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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최근 대한민국 게임 시장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동향이 있다:한글화 타이틀이 2~3년전에 비교하여 보았을때 꾸준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GTA5와 위처 3의 한글화에서부터, 한글화에 소극적이라 악평이 자자했던 코에이 테크모 게임인 토귀전 극의 한글화, 슈타인즈 게이트나 로보틱스 노츠 등의 비주류 게임에서부터 심지어는 바운드 바이 플레임이나 로드 오브 폴른 같은 덜 메이저한 게임들까지 한글화가 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불과 2~3년전의 상황에 비추어보았을 때는 도저히 예측하지 못했던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2~3년 사이에 무슨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재밌는 점은 자사 플랫폼을 유지하기 위해서 트리플 A게임들을 한글화 했었던 기존의 경향과는 다르게(마이크로소프트 코리아의 헤일로 나 SCEK의 언차티드의 한글화를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독점작의 한글화를 통해 사람들이 자사 플랫폼을 구매하고 유지하게 만든다), 현재의 흐름은 로컬 유통사라는 규모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글화가 기존의 유저들을 유지하기 위한 플랫폼 유지의 밑지고 보는 투자적 개념에서, 게임을 한글화해서 한글화 비용 및 기반 제반 비용, 더 나아가 수익까지 보장할 수 있다는 수익 창출의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흐름이다:즉, 가시적인 측면에서 정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이 한국 시장내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며, 유통사들은 자신들의 내부 자료를 근거로 한글화가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인터넷 상에서 자신들이 불법복제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공격하였기에, 그렇기에 불법복제의 수가 유의미하게 줄어들고 불법복제 소비자가 양지로 기어 나와 유의미한 정품 수요로 변화하였다고 평을 할 수도 있다:이는 완벽한 넌센스다. 불법복제-정품 구매의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대체하는 대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불법복제-정품 시장이 겹쳐져 있는 회색 지대의 문제다. 복돌이들이 정품을 구매하기도, 정돌이들이 복돌짓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품을 사서 써야한다는 인식과 지적재산권이나 소프트를 제값을 주고 구매를 해야하는 것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식과 별개로 사람은 편의를 쫒아서 움직이는 생물이며, 자신의 편함을 쫒아서 소비를 한다. 그것은 비단 정품-불법복제를 가리지 않는다. 스팀의 경우처럼, 불법복제를 정품의 구매 사용이 편의 측면에서 압도하고, 불법복제는 줄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할 때 불법복제를 능가하고 판매량을 올릴 수 있다. 즉, 얼마나 불법복제로부터 차별화된 전략을 취하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불법복제가 도덕적으로 옳다던가, 불법복제가 현명한 소비자의 판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의 비난에 매몰되어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혹은 우리가 그 도덕적 잘못에 너무나 많은 가치와 비용을 소비하고 보아야 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에서 이 글은 출발하고 있다.)


일단 복돌이들이 양지로 나와서 판매량이 늘고, 한글화가 된다는 가설은 치우도록 하자. 하지만 그렇다면 이 새롭게 나온 소비자들의 숫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이 소비자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라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나왔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즉, 새로운 수요란 게이머들이 새롭게 유입되거나 전환된 것이 아닌, 기존의 게임 소비자들이 경제력을 갖기 시작했다라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게임이라는 문화는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부터 한국에 들어왔으나, 그것이 메인스트림이 된 것은 90년대 후반 PC방 문화와 스타크래프트 등이 등장해야 했었다. 그리고 PC방이란 공간의 특성과 주 소비층이 학생층이었다는 것을 같이 감안하여보자:PC방은 게이머가 PC방이라는 공간에서 시간 단위로 게임을 플래이하고, 소비하는 공간이다. 게임은 구매와 보유의 상품이 아닌, 특정한 공간에서 짧은 시간으로 공유되는 무언가였던 것이다. 또한 여기에 게임에 대한 기성세대의 선입견이 겹치면서, 게임은 집과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간으로 침투할 수 없고, 그 주변을 맴돌게 된다.


