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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랜스(제임스 스튜어트 분)는 자신의 오래전 친구 톰(존 웨인 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텍사스의 신본이라는 작은 마을로 향하면서 회상에 잠긴다. 과거의 산본은 리버티 벨런스(리 마빈 분)라는 무법자 때문에 공포 분위기가 하루도 가실날이 없었다. 이 곳에 도착한 젊은 변호사 랜스는 법의 울타리 안에서 무법자를 옭아매려 하지만 여의치 않는데, 이때 신본 마을에서 유일하게 리버티와 맞설 수 있는 톰은 오직 총만이 해결책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서로 의견차이를 보이며 티격태격하는데, 그 이면에는 할리라는 마을 처녀에 대한 질투심이 깔려있다. 점점 더 리버티의 만행은 심해지고 최후의 대결시간은 다가온다.


페드로 코스타는 존 포드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한적이 있었다:"어떻게 존 포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광활한 대지, 웅장한 산맥의 풍경처럼 누구나 좋아할 법한 것들이 거기에 있다. 단순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삶이 주는 아름다움. 반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존 포드의 영화에는 그런 단순한 것들의 가치가 담겨 있다. 몬테이로의 말을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단순해질 것인가'다." 이 단순의 미학, 단순함의 찬미야말로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를 설명하는 키워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이러한 단순의 미학을 통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상식적인 서부극를 뒤집는다. 영화는 어둠에 사로잡힌 서부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법과 질서에 대한 갈구를 보여주지만,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늙어버린 사람들은 사라져버린 서부 개척시대의 미덕과 영웅 반추하며 그에 대한 아련함을 경험한다. 이러한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대치되는 양가적인 감정을 영화는 능숙하게 다루어내며, 흑백영화만이 재현할 수 있는 깊은 '어둠'을 이용하여 컬러영화들은 쉽게 재현할 수 없는 미학을 구축한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보여주는 서부의 세계는 일반적인 서부극과는 벗어나있다:서부극에서 서부라는 공간은 모든 것이 허용되어있는 자유로운 세계, 방아쇠를 당기고 결정하는 자가 법이며, 무법인 지대인 동시에 미국의 찬란했던 개척정신이 극에 달한 시대다. 하지만,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서부는 그와 정반대의 세계로, 무법의 암흑과 어둠의 지배하는 세계이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선량한 시민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는 기존의 서부극에서 서부를 드러내는 방식인 '광활한 자연의 풍광'과 대치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늙은 랜스가 호레이쇼 그릴리의 명언(서부로 가라, 젊은이들이여. 가서 명성과 부와 모험을 찾으라)을 인용하면서 회상을 하는 순간, 그는 야만적으로 총을 쏘며 마차를 가로막는 리버티 벨런스와 만난다. 그리고 랜스가 리버티와 첫만남을 갖는 시간은 '밤'이다. 이처럼, 영화는 기회의 땅 서부를 찾아 떠나라는 전통적인 격언을 박살내면서 강도와 부당한 폭력이 일어나는 공간으로서 서부를 재현하고, 그것을 칠흑같은 암흑으로 표현한다: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흑백영화만이 가능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묘사를 통해 광활한 자연을 대체하고 서부의 본질처럼 묘사하였던 다른 서부극과는 차별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사건들은 모두 밤에 일어나지 않는다:밤이라는 시공간의 대척점에 언제나 '낮'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는 근면한 삶을 살며 정직하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반인들과 그들의 삶을 낮에 배치함으로서, 무법과 폭력에 대비되는 질서와 균형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마을을 꾸리고 가혹한 서부의 자연과 인디언이라는 외부에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이 근면한 사람들은 투표와 자신들을 대변해줄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서 무법천지인 서부라는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이러한 낮이라는 시공간은 어둠을 대변하는 리버티 벨런스조차도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며(네놈들 모두 밤에 보자), 심지어 리버티와 그 졸개들이 희화화 시키는(투표장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 유쾌한 힘을 가진 공간이다:단순하고 착한 사람들의 저력. 하지만 밤이 되면, 이들은 개척 공동체를 위협하는 진정한 공포로 화하게 된다.


