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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일까지는 글이 띄엄띄엄 올라오겠네요.


무더운 여름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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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비타판을 기준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대략 10시간 전후 플래이, 미션 모드 100여개 이상 클리어, 노말 아케이드 모드로 클리어 한 뒤의 감상을 토대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부족하거나 문제가 있는 점이 많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니,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베리어블 시리즈는 대전 액션 게임 프랜차이즈로서, 캡콤에서 자사 게임의 케릭터들과 다른 회사의 케릭터들이 대결하는 일종의 드림매치 형식의 게임이다. 첫 작품인 액스맨 대 스트리트 파이터 라든가, 캡콤 대 SNK 시리즈, 캡콤 대 타츠노코, 그리고 여기서 리뷰하고자 하는 마블 대 캡콤 시리즈의 최신작인 얼티밋 마블 대 캡콤 3까지, 배리어블 시리즈는 꾸준하게 발매되고 사랑받아왔던 시리즈였다. 특히, 마블 대 캡콤 시리즈의 경우, 배리어블 시리즈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며, 밸런스가 엉망진창이었던 마블 대 캡콤 2가 2000년에 발매된 이후로 3편이 나올때까지 꾸준하게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10년만의 신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3편이 갖는 부담감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마대캡 3는 훌륭한 격투게임 작품이며, 게임 시스템의 허들을 낮춤으로서 벨런스를 괴이하게 맞춘 작품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밸런스는 크게 맞아떨어진다 볼 수 없지만, 대인 플래이가 주가 되는 격투 게임 장르 특성이 역으로 AC 북두의 권 격투 게임처럼 꼼수와 케릭터 조합, 그리고 즉사 패턴 등 기존의 게임이었다면 밸런스 파괴로 규정되었을 법한 요소들이 발견되고 연구되어 역으로 거의 대부분의 케릭터들이 사용되는(최근에는 케릭터 조합이 고정화되고 있다지만)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게임의 시스템이 단순해지고 접근하기 편해짐으로서, 초보들도 쉽게 어디서나 즐길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마대캡 3의 기본적인 진행은 일반적인 격투게임과 비슷하다:게이머는 게임 내의 케릭터들을 3명 선택하고 조작해서 상대를 공격하고 콤보를 이어나가며, 그리고 상대팀을 쓰러뜨리면 된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약-중-강 공격 버튼을 순차적으로 누르는 것만으로 콤보를 이어나갈 수 있으며, 동시에 에어리얼 버튼을 따로 설정함으로서 약-중-강-에어리얼-공중 콤보 시동이라는 단순하고 편한 콤보 발동 및 연계가 가능하다. 심지어, 점프 입력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이, 에어리얼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음으로서 자동으로 상대를 추적할 수 있다. 콤보 루트나 공식 역시 상당히 단순하며 많은 수의 케릭터들이 공통의 콤보 루트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초보자는 몇몇 케릭터를 조작해보고 다른 케릭터의 조작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어떤 게이머들은 케릭터들의 개성이 너무 없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지만, 케릭터 간의 개성과 차이점이 너무 과도해서 게임에 하나의 장벽을 만들어내는 블래이블루/길티기어 시리즈와는 다르게 공통점이 많기에 접근하기 쉽다는 점, 그리고 미세하지만 모션의 차이점이나, 그리고 필살기나 특수기의 활용에 있어서 차이점들이 겹치면서 케릭터 간의 특징을 뚜렷하게 구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대캡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3명의 케릭터를 하나의 팀으로 짜서 게임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 