(이는 어찌보면 복돌의 문제를 설명하는데도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는데, 주 소비계층이 게임을 살 경제력이 없기에 사지 못한 것도 있지만, 게임을 살 문화적 '환경'자체가 조성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을 소비하는 계층이 나이가 들고, 경제력을 갖고, 동시에 기성세대의 잔소리를 견뎌내거나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위치에 도달하는 시기가 온다:재밌는 것은 PC방과 스타크래프트의 성공으로 게임이 보편적인 문화가 된지 10년 정도 지난 지금에서, PC 게임 시장과 함께 콘솔 게임 시장도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스타크래프트와 PC방에서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문제가 된 것은 '시간'의 유연함의 문제인 것이다:그들은 이제 직장을 다니는 등 시간을 운용하는데 있어서 학생 때와 다른 큰 제약이 생기게 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게임을 PC방이라는 집 바깥의, 공적인 장소가 아닌 사적인 장소로 끌어들이게 된다. 동시에 문화적인 허들 역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이상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탄압받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적어도 지금은 게임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는 시대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과연 '게임을 하는 계층이 나이가 들고 경제력이 생기고,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기에 게임 구매의 수요층이 늘고, 그것이 한글화로 이어졌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하지만, 근래 10년 간, 우리 게이머들이 무의식적으로 무시했었던 중요한 문제가 있다:게임을 하는 사람의 수는 4, 5년전의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로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임을 전혀할 것 같이 않은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가볍게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긴다:노인들이 드래곤 플라이트를 하며,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분들께서 애니팡을 한다. 즉, 게이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반대자들에게 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잠재적 우군 또는 게임을 하는 공범들에게 둘러싸여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글화 흐름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해보자:전통적인 게이머-非게이머의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게임이라는 매체를 얼마나 코어하게 잡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예를 들어서, 한때 오락실을 재패했었지만 현재 관점에서 상당히 하드코어 하다 할 수 있는 철권 태그 토너먼트 같이, 과거에는 게임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코어 게이머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게임을 편하게 즐기는 게이머들, 캐주얼 게이머들의 등장으로, (코어)게이머와 非게이머의 구분은 점점 의미가 없어지며 '회색지대'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이는 시장을 더욱 변화무쌍하게 만들었다. 즉, 스마트폰 게임들은 게임 산업에 하나의 '열린 창문'을 만들었다고 봐야한다:캐주얼 게이머들이 늘어가면 늘어날수록, 게이머라는 계층의 절대 숫자가 늘어난다. 동시에, 게임에 노출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게임에 대한 심리적인 허들이 내려가고, 다양한 관심과 수요들이 생겨나게 된다. 퍼스트 파티 한글화를 넘어서 트리플 A게임에서 잡스러운 게임들까지 한글화되는 것도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게이머의 절대 숫자가 늘어나고, 다양한 게임에 노출되는 사람이 늘어날 수록, 다변화된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만큼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한글화의 열풍은 주 소비 계층이 경제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을 넘어서, 시장 자체의 절대적인 숫자의 확보, 게임 자체가 하나의 여가이자 문화로써 자리잡기 시작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얼마전 소니에서 PS4 1000만대 판매 돌파를 자축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성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분석을 하지 못했다는 기사가 떴었다. 이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크게 놀랍지는 않다:스마트폰 게임들은 기존의 게임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는 게임 시장을 잠식하기는 하겠지만), 오히려 게임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게임을 하게 만들고, 게임에 관심을 갖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기존의 시장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 유동적인 회색지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PS4 1000만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란걸 감안해보면 알 수 있다"Xbox One이나 Wii U 같은 2, 3인자도 500만대, 700만대의 총 판매량을 확보하는 등 전세대와 비교하여보았을 때 비교불가능한 성과를 내고 있다.(물론 PS4가 Wii U의 소비자나 엑원의 소비자를 흡수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동기간 대비 판매량이 늘어났다는 사실로부터 증면되는 시장이 커진 사실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게임에 대한 심리적인 허들은 내려가고, 게임은 삶의 일부분으로 점점 침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기존의 시장논리와 문법이 통용되지 않는 새로운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며, 이는 5~10년 내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게임산업 자체가 아주 크게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게임 이야기