신본을 둘러싼 무법자-개척민들의 갈등에 끼어드는 랜스라는 인물은 이 공동체에 '법과 질서'를 가져다주는 대변자인 동시에 법과 질서의 화신 그 자체이다:뻔한 설정이긴 하지만 그는 변호사이기에 법을 잘 알며, 무능한 보안관이 리버티를 두려워해서 리버티 검거를 관할권을 핑계로 거부하려하자, 그는 법전 속에서 관할권에 대한 법조문을 찾아내면서까지 리버티의 징벌을 요구한다. 이와같이 무법이 판을 치는 서부시대에 고리타분할 정도로 질서와 법을 추구하는 인물이 바로 랜스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랜스를 단순하게 법과 질서를 서부에 가져오는 인물로는 한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내에서 그는 학교를 연다:그리고 이 학교에서 전통적인 WASP 주민들 뿐만 아니라 히스페닉과 심지어 흑인 하인까지 같이 랜스의 가르침을 받는다. 랜스가 헌법에 의해서 모두가 평등하며 모두에게 주권이 있고 그러한 권리에 의해 투표할 수 있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미국적인 공동체'(백인 뿐만 아니라 이주민들까지 포함을 한)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헌법으로 표현되는 미국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랜스의 목표는 단순한 교육을 통한 계몽보다 더 나아간다. 그는 개척민들을 대표하고, 그들을 위한 '주'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왜 주인가? 왜 법인가? 주라는 경계가 생겨나기 전의 신본이라는 공간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다. 따라서, 그 어떤 법도 적용받지 못하며 또한 법에 의해서 보호받지 못한다. 그것은 리버티에게 폭력으로 고통받았던 랜스가 내놓은 신본의 주민들을 위한 해결책이다:헌법에 명시되었듯이 법에 의해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 법이 이 땅에 강림하도록 하여라. 재밌는 점은 법의 보호를 갈구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러한 '법의 없음'을 이용하는 대목장주의 존재(화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가 신본의 주민들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리버티 벨런스를 고용하고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신본과 그 일대를 '법이 없는 공간'으로 남겨두려 한다. 이들은 단순하며 착한 사람들이란 신본의 주민들과 대척되는 집단이다:영화의 마지막, 주를 대표하는 사람을 선출하기 위해 웅변을 준비하는 웅변가를 보자. 그는 자신이 연설을 준비하였지만, 그것이 이번에는 필요없다고 외치면서 자신의 연설문을 구겨버린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펼쳐본 구겨진 연설문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이러한 가식과 허영이야말로, 근면하고 성실하며 착한 신본의 주민들과 대척되는 지점이자 미국적 가치와는 동떨어진 존재들로 볼 수 있다. 즉, 서부시대의 무법지대라는 장소와 시공간을 둘러싸고, 두개의 서로 다른 존재들이 대립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법이라는 테마를 두고, 영화는 무법자와 무법지대라는 시공간이 밤과 리버티 벨런스처럼 사악하고 폭력으로 가득차있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존 웨인이 연기한 톰 도니펀이라는 능글능글한 마초는, 우리가 익히 아는 거칠고 강인한 서부의 영웅 케릭터의 전형이다. 하지만, 랜스와 톰의 관계는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다. 먼저, 랜스는 톰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며, 폭력이나 사용하는 야만인이라 생각한다:스테이크를 두고 리버티와 톰이 서로를 총으로 쏴서 죽일뻔한 상황을 보고 랜스가 화를 내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 같은 것을 세우기 위해서 서로를 향해 총을 뽑는 무법자들의 어처구니 없음 때문이었다. 동시에 톰은 랜스를 '순례자'라 부르며, 그를 비웃는다:톰은 서부에는 서부만의 룰이 있으며, 그것은 얼마나 총을 빠르게 뽑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톰은 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랜스를 맨몸으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 순례자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랜스에게 있어서 폭력으로는 그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그가 만들려는 세계는 총을 먼저 뽑는 폭력이 법인 세계가 아닌, 헌법이라는 조문에 적혀있는 미국인의 이상이자 가치관이 실현된 공동체 그 자체이며, 그것은 폭력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은 랜스와 대립하지 않는다:오히려, 그는 랜스를 향한 비웃음 뒤에서 랜스를 조력하는 조력자다. 랜스를 구해준 것도 톰이고, 주를 대표하는 후보를 뽑을 때도 랜스의 추천을 사양하며 랜스를 주대표 후보로 추천한 것도 톰이었다. 하지만, 랜스와 정반대의 인물이(능글맞은 서부의 마초 vs 동부에서 온 법과 질서의 순례자) 왜 랜스를 도와주는 것일까? 톰은 그러한 '세련된' 행위들이(법과 질서, 누군가를 대표한다는 것)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잘 안다. 그렇기에 그는 랜스(법과 질서)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톰은 능글맞은 서부의 사나이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며(영화는 선인장 꽃 등의 장치들을 이용해서 그의 상냥함을 강조한다) 이런 배려를 통해서 자신의 시대(무법시대인 서부시대)를 마무리짓기 위해서 랜스와의 '세대교체'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밤을 지배하는 리버티 벨런스의 폭력은 랜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도 그를 가로막지 못한다는 분노로 랜스는 리버티 벨런스를 쏴서 죽여버린다. 이로써, 질서와 규칙에 피가 묻는다. 주의회 대표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대지주를 대변하는 상대편이 랜스를 어떻게 비난했던가? 그들은 랜스를 선량한 시민을 쏴서 죽인 살인마로 매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리버티 벨런스가 선량한 시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랜스가 무거운 마음을 감추고 회장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그 역시 폭력을 통해서 질서를 가져왔었고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공동체에 크나큰 원죄를 지웠기 때문이었다(이것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도덕적 신념과 자기완결성에 흠집이 났다고도 할 수 있겠다) 과연 피로 세워진 질서와 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여기서 리버티 벨런스를 쐈다는 행위 자체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리버티 벨런스Liberty Valance라는 이름은, 자유의 균형Liberty Balance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며 한글자 차이이다. 물론, 리버티라는 케릭터 자체는 무법자의 흉포함을 드러내는 존재이며, '자유의 균형추'로서 작용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과 질서를 대변하는 랜스가 자유라는 이름을 가진 악역을 쏴죽인 것은 의미심장한 행위이다. 법은 자유로운 무법자를 쏴죽이면서 질서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질서가 갖는 원죄일까? 칼 슈미트가 주권자가 결정을 통해 정상-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을 배제하여 정상을 도출한다고 주권권력과 법의 개념을 설명하였듯이, 랜스라는 법의 대변자 역시 리버티라는 무법자를 죽임으로서 법을 도출해낸것에 불과한게 아닐까? 그리고, '폭력'의 행사자라는 측면에서 법과 무법자는 모두 동일한 존재가 아닐까? 그렇기에 리버티 벨런스를 쏜다는 행위 자체는, 단순하게 악역을 제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무법의 시대를 끝내고, 법의 시대를 불러일으키는 것, 하지만 그것이 랜스가 꿈꾸었듯이 평화로운 방식이 아닌 폭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고 지켜왔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위협한다. 주변인들은 정의가 실현된 것에 환호하지만, 랜스가 느끼는 껄끄러움과 문제의식은 단순하게 양심의 문제를 넘어서게 되며 영화는 리버티와의 대치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상황으로 빠져든다.


결국, 랜스는 떠나려 하지만, 떠나려는 그의 앞을 톰이 가로막는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한다:자네는 너무 많이 생각해, 그리고 너무 많이 말해. 게다가 자넨 리버티 벨런스를 쏘지 않았어. 그리고 영화는 리버티 벨런스의 살해장면을 재구성한다. 리버티와 대치하는 랜스를 길건너의 어둠속에서 톰과 그의 조수가 바라본다. 그리고 검은 어둠 속에서 랜스가 총을 쏘려는 순간에 맞춰서, 톰이 리버티를 쏴서 죽인다. 결국 리버티는 톰이 쏴서 죽인 것이며, 랜스는 '아무도' 쏴서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사건의 재구성 장면이야말로,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어둠은 단순학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기록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 된다. 처음 리버티 벨런스와 랜스의 대결 장면에서 관객은 정당한 대결로 랜스가 리버티를 쏴죽이고, 서부극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불빛 아래서 이루어진 랜스와 리버티의 대결을 바라보고 개입한 제 3자의 존재(톰)가 리버티를 쏴죽임으로서, 서부극의 정당한 결투라는 이미지를 부숴버린다. 왜 톰은 이런 비겁한 행위를 했는가? 톰은 이야기한다:냉혈 살인자라, 난 그렇게 하고 살 수 있어...할리는 자네 여자야. 자네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으니, 이젠 읽고 쓸 거리를 주게. 이는 무법자가 법과 질서를 향해서 주는 최후의 배려이다:무법자는 스스로 무법의 시대를 끝내고 비겁하고 냉혹한 살인자가 됨으로서,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한 때 그의 여자였던 랜스의 연인,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진짜 영웅은 퇴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나, 여타 다른 서부극과는 다른 방식이다. 보통의 서부극에서 영웅은 자연속으로 사라진다.(흔히들 이야기하는 석양을 향해 달리는 엔딩) 이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 영웅은 문제가 사라지고 법과 질서가 다시 자리잡은 일상의 세계에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부의 영웅들은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들이 속했었던 풍경 속으로 사라져간다. 하지만, 톰은 그렇지 않는다:주지사 투표가 열리는 시간적 배경, 랜스가 리버티와 대치했던 한밤중, 그리고 그날밤을 회상하며 랜스에게 이야기하는 톰의 고백 등은 모두 밤이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누군가 이야기하였듯이 '역사는 밤에 쓰여지는 것'이라는 명제처럼, 영화는 후반부에 폭력과 어둠이 지배하는 밤의 이미지 위에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공간과 역사가 기록되지 않은 어둠이란 이미지를 덧칠한다. 그리고, 진정한 영웅은 진실을 가르쳐주고서는 자신이 받아야하는 찬사(물론 대중은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 랜스를 향해 환호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리버티 벨런스를 '진짜로 쏜' 사나이 톰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를 뒤로 한체, 회장을 퇴장한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자신이 속해있었던 광활한 자연이 아닌 더이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심연 속이다.


그리고 랜스의 회상은 끝이 난다:그는 영웅을 기억한다. 마지막 무법자, 그리고 마땅히 존경받아야 했던 자가 맞이한 쓸쓸한 최후에 대해서. 랜스는 영웅이 존경받았으면 하고, 자신의 이야기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 그것은, '전설'은 '사실'이 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다. 하지만, 역사의 어둠속에 묻혀버린 진실을 랜스와 할리는 기억하며,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아름다움을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랜스가 다시 신본으로 돌아와서 변호사를 개업할까 라고 할리와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기원(미국)이 서부에 있음을, 그리고 그것에 향수를 느끼기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은 끝나버렸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지만, 서부시대라는 무법의 시대에 대해서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이 영화의 마지막에 공존한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이다. 지금에서 본다면, 이 단순함의 아름다움은 정치적 보수성과 보수의 가치를 그대로 내새우고 있는 지점이며, 존 포드가 미국의 탄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부시대를 통해서 재구성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보수성이 껄끄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단순하지만 아름다우며 동시에 공감할 수 있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영화가 갖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부극의 문법을 비틀어서, 서부극을 넘어서며 서부시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영화의 이야기는 아름답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그런 점에서 명작의 반열에 든 작품이라 편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






언제나 오는 땜빵용 포스팅입니다(.....)