팀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것은 마대캡 3에 있어서 핵심이자 기본이라 할 수 있는데, 팀과 어시스트의 종류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게임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KOF 시리즈의 스트라이커 개념과 유사한 어시스트의 개념(어시스트는 별도의 자원을 소모하지는 않지만, 짧은 쿨타임이 존재한다)으로 콤보를 이어나가거나 상대를 견제할 수 있으며, 게임 도중에 케릭터를 교체할 수 있는 태그 기능을 이용해서 케릭터들의 체력을 관리하고(교체하면 손실된 체력분을 천천히 회복한다) 상대 케릭터에 맞는 카운터픽을 고를 수 있다. 또한 강제로 교체를 유도해서 체력 회복을 막고 상대에게 불리한 싸움을 강요하는 스냅백의 존재라던가, 공중에서 태그하여 콤보를 이어나가는 팀 에어리얼 콤보 개념 등등 마대캡 3의 특징적인 시스템들은 대부분이 이 팀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팀에 기반한 게임 플래이가 특별한 조작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L버튼과 R버튼(비타 기준으로)으로 어시스트를 부르거나 교체를 할 수 있으며, 그외의 시스템 사용 별도의 조작체계나 버튼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대캡 3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빠른 페이스라는 것을 감안하고 그 점을 전제하고 여타 격투 게임과 비교해 보았을 때,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조작들을 보여준다. 위에서 이야기한 콤보-공중 콤보로 쉽게 이어지는 것과 함께, 필살기의 조작은 절대 다수는 승룡권, 파동권 커멘드에 기초하고 있다. 레이징 스톰 커멘드(↙→↘↓↙←↘+버튼)라든가 연속 입력 필살기 등의 선입력 등의 개념이 필요한 복잡한 조작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 레버 반회전 커멘드 같은 것도 게임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초필살기는 기존의 필살기 커멘드에서 버튼을 두개를 누르는 것만으로 쉽게 나가며, 격투 게임을 처음 해보는 게이머도 승룡권 커멘드만 제대로 익힌다면 거의 모든 케릭터를 다룰 수 있는 전제조건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게임은 3명의 케릭터들이 계속 나왔다 들어가면서 정신없는 페이스로 진행이 된다. 마대캡 3는 화려하고 빠르며 정신없지만, 동시에 조작 자체가 단순하기에 초보가 입문하기에는 쉬운 구조를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마대캡 3에 있어서 중단을 이용한 이지선다의 심리전의 개념이 상당히 미약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인데, 모탈컴벳과 유사하게 지상 기본 공격 및 특수기의 대부분은 상단과 하단에 몰려있으며, 중단은 특이하게도 점프 공격에 대부분 붙어있다는 것이다.(게임 위키를 뒤져보고 게임을 플래이 해본 결과 그러하다는 것이다. 게임 내에서 상-중-하의 분리를 자세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물론, 이것이 기존의 격투게임에서 보여주는 역가드-다지선다 등의 심리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며, 프레임 단위의 공방 역시 마대캡 3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본인의 감상이지만, 게임이 중단 이지선다를 점프 공격 개념에 몰아줌으로서, 지상에서의 복잡한 공방의 존재를 줄이고 어시스트나 공중전 등의 다양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게이머를 배려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재밌는 점은 3명으로 구성된 팀이 유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에 끼어들며, 여기에 간단한 조작이 결합하면서 고수들 급에서 마대캡 3는 '한번 아차하면 케릭터 하나가 즉사하는' 흉흉한 게임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엑스 펙터라는 시스템이 체력회복+공속/이속 증가+데미지 증가에 '모션 캔슬'을 가능케 함으로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일발 역전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도 한다.