베요네타라는 케릭터는 어찌보면 데빌 메이 크라이의 단테라는 케릭터의 거울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쿨시크하게 넘겨버리며 댄디즘을 추구하는,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무국적 무인종의 남자 단테, 그 대칭에는 비슷한 컨셉을 이어받으면서도 섹스어필과 섹스에 대한 테마를 케릭터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베요네타가 있다. 둘이 지향하고 있는 지점은 남성적인 극단과 여성적인 극단이라는 정반대이지만, 이들은 수직선상의 대칭되는 지점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수직선은 '현실에는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관념적인 케릭터성의 구현'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살아있는' 케릭터들이 아니다. 케릭터들이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관념들을 어느정도 반영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는 익히 많이 봐왔다. 하지만, 케릭터들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다:케릭터들에게는 드라마가 있고, 사람들이 케릭터에 공감하고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며, 이는 게이머에게 케릭터가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지점으로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베요네타와 단테는 그런 감상자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지점에서 벗어나있다(물론 게임 내에 서사가 없다든가, 그들이 몰개성적이라든가 매력적이지 않다든가 감정의 이입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그들을 감상하게 만드는 무언가에 가깝다. 예를 들어보자:데빌 메이 크라이 4에서 단테는 무기 루시퍼를 얻고 난 다음 곧바로 루시퍼를 이용해서 장난스럽게 석판을 파괴하는 장면이나, 뜬금없이 보스와 함께 햄릿의 한 장면을 연극풍으로 재현하는 등 스토리나 드라마 부분에 있어 논리적 정합성에 떨어지는 행위들을 자주한다. 베요네타 역시도 그런 비정합적인 행위들을 게임 내에서 많이 보여주며,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자신의 가짜와 함께 댄스 배틀을 벌이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드라마를 구축하지도 않고, 서사를 구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행위를 이들은 하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행위들은 상당히 재밌는 부분이 있다:바로 이 둘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장르 구분' 자체다. 데빌 메이 크라이가 목표로 삼는 '스타일리쉬 액션'이라는 장르와 베요네타가 목표로 삼는 '논스톱 클라이막스 액션'이라는 장르는 언뜻보면 그 개념 자체가 와닿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스타일리쉬 액션 장르와 논스톱 클라이막스 액션 장르가 무엇인가? 이게 전통적인 게임 장르 구분과는 다르게 유의미한 차이점이 존재하는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데빌 메이 크라이나 베요네타가 만들어내는 게임 장르의 구분은 일반적인 장르 구분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구현해내고자 하는 '콘셉트'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데빌 메이 크라이는 액션 어드벤처 게임 최초로 적을 띄우고 농락하며, 화려하고 '스타일리쉬'하게 적을 상대한다라는 개념을 실현한 게임이다. 그리고 베요네타는 강력한 회피와 슬로 타임, 그리고 쉬운 무기 사용과 캔슬 등의 개념을 게임 시스템에 삽입함으로써, 유연하고 화려하며 쉬운 액션, 매순간 순간이 '클라이맥스'인 액션을 구현하였다. 즉, 이들이 스스로를 규정내리는 장르 구분은 자신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전체 게임의 콘셉트 그 자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그들의 목표에 단테와 베요네타라는 케릭터를 대입하여 보았을 때, 이들 케릭터들이 비정합적이로 취하는 행동들, 황당한 행위들은 그 케릭터와 이를 둘러싼 드라마를 구축하려는 행위가 아닌, 게임 자체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콘셉트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단테는 멋진 인간이며, 보스와 함께 햄릿 연극의 일부를 재현하는 허세를 부림으로써 자신이 강하고 멋지고 유쾌하다는 것을 드러내며, 그것이 게임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한다. 베요네타는 역시도 섹드립과 특유의 색기를 통해서 남성 케릭터가 가질 수 없는 나긋하고 유연함을 보여주며, 이것은 게임의 가장 중요한 시스템인 회피와 회피 시에 발동되는 위치타임과 함께 '유연하며 화려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분위기를 구축한다. 즉, 어떻게 본다면 이들 둘은 게임이라는 큰 틀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밌는 점은 단테와 다르게 베요네타만이 갖는 싸우는 여전사로써의 독특한 위치일 것이다:'싸우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여성이 남성 없이도 스스로 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는 동시에, 그런 강인한 여성이 괴롭힘 당하고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것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기제로도 작용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성적인 독립성과 성적인 종속감이 싸우는 여전사의 이미지를 두고 공존했으며, 이는 소위 '방어력 높은 갑옷'이라 불리는 헐벗은 갑옷으로 드러난다:그녀들은 싸우지만, 갑옷으로써 가치가 전무한 갑옷을 입고 있다. 이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이런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을 위함이다. 즉, 싸우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보통 서로 모순되는 두 경향이 충돌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베요네타는 다르다. 베요네타는 오히려 그 점에 있어서는 당당하게 정문을 박차고 들어간다:온 몸에 꽉끼는 타이즈를 입은 이 치녀 콘셉트의 여전사는, 사실은 안경 이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습니다(옷이 머리카락이니까) 라든가 애보다 애만드는게 좋아(섹스가 좋아)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해서 다른 케릭터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등 강한 섹스어필을 지향한다. 하지만, 그것이 싸우는 여전사가 빠지는 클리셰와 모순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싸우는 여전사가 강인한 여성이라는 점을 어필하면서도 끝내는 남성적 욕망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운명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면, 베요네타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남성적인 욕망이 아닌 게임이 취하고 있는 거대한 콘셉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취하는 치녀 콘셉트는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그로부터 그녀를 해방시킨다:섹스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알몸으로 싸우지만 당당한 여전사. 킬라킬에서 키류인 사츠키가 '나, 키류인 사츠키, 대업을 위해서라면 알몸으로 싸워도 거리낌없다!'라고 외쳤을 때처럼(사실 킬라킬이야말로 이러한 테제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베요네타를 둘러싼 노골적인 섹스 코드들은 '나는 내 소비자에게 나를 보여줄 필요가 없으며, 이 모든 것은 나 그 자체이기에 나는 떳떳하다'라는 선언 하에서 그녀의 멋을 한층 더 강화하는 무언가가 된다. 