렐릭에서 스페이스 마린이 나오고 난 뒤에 오랜만에 워해머 액션 게임을 보내요.


2015년에 나온다고는 하며, EYE Divinity를 만든 회사에서 만든다고 합니다.






게임 이야기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미연시는 본인의 전문 장르가 아니다. 그리고, 미연시가 세계 시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장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일본의 서브컬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문화권에서 자주 발견되는 '미연시'라는 게임 장르와 테마는 서구의 게임들과는 다른 독특한 자신만의 장르 문법과 이야기를 개척하였다. 예를 들어보자:우리가 흔히 평행세계에 대해서 심도있는 고찰을 다룬 바이오쇼크-인피니트의 경우, 이미 크로스 채널 등의 미연시 작품에서 '평행세계와 루프물'이라는 장르 공식이 완성된 상태였다. 물론, 이러한 루프물과 평행세계에 대한 일본 미연시 장르의 고찰은 '선택'에 의해서 갈려나가는 세계와 이야기 라는 장르의 공식을 게임의 스토리와 접목시킨 결과물(미연시가 시뮬레이션인 이유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엔딩의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나스 키노코가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이며, 이러한 점에서 서구 게임 제작전통과는 다른 분석할만한 독특한 문화와 전통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미연시 장르에 대해서 가장 정석적인 공식은 히로인을 만나고 이야기가 진행이 되며, 그리고 마지막에 히로인과 이어짐으로서 게임 자체가 완결되는 것이다. 즉, 게이머는 히로인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동시에, 그 관계가 정점을 맞이하는 순간 관계 자체가 엔딩과 함께 종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단순하게 축약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게임의 엔딩과 스텝롤이 올라가면서 게이머는 한가지 의문이 들게 될 것이다:그래서, 이후에 이들(나의 분신으로서의 주인공과 히로인)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이 뒤엔 무슨 이야기가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수요들은 지속적으로 '후일담'과 팬디스크의 형태로 충족되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끝이 있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연애라는 판타지가 가장 빛을 발하면서 강력함을 발휘하는 지점은 맺어짐 이후의 추억을 쌓아가는 '과정'이자 연인이 존재하는 '일상'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리고 맺어지는 이야기가 끝나는 그곳에서부터 러브플러스는 시작된다. 러브플러스는 코나미가 도키메키 메모리얼 시리즈로 전연령 미연시 시장에서 쌓아온 연륜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러브플러스는 DS로 나오면서 미연시 팬들 사이에서 조용한 광풍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고, 인터넷 시대를 풍미한 전자 여친이자 하나의 밈으로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3DS로 낸 뉴 러브플러스의 버그와 실패로, 러브플러스 프랜차이즈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러한 뉴 러브플러스의 버그를 잡고 보완한 뉴 러브플러스+가 발매되었다.


(여담이지만, 정말이지 네이밍 센스는 거지같다고 생각한다.)


러브플러스의 게임 플래이는 두 파트로 구성된다:게임은 세명의 히로인과 맺어지는 과정을 다룬 친구 모드와 친구 모드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이후 추억을 쌓아가는 연인모드로 나뉘어져있다. 친구모드의 경우, 아주 단순한 진행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는데, 게이머는 충실하게(?) 학교 생활을 영위하며, 히로인들을 각각의 장소에서 만나고(네네-패밀리 레스토랑, 린코-도서부 활동, 마나카-채육부 활동), 이벤트를 통해서 각각의 히로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히로인과 주인공의 관계를 연인의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물론, 이 파트에서 게임은 대단히 간단하며 쉽다:혹자는 이 파트를 튜토리얼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실제 연인모드에서 할 수 있는 것들과 비교해보면 친구모드는 연인모드 이전에 게임의 대략적인 탬포를 익히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친구모드만으로 본다면, 러브플러스의 시스템과 이야기는 상당히 애매하다:게임에 등장하는 히로인들은 3명 뿐이며, 이들이 제공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특히 히로인이 3명이라는 것은 미연시 장르에 있어서 치명적인 부분이 아닐까 라고 생각되는데, 보통은 다양한 '속성'을 지닌 히로인들과 무색무취한 주인공이 다양한 이야기를 경험하고 이어지는 것이 미연시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브플러스의 히로인들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함'이 가장 인상적이며(동시에, 현실에서 완벽하게 동떨어져 있다. 이는 추후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들과 주인공이 관계맺는 과정은 별다른 기승전결이 없는 일상의 무난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친구의 관계를 넘어서 연인의 관계가 되었을 때, 보통의 미연시라면 이야기가 끝났을 지점에서 러브플러스는 본색을 드러낸다. 연인모드의 목표는 정해져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히로인과 자신만의 추억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 이 모드에서는 시간이 일상의 시간과 똑같이 흘러가는데, 게이머는 구획으로 나뉘어진 타임라인에 맞춰서 일과를 정하고, 연인과 소소한 대화와 스킨십을 즐기면서 '남친 포인트'를 모은다. 그리고 이렇게 주중에 모은 남친 포인트를 데이트를 통해서 사용하게 되는데, 데이트에서 게이머는 히로인과 데이트스팟을 돌아다니면서 히로인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것을 즐기는 구조다. 대략 한시간 정도 진행되며 주말에 주로 진행되기에 주중과 다르게 게이머는 데이트를 시간적 여유를 갖고 천천히 즐길 수 있다. 게임은 이러한 데이트와 소소한 일상을 구축하기 위해서, 연인의 다양한 반응과 패턴을 게임에 집어넣었고 게임은 분명히 '일상의 반복'임에도 불구하고 이 다양한 패턴 덕분에 게임은 반복적이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거의 주지 않는다.


