게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세이크리드는 디아 시리즈와는 다른 거대한 필드를 도입하여서 게임 플래이를 차별화하였고, 토치라이트는 모딩 개념을 도입해서 게임이 끝난 이후에도 이것저것 다양한 확장을 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즉, 소위 훌륭한 디아 2의 모방자들은 큰 게임 흐름에 있어서 디아 2와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디아 3는 유독 그러한 디아 2의 큰 흐름을 따라야 하는 '전통'으로 규정지었기에 문제에 봉착한다.


확장팩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것을 도입하지만, 그러한 원판의 문제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다:잘 쓰여지지 못한 이야기와 게임 서사(게임 플래이를 둘러싼 환경들)들은 게이머에게 게임을 반복해야하는 동인을 제공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보더랜드 2 같은 경우에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며 매력적인 미치광이 같은 세계와 함께 '총'이라는 핵심 모티브를 게이머가 지속적으로 파밍을 해야하는 이유를 제공한다(물론 총 쏘는 맛도 있다) 하지만 디아 3의 기본 스토리는 매력적이지 못하며(확장팩도 그러하다), 게이머가 파밍을 해야하는 이유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다:모든 것은 '사후적'으로써 네팔렘이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한 것이기에 어떤 급박함이라던가 이야기에 있어서 끌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게임 플래이 자체는 그러한 반복플래이를 어느정도 숨겨주기도 한다:수십마리의 적을 한번에 도륙내는 쾌감이야말로 디아블로 2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라 할 수 있고, 많은 핵 앤 슬래시 RPG에 게이머들이 끌리는 부분이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디아 3의 장점들(자유로운 스킬셋, 액션 등)을 이어받은 작품들이 이제 슬슬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오히려 콘텐츠나 큰 틀의 게임 플래이에 있어서는 디아 3를 압도하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상은 이번 지스타에서 공개된 스마일게이트 신작인 로스트 아크다. 기본적으로 디아 3의 게임 플래이를 빌리고 있지만(트라이포드 시스템), 로스트 아크의 특징은 후반부에 공개되는 다양한 콘텐츠들에 있다:기본적으로 다양한 MMORPG에서 차용한 듯한 채집과 수집요소들, 더 나아가서 탑 뷰 카메라를 베이스로 두되 카메라를 돌릴 때는 과감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게임은 새로운 것은 없지만 충분히 검증된 매력적인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고 있다. 내후년 발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지만, 로스트 아크가 큰 틀에서 보여주는 할 거리는 이미 디아블로 3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물론 내후년에 나올 게임에 대해서 너무 이른 김칫국을 마시는 것은 좋지 않을 수 있다(또한 한국 게임 개발 전통이 항상 신선하고 좋은 것을 망치는 방향으로 특화된걸 생각하면.....) 그러나 이미 트레일러만으로도 디아블로 3의 할 것을 아득하게 상회하는 물건이 나왔다는 것은, 확장팩으로 변화를 시도해도 디아블로 3의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약 디아블로 3의 새로운 확장팩이 뭔가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디아블로 라는 프랜차이즈에 장기적인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게임 이야기





파 크라이 3가 기존의 FPS 플래이 흐름과는 다른 독보적인 지점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본인은 '활'을 꼽고 싶다:투박하고 원시적이며 한번에 한발 밖에 쏘지 못하는 활이 일인칭 '슈팅' 게임에 들어온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물론 튜록이라던가 등의 과거 FPS에서도 활은 무기로써 등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파 크라이 3가 이들과 독보적으로 다른점은 오픈월드라는 공간에서 활이라는 무기를 구현하고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후속작인 파 크라이 4에서는 자동 쇠뇌의 추가와 활 사냥 시 어드벤티지 추가 등의 소소하게 활 플래이를 밀어줌으로써 게임의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게임의 중요한 한 축임을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왜 활인가? 활은 원시적인 무기이다. 선사시대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활은 화약 병기의 등장과 함께 전쟁 무기 일선에서 취미용 무기로 뒤로 물러났었다. 화약 병기 같이 큰 소리는 내지 않지만, 20-30미터 정도만 넘어가도 맞추기 어려워지며 바람의 영향과 함께 사용자의 힘, 쥐는 자세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야외에서 조용히 사냥을 하는 용도로써 아직도 유효한 것이 바로 활이다. 탄약 자체를 재활용이 불가능한 총과 다르게 탄약 병기와 다르게 화살은 회수하고 사용할 수 있다. 활은 총이 지배하는 현대 무기 체계에서는 제한적인 환경에서는 매우 유효한 무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 크라이 3와 4가 활을 게임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활이 갖는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와 게임의 배경(원시의 야만이 살아있는 정글과 히말라야 산맥)을 이어붙이기 위한 것도 있다. 하지만 활이란 무기가 게임에 들어오면서 활은 게임의 템포를 재정의 하게 된다. 오픈월드 FPS로써 파크라이가 제시하는 세계는 가혹한 세계이다:게이머는 항상 수적 열세에 시달리며, 요즘 게임들 대세인 콜옵식의 자동 체력회복이 아닌 버튼을 눌러서 회복하는 수동 회복의 방식을 체택한다. 회복약은 전투 중에 쉽게 조달할 수 없으며, 탄약은 후반부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항상 부족한 축이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케릭터가 성장하기 전까지는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 적들을 면밀히 마킹하고 루트를 관찰한 뒤에 조용히 처리하는 잠입 위주에 플래이를 하게 되며, 이러한 게임 플래이의 핵심을 구축하는 것은 바로 '활'이다.