이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대중이 은밀하게 요구하는 '창녀이면서 처녀인' 이 모순되며 왜곡된 관념에 대해서, 이들을 가장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완벽하게 깨부수는 자들이 이론적으로는 창녀이면서 처녀인 무언가에 가깝다는 것이다. 


베요네타 2는 9월 20일에 Wii U 독점으로 발매된다.




게임 이야기







스마트 토이 시장(정확히는 콘솔과 피규어의 결합)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게임이
액티비전의 스카이랜더스와 디즈니의 인피니티,
이렇게 두개가 있는데, 지금 어느쪽이든 닌텐도의 아미보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혹은 이것을 다른 스마트 토이와 비교해서 볼 수 있을 것인지, 어떠한 형태의 컨버전스인지에 대해서
다뤄보려면 어느쪽이든 하나를 사서 해봐야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토이박스 모드는 재밌고 피규어는 완성도가 높은데 정작 게임이 애매하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
지금 고민이 좀 많네요. 걍 사지말고 넘길까 하는 생각도 들고...





게임 이야기




게임스컴 2014 소니 컨퍼런스에서 공개된 P.T.에 대해 사람들은 처음 그 의미를 모르고 지나쳤었다:깜짝 놀라는 사람들의 영상을 편집한 것에 불과했었던 P.T.의 소개 영상과 '지금 당장 PSN을 통해서 풀립니다'라고 이야기한 뒤, 그게 끝이었다. 물론 코지마 히데오가 나와서 팬텀패인에서 박스로 장난치는 영상을 소개해서 좌중을 포복절도하게 만든 뒤에 씨익 웃으면서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뭔가 위화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코지마가 사람들을 웃기게 하려고 컨퍼런스에 등장한 건 아니었을텐데 라고 말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P.T.가 사실 사일런트 힐의 '플래이 가능한 티저'(Playable Teaser)의 약자였으며, 메탈기어의 코지마 히데오와 퍼시픽 림을 만든 기예모르 델 토로, 그리고 쟁쟁한 게임 디자이너들이 게임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네트를 발칵 뒤집어넣는데 성공한다.


(재밌는 점은 코지마 히데오는 사일런트 힐 신작이 오픈월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기예모로 델 토로는 게임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과거 THQ와 함께 만들려 했었던 인세인을 오픈월드 호러 게임을 만들려고 했었다고 한다. THQ가 인세인을 엎은 이후, 인세인과 관련된 자료는 델 토로의 소유로 넘어갔는데, 인세인의 컨셉들이 사일런트 힐 신작의 컨셉에 접목되어서 오픈월드 호러 게임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라고 점쳐볼 수 있다.)