(심지어 엑스 펙터의 경우, 팀의 동료가 다운되면 다운될수록 더욱 강력한 성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일발역전이 가능한 시스템과 강하지만 쉬운 콤보 조작이 결합하면서, 마대캡 3는 약케와 강케 사이의 틈이 좁혀지게 되었고, 소위 약케라고 불리는 그룹 내에서도 노력과 애정으로 이를 커버하여 공식 대회에까지 출전하는 등의 모습이 흔하게 보이기도 했다. 물론, 현재로써는 게임 내의 시스템이 충분하게 파훼되고 효율적인 팀 조합이 발굴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팀 조합이 단순화되었다는 평가를 듣기도 하는데, 밸런스를 망가뜨림으로서 오히려 밸런스가 맞게 되었다든가 개개인의 노력으로 새로운 운용이 등장하는 등 게임 내 벨런스를 맞추는데 있어서 여러 시사점들을 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천상계의 이야기는 천상계의 이야기고, 초보 게이머에 있어서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대부분의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그정도로 잘하지는 않을 것이며, 소소하게 들고다니면서 즐기기에는 CPU와의 아케이드 모드 정도가 게임 플래이의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며, 이런 게이머들에게는 이러한 막장 벨런스의 요소와 대인전에서의 연구와 발견등은 크게 와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대캡 3는 캐주얼 하면서도 동시에 하드코어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양쪽 모두를 어느정도 만족시키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튜토리얼이나 입문에 있어서 게임은 좀 아쉽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게임 자체가 간단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시스템 설명을 수반하는 튜토리얼 단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물론 미션 모드를 통해서 간단한 콤보 조작은 배울 수 있는데, 엑스 팩터 발동 같은 요소들이나 그것이 갖는 특징들은 가볍게 설명했어야 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해본다. 또한 게임에서 혼자 즐기기에는 컨텐츠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는데, 아케이드 모드를 제외하면 얼티밋 마대캡 3에서 추가된 영웅 대 전령 모드(아케이드 모드와 유사하지만, 카드를 모아서 덱을 만들고 그 덱에 따라 특수효과를 받는다)말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수집요소는 상당히 많으며, 혼자서 아케이드 모드를 클리어하며 이런저런 수집요소들을 모은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영웅 대 전령 모드 외에도 다양한 모드를 얼티밋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넣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비타 기준으로 보았을 때, 게임은 안정적으로 60프레임을 뽑아내며, 그래픽에 한계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디테일 등등에 있어서) 동시에 비타라는 기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불편한 구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로딩이 오래걸릴 때가 존재하지만, 크게 신경쓸 부분은 아니며, 오히려 대부분의 구간에서 로딩은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얼티밋 마블 대 캡콤 3는 비타를 가지고 있으며, 격투게임에 큰 거부감이 없는 게이머라면 누구라도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게임은 완벽하지 않지만, 입문이 쉽고 즐기는데 큰 부담이 없으며, 또한 파고들 부분도 많다. 다만 아쉬운 점은 마블이 디즈니에게 인수되면서 게임의 판권이 모호해져서 현재 PSN 등에서 게임이 사라졌다는 점에 있으며, 본인 역시 PSN 고별 세일로 싸게 샀으며 현재로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물량을 구해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안타깝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게임 이야기