파 크라이 3과 4에서 활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어느 부위든 한방만 맞추면 적들(갑옷을 입은 중무장 떡대들을 제외하면)을 눕힐 수 있으며 무성 무기에 숙달되면 상당한 거리 바깥에서 적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 발에서 한 발까지로 이어지는 시간이 길며, 가장 중요한 점은 '탄도학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라는 것이다. 게이머는 활로 50미터 정도 넘어가는 적들은 나름대로의 보정없이는 맞추기 힘들다. 물론 대부분의 FPS 게임들은 교전거리가 50미터가 안되며 소위 장거리 저격의 개념은 잘 구현되지 않는다(배틀필드 멀티 같은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파크라이 3과 4는 오픈월드 FPS며, 50미터 전후에서 적을 관찰하고 교전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활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자주 발생한다.


그런데도 조준하기 불편한 활을 통해서 게임의 템포를 익히게 하는 것은 상당히 재밌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초반에는 적을 끌어들이지 않는 무성무기가 활 밖에 없으며, 초반 사냥(무성무기가 아니면 동물들이 대단히 빠르게 도망쳐서 사냥 효율을 떨어지게 만든다)과 후반 사냥 미션들은 활을 사용하도록 강제한다. 하지만 게이머는 이를 통해서 게임과 게임 속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활은 빗나가면 적에게 발각되기 쉽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고 난뒤에는 재빠르게 움직여라(적이 너를 발견하지 못하게). 적이 너를 발견하기 전에 먼저 적을 해치워라(활의 연사력이 떨어지고, 회복 수단은 제한되어 있기에) 등등. 이렇게 본다면 활은 게임의 컨셉을 이해하게 만드는 주요한 수단인 동시에, 게임의 템포를 익히게 만드는 훌륭한 튜토리얼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느정도 사냥을 통해서 템과 가방들이 완비되기 시작하면, 정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들의 머리통을 부숴버리는 플래이가 유효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중후반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활이다. 재밌는 점은 비슷한 반-오픈월드 FPS인 크라이시스 3에서도 활을 중요한 테마 병기로 내세웠다는 것이다:어찌보면 활이 갖고 있는 특수한 성격들이 오픈월드 FPS에 잘 맞아떨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2014년도 2학기 모대학 종교학 수업 감상문으로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바다 한가운데 좁은 구명보트에서부터 호랑이와 함께 남게 된 소년파이의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파이의 가족들은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민을 준비한다.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로 떠나는 배에 탑승한 가족들은 상상치 못한 폭풍우을 맞이하고 화물선은 침몰하게 된다. 그리고 가까스로 구명선에 탄 파이만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구명 보트에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 그리고 바나나 뭉치를 타고 구명보트로 뛰어든 오랑우탄이 함께 탑승해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놀라게 만든 진짜 주인공은 보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벵갈 호랑이리처드 파커였다.

 