하지만 오랜만의 사일런트 힐 신작이라는 기쁨을 제쳐두고, 우리는 중대한 질문을 P.T.에 던져야 할 것이다:어째서 플래이 가능한 '데모'가 아니라 플래이 가능한 '티져'인 것일까? 우리가 익히 접하는 게임이나 영화의 '티저' 마케팅이란, 작품이나 서비스 정보의 극히 일부분만을 내놓고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추측하거나 생각하게 만드는 마케팅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케팅들의 대부분은 다소 생뚱맞은 사진과 영상, 정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정보들은 부분으로서 전체를 추측할 수 있는 퍼즐 조각으로서 작용된다. 이 퍼즐 조각은, 티저 광고를 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대처하게 만드는데, 티저 마케팅의 강력한 힘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라는 능동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티저 마케팅은 사진, 단문, 영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통념이기도 하다. P.T.가 깨부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이 통념 그 자체이다:게임이 플래이되고 경험되는 것이라면, 왜 그것을 하나의 '티저'로 만들지 못하겠는가? 이는 데모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데모는 재현Demonstration의 축약으로서, 게임의 축약이자 핵심을 구현하고 게이머로 하여금 '데모는 이러했으니 게임도 이러할거야/이거 이상으로 재밌을거야'라고 믿을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P.T.는 다르다. P.T.가 축약해서 구현하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게임 그 자체가 아니다:사람들이 P.T.를 하고 가장 혼돈스럽게 느끼고 있었던 지점은 P.T.가 전통적인 사일런트 힐 시리즈의 3인칭이 아닌 1인칭으로 구현되었고, 이것 때문에 사일런트 힐 신작은 1인칭 게임이 되는게 아니냐 라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매체들에 의해서, 사일런트 힐의 신작은 전통적인 3인칭 호러 액션 게임이 될 것이라고 확정되었다.