데스티니 게임 플래이 트레일러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진 기대하지 않고 있는데(보더랜드+헤일로 느낌의 무난한 게임 같아서)

그래도 게임이 평타 이상은 쳐줄거 같아서 기대하고는 있는 중입니다.

베타키를 어떻게 구해봤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흠...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미야지 마사유키라는 이름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소할 것이다:그는 2008년 망념의 잠드를 감독했으며, 2012년 후세-말하지 못한 내사랑을 감독하였고, 이 둘 이외에는 감독을 맡은 작품이 없다. 게다가 사실 이 두 작품은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있어서 생소한 작품들인데, 흥행 측면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으며 재미 자체로만 본다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와 후세라는 두 작품 만으로도 미야지 마사유키는 다른 애니메이션 감독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망념의 잠드와 후세의 서사가 갖는 특징은 피해자-가해자의 이분법적이며 대칭적인 이야기 구조를 무너뜨리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극단적인 대결이 아닌 중지와 화해로 마무리 지음으로서, 애니메이션은 스펙타클이나 볼거리를 주는 재미가 아닌 독특한 이야기의 중지로 귀결이 된다. 망념의 잠드에서는 아키유키와 히루켄 황제가 대결하는 장면에서 한쪽(희망)이 다른 한쪽(절망)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 산 자의 희망을 대표하는 아키유키가 자신의 이름을 이름없는 죽은 자들의 집합인 히루켄 황제에게 줌으로서 이름을 받지 못한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해 화해의 악수를 먼저 청한다. 후세에서는 전설적인 이야기속의 괴물과 영웅의 대결을 재현하는 시노와 쇼군의 싸움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시노가 쇼군을 마무리 짓지 않음으로써 끝난다.(네녀석 혼을 빨아먹었다간 나까지 기분이 나빠질거 같아) 이 독특한 중지의 미학은 일반적인 대중문화 서사와는 차별적이라 할 수 있다:한쪽이 다른 한쪽을 쓰러뜨리고, 그 과정을 볼거리로 구축하여 관객에게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스펙타클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 차별적인 지점이,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봐야하는가?'라는 지루함과 짜증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야지 마사유키의 세계관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야지 마사유키의 세계관과 미학이 갖는 독특함이란,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 세계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며,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 세계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어느 평론가는 그의 작품 세계를 '축축하고 무거운 우울함'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우울함과 축축함은 하나의 중력을 구성하여 극중의 케릭터와 관객들을 옭아멘다. 이 중력과 축축한 우울함의 미학이란, 제임스 그레이의 개인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아버지는 내게 이야기했다. 너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 아니니 영화 감독은 못될 것이라고. 그것은 아버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했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영화감독이 되었다.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비밀이 있다:가족에는 애정어린 지원과 무시무시한 감정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것을" 이 애정과 파괴의 상반되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치관이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는 충돌하는 동시에 공존하며, 그것은 다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와 리틀 오데사를 예로 들어보자:이 두 영화는 아주 클리셰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범죄자는 불현듯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며(리틀 오데사), 실연의 고통을 가진 남자는 두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혼란을 겪게 된다.(투 러버스) 하지만, 일반 장르적 클리셰들과 이야기들과 다르게, 영화에는 무시할 수 없는 '색체'가 존재한다:이 두 영화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쓰이는 BGM들(서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 단성 성가 같은 BGM들은 어떤 의미에서 유대교의 성가를 연상케 한다.)과 어떤 이야기 내에서 '유의미한' 화소로 존재하지 않는 러시아 유대인들의 문화들이 배경으로 자리잡는다.(제임스 그레이는 러시아 유대계 가정 출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 유대계가 갖는 문화적 특수성은 어떤 민족주의적인 이야기로 귀결되지 않는다. 폴 윌레만이 '영국 흑인 영화가 영국 흑인 민족주의적이지는 않다'라고 서술하였듯이, 이들의 배경은 '민족'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지 않는다. 즉, 민족이라는 배경이 서사의 주요한 동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폴 윌레만이 주목한 것은, '다문화'라는 개념자체가 하나의 폭압적인 개념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우리가 다문화 가정이라는 사례를 볼 때, 다문화 가정에 속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입지 않는' 전통 복식을 입고 나와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분명하게 구획되고 구분되어지는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문화의 탈을 쓴 하나의 '울타리'이다:문화란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 섞이고 거부하는 등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갖는다. 과연 순수하게 현재의 문화로부터 구분되는 '전통문화' 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가? 