시간이 갈수록 배고픔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이 배에 남게 된다. 파이는 배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점차리처드 파커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태평양 한가운데서 집채 만한 고래와 빛을 내는 해파리, 하늘을 나는 물고기, 그리고 미어캣이 사는 신비의 섬 등 그 누구도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들을 겪게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재밌는 점은 영화의 말미에 밝혀지듯이 파이의 이야기에는 두가지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첫번째는 파이가 들려준 호랑이와 조난 당한 이야기, 두번째는 사람들과 조난당하고 난 뒤 끔찍한 경험을 한 이야기. 보통 인터넷 등지에서는 어떤 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가, 혹은 파이가 끔찍한 행위를 했는가 여부를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오간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의 접근방법에는 중요한 결점이 있는데, 바로 두번째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의 극초반 시퀸스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동물들(호랑이=파이, 하이애나=주방장, 얼룩말=다친 선원, 오랑우탄=어머니)이 어떻게 해서 모두 죽고 파이(=벵갈 호랑이) 홀로만 남았는지는 설명해주고 있지만, 첫번째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이와 벵갈 호랑이가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공존하는 노력은 두번째 이야기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파이는 두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일까? 어느쪽이 과연 진실인 것일까? 일단 결론을 먼저 내리자면, 진실은 어느 한쪽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파이가 이야기한 두가지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선 모두 사건에 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파이가 벵갈 호랑이와 함께했던 표류기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동물성 또는 야수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위험한 순간에, 그의 이성(아버지가 이야기했었던)과 그의 야성이 갈등을 벌이다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화해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한다(파이는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고, 호랑이는 파이에게 식인섬의 위협을 가르켜 준다)

 

하지만 호랑이와 파이의 표류는 단순하게 표류 자체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파이의 일생과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종교가 놓여있다:파이는 종교에 관심이 많았고 이슬람과 기독교, 힌두교 등을 다양하게 접하고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현재 자신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추구하는 행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종교 자체에 관심을 잃는 것은 리차드 파커와 교감을 하려 했었던 경험이 아버지에 의해서 좌절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왜 종교에 대한 관심을 잃는 것이 호랑이의 야수성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일까? 여기서 이단적인 철학자인 조르주 바타유의 이론을 끌어들여보고자 한다:바타유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이라는 의식적인 행위로 인해서 인간은 여지껏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도 경험하지 못하는 불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노동으로 대변되는 이성은 모든 것에 질서를 구축하고자 한다. 하지만 육신이라는 한계에 갇혀있는 인간은 항상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성욕, 식욕, 파괴욕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인간은 금기를 만들었다:금기는 절대로 어겨서는 안되는 법칙이 아니라 어길 수 밖에 없는법칙,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법칙을 어기고 돌아오는 사람들(전쟁에서 상대 군인을 살인하는 것)을 위한 가이드라인으로서 존재한다(전쟁에서의 살인을 속죄하고 그 살인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는 것이 바타유의 해석이었다.

 

그렇기에 동물을 숭배하는 초기 종교들의 모습을 바타유는 인간의 금기에 대한 특이한 사고에 기반하였다고 보았다:원시인들 또는 고대인들은 아무렇게나 먹고 사냥하고 죽이고 성교하는 동물들이 인간이 구속되어 있는 금기를 모를 리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고대인들은 동물들이 그 금기를 알면서도 자유롭게 어기고 있으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바타유는 이러한 동물의 신성함이 초기 종교 의식에 있어서 동물을 사용한 희생제의가 흔하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동물이라는 신성한 존재와 생명을 열어재낌으로써 닫힌 존재를 순환되는 연속체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 그렇기에 인간은 경험할 수 없는 연속된 세계의 안정감을 잠시나마 느끼고자 했다는 것이 희생제의의 의의라는 것이다.

 