(덧붙여서 요즘 시대에 데모는 더이상 '데모'라는 한계에 얽메여있지 않기도 하다:데모를 풀어놓고 거기서 유저들의 피드백을 받아 게임 조정을 가하는 광경은 이제 흔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브레이버리 디폴트나 프리덤 워즈, 토귀전 등의 게임들은 게임을 내놓기 전에 데모를 내놓고 게이머들의 피드백을 받아서 이를 최종판에 수정을 가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데모와 베타 등의 개념은 퇴색하고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이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티저 게임 광고는 P.T.가 아니다:기억하실지도 모르겠지만, 포탈 2에서 슈퍼 에이트의 티저 광고를 게임의 형태로 삽입하기도 했었고, 그 이전에도 티저형태의 게임들은 분명하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슈퍼 에이트의 경우, 그것이 게임의 형식과 시너지를 일으킨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며, P.T.의 경우 게임 내적인 특징과 외적인 특징이 맞물려서 역사상 전례가 없는 독특한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P.T.는 1인칭으로 제작되었는가? 일단, 왜 1인칭으로 만들어졌는가에 관하여 밑에서 다루기도 하겠지만, 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대답은 P.T.는 티저 게임이 아니라 데모 게임이라는 것이다:데모는 게임플래이의 핵심을 데모를 통해서 구현을 했어야 했었다면, 티저 게임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게임플래이를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P.T.는 앞서 이야기했던 티저 마케팅의 일부로써,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떤 물건인지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사일런트 힐 신작이 어떤 게임인지에 대한 컨셉을 언뜻 내비치는 것이 본질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P.T.는 훌륭하다:기존의 사일런트 힐 시리즈가 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내면이 반영된 그로테스크한 공간(사일런트 힐 2와 그 정신적 계승작들)을 강조했었고, 이는 P.T.에서 핵심을 관통하여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임은 어두침침한 복도와 방을 루프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게이머는 끔찍한 사건과 그에 관련된 죄를 직시 전까지는 이 루프를 깨뜨릴 수 없다. 그리고 죄의 증거들은 게임 처음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일가족 살인 사건를 다루는 라디오의 뉴스와, 그 살인의 증거들(만지면 총맞은 것처럼 자국이 나는 사진이라던가, 유령의 독백, 벽의 낙서들 등등), 배회하는 여자 유령과 새면대 속의 태아처럼 보여지는 핏덩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플래이어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드는 피묻은 냉장고 등등의 다양한 형태로 구현되며 게이머를 압박한다. 하지만 이는 일직선의 진행이 아니다. 오히려 P.T.는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루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끔찍한 공포와 마주할 것을 강요한다. 이러한 진행 방식은 기존의 트리플 A 게임으로 불리는 대규모-전문화된 게임 문법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콜옵의 경우, 게이머는 일직선의 복도형 스테이지를 따라 전진하는 것만으로 게임을 클리어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스테이지의 구조 대신에, 게임은 다양하고 화려한 볼거리를 집어넣음으로써, 이 단순한 구조를 숨기려고 노력한다. P.T.는 바로 이 문법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스테이지 구조는 매우 단순하며, 그것을 복잡하게 하려는 시도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단순성을 극대화해서, 게이머로 하여금 문을 열고 다음 복도로 나가는 것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이를 통해 게이머는 단순한 스테이지 구조 속에 숨겨진 디테일에 주목해야한다는 것을 학습한다. 그리고 복도에 머물면서 다양한 죄와 살인, 비극의 증거들을 보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상현상들을 통해서 공포를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동시에 한 가족이 맞이했어야 했었던 비극에 대한 묵직한 여운을 준다. 이는 최근 악의 넘치는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이블 위딘과는 다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블 위딘은 과거 호러 게임들의 악의들, 예를 들어 그로테스크하게 변형된 신체와 뇌를 후벼파는 듯한 컷씬의 구도들을 통해서 F.E.A.R.나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들의 악의를 계승한다. 하지만, P.T.는 그런 뇌를 후벼파는 악의가 아닌(물론 놀라게 만드는 것도 있다),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게이머는 폐소공포증이 느껴지는 복도를 뱅뱅 돌면서 나가려고 시도하지만 나갈 수 없다. 그리고 게이머가 뭔가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무겁게 짓누르는 분위기의 근원, 공포의 핵심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러한 구조는 이미 사일런트 힐 2에서 구현된 게임 서사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점들에서 P.T.가 1인칭으로 만들어지고, 기존의 트리플 A게임의 공식을 부정하는 이유가 드러난다:P.T.가 근거하고 있는 지점들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인디 호러 게임들이다. P.T.를 통해서 드러내는 사일런트 힐 신작의 컨셉은 일직선의 진행과 맞서싸울 수 있는 공포 등이 아닌, 피하고 싶지만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끔찍한 진실과 공포,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와 마주하고 살아남는 것이 핵심이며, 이는 최근 인디 호러게임들의 흥행과도 맞닿아있다. 재밌는 점은, 10년 전에 사일런트 힐 2가 뿌렸던 호러의 씨앗이 트리플 A 게임 등에서는 점점 사그라들고 인디 호러게임들로 계승되더니, 이제는 그것이 역으로 다시 트리플 A 게임으로 이식되어 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코지마가 인디 게임의 조작감을 떠올리며 P.T.를 만들려 했었다고 이야기한 것은, 사일런트 힐 2라는 게임의 적통을 이었던 게임들이 사일런트 힐 시리즈가 아니라 역으로 인디 호러게임들 쪽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암네시아, 페넘브라, 디어 에스더, 좀 더 하드한 쪽이긴 하지만 아웃라스트 같은 게임들까지. 그리고 이러한 게임들의 코드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1인칭이라는 시점까지 계승함으로써, 더욱 발전된 방향으로 게임을 만들고자하는 노력을 P.T.를 통해서 강력하게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P.T.가 홍보에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PS4라는 플랫폼의 강점 덕분이었다:PS4는 트위치에 기반한 방송 기능을 모두 탑재하고 있다. P.T.를 플래이하는 게이머는 단 한명 뿐이지만, 방송을 통해서 게임 플래이를 보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그 수의 제한이 없으며, 이를 통해서 플래이 가능한 티저는 플래이어를 넘어서 수많은 대중들을 향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사일런트 힐 신작은 발매일정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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