데이트가 게임의 메인컨텐츠이긴 하지만, 러브플러스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행이다:게이머는 히로인과 관광명소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일단 본인은 이 여행 이벤트 도중에 베터리가 다되어버려서 완벽하게 클리어를 못했지만, 이 이벤트를 경험하신 분의 경험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여행이 시작되면서부터 게이머에게 지옥이 시작되는데, 게이머가 여행을 '완벽하게' 경험하기 위해서는 당일치기 여행 36시간 동안 단 '한번'도 게임기를 끄거나 슬립모드로 전환시켜서는 안된다. 여행 내내 히로인은 완벽하게 무작위의 반응들을 보이게 되며, 심지어는 자고 있는 도중의 '잠꼬대'마저도 다 들어야 한다. 문제는 3DS의 베터리는 경악할만한 수준의 조루 베터리이기 때문에, 게이머는 3DS를 어뎁터에 꽂아놓고 하루 36시간 동안 나가지 않고 데이트를 할 준비를 해야한다. 게임 속의 여친과 주인공은 분명 여행을 가있는 상황인데도, 게이머는 혼자 집에 남아서 여친과 주인공이 여행간 것을 컨트롤해야 하는 일종의 '촌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은 이와같은 큰 이벤트나 데이트 이외에도 추억을 만드는 다양하고 소소한 이벤트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일상적인 삶에 기반한 게임의 템포를 다체롭게 구성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의 반복과 소소한 행복을 다뤄내는 러브플러스의 연출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먼저 게임은 3DS의 일반적인 게임기 잡기인 가로잡기가 아닌 세로잡기를 기본으로 한다. 세로잡기가 3DS만이 가능한 특수한 인터페이스 입력 방식이지만 그것이 갖는 메리트는 적다고 볼 수 있다:두 개의 스크린을 이어서 하나의 스크린처럼 구성하는 연출 방식은 두 스크린을 분절하는 경첩의 존재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보이며, 게임기를 잡는 자세도 전혀 편하지 않고, 그리고 터치스크린을 제외하면 다른 패드나 버튼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왜 굳이 이렇게 불편한 입력방식을 러브플러스는 기본으로 채용한 것일까? 그것은 가로잡기와 가로 화면이 갖고 있는 '연출적인 한계'에서 비롯된다.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긴 가로잡기 및 일반적인 게임 화면은 게이머에게 있어서 트여있는 시각을 제공하지만, 수직적인 정보량은 극도로 제한되게 된다. 하지만, 러브플러스는 세로잡기를 통해서 히로인의 수직적인 정보를, 머리에서부터 하반신 일부를 보여주며, 그리고 세로잡기 특유의 게임기를 손으로 '받쳐주는 감각'을 통해서 '내 손안에 여친이 있다'라는 독특한 감성을 실현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이 감성이 뒷받침되어 여친과의 스킨십이나 키스모드의 경우, 비록 화면의 한계상 히로인의 얼굴만 터치스크린에 뜨지만 히로인과 상호작용한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게임서사로 표현되는 게임 내부의 세계는 우리 주변의(물론 일본 기준으로 보자면) 평범한 일상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사실은 일상과 평범함을 가장한 정밀한 환상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정밀한 환상의 공간이 가상의 여자친구와 함께 현실에 존재할 리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잡는다. 먼저 게임의 배경이 되는 '토와노'라는 이름은 '영원의'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게임의 시공간은 4계절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학창생활의 영원한 반복일 뿐 주인공과 히로인은 그러한 반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 내의 세계는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학창생활이라는 판타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대단히 친절하고 따스하며 아름답다는 느낌인데, 같은 학창 생활의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는 페르소나 4와 비교해보면 러브플러스는 필요이상으로 따스하고 친절해서 어떤 때에는 소름끼치기도 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타 미연시와 다르게 러브플러스가 가장 무섭고 강력한 지점은 게이머의 일상에 침투해서, 그것이 마치 설득력 있는것처럼 보이는 완벽한 추억과 완벽한 환상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로인들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문제를 갖고 있고, 주인공이라는 인물이 개입을 하게 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지만, 맺어지고 난 뒤에는 이 관계는 무슨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진 것 마냥 절대 해어지지 않는 완벽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이런점에서 본인은, 좀 도발적이긴 하지만, 겉으로는 완벽하지만 속으로는 곪아버린 1950년대 미국 마을을 배경으로 한 스텝포드의 아내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정교하면서도 일상에 침투하여 개인이 이루지 못했고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판타지를 러브플러스가 만족시켜주기 때문에 러브플러스가 수많은 팬들을 매혹시키고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가끔식은 이 완벽하고 보송보송한 아름다움에 소름이 끼칠 때도 있다.


그러한 소름끼치는 지점이라던가, 연출적인 똑똑함을 제외하고 본인이 러브플러스를 통해서 본 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러브플러스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스마트폰 게임에 가까운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언제 어디서나 가볍게 꺼내서 확인하고 진행을 하며, 게임을 한시간~2시간을 붙잡는 것이 아닌 하루 종일 10~20분 정도 꺼내어서 기분전환을 하는 물건으로서는 제 격이다. 또한 게이머의 일상 사이클과 게임의 사이클이 같이 맞물려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일상과 삶에 가까운 게임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러브플러스는 기존의 미연시들이 갖는 한계인 '서사가 종료되면 게임도 끝난다'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게임은 게이머가 질릴때까지 무한하게 반복되고 계속된다. 마치 게임속의 마을인 '토와노'처럼, 일상과 추억은 '영원하게 되는 것'이다. 

게임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게임은 계속될 수 있는가? 오픈월드 게임이 아니라면 보통의 대답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러브플러스는 이야기가 끝난 이후가 바로 시작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게이머가 스스로 써나가는 것이다. 어찌보면, 대단히 단순하고 소소한 것이기에 놓치기 쉽고 간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 간과하기 쉬운 지점에서 러브플러스는 게임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동물의 숲이나 심즈 같은 류의 게임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일상을 재현하는 게임이 게이머의 삶의 사이클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플래이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이 심즈나 동물의 숲처럼 특정한 플래이방식을 뛰어넘어서 미연시라는 이질적인 장르 및 플래이방식과 결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시에, 러브플러스의 한계가 여기서 등장한다:게임이 콘탠츠를 늘려나가는 방식이란 전적으로 '성우의 노가다'에 의존하고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반응을 도출하는 것, 게이머가 지루하지 않게 성우의 훌륭한 연기를 통해서 게이머를 붙잡아두는 것이 러브플러스의 기본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인력을 때려넣는' 게임 플래이와 매력이 역으로 러브플러스라는 프랜차이즈가 확장하는데 발목을 잡는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새로운 게임 메커니즘과 템포를 추가하려면 기존의 성우들을 불러서 또 그만큼의 인력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러브플러스는 혁신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동시에 구세대적인 한계에 사로잡혀서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작품이기도 하다.


또다른 문제점도 존재한다. 게임의 플랫폼이라 할 수 있는 3DS의 세로잡기가 갖는 근원적인 한계, 가운데 경첩의 존재가 두개의 스크린을 분리함으로서 넓은 화면을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윗쪽화면과 아랫쪽 화면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시선이 분산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히로인이 존재하는 오른쪽 터치스크린에 왼쪽 터치스크린의 끝에서 삐져나온 선택지들로 인해서 집중이 분산되는 문제는 상당히 당혹스럽고 짜증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부자연스러운 정도는 아니지만 프레임이 떨어지는 부분도 거슬리며, 뉴 러브플러스+ 자체가 기존의 3DS 버전 뉴 러브플러스의 버그 패치버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 아쉽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뉴 러브플러스+, 러브플러스라는 프랜차이즈 자체는 새로운 게임의 가능성의 단초를 제시한 작품이며, 요즘 같이 모두가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다니면서 게임을 하는 시대에 새로운 '휴대용 게임의 콘샙트' 또는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근원적이고 태생적인 한계는, 어찌보면 러브플러스라는 프랜차이즈가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한계로서,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뉴 러브플러스+의 판매량인 뉴 러브플러스에 비하면 대단히 미미한 수준이다. 러브플러스 라는 프랜차이즈의 광풍은 버그로 인해서 멈추게 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러브플러스 내부에 존재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플랫폼(스마트폰 같은)과 결합하여 새로운 무언가가 될수 있다면, 러브플러스는 단순하게 폐인 양성 게임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명제를 제시한 게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






팬텀패인 E3 데모 영상입니다(코지마 스테이션에서 공개한 것)


그나저나 발매일이 10/10이라는 루머도 돌고 있는데(1984 영화판 개봉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게임 이야기