물론, 바타유의 견해는 극론이며 객관적인 자료나 관찰에 근거하였다기 보다는 추상적인 이론과 이단적인 사고 실험에 근거하고 있는 이론이다.(바타유 스스로도 자신의 이론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심지어 이런 극단적인 발상을 하는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닐까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유를 인용한 것은 바타유가 종교와 인간 본성에 대해서 보여준 광인의 번뜩임과도 같은 통찰력이 날카롭게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도 리차드 파커와 파이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쓸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성을 중시하였던 아버지는 리차드 파커의 파괴적인 야수성을 아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낸다. 재밌는 점은 바로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에서 표류자들이 잡아먹은 선원의 이름이라는 것이고, 실제로 1884년 표류중에 벌어진 굶주림으로 벌어진 인육취식 사건의 피해자 이름이라는 것이다. , 리차드 파커는 단순하게 호랑이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 두려워하는 야수적 본질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파이가 리차드 파커의 잔학한 모습을 보고 소통의 가능성 자체가 없다고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파이가 종교 자체에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은 이해하고 화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연적인 야수성을 확인한 것이었고 그 역할에 있어서도 종교 역시도 무의미한 무언가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와 호랑이는 공존하며 소통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러한 화해의 과정에 있어서 종교의 힘은 강하게 드러난다:비슈뉴 신과 예수와 알라를 한 데 뒤섞어서 파악하는 인도인다운 종교관념은 상당히 인상깊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에게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 파이는 하나의 사건을 두 개의 이야기로 쪼개서 설명하는가 라는 지점이었다. 만약 그가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이야기하고 싶었더라면, 굳이 호랑이와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얼룩말이 나와서 미어켓과 식인섬이 거쳐가는 판타지 미스터리 활극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진짜 처음 일어났었던 일에 대해 덧붙여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러한 과정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인터넷 등지에서도 어느 한쪽이 오롯하게 진실인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심한 것을 생각하면(물론 대부분은 전자가 진실이라고 단정한다) 파이의 이야기는 다소 혼란스러운 감이 있다. 하지만 파이가 이야기를 두 개로 쪼개서 이야기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그것은 바로 경전과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소설과 서사가 모든 것을 일방향적으로 정의한다고 규정하고, 그에 대칭되는 고대에서 중세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전통에 주목한 적이 있다. 소설에는 화자가 있고, 작가가 있으며, 의도되어있는 주제가,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결론이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소설은 근대적인 산물이었다:고독하게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서 홀로 읽는 개념의 텍스트가 바로 소설이었으며, 고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국민들로 구성된 근대 국가에 프로파간다를 설파하기 위한 텍스트 구조 및 문법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이야기는 오로지 뼈대만으로서 전달해야 하는 정보주제없이 교훈을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의 서사가, 의도되어있는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은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는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캄비세스는 그 포로를 능욕하기 위해서 페르시아 병사들의 승리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세워두라고 명령했다. 그러고서 그는 그 포로가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항아리를 갖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모습을 보게 했다. 모든 이집트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고 비탄에 잠겨있을 때, 사메니투스만은 아무 말도 없었고 미동도 하지않았으며 눈을 바닥에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처형당하러 가는 행렬 속에 자신의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뒤 그가 자신의 시종, 한 늙고 초라한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드러내는 온갖 표현을 해 보였다.”(역사 제 3 14)

 

이 이야기에서 헤로도토스는 사메니투스가 왜 슬퍼하였는지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지 않다. 판단과 해석은 오로지 독자의 몫인 것이다. 벤야민이 주목한 이야기의 미덕이란 바로 정보가 아니라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공백또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여백의 문제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만이 이러한 이야기의 미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뛰어난 소설과 대중매체 작품들은 자신의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감상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들을 고전이라 지칭한다.

 

종교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우리가 종교의 경전이라는 텍스트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절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대명령이거나 영원불멸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곱씹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왜 기독교와 이슬람, 불교, 힌두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종교였기 때문에? 아니다.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종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소위 세계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들이 경전이나 가르침을 통해서 전파하고자 한 이야기들은 인간에게 묵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기에 그 가르침과 경전에 무게가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 경전은 완성된 진리 및 정보가 아니라 인간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텍스트, 즉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파이가 두가지 이야기를 해준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그것은 어느 한쪽 버전의 이야기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닌, 두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보고서 말미에 ‘…그 어느 누구도 뱅갈 호랑이와 함께 오랫동안 표류해서 살아남지 못했었다라는 결론 역시도 중의적이 된다:파이는 그러한 끔찍한 재앙을 겪었음에도 야수성과 이성 어느 한쪽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라고.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경험했던 그가 영화 엔딩에 가족과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살아남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문학이나 예술, 더 나아가서 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이 감상을 끝마치기 전에 한 가지 궁금점이 남아있다:그렇다면 정글 속으로 사라진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 벤야민이 적절한 어구를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을 끝으로 이 감상을 끝마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살아 있다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게임 이야기





내일 지르러 갑니다.