그런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유대문화는 민족이라는 커뮤니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하지 않지만, 그 커뮤니티가 실존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다뤄내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사례는 최초의 유성영화였던 재즈 싱어를 예로 들 수 있겠는데, 랍비였던 아버지와 흑인 분장을 하고 재즈가수 질을 했던 아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통문화라는 분명하게 구획지어진 '선'과 '자리'를 주고, 결국은 아들이 아버지의 랍비직을 계승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아버지로의 전통문화로의 회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재즈 싱어의 전통문화와 신세대 문화는 이데올로기 적으로 재편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후술할 랑시에르의 미학에 대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임스 그레이는 이러한 유대민족의 문화를 영화에 분명한 배경으로 깔아두려 한 것일까? 이러한 유대민족의 문화를 주변에 깔아둠으로서 극 내의 케릭터가 편안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다. 이 배경은 케릭터를 젖어들게 만들며, 동시에 중력으로서 땅으로 끌어내리려 한다:왜 투 러버스의 주인공은 가족을 떠나서 비유대인인 미쉘과 도망을 치려 하는 것이며, 왜 리틀 오데사의 주인공은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인 리틀 오데사를 예전에 떠났었던 것일까? 이는 위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발언을 대입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중력은, 안착한 자들에게 있어서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더이상 날아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파괴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은 이 중력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그들은 그들의 커뮤니티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중력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 두 감정은 일반적인 대중문화 서사에서 드러나는 방향성과 선호가 아닌, 양가적이고 공존하며 동시에 구획되거나 구분되어질 수 없는 중요한 두 감정이기에, 케릭터들은 어찌할 수 없는 우울에 사로잡힌다. 이는 영화내에서 분명하게 깔리고 있는 유대문화라는 배경이, 그들을 유대문화의 색으로 물들이며 동시에 그들을 축축하고 무겁게 사로잡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들을 유대문화라는 독특한 문화적 배경에 근거해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임스 그레이의 이 두 작품들은 우열이나 분명한 구획을 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우울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아주 평범한 장르영화적 클리셰를 이야기라는 측면이 아닌 분위기라는 측면에서 재구성하고, 관객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고 들어간다. 투 러버스의 마지막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주인공은 떠나버린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있는 그의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일까? 영화는 분명한 해답을 주지 않으며, 관객은 안정과 변화, 안착과 떠남, 사랑과 이별 등의 상반된 관계의 감정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느끼며, 보통은 구획되고 구분되어질 상반된 감정이 충만해짐을 느낀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감정의 충만함, 동시에 이 두 감정과 방향성에 대해서 선호나 구획지음, 구분 등의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대등하게 다뤄낸다는 점에서 미야지 마사유키의 두 작품 역시 비슷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임스 그레이의 감수성이 좀더 미묘한 순간들과 어찌할 수 없는 우울과 중력에 젖어들어감을 다뤄내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미야지 마사유키의 두 작품들은 대중문화 서사의 스펙타클과 도덕적 이야기를 거부함으로서 이를 구현해낸다. 잠드의 경우에는, 서브 플롯의 마지막에서 아키유키의 아버지는 폭탄테러의 가해자와 자신이 머리에 총을 쏴서 쓰러뜨린 군소속 지휘관을 함께 간호하며 살아간다. 후세에서는 모든 일의 원흉인 쇼군의 징벌을 포기한 뒤 에필로그에서 악역인 쇼군은 극중의 강박적인 모습을 벗어던지고 편안한 모습으로 재등장하며, 동시에 도덕적인 징벌을 요구하는 서브플롯을 은연중에 관객에게 제시할 뿐 그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음(이테츠루의 아들이 목잘려서 저잣거리에 난 것은 관객들이 손쉽게 분석해낼 수 있는 정보이나, 그것은 구체적인 이야기의 화소로서 드러나지는 않는다)으로서 묘한 이야기를 구축한다. 즉, 미야지 마사유키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단죄와 징벌을 거부하며, 그보다 좀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폭력의 중지와 증오의 연쇄를 끊어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미야지 마사유키의 거시적이며 분명한 목표에 의해서 서사는 재배치된다:극에서 적을 향한 폭력과 징벌을 위한 스펙타클 그리고 도덕적인 카타르시스는 배제되고, 피해자-가해자가 뒤섞이며 전투와 클라이맥스 장면들은 비극적인 순간들을 반복하는 시지푸스의 영웅들의 격돌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독특한 감정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아닌 비극에 사로잡혀서 폭력을 반복하는 케릭터들의 우울이 밖으로 스며나오는 일종의 디아스포라이다. 동시에 제임스 그레이의 케릭터들이 떠남과 안착함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는 우울에 사로잡혀있었듯이, 미야지 마사유키의 작품들 역시 그러한 우울에 사로잡힌다:징벌도, 속죄도, 단죄도, 그 어느 것도 아닌, 명확하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별되지 않는 폭력의 순환 과 그로인한 우울 속에서 인물들은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야지 마사유키 작품의 미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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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슈퍼 버니홉의 삽질 기사, 쇼벨 나이트 리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리뷰어입니다. 과도한 개그도 없고, 차분하고, 정확한 분석을 보여주죠.