나치를 죽이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가 되었다:마치 클래이 사격처럼, 일정한 서사(나치가 등장하고, 세계가 위험에 빠진다)와 함께 게이머는 모서리마다 튀어나오는 나치 군복을 입은 나치 군인들이나 하켄크로이츠를 이마에다 박아놓고 나 죽여줍쇼 하고 달려드는 표적들을 얼마나 정확하고 화려하며 빠르게 처리하는가를 테스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을 죽이는데 있어서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 게임 서사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근래의 게임들이 ‘마땅히 죽여야 하는 적’에 대한 개념에 의문을 품고, 서사에 있어서 분명한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아닌 적마저 서사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복잡한 서사를 보여주는 경향이 생기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나치를 죽이는 것은 어떠한 서사의 설명도 절대적으로 필요가 없다:나치니까 죽여도 된다. 사람들은 나치 군복을 입은 허수아비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너그러울 정도로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나치즘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나치가 저지른 범죄는 전인류를 향한 적대행위이자, 파괴행위이다. 하지만, 과연 나치즘이 나치의 ‘군복’을 입은 자들과 하켄크로이츠의 기치를 내걸은 자들로만 ‘한정’지어서 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재기하였던 문제들, 나치즘이 존속할 수 있게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들의 ‘악’의 문제라던가 나치즘이 본격적으로 전인류를 향한 전쟁행위로 이어지기 전, 유럽 전역에서 나치즘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바라본 시각도 존재했다는 점 등등은 나치즘이 단순하게 하나의 군복, 상징으로 좁혀서 바라볼 수 없는 복잡한 문제임을 암시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울펜슈타인이나 다른 게임들이 나치즘을 특정한 군복과 상징을 입은 존재로만 한정짓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지 않다:그것을 비판하려면, 단순히 게임을 넘어서 다양한 대중문화의 성향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덧붙이자면 울펜슈타인은 그러한 비판을 하고 싶지 않은 잘만들어진 게임이기도 하다) 또한 대중문화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상징과 군복이야말로 간편하게 적과 나를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기 떄문이다:타란티노의 바스타드-거친녀석들에서 이야기했던 것 처럼, ‘너희 나치들은 군복으로 구분이 가능하지, 하지만 군복을 벗고 있을 땐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걸(이마에 하켄크로이츠 문신을 새기는 것) 하는 거지’처럼 군복과 상징이야말로 아주 편리하게 기능하는 피아식별 장치이며 서사를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군복이 내가 나치를 쏴죽이기 위한 도덕적 양심을 덜기 위한 방책에 불과한 것일까? 적이 군복을 입는 것 자체는 게임플래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단순하게 적을 나치로 설정한 것 이상을 넘어서 게이머의 행위, 즉 게임 플래이와 군복입은 적과의 상호작용 측면인 정당한 전쟁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토포필리아와 게임을 접합시키면서 게임 서사라는 개념에 대해서 정의내린 적이 있었다. 게임서사란 개념은 게임의 표피, 겉으로 묘사되는 요소들의 총칭으로서 게임의 이야기, 그래픽, 사운드, 미술 컨셉 등등의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시킨다. 하지만, 게임에 있어서 게임서사라고 스스로 정의내린 게임의 표현 양식 일체들과 다르며, 게임만이 갖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고유하며 본질적인 특색이 존재한다:그것은 게이머의 행위에 의해서 게임은 향유되어진다는 것이다. 미연시 같이 행위가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케이스에 있어서도, 게이머는 선택을 통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소설과 미연시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이머가 게임을 자신의 행위로 플래이할 수 있더라도, 게임은 게이머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를 부여하지 않는다:가령 테니스 게임에서는 라켓으로 심판을 때린다든가 관객에게 라켓을 던진다든가 등의 행위는 가능하지 않다. 게이머의 행위는 보이는/보이지 않는 규칙에 의해서 장려되거나 금지되는데, 이러한 게임의 규칙이야말로 게이머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내린 게임서사와 게임 규칙을 사례를 들어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장기라는 게임에 있어서, 게이머들은 각각 정해져있는 규칙에 따라서 장기말을 움직여야 한다. 즉, 장기의 룰은 게이머의 행위를 규율한다. 하지만,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규칙들은 각각의 장기말들과 장기판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서 구현된다. 이러한 표현물과 상징물 일체들, 그리고 장기라는 판과 그것이 초나라-한나라의 싸움을 모사하는 것이라는 맥락까지 합해져서 게임이라는 표면을 이루는 게임서사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게임 서사와 규칙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가끔식은 서로가 구분이 불가능할 때도 존재한다. 하지만 서로 섞여있는 회색의 지점에도 불구하고, 게이머의 행위라는 기준점에서 보았을 때는 이 두 개념은 분리가능하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했던 정당한 전쟁이라는 감각은, 게임 서사(역사의 악 나치를 적으로 설정) 이외에도 ‘게임 규칙’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칼 슈미트의 저서 파르티잔은 민족주의 국가와 국민이념, 그리고 전쟁기술의 발달이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비정규군의 존재, 파르티잔(군복을 입지 않고, 무기를 휴대하지 않으며, 책임을 질 지휘관이 없는)을 만들어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비정규군의 존재는 근현대사 내내 일어났던 전쟁들에 등장하면서 재래적인 전쟁의 관념을 바꾸었다. 그에 반해 구세대의 산물이라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전쟁 개념의 산물인 헤이그 육전 ‘규칙’은 다음과 같은 전쟁 규칙을 정하였다:전쟁은 피아식별이 가능한 군복과 상징물을 착용하고, 그리고 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한한 정규군 당사자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지휘관의 명령 하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물론, 2차세계대전 이후, 유명한 파르티잔 중 하나인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과 비정규군의 비중이 커짐으로서, 비정규군도 육전규칙 하에 전쟁법 상 교전 당사자로 포로의 지위 등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이며 구세대적인 전쟁관념은 민간인과 군인의 절대적인 구분, 서로가 서로를 죽일 권리가 있는 교전주체들 간의 살육의 개념이 강했으며, 이는 군복으로 표지되는 국가간의 정당한 싸움이라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게임의 규칙도 ‘적과 나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피아식별이 가능힌 상황에서 싸움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헤이그 육전 규칙괴 실제 세계의 공정하며 정당한 전쟁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 정당한 전쟁관념을 토대로 규칙을 구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전쟁에서의 폭력을 학습하는 효과를 갖지는 않는다. 게임을 살인자 양성 시뮬레이터라 비판한 참전용사들의 비난은 게임속의 전쟁이 실제와는 완벽하게 다르다는 점을 묵과하고 있기에 절대적인 오류라고 볼 수 있다(비록 게임이 게이머를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비인간적인 폭력에 둔감하게 만들지언정) 게임 속의 전쟁은 현실과 극단적인 괴리가 있으며, 게임 속의 규칙이 게이머를 즉각적으로 옭아멜 수 있는 절대적인 효력을 갖고 있다면, 실제에서의 규칙은 사후처방적이며 동시에 수많은 다양한 맥락들이 얽메여서 절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지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임은 게이머의 작위와 부작위를 규정지음으로서 ‘공정함’이라는 관념을 구축하는데 있다.