게임 이야기





몬스터 헌터는 자체적인 장르 구분에 따르자면 '헌팅 액션 게임'이다:몬스터를 사냥하고 소재를 모으고 새로운 장비를 맞춘다. 그리고 더 높은 몬스터에게 도전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반복하는 것이 몬스터 헌터라는 게임의 특징이며 동시에 헌팅액션 게임 장르라는 분야의 공통 요소이다.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몬스터 헌터가 과연 이 모든 체제와 게임 구조를 만들었을까? 몬스터 헌터가 처음 몬스터 헌터라는 게임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어떤 게임을 참조하고 어떤 게임을 생각하면서 게임을 만들었을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개발비화 같은 것이 아니다. 현재 나온 몬스터 헌터 4G를 기준으로 몬스터 헌터 시리즈 및 헌팅 액션 장르의 근본이 되는 뼈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역으로 일본에서 유행하는 헌팅 액션 장르에서 게임 일반에 넓혀서 적용할 수 있는 법칙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몬스터 헌터가 다른 액션 장르에 비교해서 갖는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그것은 바로 '불친절함'이다. 몬스터 헌터는 다른 액션게임과 다르게 몬스터의 체력을 확인할 수 없으며 처음 잡는 몬스터는 그 패턴을 쉽게 인지할 수 없다. 또한 인터페이스는 불친절하고(왜 나는 퀵 슬롯으로 아이템을 못쓰고 아이템 벨트를 돌리면서 써야하는 아이템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조작은 불편하다. 하지만 여타 액션 게임들이 쉽게 화려한 공중 콤보를 만들어나가는 트렌드로 굳어지고 있는데 반해서, 몬스터 헌터의 무기 조작은 단순하며 화려하지 않다. 게이머가 10분 동안 되는 수렵시간 내내 사용하는 동작들은 고작 다섯손가락 내에 들 것이며, 몇몇 소재들을 구하기 위해서 수십 수백번을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몬스터 헌터는 트렌드에서 벗어난(실제로도 몬스터 헌터가 앞으로 세계적인 트렌드를 탈수 없으리라 보고 있지만...여기에는 복잡한 요인이 개입되어있다고 본인은 본다) 게임이긴 하지만, 중요한 점은 몬헌은 현재 성공적으로 프랜차이즈를 존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단순히 사람들이 노가다 하는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본인은 몬스터 헌터의 성공과 헌팅 액션 장르에 새로운 장르적 분석 기준을 끌고 오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격투 게임'이다.


혹자는 몬헌의 그 기묘하게 '느린' 페이스에 적응하지 못해서 게임에 정을 붙이지 못하겠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몬스터 헌터의 사냥 페이스는 묘하게 느리다:몬스터들의 동작들 대부분은 큼직한 예비동작들을 갖고 있으며, 게이머는 그 예비동작을 통해서 사전에 대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헌터의 동작 역시 크고 헛점이 많다. 많은 초보 헌터들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서 큰 피해를 보기 십상인데, 이는 항상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몬스터들의 꼬리치기 패턴은 시계 방향으로 180도 반경을 두번 휩쓰는 형태로 나타나며, 초보 헌터가 첫번째 꼬리치기만 보고 성급하게 들어가게 된다면 두번째 꼬리치기에 휩쓸려서 나가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헌터가 몬스터의 패턴을 관찰하며 이해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면, 헌터는 몬스터의 공격패턴의 헛점을 파고 들 수 있다. 


즉, 몬스터 헌터의 액션은 전적으로 '상대방의 수를 읽는 판단'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격투 게임과 많은 부분 유사점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격투 게임에서는 상대의 능력과 습관 및 케릭터의 성능을 파악하여 전략을 유추하고 이를 통해서 가드 시의 이지선다나 프레임 단위의 공방을 펼친다. 몬스터 헌터에서는 몬스터의 동작을 보고 후에 어떤 모션으로 이어질 것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어떤 틈이 생길 것인지를 판단하고 게임에 임해야 한다. 이 둘은 결과적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종국에 가서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면 그 판단이 일어나는 '시간적 텀'의 차이다:격투 게임에서는 프레임, 즉 60분의 1초에 해당되는 찰나의 순간 단위로 판단이 일어난다면, 몬스터 헌터라는 게임에서는 그 판단이 '의식적으로 인지할 수 있게끔' 늦은 타이밍으로 조절되어 있다.