게임 이야기






*들어가며 붙이는 말.

글을 쓰다 보니 이런저런 잡설들이 길어지게 되었는데, 너무 심각하게 보지 마시고, 본인은 이렇게 게임 리뷰를 쓴다 라고도 가볍게 이해해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이들은 어찌보면 저만의 문제의식일 수도 있으니까요. 현재도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문제기도 합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때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엔하위키, 테세우스의 배에서 발췌)


테세우스의 배라는 유명한 역설을 인용한 것은, 게임 리뷰가 갖고 있는 가장 골치아픈 딜레마를 이 역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게이머가 플래이함으로서 소비된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소비와 게임의 소비에 있어서 분명하게 다른 점들이 존재한다:게임의 소비는 다른 작품들(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등)과 다르게 장기적이며 집중적으로 일어나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점은 ‘행위로서’ 행해진다. 이러한 게임만의 특수성과 인터넷 기반의 게임들이 늘어남으로서 인해서 생겨난 새로운 특징들이 맞물려서, 게임 리뷰 및 게임 비평에 있어서 ‘어떤 시점의 게임을 정리하고 리뷰할 것인가’라는 지점을 특정짓는데 많은 어려움이 생겨난다.


첫번째 딜레마는 한번 출판/공개되면 고정된 텍스트의 형태를 취하는 만화나 소설, 영화 등의 매체와는 다르게 게임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면서 자신을 확장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리그 오브 레전드, 통칭 롤은 2009년 10월 27일부터 정식서비스를 해서 현재 2014년 7월까지 근 5년간 게임 서비스를 하였다. 그리고 이 5년간의 기간동안 롤은 무수히 많은 패치와 일러스트 업그레이드 등등 다양한 것을 손보았다. 그렇다면, 롤이라는 게임의 리뷰를 쓰기 위해서 리뷰어는 ‘어느 시점’의 롤을 리뷰해야하는 것일까? 2009년 처음 나왔을 때의 롤? 혹은 2014년 현재 시점의 롤? 아니면 더 먼 미래 시점의 롤? 롤은 지금 이시간에도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이건 비단 라이엇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넘어서, 게이머들의 플래이하는 방식과 전략, 조합 등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것은 게임 내부의 플래이와 게이머의 ‘경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두번째 딜레마는 게임과 게이머의 관계의 ‘역동적’인 관계다. 라프 코스타의 재미이론을 인용하자면, 게임에 있어서 재미의 원천은 본질적으로 게임을 ‘학습’하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즉, 게이머는 자신이 더이상 게임 내의 패턴을 학습할 수 없을 정도로 게임을 파고들며, 게임에 학습할 것이나 정복할 것이나 받을 보상이 더이상 없다면 그 시점에서 게임은 끝난다.(혹은 게이머를 지루하게 만들거나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게이머는 게임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규칙을 악용, 오남용, 혹은 규칙을 ‘뛰어넘는’ 행위를 경이적이라 할 수 있을정도로 빠르게 학습하며, 게임에서 보상을 얻어내는 과정을 극단적으로 간단하게 효율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게임 전체와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상호작용을 하여 게이머의 경험을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보자:몬스터 헌터 시리즈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하메’의 존재는, 게임 규칙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들을 우회하고 속임으로서 게임에서의 보상을 더 빨리 얻어내는 일련의 규칙의 오남용을 통칭한다. 하지만, 하메라는 규칙의 오남용의 존재가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은 아닌데, 기본적으로 노가다 게임일 수 밖에 없는 몬스터 헌터에 있어서 자신이 맞추고 싶은 장비를 좀더 적은 시간으로 만들 수 있게 도와준다. 비단 이러한 하메가 아니더라도,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서 게이머는 최소 시간-최대 효율을 이루어내는 최단의 루트를 찾아내고 있으며, 이는 외부에서 보았을 때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찾아냈지?’싶은 그런 공략들도 존재한다.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공략을 찾아낸 사례, 길드퀘스트 관련: http://rigvedawiki.net/r1/wiki.php/%EA%B8%B8%EB%93%9C%20%ED%80%98%EC%8A%A4%ED%8A%B8)