게임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서는, 좀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여기 하나의 FPS 게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게이머는 코너마다 튀어나오는 적병들을 모조리 쏴죽이고 앞으로 쭉쭉 전진하여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된다. 콜옵 처럼 적이 단 한 종류만 출현한다면, 게이머는 고민할 필요 없이 적을 죽이면서 계속 앞으로 진행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적병 이외에도 난민 소년들과 비무장한 여인들이 나와서는 ‘쏘지마세요!’를 외치더니, 갑자기 플래이어에게 다가가서는 자폭테러를 가하는 패턴이 추가되었다. 이렇게 된다면 게이머들은 상당한 좌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쏘지 말아야 할 대상이 사실은 쏘아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게이머들은 거부감을 느끼면서 총으로 이들을 사살해야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인터미션에서 게이머가 총으로 사살한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이 나와 게이머를 성토한다면, 게이머는 더이상 이 게임을 플래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죽어마땅한 절대적인 적의 개념도, 우리의 양심의 부담을 덜면서 상대편을 죽일 수 있는 절대적인 전쟁의 규칙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복잡한 맥락과 상관관계들이며, 그 무엇도 흑백으로 뚜렷하게 구분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게임은 ‘공정한’이라는 감각을 심어주기 위한 단순한 규칙에 의해서 통제되며, 현실의 모사가 아닌 ‘가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현실의 복잡한 사안들에 대해 판단의 난해성을 들어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뚜렷한 흑백을 나눌 수 없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아래서 고통받았으며, 누군가는 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그것이 설령 단순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그 자체를 넘어서서 그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묵인한 사회 전체를 향한 고발이며 공동의 책임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해자, 죄인-단죄자의 구분을 통한 정의의 바로세움이 아니라, 더이상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끔 비인간적인 폭력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케이스이며, 이런 케이스는 게임 속에서 찾아보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좀더 가벼운 사례를 들어보자:버추어 캅 시리즈의 경우, 게이머는 총알이 빗발치는 사건현장 한 가운데서 범죄자들을 총으로 쏴 잡아야한다. 하지만 중간중간 민간인들이 양 손을 들고 나와서는 쏘지마세요! 라고 외치는 지점에서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민간인을 총으로 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건 게이머가 비도덕적인 새디스트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빠르게 판단을 내리는 것이 특징인 게임 규칙 특성상 실수를 유발하게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케이스를 다른 게임 장르에다 비유를 하자면, 빠른 음악에 맞춰서 노트를 눌러야하는 리듬게임 장르에서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노트가 내려오면서 옆에다가 ‘이 노트는 누르지 마시오’라고 적어놓은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게임 서사의 문제라기 보다는 규칙 자체(게이머의 빠른 반응을 테스트를 하기 위한)가 갖고 있는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울펜슈타인과 나치로 돌아와보자:나치는 이미 서사적으로 정당한 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군복은 적과 아군을 분명하게 나누기 위한 ‘규칙’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렇기에 게임은 정당한 전쟁이라는 경험을 구축하기 위해서 나치를 게임 서사로 표현하였으며, 동시에 적과 나의 구분을 나치의 군복을 통해서 이루어냄으로서 게이머는 전쟁터에서 정당한 적(서사로도 정당화되었지만, 동시에 게임 규칙으로도 정당화된)에게 마음껏 폭력을 분출해도 되게 되는 것이다.


군복, 적과 나를 구분하는 표지, 그리고 그것을 규정하며 정당한 전쟁을 요구하는 규칙에서 새로운 규칙이 파생되기도 한다:게임을 하다보면 게이머들은 약점을 보란듯이 드러내는 적들이나 보스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의 문법에서는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현실의 전쟁에서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적들이 공격할 수 있게끔 드러내고 다닌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다르다:게임이 만들고자 하는 정당한 전쟁의 관념은 게임의 규칙으로서 처음보는 적이라도 한 눈에 그 약점을 알아볼 수 있게끔 만듬으로서, 게이머가 불공정하게 느끼지 않고 공정하다고 느낄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덧붙이며:본인의 생각들임. 게임 규칙-게임 서사는 분명하게 구분이 가능할까? 이 둘은 서로 면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서사 없이는 규칙을 표현할 수 없으며 행위를 제한하는 규칙 없이는 게임 서사는 무의미.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둘은 결합, 그리고 게이머는 이 둘을 경험을 통해 느낌. 분리 가능성은 희박해 보임. 그러나 가장 한계상황을 가정해본다면, 극단적으로 서사를 제외하거나 규칙을 제외해서 본다면-예를 들어 이야기의 요소를 게임 플래이에서 제외해서 본다던가, 극단적으로 게임 플래이를 서사로부터 유리시켜서 개념화 단순화시킨 ‘여기로 가서 아이템을 먹으시오’ 등의 원리와 게이머 행위를 제약하는 개념-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며 영향을 끼치지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봄.)


 (게임의 규칙은 게이머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기에, 그 규칙이 지키고자 하는 것, 법에 있어서 헌법이나 헌법이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가 게임의 규칙 전체를 포괄하며 통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헌법제정자가 헌법과 법을 만들어낼 때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그려내듯이, 게임 제작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게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글을 1개월 가량 방치하였다가 마무리 지은 것이기에 흐름에 부자연스러운 지점이 있기도 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게임 이야기





*우물파는 게이머 31화 E3 특집 소니편의 요약 정리입니다.




E3는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인상적인 축제라고 할 수 있다:E3에서 많은 기대작들이 공개가 되며, 하반기 게임 발매 라인업의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E3 컨퍼런스를 통해서 게임 유통사들과 각 콘솔들은 자신들의 장기전략들이 공개하며, 게이머들에게 '과연 이 게임/콘솔이 살만한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여 게이머들이 콘솔에 끌릴만한 세일즈 포인트를 어필한다. 그렇기에, E3는 다른 행사들(게임스컴이나 GDC나 연말 GOTY 쇼 같은)과 비교해서 갖는 중요한 지점이 있으며, 이것을 얼마나 게이머들에게 성공적으로 잘 풀어내느냐에 따라서 그해의 컨퍼런스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2014년 소니 컨퍼런스는 어떠하였는가? 이는 소니의 2013년 컨퍼런스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2013년 컨퍼런스에서 플래이스테이션 4의 발매 정보와 함께, 다양한 독점-멀티작 라인업을 공개하면서 소니는 플래이스테이션 4의 런칭을 알렸다. 하지만 큰 무리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니 컨퍼런스의 흐름은 상당히 아쉬웠다고 할 수 있었다:플4를 사야하는 이유로서, '독점작'들은 어디갔단 말인가? 플4를 통해서 소니는 많은 것을 약속하였지만, 정작 게임 라인업의 대다수가 멀티 작품들이었다. 물론, 반대쪽에서 키넥트와 셋톱박스적인 기믹을 강조하였던 엑박원의 경우에는 게이머들의 냉소만을 받았기에 상대적으로 소니쪽의 승리로서 2013년 E3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엑원의 판단 미스와 소니의 절치부심으로 인해서, 2013년 하반기 차세대 콘솔 발매와 판매실적은 플4의 압도적인 승리로 결론나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6월, 다시 E3가 왔다:여기서 소니가 보여줄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현재 소니가 취하고자 하는 전략은 현재의 승리를 확실하게 굳히고, 경쟁자인 엑원보다 더 멀리 나아가며 거실에서의 플래이스테이션 4라는 기기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는 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소의 엑원의 경우, 현재로서는 부진에 놓여있지만 마소는 경영부진을 겪고 있는 소니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막강한 강력한 자본력과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장기적으로 저번 세대와 비슷한 판매량 전개를 예상하여 본다면, 엑원-플4의 격차 역시 마지막으로 가면 갈수록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소가 내세웠던 셋톱박스와 홈엔터테인먼트 문화를 콘솔에 통합시키려 했던 장대한 비전이 빛을 발하여 이번 세대 말이나 다음 세대 때에는 역으로 소니의 패배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지점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소니는 작년과 다르게 이번에 있어서 확실하게 '왜 플래이스테이션을 사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며 게이머를 끌어들어야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새로운 시대를 여는 축제는 이제 끝이 났다. 새로운 것에 대한 흥분과 기쁨이 가라앉고 난 다음, 사람들을 어떻게 새로운 것으로 끌어들여야하는지에 대해서 차세대 콘솔들은 분명하게 답을 해야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분명한 차이 역시도, 엑박과 플3의 걸어왔던 길을 생각해보면 결국은 좁혀질 수 있는 간극이기 때문에, 심각한 경영부진을 경험하고 있는 소니의 입장에서는 '앞서고' 있는 것이 아닌 '쫒기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콘솔의 매력=매력적인 독점 타이틀의 보유'라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2014 E3 소니 컨퍼런스는 분명하게도 기대 이하였다. 물론, 2013년에 보여주지 못한 블러드본이나 디 오더 1886, 리틀 빅 플래닛 3, 그리고 언챠티드 4 등의 굵직한 독점작들이 상대방 엑원에 비교해서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엑원의 경우, 헤일로 5 이외에는 보여줄 것도 없었을 뿐더러 문제는 헤일로 5 마저도 제대로 된 플래이영상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더 큰 실망감을 더해버리고 말았다) 분명하게 우세에 놓여있다. 하지만, 문제는 컨퍼런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임 쇼케이스들은 '멀티작품'들이었으며, 과거의 바이오쇼크 1편처럼 기간한정 독점의 개념도 아니고 플4를 소위 '리드 플랫품'으로 삼은 것도 아닌 구세대 후반부의 동시 발매 멀티작들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컨퍼런스의 느낌이 '플4만이 할 수 있다'의 뉘앙스가 아닌 '플4도 할 수 있다'라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소니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게임의 개발은 점점 대규모화 되었고, 콘솔을 능숙하게 다루는 퍼스트 파티가 길을 뚫고 서드파티가 그 뒤를 따르는 형국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서드파티 유통사들에 있어서, 한 콘솔로 독점 작품을 내는 것은 더이상 수지타산에 맞는 행위가 아니다. 팔리는 게임을 만들고 그 게임을 최대한 많이 팔기 위해서, 서드파티 유통사들은 비슷한 게임들(FPS, 밀리터리, 성인 지향의 피튀기는 폭력 등등)을 최대한 많은 콘솔과 플랫폼으로 내서 최대한의 이익을 거두려 한다. 혹자는 이러한 트리플 A 게임들의 지배가 별차이도 없는 똑같은 게임들을 반복 재생산하고, 창의성을 죽이고 폭력을 흩뿌리고 있다고 푸념하기도 했었고, 본인 역시 그런 폭력 게임을 즐기는 쪽임에도 불구하고 소니 컨퍼런스 대부분을 차지한 서드파티 멀티 게임들로부터 폭력이 대량생산된 느낌을 받았었다. 