그렇기에 몬스터 헌터이란 게임은 바로 이 '판단'을 학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진오우가가 충전중에 언제 머리를 들고 언제 해머로 내려쳐야 하는지, 그리고 그라비모스가 열선을 뿜은 후 화염 가스를 방출하는지를 보고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 리오레우스가 발톱으로 공격할 것인지 여부를 지속적으로 판단하고 파고들며 자신이 능동적으로 게임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게이머는 의도적으로 '틈'을 만들고 그 사이로 비집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게이머는 섬광구슬에 약한 몬스터에 대비하여 섬광구슬 및 조합분을 챙겨서 사냥에 임할 수 있으며, 또는 방어구 스킬의 조합을 통해서 몇몇 몬스터들의 성가신 패턴 자체를 원천 봉쇄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몬헌은 마치 논술 답안지와도 같은 게임이다:큰 틀에서 목표는 있지만 완벽한 정답은 없다. 게이머가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할수록(사고를 그 몬스터라는 문제에 맞출수록) 몬스터 헌터는 그들에게 보상을 선사한다. 어찌보면 '노력한 만큼 얻어내는'(물론 물욕템은 아니지만) 게임이 몬스터 헌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의 학습은 종종 기존의 게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순간들을 선사하기도 한다:헌터들이라면 대부분 기억에 남는 짜릿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죽음의 위기에서 한끝 차이로 피하는 브레스나 돌진, 진짜 필요한 순간에 칼같이 들어가는 경직 등등. 물론 이러한 경험들은 다른 게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경험들이다. 하지만 몬스터 헌터에서 이러한 경험들이 기억에 남고 또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이유는 게임 페이스가 느리다는 점, 게이머가 능동적으로 판단하며 게임에 적응한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격투 게임에서는 이러한 문법이 정교하게 짜여진 문법과 틀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초보가 적응하기 힘들다. 동시에 같은 대결이라는 테마를 갖고 있는 콜옵의 멀티의 경우, 죽음이 너무나 쉽고 무의미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순간 순간이 값어치가 있다고 하기 힘들다. 멋진 킬을 따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운은 금방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격투 게임 장르와 같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몬스터 헌터 및 헌팅 액션 장르가 갖고 있는 한계 역시 명백하다:그것은 바로 '대적자'의 문제이다. 어느정도로 어려운 패턴을 가져야 게이머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서 학습하며 재미를 느끼는 대적자가 될까? 이미 몬스터 헌터에서도 프론티어가 그나마 '상대적으로' 실패한 몬스터 디자인들을 몇몇 내보임으로서 몬스터 디자인이 쉽지 않음을 내비친다:무뢰룡 벨큐로스는 너무 기계적이고 난해한 움직임을 보였었다(꼼수는 초현실적인 의미로 기계적이었다...) 몬스터를 디자인하는 것, 더 나아가서 훌륭한 퀄리티의 몬스터의 수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몬스터의 패턴을 학습하고 공략하는 헌팅 액션 장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갖고 있는 헌팅 액션 게임이 몇이나 될까? 그나마 오랫동안 꾸준하게 시리즈를 내고 있는 갓이터 정도가 여기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그 갓이터 마저도 몬헌에 비해서 갈 길이 멀다고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몬스터의 디자인 및 게임 매커니즘의 구성측면에서 소위 헌팅액션 장르가 갖고 있는 매력과 한계는 대단히 뚜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이 감상 역시 모대학 과제 레포트로 제출된 것입니다.


사막의 라이온은 20세기 초기에 벌어졌던 이탈리아와 리비아 사이의 20년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실화이며 등장인물도 역사적 실존 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20세기 초, 당시 끊임없이 벌어졌던 강대국의 제국주의 전쟁은 아프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튀니지아를, 스페인은 모로코를 점령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1910년부터 리비아를 침공하였으나 29년까지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러자 무솔리니는 새 지후관 그라치아니를 파견한다.


한편 그의 상관 베드윈족의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로서 전직은 교사이며 적을 물리치는 것만이 평화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코란의 정신을 이어받아총을 들고 나선 탁원한 전술가이다. 이탈리아군에 의한 무자비한 양민학살이 지속되지만 무크타르는 사막전과 산악전에서 뛰어난 전술로 현대병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을 계속 패퇴시킨다. 평화라는 미명하에 작전상의 협상이 벌어지고 전쟁은 계속된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사막 수백 마일에 4천 명의 인부를 동원해 수천 톤의 철조망 작업을 행하영 베드윈족 5천명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하고 무크타르를 생포해 공개리에 교수형에 처함으로서 1931 9 16일 전쟁을 종결한다.


 사막의 라이온은 제국주의 열강 시기에 있었던 식민지 지역민들의 저항들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20년간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싸운 오마르 무크타르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전세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반 제국주의 비정규군, 파르티잔의 사례이자 표본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무크타르와 그의 반제국주의 파르티잔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중요한 구심점으로 내세운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는 이슬람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입증된 무력과 확장에 특화되어 있는 종교이기에 무장 파르티잔들의 전술적 교리로써 기능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효율적이며 제국주의적 폭력에 맞서 싸우는 평화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위한 지역민들이 내세울 수 있는 가치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종교는 지역민들의 문화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이는 이슬람이라는 문화가 이러한 파르티잔의 문화를 부추기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라는 구심점이 지역민들을 뭉치고 조직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한다:레바논 같은 이슬람-기독교 갈등 지역에서는 기독교 민병대가, 미얀마에서는 이슬람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도들이 무기를 들고 민병대를 조직한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라기 보다는 종교가 인간과 지역, 그리고 국가와 국가를 넘어서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사람을 조직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슬람 부흥의 역사가 정복전쟁의 역사,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이라는 화전양면 정책의 결과물로 보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교라고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만약 무력적이고 호전적인 확장만으로 이루어진 종교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될 리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발원했던 역사적인 특성상 코란과 교리에 많은 군사적이고 호전적인 부분들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당시의 맥락을 감안하여서 재해석하여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슬람 파르티잔들에게 있어서 아주 극명한 대립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렸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소련-아프간 전쟁 이후 그에 대립하였던 극단적 이슬람주의자 탈레반이다. 마수드는 아프간 전쟁 중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로서 압도적인 물량과 기술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무자헤딘들을 이끌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진정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답게 그는 저항하지 않는 자, 아이, 여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프간 전후 이후를 생각하며 여성의 교육과 권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수피즘 책을 들고다니며 읽는 등 다른 사상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에 반해 같은이슬람 원리주의자 탈레반들은 익히 알려진대로 수많은 인권 탄압과 유적 파괴, 학살, 테러 등의 행위를 자행하거나 방조하였다.