이러한 두 딜레마는, 게임 리뷰를 언제, 어떻게 써야할지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게임 리뷰가 쓰여지는 보통의 양태는 ‘첫 클리어까지의’ 첫인상의 문제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전문적인 게임 리뷰들은(웹진에서 쓰여지는 게임 리뷰들을 기준으로 보자면) 게임이 발매되고 난 뒤에  게임의 판촉을 위해서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들의 리뷰는 분석과 함께 리뷰 점수 등의 분명하게 게임을 구입할 것인지 말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해주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게임 리뷰는 ‘단기적’인 전망만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가끔씩 리뷰에서 다루어야하는 게임의 규칙과 게임서사를 빼먹음으로서 ‘반쪽짜리’ 리뷰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포켓몬스터 X,Y 발매전에 공개된 주요 게임 웹진 리뷰들에 있어서 PSS 시스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언급한 웹진은 없었으며, 게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풍경이자 경험이라 할 수 있는 이 지점을 대부분의 리뷰들은 넘겨짚음으로서 실질적으로 게이머가 그 이상의 경험을 예측하거나 이를 구매의사에 반영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게임 웹진 리뷰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누락이 아니다:PSS 시스템이란, 결과적으로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즐겼을 때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며 게임이 정식출시 되기 이전에 이러한 것들을 추측하거나 경험한다는 것은 많은 무리수가 따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게임 리뷰를 어떻게 써야하는 것일까? 게임이라는 텍스트가 게이머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게이머가 느끼는 게임의 감상을 변화시킨다면, 글이나 단일한 매체로 고정되고 변화하지 않는 형태로서의 게임 리뷰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다:게임 내부의 게임서사(게임을 표현하는 표현물 일체)와 규칙(게이머의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 일체)은 게이머가 게임을 플래이하면서 행동을 취하고 그 과정에서 보고 느끼고 반응하는 모든 것들, ‘경험’과는 별개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게이머들은 서로 다른 경험의 근거와 사고방식, 지식, 감정 등을 갖고 있으며, 이는 하나의 게임에 대해서 상이한 평가를 불러일으킬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게임이라는 텍스트 자체는 규정불가능한 무언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은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표방하려는 것은 아니며 게임이라는 텍스트의 변화성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인은 아주 단순한 명제로부터 조심스럽게 논의를 전개시키고자 한다:게이머의 경험은 게임이라는 분명한 텍스트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이 만약 울펜슈타인 뉴 오더를 한다면, 그들이 느끼는 경험은 전적으로 울펜슈타인 뉴 오더에 기반을 두고 있지 콜 오브 듀티:고스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게임 리뷰의 경우 텍스트가 갖고 있는 텍스트 자체의, 텍스트 내부의 특징들에 맞춰서 그 특징을 객관적으로 문자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즉, 게이머의 경험이라는 살이 붙기 이전의 상태, 게임 텍스트의 규칙과 게임서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게임 리뷰어는 리뷰를 읽는 사람들에게 이 게임이 어떻게 플래이되고 어떤 경험을 줄 것인지를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게임은 되도록이면 ‘발매 이후’에 리뷰에 착수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요즘 들어서 많은 게임들이 멀티를 내제하고 있으며 PSS 처럼 독특한 형태의 멀티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화 과정을 통해서 게임 텍스트의 뼈대를 드러낸 후에, 리뷰어는 그 위에 살을 덧입힐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주의해야하는 것은 게임 텍스트의 뼈대와 구조를 드러낸 것과 리뷰어의 경험과 주관을 한꺼번에 뒤섞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리뷰어가 어떤 객관적인 구조와 분석을 통해서 리뷰를 읽는 사람들에게 게임이 어떠함을 설명하려 한다면,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분리함으로서 게이머에게 게임이 어떠할지를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만약, 경험을 뒤섞어 버린다면, 그것은 게임 리뷰어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게임 플레이 일지'가 되며, 리뷰를 읽는 게이머는 리뷰어의 객관과 주관이 혼재되어 있기에 자신의 경험에 대입할 수 없는 문제를 갖게 될 것이다. 특히 추상적인 단어인 '게임성'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게임 텍스트의 구조를 추상적으로 뭉게버리고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게임 텍스트 구조와 섞어버리는 행위는 극도로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라 본다.


하지만, 게임의 리뷰에 있어서 게이머가 게임 텍스트의 '객관적인' 구조를 밝히는 것은 상당히 힘들어보이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시스템 이외에도 게임에는 숨겨져있는 행동의 제약 규칙들이나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게임 서사들이 존재하며, 단일한 게임 텍스트 구조의 경우에는 이 게임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는지, 아니면 실패했는지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기도 하다. 이럴 때에는, 게이머는 복수의 게임 텍스트 구조를 비교 분석해서 객관적인 게임 텍스트 구조를 밝혀내고, 그것이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 내의 비슷한 게임들을 비교하는 수평적인 비교와 게임의 시리즈와 구작들, 혹은 계보학적인 변화를 따라서 게임들을 비교하는 수직적인 게임 비교를 통해서 게임 텍스트의 구조를 살펴보고 게임 텍스트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을 이루는 주요한 구성요소로서 게임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며, 게임의 리뷰에 있어서 이러한 주관적인 경험의 문제를 끌고 들어오는 것은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객관적인 텍스트 구조와 주관적인 경험을 섞어버리는 것이 아닌, 객관적인 텍스트 구조에서 '어떻게' 그것이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변화하는가라는 중간 과정을 분명하게 삽입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텍스트 구조와 주관적인 경험 사이의 거리를 분명하게 밝힐 뿐만 아니라, 게임 리뷰를 읽는 게이머가 이 과정을 읽고 이해함으로서 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결국, 게임 리뷰를 읽고 게임에 대해서 판단을 해야하는 것은 게이머 독자이지 게임 리뷰어가 아니다.