또한 소니가 미디어 사업과 게임 사업을 함께 합치려는 시도를 보여준 것들은 과거 2013년 엑원 컨퍼런스의 연장선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게이밍 콘솔 이외에도 VOD 서비스나 셋톱박스 서비스는 분명하게 성장하고 있는 거실 문화의 수요이며, 엑원의 셋톱박스 전략은 게이머들에게 야유를 들을진 몰라도 먼 미래를 내다본 훌륭한 전략인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니 역시도 그러한 셋톱박스 전략을 간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마소가 올해 컨퍼런스에서는 게임에만 초점을 맞추었는데 반해서, 소니는 미디어 사업까지 E3 컨퍼런스에 끌어들임으로서 굳이 E3에서 발표할 이유가 없는 분량에 컨퍼런스를 할애하였고(코믹콘 같은 이벤트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 점에서는 실망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자사 콘솔인 비타에 대해서 어떠한 아이디어도 내놓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기에, 비타 유저로서는 썩 만족스럽지 못한 지점도 있었다.


하지만, 독점작과 멀티 타이틀이라는 지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소니 컨퍼런스에서 일련의 희망과 소니의 비전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컨퍼런스 중반 팬레터들을 모아서 어떠한 게임을 플래이스테이션으로 즐기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게이머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낸 것을 모아서 그것을 컨퍼런스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특히 그림 판당고를 HD 버전으로 만들어서 비타와 플4에 이식한 점 등은 엄청난 소식은 아니었지만 게이머들로 하여금 '소소한 행복과 만족'을 던져주는 지점으로 작용하였으며, 인디 라인업에 있어서도 노 맨스 스카이의 압도적인 비주얼과 저니 개발사의 신작 압주를 공개하는 등 게임의 취향을 다각화 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플2부터 쌓아온 게임 아카이브를 활용하는 '플스 나우' 서비스 베타와 서비스 계획을 공고히 하며, 게임 플래이 동영상을 직접 유튜브에 올릴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히는 등 기존의 있던 시스템과 자원을 십분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팬레터 이벤트나 다양한 서비스들의 제공은 단순하게 게임과 취향의 다각화를 넘어서는 지점도 보여준다:소니는 플4 런칭 당시 트위치 방송기능과 게임 패드에 쉐어버튼을 넣음으로서 게임을 단순하게 하는 것 이상의 '공유하는 문화'로 만들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소니는 플4를 통해서 게임은 단순하게 행해지는 것을 넘어서 공유되는 것 이라는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팬레터를 모아서 컨퍼런스에 발표하는 이벤트 역시도 그러한 공고한 철학에 기반한 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E3 이전에 엑원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였던 키넥트를 빼는 결단을 내리거나 게이밍 퍼포먼스를 위해서 키넥트 전원을 엑원으로 돌리는 등의 조치를 발표하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마소와는 다르게, 소니는 과거에 비해서 독점작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4는 왜 사야하는가?' - '게임도 게임이지만, 게임을 하는 것을 타인과 공유하며 즐길 수 있는 콘솔이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엑원이나 플4나, 어느쪽이든 이제 1년도 채 안된 콘솔들이며 앞으로의 향후 승패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니는 플3때와는 다르게 자신만의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있고, 그것이 엑원과는 다른 방향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니의 철학은 마소와의 차이를 공고하게 하면서, 새로운 게임 문화의 장을 열고 거기서 활로를 찾고자 하는 어떤 시도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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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소울을 만든 프롬소프트의 PS4 독점작, 블러드 본입니다.



2015년 봄에 나온다는 루머가 돌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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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월요일날 유출되었다가 사라진 팬텀패인의 트레일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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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래이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본인에게 있어 멀티플래이 게임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언리얼 토너먼트 시리즈였고, 그 후엔 카운터 스트라이크, 래인보우 식스,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등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곤 콜옵식의 빠른 패이스의 멀티플래이와 그에 맞서는 배틀필드의 거대 전장과 장비전, 레프트 4 데드 이후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된 협동 플래이, 스셀 시리즈의 스파이 대 용병, 다크소울 식의 싱글과 멀티플래이의 혼재,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의 함깨하는 게임의 세계, 어크 시리즈의 심리전적인 멀티플래이 등 다양한 멀티플래이를 경험했었고 즐겨왔다. 물론, 실패한 경우도 많았었다:케인 앤 린치 2의 경우에는 게임의 이론, 죄수의 딜레마 등의 요소를 도입한 멀티 시스템을 선보였다가 게이머들의 낮은 이해도로 인해서 실패하였고, 에너미 테러토리 시리즈의 경우에는 괜찮은 게임에도 불구하고 그 뒤를 이어줄 수 있는 정신적 계승작의 부재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었다. 