어떻게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두 집단이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주 세밀하지만 중요한 차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슬람은(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모든 종교가 그러하겠지만)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메시지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달하는 전통과 경전은 만들어진 그 시대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전통과 경전이 만들어진 시대가 갖는 권위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막는 닫혀있는 폐쇄적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문제는 종교의 본질은 장소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매세지 그 자체이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경전과 전통은 그저 눈에 보이는 무언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경전이나 그 어떤 텍스트, 이야기, 전통 등은 현재 시대의 맥락에 따라서 재해석되고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경전에서 메시지 그 자체를 재해석해서 발굴해내지 않는 한, 경전에 적혀있는 가르침은 책 사이에 끼워져서 향기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재해석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곡해의 가능성을 수반한다.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슬람-레반트 국가, 통칭 IS가 코란의 말씀대로 어린이 십자가형, 성노예, 대량 학살 등을 자행하고 있으며 분명 코란에 조항 자체로도 어긋나는 행위도 포함되는데도 이를 행하는 것은 이러한 곡해의 문제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균형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오마르가 이야기했었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했듯이,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실, 율법과 가르침 등의 사이에서 능동적인 균형을 맞추는 게 가능하다면 종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더 이상 사람의 삶을 구속하는 기제가 아닌 삶의 구심점이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아흐마드 샤 마수드들의 말을 인용하며 끝마치고자 한다.

 

 

어떻게 아이와 여자를 죽이는 것이 지하드란 말인가?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이 감상문은 모대학 과제 레포트로 제출된 것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영화는 먼저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우에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가 폴란드계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러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 담배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을 인수하고, 인건비 한푼 안들이고 유대인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대인 회계사인 스턴의 도움을 받아 공장을 운영하여 큰 돈을 벌게 된다. 쉰들러는 성공가도를 달리며 큰 돈을 벌게 되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 행위를 목격하게 되면서 그는 바뀌게 된다.