게임 비평의 경우에는 리뷰와 조금 다르다고 본인은 생각한다:게임 비평은 게임 이외에도 게임 외적인 텍스트를 갖고 들어옴으로서, 게임 텍스트와 경험, 그리고 외적인 텍스트를 씨줄과 날줄로 하여 하나의 직조물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게임 비평의 경우에는 리뷰에 비교 보았을 때 글을 쓰는 폭이나 방법 면에서는 좀더 '자유롭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해본다. 물론, '게임 비평'이라는 개념 자체도 확립되지 않은 점을 생각해볼때, 이에 대해서는 좀더 조심스러운 사유가 필요하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덧붙이며


(글에는 들어보내지 못했지만, 덧붙이는 문단...저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 글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게임 텍스트 구조와 그에 기반하는 경험의 변화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장르적인 문제인 경우, 예를 들어서 온라인 게임과도 같이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게임 장르를 다룬다면, 짧게 나마 덧붙이는 글로써 이러한 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전망이 예상된다 라는 방식의 글쓰기도 나쁘지 않다. 게임 장르나 특징에 맞춰서 리뷰쓰기에 변화를 두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게임에 있어서 텍스트 구조와 경험이 게이머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 리뷰어가 일일이 코멘트를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본인은 판단한다. 이는 게임 리뷰가 대부분 쓰여지는 기준인 '시작부터 엔딩까지' 내에서 대부분의 게임 제작자들이 만들어내고 그들이 의도한 게임 텍스트 구조의 '원형'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게임의 경험은 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 리뷰어는 원형적 텍스트 구조를 밝힘으로서 게임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지점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근원적인 구조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부터 새로운 딜레마가 생겨난다:이 '원형적' 텍스트 구조야말로 리뷰어에 의해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는 원형적이며 객관적인 텍스트 구조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게임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텍스트 구조와 별개로, 어떤 꼼수 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제작자가 의도하고 게이머가 인지할 수 있는 원형적인 게임 텍스트 구조가 실존하는가? 본인은 법학도임으로, 법학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 끌어들이도록 해보겠다:법은 단순하게 조문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서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법이란 해석과 이를 통한 적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가령 법조문에 고의나 과실없이 주의의무를 다한 자 라는 개념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고의의 단어 정의는 무엇이고, 과실은 어디까지가 과실로 인정될 것이며, 주의의무를 다했다는 것은 어떠한 주의의무를 다했다고 보는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사법부의 구체적인 판단들, 판례의 형태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리고 무엇이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판례라는 유권해석 이외에도 비교법학, 법해석학, 법철학 등의 다양한 법 관련 학문들이 맞물려 들어가면서 법의 해석과 '이 법은 무엇인가'라는 개념을 구성한다.


물론, 해석과 별개로 법에서 누가봐도 '객관적인' 부분은 존재한다:가령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경우, 이는 어떠한 이론도 없이 살인의 구성요건을 충족시킬 것이다. 하지만, 인과관계에 있어서, 가령 본인이 즐겨 인용하는 '가해자가 죽일 의도로 피해자를 흉기로 공격했는데, 피해자는 내상을 입은체로 살아남았다가 훗날 콜라와 김밥을 먹다 채해서 피해자가 죽었던 판례'(통칭, 김밤 콜라 사건)에 있어서 무엇이 살인의 인과관계를 구성하는가에 대한 대법원의 해석과 판단이 작용하였다는 것을 고려해보자:과연 누가봐도 '완벽하게' 객관적이라는 개념은 존재하는가? 오히려 분명하게 분리되어있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상반된 개념은 특정 상황에서는 '같이 섞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칼 슈미트가 그 유명한 주권-예외상태를 통해서, 주권자는 무엇이 예외고 무엇이 상례인지를 결정하는 존재라고 규정한 것을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게임에 있어서 무엇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원형적인 게임 텍스트 구조이고, 혹은 객관적인 텍스트 구조인지를 게임 리뷰어는 '결정'을 통해서 예외-일반을 구분하는 것이 아닐까?(동시에 키에르케고르는 예외상태란 주권자가 체제 자체를 열렬하게 사유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게임 리뷰어가 원형적 텍스트가 아니라고 분리해내는 사례들 역시, 단순하게 버려지고 쳐지는 것이 아닌 원형적 텍스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주요한 지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구조'(누가봐도 인정할 수 있는)라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게임 리뷰어가 분석하고 따로 때어내서 정리를 해야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게임의 원형적인 부분을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게임 리뷰어는 주권자와 법에서 권위를 갖는 자들(후견인, 로마법의 원로원 같이 특정한 사실적 관계에서 법적인 힘을 갖는 자들)처럼 '어떤 특별한 권위'(게임 리뷰어라는 사실적 지위에서 오는)를 가지고 그것을 통해서 결정짓는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제시해본다.


(김밥 콜라 사건에 대하여, http://cafe332.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N4Y2&fldid=T8R&datanum=4769&contentval=&docid=N4Y2T8R47692010022204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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