다양한 사례들을 모두 일반화 시키기에는 좀 그렇지만, 멀티플래이 게임의 성공과 실패에 있어서 적어도 게이머들은 수긍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일반명제를 도출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멀티플래이 게임의 룰은 모두가 이해하고 숙지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이고 '간단'해야 한다. 케인 앤 린치 2의 경우를 보자. 게이머들은 한 팀이 되어서 돈다발을 강탈하고, 도주지점까지 무사히 나와야한다. 문제는, 게이머가 팀원을 배신해서 팀원의 돈다발까지 들고 도주할 수 있으며, 게이머는 팀원과의 배신-협동 사이의 관계를 자신의 스코어와 비교하면서 신중하게 결정내려야 한다. 이러한 배신-협동의 선택의 이익을 두고 그래프를 그린다면, 게이머는 현금을 강탈할 때까지 협동을 하고 이후에 현금을 들고 튀는 과정에서 배신을 때리는 것이 가장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는, 신뢰와 협동을 무너뜨리기 가장 좋은 지점이다. 협동과 배신, 신뢰와 뒷치기가 같은 라운드 내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캐인 앤 린치 2의 멀티는 새로운 명제를 제시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인 지점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똑같은 룰의 멀티 데모를 플래이했을 때 적지 않이 실망한 것은, 게이머들이 이러한 룰을 숙지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배신은 게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며, 이 게임만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어떤 게이머도 게임 도중에 배신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서, 게임은 단순한 '코옵 멀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와같이 모든 플래이어가 '룰'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멀티플래이 게임이 만들어진 의도대로 플래이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으며 이 핵심적인 룰의 지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멀티플래이 게임들은 최대한 단순한 형태를 취하려 한다. 가령, 콜옵 시리즈의 팀 데스매치나 배틀필드 시리즈의 컨퀘스트 같은 게임의 경우에는 개별 플래이어들이 커스터마이징을 통해 취할수 있는 전략, 또는 킬스트릭을 통해서 전장의 흐름을 바꾸는 등의 행위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 게임의 규칙이란 '상대팀 보다 우리팀이 킬 포인트를 더 많이 먹는다'나 '맵 상의 고지를 점령하여 적을 압박하고 승리한다' 등의 단순명쾌한 명제이며 게임 플래이는 게이머 개개인의 별 생각을 하지 않고 쏘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케인 앤 린치 2의 멀티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게임의 규칙, 즉 어떻게 하면 가장 점수를 많이 낼 수 있는가라는 협동-배신의 포인트에 있어서 게임은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고, 배신에 있어서 게이머가 얻는 이익을 크게 설정하지 않음으로서 게임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틀을 벗어나 성공한 케이스들도 꽤 존재한다:어크 멀티의 경우, 기본적으로 게임은 숨바꼭질의 룰에 기초하고 있으며 게임은 게이머의 운동신경과 순간 판단능력을 매번 체크하는 것이 아닌 느린 패이스의 '심리전'의 양상(물론 추격과 순간적인 판단능력도 필요하기도 하지만)을 띈다. 게이머는 주위의 정보들, 속삭이는 소리와 패드의 진동, 그리고 군중 속에서 누가 튀는 행동을 하는지 등을 판단하고 특수능력을 사용해서 자신을 노리는 상대방의 암살을 커트할 것인가, 아니면 도망가서 후일을 기약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게임은 여타 멀티플래이 게임들보다 더 많은 정보량을 짧은 시간에 처리해야한다. 또한 게임은 각각의 게임 모드에 따라서, 판이하게 게임 전개와 게이머의 플래이가 달라지게 된다:가령 지명수배의 경우, 자신을 뒤쫒는 암살자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화려한 행동들(뛰어다니는 등)을 할 여유가 존재하지만, 암살의 경우에는 암살 타겟을 설정하는 것이 게이머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노출 시키는 것은 곧바로 자신을 다른 게이머에게 암살 타겟으로 드러내는 형국이 되기에 절대로 뛰어선 안된다. 인간사냥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팀전이기에 협동해서 은신하는 눈치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렇기에 어크의 멀티플래이는 복잡하다는 느낌을 쉽게 받는다.


그렇기에 어크 멀티플래이는 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당혹스러운 멀티플래이며, 쉽게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 멀티플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크 멀티플래이는 멀티플래이에 있어서 하나의 '가능성'을 부여하였다:그것은 단순한 룰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뛰어다니며 총을 쏘고 적을 박멸하는 자극적인 멀티플래이 이외에도, 다른 형태의 멀티플래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어크의 멀티플래이는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게이머는 살아남기 위해서 NPC인척 연기를 해야하며, 주위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생각하며 동시에 암살자를 끌어들여서 제압하고 도망치는 등의 전략전술적인 측면에서 많은 선택지를 갖고 있다. 어크의 멀티플래이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연극무대'라고 볼 수 있으며, 매번 매번의 암살은 다양한 맥락이 맞물려 들어가는 상황 그 자체가 되고 그렇기에 각각의 암살 성공은 단순한 사격 연습 이상으로 게이머에게 도전의식과 성취감을 부여한다. 


이런 식으로 콜옵이나 배필식의 멀티에서 벗어나는 것, 새로운 멀티의 가능성을 보는 것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콜옵이나 배필식의 멀티가 우리에게 주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쾌감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규칙의 단순함과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갖는 이점은 현재 대부분의 멀티플래이들이 콜옵과 배필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과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게이머들이 쉽게 매료될 수 있는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하였을 때, 이번 E3에서 공개된 래인보우 식스:시즈는 어떤 의미에서는 또다른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 게임은 과거 레인보우 식스 시리즈의 멀티플래이의 전략성(하트비트 센서를 이용한 상대방 감지와 원샷 원킬의 긴장감. 적들이 맵에 표시되지 않는 점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끌어들이려 하면서(라운드 준비시간 동안의 정찰, 진입루트의 모색, 부비트랩, 바리케이드 설치등의 요소 등), 동시에 빠른 게임 플래이(한 라운드에 5분 내외)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서 새롭고 깊이있는 멀티플래이를 확립하면서 게이머를 끌어들이고자 노력한다.


게임의 디자인적인 측면에서보다 본인이 더 관심이 생기는 지점은, 시즈의 게임 플래이 영상에 게임을 플래이하는 게이머들의 '목소리'까지 게임 트레일러의 내부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과거의 멀티플래이 게임들은 게이머들이 소통하는 지점이 거의 전무하거나 상당히 간편한 기제(커모로즈 같은)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을 숙지하여야 한다. 대화는 약어로 진행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게임은 대화없이도 진행이 가능했다. 이후, 기술의 발전으로 헤드셋이나 음성체팅이 게임 내부로 자연스럽게 들어왔으며, 음성챗은 멀티플래이 게임의 일부로 자리매김하였으나, 게임은 여전히 단순한 룰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게이머간의 의사소통은 '필수적'이지 않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래인보우 식스:시즈의 트레일러는 보여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연출된 것이라 해도, 게이머들이 적극적으로 보이스쳇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빠르게 계획을 세우고 능동적으로 게임을 풀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타 FPS 게임에서는 다른 플래이어가 좀 더 잘하는 봇 이상 이하도 아니었고 팀워크의 개념도 희미했었다면, 시즈의 경우에는 그것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 강제되어야 하며 게이머들이 서로 의견을 교류하며 전략을 세우고 움직이며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며 깊이있고 복잡한 의사소통으로 멀티플래이의 새로운 가능성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양날의 검이다:게이머들은 여태까지 그러한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수많은 국가의 게이머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쓴다면, 이러한 언어적 장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점에서 다크소울 시리즈가 정말로 무식하고 단순하면서 천재적인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보이스 챗을 '삭제'하고 그 자리에 제스처로 의사소통하는 수단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즈는 그런 요소로 커버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전략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앞으로 제작자들이 진지하게 고려해야할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시즈는 2015년에 발매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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