그러한 쉰들러의 현실 직시는 마침내 그의 양심을 움직이고 유대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 일명쉰들러의 유대인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였는데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구해내기로 계획을 잡는다. 그리고는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코우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스턴과 함께 유대인 명단을 만들게 된다. 그러한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1,100명의 유대인을 폴란드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쉰들러 리스트는 훌륭한 휴먼드라마이다. 자극없이 절제된 이야기와 카메라 워크, 그리고 흑백의 모노톤을 통해서 빛바랜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도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갖고 있었던 껄끄러움이 쉰들러 리스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살아남은 평범한 미국인 라이언 일병이 살았던 다사다난한 미국을 어떻게 보았을 것이며, 특히 베트남전이라는 불의를 그가 어떻게 보았을까? 이를 쉰들러 리스트에 역으로 적용하여 본다면, 학살의 아픔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은 레바논 전의 샤브라-샤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이나 중동전쟁의 역사를 어떻게 보았을까?로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치가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를 팔레스타인을 위시한 주변국가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다. 팔레스타인과의 연이은 충돌, 혹은 레바논전 당시의 샤브라 샤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 등등 되찾은 시온의 역사는 그들이 발 붙일 땅을 찾는 과정에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주변국에게 투영하여 돌려주려 하는 것 마냥 잔혹하며 무자비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혹자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성향을 자신의 땅을 떠나 2000년간 전세계를 떠돌아다녔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역사에 비추어 볼 것이다. 유대인들은 2000년 동안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곳에 뿌리를 내렸음에도 유대인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수많은 민족들과 부족들이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감에 따라 사라져갔지만, 유대인은 그들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그들의 종교와 가르침에 기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가라타니 고진은 유대교는 최초로 국가와 사회가 멸망해도 살아남는 신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고 평가한다) 혹은 유대인이 유럽이라는 세계에서 타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결국은 그런 강력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아무도 하지 않는 고리대업을 하면서 유대자본을 형성하고 강력한 경영정신으로 무장한 상인 집단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쪽이든 간에, 유대인이란 유럽을 넘어서 오랫동안 전세계의 타자였었다. 그들은 동화되지 않으면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던 민족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타자로서의 유대인이 갖고 있는 특수성은 우리 아닌 것에 대한 적개심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례로 수업시간 중 일부 감상한 지붕위의 바이올린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전통과 전통바깥의 존재들, 예를 들어 황제라든가 외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외부자에 대한 폐쇄적인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떤 사회이든 경직되면 경직될수록 외부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믿음처럼, 자신들은 하나님에게서 선택받았으며 언젠가 그들의 땅을 수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외부의 사회에 대해서 나 이외에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사고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그들이 2000년 동안 돌아가기 원했던 가나안의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물으면 본인은 그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유대민족은 다시 돌아왔지만 돌아온 이후로 지금까지 주변국과 수많은 민족의 피와 눈물을 흩뿌리며 그 땅을 지켜내고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고향에서 그들은 완벽한 타자이다. 그들이 떠난 뒤 2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의 고향에서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상식적으로 본다면 이들이 원주민이겠지만)을 몰아내고자 하고 있기에 그들 자신이 바로 그들의 고향에 있어서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자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비극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유대교의 내부에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이 왜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는가?’라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유대인이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을 특별한 이유또는 서사적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그저 그들은 선택받았기에 선택받은 자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스스로 선택받았다고 믿음으로서 유대인은 유럽 역사와 사회에 있어서 타자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유대인만이 유럽 사회에 있어서 단 하나뿐인 타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럽 사회에는 집시가 있었다, 현명한 여자(Witch)가 있었다, 장애인, 고아, 과부, 정신병자 등등의 다양한 타자가 있었다. 타자들은 사회에서 무력하게 우리 집단 또는 다수 집단으로 포섭되고 배제되어 왔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그들 자신으로 남아있었으며 이는 사회 윤리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사회나 집단은 항상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자신과 똑같은 색으로 물들이고자 한다. 다름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며 배격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은 그 다름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고, 감내하며 인고하여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고난의 역사는 확장하여 본다면 전세계의 소수자들과 타자들의 역사. 발터 벤야민이 역사에 있어서 비상상황이란 없었다. 역사는 언제나 비상상황이었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주장하였던 것은 2차세계대전이 갖고 있었던 유일한 잔혹성이 아니라 전세계 역사에 내포되어있었던잔혹성 자체였었다. , 유대인의 역사는 유대인만의 역사가 아닌 전세계가 타자를 향해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라는 것으로 비추어볼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유대인이야말로 타자의 운명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사명을 띄고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전세계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재판을 했어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의 법정이 아이히만을 유대민족만을 위한 광대와 괴물로 만들고 있는 동안, 유대인 학살이 갖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 ‘사회에 소속되지 않은 타자를 향해서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배제를 도외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쉰들러 리스트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타자와 함께 살기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카 쉰들러는 성인도, 지식인도, 위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전쟁으로 한탕 벌어보려고 했었던 부패한 상인이었으며 여자와 돈을 밝히는 속물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그가 벌었던 전재산을 쏟아부어가면서 1100여명의 유대인을 구하고, 패전 후 도망치기 전에 자신들이 구했던 사람들 앞에서 이 금뱃지로 두명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이 차로 열명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라고 울부짖는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그는 확연하게 변하였다:그것은 바로 그가 유대인 학살의 아픔에 공감하였다는 지극히 단순하며 인간적인 능력에 기초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스카 쉰들러가 보여주는 것은 선의 평범성의 개념이다.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악의 개념과 다르게, 오스카 쉰들러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믿음이나 엄격한 도덕적 잣대, 혹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겪었던 수천년의 고난에 대해서, 더 나아가서 유대인과 유대교가 걸었던 수난의 역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바로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산다는 것이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과 세계 곳곳에서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비극들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스라엘에 묻힌 오스카 쉰들러의 묘비에 적힌 어구를 인용하며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오스카 쉰들러는 흔해빠진 기회주의자요 부패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거대한 악이 세상을 점령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악에 대항해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귀족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아닌 부패한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였다.

 

그의 영혼에 안식과 축복이 있기를.



게임 이야기



데이 제로 에디션으로 일찍 플래이하고 있습니다.

스토리적으로 상당히 재밌는 부분이 많기에 글로 쓰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라고 해도 이번에도 날로 글을 먹내요. 낼름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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